“조용히 계시지?”상혁이 웃었다.“최윤형 따위가 뭐라고. 아직도 왜 갑자기 최윤형이 태도를 바꿨는지 잘 모르시나 보네.”강여경은 얼떨떨해서 최하준을 쳐다봤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도 성이 최 씨라는 것을 깨달았다.“아냐! 난 그 집안에 최하준이라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는데?”“그 댁에 식구가 몇인데 당신이 다 알아?”상혁이 비웃었다.“잘 들으세요. 우리 변호사님이 스무 살 때부터 그 가문을 짊어지고 키워온 분이십니다.”강여경의 머리가 웅웅 울렸다. 꿈을 꾸는 게 아닌가 싶었다. FTT가에 미스터리 한 존재가 있었다. 최란의 아들로 외부에 거의 모습을 드러낸 적이 별로 없지만 사람 대하는 수단이 아주 악랄한 인간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스무 살에 회사에 들어가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자신을 반대하는 삼촌의 다리를 부러뜨렸다는 유명한 일화도 있었다.최하준이 회사를 장악하고 나서부터 번개 같은 속도로 글로벌 시장에서 사세를 확장시켰고, 국내에서는 통신, 금융, 과학 기술 분야를 다 장악하게 되었다.최하준은 세계적인 거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국내 최고 재벌이자 가장 미스터리한 인물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거짓말!”강여경은 질투가 폭발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강여름이 대체 어쩌다가 이런 남자를 낚은 거야?’“내가 뭐 한다고 당신을 속입니까? 하여간 최윤형 같은 물건은 우리 변호사님을 보면 꽁무니부터 뺀다고.”상혁이 조롱하듯 웃었다. “원래 우리 변호사님이 직접 나서지는 않으시려고 했는데, 호텔에 가둬두고 강여름 씨에게 그런 짓까지 하다니.... 언론에 뿌린 사진은 또 그게 뭡니까?”강여경이 움찔했다. 바들바들 떨면서 무릎으로 기어서 하준에게 갔다.“저기, 제가 너무 어리석었습니다. 제발 한 번만 봐주세요.”차디찬 증오가 하준의 눈에서 빛났다. 도저히 살려둘 수 없다는 듯한 증오의 시선이 떨어졌다.“내가 이대로 놓아줄 것 같나?”“아니에요. 제가 아닙니다. 사진은 제가 찍은 게 아니라고요.”강여경이
상혁이 더러운 것을 피하듯 뒤로 흠칫 물러났다.“어허, 손대지 마십쇼. 이 분이 나이 들어 보여도 40줄 밖에 안 됐습니다. 내내 싱글이라 짝을 찾으신다기에 특별히 소개해 드릴까 싶었지.”그러더니 상혁도 가버렸다. 강여경이 절망에 울부짖었지만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그제서야 강여경은 애초에 왜 강여름을 그렇게 괴롭히고 할머니를 2층에서 밀었던가 하는 후회가 몰려왔다.그러나 이 세상은 후회해서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경찰서 입구.막 진술을 마치고 나오는데 누군가가 뒤에서 이름을 불렀다.“여름 씨!”돌아보니 양유진이 활짝 웃으며 걸어왔다. 추운 날씨에 목에 두른 고급스러운 체크무늬 목도리가 신사적인 풍격을 더해주었다.“어머, 여기서 뭐 하세요?”여름이 억지로 웃음을 짜내며 인사를 건넸다. 그를 보니 문제의 사진이며 하준과 있었던 즐겁지 않은 일들이 떠올랐다.“친척이 뭘 좀 잘못했나 본데 와서 해결 좀 해주느라고요.”양유진이 어쩔 수 없다는 얼굴을 해 보였다.“강태환과 이정희가 다 잡혀갔다던데….”“네. 그래서 진술서 작성했어요. 다음주에 사건이 넘어갈 테니 곧 판결 나겠죠.”“축하합니다. 마침내 할머니의 원수를 갚았군요.”양유진이 기뻐했다.“감사합니다.”그렇게 말했지만 눈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그저 무척 피곤해 보였다.양유진이 함께 주차장 쪽으로 걸어갔다. 가면서 가만히 여름을 보더니 물었다.“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혹시 최 변이 뭐 오해하거나 그래서 잠도 못 자고 그러는 거 아닙니까?” “그 일은 언급하지 말아주시겠어요?”여름이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다 제 잘못입니다.”양유진이 미안한 얼굴을 했다.“무슨 말씀이세요? 그날 절 도와주신 것뿐인 걸요. 대표님 아니었으면 저는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 지도 모르죠. 어제 일부러 절 옹호하는 입장문도 발표해 주셨고. 감사 드려야 마땅하죠.”여름이 고개를 저으며 사실대로 말했다.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걸어가느라 두 사람은 옆에 젊은 남자를
곧 구급차도 와 양유진을 병원으로 이송했지만 이미 출혈이 심해 완전히 혼수상태였다.여름은 얼른 한선우에게 연락했다. 병원에 도착해 얼마 안 되어 한선우가 금방 달려왔다.응급실 문이 열리고 의사가 차트를 들고나왔다.“칼이 환자의 왼쪽 신장을 뚫고 들어갔습니다. 바로 제거해야만 살릴 수 있습니다. 환자분 보호자가 어느 분이시죠? 바로 수술동의서에 사인 바랍니다.”여름은 머리가 멍해졌다. 한선우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선생님, 반드시 제거해야만 합니까?”“이미 괴사해서 제 기능을 못 합니다.”의사가 난처해하며 말했다.“제거하지 않아도 된다면 그게 베스트였겠지만요.”어쩔 수 없이 한선우가 동의서에 사인했다.여름은 너무나 괴로워 눈물을 흘렸다.“다 나 때문이야. 원래 날 죽이려던 건데, 양 대표님이 몸으로 칼을 막아줬어.”한선우는 마음이 복잡했다. 양유진이 여름에게 이 정도로 마음이 깊었는지 미처 몰랐다.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그저 삼촌의 안위가 걱정일 따름이었다.“쓸데없는 생각 마. 신장만 제거하면 생명엔 지장 없다잖아. 한쪽만 있어도 기능은 할 수 있어. 앞으로 조심해야겠지만.”여름은 씁쓸하게 웃었다. 멀쩡한 장기를 잃는데 몸이 전처럼 온전할 수는 없을 터였다.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께 연락 드렸어?”“아니, 노인네들 충격받으실까 봐. 외삼촌 수술 끝나고 말씀드려야지.”한선우는 여름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쉬고 있었다. 사실은 진상을 알게 되면 두 분이 여름을 과하게 탓할까 두려웠다.세 시간 뒤, 다행히 수술은 잘 끝났고 양유진도 고비를 넘겼다. 하지만 아직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다.얼마 뒤, 경찰이 왔다.“강여름 씨, 가해자를 조사했는데 이름이 ‘윤정후’라고 합니다. 동성 사람은 아니에요.”여름은 극도로 분노했다.“전혀 모르는 사람이에요.”경찰이 고개를 끄덕였다.“그자 말로는 원래 ‘윤정혜’라는 쌍둥이 누이가 있었는데 5년 전, 겨우 열일곱 살 때, 흠…. ‘백운’의 백윤택 사장 눈에 들었던 모양입니다. 윤정혜는 완강히 거
“잊으셨습니까? 그 사진 보고 경호 중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하지 말란다고 경호를 그만둬? 이 상황에 제정신이야?”하준은 폭발할 지경이었다.상혁은 침묵했다. ‘차윤은 최하준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사람이잖습니까?’“병원으로 가.”하준이 나섰다.병원에 도착해 바로 VIP 실로 들어섰다.아직 혼수상태인 양유진은 코에 산소호흡기를 달고 있었고 여름이 그 옆에서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아주고 있었다.더할나위 없이 눈꼴신 장면이었다. 언젠가 자신을 이렇게 간호해 줬었는데 지금은 다른 남자를 돌보고 있었다.“갑시다.”음절마다 꾹꾹 힘주어 하준이 말했다.“따라와요.”여름이 하던 걸 멈추고는 고개를 저었다.“이 사람 깨어나기 전에는 못 가요.”“내가 무슨 말 하는지 못 알아듣습니까?”울화가 치밀어 올랐다“마지막 기회입니다.”그 어느 때보다 서늘한 말투였다.하준의 말투에 여름의 마음은 더 싸늘하게 식었다. 불과 몇 시간 전 하준 때문에 칼을 맞을 뻔했던지라 마음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다.‘저 인간이 과연 나에게 관심이 있기는 한 걸까?’“사람이 도리라는 게 있지, 양 대표님 아니었으면 난 벌써 죽은 목숨이에요. 당신 여자 친구를 살려준 사람에게 감사는 고사하고 이게 무슨 태도인가요?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냉정해요?”“냉정해?”하준이 뚜벅뚜벅 여름을 향해 걸어왔다. 그간 여름을 위해 온갖 일을 감당하고 보호하고 아껴주었는데, 냉정하다는 소리나 듣다니!그 말이 비수처럼 가슴에 박혀 너무나 쓰라렸다.“윤정후가 왜 날 해치려 했는지 잘 아시죠?”여름이 차갑게 웃었다.“천하의 최하준이 뭐가 부족해서 그깟 푼돈 벌겠다고 양심을 팔았나요? 명성 때문이에요? 다른 사람의 죽음으로 얻은 그 명성요?”
하준이 주먹을 꽉 쥐었다. 손등의 시퍼런 핏줄이 터질 듯했다.“강여름 씨, 잘 들어요, 나는 변호사입니다. 변호사에게는 승패만 있어요. 정의의 사도는 아니란 말입니다.” “하지만 인간이라면 양심은 있어야죠.”여름이 고개를 저었다. 갑자기 하준과 자신은 완전히 다른 세계의 사람이란 걸 깨달았다.“지금까지 내가 강여름 씨를 위해 한 일은 다 뭡니까? 나한테 그런 말을 하다니!”하준은 주체할 수 없는 화를 삭이며 여름을 노려봤다. 이제껏 여자에게 이렇게 잘 해줘 본 적이 없던 그였다. 그런데 여름이 말 한마디로 그 모든 것을 부정해 버렸다.“양유진이 당신 목숨을 구해줬다고 그 사람하고 사귀기로 결심이라도 한 겁니까? 하긴, 처음부터 당신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던 놈이니까.”“말조심해요.”여름도 화가 났다.“나 때문에 신장 하나를 잃었어요. 그런데 병간호도 못해요? 이건 생명의 은인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과 감사 표시에요.”“난 모르겠고, 당장 따라와요. 양유진은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양유진은 뒤로 강여경에게 그런 사진을 보낼 수 있는 인간이다. 겉으로는 사람 좋은 척하지만, 뒤에서는 무슨 일을 꾸미는지 알 수 없는 위선자였다.“당신이야말로 내가 생각했던 그런 사람이 아니네요.”여름은 극도로 화가 치밀었다.이때 한선우가 옷을 들고 들어왔다.“여름아, 옷 좀 사 왔어. 얼른 갈아입…”말을 하다가 최하준을 발견하고 한선우의 얼굴이 굳었다.“누가 들여보낸 거야? 당장 나가.”하준이 한선우와 여름을 한 번씩 쳐다보고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어쩐지 이상하게 버틴다 했더니. 전 남친에 새 썸남까지? 삼촌과 조카에게 이중으로 둘려싸여서 아주 신이 났다, 이거군.”“날 겨우 그런 인간으로 봤군요.”여름의 눈가가 빨개졌다. 몸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말이 너무 심하잖아? 그게 사람이 할 소리야”더 이상 참지 못한 한선우가 옷을 한쪽으로 던지고 주먹을 날렸다.하준은 가볍게 손을 들어 막았다. 한선우가 분해서 소리쳤다.
요 며칠, 쌀쌀맞게 대하기는 했지만, 강여경이 놓은 덫이었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여름과 헤어질 생각은 해본 적 없다. 다만 그 껄끄러운 감정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정말 날 사랑한다면 다시는 양유진에게 가지 말아요. 마지막으로 하는 말입니다.”하준이 더 할 말이 있는 듯한 눈으로 여름을 쳐다보며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여름은 흠칫했다. 오늘 그가 너무 밉고 화가 났지만, 여전히 하준은 사랑하고 있었다.“그러는 당신은요? 날 사랑하나요?”‘사랑한다면, 취했을 때 다른 여자 이름을 부른 건 다 뭐야?’“난 당신을 사랑할 수도, 언제든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하준은 무표정하게 대답한 후 돌아서 나갔다.여름은 망연자실한 채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언제든 거둘 수 있는 사랑이라니, 그렇게까지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야?’******서재.하준은 와인잔을 들고 창 앞에 서서 마당에 쌓인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여름이 더 이상 자신을 실망시키지 않기를 바랐다.그렇다. 여름을 사랑하지만, 양유진과 이렇게 계속 얽힌다면 이 사랑은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양유진이 여름의 목숨을 구한 것은 사업상으로 좀 지원해주면 될 일이었다. 사랑하는 여자가 보답이랍시고 다른 남자 곁에 있는 꼴은 볼 수 없었다.하준은 짜증스럽게 와인을 꿀꺽 삼켜버렸다.뒤에서 조용히 서 있던 상혁이 말했다.“그 사진 건은 강여름 씨에게 말씀하지 그러십니까?”“뭐 하러? 강여름이 믿겠어? 내가 생명의 은인에게서 자기를 떼어내려는 수작인 줄 알겠지.”하준이 차갑게 웃었다.상혁은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양유진 정말 대단한 사람이군.’ 신장까지 희생했으니 자신이 여름이어도 마음이 움직였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깊은 밤.샤워를 마치고 나온 여름은 침대에 멍하니 한참을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휴대 전화를 집어 윤서에게 톡을 보냈다. 자신 대신 양유진 간호를 부탁할 생각이었다.윤서: 어머! 너 지키려다 콩팥까지 떼냈어? 넌 어때? 그냥
여름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전에는 전화를 검사하거나 하지는 않았었는데 이제 마지막 남은 프라이버시까지 침해하려 하고 있었다.“선 넘지 말아요.”“무슨 선을 넘었다는 겁니까? 당신이 다른 놈하고 시시덕거리고 있을지 누가 압니까?”하준은 상대의 핸드폰을 검사하거나 하는 걸 옳지 않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입꼬리가 귀에 닿을 정도로 웃고 있는 여름을 보니 어쩐지 심사가 뒤틀려 확인하고 싶어졌다.여름은 두 사람 사이의 믿음이 이렇게까지 깨질 줄은 몰랐다. 하지만 방금 톡 내용을 보여주면 또 오해할 것 같아 솔직히 얘기했다.“윤서랑 얘기 중이었어요. 걔 남자친구 일로요. 그리고… 윤서더러 나 대신 양 대표 문병 좀 가 달라고 했어요, 나는 못 가니까. 친구가 가는 것도… 안 될까요?” 여름은 눈을 똑바로 뜨고 하준을 바라보았다. 육안으로도 확연히 보일 정도로 그의 얼굴이 차갑게 변하는 걸 보고 마음속에 피로감이 몰려왔다.“내 침대에 누워서도 지금 다른 남자 걱정입니까?”하준은 여름의 핸드폰을 집어 벽에 던져 버렸다.핸드폰 깨지는 소리에 놀란 여름은 귀를 막았다.하준은 여름의 손을 잡아챘다. 여름을 침대에 꽉 눌러두고 거칠게 키스하기 시작했다.“어때? 누구랑 키스하는 쪽이 더 좋아? 나야, 양유진이야?” 하준의 입술은 폭풍우가 몰아치듯 여름을 덮쳤다. 너무 아파 힘껏 밀어내려고 했지만, 상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서재에서 와인까지 비우고 온 하준은 욕망에 불타올랐다. 여름과 양유진의 키스 장면을 생각하자 더 그녀를 자신이 가지고 싶었다. 점점 더 거칠게 키스를 퍼부었다.“그만! 아파요.”여름이 너무 아파 몸을 피했다.“왜 피하지? 양유진이 아니라서?” 하준은 이미 질투에 이성을 잃었다. 하준은 힘껏 여름의 잠옷을 찢었다.“그날 잊을 수 없는 밤을 만들어 준 모양이지? 그래서 오늘 다시 만나니 헤어지기 싫었나?”여름은 너무 놀랐다. 그의 손을 꽉 잡고 고개를 흔들었다.“이러지 마. 나 오늘 너무 무서웠다고요. 지금은….”“나랑은
“여기 있어요.”임옥희가 자신이 만든 아침 식사를 들고 왔다.하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강여름 씨, 내 아침을 안 했습니까?”“내가 만든 밥 안 먹겠다고 했잖아요.”여름은 담담하게 응대했다. 하준은 늘 그랬다. 의심할 때면 여름이 만든 아침밥에 화풀이해놓고, 또 내놓으라는 식이었다. ‘피곤하지도 않나?’“당장 하십시오.”하준의 얼굴이 완전히 어두워졌다.“안 해요. 내가 하인도 아니고.”여름은 죽을 다 비우고 일어났다.“회사 갔다 올게요.”하준은 고개를 돌려 현관 입구에 서 있던 차윤에게 말했다.“잘 지켜봐. 병원에 가려고 하거든 바로 데려와.”“내가 당신 노예에요?”여름은 너무 화가 났다. 병원에 가지 않겠다고 했는데도 이런 식으로 자신을 억압하려 하다니.“최하준 씨, 적당히 하죠.”“날 건드렸을 때는 이 정도는 각오했어야지. 반항은 받아주지 않겠습니다.”담담한 말투였지만 사람 환장할 소리였다.여름은 핸드백을 챙겨 나갔다. 차윤이 따라나섰다.출근길, 여름이 아무리 속도를 내도 차윤은 쉽게 따라붙고는 했다.주차장에 도착해 여름이 내리자 차윤도 얼른 뒤에서 따라 내렸다.“따라오지 말아요. 병원 안 가요.”여름은 차윤 앞으로 가 솔직히 말했다. 이 경호원에게는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전 그분 명령에 따를 뿐입니다.”“최하준 씨가 고용한 거죠? 얼마 받나요? 내가 두 배 줄게요.”여름이 가방에서 카드를 꺼냈다.차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얼마를 주셔도 소용없습니다. 저는 그 댁에서 특별히 훈련받았습니다. 고용주를 위해서만 일합니다.”여름은 흠칫했다. ‘FTT에 차윤 같은 사람이 더 있다는 건가?’FTT는 상상 이상으로 미스테리했다.“하준 씨하고는 알고 지낸 지 오래됐죠? 혹시 ‘지안’이라고 알아요?”늘 차분하던 차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찰라였지만 여름은 분명히 봤다.“하준 씨가 그러던데, 전 여친이라고. 두 사람이 아주 깊은 사이었나 봐요?”“이미 지난 일입니다. 그분 마음속엔 이제 강여름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