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돌아온 여름은 목에 걸린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푼 다음, 손에서 놓기 싫다는 듯 탁상 등 아래에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정말 예쁘다, 흠잡을 데가 없네.”“액세서리 안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어느새 하준이 등 뒤로 다가와 놀렸다.“중고라더니.”여름의 얼굴이 빨개지더니 웅얼거렸다.“그… 그건 너무 비싸서 그런 거죠. 얼마 동안 벌어야 하는 돈이냐구요.”“한선우도 쓰는데 내가 그깟 돈 못 쓰겠습니까?”“가격은 상관없습니다. 당신만 좋다면.”눈을 깜빡거리며 듣던 여름은 순간 모든 게 이해됐다.‘한선우한테 지기 싫어 그런 거야?’하지만 상관없었다. 한선우를 신경 쓴다는 건 자신을 신경 쓴다는 뜻이니까.“한선우는 이제 나랑은 털끝만큼도 관계없는 사람이에요. 이제 그 사람을 좋아하지도 않고. 내가 사랑하는 건 당신이에요.”여름은 몸을 돌려 하준의 목에 팔을 감고 얼굴에 입을 맞췄다.하준의 심장이 뛰었다. 예전에는 비록 돈을 많이 벌긴 했지만 그것은 그저 본능 같은 것이었다. 이제야 하준은 돈 버는 의미를 찾은 것 같았다.입술이 씰룩거리더니 의미심장한 눈으로 여름을 보았다.“이게 다입니까?”여름은 무슨 말인지 알아차린 듯, 고개를 푹 숙인 채 귀까지 빨개졌다.하준이 웃음을 터뜨리며 여름을 안아 올렸다.“날 보고 싶다더니?”“어머, 몰라….”여름은 놀라 얼굴이 온통 새빨개졌다. 말로만 대담하지 사실은 순진하기 그지없는 전형적인 쑥맥이었다.“그럼 거짓말이었습니까?”하준이 여름의 턱을 살살 어루만졌다. 중후한 목소리가 첼로처럼 사람의 마음을 흔들었다.여름은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점점 더 얼굴이 빨개지더니 얼른 하준을 밀어냈다.“저녁에 제대로 못 먹었다고 하지 않았어요? 내가 간장 떡볶이 해줄게요.”종종거리며 도망가는 뒷모습을 보며 하준은 하는 수 없다는 듯 웃었다.하준이 씻고 나오자 여름은 간장떡볶이를 만들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아주 오랫동안 여름이 해준 야참을 먹지 못했던 하준은 얼른 받아들고는 맛을 음미하며
방금 머리를 말렸음에도 헝클어진 머리는 하준의 조각 같은 얼굴을 더욱 돋보이게 했고, 온몸에서 야성미가 넘쳤다.여름은 얼굴을 들어 넋이 나간 듯 하준을 뚫어지게 보았다.지금, 이 순간 윤서에게 진심으로 감사하고 싶었다.윤서의 어리바리한 착각으로 이 남자가 자신에게 왔으니 말이다.하준은 매번 자신을 도와주었다.오늘에 이르기까지 자신에게 용기를 준 것도 이 사람이다.오늘 밤, 하준은 자신에게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선물하며 동성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주었다.여름도 그저 보통 사람일 뿐이다. 허영심도 있고 이런 일에 쉽게 감동한다.“쭌….”여름은 용기를 내어 그의 목을 안았다.아름답기 그지없는 얼굴에 수줍음이 어른거렸다. “우리 한 번… 해볼래요?”여름은 결심이 섰다. 가장 의미 있을지 모를 순간을 이 남자와 함께하고 싶었다. 하준은 멍해졌다.최근 여름은 이런 스킨십을 늘 거부해 왔고 그래서 자신도 더 진도를 나가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왜 갑자기….‘설마 내가 누군지 알게 되어서?’“왜지?”깊고 그윽한 눈동자가 여름을 빤히 보았다. 여름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려는 듯이.부끄럽다는 생각에 휩싸인 여름은 별다른 점을 눈치채지 못하고 그저 하준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당신이 좋으니까요, 지금 이 순간, 그 어느 때보다 내 마음에 확신이 생겼어요.”하준의 그윽한 눈빛이 여름의 부드러운 머리칼에 닿았다.하준은 그 대답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그의 주위에는 그의 신분을 알고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여자가 너무나도 많았다.“왜요… 싫어요?”여름은 하준이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자 난감했다.‘하긴 전에도 내가 먼저 나섰다가 호되게 모욕만 당했었지.’“오해하지 말아요. 유혹하는 것도 아니고, 강요하는 것도 아니에요. 당신이 원하지 않는다면 나도….”여름은 하준을 밀어내고 일어나려 했지만 하준의 몸은 꿈쩍하지 않았다.“그렇게까지 말하니 이젠 나도 어쩔 수 없네.”여름은 너무나 당황스러웠다.“어쩔 수 없이 할 필
여름이 생각해도 심장이 벌렁거렸다.“다신 안 그래요.”여름은 살레살레 고개를 저었다.하준이 웃으며 말했다.“이렇게 부끄럼을 많이 타서 아기는 언제 낳아 주겠어, 응?여름의 얼굴이 부끄러움에 완전히 빨개졌다.작은 얼굴을 하준의 가슴에 파묻고는 부끄러움에 한참 동안 아무 말 하지 않았다.“어차피 언젠가는 완전히 내 사람이 될 건데, 뭐.”여름을 꼭 안은 하준의 목소리는 매우 단호했다.여름은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다 달달해지는 기분이었다. 너무나 행복했다.******두 사람이 자는 동안, 오늘 밤 자선활동 행사에서 일어났던 일은 온 동성에 소문이 퍼졌다.이 시각 강 회장 집. 강태환은 또 사업파트너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고 있었다.“강 회장님, 따님 행동거지를 못 봐서 그러시는데요.”강태환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꺼지시오, 다시는 나한테 연락하지 말고.”강태환은 핸드폰을 바로 던져버렸다.수십 년을 살아오면서 반평생 영광스럽게 살아왔는데 오늘처럼 망신스러운 적이 없었다. 다 잡은 물고기였던 화신도 놓치고, 갈수록 첩첩산중에 마지막 남은 체면마저 다 깎이고 남은 게 없었다.너무 화가 나 이성을 잃은 강태환은 빗자루를 들고 위층으로 가 강여경을 향해 마구 휘둘렀다.“이 쓸모없는 것, 다 너 때문이다. 네가 돌아오고 나서 TH도 내 명예도 다 사라졌어. 내가 이 나이에 사람들한테 모욕이나 당해야겠냐!”“아악! 이게 다 우리 집안을 위한 거였잖아요. 아빠도 최윤형에게 잘 보이라고 하셨구요.”“내가 가서 잘 보이라고 했지, 방에 뛰어 들랬어?”강태환은 갖은 욕설을 퍼부었다. “당신 미쳤어요? 얘는 우리 딸이라고요!” 이정희가 달려와 강여경을 떼어냈다. 상처 난 강여경을 보자 가슴이 아파 대성통곡하기 시작했다.“이따위 자식 없는 게 나아”강태환이 강여경을 손가락질했다.“알았으면 애초에 널 데려오지도 않았을 거다. 네가 아니었으면 여름이가 이렇게 우리를 걸고 넘어지겠니? 너희들이 종용하지 않았으면 내가 어머니를 죽음으로 몰았겠어?
차디찬 바람이 창문 틈으로 들어오자 강태환은 으스스한 기분을 느꼈다. 처음으로 후회가 밀려왔다.안정된 가정이었는데 3개월 만에 풍비박산이 나버렸다.다음 날, 강태환은 전화를 한 통 받았다. 이미 화신 이사회에서 제명되었다는 통보였다.화가 나 회사로 찾아갔지만, 입구에 있던 경비가 들여보내 주기는커녕 내쫓았다.갈 곳 없는 강태환은 매일 술집에서 술에 진탕 취해 한밤중에야 집으로 돌아갔다.그날 밤, 그는 잔뜩 취해 집 현관문을 열었다. 불은 모두 꺼져 있었고 싸늘한 달빛이 거실 통창으로 스며들고 있었다.거실엔 못 보던 휠체어가 있었다. 휠체어에 등이 굽은 검은 노인의 그림자가 산발한 채로 앉아 있었다. 오싹했다.그는 다리에 힘이 풀려 바로 돌아 도망치고 싶었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뒤쪽에 있던 문이 ‘쾅’하고 닫히고 거실은 더욱 음산해졌다.“어머니….”강태환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얘, 왜 나를 그렇게 무서워하니?”휠체어가 천천히 미끄러져 다가오고, 노인의 쉰 목소리도 함께 다가왔다.강태환은 겁에 질려 뒤쪽으로 기어갔다.“어머니, 오지 말아요, 부탁이에요, 내가 그런 게 아니에요. 잘못 찾아오셨어요.”“왜 네가 아니라는 거냐?”노인의 음산한 웃음소리가 거실을 휘감았다.“지분 때문에? 돈 때문에? 왜 그랬니? 이제까지 내가 네게 해준 게 부족했니? 염라대왕님도 날 받아주지 않아 너한테 돌아왔다, 아들아….”휠체어가 점점 다가오자 강태환은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눈물이 줄줄 흘렀다.“어머니,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어요, 제가 뭔가에 홀렸었나 봐요. 하지만 제가 그런 게 아니에요. 정희, 이정희가 베개로 질식시킨 거예요. 그 여자한테 가세요.”“네가 동의하지 않았다면 걔가 그럴 수 있었겠니?”노인은 차갑게 웃으며 울었다.“어머니, 죄송해요.”강태환은 울부짖었다. “그 두 여자가 절 꼬드긴 거예요. 전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어머니, 잘못했어요, 봐주세요.”“잘못을 알았으니 이제 널 데려가야겠다
강태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제 더 이상은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그러나 지금 자백하지 않으면 나중에 이정희가 책임을 자신에게 미룰 테고 정말 감옥에 갇힐 수도 있다.“좋아. 할머니께서 주무실 때, 이정희가 질식시켰다.”마지막 양심의 발로였는지 강태환은 결국 바닥에 엎드려 큰 소리로 울었다.여름과 현주도 울음이 터져 나왔다. 할머니의 마지막이 그렇게 처참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현주가 물었다.“마지막으로 여쭈어볼게요. 어르신이 2층에서 굴러서 반신불수 된 것도 강여경 짓인가요?” “그건 정말 나도 몰라.”강태환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간 강여경이 해온 짓을 생각해 보건데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러나 어쨌든 그것도 딸인지라 차마 감옥에 보낼 소리를 할 수는 없었을 뿐이었다.결국 강태환은 경찰에 끌려가 조사받게 되었다.여름이 시커먼 별장을 돌아보았다.한때는 자기 집이었는데 이제 다시는 발도 딛고 싶지 않은 곳이 되어버렸다.열쇠를 잔디밭에 던져버리고 걸어 나갔다.입구에는 호화로운 세단이 한 대 세워져 있었다.하준이 늘씬한 몸을 차에 기대고 서 있었다. 눈이 그의 머리와 어깨에 쌓였다. 여름을 바라보았다. 그윽한 눈동자는 마치 어두운 밤하늘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별 같았다.집을 잃은 여름이 돌아갈 곳을 찾았다는 듯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하준이 코트를 벌려 그녀를 품에 안아 들였다.“쭌, 나 마침내 복수했어요.”여름이 그의 품에서 울먹였다.“하지만 기쁘진 않네요. 할머니 곁에 좀 더 같이 있을 걸 그랬어요. 그랬으면 그렇게 돌아가시진 않았을 텐데.”눈물이 그의 셔츠 앞자락을 적셨다.하준은 누군가를 잘 위로할 줄 몰랐다. 그저 여름이 실컷 울 때까지 기다리며 머리를 쓰다듬을 뿐이었다.“정말 잘했습니다. 증거도 하나 없으면서 잘도 전부 얻어냈군요.”“도박을 한 거예요. 강태환의 마음속에 남아 있을 할머니에 대한 일말의 양심에 걸고, 그 여자에 대한 강태환의 이기심에 걸고….”목이 잠긴 여름이 천천히 말했다.“절대
이정희가 울부짖었다.“아니, 이 짐승 같은 놈이! 내가 네 할머니를 죽였다고 말했단다. 여경아, 넌 부디 몸 조심하고 있거라.”이정희는 곧 끌려나갔다. 여경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시골에서 20여 년을 고생하며 살다가 이제 겨우 집에 왔는데 1년도 안 돼서 집구석이 이 지경이 되다니.강태환과 이정희에게 일이 생기면 이제 재벌 2세 놀음도 끝장이다.‘아니, 아니지! 다시 그 거지 같은 삶으로 돌아갈 순 없어!’급히 진현일에게 전화를 걸었다.“현일 오빠, 나 좀 도와줘요. 우리 엄마 아빠가 경찰에 잡혀갔어. 이번 일만 도와주면 내가 결혼해 줄 게요. 화신 주식도 반 양도할게.”“뭐라고? 너랑 같이 있는 사람은 다들 재수가 없어. 처음에는 한선우더니 이제는 네 엄마 아빠까지 감옥을 가는구나. 내 평판도 덩달아 땅바닥에 떨어졌다고! 이제 나한테서 떨어져. 너같이 더러운 것하고 엮이고 싶지 않으니까!”그러더니 진현일은 전화를 끊었다.강여경은 완전히 멍해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온 동성의 재벌가에서 자신에게 빌붙으려고 난리였는데 불과 며칠 만에 판세가 완전히 뒤집어졌다.‘이게 다 강여름 때문이야!다 망했어. 강여름 때문에 내가 이 지경이 된 거야.죽어버렸으면 좋겠어!’강여경의 눈 속에 광기가 가득했다.이 때 핸드폰이 짧게 몇 번 울렸다. 열어보니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사진 몇 장이 들어와 있었다.사진을 열어보고 흠칫했으나 곧 악마적인 미소가 떠올랐다.원래는 보디가드에게 손 봐주려고 할 셈이었지만 양유진이 들이 닥치는 바람에 그 때 룸에 설치했던 카메라를 회수하지도 못 했는데 그때의 사진이 손에 들어오다니….이 사진만 있으면 강여름은 이제 최하준과 끝이다.화신 대표로서의 강여름의 명예에도 타격이 있을 것이 분명했다.서둘러 기자들에게 전화를 돌렸다.*****오전 9시.어젯밤 밤새 눈이 내려 창 밖은 온통 은빛이었다.여름이 침대에서 일어나 보니 혼자서 자고 있었다.드디어 강태환 일가와의 일이 해결되어 오랜만에 편안하고 상쾌한 기
한동안 하준이 화내는 걸 본 적이 없었던 지라 놀란 여름은 얼른 전화를 껐다. “그 사진 보고 그래요? 오해하지 말아요.”“오해? 오해는 무슨 오해?”하준이 핸드폰을 뺏어 들었다. 눈에는 실망과 혐오가 뒤섞여 있었다.“양유진을 안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눈이 있으면 이 사진을 보라고! 당신이 더 끌어안고 있는 거 안 보입니까? 어떻게 이렇게 뻔뻔한 여자가 다 있지?”하준이 핸드폰을 집어 던졌다. 아팠다. 너무나 심장이 꽉 조여왔다.하긴 이런 사진을 보고도 냉정을 유지할 수 있는 남자가 얼마나 되겠는가?“아니, 나도 당한 거예요! 그날 강여경한테 잡혔는데 양 대표가 구해준 거예요. 정말 그 사람하고는 아무 일 없었어요!”여름은 고개를 저으며 울먹였다.“난 머리를 식히려고 욕조에 들어가서 밤새 있었어요.”“내가 바보인 줄 압니까?”하준의 목에서 음산한 웃음소리가 울렸다.“그런 상황에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고?”“난 사실대로 말하는 거예요.”여름은 억울해서 열심히 해명했다.“정말 맹세할 수 있어요.”“그만! 강여름 씨, 난 당신을 정말 이해할 수 없습니다!”하준이 그녀의 턱을 와락 잡았다.“내 앞에서는 순수하고 순진한 척하더니 날 이런 식으로 가지고 놀아?”“이 사진이 언제 찍혔는지 대충 알겠군요. 전에 내가 출장 갔을 때 당신이 밤새 돌아오지 않은 날이 있었지.”“아니에요! 정말 그 사람하고는 아무 일도 없었어요. 양 대표를 좋아하지도 않아요.”여름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내 말이 맞나 보군.”하준은 그녀의 말을 아예 듣지도 않았다. 눈에 한껏 비웃음을 담아 싸늘하게 뱉었다.“그날 전화를 걸었을 때 목소리가 좀 이상하다 싶었습니다. 쇼핑한다더니 양유진과 함께 있었군요.”말을 하다 보니 점점 더 화가 났다. 마음에 난 상처에 누가 소금이라도 뿌린 것 마냥 심장이 너무 따끔거렸다. 숨도 못 쉴 지경이었다.하준의 의심과 질책 앞에서 여름의 마음은 점점 더 무거워졌다.둘 사이에 믿음은 모두 사라졌다. 여름은 이
양유진의 다급한 목소리를 듣자 마음에 남아있던 일말의 의심도 사라졌다. 양유진을 의심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이렇게나 신사적인 사람이 그런 사진을 찍었을 리가 없지 않겠는가.“지금 엄청나게 화가 났어요. 양 대표님 전화 받으면 더 화낼 것 같아요.”여름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 카메라는 다 찾아서 처리했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런데 어떻게….”“제가 카메라는 다 처리했었죠. 다시 한 번 싹 뒤져보기까지 했습니다.”양유진이 괴로운 듯 말했다.“그때 화면이 그대로 강여경에게 실시간 전송되고 있었던 게 아닐까요? 제가 너무 안일했습니다. 알아보니 온라인에 퍼진 사진은 강여경이 기자들에게 직접 뿌린 거라고 하더군요.”여름은 쓰디쓰게 웃었다.‘내가 강여경을 너무 얕잡아 봤구나. 하필 온갖 상상을 다 하게 만들 수 있는 교묘한 프레임의 사진을 뿌렸어.’“미안합니다.”양유진이 무척 미안해 하며 다시 말했다.“나야 그렇다고 치고 여름 씨에게 너무나 파장이 크겠습니다. 혹시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최선을 다해서 돕겠습니다.”“고마워요. 회사에서도 전화 들어오네요. 일단 이거 받아야겠어요.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여름은 급히 양유진의 전화를 끊고 노선경의 전화를 받았다.“대표님, 회사로 한 번 나오셔야겠습니다. 대표님 관련한 소문이 돌아서 지금 기자들 상대하느라 회사 전화에 불이 나고 있어요. 이거 좀 급히 처리해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그래, 지금 바로 갈게요.”다른 생각은 할 것도 없이 급히 옷을 입고 내려갔다.나가면서 생각해보니 전처럼 차윤이 따라 붙지 않았다.마음이 무거워졌다. 하준이 고용했던 보디가드이니 자신과 관계를 끊을 생각으로 차윤도 해고했나 싶었다.회사에 도착하자 입구에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여름은 주차장을 통해 들어갔다.사무실로 올라가 보니 중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온라인에서 네티즌들이 이사장님이 너무… 개방적이라며…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홍보부 오 팀장이 이마에 땀을 흘렸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