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혀, 형님,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고 했습니다. 방금 화신 다녀왔거든요. 그쪽 일은 잘 해결했습니다, 이제 아무도 강 대표는 못 건드립니다.”“응, 알아. 잘했다.”하준은 꿈쩍 않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다.최윤형이 채 말을 꺼내기도 전에 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그런데 의심은 안 하던가?”순간 싸늘한 기운이 사방에서 밀려와 최윤형의 심장을 꽁꽁 얼게 만들었다.“거짓말할 생각은 마, 최윤형.”하준이 담담하게 경고했다.“열여덞 살 때 날 속였다가 어떻게 됐었는지 기억하겠지?”최윤형이 몸을 덜덜 떨었다. 그 해는 그의 인생 최대의 암흑기였다.“그게, 의심하시더라고요.”두려움에 휩싸인 최윤형은 더 속일 수 있다는 희망을 버렸다.“형님이 우리 집안 사람인 걸 알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말한 건 아닙니다, 강 대표가 워낙 영리한 사람이라 제가 들켰을 뿐입니다. 게다가 우리 둘 다 최 씨라….”하준이 미간을 만지작거렸다. ‘이 멍청한 자식은 뭐 하나 제대로 하는 일이 없군.’최윤형은 다시 우물우물 말했다.“형님이 누군지 알면 들러붙을까 봐 그러시죠? 그런데 그건 너무 당연하지 않습니까? 우리 집안 사람이야 어딜 가나 온갖 인간들이 들이대잖습니까? 그런데 그 여자는 너무 급이 낮으니, 그냥 애인 정도 삼으시면….”“닥쳐.”하준이 날카롭게 쏘아봤다.“당장 동성을 떠나.”“네네, 바로 갑니다.”하준이 있는 곳에서 단 일 초도 더 있고 싶지 않았던 최윤형은 바로 짐을 챙겨 도망치듯 떠났다.방에 남은 하준은 일어나 창가로 갔다. 자신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어려서부터 FTT라는 후광 속에 자라다 보니 자신의 배경을 보고 달려드는 여자들이 한둘이 아니었고 거기에 반감이 심했다. 그래서 여름에게 자신에 대해 말해준 적이 없었다. 그는 여름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기를 바랐다.‘이제 알아버렸으니, 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까….’김상혁이 조용히 말했다.“걱정 마십시오
여름은 멍해졌다. 사실 하준의 가족에 관해 물어볼 참이었다. ‘최윤형에게 말하지 말라고 한 건 나한테 알려주고 싶지 않다는 뜻이겠지, 그럼 관두자.’“없는데요.”하준은 천천히 눈을 내리깔았다. 여름은 시간을 확인하고는 말했다.“아, 있어요! 오늘 저녁에 난 경매 행사 참가해요. 집에서 밥 못 먹어요. 혹시 같이… 갈래요?”여름은 조심스레 물었다. 승낙할 거라고 기대하진 않았다. 콧대 높은 그가 이런 행사 따위에 참석할 리 없었다.“그러죠.”“예?”여름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그게 그렇게 놀랄 일입니까?”하준은 넋이 나간 여름의 모습을 보고 빙그레 웃었다.“아뇨, 전엔 동성에서 열리는 행사에 참석하는 거 싫어했잖아요.”“당신 지켜주러 갑니다. 또 벌이고 나비고 다 달려들 테니.”앞만 보고 진지하게 운전하는 완벽한 옆모습을 옆에서 바라보던 여름은 몸을 내밀어 하준의 뺨에 입을 맞췄다.순간 핸들을 잡은 손이 흔들렸다. “하아, 운전할 때는 유혹 금지입니다.”어쩐지 익숙한 말이었다. 여름이 웃었다.“알아요, 차 흔들리면 뒤집힐까 봐요?”“아닙니다.”하준이 여름을 슬쩍 보았다.“마음이 흔들립니다.”여름은 숨이 멎는 것 같았다.밀폐된 공간에 순간 뜨거운 기운으로 가득 차고 있었다. 여름의 가슴은 설레어 점점 빨리 뛰기 시작했다.그 순간 하준에게 달려들어 입을 맞추고픈 생각이 간절했지만, 무사히 가기 위해 꾹 참았다.******7시 반. 컨벤션센터.경매 행사가 막 열리려 하고 있었다.동성의 유명인사가 하나둘 입장했다. 이제 새로 화신의 대표이사가 된 강여름은 화제의 중심이었다. 여름이 들어서자 주위에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많은 사람의 관심 대상이 된 여름을 멀리서 바라보는 한선우의 마음에 씁쓸함이 스쳤다.단 며칠 만에, 예전에 자신이 버렸던 여친이 화신의 새로운 대표가 되어있으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모두 자신더러 어리석다고 말하고 있었다.그렇다. 어리석었다. 가장 좋은 다이아몬드를 못 알아보고, 깨진 유리조
곧 몇몇 재벌 사모가 여름의 주위를 둘러쌌다.“강 대표, 이 스커트 어디서 사신 거예요? 너무 예뻐요!”“지금 하고 계신 목걸이 가르디 신상이죠?”“…….”“여러분, 안녕하세요?”갑자기 진가은이 와인잔을 들고 의뭉스럽게 다가왔다. “어머나~ 강 대표, 이런 행사에도 오실 만큼 한가하신 줄은 몰랐네. 아니지, 아직 강 대표라고 불러도 되나 모르겠네?”“그게 무슨 소리예요?”주 여사가 불쾌한 듯 물었다.“어머, 아직 모르시나 보다. 어젯밤에 화신 기념행사에서 강 대표가 서울에서 온 최윤형 씨한테 실례를 했다지 뭐예요?”“뭐라구요? 설마 FTT 최윤형?”“맞아요, 그분.”진가은이 고개를 끄덕였다.“친구한테 듣자니까 아주 노발대발 난리 났다던데. 강 대표, 왜 그렇게 성미가 급해? FTT가 어디 그렇게 만만한 상대던가? 다음에 만날 때 무사히 자리보전하고 있어야 될 텐데….”모두 놀라 숨을 멈추고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어머나, 우리 남편이 오라고 하네요.”“오 여사, 오랜만이에요!”잠시 후, 사모님들은 다들 핑계를 대고 재빨리 자리를 떠났다.‘미쳤어, FTT를 건드렸다고? 저 여자는 이제 그냥 죽은 목숨이네.”여름은 아무 해명도 없이 그저 한심한 눈으로 진가은을 바라봤다. ‘이제 강여경이랑 잘 안 노나? 아직 아무 소식 못 들었나 보네?”“너~무 황당하지~, 아직 대표이사 자리에 엉덩이 붙이기도 전에 쫓겨나게 생겼으니.”진가은은 의기양양하게 웃다가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하준을 보았다.“ 빨리 쟤랑 손절하세요, 괜히 엮이지 마시고.”하준은 말없이 눈썹을 치켜올렸다.하준이 흥미를 보인다고 생각한 진가은은 서둘러 덧붙였다.“우리 친척 중에 최윤형 씨한테 인정받는 비서가 계세요. 나중에 저한테 부탁하시면 제가 도와드릴게요.”여름은 웃고 싶었다. 최윤형도 벌벌 떠는 최하준인데 일개 비서가 무슨 대수라고.“신경 쓰지 말고 우린 가서 앉아요.”여름은 하준의 팔짱을 끼고 앞으로 걸어갔다. 지금은 진가은에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한주그룹 한선우 아냐? 통 크네.”"서상택 회장 댁 따님이랑 사귄다더라구요.”“어쩐지, 서 회장네 ‘사도’도 꽤 안정적인 기업이잖아요. 어지간히 출세하고 싶은가 보네요.” “누가 아니래요? 그런데 전 여친은 지금 화신 대표 강여름이에요.”“강여름 씨 남친은 지금 가만히 있네요. 여자 친구한테 돈 쓸 생각은 없나 봐.”가만히 지켜보던 사람들의 시선이 여름에게로 항했다.갑자기 자신에게 쏟아지는 관심에 당황한 여름은 황급히 하준을 붙들고 조용히 얘기해다.“사람들 말 신경 쓰지 말아요. 그래 봐야 그냥 액세서리죠. 다른 사람들한테 과시하는 거 말고 무슨 쓸모가 있어요? 더군다나 중고잖아요, 저렇게 큰 돈 쓸 필요 없어요.”하준이 물끄러미 여름을 바라보았다. 좀 아까 분명 좋아하는 눈치였다. 하준은 여름이 자신이 누군지를 알았으니 사달라고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여름의 말은 너무나 의외였다.여자가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면 돈을 쓰게 하는 게 아니라 절약하게 한다더니 그 말이 맞는 듯했다.씨익, 하준이 매력적인 미소를 띠더니 피켓을 들었다.“400억.”낮지만 카리스마 넘치는 목소리였다.“…….”여름은 얼이 빠진 사람처럼 멍했다. 머리가 폭발하는 것 같았다.“미쳤어요, 들지 말랬잖아요!”“410억.” 진가은이 갑자기 피켓을 들었다.여름은 하준의 손을 꽉 쥐었다.“들지 말아요. 쟤 분명 살 돈 없을 거예요. 일부러 가격 올리려고 저러는 거예요.”하준은 신경 쓰지 않고 다시 피켓을 들었다.“450.”장내가 온통 술렁이기 시작했다.한선우가 하준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한선우에겐 380억이 상한이었다. ‘이 자식이, 사랑하는 사람도 뺏긴 마당에 목걸이마저 빼앗기다니!’ 한선우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옆에 있던 서도윤이 한숨을 내쉬었다.“됐어요. 목걸이 하나에 450억이라니, 너무 오버예요.”“응.”한선우는 눈을 내리깔고 분을 삭였다.진가은이 또 손을 들려고 했다. 그러자 하준이 진가은을 향해 묘
결국 최하준이 450억에 목걸이를 낙찰받았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행사 스태프들이 목걸이를 조심조심 그의 손에 넘겼다.하준이 목걸이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찬란한 붉은 색이 반짝였다.그 목걸이를 들고 그 옆에 있던 여름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일어나 봐요.”여름은 얼떨결에 일어났다.사람 홀리는 미소를 지으며 하준은 여름의 목에 목걸이를 걸어주었다. 중후한 목소리가 잘 숙성된 와인처럼 매혹적이었다.“이제부터 당신이 나의 퀸입니다.”“와!”좌우에서 부러움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여름의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비록 많이 속 쓰린 가격이었지만 마치 두 사람의 결혼식이라도 올리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정말 자신이 바라는 모든 걸 만족시켜주는 남자였다.더욱이 이 사람에게 이런 낭만적인 면이 있으리라곤 생각지 못했다.여름의 우윳빛 피부 위에서 빛나는 빨간 다이아몬드에 모두 시선을 빼앗겼다. 진정 여왕과도 같은 기품이 흘러넘쳤다.“고마워요, 사랑해요.”여름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까치발을 들어 하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입을 맞추고 나서야 많은 사람이 보고 있다는 게 생각난 여름이 얼굴을 붉히는 모습마저도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하준의 눈동자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윽해졌다.갈수록 빠져들게 하는 사람이었다. 하준은 눈 딱 감고 당장 여름을 갖고 싶다는 충동을 간신히 누르고 있었다.한선우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심장이 찢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지난번 여름이 하준을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는 믿지 않았었는데 지금 똑똑히 확인한 것이다.과거 오직 자신만을 품었던 소녀가 이제 정말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었다. 자신보다 훨씬 잘나고 능력 있는 남자를.한선우는 더 이 자리에 있을 수가 없어 그냥 돌아가고 싶었다.그런데 무대 위에 스크린이 갑자기 밝아지는 게 아닌가.주최 측이 준비한 비하인드 영상인가보다 추측하던 사람들은 화면이 나오자 다들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나랑 이러고 있는 거 진현일이 알게 돼도 괜찮겠어?”“신경 안
“정말 무서운 사람이네요. 목적을 위해 여자친구까지 이용하다니.”“우리 딸하고 혼담 있었을 때 거절하길 천만다행이에요.”“그러게요, 평소에는 반듯해 보였는데 정말 역겨워요. 앞으로 JJ랑은 거리를 둬야겠어요.”“진가은도 그런 식으로 이용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요.”“그럴지도 모르죠. 원래 그 아가씨한테 좀 호감이 있었는데 관심 꺼야겠어요.”갑자기 비난의 중심에 놓인 진가은은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누구 짓이야!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라고!”한껏 들떠 있던 이 남매는 이제 난감하기 그지없었다.그리고 자리를 뜰 준비를 하던 한선우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진작 강여경의 실체를 알았다고 생각했지만 자기가 생각한 이상으로 역겨웠다. 대체 얼마나 많은 남자가 있었던 걸까.자신이 이런 여자와 사귀었었다고 생각하니 토할 것 같았다.옆에 있던 사람들이 좋은 구경거리라도 난 듯 그의 주위에 몰려들었다.“저 사람 전에 강여경이랑 사귀려고 강여름을 버렸다지?”“강여경한테 헤어나오지 못하는 매력이라도 있나 봐. 한선우도 그런 취향인 줄 몰랐네.”“유유상종이죠.”“…….”서도윤은 더 들을 수가 없어 고개를 홱 돌려 자리를 떴다.한선우 역시 황급히 쫓아 나갔다.막 나설 때, 자신을 연민과 조소의 눈길로 쳐다보는 강여름을 보았다. 그제야 모든 게 명확해졌다.‘이게 나에 대한 마지막 일격인 건가….’그렇다면 성공이었다. 그때부터 강여경만 생각하면 구토가 나올 지경이었으니까.*****일석삼조였다.여름은 정말 만족스러웠다.강여경의 뻔뻔함이 모두 까발려졌다. ‘끊임없이 욕심 부린 것도, 남자 꼬시기 좋아한 것도 다 너야.’“이제 다 봤습니까?”이를 꽉 깨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게 당신이 말한 그겁니까? 어제 분명히 경고하지 않았습니까? 나 말고 다른 남자는 보지 말라고.”하준이 여름의 눈을 노려보며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싸늘한 기운이 엄습하고 여름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그 와중에도 여름은 둘러댈 말을 찾았다.“내가 편
진현일과 진가은이 쫓아 달려왔다.진현일의 얼굴은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가득했다. 여름을 찢어 죽여도 시원찮았을 것이다.하준은 여름을 자신의 몸 뒤로 보냈다. 크고 건장한 몸이 강한 카리스마를 뿜어내고 있었다.“강여름, 네 짓이지?”진현일이 소리 질렀다.“좋아, 네가 끝까지 날 이렇게 건드렸단 말이지, 널 못 죽이면 내 성을 간다.”진가은도 거들었다.“너, 네가 누굴 건드린 건지 알아? 최윤형이라고, 감히 그 사람 영상을 공개해? 모자이크했다고 봐주진 않을 거야.”여름의 눈썹이 올라가더니 빙긋 웃었다.“그 영상이 어디서 났는지 생각해 봤니? 내가 몰카라도 찍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설마?”진현일과 진가은은 동시에 조용해졌다. 잠시 후, 진현일이 고개를 흔들었다.“그럴 리가 없어. 최윤형이 줬을 리 없잖아. 넌 어제 그 사람을 욕보였고, 그 사람은 널 못 잡아먹어 안달인데. 해킹한 거 아니야? 흥, 넌 이제 끝이야. 최윤형 비서에게 바로 전화하겠어. 우리 집안 사람이거든.”“걸어 봐요, 최윤형 씨가 오늘 아침에 벌써 동성을 떠난 건 모르나 본데.”여름은 여유만만하게 웃고 있었다.“잘나가시는 여자 친구분께서 말 안 해줬어요? 오늘 아침 최윤형 씨가 화신에 와서 어제 일 추궁 안 하겠다고 직접 말했는데. 아, 맞다. 그리고 강태환 씨 부녀한테 제대로 참교육 시전했구요. 이제 화신 사람들 다 강여경의 실체를 알게 돼서, 그 두 사람 회사에 발도 못 디딜걸?“웃기지 마, 그게 말이 돼?”진현일은 전혀 믿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최윤형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참을 걸어 전화 연결이 된 전화기에서는 욕이 쏟아졌다. “진현일, 이 자식! 무슨 낯짝으로 전화야? 너 때문에 난 망했다고, 회사에서도 잘렸어.”“어떻게 된 거예요?”“나도 몰라. 아무튼 너랑 강여경 두 멍청이가 일 저지르는 바람에 그분은 벌써 서울로 돌아가셨어.”전화는 일방적으로 끊기고 진현일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멍하게 서 있었다. 그리고 앞에서 만면에 웃음을 띄고 서 있
집에 돌아온 여름은 목에 걸린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푼 다음, 손에서 놓기 싫다는 듯 탁상 등 아래에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정말 예쁘다, 흠잡을 데가 없네.”“액세서리 안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어느새 하준이 등 뒤로 다가와 놀렸다.“중고라더니.”여름의 얼굴이 빨개지더니 웅얼거렸다.“그… 그건 너무 비싸서 그런 거죠. 얼마 동안 벌어야 하는 돈이냐구요.”“한선우도 쓰는데 내가 그깟 돈 못 쓰겠습니까?”“가격은 상관없습니다. 당신만 좋다면.”눈을 깜빡거리며 듣던 여름은 순간 모든 게 이해됐다.‘한선우한테 지기 싫어 그런 거야?’하지만 상관없었다. 한선우를 신경 쓴다는 건 자신을 신경 쓴다는 뜻이니까.“한선우는 이제 나랑은 털끝만큼도 관계없는 사람이에요. 이제 그 사람을 좋아하지도 않고. 내가 사랑하는 건 당신이에요.”여름은 몸을 돌려 하준의 목에 팔을 감고 얼굴에 입을 맞췄다.하준의 심장이 뛰었다. 예전에는 비록 돈을 많이 벌긴 했지만 그것은 그저 본능 같은 것이었다. 이제야 하준은 돈 버는 의미를 찾은 것 같았다.입술이 씰룩거리더니 의미심장한 눈으로 여름을 보았다.“이게 다입니까?”여름은 무슨 말인지 알아차린 듯, 고개를 푹 숙인 채 귀까지 빨개졌다.하준이 웃음을 터뜨리며 여름을 안아 올렸다.“날 보고 싶다더니?”“어머, 몰라….”여름은 놀라 얼굴이 온통 새빨개졌다. 말로만 대담하지 사실은 순진하기 그지없는 전형적인 쑥맥이었다.“그럼 거짓말이었습니까?”하준이 여름의 턱을 살살 어루만졌다. 중후한 목소리가 첼로처럼 사람의 마음을 흔들었다.여름은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점점 더 얼굴이 빨개지더니 얼른 하준을 밀어냈다.“저녁에 제대로 못 먹었다고 하지 않았어요? 내가 간장 떡볶이 해줄게요.”종종거리며 도망가는 뒷모습을 보며 하준은 하는 수 없다는 듯 웃었다.하준이 씻고 나오자 여름은 간장떡볶이를 만들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아주 오랫동안 여름이 해준 야참을 먹지 못했던 하준은 얼른 받아들고는 맛을 음미하며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