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양유진의 뒷모습을 보았다. 저런 모욕을 당하고도 참을 수 있다니 무서운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어딜 다녀 오는 거야? 무슨 일이 있었어?”하준이 여름을 돌려 세우고는 마스크를 내렸다.뽀얀 여름의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다. 선명한 손자국을 발견한 하준의 눈에 순식간에 살기가 스쳤다.“정말 당신 엄마가 이런 거야?”여름의 어머니가 살아 있다는 사실 조차도 믿을 수가 없었다.“…응.”인정하기는 싫었지만 여름은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너무 뜻밖이었어. 내내 돌아가신 줄 알았거든. 그런데 보자마자 인사로 따귀를 올려붙이다니….”지금까지는 그래도 감정을 잘 컨트롤하고 있었는데 사랑하는 사람 앞이라서 그런지 말하다 보니 점점 더 울컥해서 결국 눈시울을 붉히고 말았다.하준은 마음이 아파서 여름을 꼭 안았다.“그런 엄마라면 없어도 그만이야.”“아니,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나중에 아버지랑 통화하면서 냉정하게 생각을 해보니 십중팔구 강여경이 중간에서 뭔가 수작을 부린 게 분명해. 그리고 방금 강여경의 반응을 보니 무슨 짓을 했는지 몰라도 믿는 구석이 있는 것 같아.”여름이 망연자실하게 말했다.다시 강신희를 만날 수 있다면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야기를 하고 강태환 부부와 강여경이 어떤 악행을 저지르고 다녔는지 하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방금 강여경의 태도를 보니 자신이 하는 말을 강신희가 믿어줄지 자신이 없었다.하준은 콧방귀를 뀌었다.“강여인이 중간에서 무슨 수작을 부렸든 당신 친어머니면서 다른 사람의 말에 휘둘려서 당신에게 이런 짓을 하다니, 당신 엄마가 될 자격이 없어.”하준은 강신희가 누구든 자기의 여름을 건드린 사람이라니 무작정 미웠다.여름은 입을 꾹 다물었다.하준의 말은 여름의 마음 한구석을 쿡 찔렸다.‘그래, 남이 부추길 수도 있다고 치고, 엄마는 그렇게나 분별 능력이 없단 말이야? 게다가 난 친딸인데, 어머니가 되어서 앞뒤 가리지도 않고 딸을 그렇게 미워하다니….’여름이 강신희에 대해 실망하지 않을 수 있겠
하준은 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안색이 어두워졌다.“그래서… 차진욱이 당신 탈출 계획을 알아버렸던 거야?”“…응.”여름이 괴로운 듯 인정했다.“하지만 아버님과 당신의 관계는 몰라. 내가 아직 아버님 전용기로 탈출한다는 얘기는 안 했어. 하지만 저쪽에서 대비는 할 수 있을 것 같아. 미안해, 난….”“사과할 거 없어. 당신 잘못이 아니야.”하준이 여름의 까만 머리를 쓰다듬었다.“그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후안무치일 줄 우리가 몰랐지.”차민우가 작정을 하고 여름에게 접근하고 나중에는 차진욱까지 이렇게 나왔다니….‘잠깐, 차진욱이라는 이름은 어쩐지 익숙한데? 아버지께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걸.’한병우가 니아만에서 여름과 많이 닮은 사람을 보적이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다만 정확한 증거도 없고 괜히 여름에게 헛된 꿈을 심어줄 수도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을 여름에게 말하지는 않았었다.그런데 그 니아만의 안주인이라는 사람이 강신희였던 모양이었다.다만 강여경이 여름보다 한 발 앞서 만났던 것이다. 그런데 강여경은 강신희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그리고 한병후의 말에 의하면 차진욱은 파워가 대단해서 거의 전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재벌이라고 했다. 그러니 송태구도 함부로 할 수 없었던 것이다.“우리 아버지를 좀 뵈러 가자. 아버지께서 뭔가 아시는 게 있을 것 같아.”하준이 갑자기 여름의 손을 잡고 급히 말했다.여름은 의아했지만, 갑자기 확 변한 하준의 표정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이 막 사무실에서 나서는데 밖에서 중역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몰려왔다.“방금 강여경 그룹이 와서는 저희들더러 다 나가라는데 어쩝니까?”“정말 회장직에서 물러나신 겁니까?”“이제 저희는 정말 회사에 더 다닐 수 없습니까?”“……”관리직 직원들은 크게 동요했다. 적게는 십 수년에서 이삼십 년 된 사람도 있었다. 거의 FTT가 또 하나의 집이나 다름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회사에서 나가라니, 다들 기꺼울 리가 없었다.게다가 여기서
하준이 직원들까지 다 내보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정말 FTT를 이대로 포기한다는 의미일까?이 모든 것은 여름의 어머니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여름은 자책감으로 마음이 너무 괴로웠다.차가 한병후의 별장에 들어가자 하준이 문을 열어주고 여름에게 손을 뻗었다.“내려.”“쭌, 내가 반드시 오해를 풀고 엄마에게 회사를 돌려달라고 할게.’여름이 고개를 들어 하준을 바라보았다.“나참.”하준이 이마에 흘러내린 여름의 머리카락을 쓸어주더니 목구멍 깊은 곳을 울렸다.“바보야. 이게 그렇게 단순한 일인 줄 알아? FTT의 주식은 이제 강여경의 명의로 되어 있다고. 당신 어머니가 후회해서 뭘 어쩌고 싶어도 방법이 ㅇ없어.”여름은 흠칫했다.“우리 엄마가 대체 왜 그러셨을까?”“어머니야 그렇다고 치더라고 차진욱처럼 똑똑한 사람도 강여경에게 휘둘려서 그 많은 자금을 움직여 비 상식적인 일을 벌였어. 돈은 그 집안에서 나오고 명의는 강여경의 것으로 하는데도 차진욱이 말리지 않았다니 이상하지 않아?”하준이 가만히 여름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난 강여경이 한 짓은 이간질처럼 간단한 일이 아닐 거라고 생각해.”창백한 여름의 입술이 떨렸다. 뭐라고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일단 우리 아버지를 만나 보자.”하준이 여름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뜻밖에도 최란도 거기에 있었다.둘이 들어오는 것을 보더니 최란이 난처한 듯 일어섰다.“Y국에 나가서 어떻게 할지 이야기를 좀 하고 있었다. 내가 그쪽 상황을 잘 모르잖니?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그쪽에 가시면 어디서 지내셔야 할지 몰라서 집을 좀 사달라고 얘기하던 중이었어.”예전 같았으면 하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관심을 보였을 것이다. 혹시나 재결합을 하실 수도 있다는 생각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랐었다. 그러나 지금은 일이 있어서 그쪽으로는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혹시 전에 저에게 말씀해 주셨던 니아만 이야기 기억 나시나요? 여름이와 닮은 분을 만나신 적이 있다고 하셨었죠?”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니? 그래도 네 친어머니신데.”최란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하늘이랑 여울이도 손자, 손녀인데. 내가 하준이랑 사이가 안 좋았을 때도 그렇게까지는 못했다.”그때야 최란이 최양하를 회장 자리에 앉히고 싶어서 말을 좀 듣지 좋게 하지 못했을 따름이었다.나중에 하준에게 아들과 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는 매우 기뻐했다.여름은 어쩐지 의기소침해져서 할 말을 잃었다.하준이 한숨을 쉬었다.“글쎄 따귀를 올려 붙였답니다.”한병후가 한참 만에야 침울하게 입을 열었다.“정 그렇다면 나는 일단 한동안은 차 회장을 만나지 않겠다. 그러면…다들 떠나기로 했던 계획은 어떻게 할래?”모두의 시선이 여름에게로 향했다.잠깐 입을 다물고 있던 여름이 고개를 저었다.“저는 남아서 진상을 파헤쳐 보겠습니다.”하준이 여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검은 눈동자가 날카롭게 빛났다. 그리고 뭔가 생각이 난 듯했다.“그분의 실질적인 파워가 어느 정도 되나요?”한병후가 잠시 신음하더니 심란한 듯 말했다.“말했다시피 차 회장의 아내는 셀레만 제도의 주인이란다. 강신희는 그곳에 떨어진 후에 그곳의 석유를 개발해서 재력을 쌓았어. 강신희와 차진욱의 재력은 막상막하일 거다. 하나는 석유를 장악하고 하나는 해운과 금융을 잡고 있으니 어느 나라를 가더라도 대통령이 직접 마중을 나오는 그런 신분이 된 거지.”여름은 그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어머니가 차진욱 회장과 결혼하고 나서야 지금의 지위를 누리게 된 게 아니란 말씀인가요?”“두 사람은 애초에 강대강의 결합이었단다.”한병후가 여름을 안쓰럽다는 듯 바라보았다.“이치대로라면 자네가 그 사람의 딸이니까 강신희가 자네를 딸로 인정만한다면 바로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상속녀가 되는 거겠지.”“그런 말씀 마세요. 여름이는 금전에 관심이 있는 부류는 아니라고요.”하준이 얼른 말을 끊었다.“이러면 어떨까요? 오늘 차진욱의 수하가 우리 애들 손에 적잖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러니 십중팔구 니아만에서 새 인원을 보충
같은 시간.차진욱의 별장.차진욱 앞에 보디가드 둘이 꿇어앉아 있었다. 차진욱은 더없이 음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래서, 니아만에서 데려온 30여 명 중에 너희 둘만 남고 다 부상이라는 건가?”둘은 덜덜 떨었다.강여경은 심장이 떨렸지만 강신희만 믿고 불쌍한 척하며 일어섰다.“강여름이 갑자기 지룡을 끌고 들이닥쳐서 그래요. 게다가 이주혁 대표에게서도 사람을 받아 와서 랩에 있던 우리 경호원들을 둘러싸고 일부러 부상을 입힌 거예요.”“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강신희가 분노에 테이블을 탕 쳤다.“커피숍에서 만났을 때 다리를 분질러 놨어야 하는 건데.”“정말 죄송해요. 다 제가 못나서 벌어진 일이죠.”강여경이 울었다.“얼른 랩을 장악하고 싶어서 그랬어요. 최하준의 수하가 지키고 있으니 사람을 많이 데려가면 될 줄 알았는데 저쪽이 그렇게 결사적으로 나올 줄 몰랐어요.”“됐다. 울지 말거라. 내가 강여경 그것을 너무 얕잡아 봤어. 당장 니아만 쪽에 연락해서 사람을 불러와야겠다. 네가 당했으니 두 배로 되돌려 줘야겠어.”강신희가 이를 박박 갈았다.차진욱은 미간을 문질렀다. 이쯤 되니 남의 나라에 온 것이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내가 최하준이라면 상대가 사람을 불러올 것을 계산하고 하늘길을 막아버릴 거야.”강여경이 움찔했다. 강신희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무슨 뜻이에요? 겨우 최하준 따위가 내가 내 경호원 불러들이는 걸 막는다고요?”“허니, FTT는 이 나라 최고의 재벌가고 쿠베라와 한 배를 타고 있어요. FTT를 70% 사들였다고 최하준의 인맥까지 다 깎여나간 건 아니에요.”차진욱의 얼굴이 무거웠다.“역시나 당신이랑 여경이는 한동안 얌전히 지내는 게 좋겠어. 우리 쪽 인원이 다 다쳤으니 지금은 몸을 숙일 때야.”강신희가 비웃었다.“강여름을 도와주고 싶어서 일부러 날 겁주는 거죠?”차진욱은 날카로운 강신희를 바라보며 너무나도 낯선 느낌이었다.“허니,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무지성이 된 거예요? 전혀 당신답지 않아요.”“나는 하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하면 후유증이 남을 수도 있는데요.”비서가 조그맣게 덧붙였다.‘다리를 못 쓰게 될 수도 있다고?’차진욱은 화가 나서 강여경을 당장 잡고 싶었다. 이제 강여경의 머리에서 나온 계획이 아니었던가?차진욱의 안색이 점점 더 어두워지는 게 보였다.강여경은 얼른 머리를 썼다.“제 친구가 있는 게 이주혁의 약혼녀거든요.”“어머나, 넌 친구들이 참 대단하구나. 그러면 전화해서 한번 물어 보렴.”강신희가 부추겼다.강여경이 고개를 끄덕였다.“어쩐 일이야?”채시아는 요즘 상태가 과히 좋지 않았다. 국내 여러 가지 쇼와 광고가 모두 취소되었다.“저기, 아저씨의 보디가드가 모두 최하준의 수하에게 당해서 다쳤는데 이주혁이 병원마다 말을 넣어놔서 다친 사람들이 입원을 하지 못하네. 네가 좀 도와줄 수 없을까”강여경이 웃었다.“물론 이 은혜는 내가 잊지 않을 거야. 앞으로 내가 세계적인 감독에게 널 소개해줄게.”채시아는 말만 들어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날 너무 대단하게 보는 거 아니니? 주혁 씨는 최하준의 절친이라 내 말을 들을 리가….”게다가 이주혁은 지금 자신과 약혼도 무르려고 하는데 자기 말이 씨알이나 먹히겠는가?“주혁 씨 부모님을 찾아가 봐. 내 배후가 누군지 늘 궁금해 하지 않았니?”강여경이 소곤소곤거렸다.“날 받쳐주는 분들은 전세계의 해운과 금융을 꽉 잡고 있는 CB그룹이야. 내 친엄마는 셀레만 제도의 주인이라 글로벌 석유를 손에 쥐고 계시지. 그런 분들과 인맥을 틀 기회를 잃고 싶니?”그 말을 들으니 채시아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너… 네 엄마는 동성에….”“사실 그 분들은 내 친부모님이 아니었어. 이 얘기는 함부로 하고 다니면 안 돼.”강여경이 당부했다.“이 기회를 잡을 수 있는지는 네 능력에 달렸어. 강력한 인맥을 잡으면 너희 주민그룹에도 크게 도움이 되지 않겠어?”“알겠어.”채시아가 끄덕였다.“내게 맡겨둬.”채시아는 이주혁이 아버지 이원명에게 바ㅗㄹ 전화했다.
강신희는 화가 나서 차진욱을 노려보았다.“아들을 아주 잘도 가르쳐 놨군요.”차진욱의 태양혈이 불뚝거렸다. 그 현명하고 냉철하던 강신희가 어쩌다가 이 꼴이 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그래, 다 내가 잘못 가르쳤어요.”차진욱도 일어나 가버렸다.부자의 싸늘한 태도에 강신희는 화가 나서 물건을 집어 던지며 화풀이 했다.‘이게 다 강여름 때문이야. 강여름이 내 남편과 아들을 내게서 멀어지게 만들었어.’******차민우는 집에서 나와 휴대 전화를 꺼냈다. 여름에게서 온 부재중 전화가 있었다.커피숍에서 나온 뒤에 여름이 자신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차민우는 강신희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차마 전화를 받을 수가 없었다.퉁퉁 부었던 여름의 얼굴을 떠올리고 차민우는 죄책감이 들어 전화를 걸었다. 통화가 되자 비아냥거리는 여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아, 뭐. 아직도 나한테서 빼낼 거리가 있나 봐요?”“미, 미안해요.”차민우는 너무 미안해서 더듬거리며 사과했다.“아까는 엄마랑 같이 있어서 일부러 그렇게 말한 거예요. 엄마가 더 화를 낼까 봐. 사실은 처음 만났을 때 그쪽이 누군지도 몰랐어요. 나한테 이상한 이름을 가르쳐 줬는데도 난 그게 정말인 줄 알 정도였잖아요.”“그래도 나중에는 알았지? 서울에서는 일부러 날 찾아온 거지? 쇼핑하다 우연히 만난 척하고 그런 거 다 계획적으로 접근한 거잖아?”여름은 진심으로 화가 났다.“무려 CB그룹 회장님과 그 아들이 그렇게 몸을 숙이고 직접 날 속이려고 스파이 노릇까지 할 가치가 있었나? 이해가 안 돼. 내가 대체 어쩌다가 CB그룹 같은 대기업에 밉보인 거지?”“우리에게는 잘못한 거 없어요. 강여경과 우리 엄마 때문이지.”차민우는 마음 속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그리고 우리 외할머니.’그러나 여름을 안 지 좀 되었지만 차민우는 아무리 생각해도 여름이 그렇게…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말은 그렇게 하면 안 되지. 내내 강여경이 날 괴롭혔거든. 내 친구도 죽게 만들고. 나야 말로 걔한테 원한이 크
“……”전화기 저쪽이 갑자기 침묵하기 시작했다. 차민우가 싸늘하게 말을 이었다.“왜? 수작을 간파 당해서 찔려?”“아니. 그 상상력에 할말을 잃었다.”여름의 목소리가 무력감으로 가득했다.“이렇게 하자. 내가 무슨 짓을 할까 봐 걱정되면 내 혈액, 머리를 가지고 니아만으로 가서 검사를 해 봐. 그러면 내가 뭘 어쩌겠어?”“니아만이라고 하니까, 그건 더 필요없어.”차민우가 담담히 받았다.“애진작에 내가 니아만에서 강여경과 우리 엄마의 친자 확인 검사를 했거든. 강여경이 우리 엄마이 딸이야.”“그럴 리가 있나!”여름은 기함했다.“니아만야말로 내 구역이니 강여경이 뭘 어쩔 수는 없거든.”차민우의 말투가 실망으로 가득했다.“당신이랑 만나는 동안 이미지가 좋았던 건 인정해. 솔직이 정말 우리 누나였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많이 했어. 하지만 아니잖아. 게다가 그런 문제로 사람을 속이고, 거짓말을 너무 오래하다 보니 이제 본인도 정말로 그렇다고 믿는 것 같은데. 오늘 전화한 이유는 내가 처음부터 정체를 알고 접근한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어서야. 인제부터 우리 엄마랑 강여경이 어떻게 나오든 나는 이제 간여할 수 없어.”여름은 진정하려고 노력한 뒤 입을 열었다.“날 안 믿으니 어쩔 수가 없네. 하지만 강여경은 정말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걔 보통이 아니거든. 아마 당신들에게 나에 대해서 엄청나게 나쁜 말을 많이 했겠지. 하지만 동성에 가서 조금만 자세히 알아보고 조사해 보면….”“됐어. 동성에서 당신이랑 강여경에 대해서는 조사할만큼 조사했어. 강여경이 말하는 건 다 사실이었어.”차민우가 말을 끊었다.“뭘 조사했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관련자도 아닌 사람들에게 대충 물었겠지. 동성에서 좀 산다 하는 집에 가서 물어 봐. 강여경이 대체 어떤 인간이었는지. 특히 JJ그룹, 한주그룹 그런데 말이야. 그 두 그룹 아들들이 강여경과 사귄 적이 있거든. 아무렴 내가 강여경이 사귀었던 사람을 매수할 수 있겠어?”여름은 마지막으로 경고했다.“너희 식구들을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