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난감했다.“아마 엄마가 원하지 않으실 거예요. 지금 가정을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았어요. 아니… 특히 남편분을요. 제가 그 남편분하고 몇 마디만 하는 걸로도 앞뒤 가리지 않고 다짜고짜 내가 그 분을 유혹한다고 화를 낼 정도였으니까….”서경주는 서글픈 기분이 되었다.“네 엄마가 전에도 나를 두고 질투를 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성적이었는데….”‘어쩌면 그렇게까지 사랑하지 않았는지도….’그런 생각이 들자 서경주는 마음이 견디기 힘들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됐다. 혹시나 다음에 또 네게 손을 대거든 바로 연락하거라. 아무리 꿈에도 못 잊던 사람이라고 해도, 엄머라는 사람이 자식에게 이러는 법은 없다.”“네.”여름은 차마 차진욱이 아버지보다 훨씬 더 근사하고 멋지더라는 이야기는 할 수 없었다.통화가 끝나자 여름은 상당히 평정심을 찾을 수 있었다. 바로 차민우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다.신호가 몇 번 가더니 상대는 전화를 끊어버렸다.여름은 쓴웃음이 날 뿐이었다.솔직히 차민욱의 입에서 강신희와 강여경에 관한 정보를 얻어낼 생각만 아니었다면 여름은 연락하고 싶지도 않았다.여름은 동생으로 생각했던 차민우가 그렇게 온갖 방법을 써서 자신에게 접근했던 것이 모두 달리 꿍꿍이가 있었다는 것은 충격이었다. 더구나 자기가 멍청하게 그 계략에 걸려들었다는 것이 분했다.이제 저쪽에서는 자기 계획을 알고 있으니 해외로 도피는 인제는 물 건너 간 것이었다.상대의 비열한 수법을 생각하니 여름은 생각할 수록 분통이 터졌다.잠시 생각해 보다가 여름은 결국 FTT로 차를 몰았다. 강여경은 십중팔구 거기 있을 터였다. 대체 강여경이 무슨 수작인지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FTT 본사.최민과 최진이 짐을 한 무더기 들고 사무실에서 나왔다. 두 사람은 난처한 얼굴로 하준을 쳐다보았다.오랜 침묵 끝에 최진이 먼저 입을 뗐다.“우린 이만 가볼게. 이제 우리는 FTT식구가 아니다.”하준은 조롱하는 시선으로 둘을 바라보며 담담히 인사했
“사람 사이의 관계를 그렇게 추잡하게 밖에 생각을 못합니까?”양유진은 우아한 몸짓으로 안경을 추어올렸다.“그리고 강여경 씨는 인제 FTT의 최고주주니 말 조심하시죠.”“그러니까 말예요. 아직도 여기가 자기 나와바리인 줄 아나 봐.”강여경이 실실 웃으며 사무실을 둘러보았다.“경치도 좋네. 결정했어. 앞으로 이 사무실은 내가 쓰겠어. 최하준 씨 사무실은 1층으로 옮겨요.”그러더니 뒤 쪽의 보디가드에게 까딱까딱 손가락질을 했다.“여기 짐 옮겨. 그래도 FTT 회장이니까 애써 일해온 공로가 있으니 잘 모시고. 아, 인제부터는 회장이 아니지만, 그간 해온 공로가 있으니까 홍보팀 팀장으로 발령하지. 상판이 저 정도면 홍보팀 팀장에 어울리겠어.”“어울린다 뿐인가? 저 정도 얼굴이면 돈 많은 사모님들과 일부 특이 취향의 남자들도 환장할 만하지.”양유진이 실실 웃으며 맞장구 쳤다.하준은 두 손을 주머니에 찌른 채로 두 사람을 내려다 보았다.매처럼 날카로운 시선에서는 싸늘함이 느껴졌다.그 둘은 일찍이 하준에게는 벌레만도 못한 존재였다. 그런데 지금은 하준의 앞에서 기고만장해서 날뛰는 것이었다.하준은 정말이지 둘을 당장이라도 해치워버리고 싶었다.“최 팀장이 인제는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잘 알았겠지? 앞으로 내 앞에서는 공손하게 굴도록, 알겠…?”강여경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얼음장 같은 하준의 얼굴이 앞으로 쑥 나왔다.강여경은 움찔해서 저도 모르게 옆에 있던 보디가드의 뒤로 몸을 피했다. 그러고는 소리쳤다.“뭐 하려는 거야? 당장 내려가라고! 당신은 인제 여기 있을 자격이 없어. 빠… 빨리 옮기란 말이야.”갑자기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와서 집기를 들어내기 시작했다. 일부러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여름과 하준의 사진을 바닥에 떨어트리고 밟고 지나가려는 사람도 있었다.그러나 발에 밟히기 전에 하준이 얼른 치워버렸다.하준이 허리를 굽혀 사진을 집어 들었다. 액자는 이미 깨져 버려 하준은 사진만 꺼냈다.강여경은 일부러 큰 소리쳤다.“
하준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다.어떡할지 생각하고 있는데 휴대 전화가 울렸다. 상혁이었다.“큰일 났습니다. 랩 입구에 사람들이 잔뜩 나타나서 지룡 멤버들을 다 때려눕히고 지금 막 밀고 들어옵니다. 랩직원도 적잖이 다쳤습니다.”“알겠어.”하준이 싸늘하게 강여경을 노려보았다.돌아서서 얼른 밖으로 향했다.그러나 입구에 서 있던 보디가드 셋이 갑자기 하준을 막았다.강여경은 고소하다는 듯 떠들었다.“랩에 가 보시게? 내가 거길 보내줄 것 같아? 당신이 피 땀이 어린 곳인 건 알겠지만 나는 랩을 통채로 빼앗아야겠어. 내내 자기가 아주 잘난 줄 알고 있잖아? 예전에 동성에서부터 날 벌레취급하면서 어떻게 날 괴롭힐까 연구하던데 난 다 기억해 두고 있었다고. 오늘부터 하나하나 다 복수해 줄 거야. ““당신뿐이 아니지.”양유진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왔다. 눈에 음험한 빛이 돌았다.“나도 있거든. 최하준이 내게 주었단 모욕은 내가 하나하나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 신혼 첫날 밤 강여름은 원래 내 아내인데도 멋대로 데려가 버렸지. 그 모욕을 당하고 나는 맹세했다고. 언젠가는 내가 복수하겠다고. 사는 게 사는 게 아니게 만들어 주겠다고.”하준은 자신을 바라보는 복수의 눈을 보며 우습기 그지 없었다.둘은 자기들이 여름에게 저질러 온 죄는 생각지 못하는 걸까?“둘이 아주 천생연분이군.”하준이 문득 웃었다.“자기가 남을 해치는 건 괜찮고 상대가 반항하거나 되갚으면 갑자기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군. 너희들이 저질러 온 짓은 생각지 못하는 거야?”강여경이 눈썹을 찡긋했다.“우리 아빠는 맏아들이라 원래 집안의 재산은 모두 맏아들이 물려 받아야 하는데 강여름이 화신을 빼앗아 갔어. 그러니 지금 이 모든 것은 자업자득이지. 이런 걸 인과응보라고 하는 거야.”양유진이 피식 웃었다.“겨우 강여름 주제에 나와 만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지 않고 말이야. 심지어 내가 신장을 잃은 척까지 해가며 살뜰히 돌보아 주었는데. 난 평생 누구에게도 이렇게 비위를 맞춰본 적이 없다고.
“웃기시네. 감히 내 보디가드들을 다치게 했다가는 절대로 좋은 꼴 못 보게 될 줄 알아.”강여경이 독살스럽게 경고를 날렸다.“지금 너희는 완전히 사람 잘못 건드렸어. 대통령이 나서도 이제 너희를 구할 수는 없을 거다.”여름은 날뛰는 강여경을 보면서 속에서 점점 더 불덩이 이글이글 크게 타오르는 것 같았다.“아니, 내가 지금 누굴 건드리는지는 아주 잘 알고 있어. 네가 데려온 사람들 네 수하가 아니잖아. 차진욱의 인원이지. 네 뒤에 있는 그 사람 말이야.”그 말을 들은 하준은 의아했다.‘차진욱이라고? 그 차진욱?’강여경은 더 의기양양하게 웃었다.“그래, 너 같은 촌뜨기는 그 분의 파워가 얼마나 강한지도 모를 걸.”“인정해. 넌 평생 내가 만나본 적수 중 가장 강력하더라. 물론 네가 대단한 게 아니라 너의 그 비열하고 치졸함이 대단한 거긴 하지만.”여름은 냉정을 유지하기 위해 많이 애써야 했다. 알아봐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대체 우리 엄마는 어떻게 찾았지? 엄마에게 뭐라고 지껄여 구워삶은 거야?”하준은 완전히 경악하고 말았다.강여경이 순진한 척 눈을 커다랗게 떴다.“뭐래? 뭔 소린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네.”“가식 그만 떠시지. 이미 엄마를 만났거든.’그 일을 언급하려니 여름은 다시 심장이 찢어지는 듯 아팠따.“대체 뭐라고 했길래 엄마가… 나에게 그렇게 심하게 대하실 수가 있지?”“흥, 따귀 몇 대 맞은 거 말이군?”강여경은 고소하다는 듯 마스크를 쓴 여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그러길래 누가 남의 남편을 그렇게 유혹하라니? 그래서 맞은 주제에 뻔뻔하기는….”강여경은 이리로 오는 길에 이미 강신희의 전화를 받아 상황을 알고 있었다.여름이 자기 엄마에게 욕을 먹고 맞았을 것을 생각하니 통쾌하기 짝이 없었다.강여름과 강신희가 만나도 두렵지 않은 것이, 이미 친자 확인을 끝냈기 때문에 강여름이 무슨 소리를 해도 강신희가 안 믿을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게다가 강신희는 약을 먹고 있어서 이미 반쯤은 이성을 잃은 상태였다.
양유진도 신난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웃기는 연극을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아, 내일이 사뭇 기대 되는데.”강여경이 씩 웃었다.“지금까지 엄마는 나에게 천문학적인 자금을 투자해 주셨고, FTT도 내 명의로 사주셨어. 엄마가 나에게 얼마나 잘 해주시는데.”여름은 분노로 온몸이 덜덜 떨렸다.전에는 강여경 배후의 인물이 누군지 몰라서 이렇게까지 화가 나지는 않았는데 이제는 자기 엄마라는 것을 알게 되자 피를 토하는 심정이 되었다.“넌 내 걸 빼앗아 가는 걸 왜 이렇게 좋아하니 처음에는 TH, 그 다음에는 화신…. 그런데 이제는 다 상관 없어.”강여경이 빨간 입꼬리를 올렸다. 여름이 화가 나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것을 보니 너무나 마음이 흡족했다. 이 날을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네가 무슨 거짓말을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절대로 영원히 진실을 감출 수는 없어. 난 남아서 네 추악한 면모를 하나하나 까발려 줄 거야. 그 집안 사람들이 네 더러운 진짜 모습을 하나하나 다 보게 만들 거야.”여름은 이를 악 물고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이제 슬슬 랩에 가 봐. 네가 그 집의 보디가드를 데리도 나왔을 때는 멀쩡한 모습이었을 텐데 이제 하나같이 실려 나갈 테니 그 꼴을 보고 나면 차진욱님이 뭐라고 하실까?”강여경은 카리스마 가득한 차진욱의 모습을 떠올리니 심장이 떨렸다.강신희는 별로 개의치 않겠지만 차진욱은….“상관 없어. 넌 아저씨가 날 얼마나 예뻐하는지 모르는구나.”강여경이 말은 그렇게 했지만 더는 여기서 이러고 있을 수 없었다. 정말 여름이 말한 것처럼 상황이 그런지 봐야 했다.“우리 가요. 같이 내려가 보자고요.”강여경이 양유진에게 눈짓을 해보였다.양유진은 고개를 까딱했다. 그러나 여름의 앞을 지나가려다가 걸음을 멈추더니 가식적인 웃음을 띠고 말을 건넸다.“여보, 사실 당신이 내 침대로 돌아오기만 하면 당신의 아이들은 다치지 않게 해줄 수 있어. 그동안 내가 돌보아 키운 아이들 아닌가?”여름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감히 아이
여름은 양유진의 뒷모습을 보았다. 저런 모욕을 당하고도 참을 수 있다니 무서운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어딜 다녀 오는 거야? 무슨 일이 있었어?”하준이 여름을 돌려 세우고는 마스크를 내렸다.뽀얀 여름의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다. 선명한 손자국을 발견한 하준의 눈에 순식간에 살기가 스쳤다.“정말 당신 엄마가 이런 거야?”여름의 어머니가 살아 있다는 사실 조차도 믿을 수가 없었다.“…응.”인정하기는 싫었지만 여름은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너무 뜻밖이었어. 내내 돌아가신 줄 알았거든. 그런데 보자마자 인사로 따귀를 올려붙이다니….”지금까지는 그래도 감정을 잘 컨트롤하고 있었는데 사랑하는 사람 앞이라서 그런지 말하다 보니 점점 더 울컥해서 결국 눈시울을 붉히고 말았다.하준은 마음이 아파서 여름을 꼭 안았다.“그런 엄마라면 없어도 그만이야.”“아니, 나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나중에 아버지랑 통화하면서 냉정하게 생각을 해보니 십중팔구 강여경이 중간에서 뭔가 수작을 부린 게 분명해. 그리고 방금 강여경의 반응을 보니 무슨 짓을 했는지 몰라도 믿는 구석이 있는 것 같아.”여름이 망연자실하게 말했다.다시 강신희를 만날 수 있다면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야기를 하고 강태환 부부와 강여경이 어떤 악행을 저지르고 다녔는지 하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방금 강여경의 태도를 보니 자신이 하는 말을 강신희가 믿어줄지 자신이 없었다.하준은 콧방귀를 뀌었다.“강여인이 중간에서 무슨 수작을 부렸든 당신 친어머니면서 다른 사람의 말에 휘둘려서 당신에게 이런 짓을 하다니, 당신 엄마가 될 자격이 없어.”하준은 강신희가 누구든 자기의 여름을 건드린 사람이라니 무작정 미웠다.여름은 입을 꾹 다물었다.하준의 말은 여름의 마음 한구석을 쿡 찔렸다.‘그래, 남이 부추길 수도 있다고 치고, 엄마는 그렇게나 분별 능력이 없단 말이야? 게다가 난 친딸인데, 어머니가 되어서 앞뒤 가리지도 않고 딸을 그렇게 미워하다니….’여름이 강신희에 대해 실망하지 않을 수 있겠
하준은 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안색이 어두워졌다.“그래서… 차진욱이 당신 탈출 계획을 알아버렸던 거야?”“…응.”여름이 괴로운 듯 인정했다.“하지만 아버님과 당신의 관계는 몰라. 내가 아직 아버님 전용기로 탈출한다는 얘기는 안 했어. 하지만 저쪽에서 대비는 할 수 있을 것 같아. 미안해, 난….”“사과할 거 없어. 당신 잘못이 아니야.”하준이 여름의 까만 머리를 쓰다듬었다.“그 사람들이 이렇게까지 후안무치일 줄 우리가 몰랐지.”차민우가 작정을 하고 여름에게 접근하고 나중에는 차진욱까지 이렇게 나왔다니….‘잠깐, 차진욱이라는 이름은 어쩐지 익숙한데? 아버지께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은걸.’한병우가 니아만에서 여름과 많이 닮은 사람을 보적이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다만 정확한 증거도 없고 괜히 여름에게 헛된 꿈을 심어줄 수도 있었기 때문에 그 일을 여름에게 말하지는 않았었다.그런데 그 니아만의 안주인이라는 사람이 강신희였던 모양이었다.다만 강여경이 여름보다 한 발 앞서 만났던 것이다. 그런데 강여경은 강신희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그리고 한병후의 말에 의하면 차진욱은 파워가 대단해서 거의 전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재벌이라고 했다. 그러니 송태구도 함부로 할 수 없었던 것이다.“우리 아버지를 좀 뵈러 가자. 아버지께서 뭔가 아시는 게 있을 것 같아.”하준이 갑자기 여름의 손을 잡고 급히 말했다.여름은 의아했지만, 갑자기 확 변한 하준의 표정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이 막 사무실에서 나서는데 밖에서 중역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몰려왔다.“방금 강여경 그룹이 와서는 저희들더러 다 나가라는데 어쩝니까?”“정말 회장직에서 물러나신 겁니까?”“이제 저희는 정말 회사에 더 다닐 수 없습니까?”“……”관리직 직원들은 크게 동요했다. 적게는 십 수년에서 이삼십 년 된 사람도 있었다. 거의 FTT가 또 하나의 집이나 다름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회사에서 나가라니, 다들 기꺼울 리가 없었다.게다가 여기서
하준이 직원들까지 다 내보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정말 FTT를 이대로 포기한다는 의미일까?이 모든 것은 여름의 어머니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여름은 자책감으로 마음이 너무 괴로웠다.차가 한병후의 별장에 들어가자 하준이 문을 열어주고 여름에게 손을 뻗었다.“내려.”“쭌, 내가 반드시 오해를 풀고 엄마에게 회사를 돌려달라고 할게.’여름이 고개를 들어 하준을 바라보았다.“나참.”하준이 이마에 흘러내린 여름의 머리카락을 쓸어주더니 목구멍 깊은 곳을 울렸다.“바보야. 이게 그렇게 단순한 일인 줄 알아? FTT의 주식은 이제 강여경의 명의로 되어 있다고. 당신 어머니가 후회해서 뭘 어쩌고 싶어도 방법이 ㅇ없어.”여름은 흠칫했다.“우리 엄마가 대체 왜 그러셨을까?”“어머니야 그렇다고 치더라고 차진욱처럼 똑똑한 사람도 강여경에게 휘둘려서 그 많은 자금을 움직여 비 상식적인 일을 벌였어. 돈은 그 집안에서 나오고 명의는 강여경의 것으로 하는데도 차진욱이 말리지 않았다니 이상하지 않아?”하준이 가만히 여름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난 강여경이 한 짓은 이간질처럼 간단한 일이 아닐 거라고 생각해.”창백한 여름의 입술이 떨렸다. 뭐라고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일단 우리 아버지를 만나 보자.”하준이 여름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뜻밖에도 최란도 거기에 있었다.둘이 들어오는 것을 보더니 최란이 난처한 듯 일어섰다.“Y국에 나가서 어떻게 할지 이야기를 좀 하고 있었다. 내가 그쪽 상황을 잘 모르잖니?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그쪽에 가시면 어디서 지내셔야 할지 몰라서 집을 좀 사달라고 얘기하던 중이었어.”예전 같았으면 하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관심을 보였을 것이다. 혹시나 재결합을 하실 수도 있다는 생각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랐었다. 그러나 지금은 일이 있어서 그쪽으로는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혹시 전에 저에게 말씀해 주셨던 니아만 이야기 기억 나시나요? 여름이와 닮은 분을 만나신 적이 있다고 하셨었죠?”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