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상원을 감옥에서 풀어주고 FTT를 건드리는 자는 분명 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여름이 심란한 듯 말을 이었다.“연달아서 그렇게 큰일이 벌어질 리 없어. 게다가 양쪽 다 VIP랑 관련되었잖아?”“그러니까… 내가 윤상원을 괴롭혀서 상대가 FTT에 손을 댔다는 말이야? 네가 내 친구고, 하준 씨가 네 남친이라서?”윤서는 점점 더 어리둥절해졌다.“아니, 난 신아영이 의심스러워.”여름이 자기 생각을 풀어놓았다.“윤후그룹이 어느 정도 실력인지는 우리가 빤히 ㅏ 알아. 특히나 그때 상원 오빠네 부모님의 절박한 표정으로 봐서는 정말 아들을 풀어줄 다른 방법이 없었던 게 분명해. 그런데 이렇게 갑자기 풀려났다고? 절대로 누군가 가까운 사람이 힘을 썼을 텐데 유일한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신아영이잖아.”“신아영이?”윤서가 기함했다.“걔가 그 정도 능력이 있었을까? 그동안 걔네 집도 거의 망할 뻔해서 숨도 못 쉬고 있었을 텐데.”“3년 전 일을 잊었어?”여름이 일깨웠다.“내가 너한테 동성에서 가짜 지다빈과 강태환의 친자관계 확인해달라고 했을 때 신아영이 그걸 봤고 얼마 뒤에 강여경이 바로 튀어버렸잖아?”윤서의 머리가 번쩍했다.“그러니까, 강여경이 신아영을 도와줬다?”“파헤쳐진 우리 엄마 묘에 강여경이 쪽지 남겨뒀었잖아? 십중파구 걔가 외국에서 뭔가 새로운 백을 잡은 거야. 나를 노리고 들어오는 게 분명해.”여름이 걱정스러운 듯 말을 이었다.“게다가 외삼촌네 부부를 감옥에서 꺼내줬고, 민관이랑 우형이까지 크게 당했다고.”윤서로서는 어쩐지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이었다.“그러니까 강여경이 배후에 누군가를 업고 VIP를 조종하고 있다고?”“나도 제발 안 그랬으면 좋겠어.”여름의 안색이 더욱 무거워졌다.“그게 사실이라면 강여경은 복수 때문에 돌아온 게 틀림없어. 그렇게 악독한 애가 권력을 얻었다면 절대 우리를 그냥 두지는 않을 거야.”윤서가 고민스러운 듯 입술을 깨물었다.“정말 너무 불공평해. 귀신은 대체 뭐 한다니, 저런 애 안 잡아가고
“사실 난 그것도 신아영이 부추겨서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해.”여름이 말을 이었다.“나도 상원이 오빠는 오래 봐 왔지만 한선우랑 비슷한 점이 있는 것 같아. 비즈니스에 있어서는 한선우만큼 비열하지는 않아서 편법 쓰지 않고 착실하게 해왔지. 어쨌든 애정문제에 있어서는 우유부단하고 귀가 얇아서 여우 같은 애한테 잘 속아 넘어가는 그런 타입이지.”윤서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 점에는 동의가 되었다.“한선우도 나중에는 자기 잘못을 깨달았잖아.”여름이 이야기를 계속했다.“강여경이 사랑한 것은 한선우가 아니라 한선우의 배경이었다는 것을 깨달았거든. 한선우가 다 잃고 나니 강여경은 어떻게든 관계를 끊으려고 했어. 하지만 신아영은… 정말 강상원을 사랑하는 것 같아.”임윤서가 문득 작은 소리로 이야기했다.“사랑하지 않는다면 이런 상황에서는 누구라도 상원이 오빠를 버렸겠지. 이번에 출소하고 나면 신아영이 더 좋아지겠다.”“전에 네 양아버지 명예를 손상시킨 댓글을 쓴 ID는 윤후그룹에서 나온 거였잖아? 윤상원이 한 게 아니면 신아영이라고. 감옥에 한 달 넘게 갇혀 있었으니 이제는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되었을 거야. 바보가 아니니까.”여름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윤서의 눈이 반짝했다.“어허… 이거 강여름의 사람 보는 눈이 점점 더 예리해 지네?”“안 그랬다가는 애진작에 난 살아남지도 못했을걸. 특히나 양유진 같은 인간을 겪고 나니 사람 보는 눈이 아주 한껏 높아진 것 같아.”여름이 한숨 쉬듯 뱉었다.“알겠어. 도와줄게.”윤서가 여름의 어깨를 두드렸다.“영식 씨에게 미리 얘기는 해 둬.”여름이 말했다.“날 좋아하지도 않는데, 전혀 신경 쓰지 않을걸.”윤서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해보였다.윤서의 그런 모습을 보자니 여름은 어이가 없었다.‘윤서는 늘 저렇게 생각하는 게 단순하다니까.’******어느새 대문이 이르렀다. 송영식과 하준이 거기서 둘을 한참이나 기다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뭔 얘기가 그렇게 길어?”송영식이 미간을 찌
송영식의 얼굴은 완전히 흙빛이 되었다.“아참!”윤서가 갑자기 돌아보았다. 약간 어색한 표정이었다.“저기… 아마도 곧 윤상원을 좀 자주 만나게 될 것 같아.”송영식은 완전히 깜짝 놀랐다. 한참 뒤에야 버럭했다.“정신 나갔어? 그 놈이 당신한테 무슨 짓을 했는데 또 만나러 가? 그 놈이 그렇게 좋아? 가서 바보 같이 또 무슨 짓을 당하고 싶어서, 어!”“내가 아무리 바보라도 당신만큼 바보는 아니거든.”애초에 차근차근 이야기하려고 마음 먹었던 윤서지만 송영식의 말을 듣고 나니 괜히 속이 꼬여서 화가 났다.“난 백지안과는 이제 완전히 손을 끊었잖아. 그런데 당신은 내 아이를 가지고 그 녀석을 만나겠다고? 꿈도 꾸지 말라고.”송영식이 씩씩거렸다.“얌전히 있어. 괜히 우리 집안 망신시키지 말고. 그리고, 지난번에 그 녀석은 손찌검까지 했잖아?”“나도 그건 잘 알아. 아주 그냥 입만 열면 막말이야, 그만 하라고! 대체 누가 풀어줬는지 확실하게 알아보려고 만나는 거거든 여름이가 그러는데 윤상원을 출옥하게 해준 사람이랑 FTT에 손을 쓰는 사람이 동일인일지도 모른대. 바로 강여경 말이야.”“강여경?”송영식은 흠칫했다.‘또 그 인간인가?’“그래. 3년 전에 지다빈으로 가장하고 당신들 곁에서 멤돌던 그 인간 말이야. 멍청한 당신들 셋 다 속아 넘어가서 강여경이 도망치게 뒀었잖아. 지금 그 강여경이 복수하러 돌아왔다고.”윤서가 거침없이 말했다.멍청하단 소리를 들은 송영식은 부루퉁했다.“…내 잘못은 아니지. 죽은 사람 DNA를 조사했을 때는 지다빈이 맞았잖아?”“흥, 그때 제일 난리 친 게 당신이었지. 백지안과 관련된 인간이라면 덮어놓고 감싸느라고 정신을 못 차리고 말이야.”윤서가 깊이 숨을 들이 마셨다.“그리고, 난 그냥 통보하는 거야. 당신에게 허락 받으려는 게 아니고.”송영식은 화가 나서 혈압이 확 올랐다.“강여름이 당신에게 가라고 부추긴 거지? 이 못된….”“꼭 여름이 때문이 아니고 신아영 때문이기도 해.”윤서가 말을 끊었다.“신
그러더니 송영식은 도망치듯 급히 방에서 나갔다. 그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윤서는 한참 뒤에야 정신을 차렸다.‘부비동염이라고?누굴 바보로 아나?설마 날 보고 흥분해서 코피를 흘린 건 아니겠지?’부끄러워 죽을 뻔했던 윤서는 갑자기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냥 여자 몸을 좀 본 것뿐인데 생전 처음 본 사춘기 애처럼 코피까지 흘릴 일이야? 흐응, 어지간히 왕성하신가 보네.’다시 풍더분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윤서는 고소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옆방 문을 두드렸다.“어이, 송영식 씨. 코피 좀 흘렸다고 죽은 건 아니겠지?”“쾅!”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연한 민트색 셔츠로 갈아입은 송영식이 말간 얼굴로 나왔다. 덕분에 더욱 신화 속 인물이 튀어나온 듯한 느낌이었다.윤서는 그 남자가 너무 야스러운 색을 즐겨입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밝은 색이 송영식의 동안 얼굴에는 꽤나 잘 어울린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런데, 잠깐! 왜 옷을 갈아입었지? 바지까지 다 갈아입었잖아? 머리도 젖었고.’윤서의 시선이 순식간에 묘하게 바뀌었다.“왜 대낮부터 방에서 샤워를 하고 그랬대?”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코피가 여기저기 묻어서 아예 샤워했다, 왜?”“흐응, 난 또 끝내주는 내 바디라인에 도저히 컨트롤이 안 돼서 샤워기 틀어 놓고 솟구치는 열기를 해결했나 했지.”윤서가 피식 웃으며 묘한 시선을 던졌다.송영식은 민망한 나머지 완전히 얼어붙었다. ‘뭐야? 내 샤워실에 CCTV라도 달아 놓은 거야?완전히 본 것처럼 말하잖아?야, 그렇게 있는 대로 말을 해버리면 난 뭐가 되냐고?’“이 사람이 진짜 창피한 줄도 모르고 말이야!”송영식이 으르렁거렸다.“임산부가 무슨 끝내주는 몸매 운운하고 있어? 뻔뻔스럽게.”“흥, 내가 그렇게 섹시하게 보이지 않았으면 왜 갑자기 코피를 흘리고 난리래?”윤서가 비꼬았다.“부비동염이 있다고 말했잖아?”송영식은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진짜?”“진짜지, 그럼!”송영식이 콧방귀를
송영식이 냉랭하게 웃었다.‘이래 놓고 비웃는 게 아니라고? 대놓고 인신공격한 주제에.’“괜히 도발해서 남자로서 나의 존엄을 짓밟고 싶은가 본데 지금 바로 증명해 보일 수도 있어.”송영식이 한 손으로 윤서의 어깨를 잡고 벽까지 밀어붙였다.안 그래도 큰 송영식의 몸이 더 크게 느껴졌다.엄청나게 힘이 좋은 사람은 아니라고 해도 기세로 압박해 오니 역시나 숨도 못 쉴 정도로 긴장되었다. 막 샤워를 마친 다음이라 몸에서는 은은한 비누 향기가 풍기고 있었다.그러나 윤서가 쉽사리 지는 타입은 아니었다. 고개를 바짝 들고 초승달 눈을 하고 웃었다.“5개월 된 임산부에게 증명해 보이겠다고 덤비다가 애가 잘못되면 어쩌시게?”모처럼 만에 용기를 내어 덤비려던 송영식은 순식간에 맥이 쭉 빠지면서 쭈그러들었다. “흥, 당신이 아무리 매섭게 군대도 두고 보라고. 내가 언젠가는 침대에 눕힐 거야.”임윤서가 ‘쯧’하는 소리를 냈다.“애만 낳고 나면 내 실력이라면 1분 안에 당신 코를 납작하게 해줄 수 있어.”“……”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윤서를 노려보았다.거의 윤서를 잡아먹을 듯한 시선이었다.‘내가 임윤서를 침대에 눕히지 못하면 성을 간다.조만간 내 팔 아래 누운 모습을 보게 될 거야.’“비켜!”윤서가 송영식을 밀어내며 진지하게 말했다.“당신에게 부비동염이 있는지 어떤지는 내가 잘 알아. 지금 한창 욕구가 폭발하는 나이라는 건 알겠어. 그러니 다른 상대를 알아봐. 나는 상관없으니까. 그렇게 참다가 큰일 내겠어.”표정을 보고 윤서가 지금 농담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송영식은 매우 속이 불편해졌다.“날 뭐로 보는 거야? 내가 주혁이인 줄 알아?”“친구를 그렇게 매도해서야 쓰겠어?”윤서는 살짝 어이가 없었다.“전에는 백지안을 금이야 옥이야 하느라고 그랬다지만 이제는 굳이 그럴 필요 없잖아?”“그러고 나가서 함부로 휘두르고 다니다가는 집안에서 쫓겨날걸.”“그러면 몰래 해. 들키지만 않으면 되잖아.”윤서가 잠시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비밀은 지켜
“……”윤서는 너무 놀란 나머지 할 말을 잃었다.멍하니 눈앞의 송영식을 바라보았다. 조각 같은 얼굴은 난처한 듯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이건 뭔가… 살짝… 귀엽잖아?’송영식이 ‘흥’하고 콧방귀를 끼며 고상한 척해 보였다.“결혼까지 했는데 나가서 다른 사람이랑 욕구를 해결하다니, 당신이 하라고 해도 내가 못 한다고.”“어….”송영식이 그렇게 숭고한 가치관을 따르고 있을 줄 몰랐던 윤서는 갑자기 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나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 아니고?”다시 의심하는 소리를 들은 송영식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윤서를 노려보았다.“난 진지한 사람이야. 이 결혼에 대해서도 진지하다고. 임윤서, 당신이랑 결혼한 이상 이혼할 생각은 꿈에도 없어.”“뭐라고?”윤서는 멍해졌다.“당신 삼촌이 당선되시고 나면….”“솔직하게 말하지. 결혼을 한 이상 나는 아이에게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 줄 각오가 되어 있어. 우리가 늘 싸우긴 해도 난 당신이 싫지는 않다고. 그래. 내가 전에는 당신에게 여러 가지로 잘못한 건 인정해. 어쨌든 내 몸은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 거라고. 난 이 결혼을 끝까지 지킬 셈이야. 당신도 이혼할 생각 하지 마. 절대 이혼 안 해.”송영식은 두 손을 양쪽으로 펼쳤다. 이제는 아무것도 두려운 것이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윤서는 송영식이 하도 뻔뻔하게 나오니까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결혼 전에 쓴 합의서 잊어버렸어?”“도장 찍었어? 그게 법적인 효력이 있는 합의서인가?”송영식이 싱글거리며 물었다.“한 기업의 대표라는 사람이 말이야, 그렇게 뻔뻔하게 나올 거야?”윤서는 이제 참을 수가 없었다.“이 일에서만큼은 내가 낯짝 좀 두꺼워질까 하고. 당신이 날 뭐 어쩔 건데?”송영식이 근사하게 뻗은 눈썹을 찡긋했다. 화가 나서 발딱거리는 윤서를 보더니 주머니에 손을 꽂고 의기양양하게 1층으로 내려갔다.윤서는 심호흡을 했다. 일단 지금은 송영식과 싸우느라고 에너지를 낭비할 때가 아니었다.우선 윤상원을 찾아가는 일이
“네가 말한 대로 됐으면 좋겠다.”윤서가 걱정하며 말했다.“윤상원 같은 사람을 상대하려면 논리적인 이유 수만 가지 대는 것보다 눈물 한 방울이 더 잘 먹힌다고. 전에는 네가 그래서 신아영에게 진 거고, 아직까지도 우위를 점하지 못하는 거야.”“……”윤서는 마음이 답답했다.여름이 하는 말이 팩트이긴 했지만, 마음에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몇 년 동안 곁에서 힘들게 도운 것보다 눈물 몇 방울이 더 강력하다니….******얼마 지나지 않아서 윤상원이 윤서의 시야에 들어왔다.감옥에서 윤상원이 그리 잘 지내지 못했다는 게 보였다. 바싹 말라서 셔츠가 헐렁헐렁하게 남는 게 보일 정도였다. 그렇게 근사하던 윤상원에게서는 음험한 기운이 느껴졌다.그런 윤상원은 더 이상 윤서의 마음 속에 있던 근사한 남자가 아니었다.윤서는 속으로 탄식하면서도 차를 몰아 다가가 창문을 내렸다.“타. 어디 가서 얘기 좀 해.”윤상원은 차에 타더니 냉랭하게 윤서를 훑어보았다. 전에는 그렇게 자세히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지금 가만히 되돌아보니 이전에 몇 번 만났을 때 윤서는 옛날보다 풍더분한 옷을 입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정말… 임신한 건가?’어디로 봐도 배가 살짝 도드라진 것이 보였다.피부는 여전히 눈처럼 말간 것이 임신했다고 미모가 전혀 죽지 않았다. 얼굴은 살짝 동그래져서 귀여움을 더하고 있었다.이때 윤상원은 매우 심란했다. 심장이 찌릿찌릿 아리기까지 했다.사실 교도소에 갇힌 동안 윤상원의 머리 속에는 오로지 ‘윤서가 임신했어. 윤서가 결혼했어’라는 말만 맴돌았다.‘내 아내가 될 줄 알았던 윤서가 이제는 정말로 완전히 남의 여자가 되어 버렸다.’“사모님, 이제 결혼도 하셨는데 날 찾아온 걸 남편분은 아시는지?”윤상원이 조롱하듯 입을 열었다.“다시는 그쪽 집안을 건드리고 싶은 생각은 없어서 말이지.”비아냥거리는 윤상원의 말투에 윤서는 화가 폭발할 뻔했다.‘이 인간은 교도소까지 다녀왔는데도 저가 뭘 잘못했는지 전혀 깨닫지 못했구먼.’그러나 여름의 당부를
윤서가 소리치며 눈물을 몇 방울 또르르 흘렸다. 눈물을 본 윤상원은 심장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날 마음에 두고 있었다면 왜 널 찾아갔을 때 돌아오지 않았어? 우리가 다시 사귀었더라면 지금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텐데.”윤상원은 찢어지는 심장을 부여안고 이를 악물었다. 지나간 사랑에 대해 윤상원이 어찌 섭섭하지 않겠는가?신아영과 사귀기는 했지만, 신아영에게는 윤서에게 느끼는 그런 감정이 생기지 않았다.그저 신아영인 자신에게 잘해준 것이 고맙고 윤서와는 재결합할 가능성이 보이지 않자 사귀기로 했던 것뿐이었다.“아영이랑 오빠가 그렇게 가깝게 지내는 게 너무 꼴 보기 싫었어. 나랑 지내는 시간보다 아영이랑 지내는 시간이 더 많으니까 날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았다고.”윤서가 고개를 숙이고 솔직하게 말했다.“걔가 오빠 친동생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아니잖아. 난 사랑은 두 사람이 하는 거라고 생각해. 나중에 서울에 가서 나는 오빠를 잊어버리고 새로 시작하려고 했어. 그런데… 백윤택에게 걸려들고 말았지.”윤상원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새록새록 기억이 났다. 4년 전 윤서가 백윤택에게 강간당했다는 소문이 퍼졌었다. 윤서가 병원으로 실려 간 사진이 있는데도 백윤택은 나와서 윤서가 자기를 꼬드겼다고 주장했었다.“그때 백윤택이 날 따라다니긴 했어. 하지만 그런 인간쓰레기를 내가 허락할 리가 없잖아? 계속해서 거절하자 그 인간은 성질이 나서 사람들을 데리고 우리 집에 쳐들어온 거야. 날 마구 때리고 옷을 찢…”“윤서야…”윤상원이 주먹을 꽉 쥐었다.윤서가 말을 이었다.“다행히도 날 구하러 와준 사람이 있어서 백윤택은 성공하지 못했어. 하지만 난 너무 다쳐서 병원으로 실려 갔지. 경찰에 신고했지만 백윤택은 인맥과 돈을 동원해서 나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더라고. 그때 나는 아무런 힘이 없어서 분명 피해자인데도 온갖 비난을 받아야 했고 결국은 해외로 나가버렸지.”윤서가 한숨을 쉬었다.“막 나가서도 잘 지내진 못했어. 늘 오빠 생각을 했어. 혹시나 안부 톡이나 전화가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