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네티즌들은 원지균의 과거를 팠다. 원연수의 생부지만 어려서 도박과 술에 빠져 살던 인간이라는 사살이 알려졌다. 심지어 20여 년 전에 이웃에 살았던 사람은 원지균이 일도 안 하고 원연수 모녀를 하루가 멀다 하고 심하게 구타했던 사실을 잊지 않았다.나중에 원연수의 엄마는 참지 못하고 이혼한 뒤 연수를 데리고 이사를 갔다고 했다.원지균은 다른 사람과 결혼해 아이를 하나 낳았는데 세 식구가 죄 게을러서 원연수가 배우가 되기 전에는 온 가족이 지지리 궁상으로 살다가 원연수가 배우가 되더니 갑자기 집도 사고 아들에게는 회사를 차려주기까지 했다. 그러나 회사 사람 증언으로 그 아들이라는 자는 능력이 없어서 계속 사업은 망해가는 중이고 원연수를 등쳐먹을 생각뿐이었다고 한다.네티즌은 흥분했다.-원연수도 참 팔자가 저게 뭐냐? 저런 애비가 있다니 너무 안쓰러워.-와, 원지균이 재혼한 부인도 하루 종일 도박 밖에 안 한대. 셋이서 원연수가 벌어온 돈을 펑펑 쓰다가 돈이 떨어지면 또 원연수를 등쳐 먹으러 갔다더라.-아마 원연수도 돈을 주다 주다 못해서 못 준다고 해서 다투다가 원지균이 칼로 찌른 거지. 전처도 찌른 적이 있대. 저게 인간이냐?-원지균은 아들도 완전 쓰레기 같은 놈임. 허구한 날 스포츠카 끌고 나가서 잘난 척이나 하는데, 집이며 차며 죄다 원연수 돈으로 산 거였음. 원연수가 이제 돈을 못 주겠다고 하자 원지균이 애비도 부양하지 않는 불효막심한 인간이고 애비를 학대한다고 언론에 흘리겠다고 해서 원연수는 어쩔 수 없었던 거.-안 됐다. 원연수가 지금은 좀 회복이 됐나?-저런 인간은 평생 감옥에 처넣고 못 나오게 해야 함. 저런 게 무슨 애비 자격이 있어?“……”병원 복도에서 이주혁은 가운을 입고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원연수의 매니저인 조현희가 뛰어왔다. 이주혁을 보더니 깜짝 놀랐다.“대, 대표님….”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다. 왜 이주혁이 원연수의 집에 갔는지, 왜 원연수를 이주혁의 병원으로 데려 왔는지 등등….그나마 이주혁이 얽혀 있다는
병실.원연수가 마침내 깨어났다.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조현희와 이나정이었다. 조현희는 바쁜지 연수를 등지고 계속 통화 중이었다.“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지금 원연수 씨 상처가 너무 깊어서 다음 달까지는 움직일 수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혹시 시간이 급하시면 다른 배우로 교체하시거나 원연수 씨가 회복되면….”“깼구나. 진짜 얼마나 놀랐는지 죽는 줄 알았네.”이나정이 먼저 발견하고 눈을 반짝였다.조현희도 돌아보더니 몇 마디 더 하고 급히 전화를 끊었다. 원연수를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몸은 좀 어떠니? 이거 참 골치 아프게 되었어.”“죄송합니다, 팀장님.”원연수가 가느다란 소리로 사과했다.“영화 촬영은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아요. 이달에 광고 3개랑 이벤트 3곳은 참석할게요.”“광고랑 이벤트 쪽에서 미친 듯이 전화가 온다. 하나는 급하다고 해서 취소했는데 위약금이 장난이 아니야. 하나는 그래도 기다려 주겠다네.”조현희가 미간을 문질렀다.“구 감독님에게 진짜 너무 죄송스럽다, 얘. 내내 널 그렇게 잘 봐주셔서 이제 막 주연으로 발탁한 참인데.”원연수는 두 눈을 감았다. 를 찍을 수 없는 것은 정말 너무 안타깝다. 그러나 후회하지는 않는다. 어제 안 그래도 기분이 안 좋은데 원지균이 덤벼들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애진작부터 원지균을 해치우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하지만 담당의에게 물어보니까 상처가 그렇게 심한 거 아니래. 1달 정도 지나면 영화 촬영 정도는 할 수 있다네. 감독님이 일단 다른 씬을 먼저 찍으면서 기다려 주신대. 하지만 촬영장으로 돌아가면 밤샘 촬영을 해서라도 2달 안에 촬영은 끝내야 해. 그런데 와이어 씬이 많은데 너 몸이….”“괜찮아요”원연수가 끄덕였다.조현희는 기뻐하기는커녕 미간을 찌푸렸다.“상처가 간신히 촬영할 수준으로 아문다고 해도 와이어 달고 올라갔다가는 다시….”“상관없어요.”원연수가 말했다.“감독님께서 기다려 주시는 것만 해도 이미 절 충분히 존중해 주시는 거잖아요. 엄청난 영광이라고요
“일단 잘 쉬어. 나정 씨 여기 남겨 놓을게. 난 네 일 처리 해야 해서 가봐야겠다. 밖이 지금 기자들로 꽉 찼어.”조현희가 말했다.“아참, 너희 아버지 일은 어떻게 처리할까?”“여론 분위기는 어떤데요?”원연수가 물었다.“다행히도 사람들이 원지균 일가 세 명의 상황을 다 조사한 데다 예전 주변 사람들의 증언이 적잖이 나와서 그 집 식구들 세 명이 흡혈귀나 다름없다는 걸 알아서 너에게 동정적이야.”원연수는 잠깐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원지균이 사는 단지와 아들의 회사를 폭로하고, 변호사를 찾아가서 제가 이전에 원지균에게 뜯겼던 돈을 되찾아 주세요. 그리고 원지균을 고소하죠. 사람이 다쳤는데 감옥 보내야죠.”조현희가 놀란 눈으로 연수를 쳐다봤다.“왜요?”원연수가 물었다.“아, 아무것도 아니야.”조현희가 심란한 듯 답했다.“지금은 네가 많이 변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전에는 마음에 약해서 그 희박한 부녀의 정에 끌려다니는 것 같았거든. 그때 너무 약해 보였어.”“이제는 안 그럴 거예요.”“나한테 못되게 하는 인간은 나에게서 뭔가를 받을 자격이 없어요.”“그래.”조현희가 떠났다.이나정이 연수에게 죽을 먹였다.얼마 뒤 다시 문이 열렸다.이번에는 이주혁이었다.하얀 가운을 입은 이주혁은 안경을 쓰고 있었다. 살짝 근실 일할 때는 보통 안경을 썼다. 안경은 이주혁의 미모를 가리지 않았다. 오히려 우아함과 품격을 더해주는 느낌이었다.이나정은 백의에 안경을 쓴 이주혁이 엄청 근사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 눈앞에서 보고 있자니 도저히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원연수의 가벼운 헛기침 소리를 듣고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민망했다.다만 이주혁은 그렇게 쓰레기로 유명한데 겉모습은 이렇게 맑고 위풍당당한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역시 남자는 겉모습만 봐서는 안 돼.’“잠깐 자리 좀 비워주죠.”이주혁이 이나정에게 대놓고 말했다.이나정은 곤란해했다.“대표님, 연수 씨가 다쳤으니까 제발….”“내가 무슨
원연수가 가볍게 웃었다.이주혁은 원연수가 즐거워서 웃는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왜 웃지?”“전에 출연했던 작품에 나오던 파워 카리스마의 실장님 같은 말씀을 하셔서요. 모모 씨, 당신에게 흥미가 생겼소. 모모 씨, 당신이 마음에 들어.”핏기가 많이 가신 입술에 살짝 웃음기가 돌았다.“하지만 드라마의 실장님은 결국 결혼에 골인했는데 대표님은 불륜을 하고 싶으신 거잖아요. 그것도 이렇게 대놓고. 뻔뻔하다고 해야 할까, 얼굴이 두껍다고 해야 할까?”이주혁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원연수, 난 기껏 도와준 사람에게 이렇게 모욕을 주나? 대체 이게 당신에게 몇 번째 당하는 모욕인지 셀 수도 없군.”이렇게 주혁에게 모욕을 주어 주춤거리고 뒤로 물러서게 한 사람은 지금까지 없었다.“모욕을 준 게 아닌데요. 그냥 팩트를 말한 것뿐이에요.”원연수가 어깨를 으쓱했다.“내가 팩트를 말하는 것을 모욕으로 받아들이신다면 저도 어쩔 수가 없네요.”“내가 정말 널 어쩌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나?”원연수의 손목을 확 잡아챘다. 그러나 움직이자마자 연수의 입에서 ‘앗!’하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고통에 일그러진 얼굴을 보니 움츠러들어서 이주혁은 저도 모르게 손을 놓아버렸다.한참을 숨까지 참으며 고통이 가시길 기다렸다가 원연수가 입을 열었다.“무슨 주치의가 이 모양이지? 담당 의사 바꿔주실 수 있나요?”“일부러 나에게 치료를 받고 싶어서 줄 선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이주혁이 콧방귀를 뀌었다.“어쨌든 이번에 나한테 빚진 거야.”연수가 귓가의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사실 대표님 도움은 굳이 필요 없었는데 대표님이 끼어든 거잖아요. 대표님이 없었어도 그냥 경찰에 전화하고 구급차가 왔으면 저는 치료도 받았을 거거든요. 오히려 대표님 때문에 팀장님이 경찰에 일부러 찾아가서 대표님이 우리 집에 찾아왔었다는 말 나지 않게 단속해야 했다고요.”이주혁은 정말 화가 났다. 병원에 데려와서 직접 손을 써서 구해줬더니 사족 취급을 받다니….“정말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
여름은 미간을 찌푸리고는 가져온 선물을 침대 머리맡에 내려놓았다.“이주혁은 친구로서는 좋은 사람인지 몰라도 남편이나 남친으로는 아닌 것 같아. 어느 한 여자에게 정착하는 타입이 아니야.”윤서가 덧붙였다.“하지만 시아랑은 결혼한다잖아?”“넌… 시아가 이주혁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니?”여름이 눈썹을 까딱해 보였다.“시아가 이주혁을 꽉 잡고 있다면 이주혁이 절대 시아랑 결혼 안 할걸.”“걱정하지 마. 난 이주혁이랑 사귀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으니까.”원연수가 희미하게 웃었다.“그냥 잠깐 나에게 호기심이 생긴 것뿐이야. 손에 넣고 나면 금방 흥미를 잃을걸. 그리고 난 애초에 이주혁을 좋아하지도 않아.”“연수는 이성적인 친구니까 난 믿어. 전에 밥 먹을 때 이주혁이 왜 그렇게 연수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가 싶었는데 이제야 왜 그런지 알겠네. 널 손에 넣지 못해서 기분이 나빴던 거구나?”윤서가 씩 웃었다.연수는 어이없다는 듯 눈알을 굴리더니 화제를 바꿨다.“너희들이 날 보러 올 줄 몰랐다. 사실은…”“우린 친구잖아.”윤서가 말을 끊었다.“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처음 널 봤을 때, 친근한 느낌이 드는 거야. 응, 마치 원래 알았던 사람인 것처럼. 이주혁에 너에 대해서 그렇게 안 좋은 말을 했지만, 그러면 뭐 해? 친구라는 건 자기가 만나는 거니까 그 사람이 사귈 만한 사람인지 아닌지는 내가 제일 잘 아는 거지.”“정말 고맙다.”원연수의 눈이 한결 부드러워졌다.지금 가장 친한 사람을 꼽으라면 연수는 망설이지 않고 눈앞의 두 사람을 꼽을 것 같았다.물론 예전의 친구이기도 했고.“도와줘야 할 일 있으면 언제든 말해.”여름도 덧붙였다.“혹시 이번 건으로 고소하게 되면 하준 씨 친구 중에 실력 굉장한 변호사가 있다니까 소개해줄게. 언제든 연락만 해.”“그래.원연수가 입을 열었다.“사실 너희들에게는 말해도 괜찮을 것 같아. 이 상처는 사실은 내가 일부러 낸 거야. 원지균이 매달 나에게서 돈을 뜯어내려고 협박을 하는데 내가 이제는 질려
“내가 구한 환자라서요. 저는 한 번 치료한 환자는 끝까지 책임지는 편입니다.”이주혁이 평온한 눈으로 답했다.윤서가 비꼬았다.“우리 수연이의 병세만 책임져 주시면 고맙겠네요.”“두 분도 원연수를 안 지 얼마 안 되면서 간섭 작작 하시죠.”이주혁이 아무렇지도 않은 눈으로 둘을 쳐다봤다.윤서는 화를 참는 성격이 아니었다.“안 지는 얼마 안 됐지만 연수는 우리 친구라고요. 말이야 바른 말이지, 시아랑 결혼할 거면서 연수는 건드리지 말아요. 연수는 착한 애라고요. 이주혁 씨가 전에 데리고 놀던 애들하고는 차원이 달라요.”“연수는 그런 애가 아니에요.”여름도 나섰다.“연수는 주혁 씨의 배경 같은 걸 노리는 애가 아닐 거예요. 놀고 싶다면 주혁 씨가 가진 것을 노리는 사람이랑 놀아요. 그리고 시아를 잘못 건드리면 안 돼요. 걔가 알았다가는 연수를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시아는 내가 충분히 컨트롤 할 수 있습니다.”이주혁이 아무렇지도 않게 답했다.윤서가 비웃었다.“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니까 시아를 전혀 모르시는구나. 시아가 얼마나 무서운 애인데요. 처음에는 티도 안 날 거예요. 참을 줄 아는 애니까. 하지만 일단 방심했다가는 완전히 뼈도 추리지 못하게 다 씹어 삼킬 걸요.”여름도 덧붙였다.“너무 심하게 말한다 생각하지 마세요. 그래도 주혁 씨가 변덕스러워서 그렇지 쓰레기라고 생각하지는 않으니까요.”“아니오. 난 내내 쓰레기 같은 놈이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쓰레기인지 아닌지는 두 분하고는 상관이 없죠.”그러더니 이주혁은 성큼성큼 걸어 자리를 떠 버렸다.윤서가 이주혁의 뒷모습을 보면서 발을 굴렀다.“아오, 짜증나! 난 송영식이 세상에서 제일 짜증나는 인간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까 이주혁이 더 짜증나네.”여름이 미간을 찌푸렸다.“어쨌든 이주혁이 비열한 수단을 쓴다면 우리는 연수를 도와줘야 해.”“당연하지. 연수를 불륜 상대로 만들 수는 없어. 이주혁은 상관 없는지 몰라도 연수는 배우인데 그 사실이 알려졌다가는 평생 끝장나는 거라고.
“무슨 생각해?”이주혁이 원연수를 보더니 동공에 웃음기가 스치고 지나갔다.“생각은 무슨 생각을 하겠어요? 빨리해주세요.”원연수가 쌩그라니 얼굴을 돌렸다.“이런 일은 빨리하는 게 아니야.”이주혁이 말했다.“……”옆에 있던 이나정도 얼굴이 온통 새빨갰다. 아무리 순수하게 생각하려고 해도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다 보니 순수해질 수가 없었다.결국 원연수가 폭발했다.“병원에 간호사 없나요? 링거 꽂는 일을 왜 닥터가 직접 하죠?”“내가 간호사들보다 훨씬 덜 아프게 해줄 수 있거든.”이주혁의 입술이 섹시한 미소를 만들어 냈다. 숨 막힐 정도로 매혹적이었다.그러나 원연수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상관없어요. 아픈 건 무섭지 않거든요.”“하지만 그러면 내가 마음이 아프거든.”이주혁이 싱글싱글 웃었다.원연수는 속으로 싸늘하게 웃었다. 익숙했다. 이주혁은 원하는 상대가 생기면 온갖 달콤한 말로 유혹하고 질려버린 뒤에는 누구보다도 빨리 얼굴을 바꾸는 사람이었다.예전의 백소영도 그랬다. 그때는 아직 학생이었다. 이주혁의 미모와 따스함에 아무리 자기 마음을 단단히 걸어 잠근 소영이었지만 주혁에게 마음이 떨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뒤에 이주혁이 얼마나 쌀쌀맞게 얼굴을 바꾸었던지 소영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똑같은 말을 대체 얼마나 많이 하셨을까? 소영이도 들어봤겠죠?”원연수가 문득 물었다.이주혁의 웃음기가 그대로 굳어버리더니 고개를 숙였다. 원연수가 말을 이었다.“경찰에서 소영이는 무죄라고 발표했대요. 소영이는 모함을 당한 거예요. 그때 법정에서 다투던 사람은 대표님이 변호사 중에서 가자 실력 좋은 사람이었겠죠. 직접 무고한 사람을 감옥에 집어넣은 기분이 어때요?”이주혁의 얼굴의 선이 하나하나 굳어졌다. 한참 만에야 저음이 흘러나왔다.“내가 소영이에게 빚을 졌어.”“빚이라고요?”원연수가 비웃었다.“안타깝네요. 소영이는 부모님도 돌아가시고, 본인도 저세상으로 가고. 이제는 대표님의 ‘빚을 졌다’는 한 마디 말고는 아무것도 돌이킬
“나 보고 싶었어?”하준이 가느다란 여름의 허리를 안았다. 눈빛이 사뭇 부드러웠다.“요즘 일이 많아서 퇴근 시간이라는 게 없네.”“매일 보니까 딱히 보고 싶지는 않았는데… 아얏!”여름이 말하다가 허리를 꼬집혔다.여름이 하준을 노려보았다.“뭐야!”“내가 안 보고 싶다고 말하다니.”하준은 일부러 화난 듯한 말투로 말했다.“밤이면 볼 텐데 보고 싶기는, 뭘.”여름이 입을 비죽거렸다. 지금 여름은 거의 하준의 본가로 이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쨌든 워낙 넓어서 여름과 아이들은 한 동을 쓰고 있어서 이혼도 안 한 상대로 종일 어르신들을 상대하는 민망함이 없었다.“하지만 난 매일 당신을 볼 수 있어도 당신이 보고 싶은데.”그렇게 말하면서 하준이 여름의 턱을 들어 키스했다.여름은 얼른 몸을 뺐다.“아니, 나 할 얘기 있어서 왔단 말이야.”“응?”“오늘 병원에 연수 병문안을 갔었거든. 사고를 당했어.”하준은 잠깐 일시 정지 상태가 되었다. 한참을 생각한 끝에 원연수가 누군지 겨우 떠올릴 수 있었다.“언제 그렇게 사이가 좋아졌어?”“지난번에 밥 먹고 나서는 그렇게 자주 연락을 하지는 못했는데 오늘 윤서가 끌고 가서 한참 얘기했지. 난 연수가 꽤 마음에 들거든.”여름이 솔직하게 말했다.“나 서울 와서 얼마 안 됐을 때 친구도 없었을 때 소영이가 있어 주었잖아….”여름의 입에서 백소영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하준의 몸이 순간적으로 긴장했다.여름은 하준을 흘깃 보았지만 딱히 그에 대해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연수는 정말 괜찮은 애야. 연예계에 있으면서도 자기 자신을 잃지 않았어. 난… 걔가 아주 오래된 친구 같은 느낌이야.”“친구는 많으면 좋지.”하준이 맞장구를 쳤다.“그런데…”여름이 잠시 망설였다.“주혁 씨가 좀 이상해. 보니까 주혁 씨가 연수 담당 의사더라고. 원래 암 병동 담당이었잖아? 연수는 자창인데 아무리 심각하대도 주혁 씨가 담당해야 하는 건 아니지 않아?”하준이 눈썹을 치켜세웠다.“주혁이가 연수 씨에게 마음이 있는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