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생각해?”이주혁이 원연수를 보더니 동공에 웃음기가 스치고 지나갔다.“생각은 무슨 생각을 하겠어요? 빨리해주세요.”원연수가 쌩그라니 얼굴을 돌렸다.“이런 일은 빨리하는 게 아니야.”이주혁이 말했다.“……”옆에 있던 이나정도 얼굴이 온통 새빨갰다. 아무리 순수하게 생각하려고 해도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다 보니 순수해질 수가 없었다.결국 원연수가 폭발했다.“병원에 간호사 없나요? 링거 꽂는 일을 왜 닥터가 직접 하죠?”“내가 간호사들보다 훨씬 덜 아프게 해줄 수 있거든.”이주혁의 입술이 섹시한 미소를 만들어 냈다. 숨 막힐 정도로 매혹적이었다.그러나 원연수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상관없어요. 아픈 건 무섭지 않거든요.”“하지만 그러면 내가 마음이 아프거든.”이주혁이 싱글싱글 웃었다.원연수는 속으로 싸늘하게 웃었다. 익숙했다. 이주혁은 원하는 상대가 생기면 온갖 달콤한 말로 유혹하고 질려버린 뒤에는 누구보다도 빨리 얼굴을 바꾸는 사람이었다.예전의 백소영도 그랬다. 그때는 아직 학생이었다. 이주혁의 미모와 따스함에 아무리 자기 마음을 단단히 걸어 잠근 소영이었지만 주혁에게 마음이 떨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뒤에 이주혁이 얼마나 쌀쌀맞게 얼굴을 바꾸었던지 소영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똑같은 말을 대체 얼마나 많이 하셨을까? 소영이도 들어봤겠죠?”원연수가 문득 물었다.이주혁의 웃음기가 그대로 굳어버리더니 고개를 숙였다. 원연수가 말을 이었다.“경찰에서 소영이는 무죄라고 발표했대요. 소영이는 모함을 당한 거예요. 그때 법정에서 다투던 사람은 대표님이 변호사 중에서 가자 실력 좋은 사람이었겠죠. 직접 무고한 사람을 감옥에 집어넣은 기분이 어때요?”이주혁의 얼굴의 선이 하나하나 굳어졌다. 한참 만에야 저음이 흘러나왔다.“내가 소영이에게 빚을 졌어.”“빚이라고요?”원연수가 비웃었다.“안타깝네요. 소영이는 부모님도 돌아가시고, 본인도 저세상으로 가고. 이제는 대표님의 ‘빚을 졌다’는 한 마디 말고는 아무것도 돌이킬
“나 보고 싶었어?”하준이 가느다란 여름의 허리를 안았다. 눈빛이 사뭇 부드러웠다.“요즘 일이 많아서 퇴근 시간이라는 게 없네.”“매일 보니까 딱히 보고 싶지는 않았는데… 아얏!”여름이 말하다가 허리를 꼬집혔다.여름이 하준을 노려보았다.“뭐야!”“내가 안 보고 싶다고 말하다니.”하준은 일부러 화난 듯한 말투로 말했다.“밤이면 볼 텐데 보고 싶기는, 뭘.”여름이 입을 비죽거렸다. 지금 여름은 거의 하준의 본가로 이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쨌든 워낙 넓어서 여름과 아이들은 한 동을 쓰고 있어서 이혼도 안 한 상대로 종일 어르신들을 상대하는 민망함이 없었다.“하지만 난 매일 당신을 볼 수 있어도 당신이 보고 싶은데.”그렇게 말하면서 하준이 여름의 턱을 들어 키스했다.여름은 얼른 몸을 뺐다.“아니, 나 할 얘기 있어서 왔단 말이야.”“응?”“오늘 병원에 연수 병문안을 갔었거든. 사고를 당했어.”하준은 잠깐 일시 정지 상태가 되었다. 한참을 생각한 끝에 원연수가 누군지 겨우 떠올릴 수 있었다.“언제 그렇게 사이가 좋아졌어?”“지난번에 밥 먹고 나서는 그렇게 자주 연락을 하지는 못했는데 오늘 윤서가 끌고 가서 한참 얘기했지. 난 연수가 꽤 마음에 들거든.”여름이 솔직하게 말했다.“나 서울 와서 얼마 안 됐을 때 친구도 없었을 때 소영이가 있어 주었잖아….”여름의 입에서 백소영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하준의 몸이 순간적으로 긴장했다.여름은 하준을 흘깃 보았지만 딱히 그에 대해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연수는 정말 괜찮은 애야. 연예계에 있으면서도 자기 자신을 잃지 않았어. 난… 걔가 아주 오래된 친구 같은 느낌이야.”“친구는 많으면 좋지.”하준이 맞장구를 쳤다.“그런데…”여름이 잠시 망설였다.“주혁 씨가 좀 이상해. 보니까 주혁 씨가 연수 담당 의사더라고. 원래 암 병동 담당이었잖아? 연수는 자창인데 아무리 심각하대도 주혁 씨가 담당해야 하는 건 아니지 않아?”하준이 눈썹을 치켜세웠다.“주혁이가 연수 씨에게 마음이 있는
“자기랑 말하기 싫어.”여름이 화를 냈다.“내가 보기에는 당신이 당신 친구를 모르는 거야. 가서 잘 얘기해 봐. 곧 결혼할 거니까 원하는 게 있으면 시아랑 해결해야지 괜히 연수 건드리지 말라고.”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홱 고개를 돌리고 가버렸다.하준은 뒷골이 당겼다.‘그야말로 여름날 날씨 같네. 종잡을 수가 없어.’하준은 할 수 없이 쫓아갔다.“알겠어. 자기야. 화내지 마. 내가 실수했어. 조금 있다가 주혁이한테 가서 어떤 상황인지 한 번 알아볼게, 응? 그리고 난 싸잡아서 욕하는데 넣지 말아줘. 나에게는 당신밖에 없다고.”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당신은 당신 나름의 생각하는 방식이 있겠지만, 어쨌든 연수는 그런 애가 아니라는데 나는 다 걸겠어. 그리고 현명한 사람이라면 그런 짓 하지 않지. 지금 한창 뜨는 중인데 연수가 누군가의 바람 상대가 됐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배우 일은 망하는 거라고. 더구나 시아 같은 애는 건드리면 안 돼. 솔직히 주혁 씨가 너무 이기적인 것 같아. 자기 욕구에만 집중하다가는 한 사람의 미래를 날려 버릴 수 있는데, 소영이에게 그런 짓을 한 걸로 충분하지 않나?”“…그래. 자기 말이 맞네.”하준이 얌전히 맞장구를 쳤다. 괜히 여름의 기분을 거르게 될까 봐 두려웠다.“난 간다. 가서 주혁 씨를 완전히 설득한 다음에 와.”그러더니 여름은 백을 들고 나가 버렸다.하준은 여름의 뒷모습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여름의 말이 사실이라면 확실히 주혁이 잘못된 길을 걷는 것 같았다.******하던 일을 마치고 하준은 차를 몰아 병원으로 향했다.“이 시간에 당직이야?”진찰실에 들어선 하준은 가운을 입은 주혁을 보고 놀라서 물었다.이주혁은 다른 의사들과 달랐다. 주민그룹의 가장 젊은 권력자이면서 실력을 인정받은 의사로 환자들이 전 세계에서 돈을 싸 짊어지고 와서 치료를 받기 원하는 부류였다. 그래서 지금은 수술이 잡히거나 긴급한 환자가 있지 않은 한 당직은 기본적으로 하지 않았다.“여름 씨가 뭐라고 했어?”이주
“알아.”이주혁이 손에 든 볼펜을 빙글빙글 돌렸다. 하준이 한 얘기는 자신도 다 아는 얘기였다. 이미 몇 번이나 원연수에게 대차게 까이기도 했다.게다가 백소영을 생각하면 원연수와는 가까이 지내지 않는 것이 좋다고 머리로는 생각했다.그러나 사람이란 때로는 정말 알 수가 없다.심지어 오늘 아침에 왜 원연수네 집에 갔는지도 이해가 안 됐다.원연수가 원지균을 그 지경으로 만들어 놓는 것을 두 눈으로 봤는데도 연수가 표리부동하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오히려 묘하게 즐기는 기분까지 들었다.주혁은 질질 짜는 연약한 사람은 싫었다. 원연수가 자기 등을 찌를 때는 자기가 뭔가에 찔리는 기분이 들었다.분명 속이 계략으로 찬 사람인 게 분명했고, 주혁은 그렇게 속에 꿍꿍이가 가득한 사람은 싫어했다.그러나 이상하게도 연수는 예외였다.처음 키스했을 때는 연수의 눈에 반했다. 그리고 나중에는 연수의 성격에 끌렸다.“사랑에 빠졌다고 말하지는 마라.”이주혁이 내내 아무 말이 없자 하준이 묘한 눈빛으로 물었다.“사랑?”이주혁은 움찔했다. 빙글빙글 돌리던 볼펜이 책상에 떨어졌다. 주혁이 웃었다.“침대에서 마음이 동했다면 모를까, 침대도 아닌데….”그때 뭔가가 뇌리를 탁 치고 지나갔다. 아주 오래전 소영이와 사귀던 때의 기억이었다.“넌 몰라.”이주혁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아무래도 난 원연수를 꼭 손에 넣어야 할 것 같아.”“넌 한 번도 누굴 손에 넣어야 한다는 마음이 든 적이 없잖아. 네 사전에 ‘억지로’는 없으니까.”하준이 일어서서 이주혁의 어깨를 두드렸다.“시아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면 굳이 결혼할 필요 없잖아. 결혼을 한다면 그렇게 보기만 해도 짜증 나는 사람이랑 매일 어떻게 보고 살아? 원연수를 얻고 싶다면 일단 결혼부터 취소해. 이대로 가서 대시하다가는 멀쩡한 사람 하나 망친다.”“일이 여기까지 진행되었는데 우리 부모님이 시아랑 결혼을 취소하게 둘 것 같냐? 청첩장까지 다 만들었는데.”이주혁이 덤덤히 말했다.“그러면 연수 씨에게서 떨어져.
“소영이 얘기는 꺼내지 마.”여름이 화를 냈다.“소영이도 그냥 데리고 논 거잖아. 다 놀고 나서는 얼굴 싹 바꾸고 돌아섰으면서.”“그런 거 아니야.”하준이 중얼거렸다.“걔가 소영이랑 사귈 때는 얼마나 인내심이 있었다고. 주혁이는 여자에게 인내심을 발휘하는 애가 아니야. 소영이만큼은 끝까지 기다렸다니까. 나중에 헤어지고 나서는 소영이가 지안이를 괴롭혔던 것 말고 둘 사이에 뭔가 다른 일이 있었던 것 같아.”“소영이가 무슨 백지안을 괴롭혀? 백지안이 일부러 불쌍한 척하고 그랬던 거지. 마치 남들 보기에는 소영이가 백지안을 엄청 괴롭힌 것처럼 보이게.”여름이 우울하게 말했다.“그때는 우리가 몰랐잖아.”하준이 얼른 여름의 손을 잡았다.“우리 옛날얘기는 그만 하자. 자기야. 저녁 먹었어? 난 배고픈데.”“배고프면 알아서 가서 찾아 먹어. 내가 주방 아줌마도 아니고.”여름은 하준의 손을 뿌리쳤다.“백지안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내가 지금 바빠서 가만둔다고 이러고 끝날 거라고 생각하지 마. 두고두고 복수할 거야.”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은 쳐다도 보지 않고 가버렸다.여울과 하늘이 한껏 궁금한 얼굴로 다가왔다.“왜 엄마를 화나게 했어요?”하준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동성.해외에서 온 비행기가 동성의 공항에 착륙했다.차민우가 밖에서 한참을 기다리고 나서야 차진욱이 강신희를 안고 함께 걸어 나왔다. 두 사람은 결혼한 지 수십 년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애인 사이 같았다. 특히 차진욱은 한시라도 강신희와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강여경은 뒤에서 따라왔다. 강여경 뒤로는 경호원과 직원이 짐을 가지고 줄줄이 따라 나왔다.“어서 오세요!”차민우가 걸어갔다.“민우야.”강여경이 환하게 웃었다.“왜 우리랑 같이 안 오고 혼자서 먼저 왔어? 엄마랑 같이 있는 것만 아니면 나도 얼마나 돌아오고 싶었다고.”“먼저 와서 외삼촌이랑 외숙모 꺼내드리고 하느라고요.”차민우가 웃으며 강신희를 바라보았다.“엄마, 삼촌 뵈러 가요. 원래는 공항에
차진욱의 얼굴이 그제야 살짝 좋아지더니 강신희의 귀에 속삭였다.“이따가 집에 가서 사랑한다고 해줘.”“……”‘다 큰 남자가 어쩜 저렇게 유치할까?’차민우는 아무것도 못 본 체했다. 어쨌든 부모님의 꽁냥꽁냥에는 이미 익숙해졌다. 부모님에게 차민우는 부록이나 마찬가지였다.강여경은 머릿속이 웅웅거려서 그런 데 쓸 신경이 없었다. 강신희가 동성에 도착하자마자 기억이 회복될 조짐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예전에 기억을 전혀 회복하지 못했던 것은 아마도 익숙한 곳에 가지 못해서였던 모양이다. 익숙한 곳에서 한동안 살다 보면 기억이 돌아오고 그러면 자기 딸 이름이 강여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지도 모른다.강신희의 기억이 돌아오는 것을 막아야 했다.‘하지만 어떻게 해?’******집에 도착하니 강태환과 이정희가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차가 멈추자 먼저 카리스마가 넘치는 차민우가 내리고 이어서 누군가의 손을 잡아서 내려주었는데 여자는 관리를 잘 해서 서른 정도로 보였다.강태환은 그 여자를 잠깐 보더니 눈시울을 붉혔다. “신희야….”이름을 부르면서 튀어 나가는데 차민우의 우악스러운 손에 잡혔다.“아빠, 이쪽이 외삼촌하고 외숙모예요.”괜히 아빠의 질투심을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해 차민우가 미리 한 김을 뺐다.“딱 보니 알겠구나.”차진욱이 담담히 말했다. 어쨌거나 모르는 남자가 강신희에게 손 대는 것이 싫었을 뿐이었다.“오빠시구나.”강신희가 강태환을 보며 말했다. 어떤 사람은 딱 보는 순간 기억 속에 익숙한 느낌이 있기 마련이다.“오랜만이에요. 여전히 곱네.”이정희가 감격한 듯 말했다.“나랑 오빠는 팍삭 늙어서 회갑이래도 사람들이 믿을 판인데….”“삼촌이랑 외숙모 감옥에서 고생하셨죠?”강여경이 얼른 끼어들었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강신희에게 강태환 내외가 이 꼴이 된 것이 강여름 탓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강태환은 ‘삼촌’ 소리를 듣고 움찔했으나 이정희가 눈치 빠르게 말을 받았다.“아유, 그런 얘기는 뭐 하려고 하니? 일단 들어가자.”“수십 년
“기억을 찾겠다고?”이정희가 주춤하더니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 그래야지.”******점심 식사 후.강태환 부부가 강여경을 서재로 불렀다. 이정희가 목소리를 낮추어 흥분한 듯 입을 열었다.“애, 뭐야? 강신희가 완전히 기억을 잃었다더니? 만약에 강신희가 기억을 찾게 되면 우린 끝장이라고. 저 차진욱인가 뭔가 하는 사람은 함부로 건드리면 큰일 나게 생겼던데.”“이게 다 너 때문이다. 괜히 거짓말은 해가지고.”강태환은 강여경 때문에 화가 나서 죽을 지경이었다.“네가 강여름인 척하니 정말 죽고 싶어 환장했냐?”“흥, 내가 아니었으면 엄마 아빠는 아직도 감옥에 서 썩고 있을걸.”강여경이 쌀쌀맞게 답했다.“그리고, 언제든 강여름이 고모한테 딸로 인정을 받고 나면 나한테 복수하려고 들 텐데 그러면 아주 날 잡아먹을걸.”“이 양반이 증말, 최하준이 우리 애를 어디 산골짜기에다가 처박으려고 했던 거 기억도 안 나요?”이정희가 눈물이 그렁그렁해서는 강태환에게 일깨웠다.그런 말을 들으니 강태환은 갑자기 할 말이 없어졌다. 감옥에 갇힌 몇 년 동안 그래도 마음이 많이 가라앉았었는데 강여경을 만나고 나니 어쩐지 다시 울컥울컥하게 되었다.“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두 분만 조심하고 있으면 돼요.”강여경이 말했다.“그러면 내일 정말 예전에 살던 곳으로 가야 하냐?”강태환이 멍한 채 물었다.“일단 좀 낯선 데로 돌면서 며칠 시간을 좀 끌어주세요.”강여경이 또 당부했다.“죽어도 강여름이 딸이라고 하셔야 해요.”강태환과 이정희가 끄덕였다.방으로 돌아온 강여경은 양유진에게 전화를 걸었다.“고모의 기억을 회복하지 못하게 할 방법 없어요? 이제 우린 한배를 탄 거나 마찬가지니까 만약 내가 발각되면 당신까지 다 같이 끌려들어 가는 거라고요. 지금 당신도 그렇게 처지가 만만하지는 않잖아요?”양유진이 이마를 문질렀다.“써먹을 사람이 있을 것 같기는 한데…. 대체 강여름에게는 언제 손을 댈 거요? 최하준의 기세가 이제 하늘을 찔러
양유진은 잠시 말이 없더니 물었다.“부작용이 얼마나 뚜렷한가?”“그냥 조금? 처음에는 잘 인지를 못 하지만, 너무 장시간 사용하게 되면… 나도 확실하게는 말을 못 하겠네.”백지안이 솔직하게 말했다.“장기간? 얼마나?”“2~3년 정도.”“됐어. 그 약을 구해줘.”음험한 양유진의 눈이 번뜩였다. 2~3년이라면 양유진이 세계 무대에 올라 서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게다가 차진욱이라는 사람은 오로지 강신희에게만 신경을 쓰므로 강신희에게 이상이 생긴다면 분명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받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강여경이 침투해서 잘 버텨준다면 2~3년 안에 많은 것이 달라질 것이다.******동성.며칠 동안 강태환은 강신희 내외를 데리고 꽤 많은 곳을 돌아다녔다.“여기가 예전에 우리 회사야. 옛날에 방학이면 너도 TH디자인그룹에서 아버지랑 같이 일하곤 했었지. 하지만 이제는 우리 회사가 아니니까 그냥 입구에서만 구경해야 해.”유감스럽다는 듯 강태환이 그런 이야기를 했다.강신희는 높다란 마천루 앞에 서서 올려다보았다. 동성에 도착했던 날 느꼈던 익숙한 느낌은 그 이후로는 완전히 사라졌다.“아버지께서 물려주신 회사가 왜 이제는 우리 것이 아니죠?”강태환이 곤란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이정희는 한숨을 쉬었다.“그것도 최하준이랑 관련이 있어요. 여경이를 찾아온 뒤로 우리가 여경이를 회사에 취업시켜서 그동안 잘해주지 못했던 것을 좀 보충해 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경이가 회사를 빼앗아 가려고 한다고 생각한 여름이가 기분이 안 좋아져서 우리를 미워하게 되었죠. 그래서 최하준이랑 사귀고 나서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우리 TH 디자인을 붙들고 난리를 쳐서 결국은 TH 디자인의 명성을 땅바닥에 떨어트려 자금 조달에 문제가 생겼고… 어쩔 수 없이 TH 디자인을 팔게 되었지.”“죄송해요.”강여경이 미안하다는 듯 바로 사과했다.“제가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는지도 몰라요.”“그런 소리 하지 마라. 우리가 딸을 잘못 가르친 거지.”이정희가 가식적으로 마음이 괴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