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를 잘못 타셨나 본데? 난 이제 도착했거든요.”기사는 매우 당황한 듯했다.“죄송해요. 죄송합니다.”윤서가 바로 사과했다.“제가 차를 잘못 탔나 봐요. 제가 호출을 취소하는 걸로 할게요. 그러면 신용도 떨어지지는 않을 거예요.”“아이고, 고마워요.”“다 제 책임인걸요.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윤서는 전화를 끊더니 앞좌석의 기사의 어깨를 두드렸다.“저기요, 죄송한데 제가 차를 잘못 탔어요. 다른 분 태우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아닌데.”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더니 윤상원이 고개를 돌렸다.윤서는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온몸이 벌벌 떨렸다.“왜 당신이 여기 있어?”“나도 그 근처에서 약속이 있었는데 먹고 나오다가 널 발견한 거야.”윤상원이 고개를 휙 돌리더니 진지하게 다시 운전에 집중했다.“널 보고 가까이 다가갔더니 네가 착각해서 내 차에 올라탄 거야.”핸들의 고급 외제 차 로고를 보고서야 윤서는 자신이 얼마나 착각을 했는지 깨달았다.“미안한데 내리게 길가에 차 좀 세워 줘요.“윤서가 담담히 말했다.“괜찮아. 시간도 있고 내가 데려다줄게.”윤상원이 부드럽게 답했다.윤상원의 뒷통수를 보며 윤서가 고집스레 말을 이었다.“됐어. 친하지도 않는 사이에 뭘 데려다준대?”“윤서야….”윤상원은 씁쓸한 기분에 목소리가 살짝 잠겼다.“어려서부터 우리 친구였잖아. 헤어졌다고 하더라도 적이 될 필요는 없지 않겠어? 최소한 그냥 학교 선후배로는 지낼 수 있지. 꼭 이래야겠어?”‘내가 뭘 어쨌는데?’윤서는 기분이 상했다.윤서의 마음속에서 윤상원과 송영식의 자리는 완전히 달랐다.윤상원은 원 없이 사랑해보았던 대상이라면 송영식은 미워하고 실망했던 사람이었다. 똑같이 사랑하지 않아서 헤어진 사람이라지만 마음이 완전히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었다.윤상원은 생각 없이 툭 뱉은 말이라도 윤서의 심리에 미치는 영향은 컸다.특히나 윤서는 지금 임신해서 호르몬의 영향으로 살짝 우울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윤상원 씨는 보기만 해도
윤서는 두 눈을 가만히 감았다.‘서울에 오지 말았어야 했다고?아니! 난 후회하지 않아. 그야말로 온갖 일을 다 겪었지만 그래도 내가 없었다면 여름이는 혼자서 그 많은 일을 다 감당하지 못해서 그저 절망 속에 나날을 보냈을 거야.그래도 내가 있어서 외국에 나가서도 힘든 가운데 사업을 일으켜서 최고가 될 수 있었던 거야.’“아니! 난 후회하지 않아. 동성에 있을 때 나는 꿈도 없고 목표도 없이 그저 오빠 옆에 그림처럼 서 있기만 하는 존재였어.”“너 혹시 아직도 옛일을 잊지 못해서…”윤상원의 목구멍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아니라면 대체 윤서가 이미 지난 일에 왜 그렇게 큰 원한을 품고 있겠어?’마음에서 내려놓지 못하니까 담대해질 수 없는 거라고.’윤상원은 그렇게 생각했다.“저기요, 굳이 데려다주실 생각이라면 입 좀 다물어 주실래요? 차만 세워 주면 당장이라도 내리고 싶거든요.”윤서가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뱉었다.‘대체 오늘 무슨 마가 껴서 아침부터 송영식을 만나더니 간신히 정리하고 나니 이주혁이 나타나고 이제는 윤상원까지 난리람?’윤상원이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입가가 움찔거리더니 결국 정말 윤서가 차에서 뛰어내리기라도 할까 봐 겁이 나서 닥치기로 했다.그런 생각이 들자 저도 모르게 차를 천천히 몰게 되었다.그러다가 휴대 전화가 울렸다. 신아영이었다.윤상원은 흠칫하고 놀라서 얼른 전화기를 무음으로 돌리고 던져두었다.“왜 안 받아요? 전화 안 받으면 신아영이 혼자서 막 망상을 펼치고 난리일 텐데.”윤서가 비웃었다.“그런 거 아니야. 보험회사였어.”윤상원이 얼른 거짓말로 둘러댔다.윤서는 팩폭을 하는 노력을 들이기도 귀찮았다.리버사이드 파트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윤서는 후다닥 차에서 내려버렸다.“윤서야….”윤상원이 바로 따라 내렸다. 지척에 있는 윤서를 보자니 심장을 칼로 도려내는 듯 아팠다.두 사람이 이렇게 가까이 서 있는 데도 마음은 마치 세상 저 끝에 있는 듯 닿을 수가 없었다.
윤상원은 흠칫하며 윤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제 눈에서 분노가 새 나왔다.“넌 예전 그때처럼 못된 것이 정말 하나도 변하지 않았구나. 그러니까 송영식 같은 녀석도 널 버린 거겠지.”“오빠는 여전히 멍청이고 말이지.”윤서는 주먹을 꽉 쥐었다.“그래, 그딴 소리 실컷 해 봐. 그래 봐야 제 무덤이나 파는 격이니까.”윤서는 힘껏 윤상원의 손을 뿌리치고 돌아서 단지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까지 한참을 걸었다.임신을 해서인지 요즘 윤서는 매우 감정적으로 되어 윤상원의 말에 심하게 상처받았다.‘오빠에게 나는 영원히 신아영을 이길 수 없는 존재야.신야영은 영원히 제일 착하고, 나는 제일 못 된 인간이고.대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뭘 그렇게 잘못해서 늘 나만 상처받고 속상한 내 마음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건데?’윤서가 얼마나 외로운 상태로 위태롭게 있는지 아무도 몰랐다.“임윤서, 왜 사람을 좀 기다리지 않고….”임윤서 네 라인 앞에서 기다리던 송영식은 윤서의 모습을 보고 후다닥 다가왔다. 그런데 윤서가 눈물범벅이 된 것을 보고는 움찔하더니 어쩔 줄을 몰랐다. 윤서가 이렇게까지 우는 모습은 처음 보아서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왜… 왜 이렇게 울어?”임윤서는 갑자기 이런 데서 송영식이 튀어나올 줄 몰랐던 터라 손등으로 얼른 눈물을 훔치고는 고개를 숙이고 아파트로 들어가려고 했다.송영식은 잠깐 멍하니 있다가 얼른 따라 들어갔다.“아까 주혁이가 막말해서 그래? 미안해. 나도 좀 심하게 말했지? 원연수가 당신 친구인데 말이야. 저기, 화내지 말고, 그만 울고, 나한테 화풀이 해. 너무 울면 아기한테도 안 좋을 것 같은데….”“저리 가!”임윤서는 결국 송영식에게 크게 소리치고 말았다.‘그러니까 송영식 같은 녀석도 널 버린 거겠지’라는 윤상원의 마지막 한 마디에 윤서의 자존심은 완전히 부서지고 말았다. 그런 와중에 송영식의 면상을 보자니 울컥했다.눈물도 조절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다.“내 팔자는 대체 왜 이래? 남
“아, 뭐야! 왜 사람을 좀 가만히 안 두고 끝까지 따라와?”윤서는 완전히 멘붕이 되었다.“화… 화내지 말라니까.”송영식은 얌전히 눈을 내리깔았다.“내가 진심으로 사과할게. 물론 사과한다고 내가 예전에 당신에게 준 상처가 아물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인정할게. 내가 정말 너무 했고, 어리석고, 나쁜 놈이었어. 정말 미안해. 당신에게도, 아이에게도 모두 다 미안해.”“됐네요. 내가 모를 줄 알고? 나랑 결혼해서 다시 본가로 들어가고 싶어서 괜히 비위나 맞추는 거잖아?”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내가 돼지랑 결혼을 하면 몰라도 당신하고는 결혼 안 해.”송영식은 움찔했다. 그 일은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이다.그저 엉엉 우는 윤서를 달래려고 저도 모르게 사과를 했던 것뿐이었다.윤서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송영식도 따라 내렸다.입구에 도착하자 윤서가 돌아보았다.“스스로 생각해 봐도 너무 가식적이지 않나? 날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그저 나에게 접근해서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생각이잖아? 이건 명백히 나에 대한 2차 가해라고. 난 돌이 아니야. 디딤돌로 밟고 올라설 생각하지 마셔. 이렇게 자꾸자꾸 상처 주면 나도 마음 아프다고.”말하면서 윤서는 점점 더 목이 멨다.그 말을 들은 송영식은 부끄러운 나머지 얼굴이 화륵 타올라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실제로 윤석 좋아서가 아니라 그저 아이를 생각해서, 그리고 가족에게로 돌아갈 생각에 어떻게든 윤서와 결혼할 생각을 했던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그리고 그 점을 윤서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게다가 방금 윤상원까지 만나는 바람에 윤서는 정서적으로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다.“솔직히 식구들이 다시 당신을 받아주고는 싶지만 대외적으로 웃음거리가 될 걱정도 덜고, 상한 내 기분도 생각해준답시고 폭탄을 나한테 던져 놓은 거잖아. 이렇게 해놓으면 우리 둘을 다시 엮어서 결혼도 시킬 수 있고, 당신이 다시 아이 아빠도 되지 좋겠다고 생각했나 본데, 내 생각 물어본 사람 있어? 있냐고?”윤서는 다시 감정이 폭
“내가 보니까 그냥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었다고.”송영식이 유유히 말을 이었다.“낮에 법정에서 둘이 이야기하는 거 들어보니까 전에 임윤서가 원연수가 나온 드라마를 본 모양이더라고 그래서 오늘 가까이서 좋아하는 배우를 만나서 너무 좋았던 모양인데 네가 분위기 이상하게 만들어 버렸잖아.”“……”“내가 보니까 윤서가 원연수를 진짜 좋아하는 것 같더라. 저기… 연수 씨더러 먼저 윤서에게 연락 좀 해주라고 하면 안 돼?”송영식이 간절하게 부탁했다.“둘이 그냥 친구로 지내게 해서 덕심 좀 충족시켜 주라.”이주혁의 입꼬리가 경련을 일으켰다.“내가 왜 네 말을 들어 줘야 하는데? 내가 임윤서랑 딱히 친한 것도 아닌데.”“야, 윤서 배 속의 아이는 내 애잖아. 그러면 넌 걔 삼촌 아니냐?”송영식이 바로 답했다.“네 아기 삼촌 같은 건 안 한다.”이주혁이 불만스럽게 뱉었다.“난 이제 애라고는 애 하나인데 친구로서 정말 그러기냐?”송영식이 한숨을 쉬었다.“방금 생각해 봤는데 전에는 정말 내가 윤서한테 너무 심하게 한 것 같아. 이제부터 조금씩 잘해주면서 갚을 거야. 너도 좀 도와주라.”“아, 알겠어. 내일 원연수한테 얘기해 놓을게.”결국 이주혁은 졌다는 듯 그렇게 말하더니 얼른 전화를 끊어버렸다.“나중에 하지 말고 지금…”말하는 중에 전화는 이미 끊겨 버렸다.송영식은 전화기를 내려놓고 꼼짝 않고 그대로 문 앞에 앉아서 기다렸다.******집 안.윤서 간신히 평온을 찾고는 백에서 윤상원의 명함을 꺼냈다.‘이젠 진짜 장난이 아니라고!이제부터 시작이야, 신아영. 각오해.다음 날 윤서가 일어나자 조현미가 아침을 들고 왔다.“저기 방금 쓰레기 버리러 나가다가 송 대표님을봤어요. 밤새 문 앞에서 주무셨나 봐요.”송영식이 밖에서 밤을 새웠다는 말을 듣고 윤서는 살짝 놀랐다.“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으신 건 알겠지만…”조현미가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내내 저렇게 밖에 두는 것도 좀….”“들어오라고 하세요.”윤서가 망설이다가 답했다.조
“뭐, 이 사람이랑 원한 관계야?”그렇게 말하던 송영식에게 예전에 멀끔하게 생긴 남자가 임윤서에게 질척거렸던 일이 생각났다. 임윤서는 전 남친이 어렸을 때부터 친했던 여자랑 얽혀서 관계를 정리하지 못한다고 말했던 것이 생각나서 어쩐지 씁쓸했다.“이 사람이… 전 남친은 아니지?”“맞는데.”윤서가 먹던 것을 꿀꺽 삼키며 기다란 눈썹을 아래로 내리깔았다.“하지만 윤후 그룹을 막아달라는 건 그 사람하고는 상관없어.”“그러면 누구 때문인데?”송영식이 물었다.“자세히 알 거 없고, 어쨌든 정말 나한테 미안해서 용서를 받고 싶다니까 기회를 준 거야. 하기 싫으면 말해, 그냥 정환이한테 부탁하면 되니까.”송영식은 얼른 입을 꾹 다물었다.‘아니, 왜 정환이한테 그런 일을 부탁한대?’윤서가 갑자기 전남친의 회사 일을 방해해 달라는 것이 버림받은 데서 오는 원한 때문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어쨌거나 윤서가 너무나 단호하니 송영식은 결국 해주겠다고 했다.“알았어. 내가 해줄게. 식품회사 하나 정도는 내가 충분히 해볼 수 있지. 어떻게 해줘? 아주 파산하게 해 줄까, 아니면…”“파산까지는 됐고, 자산규모가 한 1/10 정도로 줄어들게?”윤서가 시큰둥하게 말했다.“……”‘거의 파산 아니냐고….’“알겠어.”송영식이 무뚝뚝하게 답했다.윤서는 아침을 다 먹더니 2층으로 올라갔다. 송영식이 결국 한마디 했다.“과거는 그냥 지나가게 둬. 사람이 계속 뒤만 돌아보고 살다가는 행복하게 못 살아.”“당신은 백지안의 그늘에서 아주 다 벗어났나 보네?”윤서가 공격했다.송영식의 표정이 어두워졌다“딱히 복수할 생각은 없어. 누군가를 사랑하는 건 자기 일이지, 상대에게 꼭 내가 주는 만큼의 사랑을 달라고는 할 수 없잖아. 잘못이 있다면 내가 사람을 잘못 본 탓이지. 복수한다고 내 사랑을 돌려받을 수 있나? 그렇게는 안 되잖아.”“아주 잘 나셨네.”송영식의 말을 듣더니 윤서가 비웃는 듯한 눈으로 돌아보았다.“사람이 좋은 마음에서 조언하는데 말이야.”윤서의
송영식은 한동안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윤서의 말을 듣고 나니 많은 일이 이해되었다.“자기를 좋아하는 걸 알면서 계속 당신을 불러서 자기 연애 고민 상담하고 그러는 것도 다 어장 관리야. 그쪽이랑 헤어지고 나면 나에게 오지 않을까 하는 헛된 희망을 심어주는 거라고.”윤서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촌철살인이었다.“그런 사람은 따라다니고 사랑해줄 가치가 하나도 없는 인간이야. 당신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그냥 썸이나 타다가 더 잘생기고 돈 많은 남자를 만나면 바로 갈아타서 그쪽에 가서 또 썸 타고 그러는 거라고.”송영식은 그날 밤 백지안이 다른 남자와 입을 맞추던 모습을 떠올렸다. 갑자기 마음이 확 답답해지고 말이 나오지 않았다.‘어쩌면 여자는 여자가 더 잘 아는지도 몰라.’“고, 고마워. 많이 배웠네.”송영식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흡사 반려인에게 야단맞은 대형견 같은 모습이었다.송영식의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은근히 속이 시원했다.“아, 윤후 그룹 상대하다 보면 윤상원이 반드시 당신을 찾아가서 나에 대해 온갖 욕을 퍼붓겠지만, 그냥 신경 쓰지 마셔.”송영식이 눈을 끔뻑거렸다.“자기 전 여자친구를 버린 주제에 뒤에서 그 녀석이 당신 욕을 할 일이 뭐가 있어?”“그쪽 눈에는 아마도… 내가 아주 아주 못된 년으로 보일 테니까. 예전에 최하준도 여름이를 아주 못된 년 취급했었잖아? 설마 세상에 백지안 같은 인간이 그거 하나뿐인 줄 알았어?”윤서가 콧방귀를 뀌더니 2층으로 올라갔다.송영식은 순진해서 아직 강여경이니 신아영 같은 불여우를 많이 만나보지 못했다. 그런 인간을 많이 만났으면 아마도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을 것이다.******송영식은 무거운 마음을 안고 리버사이드 파크를 떠났다. 곧 비서에게 전화를 넣어서 윤후 그룹에 대한 압박에 들어가기로 했다.송영식에게 윤후 그룹 정도 규모의 회사를 상대하는 것은 그렇게 큰일도 아니었다.다만 그렇게 지시를 하고 나니 뒷맛이 깔끔하지 않았다.남들은 어지간한 아이돌을 압살할 미모라며 떠
“아우, 정말 부끄럽게. 뭐래!”여름이 손가락을 세워 하준의 입을 막았다.“우리 자기는 ‘아, 뭐래!’ 할 때 너무 귀엽더라.”하준이 음흉하게 웃었다.“거기 두 사람 적당히 좀 하지.”송영식이 결국 비죽거렸다. 액정을 뚫고 닭살이 올라올 지경이었다. “아, 준. 가만히 좀 있어 봐.”여름이 하준에게 경고를 하더니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윤서는 상원이 오빠를 못 잊어서가 아니에요. 윤사원한테 붙어 있는 윤아영 때문일걸요. 윤후식품 상대하기 싫으면 내가 직접 신아영을 상대할게요. 진작 알았으면 내가 먼저 나서는 건데. 윤상원이 서울로 진출하려는 건 이제 알았네요.”“자기야, 그게 누군데? 자기 손 더럽히지 말고 냅둬. 내가 할게.”하준이 적극적으로 나섰다.송영식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더니 다급해졌다.“아니, 두 사람은 나서지 말라고. 안 한다고 안 그랬어. 그냥 무슨 상황인지 궁금해서 물어본 거지.”“그게 좀 복잡해서 내가 말해도 이해가 안 되고 별로 믿어지지도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그냥 거두절미하고 하여간 윤상원 때문은 아니에요.”여름은 그러더니 전화를 끊었다. 송영식은 여름이나 하준이 선수 칠까 봐 바로 비서에게 연락해서 작전 개시를 명령했다.******원연수는 원래 오전에 광고 촬영이 있었다. 그러나 권현규가 급히 부르는 바람에 촬영에 늦겠다고 하고 사무실로 들어왔다. 그러니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대체 무슨 일이길래 촬영하는 사람을 불러서…”원연수가 그렇게 말하면서 문을 열었는데 사무용 의자에 앉은 훤칠한 모습에 뒷말은 막혀버렸다.“왔군.”힘줄이 두드러지는 이주혁의 손에는 검은 만년필이 빙글거리고 있었다.“10분이나 기다렸다고.”원연수가 아무리 성격이 원만하다고 해도 울컥 화가 났다.“여기 오느라고 광고 촬영을 2시간이나 미뤄 놓고 왔는데, 이게 뭐죠?”“회사 대표가 보자고 부르면 직원은 와야 하는 거 아닌가?”이주혁이 원연수의 차가운 눈동자를 마주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에서 모처럼만에 인간다운 표정이 느껴지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