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 정말 부끄럽게. 뭐래!”여름이 손가락을 세워 하준의 입을 막았다.“우리 자기는 ‘아, 뭐래!’ 할 때 너무 귀엽더라.”하준이 음흉하게 웃었다.“거기 두 사람 적당히 좀 하지.”송영식이 결국 비죽거렸다. 액정을 뚫고 닭살이 올라올 지경이었다. “아, 준. 가만히 좀 있어 봐.”여름이 하준에게 경고를 하더니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윤서는 상원이 오빠를 못 잊어서가 아니에요. 윤사원한테 붙어 있는 윤아영 때문일걸요. 윤후식품 상대하기 싫으면 내가 직접 신아영을 상대할게요. 진작 알았으면 내가 먼저 나서는 건데. 윤상원이 서울로 진출하려는 건 이제 알았네요.”“자기야, 그게 누군데? 자기 손 더럽히지 말고 냅둬. 내가 할게.”하준이 적극적으로 나섰다.송영식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더니 다급해졌다.“아니, 두 사람은 나서지 말라고. 안 한다고 안 그랬어. 그냥 무슨 상황인지 궁금해서 물어본 거지.”“그게 좀 복잡해서 내가 말해도 이해가 안 되고 별로 믿어지지도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그냥 거두절미하고 하여간 윤상원 때문은 아니에요.”여름은 그러더니 전화를 끊었다. 송영식은 여름이나 하준이 선수 칠까 봐 바로 비서에게 연락해서 작전 개시를 명령했다.******원연수는 원래 오전에 광고 촬영이 있었다. 그러나 권현규가 급히 부르는 바람에 촬영에 늦겠다고 하고 사무실로 들어왔다. 그러니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대체 무슨 일이길래 촬영하는 사람을 불러서…”원연수가 그렇게 말하면서 문을 열었는데 사무용 의자에 앉은 훤칠한 모습에 뒷말은 막혀버렸다.“왔군.”힘줄이 두드러지는 이주혁의 손에는 검은 만년필이 빙글거리고 있었다.“10분이나 기다렸다고.”원연수가 아무리 성격이 원만하다고 해도 울컥 화가 났다.“여기 오느라고 광고 촬영을 2시간이나 미뤄 놓고 왔는데, 이게 뭐죠?”“회사 대표가 보자고 부르면 직원은 와야 하는 거 아닌가?”이주혁이 원연수의 차가운 눈동자를 마주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에서 모처럼만에 인간다운 표정이 느껴지
그러나 원연수의 심장은 이미 꽉 조여오기 시작했다.“말해 봐. 백소영은 죽지 않았지?”이주혁이 원연수의 아래턱을 와락 움켜잡았다.“하!”원연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도 들은 양 눈에서 분노가 뿜어져 나왔다.“사람이 그런 파도에 뛰어들었는데 살아남는다고요? 재주 있으면 본인이 해도시던지? 이미 저세상 간 사람을 두고… 나도 소영이가 안 죽었으며 좋겠다고요.”백소영의 영혼은 살아남았지만, 몸은 이미 영원히 이 세상에 속하지 않게 되었다.“이해할 수가 없네요. 왜 이렇게 소영이의 죽음에 집착하는 거죠? 대체 둘이 무슨 사이인데요?”원연수가 차갑게 웃었다.“당신을 거쳐 간 수많은 여자 중 하나라는 시시한 소리는 하지 마세요.”이주혁은 돌아서서 눈을 감았다.자신도 왜 이렇게 백소영이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에 이렇게 집착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아마도 남아있는 한 가닥 양심이 마음을 흔드는 듯했다.“그래. 백소영이 날 좋아했었지. 죽도록 좋아했었다고.”이주혁의 입술이 달싹하더니 또박또박 말했다.아무리 냉정하게 있으려고 해도 그 말을 들은 원연수는 분노가 폭발했다.“정말 당신과 소영이가 잠깐이라도 그런 사이였다면 아마도 그게 이생에 가장 후회되는 일이겠네요..”“당신이 소영이도 아니면서 뭘 안다고 그런 소릴 하나?”이주혁이 위험스럽게 웃었다.“소영이를 잘 아니까요. 소영이는 고상하고 자부심이 있는 애였어요. 여자만 보면 발정이 나는 당신 같은 남자를 사귀었다니 엄청나게 후회했을 거라고요.”원연수가 싸늘하게 답했다.이주혁의 눈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와락 원연수에게 다가섰다.“내가 여자만 보면 발정이 난다고? 그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군. 지금 널 보고 있으니 마음이 동하는걸.”이주혁이 큰 덩치로 압도해왔다.원연수는 심장이 찌릿했다.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을 치다가 벽에 부딪혔다.이주혁이 두 손으로 벽을 짚으며 몸으로 원연수를 가두었다.원연수의 몸에서 은은하게 달콤한 향기가 풍겨 코끝을 자극했다.순간적으로 몸이 굳었다.어렸을 때
원연수는 움찔했다.이주혁이 이렇게나 무턱대고 들이댈 줄은 몰랐다.‘곧 결혼할 인간이….’이주혁 같은 인간이라면 혼인에도 그렇게 충절을 지킬 것 같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백소영의 어린 시절 친구라고 밝힌 사람에게도 이렇게 들이댈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이 정도로 저질이었구나.이렇게 마구 선을 넘을 정도로 굶주린 건가?내가 겨우 이런 인간을 사랑했었다니….’구역질이 날 지경이었다.힘껏 밀어내 봤지만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원연수는 어쩔 수 없이 이주혁의 입술을 깨물어 피를 냈다.이주혁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원연수는 주혁을 밀어내고는 따귀를 올려붙였다.사무실에 ‘짝’하는 소리가 울렸다.“내게 손을 댄다고?”이주혁의 두 눈에 얼음 같은 한기가 돌았다.“왜 안 되는데? 감히 내 존엄을 침해하는 변태를 한 대 치지도 못하나?”원연수가 싸늘하게 뱉었다.“이번에는 날 정말 잘못 건드렸어. 기왕 변태 소리를 들었으니 변태가 뭔지 제대로 보여줄까?”이주혁이 원연수의 허리를 와락 감더니 소파에 던지고 그 위로 자신의 몸을 겹쳤다.“놔! 놓으라고!”이주혁이 이 정도로 미친 짓을 할 줄은 몰랐지만 어쩌겠는가? 운동과 수련으로 단련된 이주혁이 이렇게 누르고 있으니 그야말로 아래 깔린 원연수는 꼼짝을 할 수 없었다.그나마 걷어차려고 다리를 움직이는 찰나에 이주혁이 다리까지 감아버리더니 씩 웃었다.“아주 적극적인데 그래?”원연수의 눈에 핏발이 섰다.“당신에게 덤비는 여자라면 얼마든지 있을 텐데 왜 나한테 이래요? 내가 소영이 친구라서? 변태도 이런 변태가 없네. 소영이는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겠구나.”‘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한다고….’그 말이 망치처럼 이주혁의 머리를 땅 쳤다.온몸이 확 굳어졌다.원연수는 그 틈을 타서 이주혁을 확 밀치고 옷을 집어 사무실을 빠져나갔다.그러나 사무실 문을 나서자마자 시아가 명품 백을 들고 거들먹거리며 다가오는 게 보였다.흐트러진 원연수의 옷 매무새와 목 여기 저기 난 키
시아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이주혁의 입술에서는 핏방울이 맺혀있었고 두 눈은 아직 이글거리고 있었고 바지 아래서는 생생한 욕망의 증거가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바보가 아닌 이상 이게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있었다.자신이 아무리 유혹해도 얼음 조각처럼 차갑기만 하던 이주혁이었다. 여자를 홀리고 다닌다는 말이 거짓말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목석같은 이주혁이었다.그런데 이제는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이 눈에 보였다.이주혁은 여자를 안 좋아하는 게 아니라 자신에게만 만 반응이 없는 것이었다. 원연수에게는 저렇게 흥분하다니 너무 분해서 도저히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질투로 가슴이 폭발할 것 같았다.‘원연수가 나보다 나은 게 뭐야? 분명 뭔가 부정한 수단으로 주혁 씨를 유혹한 게 틀림없어!이 더러운 것이!’원연수가 눈앞에 있었다면 당장 따귀라도 올려붙이고 싶은 심정이었다.뒤따르던 소연희도 분위기를 파악하고 경악했다.그러나 당사자인 이주혁은 태연하게 테이블에 다리를 올리고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오히려 시아가 나타난 것이 불만인 듯했다.“여긴 무슨 일이야?”“넌 나가 있어.”시아가 소연희에게 눈짓했다.소연희는 고개를 끄덕이고 한숨을 쉬었다.‘대표님이 시아 님을 엄청 아끼는 줄 알았더니 아니었나 봐. 시아 님을 신경 쓴다면 이런 상황이 발각되고 나서 저렇게 쫄리는 거 하나 없다는 듯 태연하고 냉정할 수는 없지.’사무실 문이 닫히자 시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곧 뚝뚝 눈물방울이 흘러내렸다.“왜? 하고 싶으면 나한테 오지…”“너한테?”이주혁이 말을 끊더니 눈을 들어 담담하게 말했다.“미안하지만 너한테는 끌리지가 않아.”“……”시아는 너무 크게 충격을 받아서 눈 앞이 하얘졌다.‘무슨 소리야? 나한테는 끌리지 않는다니? 원연수한테는 끌렸잖아?’이주혁이 다시 아무렇지도 않은 눈으로 시아를 흘끗 쳐다보았다.“무슨 망상을 하고 있나? 내가 왜 너랑 결혼하는지 아직도 잘 몰라? 네가 날 컨트롤 하려고 든다면 이주혁의 아내가 되었더라도
“알겠으니까 그만 나가 봐.”이주혁이 아무 표정 없이 말했다.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주혁이 그 말에 전혀 개의치 않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시아는 꽤 오래 곁에서 함께했기 때문에 주혁을 조금은 알았다.이주혁은 화가 날수록 얼굴이 냉정해졌다.그러나 뒤집어 생각해 보면 이주혁이 원연수의 과거에 대해 듣고 그렇게 화날 정도로 신경을 쓴다는 뜻이라서 시아는 분했다. 곧 ‘경화’ 촬영에 들어가야 하니 원연수가 조연으로 들어오면 감히 주제도 모르고 자기 남자를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단단히 보여줘야겠다고 별렀다.시아가 나가자 이주혁은 잠시 후 테이블을 힘껏 걷어찼다.테이블은 나뒹굴며 여기저기가 부서졌다.어두운 이주혁의 얼굴에 위험스러운 기운이 돌았다.권현규가 들어오다가 이주혁의 입가에 흐르는 피를 보고 깜짝 놀라더니 웃었다.“사무실에서 원연수랑 긴히 할 말씀이 있으시다더니. 아니, 무슨 얘기를 그렇게 격렬하게 나누신 겁니까? 진작 알았으면 제가 준비를 좀 하는 건데 그랬습니다.”이주혁의 싸늘한 시선이 꽂혔다.“원연수가 배민교랑 원조 교제를 했었다는 말을 들었는데?”권현규는 움찔하더니 시원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죠.”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사무실 분위기가 더할 나위 없이 싸늘해졌다.“왜… 전에는 그런 얘기를 안 했습니까?이주혁의 눈에 마땅찮은 기색이 가득했다.“상대의 과거는 신경 안 쓰는 타입이신 줄 알았는데요?”권현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물론 신경을 써 본 적은 없지만 원연수가 전에 다른 남자와 만났다는 생각을 하자 울컥 짜증이 올라왔다.‘그렇게 고상한 척은 있는 대로 다 하더니 원조 교제를 했었다고?아주 가식적인 인간이잖아?내 앞에서 그렇게 도도하게 군 것도 다 그냥 수작이었나?젠장, 그런 녀석에게 키스까지 하다니 아주 멍청하게 그 녀석의 함정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간 격이잖아?’“뭐, 굳이 원연수가 아니어도 되시잖습니까?”권현구가 문득 말했다.“이미 2년이나 지난 일입니다. 하긴 그래도 그때 배민교가 원연수를 정말
“왜 그래?”송영식이 어리둥절해서 물었다.“물어 봤자 내 흑역사 밖에 들을 거 없어. 그냥 임윤서더러 걔 만나지 말라고 해.”그러더니 이주혁은 전화를 끊어버렸다.이주혁은 차에 앉아서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입가에는 아직 원연수의 입술에서 나던 향기가 남아있었다.‘빌어먹을! 너무 달콤하다고!’다만 다시 생각해보니 혐오감이 들었다.******오전 11시.하준은 차를 몰고 해변 별장으로 갔다.이번에는 특별히 굴착기를 한 대 빌렸다.백지안이 시끄러운 소리에 놀라서 초췌한 얼굴로 나왔다.“지금 뭐 하는 거야?”백지안이 정성스럽게 가꾸어 놓은 화단을 굴착기가 다 헤집고 있었다.창문이 열리더니 선글라스를 쓴 하준의 얼굴이 보였다.“부수는 중이지. 이제 이 별장은 내게 돌려줘야 한다고 판결 받았잖아. 나랑 여름이가 신혼을 보냈던 곳을 네가 멋대로 차지하고 그 동안 살았다는 생각을 하니까 더러워서 싹 쓸어버려야겠어.”“아니, 이게 정말….”백지안은 화가 나서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이제 이 집은 네 집이 아니라니까.”최하준이 한 마디 덧붙였다.“아, 원래부터 네 집이 아니었다고 해야 맞나? 하여간 당장 물건 챙겨서 나가.”“법원에서는 유예 기간을 일주일 줬잖아? 네가 무슨 자격으로 나더러 당장 나가라 말라야?”백지안이 분한 듯 외쳤다.“뭐, 하고 싶으면 일주일을 더 버텨 보시던지. 어쨌든 판결문에 내가 여길 부수지 말라는 규정은 없었거든. 다 부서진 벽 옆에서 자고 싶은가 본데, 네 마음대로 해 봐.”하준은 씩 웃더니 다시 굴착기를 몰고 돌진했다.굴착기의 버킷이 그대로 거실 전면 유리로 향했다. ‘챙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유리는 박살이 났다.백지안은 흥분했다.“멈춰! 그만하지 못해? 1시간만 줘. 당장 챙겨서 나갈게.”집에 가득한 명품 백이며 보석과 의류를 다 챙길 시간도 부족해 보였다.“아니, 10분 줄게.”최하준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야….”“이제 9분 남았네.”하준이 눈썹을 치켜 올렸다.백지안은 울컥했다
백지안이 떠나자 하준은 여름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다.“자기야, 내가 해변 별장을 다 부쉈어.”여름은 사무실에서 하준이 걸어온 영상을 받았다가 폐허 위에 서 있는 하준을 보고 움찔했다. 그 아름답던 집이 이렇게 폐허가 되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아니, 그렇게 할 일이 없어?”여름은 어이가 없었다.“아침에 출근한다더니 가서 집을 부수고 있었어? 어떻게 한 거야?”“굴착기를 빌려왔지.”“굴착기도 운전할 줄 알아?”여름은 깜짝 놀랐다.“응, 좀 배웠지.”하준이 웃었다.“……”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몇 달은 배워야 하는 굴착기 운전을 대체 어디서 언제 배웠단 말인지….“축하해. 돈 벌 수 있는 기술이 또 늘었네.?”여름이 놀렸다.“여긴 내 손으로 부수고 싶었어. 우리의 신혼집이 백지안에게 더럽혀졌잖아. 그대로 남겨두고 싶지 않았어.”하준이 진지하게 말했다.“백지안은?”여름이 물었다.“내가 쫓아냈지. 후다닥 뛰쳐나가면서 보석을 한 보따리 들고 가더라고.”하준은 좀 슬픈 기분이 되었다.“대체… 어쩌다가 그렇게 마음이 천박한 사람을 만났을까? 백지안이 내 여자친구였다는 걸 생각만 해도 너무 비참하다.”“그러면 내 생각을 해. 그러면 기분이 좀 나아지지 않겠어?”여름이 장난스럽게 눈을 깜빡여 보였다.그런 여름을 본 하준은 심장이 녹아 내리는 것 같았다.“자기야, 우리 같이 점심 먹자. 보고 싶어서 죽을 것 같아.”“작작해. 이제 출근한지 2시간 밖에 안 됐다고.”하준의 주접에 여름은 얼굴이 달아올랐다.“보고 싶은 걸 어떡해? 자기가 안 온다면 내가 자기 회사로 갈게.”하준이 웃었다.“오늘 우리 회사 밥은 그냥 그런데….”“상관 없어. 당신하고 함께라면 뭘 먹어도 다 맛있어.”하준은 이미 마음이 너무 조급했다.여름의 얼굴이 확확 달아올랐다.전화를 끊고 나서 심호흡을 한참 해서 마구 날뛰는 심장을 진정시킨 다음에야 엄 실장을 불렀다.“식당에 특별히 좀 맛있는 걸로 음식을 해달라고 부탁해 주세요. 잠시 후
백지안이 입술을 깨물었다.“다르지. 난 최하준을 증오하잖아. 난 최하준을 부셔버리고 싶어.”양유진의 싸늘한 눈이 반짝 빛났다.백지안인 천천히 양유진에게 다가갔다.“내가 이렇게 말할 때는 방법이 있다는 뜻이거든. 이럴 줄 알고 전에 최면을 걸 때 내가 수작을 좀 걸어뒀지.”양유진이 깊이를 알 수 없는 눈을 가늘게 떴다.“그래?”“그럼.”백지안이 끄덕였다.“사람이 곤경에 빠질 때도 있는 법이지. 당신도 그렇잖아? 강여름하고 이혼도 안 했는데 최하준하고 강여름은 이미 대놓고 둘이 붙어 다니고, 밤에는 아예 같이 지내는 것 같던데. 그 꼴을 보고도 괜찮아?”양유진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백지안의 도발에 얼굴은 더욱 험악하게 일그러졌다.“백지안, 정말 마지막으로 네 가치를 증명할 기회를 한 번만 더 주겠다.”“좋아.”백지안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하지만 그 전에 백윤택을 없애줘야겠어.”양유진이 눈썹을 치켜 세우고는 백지안을 쳐다보았다.“네 어떤 점이 마음에 드는지 아나? 넌 내가 본 중에 두 번째로 악독하고 냉혈한 년이야. 가족에게까지 손을 대다니.”“그 자식이 날 배신하니까 그렇지.”백지안이 울분을 터트렸다.“멍청한 자식이 내가 납치했다고 하더라니까? 내가 언제 저를 납치했다고.”“그 일은 확실히 좀 이상해. 아마도 최하준이 무슨 수작을 부린 거겠지.”양유진이 미간을 찌푸렸다.“하지만 백윤택은 지금 이주혁의 보호 하에 있어서 손댈 수가 없어.”백지안은 분해서 부들부들 떨었다.“하지만 영원히 이주혁의 보호 하에 있지는 않겠지.”양유진이 태연히 말을 이었다.“두어 달 지나면 최하준과 이주혁도 나를 어쩌지 못할 거야.”백지안이 깜짝 놀라서 양유진을 쳐다보았다. 이주혁은 백지안도 함부로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상대인데 그런 이주혁에게서 보이콧을 받고 있는 양유진이 대체 뭘 어떻게 할 작정인지 이해가 잘 안 됐다.백지안이 우물쭈물 입을 뗐다.“아직 당신이 주민그룹의 진짜 파워를 잘 모르나 본데, 지금 추신이 주민그룹에 필적한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