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재판을 집중해서 보고 싶었다. 그러나 윤서가 옆에서 너무 시끄러웠다. ‘대체 백지안이 재판에 져서 징징 짜는 꼴이 보고 싶어서 온 거야, 법정에 친목하러 온 거야?”순식간에 식사 약속까지 잡는 것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여름이 막 한 마디 하려고 입을 떼는데 앞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뒤를 돌아보면서 이 사이로 말을 뱉었다.“임윤서, 조용히 좀 못 해?”임윤서가 성격 좋게 처음 만난 사람과 즐겁게 이야기 하는 모습을 보니 송영식은 문득 울컥했다.‘쿠베라 정도 되는 집안의 양녀면 이득을 노리고 접근하는 사람도 있다고. 안 지 몇 분 되지도 않는 사람이랑 마구 밥 먹을 약속까지 잡고 앉아 있다니 정말 천하태평이구먼.”윤서는 움찔했다. 그제서야 자기 앞 자리에 송영식이 앉아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이 자식이 진짜로 왔네? 게다가 건방지게 나한테 저 따위 소리나 하고!’“남이사 뭘 하든 무슨 상관인데?”그렇게 말하면서 윤서는 송영식이 앉은 자리를 발로 탁 차버렸다. 그런데 하필 윤서의 발길질이 정확하게 송영식의 엉덩이 부위에 꽂혔다.송영식은 바로 ‘우억!’하고 비명을 지르며 벌떡 튕겨 올라갔다.확 긴장되었던 장내가 고요해지면서 재판장을 포함한 모두의 시선이 송영식에게 꽂혔다.송영식의 일그러졌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죄… 죄송합니다.”재판관의 날카로운 시선이 송영식에게 꽂혔다.“다시 시끄럽게 굴면 내보낼 수밖에 없습니다.”하준도 송영식을 돌아보고는 할말을 잃었다.‘여기가 어딘 줄 알고 난리람?’“…….”송영식은 상당히 억울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다시 앉았다. 고개를 돌려 윤서를 노려보았다.윤서는 도발하듯 씩 웃었다.“……”‘아오, 진짜 저…저… 아오! 짜증나!’송영식은 울분이 치밀었다.여름도 할 말을 잃었다.곁눈질로 보니 윤서의 옆에 앉은 사람도 가만히 상황을 보더니 살짝 피식 웃는 것이 보였다.뭔가 매우 낯익은 느낌이었다.원연수도 여름의 시선을 느끼고 돌아보더니 가볍게 목례를 했다.여름도 목례를 돌려주고는
백지안은 피고인 석에 앉아서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냉랭하게 상황을 바라보고 있었다.백지안의 변호사인 스티븐이 담담히 말했다.“이 나라 전설의 대변호사라더니 겨우 이거 밖에 안 되는군.”백지안이 소곤소곤 물었다.“확실히 이길 수 있는 거죠?”“뭐, 대충 그렇게 되겠군요. 최하준을 보는 재판장의 시선이 얼마나 불만스러운지 보라고요. 이제 내가 마지막으로 밟아주면 확인사살이 되겠습니다.”스티븐이 일어서며 하준에게 물었다.“최하준 씨, 최근 유부녀와 만난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사실입니까?”하준의 입술이 살짝 움직였다.“내 전처입니다만….”“제 질문에 사실인지 여부만 말씀하시죠. 아직 다른 사람과 혼인관계에 있는 여성과 사귀고 있습니까?”스티븐이 물었다.“그렇습니다.”하준이 끄덕였다.스티븐이 씩 웃으며 재판장을 돌아보았다.“존경하는 재판장님, 들으셨습니까? 어떤 이유에서든 최하준은 대중 앞에 드러내 놓고 유부녀와 사귀고 있습니다. 사회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을 정도로 저열한 윤리관을 가진 사람입니다. 최하준은 백지안 씨의 사랑을 기만하여 의뢰인의 인생에서 십 년이 넘는 시간을 낭비하게 만드는 등 죄질이 심히 불량하고 사회적 비난의 가능성이 크니 부디 재판장님께서는 현명한 판단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상대의 진심을 그저 희롱하는 이란 사람에게 돈이 생겼다 하면 무고한 여성을 해칠 뿐입니다. 재판장은 스티븐의 변론을 듣자 최하준에 대한 비호감이 더 커졌다.최하준이 일어섰다.“백지안 씨,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보겠습니다. 저와 백지안 씨가 성관계를 가진 적이 있습니까?”백지안이 원망스러운 눈으로 하준을 쳐다보았다.“인정하지 않겠다면 나도 어쩔 수가 없군요.”“돌려 말하지 말고 직접적으로 말씀해 주시죠.”하준이 싸늘하게 말했다.“네.”백지안이 고개를 끄덕였다.하준이 재판장을 돌아보았다.“이쯤에서 제 마지막 증인을 신청합니다.”“증인이 누굽니까?”재판장이 물었다.“백지안 씨의 친오빠인 백윤택 씨입니다.”하준의 말을 듣고 백
백지안과 시선을 마주친 백윤택은 얼른 목을 움츠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백지안은 바로 눈시울을 붉히며 그렁그렁한 눈으로 말을 건넸다.“오빠. 그동안 어디 갔었어? 너무나 걱정했는데. 어디 다쳤어? 최하준이 협박한 거야?하준이 바로 지적했다.“백지안 씨, 언사에 주의해 주십시오. 비방으로 고소할 수도 있습니다.”백윤택이 불안한 듯 떨면서 증인석에 앉자 하준이 질문했다.“백윤택 씨, 본인의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나서 제가 여러 차례 영하를 도와주고 수 차례 영하 그릅을 위해서 파트너를 찾아주기도 했었죠?”백윤택이 덜덜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렇습니다.”하준이 질문을 이어갔다.“제 도움이 없었어도 영하 그룹이 오늘날까지 버틸 수 있었겠습니까?”백윤택이 고개를 저었다.“아닙니다.”하준이 다시 물었다.“백윤택 씨의 여동생은 저와 성관계를 가졌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게 사실이라고 생각하십니까?”스티븐이 벌떡 일어섰다.“이의있습니다. 백윤택은 제 의뢰인의 오빠일 뿐입니다. 개인 간의 비밀스러운 문제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제가 알기로 백윤택 씨와 최하준은 내내 관계가 그렇게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최하준의 증인이 되겠다니 증인을 협박한 정황이 있지 않은지 의심스럽습니다. 지금 증인의 몸 여기저기를 보시면 상처투성이 입니다.”재판장이 인상을 찡그렸다. 방청석에서는 다들 귓속말을 하느라 웅성댔다.백윤택이 돌연 큰소리로 외쳤다.“아닙니다. 최하준은 저를 협박하지 않았습니다. 백지안의 악독함에 제가 나선 겁니다.”백지안의 안색이 살짝 변하더니 울먹였다.“오빠,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온갖 풍파를 겪으면서 내가 이것저것 해주지 않았다면 오빠는 여기에 이렇게 서 있을 수도 없었을 거야.”하준이 피식 웃었다.“이 세상 좋은 일은 모두 본인이 다하셨군요. 당시 백윤택 씨의 소사는 다 제가 변호를 맡았습니다. 제가 아니었다면 백윤택 씨는 지금 감옥에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백지안 씨는 오빠인 백윤택 씨를 이용하기만
백지안은 얼굴이 창백해지고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백윤택은 전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넌 남의 혼인관계를 깬 당사자였잖아. 최하준과 강여름 사이에 갈등을 조장했고 일부러 자해를 하고는 나더러 최하준에게 가서 해변 별장을 달라고 말하라고 시켰지. 실은 그 집 자체가 탐나서가 아니라 최하준과 강여름이 신혼을 보냈던 곳을 빼앗아 강여름에게 보여주고 충격을 주려는 심보였잖아.”백윤택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심지어 그때 강여름은 임신했었는데 나더러 최하준이 아이들을 너에게 맡기면 잘 돌봐주겠다면서 적극적으로 이혼을 시키려고 했어.”“……”백윤택이 백지안이 뒤에서 자신을 조종해 벌였던 못된 짓을 낱낱이 꺼내 들었다.법정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충격 받은 사람들은 웅성웅성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아니, 최하준이 배신하고 다른 여자랑 결혼해 놓고는 다시 자기를 꼬드겼다고, 자기가 최고의 피해자인 척했었잖아?”“뭐야, 이제 보니 자기가 내연녀였잖아?”“진짜 못됐다. 하마터면 완전히 속을뻔했네.”“그냥 의뭉스러운 정도가 아니라 완전 천하에 못된 것이네. 태어나지도 않은 애를 빼앗아 가려고 한 거야?”“그러게 말이야. 애가 무슨 죄가 있다고.”“최하준도 참 멍청하네. 우리나라 최고의 재벌이라는 인간이 저런 인간한테 빠져서 정신을 못 차리고….”“어이그, 뭐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최하준도 괜찮은 놈은 아니지, 뭐. 멀쩡한 놈이 백지안 같은 인간에게 속아 넘어갔겠어? 양다리를 걸치더니 아주 쌤통이네.”“강여름하고 애들만 불쌍하다.”“……”송영식은 방청석에 앉아 있어서 사람들이 수군대는 것이 아주 잘 들렸다.아 그래도 창백하던 얼굴은 더 하얗게 질려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송영식은 백지안이 그저 권력을 탐하고 허영심이 강한 줄만 알았는데 실체를 알고 나니 상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악랄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심하게 충격 받았다.무엇보다 백지안이 하준의 아이들을 해치려고 했다는 사실이 가장 충격적이었다.
여름과의 신혼집에서 백지안과 지냈던 자신을 생각하니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자신이 했던 멍청한 짓 하나하나가 심장을 찔러오는 것만 같았다.“못된 것.”하준의 눈에 핏발이 섰다. 아무리 참으려고 해도 저절로 욕이 튀어나왔다.“그런 게 아니야!”백지안이 절망감에 울부짖었다.“내가 언제 그랬어? 백윤택, 왜 이렇게 날 모함하는 거야? 대체 최하준이 뭘 해줬길래 이래? 이주혁이 무서워서 그래? 대체 누가 오빠를 그렇게 만들었는지 생각해 보라고!”“너잖아! 네가 그랬다고!”백윤택도 이제 마구 소리를 질렀다.“동생이면서 왜 오빠가 그런 못된 짓을 저지르는 것을 말리지 않고 가만히 보고만 있었어? 강여름과 주변 사람을 해치는 일이라면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넌 그저 부추기기만 했어. 네가 최하준이랑 친구들에게 그렇게 착 달라붙어 있지만 않았으면 나도 그렇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기고만장하지는 않았을 거야. 네가 날 이 지경으로 만든 거라고.”“뭐라는 거야? 지금 이 모든 건 다 오빠가 자초한 짓이잖아. 그 동안 내가 오빠 뒤 처리를 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 줄이나 알아? 어쩜 이렇게 배은망덕하지?”“허, 그래서 내가 귀찮아져서 사람을 시켜서 납치해서 몰래 날 처리해 버리려고 했던 거냐? 이 못된 것! 내가 죽으면 혼자 죽을 줄 알았어?”“미쳤나 봐 진짜! 내가 언제 오빠를 납치했다는 거야? 뚫린 입이라고 아무 소리나 내뱉으면 다 말인 줄 알아?”“정숙하세요!”재판장이 힘껏 법봉을 두드렸다. “계속 쓸 데 없는 소리로 법정을 소란케 하면 구류에 처하겠습니다.”백지안이 훌쩍였다.“억울합니다.”백윤택은 물러서지 않았다.“저는 지금 사실대로 말씀 드리고 있는 겁니다.”재판장의 태양혈이 불뚝거렸다. 다시 화가 나서 법봉을 두드렸다.“조용히 하세요.”재판장이 백지안을 매서운 눈초리로 쳐다보자 정말 화가 났다는 것을 눈치 챈 스티븐이 백지안의 팔을 잡아 당기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했다.재판장이 싸늘하게 말했다.“피고인, 진술하세요.”백지안이 벌
백지안이 얼추 다 울고 눈물을 닦고 있을 때쯤 재판장이 하준에게 말했다.“원고 진술하세요.”하준이 일어서더니 백지안을 바라보았다. 단정히 빗어 넘긴 머리 아래로 슬픔과 한탄이 가득한 하준의 얼굴이 보였다.“누군가가 저에게 첫사랑이 뭐냐고 묻는다면 저는 악몽이라고 하겠습니다. 애초에 왜 저런 사람과 사귀었던 것이 너무나 후회스럽습니다. 저의 유년 시절, 백지안은 저의 빛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백지안을 가까이 두고 10년이 넘는 시간을 모두 그녀에게 바쳤습니다. 백지안 씨든 그 가족이든 저는 그들이 바라는 모든 것을 들어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백지안 씨가 실종되었고, 저는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하준은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말을 이었다.“원래 저는 아내와 계약 결혼을 했습니다. 그러나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저는 아내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백지안 씨가 돌아왔을 때 저는 죄책감을 가지게 되었고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기 위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제일 먼저 달려가 도와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저의 행동이 아내에게 상처가 된 것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아내와 아이들을 3년간 잃게 되었죠.”한숨을 쉬고 하준은 최후 진술을 계속했다.“저는 후회합니다. 특히 진상을 알게 된 최근에 저는 매일매일을 후회 속에 살았습니다. 후회가 된 나머지 속죄를 바라는 마음으로 손가락도 잘랐습니다.”하준은 붕대가 감진 손을 들어 보였다. 다들 헉하고 날카롭게 숨을 들이켰다.“사실 방금 백윤택 씨가 진술한 내용의 일부는 제 기억에 없습니다. 저도 이제 막 알게 된 내용도 있습니다. 저는 백지안에게 빚진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제 전처에게 미안한 마음뿐입니다. 전에는 아내가 권력을 탐하는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은 제가 완전히 오해한 거였습니다. 지금은 그저 미안한 마음뿐입니다.”하준이 재판정을 한 번 돌아보았다.“이제는 너무나 큰 교훈을 얻었습니다. 혹시나 저와 같은 분이 계시다면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전여친은
하준은 웃었다. “이번에 백윤택을 증인으로 부르지 않았어도 결과는 같았을 겁니다. 내가 잘못한 것이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사회 정의 실현이라는 점에서 재판정은 내 쪽의 손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을 테니까요.”“정말 대단하군요.”스티븐이 끄덕이며 승복했다.“앞으로 또 겨루어볼 기회가 있으면 좋겠군요.”그러더니 백지안은 돌아보지도 않고 자리를 떴다.백지안도 조용히 도망치려고 했지만 하준에게 발각되고 말았다.“3일 내로 전액 반환해줘. 3일 지나서도 반환이 안 되면 바로 강제 집행 들어갈 거야. 아, 해변 별장도 오늘 저녁까지 비워. 저녁에 바로 열쇠 받으러 갈 거야.”“최하준, 정말 너무 하잖아.”백지안이 죽일 듯한 시선으로 노려보았다.“남의 집을 그 정도로 오래 공짜로 차지하고 있었으면 충분해. 당장 비워.”그렇게 말하고 하준은 바로 여름에게 갔다.벡윤택의 증언을 다 듣고 나니 여름에게 더욱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여름은 천천히 일어섰다. 그러나 뭔가 말하려고 입을 열기도 전에 하준이 여름을 꽉 안아버렸다.“정말 미안해.”하준은 진심을 담아 사과했다.“내가 너무 바보였어. 당신이 나를 용서하지 않는 게 맞는 것 같아.”“그러면… 용서한다는 말 취소할까?”여름이 떠보듯 물었다.하준은 기겁해서 얼른 덧붙였다.“아니, 그건 안 되지.”여름이 푸흡하고 웃었다.“됐어. 이미 다 지나간 옛날얘기 해 봤자, 곱씹을수록 속만 상하지, 뭐.”“누가 됐든 사랑하는 사람과의 신혼집을 반려자가 다른 사람에게 주어버렸다면 죽도록 화가 나는 게 당연하죠. 여름이가 하준 씨 치료 때문에 일부러 데리고 그 해변 별장으로 간 거 알아요? 실은 두 사람 진짜 사랑은 거기서 싹튼 거라고요.”하준은 얼굴이 화끈해졌다. 도저히 얼굴을 들 수 없을 지경이었다.“몰랐습니다. 전혀 기억이 나질 않….”“그만 해, 윤서야. 그런 얘기 이제서와 해서 뭐 하려고.”여름이 말렸다.윤서는 씩씩거렸다.“어이구, 아주 속도 넓어.”여름은 당황했다.“내가 일일이
여름이 빙그레 웃었다.“사랑하는데 백지안이 어떤 인간인지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 사랑한다면 아무리 못된 인간이라도 다 포용할 수 있어야지. 사랑에서 최고의 경지는 상대와 상관없이 내가 사랑하면 되는 거잖아. 어쨌거나 백지안 같은 쓰레기도 항상 주워가는 사람이 있더라고. 아무도 주워가지 않으면 또 누군가를 해칠지도 모르는데 저런 거 주워가는 데는 그래도 가 제일 적합한지도 몰라.”“일리 있네. 저기요, 얼른 따라가 봐요. 백지안은 지금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할 테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으려고 할 텐데 얼른 가서 위로해 줘야죠.”윤서가 엄지 치켜올렸다.여름과 윤서가 척척 죽을 맞추며 송영식을 놀려댔다.송영식은 한창 우울하던 참이었는데 여름과 유서의 공격에 불현듯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임윤서, 적당히 하라고.”송영식은 울컥했다. “이제 다 했는데!”윤서는 고개를 돌리고는 원연수를 쳐다보았다.“같이 저녁 먹는다고 했죠? 가요. 여름아, 너도 같이…”“그래!”여름도 원연수가 꽤나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동시에 하준의 불만스러운 시선을 받았다. 여름은 눈을 깜빡였다.“저기… 오늘 하준 씨가 한 턱 쏘라고 할까? 마침 재판도 이겼겠다.”“자기야….”둘이서만 오붓하게 축하하고 싶었던 하준은 기분이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만날 둘이서만 놀면 재미없잖아. 사람 많으면 재미있고.”여름이 바로 말을 끊었다.하준의 충격은 컸다. 이제 막 사이가 좋아지는 참인데 둘이서만 있는 게 재미없다니…. “싫어”하준이 아무 말 없자 여름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아니, 어디 가서 먹을까 생각 중이었지.”하준이 얼른 가식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여름이만 기쁘게 할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그래서, 어디로 갈지 결정했어?”여름이 생글생글 웃으며 물었다.“응. 지난번에 영식이가 우리를 데려갔던 가이세키 요리집이 있는데 분위기도 우아하고 괜찮았어.”하준이 바로 답했다.“가이세티 요리 좋네. 연수 씨,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