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바보냐고!’육민관은 여름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 지는 것을 보고는 한숨을 쉬고 말았다.“재결합 하신대서 솔직히 ‘세상에 남자가 그거 하나 밖에 없나, 왜 저렇게 최하준에게 목을 메시나?’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사실 전에는 백지안에게 당한 거고 지금 누님께 하는 걸 보면 진심인 것 같습니다. 누님이 아니라면 최하준 같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손에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두 분 사이에 걸림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뿐인 겁니다.”그런 마음이란 건 여름도 알았다.사실 말로는 재결합하겠다고 하긴 했다.그러나 아이들 때문이기도 했고, 최하준이 너무나 질척거리기도 해서 더 버티기도 힘들었다.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서 정말 하준에게 완전히 마음이 열린 것은 아니었다.육민관이 어깨를 으쓱했다.“그때 누님이 귀국하고 나서 복수 때문에 최하준과 사귄다고 했을 때 마음이 약해지셨잖아요? 하지만 제 손이 이렇게 되고 나서는 누님의 마음이 완전히 싸늘하게 식는 게 보이더라고요.솔직히 저는 완전히 상관 없었어요. 누님이 신경쓰일 뿐이었죠. 아마도 저를 제대로 보호해 주지 못하고 누님 일에 저를 끌고 들어갔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거든요. 이번에는 정말 두 분 사이에 앙금이 없이 제대로 잘 해보셨으면 합니다.”그러더니 육민관은 복도를 걸어갔다.몇 걸음 걷다가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아까 보니까 최 회장 얼굴이 그다지 좋지 않더라고요.”그 말을 듣고 여름은 얼음처럼 굳어있었다. 그때 엄 실장이 왔다.“대표님, 오 사장이 드릴 말씀이 있다고 점심에 식사나 같이 하시자고 합니다.”“제가 좀 바빠요. 오늘 휴가 좀 낼게요. 오후에 돌아오지 않을 거에요.”여름은 파일을 엄 실장에 넘기고 그대로 회사에서 뛰쳐나갔다.그 길로 FTT로 내달렸다.FTT 본사에 도착하자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대로 꼭대기로 올라가 사무실 문을 차고 들어갔다.안에 몇몇 중역이 이야기를 나누다가 의아한 눈으로 문 쪽을 돌아보았다.“여긴 어쩐 일이야?”하준이 벌떡 일어섰다. 살짝 창백한
여름은 핑 도는 눈물을 꾹 참아보았지만 그래도 눈시울은 붉어졌다.“최하준, 제정신이야?”여름은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여름의 붉어진 눈시울을 본 하준은 이제 더 이상 마음이 불안하지 않았다. 입가에 엷은 미소까지 올라왔다.“나 때문에 속상했구나?”“……”여름은 울컥해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이 와중에도 내가 자기를 신경 쓰는지 안 쓰는지가 문제야?“자기가 날 이렇게까지 생각해 주다니 너무 기쁘다.”하준이 부드럽게 말했다.“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실행해 버릴 걸.”“아니, 난….”여름은 목이 메였다.“괜찮아, 아무 말도 하지마. 내 얘기 좀 들어 봐.”하준은 멀쩡한 손으로 여름의 입을 막았다.“민관이는 가족 같은 친구라고 했었잖아? 내가 민관이 손을 건드리면 우리 두 사람 사이는 영원히 끝이라고. 하지만 그때는 내가 정신이 나가서 그런 짓을 해버리고 말았지. 실은 그때 난 민관이에게 너무나 질투가 났었어. 당신이 다른 사람을 그렇게 소중하게 여긴다고 생각하니 너무 속상했던 거야. 민관이에 대한 당신 마음이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알게 되었지.”“나랑 재결합하겠다고 말은 했지만 실은 애들 때문이었다는 거 다 알아. 자기가 먼저 나에게 전화나 톡을 보내거나 보자고 하지도 않지. 우리 사이에는 깊은 골이 있었어. 하나는 백소영 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민관이 일이었지. 백소영 건은 내가 이제 어떻게 메워볼 수가 없지만 민관이 일은 내가 뭔가 해볼 여지가 있지 않을까 싶더라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재결합 한다고 해도 우리 사이는 영원히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했을 거야.”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을 꼭 안았다.“자기야, 내 예전 기억은 엉망이라 기억을 못하지만 당신이 귀국하고 나서 우리가 사귀었던 시간은 짧지만 난 잊을 수가 없어. 내게 복수하려고 작전을 세우고 접근했다는 걸 아는데도 그 시간을 생각하면 너무나 행복해. 그러니 날 그렇게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당신을 아껴주지 못했던 내가 얼마나 바보야? 나에게 다시 그런 기회를 한 번만
“그으래? 진짜 한 번 해볼까?”여름이 손을 뻗어서 정말 확 누를듯한 동작을 하자 하준은 얼른 눈을 감았다. 기다란 눈썹은 바르르 떨리고 태양혈은 바짝 긴장해서 힘줄이 올라왔다.여름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까치발을 하고 하준의 입술에 깃털 같은 뽀뽀를 해주었다.기다리던 극심한 통증이 아니라 푸딩 같은 입술이 닿자 하준은 깜짝 놀라서 눈을 번쩍 떴다.“입술 벌려.”여름은 입술을 떼지 않은 채로 하준에게 가볍게 명령했다.여름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작고 부드러웠지만 특유의 카리스마가 있어서 어쩐지 심장이 떨렸다.이번 키스는 여느 키스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바로 깨달았다. 열정적인 여름이 반응에 하준은 온몸의 피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살짝 진도를 더 빼려고 했더니 갑자기 여름이 하준의 손을 잡았다.“여름아…”하준의 섹시하게 잠긴 목소리가 울렸다.“준, 너무 흥분하면 안 돼. 진동이 오면 아프다며? 지금 자기 몸 떨리는 거 봐. “이럴 줄 알았으면 그런 소리 하지 말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키스하고 있으면 하나도 안 아파.”“어허!”여름이 귀엽게 하준을 흘겨 보았다.여름의 애교스러운 모습에 하준의 심장은 더욱 간질거렸다.“자기가 그렇게 불러주니까 너무 좋은데? 옛날에도 날 그렇게 불렀어? 어쩐지 익숙한 느낌인걸?”“응.”여름이 눈을 내리깔았다. 여름은 하준이 이전의 기억을 떠올리지 않기를 바랐다.자칫했다가는 과거를 떠올리려고 하다가 오히려 뇌에 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소염제는 먹고 있어?”여름이 물었다.“새벽에 링거도 맞았고, 약도 받아 왔지.”하준이 착실히 대답했다.“일하려면 타자도 치고 해야 하는데 불편해서 어째?”여름이 물었다. 하준은 육민관 보다는 키보드를 건드려야 할 일이 많으니 걱정이 됐다.“천천히 적응하면 되지.”하준이 싱긋 웃었다.“당신의 마음을 얻을 수만 있다면 팔을 하나 잃는대도 난 괜찮아.”“안 되지.”여름이 단호하게 말했다.“나 때문에 또 이런 짓
여름은 그냥 대충 둘러대느라 한 소리에 하준이 진지하게 대응하자 웃음이 났다.잘 생긴 사람 마다할 사람이야 없겠지만 사실 여름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된다면 늙어 쪼글쪼글해져도 좋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자기야, 점심 시간인데 같이 밥이나 먹을까?”하준이 권했다.“그래.”“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우리 회사 근처에 괜찮은 레스토랑이 많….”“집에 가서 먹자.”여름이 말을 끊었다.“자기 이래가지고 일하면 안 돼. 집에 가서 쉬어야 해.”“하지만 난 당신이랑 있고 싶단 말이야. 당신이 본가에 가서 같이 있어주진 않을 거잖아?”“그렇다고 아버지랑 있는데 우리 집에 갈 수도 없지. 당신 데리고 갔다가는 우리 아버지가 가만 두지 않으실 걸.”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청하파라곤으로 가자. 거기 자기 집 있지? 낮에는 거기서 좀 쉬었다가 밤에 애들 보러 가자.”“좋아.”하준은 너문 기뻤다. 여름과 할 수만 있다면 회사를 한 달이라도 쉬고 싶었다.가는 길에는 여름이 운전했다. 하준은 보조석에 앉아서 어린애처럼 즐거워했다.“그쪽 단지 근처에는 뭐가 없으니까 가는 길에 멀 좀 사가지고 가자.”‘응, 가다가 마트에 들르자.”여름도 동의했다.마트에 간 여름은 정육 코너에서 갈비를 샀다. 하준은 기분이 한껏 좋아졌다.“역시 기억하고 있었구나. 내가 갈비 좋아하는 거.”“그럼, 여울이도 당신을 닮아서 좋아하거든.”딸을 생각하자 또 마음 한 구석이 따스해졌다.“그냥 본가로 갈까? 애들도 같이 먹게?”“오늘은 당신이랑 둘만 있고 싶어.”하준이 여름의 손을 잡았다.“둘이서만 보낸 시간이 부족해서? 어제도 둘이서만 시간 보내고 싶다고 해서 같이 고기 먹으러 갔었잖아.”여름은 부모로서 온전히 함께해주지 못해 점점 더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고기 먹다 말고 중간부터는 당신이 기분이 많이 안 좋았잖아.”입이 살짝 나온 하준이 말했다.“그래서 내가 집에 가서 이렇게 해야겠다고 생각한 거지.”여름은 어이가 없
“아니 다행이네.”여름이 싱긋 웃으며 찬성했다.하준은 살짝 말문이 막혔지만 곧 다시 말을 이었다.“이렇게 사랑스럽고 능력 있고 요리 솜씨까지 갖춘 와이프를 두고 그런 것에 정신을 팔다니 말이야. 당신하고는 비교도 안 되는데. 내 머리가 어떻게 됐던 게 틀림없어.”여름이 눈썹을 치켜 올리더니 아무 말 없이 가만히 하준의 아부를 들었다.“여름아!”하준이 여름을 와락 안았다.“자기는 어쩜 이렇게 사랑스럽지?”“그런 건 날 이렇게 사랑스럽게 낳아준 우리 엄마게 여쭤봐야겠네.”여름은 당연하다는 듯 하준의 아부를 받았다.하준은 빙긋 웃더니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여 여름의 입술에 키스했다.“그만 해, 설거지 해야 한단 말이야.”여름이 밀어냈다.“그냥 있어. 내가 씻을 거야.”하준이 말했다.“손이 그 모양인데 어떻게 씻는다고….”“설거지 하려고 아까 쇼핑하면서 고무장갑 사 두었지.”하준이 고무장갑을 꺼냈다.“그러면 물도 안 들어간다고.” 여름은 하준이 그냥 해본 소리인 줄 알고 있다가 깜짝 놀랐다.“됐어. 좀 아물면 그때 하도록 해.”여름이 고무장갑을 빼앗았다.“자기가 설거지하는 걸 차마 볼 수 없어서 그래.”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예전에는 내가 아무것도 몰랐지만 이제는 내가 당신을 매일, 매 순간 아껴줄 거야. 당신이 한 음식이 맛있긴 하지만 앞으로는 다른 사람이 한 음식도 먹고 편식도 하지 않을 거야.”여름은 깜짝 놀랐다.원래 하준은 편식이 매우 심해서 무슨 수를 쓰든 여름에게 음식을 하도록 했었다. 그런 하준이 이런 각오를 보여준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었다.“나 요리하는 거 좋아해 그렇게 힘들지 않아. 뭐, 가끔은 일이 힘드니까 매일 음식을 하고 싶은 건 아니지만 하기 싫을 때는 내가 안 할게. 그럴 때만 너무 시키지 않으면 돼.”“그래,”하준은 이해할 수 있었다.“그럼 이제 가서 쉬어. 오늘은 내가 설거지 할 거야.”여름이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설거지가 끝나자 하준은 다시 여름을 품에 안았다.“자
하준과 여름 사이의 일은 요즘 어지간한 아이돌 스캔들 이상으로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았다.SNS에 포스팅을 하자마자 엄청난 댓글이 달렸다.-와, 이렇게 대놓고 재결합?-30부작짜리 대하드라마 갑자기 종결하는 느낌인데? 뭔가 적응 안 됨.-끝나긴 뭘 끝나? 양유진하고 강여름 이혼도 안 했는데. 양유진이 이혼 안 해준다며? 아마 시간 꽤 끌게 될 걸.-이제는 정신 차리고 강여름에게 잘 해줘라, 최하준.-와, 잠자리도 안 되는 인간이랑 재결합이라니 찐사랑이다.“……”하준은 흥미진진하게 네티즌의 댓글을 읽었다.이때 단톡방에서 송영식이 폭주하기 시작했다.-야, 완전 오그라든다. 이게 뭐야?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지더니 답했다.-솔로가 뭘 알겠냐?-뭐라고? 지금 솔로 무시하냐? 아직 솔로라도 난 아기도 있거든.-그 아기가 나중에 널 만나면 ‘아저씨’라고 부르겠지만!하준의 묵직한 한 방에 송영식은 할말은 잃었다.-……한동안 단톡방에 전혀 출몰하지 않던 이지훈도 나타났다.-우리 써머가 진짜 네 질척질에 지쳐서 재결합하겠다고 한 거 아니냐? 이제 하준이 너 다시는 울 써머 괴롭히지 마라. 그랬다가는 내가 진짜 거 가만 안 둔다.하준의 안색이 어두워졌다.-말 조심하지. 여름이는 내 와이프거든. 너랑 무슨 상관인데?지훈이 답했다-써머는 동성 사람이고 난 동성의 제왕이니까 내가 친정오빠나 다름 없다고. 울 써머도 내 말에 완전 동의할걸.이주혁이 참전했다.-아이고, 오늘 아주 단톡방 불 나네. 지훈이까지 나오고. 난 아주 톡에서 친구 끊은 줄 알았다.지훈이 답했다.- 정신 나간 애들 셋하고 떠들려니까 나도 돌아버릴 것 같아서 안 보고 있었지.이주혁이 비웃었다.-얘가 아주 매를 버네.이지훈이 반격했다.-내가 틀린 말 했냐? 그 동안 너희들 다 백지안 치마폭에 싸여서 정신을 못 차렸잖아? 내가 니들한테 바보 옮을까 봐 아주 무서웠다.이주혁이 슬슬 마무리했다.-난 수술하러 들어간다. 오늘은 더 못 떠들어.송영식도 보탰다.-난 너무
여름은 발그레진 얼굴로 샤워를 하고 샤워실에서 나왔다.하준은 느른하게 침대에 누워 야릇한 눈으로 여름을 바라보았다.“뭘 대낮부터 샤워를 하고 그래?”여름이 쌩그랗게 하준을 노려보더니 새삼 얼굴을 붉혔다.“다 자기 때문이잖아. 완전 땀에 젖었다고.”“그으래?”하준이 씩 웃더니 갑자기 침대에서 뛰어내려 여름을 번쩍 안아 올렸다.여름은 깜짝 놀라서 얼른 하준의 목을 안았다.“왜 또 이래? 얼른 내려 놔.”하준은 거칠게 여름에게 키스했다.“내가 아직 다 낫지는 않았어도 당신은 충분히 즐겁게 해줄 수 있다고. 어때? 방금 좋았어?”“……”시선을 피하는 여름의 볼은 다시 확 달아올랐다.“아무 말도 안 하면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어.”하준의 섹시한 얼굴에 은은한 웃음이 번졌다.“적당히 해.”여름은 살짝 화가 난 척했다.“이걸 어떻게 적당히 하나?”여름을 꼭 안은 하준의 목소리가 점점 더 가라앉았다.“아무데도 안 가고 하루 종일 우리 자기랑 이렇게 있고 싶다.”여름은 하준의 품에 가만히 안겨서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최근 별별 일이 다 벌어졌지만, 하준의 품에 이렇게 안겨 있으니 갑자기 미래에 벌어질 아직 알 수 없는 일도 전혀 두렵지 않아졌다.그러나 이 작은 평화는 곧 윤서의 전화로 깨졌다.“강여름, 바른 대로 불어. 너 또 최하준이랑 뭐 하고 있어?”스피커 폰이 아닌데도 집이 워낙 조용해서 하준에게도 윤서의 목소리는 그대로 들렸다.여름의 몸이 확 굳어졌다. 자동적으로 백지안이 집에 CCTV라도 달아둔 게 아닌가 싶은 찰나에 다시 윤서의 목소리가 들렸다.“뭐 하느라고 톡을 그렇게 보냈는데 답이 없어?”여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얼른 톡을 열어보았다. 윤서가 보낸 톡이 많았는데 뜨거운 시간을 보내느라 보지 못했던 것이다.하준과 보냈던 시간을 떠올리고 여름은 다시 얼굴이 달아올랐다.“하긴 뭘 해. 잠깐 낮잠 자느라고 못 봤어.”그 말을 들은 하준이 은근한 눈으로 여름을 흘긋 쳐다보았다.여름이 하준을 노려보았다.윤서는 콧방귀
여름이 어색하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윤서 말은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 실은… 아까 그것도 난 좋았어.”당장 가서 윤서의 입을 그냥 꿰매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그렇게 좋았어?”하준이 고개를 들었다. 깊은 눈에는 웃음기가 어려있었다.여름은 그제서야 자신이 당했다는 것을 깨닫고 하준을 노려보았다.“아, 몰라!”“에이, 그러지 말고.”하준이 얼른 여름의 허리를 껴안고는 실망 듯 말을 이었다.“윤서 씨 말도 틀리진 않지. 내가 계속 이렇게 안 된다고 하면 날 떠날 거야?”여름이 정색했다.“최하준, 내가 당신을 떠난다면 이 일과는 무관할 거야. 그게 그렇게 신경 쓰였다면 애초에 자기랑 재결합 안 했어.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몰라. 당신이 그렇게 달콤한 말을 해왔어도 결국 우리가 헤어졌던 것처럼 말이야. 난 이제 미래는 믿지 않아. 그냥 지금을 소중히 생각하기로 했어.”그 말을 들은 하준은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알겠어. 역시나 나에 대해서 불안한가 보다. 괜찮아. 내가 지금부터 죽을 때까지 평생을 두고 내 사랑을 증명해 보일게.”그러더니 여름의 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하지만… 최선을 다해서 치료해 볼게. 아무래도 자기한테는… 그게 중요한 것 같거든.”“……”여름이 몸을 틀었다.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올랐다.‘조만간 최하준 때문에 내가 미쳐버릴지도 몰라.’“내일이 백지안이랑 2차 공판이야. 이번에는 당신도 보러 올래?”하준이 웃으며 물었다.“내일은 바쁜데….”“보러 와. 우리 재결합 후 첫 재판에서 백지안이 지는 거 보고 싶지 않아? 그리고 법정에서 난 아주 멋지다고.”하준이 막무가내로 졸라댔다.여름은 결국 보러 가겠다고 답하고 말았다.******다음 날, 여름이 하준의 재판을 보러 가겠다고 하자 윤서가 비관론을 펼쳤다.“하지만 지금 명백히 백지안 쪽 분위기가 더 좋지 않니? 이번에는 최하준이 질걸? 가서 위로해 주게?”“아니. 이번에도 반드시 이길 거야.”여름이 곧 반격했다.“어허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