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혁은 자신이 백소영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할 것이다.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줄은 몰랐다. 집안이 다 몰락하고 죽기까지 했는데도 내버려두지 못하다니….백지안에게 뼈에 사무치는 원한을 가지고 있다면 이주혁은 죽도록 미웠다.다시 살 기회를 얻었는데 또 이주혁 같은 인간과 얽히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죽어라 피해 다녔는데 결국 만나고 만 것이다.이제는 위약금을 물고라도 바미 엔터를 벗어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그러 생각을 하고 있는데 휴대 전화가 울렸다. 권현규였다.“연수 씨, 좋은 소식이야. 방금 이 대표가 좀 미안했던지 주연은 힘들지만 조연을 맡겨 보겠다는 거야.”원연수의 얼굴이 굳어졌다.“정말로 조연을 맡기겠대요? 회사에서 나가라는 것도 아니고?”권현규가 멋쩍게 말을 이었다.“이 대표를 그렇게 나쁘게만 생각하지 마. 아 참, 조연은 너무 악녀 역이라서 자네 연기에는 도전이 될 수도 있겠던데, 그게 아무나 소화하기는 힘든 배역이잖아? 이렇게 하자고, 내가 구 감독에게 얘기해서 캐릭터를 그렇게까지 못된 애가 아닌 쪽으로 좀 조정해 달라고 해 볼게.”“구 감독님이 캐릭터 바꾸는 거 제일 싫어하는 거 아시잖아요?”원연수가 지적했다.“그랬다가는 내가 구 감독님에게 미움 산다고요. 나중에 촬영 들어가서 욕먹을 거예요.”“그러면 어떻게 해?”권현규는 머리가 지끈거렸다.“그나마 이 대표가 호의로 아이디어였는데….”“호의요?”원연수는 우습다는 듯 답했다.“안 해요. 구 감독 작품에 이제 흥미 없어요.”“연수 씨, 왜 이렇게 고집을 부려?”권현규도 슬슬 화가 났다.“이 건을 거절해서 이주혁 대표 건드렸다가는 연예계에서 바로 블랙리스트 올라갈 거야.”“……”권현규가 달랬다.“이거 하나만 잘 찍어 보자고. 그러면 내가 연말에 연기상 하나 어떻게 해 볼게. 사실 요즘은 호감 가는 배역 보다는 배우가 연기를 잘하느냐가 더 중요하지. 시아가 마음에 안 들면 자기가 연기로 눌러버리면 되잖아.”한참 만에야 원연수가 입을 뗐다.“알겠어요.”‘찍으
원연수는 아무 말이 없었다.하얀 가면은 흐릿한 불빛 아래서 소름 끼치도록 괴이하게 빛나고 있었다.백윤택은 너무 오래 갇혀있어서 이제 거의 무너지기 일보직전이었다. 미친 듯 소리를 질렀다.“백지안이군, 백지안이야! 백지안을 불러줘요, 내가 걔 오빠요.”“백지안은 당신 같은 혈육이 있다는 것 자체를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것 같던데.”원연수가 싸늘하게 말을 이었다.“뭘 해도 허구한 날 발목이나 잡으니까. 그렇게 알아듣게 말을 하고 경고를 해도 당최 정신을 못 차렸잖아? 그렇지만 않았어도 일이 지금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거야. 대체 뭐 하나 시키는 거라도 제대로 한 게 있어야 말이지.”“잘못했습니다. 제가 무조건 다 잘못했어요.”백윤택은 원연수의 말을 들을수록 백지안의 소행이라는 확신이 강해졌다.다른 사람은 몰라도 백윤택은 동생이 얼마나 악랄한지도 알았고, 배후에 미스터리의 인물이 늘 백지안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무슨 일이든 해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앞으로는 제가 정말 얌전히 있을 거라고 전해주세요”백윤택은 눈물 콧물을 짜며 질질 울었다.“이제는 이주혁 때문에 아랫도리도 다 불구가 되었으니 이 정도면 제 사정도 불쌍하지 않습니까? 그래도 제가 걔 오빠인데 정말 한 번만 봐주세요.”원연수의 눈이 번뜩였다.백윤택을 불구로 만든 것이 이주혁일 줄은 몰랐던 거시다.‘백지안이라면 정신 못 차리고 감싸는 인간이 아니었던가?’“유감스럽게도 너무 늦게 깨달은 것 같네.”원연수가 싸늘하게 뱉었다.“세상에는 아무리 후회해 봐야 소용 없는 일이 있지. 오늘은 내가 여기 오는 마지막 날이야. 무슨 뜻인지 알겠나?”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백윤택의 머리 속에 마구 솟구쳤다.완전히 멘붕이 되어 눈물 콧물을 줄줄 흘렸다.“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이렇게 빕니다. 저를 놓아주시기만 하면 돈은 얼마든지 드릴게요.”“고맙지만 사양하겠어. 우리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은 신용이 있어야 하거든. 돈을 받았으면 돈 받은 값은 해야지.”원연
원연수는 최하준이라는 인간이 정말 싫었지만 친구가 다시 최하준과 재결합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자신의 호불호 따위는 뒤로 밀어두기로 했다.“백윤택이 도망치고 나면 이 곳은 더 이상 쓸 수 없으니 자네는 최대한 빨리 자리를 옮기도록 해.원연수가 일렀다.“알겠습니다.”******원연수가 떠나고 수하는 백윤택을 데리고 뒷산으로 갔따.백윤택이 깨어났을 때는 수하가 삽을 들고 열심히 구덩이를 파고 있었다.그 구덩이에 자신이 생매장될 것이라는 것을 백윤택은 순식간에 파악했다.이미 자신이 죽은 줄 알았는데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가슴의 통증을 꾹 참고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쳤다.“어라? 어디 갔지? 거기 서!!!”어느 정도 벗어나던 중에 그 사람이 백윤택이 사라진 것을 발견하고 바로 쫓아왔다.백윤택은 있는 힘껏 “사람 살려!”를 외치며 산 아래 마을을 향해 달렸다.추적자는 상황이 여의치 않다 추적을 포기하고 다른 방향으로 달아나 버렸다.백윤택은 마을에 들어서자 바로 사람을 잡아 휴대 전화를 빌렸다. 구급차를 부를까 하다가 자신이 도망쳤다는 사실을 백지안이 알게 될까 봐 경찰에 신고했다.경찰서에 도착하자 백윤택은 신고부터 했다. 신고 내용대로 납치되었다는 곳을 경찰이 찾아가 보았지만 사람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날 납치한 건 백지안입니다.”백윤택이 바로 말했다.“걔가 날 해치려는 거예요. 빨리 가서 걔부터 잡아야 해요.”경찰이 벌벌 떠는 백윤택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백지안 씨가 해치려고 했다는데, 증거 있습니까?”“있죠. 날 납치했던 사람이 대충 그렇다고 인정한 거나 다름 없다니까요.”백윤택이 다급히 말했다.“하지만 백윤택 씨를 납치했다는 사람이 흔적도 업습니다. 백지안 씨를 직접 본 겁니까?”경찰이 물었다.“얼굴은 못 봤지만 걔가 맞아요. 빨리 가서 잡아주세요. 제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일이라니까요.”백윤택이 덜덜 떨며 답했다.“저기, 백지안을 직접 본 것도 아니고, 백윤택 씨가 말한 납치범도 못
“확실히 뭘 많이 알고 있는 것 같군요.”하준의 말투는 사뭇 싸늘했다.그 말투를 들은 백윤택은 심장이 떨렸다.“하지만 내가 법정에서 증언해 줄게. 대신 이주혁에게 날 보호해달라고 부탁만 좀 해줘. 다시는 납치당하고 싶지 않거든.”백윤택에게 최하준은 이미 예전 같지 않아서 큰 힘이 되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 친구인 이주혁은 아직 충분히 자신을 지켜줄 힘이 있으리라 생각했다.“납치라니?”하준이 흠칫했다.“그래, 백지안 고것이 내가 자꾸 자기 발목을 잡는다는 생각이 들었던지 날 제거하려고 했다니까.”백윤택이 증오에 차서 말을 이었다.“한 달 내내 지하굴 같은 곳에 갇혀 있었다고. 툭하면 가면 쓴 여자가 나타나서 고문을 하더니 결국은 날 죽이려고 들잖아. 그래서 간신히 도망쳐 나오기는 했는데 지금 온몸이 상처투성이야.”“뭐, 내가 보디가드를 붙여주겠습니다. 일단 지안이에게 들키지 않도록 얌전히 지내요.”하준이 바로 답했다.“알았어, 알았어. 내 목숨은 자네에 달렸네.”백윤택은 이제 이것저것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통화가 끝나고 하준이 휴대 전화를 내려 놓았다.여름이 앞에서 지글거리는 고기를 뒤집었다. 고소한 고기 향이 피어 올랐다.“백지안이 자기를 죽이려고 한다고 백윤택이 그래?”“응.”하준은 이 상황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굉장히 놀란 모양이야.”“당신에게까지 도와달라고 하다니 정말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두루 충격이 큰 모양인데. 하지만 이상하네. 백지안 그 독한 것이 백윤택을 살려서 내보냈다고?”여름이 의심스럽다는 듯 말했다.“나도 그 생각했어.”하준이 생각에 잠겼다.“지금 누군가가 일부러 백윤택을 납치해서는 백지안에게 뒤집어 씌웠다고 생각하는 거지? 백지안, 백윤택 남매에게 뭔가 억하심정이 있는 사람일까?”여름이 어깨를 으쓱했다.“그렇겠지. 그렇게 비열한 것들이니 우리 말고도 누군가에게 원한을 산 거야. 이번에는 당신이 그 덕을 보겠는걸. 최 변, 이번 재판은 이기겠네요?”“어허, 백윤택이
당시 하준이 못된 짓을 시행하려고 했을 때 여름은 잘린 손가락은 다시는 되돌릴 수 없다고 경고했었다. 그런데도 하준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대로 밀어붙였다.백지안에게 이용당한 것이라고는 해도 그때를 떠올릴 때마다 하준은 무한한 죄책감을 느끼고는 했다.******하준의 본가.야심한 밤. 하준은 잠들지 못했다.한참을 가만히 창가에 서있다가 마침내 칼을 들어 내리쳤다.이주혁은 자다 말고 긴급 호출을 받고 벌떡 일어나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하준의 치료는 일단 끝나있었다. 이주혁은 사라진 하준의 손가락 자리를 보고 눈빛이 어두워졌다.“야, 정신 나갔냐?”“그냥 손가락이잖아. 손도 아니고.”하준이 핏기 없는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이젠 빚진 거 없어서 다행이야. 이제 나랑 여름이 사이에 있던 묘한 장벽도 사라질 거야.”“미쳤네, 미쳤어.”이주혁이 화를 냈다.“이래서 내가 사랑이 싫은 거야. 너나 영식이나 사랑에 빠졌다 하면 미친다니까? 안 그래도 하나 입원시켜놓고 정신 없어 죽겠는데 너까지….”“넌 몰라. 사랑이라는 상처를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돈 수천억 버는 것보다 달콤할 때가 있다고.”하준이 담담히 웃었다.“손가락 하나를 잃고 완전한 사랑을 얻을 수 있다면 난 얼마든지 희생할 가치가 있다고 봐. 그리고 남에게 빚지고는 못살겠단 말이야.”이주혁은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갑자기 병사에 털썩 주저 앉는데 약간 정신이 멍해 보였다.“하준아, 넌 죽은 사람이 꿈에 나와서 뭘 부탁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냐?”하준은 어리둥절했다.“글쎄? 왜?”이주혁은 오늘 원연수를 만났던 일을 간단하게 말했다.“그 말이 진짜가 아니라면 원연수가 소영이 어머님 유골이 바꿔치기 당한 일은 어떻게 알았고, 뭐 한다고 소영이 아버님 유골을 몰래 파서 이장했겠냐?”하준은 살짝 놀라서 잠시 할 말을 잃었다.“뭐, 이 넓은 세상에 별별 일이 다 벌어질 수 있겠지. 그러니 백지영이 세상을 떠났다면 원연수가 하는 말은 진실이 아닐까? 현몽이 아주 없는
“……”육민관은 씹던 껌을 삼킬뻔했다.육민관의 시선이 얼른 붕대를 감은 하준의 손을 보더니 놀라서 동공이 확장되었다.“아니, 이게 대체….”“사죄의 의미야. 전에도 말했었잖나.”하준이 무슨 빌린 돈이라도 갚는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다. 육민관은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곧 정신을 차리고 존경스럽다는 눈으로 하준을 바라보았다.하준이 그저 입으로만 하는 소리인 줄 알았는데 몰락했다고는 해도 한때 한 나라를 호령하던 재벌 회장이 누군가의 밑에서 일하는 자신에게 미안한 마음에 그런 짓까지 벌이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왜 이렇게까지 하셨는지는 알겠습니다. 제가 아무나 존경하고 그런 놈은 아닌데 그래도 정말 존경스럽습니다.”육민관인 진심을 담아 말했다.“난 누구에게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라서. 특히나 자네는 여름이의 보디가드로 해외에 있는 동안 내내 우리 아이들과 여름이 셋이 안전하게 지낼 수 있도록 보호해 주어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하준이 가볍게 상처부분을 쓸었다. 물론 이루 말할 수 없이 아팠지만 이제는 육민관에 대한 죄책감이 조금 덜어지는 느낌이었다.육민관이 눈썹을 치켜 세웠다.“앞으로 똑 같은 실수만 다시 저지르지 않으시면 되죠. 저도 이번에는 누님이 정말 행복했으면 합니다. 어쨌거나… 제가 보기에는 우리 누님이 그 동안 정말 고달프게 살아왔거든요.”그러더니 일어섰다.“회장님 마음은 감사하게 받았습니다.”육민관은 나와서 그대로 화신으로 여름을 찾아갔다.여름은 몇몇 중역과 소규모 미팅을 마치고 나오다가 육민관이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복도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시크한 육민관의 모습에 지나가던 직원들이 흘끔흘끔 훔쳐보곤 했다.“거참, 너랑 우형이처럼 잘 생긴 애들이 하필 지들끼리 사귀어서…. 여자들하고만 경쟁해서 될 일이 아니라 남자랑도 경쟁을 해야 하고 말이다.”“그렇게 저 직원들이 안타까우면 최하준이라도 내주시던지.”육민관이 놀리듯 입꼬리를 올렸다.여름은 민관을 흘겨보았다.“나도 그러고 싶거든. 그 인간이 질색해
‘아니, 바보냐고!’육민관은 여름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 지는 것을 보고는 한숨을 쉬고 말았다.“재결합 하신대서 솔직히 ‘세상에 남자가 그거 하나 밖에 없나, 왜 저렇게 최하준에게 목을 메시나?’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사실 전에는 백지안에게 당한 거고 지금 누님께 하는 걸 보면 진심인 것 같습니다. 누님이 아니라면 최하준 같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손에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두 분 사이에 걸림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뿐인 겁니다.”그런 마음이란 건 여름도 알았다.사실 말로는 재결합하겠다고 하긴 했다.그러나 아이들 때문이기도 했고, 최하준이 너무나 질척거리기도 해서 더 버티기도 힘들었다.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서 정말 하준에게 완전히 마음이 열린 것은 아니었다.육민관이 어깨를 으쓱했다.“그때 누님이 귀국하고 나서 복수 때문에 최하준과 사귄다고 했을 때 마음이 약해지셨잖아요? 하지만 제 손이 이렇게 되고 나서는 누님의 마음이 완전히 싸늘하게 식는 게 보이더라고요.솔직히 저는 완전히 상관 없었어요. 누님이 신경쓰일 뿐이었죠. 아마도 저를 제대로 보호해 주지 못하고 누님 일에 저를 끌고 들어갔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거든요. 이번에는 정말 두 분 사이에 앙금이 없이 제대로 잘 해보셨으면 합니다.”그러더니 육민관은 복도를 걸어갔다.몇 걸음 걷다가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아까 보니까 최 회장 얼굴이 그다지 좋지 않더라고요.”그 말을 듣고 여름은 얼음처럼 굳어있었다. 그때 엄 실장이 왔다.“대표님, 오 사장이 드릴 말씀이 있다고 점심에 식사나 같이 하시자고 합니다.”“제가 좀 바빠요. 오늘 휴가 좀 낼게요. 오후에 돌아오지 않을 거에요.”여름은 파일을 엄 실장에 넘기고 그대로 회사에서 뛰쳐나갔다.그 길로 FTT로 내달렸다.FTT 본사에 도착하자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대로 꼭대기로 올라가 사무실 문을 차고 들어갔다.안에 몇몇 중역이 이야기를 나누다가 의아한 눈으로 문 쪽을 돌아보았다.“여긴 어쩐 일이야?”하준이 벌떡 일어섰다. 살짝 창백한
여름은 핑 도는 눈물을 꾹 참아보았지만 그래도 눈시울은 붉어졌다.“최하준, 제정신이야?”여름은 미친 듯이 소리를 질렀다.여름의 붉어진 눈시울을 본 하준은 이제 더 이상 마음이 불안하지 않았다. 입가에 엷은 미소까지 올라왔다.“나 때문에 속상했구나?”“……”여름은 울컥해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이 와중에도 내가 자기를 신경 쓰는지 안 쓰는지가 문제야?“자기가 날 이렇게까지 생각해 주다니 너무 기쁘다.”하준이 부드럽게 말했다.“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실행해 버릴 걸.”“아니, 난….”여름은 목이 메였다.“괜찮아, 아무 말도 하지마. 내 얘기 좀 들어 봐.”하준은 멀쩡한 손으로 여름의 입을 막았다.“민관이는 가족 같은 친구라고 했었잖아? 내가 민관이 손을 건드리면 우리 두 사람 사이는 영원히 끝이라고. 하지만 그때는 내가 정신이 나가서 그런 짓을 해버리고 말았지. 실은 그때 난 민관이에게 너무나 질투가 났었어. 당신이 다른 사람을 그렇게 소중하게 여긴다고 생각하니 너무 속상했던 거야. 민관이에 대한 당신 마음이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알게 되었지.”“나랑 재결합하겠다고 말은 했지만 실은 애들 때문이었다는 거 다 알아. 자기가 먼저 나에게 전화나 톡을 보내거나 보자고 하지도 않지. 우리 사이에는 깊은 골이 있었어. 하나는 백소영 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민관이 일이었지. 백소영 건은 내가 이제 어떻게 메워볼 수가 없지만 민관이 일은 내가 뭔가 해볼 여지가 있지 않을까 싶더라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재결합 한다고 해도 우리 사이는 영원히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했을 거야.”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을 꼭 안았다.“자기야, 내 예전 기억은 엉망이라 기억을 못하지만 당신이 귀국하고 나서 우리가 사귀었던 시간은 짧지만 난 잊을 수가 없어. 내게 복수하려고 작전을 세우고 접근했다는 걸 아는데도 그 시간을 생각하면 너무나 행복해. 그러니 날 그렇게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당신을 아껴주지 못했던 내가 얼마나 바보야? 나에게 다시 그런 기회를 한 번만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