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는 완전히 멘탈이 무너졌다. 자존심까지 버려가면서 이주혁의 비위를 맞추려고 노력했지만 여전히 미움을 받을 뿐이었다.‘이게 다 강여름 때문이야. 전에는 주혁 씨가 날 좋아했어. 이렇게까지 냉담하지 않았다고.’여름이 사람들 앞에서 예전에 시아가 표절했다는 사실을 까발리고 나서 이주혁이 시아를 보는 시선이 점점 더 매서워졌다.그러나 지금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은 다시 영화계에 복귀하는 것이었다.이주혁이야 어쨌거나 결혼하게 될 테니 이후에 그 집 식구들부터 공략해 들어가면 될 것이다.그렇게 결심을 하고 나서 시아는 슬픈 얼굴을 했다.“알겠어. 갈게요. 하지만 주혁 씨, 저기… 부탁만 들어줄 수 있어?”“……”이주혁은 시아에 대한 경멸이 점점 더 강해져서 점점 더 꼴 보기 싫었다. 시아는 눈을 딱 감고 입을 열었다.“구 감독의 경홍 대본을 읽어 봤는데 너무 마음에 들어. 꼭 주연을 맡고 싶어.”“대본이 마음에 든 게 아니라 구 감독의 능력이 마음에 드는 거겠지. 구 감독 후광으로 다시 연예계에 복귀해서 또 연기상이나 받을 요량 아닌가?”이주혁이 가차 없이 시아의 의도를 찔렀다.시아는 얼굴이 화끈거렸다.“여자도 자기 일이 있어야지. 계속 주혁 씨에게만 기대서 살 생각은 없어. 게다가 곧 주혁 씨랑도 결혼을 할 건데 내가 연예계에서 안정적으로 자리 잡는 것도 자기네 집에도 번듯하고 보기 좋잖아?”이주혁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시아가 얼른 말을 이었다.“표절 사건 덕분에 나도 정신 번쩍 차렸어. 나도 너무 후회가 돼. 그때는 그저 돈을 벌고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었어. 주혁 씨고 우리 집이 얼마나 가난했었는지…”“그만 해.”이주혁이 말을 끊었다.“네 그 배배 꼬인 심사는 잘 알고 있어. 괜히 내 앞에서 가식 떨지 마. 나가. 조금 있다가 바미 엔터에 구 감독이랑 연락하라고 전화는 넣어둘게.”“고마워.”시아는 매우 기뻐했다.“난 다, 당장 갈게. 먼저 씻어.”더듬거리며 얼른 옷을 주워 입었다.이주혁은 볼수록 눈꼴이 시어서 그대로 샤워
싸늘하고 차가운 눈.헤어질 때 그쪽에서 살짝 추태를 보인 이후로 거의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대표님?”비서가 부르면서 주의를 환기시켰다.“응, 이쪽이랑 백지안 가족이랑 혹시 뭔가 얽힌 게 있나?”이주혁이 물었다.“네. 있습니다.”비서가 말을 이었다.“뒤져보니 연화정 님이 백현수 님과 결혼하기 전에 백소영을 데리고 광호시에 살았습니다. 그 유년시절 백소영의 유일한 친구가 원연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백소영이 백현수 님의 집으로 들어가면서 두 사람이 연락을 주고받았지만 원연수의 부모님이 이혼하면서 원연수는 어머니가 데리고 갔고 이후로 연락이 끊겼다고 합니다.”이주혁은 가만히 커피만 마셨다.이상한 생각이 들었다.‘그러니까, 어려서 친했던 친구 원연수가 백현수와 연화정 부부의 유골을 파갔다?’“백소영 수감 기간에 원연수가 면회를 간 적이 있던가?”“없습니다.”비서가 고개를 저었다.“아 참! 원연수는 최근 시아 님과 비상의 여주 자리를 두고 경쟁하고 있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원작을 읽었던 독자와 구 감독은 원연수가 여주에 적합하다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대표님 업체에서는 시아 님을 낙점했습니다만….”이주혁이 눈썹을 꿈틀하더니 묘하게 입꼬리를 올렸다.“구 감독이 원연수를 골랐다면 연기력이 괜찮다는 뜻이겠지?”“꽤 잘합니다.”비서가 살짝 흥분기를 띠고 말을 이었다.“지난번 작품에서 킬러를 맡았었는데 배역과 연기가 아주 찰떡같이 어울리면서 연기가 폭발해서….”한참 말하다가 자신이 주제넘게 주절거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민망해서 얼른 덧붙였다.“원래는 발 연기였는데 2년 전부터 갑자기 연기가 달라졌습니다.”“2년 전이라고?”이주혁의 눈썹이 의미심장하게 움직였다.‘백소영이 바다에 뛰어든 것이 2년 전이었는데….’“원연수의 스케줄 좀 가져와 보지. 좀 만나 봐야겠어.”한참 만에야 이주혁이 입을 열었다.“그냥 바로 데려오겠습니다.”비서가 답했다.“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이주혁이 휴대 전화 속 사진을 들여다보았
권현규가 의아한 듯 이주혁을 쳐다보았다.그러나 이주혁은 눈을 내리깔고 잔을 들어 커피를 마시고 있어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네, 알겠습니다.”권현규가 끄덕였다.곧 늘씬한 몸에 연청색 조거 팬츠를 입고 검은 스니커즈와 검은 티를 매치한 원연수가 들어왔다. 짧은 티셔츠 때문에 드러난 허리는 누구라도 탐낼 만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시선을 위로 올려보면 연갈색 머리에 캡을 썼는데 그 아래로 화장기 없는 얼굴은 타고난 미모가 빛났다. 특히나 눈은 특히 검고 길게 뻗어 몽롱한 느낌을 주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신비로움을 감추고 있었다.두 눈이 권현규에게 떨어지더니 그다음에는 이주혁을 한 번 훑었는데 눈 깊은 곳에 작은 파문이 스치고 지나갔다.그러나 그 흔들림은 착각인가 할 정도로 찰나에 지나가 버렸다.이주혁은 느른하게 커피 향을 즐기며 흥미롭다는 시선을 던지며 소파에 기댔다. ‘재미있군!’이주혁을 그렇게 평온한 눈으로 바라보는 여자는 좀처럼 없다.원래 그런 인간이 아니라면 자신의 관심을 끌기 위해 가식을 떨고 있다는 뜻이었다.“어, 원연수 씨, 소개하지, 이쪽은 이주혁 대표…”권현규가 손으로 이주혁을 가리키며 공손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차세대 유망주로 불리는 원연수는 권현규도 매우 눈여겨보는 배우였다.원연수의 검은 눈이 이주혁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얼굴에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안녕하세요?”이주혁의 눈썹이 꿈틀하더니 별 느낌이 없다는 듯 아무 말도 없었다.이주혁에게서 별 반응이 없자 원연수의 시선은 곧 권현규에게로 향했다.“비상의 여주인공이 시아로 결정 났다면서요?”권현규는 원연수가 온 목적을 알고는 있었지만 설마하니 그 말을 이주혁 앞에서 대놓고 할 줄은 몰랐기 때문에 매우 난감한 얼굴로 끄덕였다.“그렇게 됐네. 구 감독이 그렇게 결정했다고 해.”원연수의 시선은 침착했다.“그래요? 저는 시아가 이주혁의 백으로 겨우 배역을 따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요. 원래 구 감독님도 저를 마음에 들어 했고 저도 제 연기가
아무리 생각해도 간이 배 밖으로 나왔지 싶은 언행이었다.“원연수 씨, 정신 차려요. 내가 알아듣게 말한 것 같은데? 이분이 그 이주혁 대표셔.”“아~ 그래요?”원연수가 눈썹을 치켜세웠다.“시아 같은 인간을 좋아하는 사람은 저열한 사람일 줄 알았는데 이쪽 분은 우아하고 품위 있으신데요? 그래서 ‘그 이주혁 대표’라고 생각 못 했죠.”“아니, 원연수 씨….”권현규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내 말이 틀렸나요? 우아하고 품위 있는 분이신 것 같은데….”원연수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만나 본 적이 없으니 머리로 상상만 했거든요. 전 시아가 너무 싫어서 그런 애가 좋아하는 남자에게도 편견이 생겼었나 봐요.”권현규는 이제 완전히 포기한 채로 그저 이주혁의 눈치만 보며 절절맸다.“정말 죄송합니다. 쟤가 성격은 저래도 연기는 잘합니다.”어쨌든 원연수는 회사에 주요 수입원 중 하나였으므로 최소한 보호는 해줘야 했다.이주혁은 커피잔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얇은 입술이 천천히 올라갔다.“사람을 돌려 까는 걸 보니 내게 불만이 많은가 본데?”“솔직히 말씀드릴까요? 네, 불만 있습니다.”원연수가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을 이주혁이 깊은 눈과 똑바로 마주치고 평온하게 말을 이었다.“시아를 좋아하시는 거요? 좋죠. 대표님 여자친구니까요. 물고 빠는 거 다 좋습니다. 개인적으로 자금을 들여서 영화를 찍으시든 음반을 내주시든 다 좋다 이겁니다. 하지만 자기가 좋다고 관중을 엿 먹이는 건 곤란하죠. 작년에 시아가 그딴 연기로 인기 여우상을 받은 건, 정말 코미디였다고요.”“원연수 씨, 적당히 해야지.”이주혁이 정말 화났을 때 얼마나 무서운 사람이 되는지 아는 권현규는 완전히 당황했다.그러나 원연수는 아무것도 안 들리는 사람처럼 냉랭하게 말을 이었다.“연말에는 또 돈을 엄청 들여서 연기 대상을 시아 손에 들려줄 생각이겠죠?”“내가 내 돈 쓰겠다는데 당신이 무슨 상관이지?”이주혁이 천천히 일어섰다. 커다란 몸이 공간을
권현규는 난처했다.“다른 영화를 하나 찾아줄 테니까….”“마음에 안 들면 소속사를 교체하도록 해.”이주혁이 말을 끊더니 흥미롭다는 듯 원연수를 쏘아보았다.“공평한 기회를 원하는가 본데, 연예계에 그렇게 공정한 소속사가 있기는 한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꺼지라고. 위약금만 물어내면 얼마든지 내보내줄 테니까.”원연수는 이주혁의 싸늘한 말을 듣고도 전혀 위축되는 기색이 없었다.전혀 동요 없이 이주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좋아요. 위약금을 물죠. 나도 이따위 소속사 필요 없어요.”“그래.”이주혁이 빙긋 웃었다.“하지만 연예계 반은 주민 그룹에서 잡고 있으니 내 말 한마디면 너 같은 배우 하나 골로 보내는 건 식은 죽 먹기라는 건 알아둬.”원연수의 몸이 굳어지더니 이주혁을 노려보았다.눈앞의 남자는 전혀 악의를 숨길 생각조차도 없었다.분위기는 점점 더 어색해졌다.권현규는 뒷목이 당겼다.“오늘은 이만하고 일단 돌아가 있어. 오늘 했던 말은 못 들은 셈 칠게.”“돈 있는 놈들은 무슨 일이든 돈으로 다 해결하려고 드는군.”원연수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더니 돌아섰다.“잠깐!”이주혁이 갑자기 불러세우더니 권현규를 쳐다보았다.“잠깐 자리 좀 비워 주시죠.”권현수는 황당했다.‘여긴 내 사무실인데? 나더러 나가라고?’그러나 이주혁의 위험스러운 눈빛에 굴복해 그냥 걸어 나갈 수밖에 없었다.‘이 대표가 그렇게 쪼잔한 녀석은 아니거든. 아무래도 일부러 원연수를 쪼는 느낌인데, 설마하니 마음에 든다고 애인으로 삼으려는 건 아니겠지?’이런 생각을 하면서 살살 문을 닫고 나갔다.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원연수의 눈이 어두워지며 입을 꾹 다물었다.“왜 남겨두었는지 알겠나?”원연수를 똑바로 쳐다보는 이주혁의 얼굴이 점점 더 싸늘해졌다.“백현수 부부의 유골은 네가 파갔지?”원연수의 눈이 확 커졌다. 입을 꼭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아주 똑똑하군 그래?”이주혁이 웃었다.“최소한 평범한 애들보다는 똑똑하고 침착하군.”이주혁은 원연수
이주혁이 날카롭게 소리치더니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이주혁의 등을 보고 선 원연수의 눈에 원한에 찬 불꽃이 튀었다.“내가 알기로 백소영은 딱히 친구가 없었어. 달랑 임윤서와 강여름 정도가 친구라고 할 만했지.”이주혁이 물었다.“심지어 수감되었을 때 면회도 가지 않았으면서 네가 무슨 백소영의 친구라는 거야? 그런 주제에 백소영의 부모님 유골을 멋대로 이장하다니, 설명을 해보실까?”이주혁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싸늘한 눈을 하고 돌아섰다.“아무래도 무슨 사이비 종교집단의 사주로 그런 짓을 한 것 같으니 경찰에 신고하겠어.”원연수가 이주혁을 똑바로 쳐다보았다.“소영이가 꿈에 나타났다고 하면 믿을 건가요?”“내가 그렇게 바보로 보이나?”이주혁은 바로 콧방귀를 뀌었다.원연수가 입술을 깨물었다.“난 있는 대로 사실을 말할 뿐이에요.”원연수가 목에서 오래된 옥패를 하나 꺼냈다.“이 옥패 때문이었겠죠. 나랑 소영이는 어렸을 때 같은 단지에 살아서 친했거든요. 우리 엄마랑 소영이 엄마가 친하기도 했고.5살이 되던 해에 우리랑 소영이 네가 같이 절에 간 적이 있는데 아주 추운 날이었죠. 나랑 소영이가 옷을 얇게 입어서 우리 엄마 코트 속에 들어가 있었어요. 그런데 지나가던 스님이 우리를 보더니 명이 짧다는 거예요.”이주혁이 옥패를 가만히 보더니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흔한 옥패지만 이주혁의 눈에도 익은 것이었다. 예전에 백소영이 똑같은 옥패를 차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이주혁이 옷을 벗길 때 보았던 옥패는 소영의 가슴께에 있었다.원연수가 말을 이었다.“스님께서 우리 사이가 좋은 것을 보고 이 옥패를 주셨어요. 두 개의 옥패가 한 쌍이라는데 보살 앞에 두고 10년이 넘게 향을 피우며 관리한 옥이라 영기가 있어 하나가 없어지면 나머지 하나가 감지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이주혁이 싸늘하게 콧방귀를 뀌었다.원연수는 아무 소리도 못 들은 듯 그대로 말을 이었다.“소영이가 광호시에서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연락이 끊겼어요. 그 이후로는
이주혁이 싸늘하게 권현규를 노려보았다.그 시선에 놀란 권현규는 얼른 말을 바꾸었다.“정 연수가 마음에 드신다면 제가 방법을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헛소리를!”이주혁이 결국 한 소리 하고 말았다.“그저 물어볼 일이 있었을 뿐입니다.”“아, 그렇군요.”권현규가 별로 믿지 않는다는 말투로 대충 답했다.이주혁은 옆 머리를 눌렀다.“내가 여자 따라다니거나 싫다는 여자 옆에 두는 거 봤습니까?”“그건 그렇네요. 대표님 정도 되는 분이야 오는 사람만 막지 않아도…권현규가 비위를 맞추듯 웃었다.이주혁은 권현규의 헛소리에 반응하기도 귀찮아 그대로 돌아서 나가다가 입구에서 멈추었다.“비상이란 영화 대본이 그렇게 좋은가요?”“물론입니다. 일단 감독이 누굽니까? 구 감독입니다. 구 감독이 찍은 영화가 망하는 거 보셨습니까? 무조건 천만 관객은 기본이라고요.”권현규가 침을 튀겨가며 늘어놓았다.“여주는 물론이고 조연이고 서로 하고 싶어서 줄을 섰습니다.”이주혁이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열었다.“그렇다면 원연수에게 조연을 주죠. 구 감독에게 원연연수 분량을 늘려달라고 얘기 좀 넣어 놓으세요.”그러더니 성큼성큼 나가버렸다.권현규는 멍하니 있었다.“아니, 조연이….”조연은 천하의 악녀였다.그런 욕 먹을 역할을 원연수에게 맡긴다니 엿 먹이는 건가 싶었다.일단 대중이 좋아하지 않는 악역을 맡게 되면 쉽사리 그 이미지가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젊은 여배우라면 보통 이미지에 신경을 쓰기 마련이다.그런데 권현수가 그런 말을 하기도 전에 이주혁은 가버렸다.그냥 조용히 입을 다물고 원연수의 불운에 묵념할 뿐이었다.******한편 원연수는 차에 타서 바로 운전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생각했다.운전석에 앉아서 거울을 내려 낯설고도 익숙한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그렇다. 낯선 얼굴.전에는 자신의 것이 아니었기에 낯설지만 이제는 2년 동안 이 몸속에 들어와 있으면서 익숙해진 그 얼굴이었다.지금 이 몸의 주인은 원연수가 아니라 백소영이라는 사실을 아
이주혁은 자신이 백소영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할 것이다.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줄은 몰랐다. 집안이 다 몰락하고 죽기까지 했는데도 내버려두지 못하다니….백지안에게 뼈에 사무치는 원한을 가지고 있다면 이주혁은 죽도록 미웠다.다시 살 기회를 얻었는데 또 이주혁 같은 인간과 얽히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죽어라 피해 다녔는데 결국 만나고 만 것이다.이제는 위약금을 물고라도 바미 엔터를 벗어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그러 생각을 하고 있는데 휴대 전화가 울렸다. 권현규였다.“연수 씨, 좋은 소식이야. 방금 이 대표가 좀 미안했던지 주연은 힘들지만 조연을 맡겨 보겠다는 거야.”원연수의 얼굴이 굳어졌다.“정말로 조연을 맡기겠대요? 회사에서 나가라는 것도 아니고?”권현규가 멋쩍게 말을 이었다.“이 대표를 그렇게 나쁘게만 생각하지 마. 아 참, 조연은 너무 악녀 역이라서 자네 연기에는 도전이 될 수도 있겠던데, 그게 아무나 소화하기는 힘든 배역이잖아? 이렇게 하자고, 내가 구 감독에게 얘기해서 캐릭터를 그렇게까지 못된 애가 아닌 쪽으로 좀 조정해 달라고 해 볼게.”“구 감독님이 캐릭터 바꾸는 거 제일 싫어하는 거 아시잖아요?”원연수가 지적했다.“그랬다가는 내가 구 감독님에게 미움 산다고요. 나중에 촬영 들어가서 욕먹을 거예요.”“그러면 어떻게 해?”권현규는 머리가 지끈거렸다.“그나마 이 대표가 호의로 아이디어였는데….”“호의요?”원연수는 우습다는 듯 답했다.“안 해요. 구 감독 작품에 이제 흥미 없어요.”“연수 씨, 왜 이렇게 고집을 부려?”권현규도 슬슬 화가 났다.“이 건을 거절해서 이주혁 대표 건드렸다가는 연예계에서 바로 블랙리스트 올라갈 거야.”“……”권현규가 달랬다.“이거 하나만 잘 찍어 보자고. 그러면 내가 연말에 연기상 하나 어떻게 해 볼게. 사실 요즘은 호감 가는 배역 보다는 배우가 연기를 잘하느냐가 더 중요하지. 시아가 마음에 안 들면 자기가 연기로 눌러버리면 되잖아.”한참 만에야 원연수가 입을 뗐다.“알겠어요.”‘찍으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