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심스럽게 여름을 뒷좌석에 태우고 최하준은 얼른 젖은 옷을 벗겨냈다.여름은 무의식적으로 막으려고 했다. 눈에 부끄러운 기색이 역력했다.“가만있어요. 조용! 좀 봅시다.”최하준은 한 손으로 여름의 어깨를 누르고 다른 손으로 옷을 젖혔다. 뽀얗게 빛나던 우윳빛 피부가 온통 울긋불긋 피멍투성이였다. 보기에도 참혹했다.최하준의 얼굴이 극도로 험악해졌다.여름은 그저 부끄러워서 이거저거 생각할 처지가 아닌 데다 보여줄 만한 몸 상태도 아니었다.“아직 다 못 봤어요?”여름이 부끄러워서 몸을 틀었다. 그러나 상처 부위에 자극이 가면서 통증에 얼굴이 일그러졌다.“가만히 좀 있어요.”최하준은 그대로 여름의 젖은 옷을 다 벗겨내더니 자신의 스웨터를 입히고 코트로 여름을 감쌌다.최하준이 움직이면서 상처가 건드려질 때마다 여름은 ‘스읍’하면서 급히 숨을 들이켰다.“많이 아픕니까?”최하준이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그 아픔 하나하나가 깊이 새겨져서 교훈을 좀 얻었길 바랍니다.”다음부터는 함부로 곁을 떠나지 않도록, 자신의 곁이 가장 안전하다는 사실을 뇌리에 각인시켜주고 싶었다.여름은 남한테 당하고 다니는 수치를 기억하라는 줄 알고 이를 악물면서 속으로 분을 삭였다.최하준은 여름이 말귀를 알아들은 것 같아서 적잖이 안심되었다.뒷문을 열고 나가면서 윤서에게 말했다.“친구가 잘 살펴줘요. 난 이제부터 운전해야 하니까.”******차는 번화한 도시의 새벽길을 달렸다.여름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윤서에게 조그만 소리로 물었다.“왜 하필 저 인간을 끌고 왔어?”윤서가 여름을 흘겨봤다.“야, 너 이번에 주화그룹 건드린 거 알아, 몰라? 온 동성에 양 대표고 선우 오빠고 널 보석 시켜줄 수 있는 사람이 하나 없더라. 그러니 어떡해? 최하준 씨 찾아갈 수밖에.”“그러니까 하준 씨가 지훈 씨를 찾아가서 도와달라 그랬어?”그제야 무슨 일인지 파악이 됐다.“지훈 씨도 널 위해서 주화그룹이랑 맞설 정도는 아니야, 알겠냐? 네가 지훈 씨 마누라도 아닌데.”윤
‘그러니까 최하준의 마음속에 나는 매일매일 최하준 때문에 울고불고하는 여자가 되어 있단 말이지?최하준을 너무 사랑해서 평생 함께 밥을 먹고 싶고, 진짜 아내가 되고 싶은 여자라고?’여름은 너무 놀라서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이 되어 버렸다. ‘나는 대체 전생에 임윤서에게 무슨 그렇게 죽을죄를 지었길래,처음에는 최하준이라는 진흙 구덩이에 뛰어들더니, 거기서 이제 간신히 기어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최하준에게 홀라당 빠진 바보가 되어 있는 걸까?’이제 목숨까지 구해줬으니 윤서가 한 말은 다 거짓말이라고 매몰차게 말할 수도 없는 형편이 되고 말았다.‘또 그 험난한 연기의 길로 접어들어야 하는 걸까?’“나한테 너무 뭐라 그러지 마라. 다 널 꺼내오느라고 그런 거니까. 조금만 늦었으면 안에서 큰일 났을 지도 모르잖아.”윤서가 여름의 귀에 대고 소곤댔다.“절대로 하준 씨 앞에서 내가 거짓말했다고 까발릴 생각하지 마라. 우리 둘 다 죽을 수 있어. 엄청난 변호사니까 절대로 함부로 건드리면 안 돼. 게다가 너 지금 보석으로 빼낸 거라서 주화그룹이 언제든 다시 널 고소할 수도 있는데 거기서 제대로 몸 빼고 싶으면 하준 씨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여름은 피를 토할 지경이었다.‘그래서 돌고 돌아 또다시 돌아가서 최하준 비위를 맞추고 살아야 한다고?’여름은 정말이지 다시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최하준에게 접근하고 싶지 않았다.윤서가 말했다.“잘 들어. 최하준 말고는 지금 동성에서 널 도와줄 사람 아무도 없어. 하준 씨가 안 나섰으면 너 몇 년 형은 받았을걸. 수십억 원이 걸렸으면 최소 10년 이상 판결 나와. 심하면 20~30년도 나올 수 있어. 게다가 너 평생 횡령이라는 오명까지 쓰게 되는 거야.”무거운 돌에 눌린 것처럼 답답한 마음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그래, 그런 더러운 오명을 쓰고 살아갈 수는 없지. 반드시 결백을 밝히고 말겠어!’*****차가 병원에 도착했다.응급실 입구에는 이미 의사가 나와서 대기하고 있었다. 주치의가 직
최하준이 병실로 들어서는 걸 보고 윤서가 벌떡 일어났다.“전 나가서 여름이 먹을만한 게 있는지 좀 보고 올게요.”“아닙니다.” 최하준이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이 근처 가게 비위생적입니다. 제가 호텔에 얘기해서 식사 배달하도록 해놨습니다.”‘병원에 입원해서 7성급 호텔 요리라니 우리 여름이 호강하네.’윤서는 침대에 있는 여름에게 눈짓을 해 보이고는 스르륵 빠져나갔다.여름도 최하준의 배려에 내심 놀랐다. 이렇게 잘해주다니.... 최하준의 눈에 한 줄기 따사로운 빛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그냥 아무거나 먹어도 되는데요.”여름이 안절부절하며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입을 열었다.“아무 거나요? 진단서 못 봤습니까?”최하준의 목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났다. 눈빛은 여전히 싸늘했다.여름은 당황했다. 아닌 게 아니라 아직 못 봤다.최하준이 싸늘하게 뱉었다.“바보 같으니라고. 그런 몸을 해 가지고 제대로 돌보지도 않았습니까? 의사가 그러는데 평생 불임이 될 수도 있답니다.”이번에는 여름도 깜짝 놀랐다.아직 젊다고 안심하고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요즘 생리 주기도 불규칙하고 양도 적어진 것 같았다.“경고하는데, 난 아픈 사람은 싫습니다.”최하준이 눈을 가늘게 뜨고 경고했다. 자신과 살고 싶다면 제발 자기 몸을 잘 돌보라는 말을 알아들었으면 했다.여름은 입을 삐죽거리며 받아쳤다.“아픈 걸 어쩌라고!”“아직 입은 살았군요.”최하준이 다가왔다.여름은 놀라서 이불로 쏙 들어갔다. 그러다가 상처가 건드려지는 바람에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최하준은 여름이 무서워서 그러는 줄 알고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또 한 편으로 생각해보면 자기가 무슨 괴물도 아닌데 이럴 일인가 싶은 마음도 드는 것이었다.“나와요. 사인하십시오.”손에 든 서류를 이불에 던졌다. 여름은 위에 ‘혼인 동거 협의’라고 쓰여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내키지 않았지만 열어보았다. 대략 앞으로 강여름은 최하준과 함께 살아야 하며 강여름은 식사와 청소, 고양이를 돌봄, 최하준
“네. 이민수죠.”최하준이 곁눈질로 여름을 흘끗 봤다.“얌전히 입을 제일 잘 다물고 있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죠, 알겠습니까?”여름은 한기가 든 듯 몸을 떨었다. 눈은 분노로 활활 타올랐다. ‘이민수, 이 인간 말종 같으니. 아무리 그래도 내가 사촌인데….’“저기… 조건을 좀 수정해도 될까요?”잠시 진정한 뒤 여름이 쭈뼛거리며 물었다.정말이지 다시는 최하준의 돌보미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이건 무기한 계약이었다. 너무 가혹하다.“좋습니다.”최하준이 씩 웃었다.“그러면 공정한 마켓 프라이스대로 가죠. 제 수임료는 최소 600억입니다. 그리고 강여름 씨 사건은 난이도가 상당합니다. 동성 최고 세력가라는 주화그룹를 상대해야 하니까요. 이렇게 합시다. 그래도 아는 분인데 20% 할인해서, 480억으로 합시다.”“480억이오? 날강도잖아?”여름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얼마나 운이 좋은지도 모르시는군. 밖에 나가면 더 주고라도 날 소송에 데려가려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 줄 압니까?”최하준이 일어섰다.“싫으면 그만두시죠. 나도 요즘 스케줄이 빡빡했는데.”최하준은 말을 마치고 문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열 받게도 강여름이 자기를 불러 세우지 않는 것이었다.‘이 멍청이가, 내 옆에 있을 기회를 대놓고 줬는데도 안 잡아?좋아, 애걸복걸할 때까지 내가 기다려 주지.’최하준은 힘껏 문을 밀치고 나갔다.******20분 뒤 윤서가 돌아왔다.얘기를 듣더니 복잡한 심경으로 상황을 정리했다.“내가 보기에 하준 씨가 너한테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야. 아니면 잠자리 얘기는 왜 꺼냈겠어? 게다가 다른 남자랑 둘이 밥도 먹지 말라는 거 봐라. 질투하는 거라니까?”여름은 한사코 부정했다.“아니야. 아무래도 날 평생 무료 도우미로 곁에 묶어두려는 것 같아. 나 그거 정말 너무 하기 싫어. 전에 같이 살 때 내가 얼마나 마음이 답답했는지 아니?”“어쩔 수 없네. 그런데 내가 볼 때는 지금 정말 널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하준 씨밖에 없는 것 같
‘응’ 하면서 최하준은 심히 통쾌한 기분이었다.“호텔 건 자료 준비는 어떻게 되고 있나?”“전부 착착 준비 중입니다.”김상혁은 속으로만 웃었다.‘사실 애진작부터 소송 준비는 다 하고 계셨으면서 아닌 척하시기는…그런데 이렇게 하셔도 사모님의 마음을 살 수 없다는 걸 우리 변호사님이 알기는 아실까?’한편 전화를 끊고 난 여름은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후회막심이었다. 그날 그냥 눈을 딱 감고 합의서에 사인을 했어야 했다.최하준의 도우미가 되는 것이 감옥에 들어가는 것보다야 낫지 않은가.“아유, 얼른 이거 입고 가서 부탁해 봐.”윤서가 새로 산 하얀 꽃무늬 원피스를 던지며 말했다.여름이 열어보니 깊이 파인 V넥이었다.“한겨울에 이런 걸 입고 가서 퍽도 유혹이 되겠다. 최하준이 날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아? 이런 거 입고 갔다가는 죽도록 미움만 살 거라고.”“잠자리 얘기까지 꺼낸 거 보면 그쪽으로도 너한테 생각이 있는 거라니까. 일단 해 봐. 어쨌든 최선은 다해봐야지.”윤서는 이놈의 절친이 어쩌다가 최하준에게만 이렇게 꽉 막혔는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이게 최하준 씨 법률 사무소 주소야. 지훈 씨한테 물어봤어.”여름은 손에 든 주소를 보며 숨을 한번 길게 들이쉬었다.운명이 손에 들려졌다. 어쨌든 한번 노력은 해봐야 했다.출발하기 전에 여름은 최하준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 도시락에 넣어 챙겨서 차를 몰아 로율 법률사무소로 갔다.최하준이 일하는 곳에는 처음 와보는 것이었다. 프런트에서 여름은 누구를 찾아왔는지 간단히 설명했다.안내원은 전화를 한 통화 하더니 말했다.“지금 손님이 오셨으니까 잠시 기다려 주시겠어요?”그 잠시가 장장 30분이었다.******한편 사무실에서는 이지훈이 최하준과 당구를 치면서 5분에 한 번씩 벽에 걸린 벽시계를 보고 있었다.결국 이지훈이 참지 못하고 말했다.“그냥 올라오라고 하지 그래?”“안 돼. 단단히 교훈을 줘야 정신을 차리지.”최하준은 창가로 걸어가 창문을 열어보더니 차가운 바깥 공기가
“일이 있어서 왔는데 방해될까 봐요.”그따위 소리를 듣고 상당히 거북했지만 생각해보면 결국 자신이 자초한 일이라 울고 싶었다.“확실히 방해가 되고 있습니다만.”최하준이 팔짱을 끼며 ‘나 바쁘다, 아주 바쁘다고’를 시전했다.옆에서 듣고 있던 김상혁은 최하준의 츤데레력에 손발이 다 오그라들었다.‘며칠 동안 안절부절 기다리셨으면서 어쩜 그렇게 연기를 잘하시나요?’분위기를 좀 누그러뜨려 보려고 김상혁이 웃으며 말했다.“변호사님 드리려고 선물 들고 오셨나 봅니다?”“맞다, 아, 선물은 아니고 점심을 좀 만들어 왔는데요.”여름이 급히 도시락을 꺼냈다.최하준은 테이블에 있는 볼펜을 들고 돌리면서 조롱하는 시선을 보냈다.“다시는 나한테 밥 안 해주겠다고 하신 분이 누구시더라.”여름은 이를 악물었다. 그래도 재빨리 억지로 웃는 표정을 만들어 냈다.“최 변호사님, 전에는 제가 뭘 잘 몰라서….”“지금 절 뭐라고 부르셨습니까?”최하준이 사뭇 싸늘하게 볼펜으로 테이블을 탁탁 치면서 물었다.여름은 깜짝 놀라서 대답했다.“최하준 씨?”하준은 여전히 기분이 별로였다.여름은 멘붕이 왔다. 남자의 마음은 정말이지 알 수가 없었다. 그 속을 대체 누가 알겠는가?하나는 츤데레 질을 하고 하나는 바보짓을 하고 있는 꼴을 보고 있자니 김상혁은 눈을 가리고 싶었다“전에 부르시던 대로 부르시면 됩니다.”“아~ 쭌?”여름이 갑자기 알았다는 듯 큰소리로 외쳤다.최하준은 그 소릴 듣고 와락 몰려오는 부끄러움을 덮으려고 김상혁에게 눈을 부라리며 되레 화를 냈다. “자네는 할 일 있지 않았어? 나가보지.”“죄송합니다.”김상혁이 고개를 숙이고 후다닥 문을 열고 나갔다.“저분 잘못이 아니에요.”여름이 결국 착한 김상혁을 위해 한마디 거들었다.최하준은 기분이 좋지 않은 듯 벌떡 일어나 여름을 쳐다봤다.“지금 내 앞에서 다른 남자를 감싸주는 겁니까?”“......”‘사람이 이렇게 쪼잔하다, 글쎄!’여름은 어이가 없었다.여름은 입술을 한 번 깨물더니 입을
최하준이 비꼬았다.“좋아요. 마지막 기회를 주겠습니다. 안에 가서 밥 좀 데워다 주십시오.”“그래요.”여름의 눈이 반짝하고 빛나더니 얼른 도시락을 들고 안쪽의 부엌으로 갔다.주방에 전자레인지가 있어서 3분 만에 음식은 다 데워졌다.여름은 최하준이 가장 좋아하는 돼지 불고기를 담아서 들고 왔다.돼지 불고기를 보자 최하준은 갑자기 식욕이 돋았다. 여름이 떠나고 나서 편하게 밥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젓가락을 들자마자 밥 한 톨 남기지 않고 그릇이 싹싹 비워졌다. 여름은 옆에서 놀라서 이 광경을 보고 있었다.‘내가 한 음식은 이제 관심 없다더니?남자들은 입에서 나오는 말마다 죄다 거짓말이네.’“뭘 봅니까?”밥을 다 먹고 난 최하준은 여름의 시선을 느꼈다. 그제야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스치고 지나갔다.“아니, 난, 나는 쭌이 내가 한 음식을 먹는 걸 보니까 기쁘네요.”여름은 더듬거리며 말을 마쳤다. 최하준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테이블의 서류를 집어 들고 일할 준비를 했다.여름은 좀 초조해져서 태연한 척하면서 입고 있던 코트를 벗었다.그 행동은 당연히 최하준의 시선을 끄는 데 성공했다. 뜻밖에도 여름은 안에 작은 꽃무늬의 하얀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여름의 볼륨 있는 몸매를 잘 드러내 주고 있었다. “왜? 미인계를 쓸 생각입니까?”조롱하는 말투였지만 내심 기분이 좋았다. ‘역시나 내게 마음이 남아 있잖아?’순식간에 탄로가 나자 여름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그래도 입으로는 여전히 연기를 계속했다.“아뇨. 더워서요. 여기 난방을 엄청 트나 보네요. 왜 이렇게 덥지?”“그렇게 더우면, 더 벗으시던가?”최하준의 눈썹이 위로 올라갔다.여름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곧 조용히 다시 코트를 끼어 입었다. ‘됐다. 유혹은 무슨… 망신당하기 전에 그만두자.’“이리 와요.”최하준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여름은 가식적인 웃음을 지으며 다가갔다.남자의 손이 손목을 잡나 했더니 확 당겨서 여름을 무릎에 앉혀버렸다.그 모든 일이 너무
“그냥 가게 두기에는 귀여운 옷이 너무 아까운데.”최하준의 눈이 살짝 감기면서 오른손으로 여름의 뒷머리를 받쳤다. 최하준의 입술이 여름의 입술에 닿았다.바로 이 느낌이었다. 지난번 레스토랑에서 입 맞추고 나서 내내 잊을 수 없었던 바로 그 느낌이었다.뭘 발랐는지 여름의 입술은 너무나 달콤했다.여름은 당황스러웠다.‘날 싫어하지 않나? 왜, 왜 자꾸 입을 맞추는 거지?‘설마하니 이게 바로 ‘입으로는 아니라면서도 몸은 정직한 남자’의 전형인가?’그러나 여름은 최하준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저 욕망일 지도 모를 일이었다.처음에는 머릿속이 이런저런 쓸데없는 생각으로 어지러웠지만, 곧최 하준의 키스에 정신을 잃고 말았다. 특히나 최하준에게서 나는 향기가 너무 좋아서 여름은 저도 모르게 팔로 그의 목을 감고 말았다.“여름, 여름! 우리 여름 씨! 너무 오랜만이에요!”굳게 닫혀있던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이지훈이 신이 나서 뛰어들다가 눈앞의 광경을 보고 그대로 멈췄다.여름이 소스라치게 놀라 최하준을 팍 밀치고 무릎에서 내려왔다. 얼굴이 귀까지 빨개진 채 어쩔 줄을 몰랐다.최하준의 얼굴이 평소와 다르게 매우 상기 되어 있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자다가 코털이 뽑힌 사자라도 되는 양 두 눈에 분노가 타올랐다.“미, 미안! 난 아무것도 못 봤어. 계속해!”이지훈이 놀라서 얼른 문을 닫고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쳤다. 이지훈이 원래 이렇게 남의 일에 나서는 사람은 아니었는데최 최하준의 그 성질머리에 혹여라도 여름과 무슨 일이 있을까 싶어서 분위기를 풀어볼까 하고 왔는데 세상에 이런…‘나 참, 내가 하준이를 너무 얕잡아 봤군.’사무실 안.여름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머리를 돌돌 말고 있었다.‘부끄러워. 창피해서 이제 얼굴을 못 들겠어.’ 중간에 흥이 깨져 버려서 있는 대로 기분이 상했던 최하준은 여름이 한창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감상 중이었다.‘귀엽잖아.’“이리 와요.”최하준이 다시 아까처럼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러나 이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