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최하준을 두둔하는 댓글도 있었다.-연애 한 번 하고 수백억은 좀 심하지. 하긴, 저런 돈 받을 수 있다고 하면 난 청춘뿐만 아니라 중년까지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다만-솔직히 백지안이 대체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위자료를 그렇게 받아 가냐? -와, 난 백지안 너무 불쌍하다고 생각했는데 연애 한 번에 수백억이라니 이제 보니 월드 와이드 럭키걸 아니냐?-내가 죽어라고 최하준 욕하던 사람인데 장난 없네, 위자료를 수백억이나 줬었다고?-문제는 준 제 아니라 그걸 되돌려 달라고 하는 거라니까? 결국 최하준은 쪼잔한 놈이란 소리지. 다들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FTT에 자금 문제만 생기지 않았더라면 반환 소송 같은 거 안 했겠지.-위자료 수백억이라니 좀 심하긴 하지. 최소한 반이라도 돌려줘야 하는 거 아님?-반이라도 수백억이잖아? 평생 써도 다 못 쓰겠다. 그런데 백지안이 돌려줄까? 안 돌려준다니까 고소한 거겠지?-왜 갑자기 백지안이 이렇게 가식적으로 느껴지지? 정말 최하준을 사랑하기는 한 걸까? 아무래도 최하준의 돈을 사랑한 거 아닐까?-당연하지. 그때는 최하준이 국내 최고의 부자였으니까 죽어라고 매달린 거겠지. 무일푼이라도 사랑한다는 말은 난 안 믿음.“……”여름은 완전히 깜짝 놀랐다.‘왜 최하준이 갑자기 백지안에게 위자료를 돌려달라고 하지? 이상하네. 내가 아는 최하준이라면 굶어 죽어도, 아무리 큰 빚을 지고 있어도 전여친에게 위자료를 돌려달라고 할 위인은 아닌데. 게다가 상대가 백지안인데, 갑자기 아까워진 걸까?그나저나 액수를 보니 내가 참 비참하네.난 연애도 아니고 결혼을 해서 아이까지 낳았는데 땡전 한 푼 받은 거 없이 쫓겨났구먼. 비교하자니….됐다. 그만 생각해야지. 생각할수록 어이만 없지, 뭐.’더 어이없는 것은 그 뒤에 벌어진 일이었다. 네티즌이 갑론을박하자 하준이 공개적으로 성명을 발표했다.-나와 백지안은 10년 넘게 교제했다고 하지만, 전혀 사실혼 관계라 할 수는 없습니다. 이전에는 일이 바쁘기도 했거
-그랬나 보네. 강여름이 고소하지도 않았잖아? 서지도 않는 인간이 뭔 연애 관계 이렇게 복잡하냐?“……”다시 삼각관계의 파도 속으로 끌려들어 간 강여름은 대체 최하준이 무슨 의도인지 알 수가 없었다.‘내 결혼생활을 박살 낼 작정인 거야?’난리가 난 것은 네티즌뿐이 아니었다. 윤서도 소문을 접하고는 후다닥 전화를 걸어왔다.“여름아, 오랜만에 같이 밥 먹자. 얼굴 안 본 지 한참 돼서 보고 싶네?”여름은 눈알을 굴렸다.“며칠 전에 봐 놓고 뭐래? 난 하나도 안 보고 싶거든.”“아잉~ 그러지 말고. 내가 근사한 일식집 오마카세 쏠게.”임윤서가 생글거리며 말했다.결국 여름은 약속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윤서가 보리차를 따라주며 물었다.“최하준 진짜로 안 서?”“푸헉!”너무 직선으로 꽂히는 질문에 여름은 마시던 차를 뿜었다.“작작 해라, 진짜.”“아잉, 궁금해서 그러지. 최하준은 갑자기 왜 저러는 건데?”윤서가 조그맣게 물었다.“그 뉴스 터지고 나서 송영식은 출근도 안 해. 비서실 사람이 하는 얘기 들어보니 며칠째 여기저기 변호사 구하러 다닌대.”“그래서?”“그런데 아무도 상대를 안 해준대.”윤서가 고소하다는 듯 말했다.“원래 최고의 변호사라는 것들은 돈 많은 부자의 사건만 맡잖냐? 찾아오는 사람들이라고는 국선 변호사 정도래. 전에 네가 부른 무명의 변호사에게 졌다는 얘기가 퍼져서 실력 있는 변호사들은 이제 상대도 안 한다는 거지.”“송영식은 백지안에게 변호사를 구해주려는 거겠지?”여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이번 소송은 이기기 힘들걸. 일단 액수가 너무 크고, 최하준하고 백지안 사이에 잠자리가 없었다는 증거가 확실해서 사실혼 관계를 주장할 수도 없을 거야. 전액 반환이 아니라고 해도 끽해야 몇억 손에 쥐겠지.”“그러니까. 수백억 이라니 최하준 머리가 뭐 어떻게 됐던 거 아니냐? 뭔 위자료를 그렇게 퍼준대?”윤서가 고개를 저었다.“주는 놈이나 받는 놈이나…. 게다가 받은 쪽에서는 한 푼도 못 내놓겠다고 저러지. 제일
윤서는 울상이 되었다.“야, 사람 놀래키지 마. 송영식 그 멍청이의 아이를 가지고 싶지는 않다고. 그 멍청한 머리를 물려받는다면 내 애가 너무 불쌍하다고.”“그런 소리 하지 마. 사랑에 눈이 멀어서 그렇지 사업하는 거 보면 머리는 비상한 사람이야.”“아, 시끄러워!”윤서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넌 튀김이나 먹어.”여름이 새우튀김을 집어 주었다.“다 먹고 같이 초음파 보러 가자.”“식욕이 하나도 없어.”윤서는 당황했다.“난 임신해 본 적도 없는데. 수술하면 아플까? 난 아픈 게 제일 실어.”“이제 막 초기니까 그렇게 아프지 않을 거야.”여름이 위로했다.그러나 윤서는 먹고 싶은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게다가 점점 생선 비린내를 맡을 수가 없었다.여름은 윤서를 데리고 병원 응급실로 갔다. 피 검사 후에 초음파를 보러 갔다.초음파를 하는 동안 여름은 밖에서 기다렸다. 5분 뒤 윤서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나왔다.“어떡해? 나 임신이래.”여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몇 초가 흐른 뒤 말을 이었다.“수술하자.”여름은 하준과 함께하는 동안 너무나 힘들었다. 자신도 백지안과 싸우기 버거웠는데 윤서는 말할 것도 없다 싶었다. 게다가 송영식은 지금 백지안에게 완전 콩깍지가 낀 상태인데 이 아이를 낳아서 좋을 일이 하나도 없었다.“…그래.”윤서가 끄덕였다.수술은 무서웠지만 아이를 낳아봤자 축복받기도 힘들었다.이제는 정말이지 백윤택과 송영식을 모두 잡아다 주리를 틀고 싶었다.의사에게 상담을 했다.“수술하실 거면 내일 산부인과로 가서 예약하시면 됩니다.”두 사람이 응급실을 나올 때 다른 쪽 복도에서 양복을 입은 이주혁과 닥터 몇이 걸어 나오다가 윤서와 여름을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추었다.“이번에 저희 병원으로 와서 직접 지도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환자분 목숨을 구했습….”원장이 말을 하다 말고 이주혁의 얼굴이 고정된 것을 보고 물었다.“누구? 아는 분입니까?”“네. 죄송하지만 저 두 분이 왜 병원에 왔는지 한 번 알아
다음날.여름은 휴가를 내고 윤서와 산부인과를 찾아갔다.의사는 초음파와 혈액검사 결과를 보더니 말했다.“수술받으실 거면 오후까지 기다리셔야겠습니다.”“오후요?”윤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꽤 빠르네….”윤서는 며칠은 걸릴 줄 알았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저기… 많이 아플까요?”“통증이야 있죠. 원하시면 마취를 해드리겠습니다.”“네, 그럼 마취 부탁드릴게요.”윤서는 고개를 끄덕였다.진찰실에서 멍하니 걸어 나오는데 갑자기 전유미, 송근영, 송윤구가 다가왔다.“얘야, 축하한다.”전유미가 희색이 만연해서 손을 잡았다. 친구들은 다들 손주를 본다고 난리였는데 자신은 자식들에게서 아무 소식이 없어서 섭섭하던 차였는데 어제 윤서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좋아서 잠이 다 안 올 지경이었다.“어, 어떻게 아셨어요?”윤서는 골치가 아팠다. 불길한 예감이 몰려왔다.“어제 우연히 우리 지인이 지나가다가 널 봤다고 하더구나.”송근영은 이주혁의 이름을 한 자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여름과 윤서는 시선을 교환하고는 아무 말도 못 했다.누군가에게 발각될 새라 일부러 어제 이주혁의 집안과는 관련이 없는 병원을 일부러 찾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하필 그 모습이 발각되었다니.척 보기에도 송영식의 가족은 윤서가 아이를 낳기를 바라고 있었다.송윤구가 간절한 눈으로 윤서를 바라보았다.“윤서 양, 아이를 살려주게. 우리가 바로 결혼식을 준비함세. 영식이가 자네와 아이를 책임질 거야.”“그래. 너희는 약혼한 사이잖니?”전유미가 고개를 끄덕였다.“아이만 낳아준다면 네가 원하는 조건은 우리가 모두 들어주마.”임윤서는 고개를 저었다.“어르신들께서 제게 잘해주시는 건 알겠지만요 저는 정말 송영식이랑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약혼에 동의한 건 그날 밤 일을 수습하느라고 그런 거예요. 솔직히 송영식이 저에게 괜찮은 짝은 아니잖아요? 낳아봤자 아이에게 좋을 것도 하나도 없어요. 전 아빠의 사랑도 못 받는 아이를 낳을 수는 없어요.”전유미가 다급히
송근영은 아무것도 안 들린다는 듯 계속해서 평온하면서도 카리스마 느껴지는 말투로 이야기했다.“아이만 낳아준다면 저희 부모님은 평생 아무 걱정 없이 먹고 사실 수 있을 거고 리마도 승승장구 발전할 수 있을 거야.”“그리고 넌 우리 쿠베라의 주식을 보유하게 되고. 물론 우리 영식이랑 결혼하지 않아도 되고 결혼 후에 이혼을 해도 좋아.”“그러니까 결국에는 애만 달라는 말씀이잖아요?”임윤서는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왜 하필 저한테 이러시는 건데요? 세상에 여자가 저 하나뿐이에요?”전유미가 한숨을 쉬었다.“그 아이가 우리 집안의 첫 손주인데 난 정말이지 그 아이가 세상에 태어났으면 좋겠구나. 얘, 윤서야. 그 아이는 이미 생명이란다.”임윤서는 힘없이 웃었다.“하지만 저에게는 그냥 분열 중인 세포일 뿐이에요. 아직 아기로 보이지 않는다고요.”“내가 영식이에게 꼭 너와 아이를 책임지라고 하겠다.”송윤구가 진지하게 말했다.송근영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내 말을 잊지 마. 아이가 없어지면 엄청난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임윤서는 미치기 일보 직전이었다.‘난 낳기 싫다고, 싫어! 대체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이 집안이랑 얽힌 거야?’“얘, 우리 같이 집으로 가자.”전유미가 윤서의 손을 잡았다.윤서는 얼른 전유미의 손을 피하면서 고개를 돌렸다. 얼른 여름의 손을 잡아끌며 반대편으로 걸어갔다.찬바람이 부는 윤서의 뒷모습에 전유미는 마음이 아팠다.“내가 평생 살면서 누구한테 억지로 뭘 시켜본 적이 없지만 이번에는 꼭 쟤를 우리 영식이랑 결혼시켜서 영식이를 백지안의 손에서 꺼내야겠어요.”최하준이 백지안에게 수백억 대의 위자료 반환 청구 소송을 냈다는 소식이 전국을 뒤흔들고 있었다.최하준은 백지안과 관계를 가져본 적도 없고 심지어 영하를 몇 년이나 지원해주었는데 그 와중에 백지안은 다른 남자와 바람이 났었고 헤어지면서 최하준에게서 수백억을 받아 나왔다며 백지안이 얼마나 무서운 인간인지에 대해 사람들이 수군댔다.그런데도 어리석은 아들 녀석은
2시간 뒤.송영식은 긴급 호출을 받고 본가로 들어갔다.“할아버지, 급한 일이라니 뭡니까? 얼른 말씀하세요. 회사에 지금 일이 좀 많아서요.”송영식은 마음이 조급했다. 잠시 후에 FTT로 하준을 찾아갈 참이었다.‘젠장, 갑자기 지안이에게 고소장이라니 이제 돈이 없어서 미쳤나…?’“며칠씩이나 출근도 안 하고 백지안만 싸고도는 거 모를 줄 아느냐? 그래 놓고 회사 핑계를 대?”송우재는 송영식의 얼굴을 보니 그냥 등짝이라도 후려치고 싶은 심정이었다.‘어쩌자고 우리 집안에 이런 멍청한 녀석이 태어났어, 그래.’ “어떻게 하셨어요? 임윤서가 와서 나불댔군요?”송영식은 화가 났다.“입 다물어라, 이 녀석아! 윤서는 네 말은 일언반구 한 적도 없어.”송윤구가 책상을 탕 내리치더니 한숨을 푹 쉬었다.“어제 윤서가 병원에서 검사를 했는데 지인이 우연히 발견하고 걔가 임신 5주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네 아이야. 당장 윤서랑 결혼 서둘러라.”“말도 안 돼요.”송영식은 갑자기 화가 나서 얼굴이 일그러졌다.“임윤서, 이게 일부러 이러는구먼. 나한테는 피임약을 먹었다더니 날 속였어! 자기는 나와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그렇게 큰소리를 치더니 날 방심하게 만들어 놓고 기회를 노린 겁니다. 산전 검사도 일부러 지인에게 발견되게 조작해 놓은 거예요.”전유미는 도저히 들어줄 수가 없어서 가서 송영식의 등짝을 찰싹 때렸다.“아, 왜 때려요?”송영식은 믿을 수가 없었다. 어려서부터 전유미는 금이야 옥이야 하며 송영식을 키웠다. 한 번도 어머니에게 맞아본 적이 없었다. “임윤서에게 홀리신 거예요? 어떻게 그런 애 때문에 아들을 때릴 수가 있어요?”전유미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대체 네 머리에 뭐가 든 거니? 어떻게 애가 이렇게 멍청이가 되었어?”화가 난 나머지 송우재가 씩씩거렸다.“어제 네 친구 주혁이가 보고 말해준 거다. 과동병원에 임상 지도하러 갔다가 발견하고는 나에게 말해주더구나. 그런데 윤서가 어떻게 일부러 주혁이에게 발견이 되겠느냐?”“게다가
‘아버지라….’그 말에 송영식은 움찔했다.전유미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그래. 지금 윤서 뱃속에서 요만하게 자라고 있는 중이란다. 유산을 쉽게 생각하면 안 된다. 그게 얼마나 크게 몸을 상하는 일인데.”“수술로 아플 사람은 네가 아니니 너한테는 쉬운 일로 느껴질지 몰라도 그 수술은 하고 나면 온몸이 다 상하고 말아. 어떤 사람은 수술하고 나서 다시는 임신을 못 하게 되는 경우도 있어.”“게다가 윤서가 나중에 누군가를 만났을 때 다른 사람의 아이를 낙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 사람 심정은 어떻겠니?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봐라. 다른 사람의 아이를 가졌던 사람이라면 어떤 마음이 들까….”그 말을 듣고 송영식은 할 말을 잃었다.본성이 나쁜 인간은 아닌지라 전유미가 조곤조곤 말을 이어가자 송영식은 살살 설득이 되기 시작했다.예전에 백지안이 하준이와 결혼하게 되면 아무나 잡아서 결혼을 해서 부모님에게 상처를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그러다가 백지안이 최하준과 헤어지게 되자 지안이를 행복하게 해주어야겠다고 맹세를 했었다.그러나 지금 다른 사람이 자신의 아이를 가져버렸다.‘대체 이를 어쩌면 좋지?’송우재가 평온하게 말했다.“난 너희가 어렸을 때부터 책임감을 느끼도록 가르쳤다. 네가 기본적인 책임감도 가지지 못한다면 사업을 하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서 신뢰와 존중을 얻겠니? 연애는 우리말을 안 듣고 네 마음대로 했을지 몰라도 우리 집안에 책임감 없는 자식은 필요 없다.”송영식은 깜짝 놀랐다.송우재는 계속 백지안과 사귀면 가족에서 추방하겠다는 말을 수도 없이 했었다.그러나 그때는 홧김에 한 말씀이었다면 지금은 단호하고 냉정했다.송영식도 잘 아는 바이지만 소우재는 책임감이 없고 사람 마음을 가지고 노는 사람을 제일 싫어했다.“네 자식인지, 백지안인지 하나를 골라라. 백지안을 고르겠다면 다시는 우리 집안에 남아있을 생각은 하지도 말아라. 설이고 추석이고 집에 올 생각도 말고, 문자도 톡도 하지 말아라. 족보에서도 그냥
이주혁이 콧방귀를 뀌었다.“됐다. 어쨌든 지금 네 눈에는 백지안 밖에 안 보이겠지. 어쨌더거나 내가 경고하는데 네 등 뒤에 쿠베라가 없어지는 순간 백지안은 널 떠날 거야.”“웃기지 마!”송영식은 결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너도 하준이랑 똑같아. 너희들 왜 사람이 이렇게 됐냐? 우리는 다섯 명이 다 같이 자랐는데 왜 이렇게 지안이를 미워하는 거야?”“그래. 온 세상 사람이 다 백지안에게서 등을 돌리는데 너 혼자서 걔를 지키고 있어. 그러면서 우리는 정신이 나갔고 너 혼자서 멀쩡한 것 같지? 그래, 지안이를 위해서 온 세상과 맞서 봐라. 아주 피와 뼈가 다 갈려 나갈 거다.”이주혁은 짜증이 났다.“난 수술 들어가야 해. 너랑 노닥거릴 시간 없다.”그러더니 무표정하게 나가버렸다.‘말을 하면 할수록 화만 나네.’사실 임윤서가 안쓰러운 기분이 들었다.송영식은 이주혁의 방에서 나왔다.터덜터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아래층은 소아청소년과였다.30세 남짓한 아빠가 예쁘장한 여자아이를 데리고 지나갔다. 여자아이의 눈이 까맣고 커다랬다. 그러나 어디가 아픈지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너무나 귀여운 아이였다.아빠가 딸을 달랬다.“걱정하지 마, 딸. 의사 선생님이 우리 딸 목 봐주실 거야. 주사는 안 놓고….”갑자기 심장이 욱신거렸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저렇게 귀여운 애를 없애 버리는 건가?아이씨!’송영식은 짜증스럽게 차를 몰았다. 어쩐 일인지 차는 임윤서의 집 앞으로 향했다.초인종을 누르자 문이 안에서 벌컥 열렸다.윤서는 청바지 위에 분홍색 잠옷을 입은 채 분노에 차서 송영식을 노려보았다.“사람을 왜 그렇게 노려봅니까?”송영식은 마음이 답답했다. ‘나도 노려볼 수 있거든. 나도 피해자라고!’“당신 때문에 엉망진창이야! 당신 식구들이 나한테 무조건 아이를 낳으래. 그런데 내가 당신을 노려보지 않으면 누굴 노려봐?”임윤서는 송영식을 보자마자 부아가 치밀었다.송영식은 코를 문질렀다. ‘어라? 진짜로 누나가 약을 바꿔치기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