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울이가 잠들자 여름은 다시 휴대 전화를 들었다. 하준이 보낸 영상이 있었다.헤드폰을 끼고 영상을 보았다. 얼굴이 온통 새빨갛게 달아올라 어째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불은 켜져 있지 않았지만 창 밖에서 들어오는 달빛이 비쳤다.하준의 등이 보였다. 여름의 손은… 하준의 목에 꽉 감겨 있었다.그리고 여름의 목소리는… 너무나…그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낸 그 날밤을 절망의 밤으로 기억하고 있었지만 영상속의 여름과 하준은 너무나 뜨거운 연인이었다. 심지어 여름이 더 바라는 것 같았다.‘유진 씨가 이 영상을 봤다고?’너무 부끄러워서 구멍이라도 파고 들어가고 싶었다. 잠시 후 진정하고 생각해 보니 자기 상대의 이런 영상을 보았다면 누구라도 아무렇지 않을 수 없었다.여름이 돌아온 뒤에 양유진은 그 일에 관해서는 일언반구 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여름이 스스로 원했던 일이 아니면 상관없다고까지 말했었다.이제 생각해보니 그런 모습은 너무 지나치다. 너무 대범해서 오히려 불안했다.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보니 자신이 양유진이었다면 아내가 신혼 첫날 밤 다른 남자와 그렇게 뜨거운 밤을 보낸 것을 알았다면 머릿속으로 온갖 상상을 다 하며 증오심을 키웠을 것이다. 아니면 너무나 맹목적으로 사랑하니까 아무렇지 않을 수도 있는 걸까?후자라면 정말 여름에게는 행운이다.그러나 전자라면….더운 날인데도 몸이 너무나 싸늘했다.*****다음날, 여름은 여울과 하늘을 데리고 내려갔다.식당에서 양유진과 서경주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따스한 햇살이 전면 창을 통해 들어와 양유진의 부드러운 얼굴에 떨어졌다. 여름은 막막한 기분으로 한참을 바라보았다. 양유진이 부를 때까지….“아침 먹어요.”양유진이 일어나서 두 사람의 아침을 차렸다. 그리고 세심하게 하늘과 여울이가 좋아하는 메뉴를 차려주었다. 다정한 모습을 보니 여름은 혼란스러웠다.‘그런 영상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두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여름은 화신으로 출근했다오전 10시.
여름은 곧 상황이 파악되었다“그러니까 지룡에서 최양하를 거기에 유기하고 나서 다시 차를 가지고 와서 끌고 갔다?”육민관이 끄덕였다.“누군가가 지룡 본부에서부터 눈독 들여 따라붙었을 수도 있고, 내부에서 정보가 샜을 수도 있죠.”여름의 심장이 철렁했다.가만히 생각해 보니 육민관의 분석이 꽤 말이 됐다.“사실 난 최양하가 FTT의 신제품 정보를 빼돌렸다는 생각은 안 들더라. 양하 씨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아무래도 지룡에 스파이가 있는 게 틀림없어. 그리고 신제품 정보를 빼돌린 자와 동일 인물일 거야.게다가 지룡은 내내 최하준이 가장 믿는 조직이니 신제품 개발 후에 최하준이 반드시 바로 지룡 멤버들을 보내서 랩을 지키게 했을 거야. 그러니 자료를 빼돌리고 최양하에게 뒤집어씌울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지.여름의 말이 끝나자 육민관이 존경스럽다는 듯 여름을 쳐다봤다.“형사가 되셨어야 하는 건데.”“아직까지는 내 추측일 뿐이야. 증거가 없잖아.”여름이 육민관을 흘겨보았다.“어쨌거나 그런 일을 벌일 수 있으려면 일단은 절대로 최하준의 의심을 사지 않을 심복이어야 해. 에잇, 양하 씨만 아니면 이런 일에 관심도 없었을 텐데.”“그러게나 말입니다. 내부 첩자를 잡아들이려면 지룡에 잠입을 해야 할 건데, 지금 처지로는… 양유진이 불편해하겠죠?”육민관이 말을 이었다.“이 일은 FTT나 추신에서 조사하도록 내버려 두죠?”‘양유진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여름이 미간을 찌푸렸다.“뭣 좀 물어보자. 너라면 아내가 첫날밤에 다른 남자와 자는 영상을 봤다, 그러면 어떨 거야?”말을 마치고 육민과의 이상하다는 듯한 시선을 보고는 여름이 얼굴을 붉혔다.“그래. 내 얘기다.”“어허! 이거 역시 우리 누님은 정말 보통이 아니시네.”육민관이 큭큭 웃었다.“저라면 십중팔구 놈의 목을 따러 갔겠죠.”“그 여자가 미울까?”“어떤 영상이었냐가 중요하죠. 엄청나게 반항하는 모습을 봤다면 너무 마음이 아프고 죄책감이 느껴질 테고. 하지만 상대와 즐기는 영상을 봤다면
“그래. 네 책임이 크지.”최대범이 하준을 노려 보았다. “그러니 책임지고 FTT를 제자리로 돌려놓거라. 네 녀석이 여름이만 데리고 외국으로 나가지 않았더라면 없었을 일인데.뭐, 전부 널 탓할 수만은 없지. 다 운명이지 뭐냐. 어쩜 그렇게 네 에미를 담았냐? 하나에 빠지면 그냥 정신을 못 차리고, 응당 아끼고 사랑할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고는…. 네 에비가 란이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아니? 그런데 그러게 못 본 척을 하고는 추동현이가 저를 사랑하는 줄 알았지.”‘아버지….’호칭조차도 낯설었다.잠시 넋을 놓고 있는데 장춘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네 에비는 수십 년을 소식도 없는 것을 보니 어디 외국에 나가서 결혼하고 자식도 낳고 사는 게지.”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차량 한 대가 들어오더니 최란이 내렸다.“무슨 이야기 나누고 계세요?”최대범이 마뜩찮은 듯 답했다.“한 서방 이야기 중이었다.”최란은 움찔했다. 한병후는 오래 전부터 자신의 세계에서 잊혀진 존재였었다. “그러길래 우리 말 듣고 얌전히 한 서방이랑 살았으면 오죽 좋아? 이런 꼴은 당하지 않았을 텐데.”최대범이 화를 냈다.“한 서방이 우리 FTT의 재산을 노리니 어쩌니 하더니, 눈이 멀었던 게지.”최란은 입맛이 썼다.“그건 모르는 거죠. 한병후도 추동현과 같은 부류였을지도. 그 얘긴 그만 하세요. 얘, 마침 잘 왔다. 아까 연락 받았는데 가디언그룹 이사진이 조용히 들어왔다더라. 만약 가디언과 협력을 이끌어낼 수만 있으면 FTT전자는 이번 난관을 극복할 수 있을지도 몰라.”“가디언 그룹이라고요?”하준이 깜짝 놀랐다.유럽의 대형 그룹으로 20년 정도 된, 그리 역사가 깊은 회사는 아니었다.가디언의 행보는 매우 조용하고 막후의 진짜 실력자는 미스터리해서 글로벌 부자 랭킹에 들어가지는 못하지만 누구도 무시하지 못하는 기업이다. 전세계 100개 국이 넘는 곳에 지사를 설립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 있다.“하준아, 내일 출근해라. 우리 가디언 이사장과 한 번 만나 보자.”
백윤택은 움찔했지만 곧 신이 나서 눈을 반짝였다.“좋아! 내가 몇 년 동안 저 자식 눈치를 얼마나 봤냐? 예전부터 꼴 보기 싫었어. 하지만 송 대표랑 둘이 절친인데 나중에 송 대표가 날 맞아와서 뭐라고 하면 어떡하지?”백윤택은 외국에 나가 한동안 숨어 있다가 이제 겨우 귀국한 참이었다. 만약 괜히 또 송영식을 건드렸다가는 이제는 탈탈 털릴 것이다.“멍청하기는. 최하준이 평소에 얼마나 갑질을 하고 살아왔는지 생각을 해보라고. 오빠 손을 더럽히지 말고 입만 털어. 그러면 최하준에게 분풀이하고 싶은 사람이 알아서 움직이겠지.”백지안이 힌트를 주었다.백윤택은 이거구나 싶었다.“어! 그래. 알겠어.”지금 최하준을 손봐줄 기회만 호시탐탐 노릴 몇몇 인간이 떠올랐다.눈알을 한 번 굴리더니 바로 전화를 걸었다.“어이, 하 대표, 뭐 하고 있어?”******밤 11시.하준은 거나하게 취해서 카드를 긁고는 휘청휘청 술집에서 나왔다.정신이 몽롱해서 걷다가 누군가와 부딪혔다.상대가 하준을 확 밀치니 하준은 힘없이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오호라, 이거 봐라? 이거 이거, 세상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기세등등하던 최하준이 아니신가? 우리하고는 말도 섞지 않을 정도로 도도하더니. 다들 나이도 비슷한데 우릴 굉장히 무시했었잖아?”하석윤이 쓰러진 하준을 보며 비웃었다.뒤에 있던 부하들도 따라 웃었다.“이제 FTT가 망했으니 최하준은 대표님하고는 비교도 안 되죠.”누군가가 알랑방귀를 뀌었다.“그래. 내가 평생 이놈에게 복수할 기회가 없을 줄 알았다.”하석윤은 바로 의기양양하게 하준에 가슴에 발길질을 했다.“내가 누군지 알아보겠나?”“꺼져!”하준의 입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사람이 둘로 보였다.“아하핫! 날 몰라? 난 널 아는데.”하석윤이 어금니를 악물었다.“예전에 배에서 내 다리를 부러뜨렸었잖아!”하준은 힘껏 아픈 머리를 흔들어보았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귀하신 분이라 그런 일은 기억도 안 나시나
“무, 무슨 짓이야?”하석윤은 무서워서 다리를 떨었다. 방금 전까지의 기세는 온데간데없었다.“제발 살려주세요. 눈이 삐었나 봅니다. 그리고 그 때 최하준이 제 다리를 부러뜨려서 몇 달을 못 걸었다니까요.”“아까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잖아? 그렇게 기세등등하더니?”여름은 파이프를 흔들어 보이며 해맑게 웃었다.“내 몸매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며? 어떻게? 한 번 더 춰드릴까?”“아니요. 저는 그냥 다 잊어버렸습니다.”하석윤은 울먹였다.“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그건 안 되겠는데. 3년 전 일도 아직까지 기억하는 쪼잔한 녀석인데 나중에 또 복수하러 오면 어째?”“맹세합니다. 절대로 복수 같은 건 꿈도 꾸지 않겠습니다.”하석윤은 숨조차도 크게 못 쉬었다. 자신이 괴롭히며 좋아하던 상대에게 이렇게 당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젠장, 어쩌다가 이런 사람을 건드려 가지고.아니, 인간도 아니지. 인간이 어떻게 사람한테 이래?’“그런데 나는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를 떠올려서 마음이… 매우 불편하단 말이야?”여름이 하석윤의 앞에 앉았다. “어쩌면 좋지?”“……”‘그걸 나한테 물으면 뭐 어쩌라고?’“이러면 어떨까?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당장 다 벗는 거야. 어때?”여름이 ‘이 정도면 매우 자비롭지?’라는 얼굴을 해 보였다.“…조, 좋습니다.”하석윤은 울고 싶었다. 그래도 맞는 것보다는 나은 것 같았다.“그러면 벗기세요.”“지금 나더러 길 한복판에서 네 옷을 벗기라고”여름이 눈알을 굴렸다.“이봐, 내가 무슨 건달도 아니고, 스스로 벗어!”“아, 알겠습니다. 미녀 앞에서 이런 영광을 주셔서 감사합니다.”하석윤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말했다.“미녀?”여름이 눈썹을 치켜올렸다.“그렇죠.”하석윤이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저희끼리 모이면 강여름님이 최고 미인이라고 그런 얘기를 합니다.”“더러운 것들!”여름이 흘겨보더니 바닥에 널브러진 하준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저 인간은 대체 얼마나 마신 거야?”“저
“하지만… 이주혁이 절 찾아오면 어떡하죠?”하석윤은 심장이 두근거렸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최하준은 마구 두들겨 패면서 자기는 맞기 싫은가 봐? 그러니까 백윤택이 시켜서 한 짓이라고 확실히 얘기하라니까?”“아아, 정말 현명하십니다.”하석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저, 그러면 가봐도 되겠습니까?”“가! 아, 내 얘기는 조금이라도 넣었다가는 바로 죽을 줄 알라고.”강여름이 쇠 파이프로 탕탕 바닥을 내리쳤다.“아유, 절대 안 합니다.”하석윤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부하들을 깨워서 후다닥 도망쳤다.여름은 그제서야 하준의 곁으로 다가갔다. 흙바닥에 쓰러져 흰 티는 온통 흙투성이고 얼굴은 상처투성이였다. 눈을 가만히 감고 있는 최하준은 절망적인 모습이었다.조각한 듯한 이목구비의 날렵한 선 덕분에 알아봤지, 사실 지금 이 순간의 하준은 영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여름이 아는 하준은 근육질 몸매에 우아하고 귀족적인 분위기에 머리카락 한 오라기 흐트러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하준의 양복에는 늘 주름 하나 없었다.‘최하준이 왜 이렇게 되었지?FTT의 몰락 때문인가?최하준은 그렇게 쉽게 포기하고 타협하는 인간이 아닌데?’“일어나 봐.”여름이 고개를 숙이고 하준을 흔들어 보았다.하준이 아파서 감고 있던 눈을 떠 보니 눈앞에 흐릿하게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그 사람에게서 풍기는 향기가 익숙했다. 목소리마저도 그녀와 비슷했다.“여름아, 여기는 어쩐 일이야?”하준이 희미하게 웃었다. 자신이 꿈을 꾼다고 생각했다. 꿈속에서나 여름이 곁에 올 테니까.여름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기분이 묘했다.결국 허리를 숙여 하준을 일으켰다.하준은 비틀거리며 여름의 손을 잡아 떼며 트림을 했다.“마, 만지지 마. 나 더러워. 당신 옷이… 더러워지겠어.”“집에 데려다줄게.”여름은 할 수 없이 하준의 손을 잡았다.순간 하준이 손에도 상처가 있어서 피가 흐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마음이 복잡해졌다.“바, 바래다 주지 않아도 괜찮아. 내가 갈게.”하준은 여름의
그런데 바지를 갈아입히다가 여름은 그곳에 드레싱이 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봐서는 안 되는 것을 본 기분이었다.‘저기 드레싱은 왜 하고 있지? 설마… 저길 다친 거야?’여름은 참지 못하고 한번 건드려 보았다. 정말 아무 반응이 없었다.‘전에는 이러지 않았는데?’여름은 머릿속이 한동안 하얗게 되었다. 헉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아니 멀쩡하던 데를 왜 이렇게 못 쓰게 되었지?이렇게 고주망태가 된 이유가 이것과 관련이 있는 건가?그렇게 생각하니 이해가 되네. 사람으로서 얼마나 큰일이야? 특히나 이렇게 욕구에 충실한 사람에게는 말이지.어쩐지 그날 갑자기 평생 결혼도 안 하고 아이도 안 가지겠다고 하더라니.이래가지고는 결혼도 임신도 안 되겠는걸.십중팔구… 외롭게 늙어 죽겠구나.’상처투성이 얼굴을 보고 있자니 어떤지…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사실 이 정도면 은근히 고소한 기분에 춤을 춰도 모자랄 판이다. 그야말로 자신을 그렇게나 괴롭혀 온 데 대한 인과응보가 아닌가?하지만 갑자기 마음이 싸했다.‘어휴, 그러니까 사람은 나쁜 짓을 많이 하면 안 된다니까. 다 업보지 뭐야.’여름은 한숨을 쉬고는 하준의 몸을 물수건으로 닦아주고 상처를 소독약으로 소독한 다음 연고까지 정성스럽게 발라주었다. 그 뒤에 옷을 입히고 나오기 전에 이불을 가져다 덮어주고는 가만히 문을 닫고 나왔다.주차장에 도착한 여름은 한참을 차 안에서 가만히 있었다.이게 대체 무슨 기분인지 알 수가 없었다.******다음날. 숙취에 시달리던 하준은 벨 소리에 깼다.눈을 떠 테이블에 휴대 전화를 보고는 집어 들었다. 이주혁의 또렷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야, 너 하석윤에게 맞았다며?”“……”하준은 멍하니 있다가 한참 만에야 여기저기가 쑤신다는 사실을 알았다. 머릿속 기억은 뚝뚝 끊겨 있었다. 머릿속 기억은 뚝뚝 끊겼다. 술집에서 술을 잔뜩 마시고…그 뒤에 누군가에게 맞은 것 같았다. 때린 녀석이 뭔가 잔뜩 떠든 것 같은데 누가 때렸는지는 기억이
“확실해?”하준의 목소리에서 냉기가 흘러나왔다.“난 백윤택과는 아무런 원한이 없는데.”“원한이 없다고 확신하냐?”이주혁이 떠보았다.“지안이랑 헤어진 일을 말하는 거야?”하준은 경악했다. 곧 눈에 살기가 돌았다.하준은 백지안에게 섭섭하게 한 것은 없다는 입장이었다.이제 보니 하준과 여름이 재결합하고 나서 백지안 남매는 잔뜩 심술이 나있었던 것이다.이주혁이 한숨을 쉬었다.“모르겠다. 내 말은 백윤택이라는 인간은 애초에 멀쩡한 인간이 아니라는 거야. 그런 인간은 도움을 받을 때는 당연하게 생각하고 도와주지 않으면 원한을 품는다고.”“백윤택이 일부러 그런 거겠지?”하준은 곧 상황이 파악되었다.“직접 손댔다가 너희들이 알아채면 곤란하니까 하석윤의 손을 빌린 거군.”“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지난번에 임윤서에게 흥분제를 먹인 일로도 용식이가 벼르고 있었는데 그때 해외로 도망쳤었잖아. 이제 슬슬 용식이가 화가 풀렸다고 생각했나 본데 한 달도 안 돼서 또 기어들어 왔군.”이주혁이 말을 이었다.“이번 일은 내가 너 대신 알아서 처리할게.”“그래,”하준은 머릿속이 어지러웠다.“아, 그런데 난 어떻게 돌아온 거야?”“내가 어찌 알겠냐? 어쨌든 나도 조금 아까 막 네가 맞았다는 얘기만 들었어.”하준은 고개를 숙이다가 자기 손등과 몸에 약이 발라져 있는 것을 보았다. 옷도 완전히 다 갈아 입혀져 있었다.표정이 확 변했다. 전화를 끊고 바로 바지 안을 확인했다.‘젠장, 속옷까지 다 갈아 입혔잖아?그렇다면 누군가가 날 발견했다는 얘긴데?누구지?’어젯밤 꿈에서 여름을 만났던 것이 기억났다.‘말도 안 돼.’하준은 몸이 떨렸다. 벌떡 일어나서 관리사무소 보안실로 가 CCTV 영상을 요청했다. 어젯밤 영상을 보고 나서 하준은 다리가 풀렸다.정말 강여름이었다. 여름이 옷을 갈아 입혀주었으니 분명 그곳에 드레싱이 되어 있는 것도 보았을 것이다.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이 남자로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을 들키는 것만큼이나 비참한 일이 있을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