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실해?”하준의 목소리에서 냉기가 흘러나왔다.“난 백윤택과는 아무런 원한이 없는데.”“원한이 없다고 확신하냐?”이주혁이 떠보았다.“지안이랑 헤어진 일을 말하는 거야?”하준은 경악했다. 곧 눈에 살기가 돌았다.하준은 백지안에게 섭섭하게 한 것은 없다는 입장이었다.이제 보니 하준과 여름이 재결합하고 나서 백지안 남매는 잔뜩 심술이 나있었던 것이다.이주혁이 한숨을 쉬었다.“모르겠다. 내 말은 백윤택이라는 인간은 애초에 멀쩡한 인간이 아니라는 거야. 그런 인간은 도움을 받을 때는 당연하게 생각하고 도와주지 않으면 원한을 품는다고.”“백윤택이 일부러 그런 거겠지?”하준은 곧 상황이 파악되었다.“직접 손댔다가 너희들이 알아채면 곤란하니까 하석윤의 손을 빌린 거군.”“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지난번에 임윤서에게 흥분제를 먹인 일로도 용식이가 벼르고 있었는데 그때 해외로 도망쳤었잖아. 이제 슬슬 용식이가 화가 풀렸다고 생각했나 본데 한 달도 안 돼서 또 기어들어 왔군.”이주혁이 말을 이었다.“이번 일은 내가 너 대신 알아서 처리할게.”“그래,”하준은 머릿속이 어지러웠다.“아, 그런데 난 어떻게 돌아온 거야?”“내가 어찌 알겠냐? 어쨌든 나도 조금 아까 막 네가 맞았다는 얘기만 들었어.”하준은 고개를 숙이다가 자기 손등과 몸에 약이 발라져 있는 것을 보았다. 옷도 완전히 다 갈아 입혀져 있었다.표정이 확 변했다. 전화를 끊고 바로 바지 안을 확인했다.‘젠장, 속옷까지 다 갈아 입혔잖아?그렇다면 누군가가 날 발견했다는 얘긴데?누구지?’어젯밤 꿈에서 여름을 만났던 것이 기억났다.‘말도 안 돼.’하준은 몸이 떨렸다. 벌떡 일어나서 관리사무소 보안실로 가 CCTV 영상을 요청했다. 어젯밤 영상을 보고 나서 하준은 다리가 풀렸다.정말 강여름이었다. 여름이 옷을 갈아 입혀주었으니 분명 그곳에 드레싱이 되어 있는 것도 보았을 것이다.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이 남자로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을 들키는 것만큼이나 비참한 일이 있을
양유진은 와락 차를 출발시켰다. 가는 길에 전수현에게 전화를 걸었다.“사무실에서 빌려둔 룸에서 기다려.”전수현과 한바탕하지 않으면 속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거의 회사에 도착했을 때 다시 전화가 울렸다.“대표님, 육민관에게 미행당하고 계십니다.”‘육민관이라고?’양유진은 깜짝 놀랐다.“얼마나 따라왔어?”“화신에서 나오실 때부터입니다. 어찌나 조심스러운지 저희가 진작부터 육민관과 양우형을 따라다니지 않았으면 저도 몰랐을 겁니다.”“알겠어”양유진은 휴대 전화를 꽉 쥐었다. 얼굴에는 음험한 미소가 떠올랐다.육민관은 강여름의 명령만 듣는다. 그렇다면 강여름이 자신을 조사하러 붙였다는 말이 된다.‘날 뭘로 의심하는 거지?말도 안 돼. 내가 얼마나 조심했는데 대체 어디서 새 나간 거야?’지금 당장 급한 일은 의심을 벗어나는 일이었다. 다시 전수현에게 전화를 걸었다.“거기서 기다릴 것 없어. 한동안은 못 만나. 강여름이 의심하고 있어.”전수현이 참지 못하고 불만을 터트렸다.“의심할 테면 하라고 해요. 어쨌든 대표님이 이혼할 것도 아니잖아요. 자기가 뭘 어쩌겠어요?”“네가 뭘 알아?”양유진이 냉정하게 받았다.전수현은 양유진의 반응에 울먹였다.“대표님이 너무 강여름에게 쩔쩔매는 게 마음 아파서 그러죠. 지금 대표님 위치라면 아무도 뭐라고 못할 텐데 그렇게까지 전전긍긍할 거 없잖아요?”“내 위치가 뭔데?”양유진이 싸늘하게 웃었다.“난 지금 그저 추동현의 개에 지나지 않는 처지라고.”그런 처지라는 것은 비서인 전수현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양유진의 말을 듣고는 속으로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추동현은 지금 우리나라 최고의 거부이니 그자의 심복으로 곁에 있기만 해도 평생 이인자 자리는 차지할 수 있는 거잖아요.설마… 추동현의 발밑에 있지 않겠다는 뜻인가?’그런 생각이 뇌리를 스치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네가 모르는 일도 있는 법이야. 강여름에게 우리 관계를 들키면 절대로 안 돼. 강여름은… 앞으로 써먹을 데가 따로 있다고.”
“다른 얘기할 거 없으면 이만….”하준이 다시 아무 말이 없는 것을 보고 여름이 다시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여름아….”하준이 갑자기 여름을 불렀다. 너무나 무거운 호흡이 느껴졌다.“저기… 봤어?”“……”여름은 얼굴이 달아올랐다. ‘안 봤다고 말 할 수 있겠냐?’“거기 얘기 하는 거야?”한참 만에야 여름은 헛기침을 하고는 목소리를 되찾아 되물었다.“그거야 뭐 내 알 바 아니지.”하준은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내 알 바 아니다… 너무 매정하네.’“그건 그렇네.”하준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난 이제 당신의 세계에 끼어들 자격이 없으니까.”여름은 깜짝 놀랐다. 예전의 하준이라면 지금쯤 미친 듯이 화를 냈을 것이다.‘사고 후에 사람이 바뀌었나?’사실 여름은 왜 그렇게 됐는지 너무나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의문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자기에게 관심 있다고 오해할까 봐 결국 물어보지는 못했다.하준이 말을 이었다.“다른 게 아니고 고맙다는 말 하려고 전화했어. 들어가. 바쁘지? 이만 끊을게.”통화가 끝나고 여름은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다.조심스러운 하준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마음이 영 불편했다.고압적이고 카리스마 넘치는 하준에 익숙해서 그런지 갑자기 이렇게 조심스럽고 온순한 하준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하준의 집. 하준은 노트북을 열어서 영상을 찾아보고 있었다.3년 전 배에서 난동을 부리는 영상이었다. 하준은 온몸에 힘을 준 채 여름을 꼭 안고 있었다. 사실은 방금 전 여름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3년 전 두 사람 사이는 대체 어땠는지, 왜 여름을 위해서 자신이 그 많은 재벌가 금수저를 두들겨 팼는지, 왜 그렇게 다른 놈들이 여름을 구경거리로 삼는 것이 그렇게 싫었는지….자기 성격상 절대로 누군가를 위해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과 척을 질 일을 할 리 없었다.3년 전, 여름이 자신에게 매우 소중한 사람이 아니었다면 결코 그럴 리 없었다.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 뒤에 자신이 다 잊은 것이다.그러나
“지금 증상은 거의 좋아졌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갑자기 발견한 건데요. 예전의 일을 다 잊은 게 아니라 저와 전처에 관련된 기억만 소실되었더라고요. 제가 전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전처에 관한 나쁜 기억만 잔뜩 남아 있었거든요. 그런데 요즘 계속 나오는 증거들을 모아보니 제가 예전에 여름이를 엄청나게 사랑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인지 머릿속에서 여름이와 관련된 좋은 기억은 하나도 없는 거예요.하준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저는 원래 패스트푸드 같은 건 경멸하던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친구 녀석에게 들으니 제가 전처와 패스트푸드점도 다니고 전처를 지키려고 여러 사람들에게 크게 일을 벌이기도 하고, 어마어마한 가격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다이아몬드 목걸이까지 선물했더라고요.”연 교수는 미간을 잔뜩 모으고 생각에 잠겼다.“지금 전처에 대한 것만 기억 못하나?”“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게, 다른 것도 기억이 좀 흐릿한 게 있어요. 그래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최근에 제가 잊어버린 일들이 거의… 대부분 여름이와 관련된 일이더라고요. 그리고… 정말 이상한 게 제가 그렇게나 사랑했다면 왜 머릿속에 여름이에 대한 증오만 남아 있는 거죠? 제가 증오했던 기억만큼은 또 너무 뚜렷합니다. 그래서 최근에 들어서야 그것 말고도 전처와 있었던 많은 기억을 잊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예요.”도무지 알 수 없는 현상에 하준은 막연한 얼굴을 하고 앉아 있었다.“죄송합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아마 잘 모르시겠죠. 사실 저도 이 느낌을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연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종이와 연필을 꺼내더니 점선을 그렸다.“이게 지금 자네의 상태야.중간에 빈 부분이 자네가 잊어버린 기억이지.”“네.”하준이 고개를 숙였다.연 교수가 미간을 찌푸렸다.“그러면 전에는 자네의 기억이 뭔가 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 적이 있나? 요즘에서야 알게 된 거야?”하준은 흠칫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전에는 의사가 제 증상이 원래 그런 거라
하준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되었다.‘내 머릿속에 누군가가 새로 프로그래밍을 해서 짜 넣었다?’하준은 헛웃음이 나왔다.“그럴 리가 있나요? 제가 기계도 아니고….”연 교수가 정색했다.“아, 그건 말이야. 예전에 Y국에는 오래된 최면술이 있는데 딱 그런 식이거든. 편집하는 사람이 감정과 기억을 편집하는데 당사자가 전혀 눈치채지 못하게 한다네.”하준의 머리에서 콰르릉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최면술!최면술로 나의 감정과 기억이 편집되었다고?!’“그러니까, 제가 사랑하는 사람은 원래 전처였는데 누군가가 제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생각하게 만든 거라고요?”“뭐, 내 추측일 뿐이지만 말이야. 100% 확신할 수는 없어.”연 교수가 말을 이었다.“하지만 자네가 말한 증상은 Y국의 오래된 최면술과 매우 유사하단 말이야. 시술자는 자네가 매우 신임하는 사람이었을 걸세. 아니면 성공하기 힘들거든. 그리고 정신학 방면에도 매우 조예가 깊은 사람일 거야.”‘신임하는 사람….’하준은 바로 백지안을 떠올렸다. 한때 백지안은 하준이 가장 믿는 사람이었다. 백지안이 하는 말은 무조건 다 믿었었다.게다가 세계 최고의 정신과 의사가 아닌가!그런 백지안이 자신의 기억과 감정을 편집했다는 생각을 하니 하준은 소름이 돋았다.믿을 수가 없었다.어려서 정신병원에 갇혔을 때 그렇게 자신을 응원해주던 순수한 여자애가 어떻게 그런 악랄한 수를 쓰는 인간인 된단 말인가?“선생님도 그 최면술을 하실 수 있습니까?”하준이 멍하니 물었다.“나는 못 하지.”연 교수가 고개를 저었다.“그 최면술은 너무 해악이 커서 국제 사회에서 사용이 금지되어 있어. 생각해보게. 사람들이 다들 그런 최면술을 쓴다면 세상이 어떤 꼴이 되겠는가? 게다가 그 최면술은 성공 확률이 매우 희박해. 열에 하나도 성공하기 힘들다고 했지. 실패할 경우 뇌손상이 온다고.”“뇌 손상이 온다고요?”하준은 다시 깜짝 놀랐다.“그렇다면 저에게 건 최면이 실패했다면 저도 뇌손상으로 백치가 될 수도
“정말 최악의 최면이군요.”무릎에 놓인 하준의 손이 떨렸다.“그렇지.”연 교수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복잡한 눈으로 하준을 쳐다보았다.“의심 가는 대상이 있다면 그 사람을 가까이 하지 말게. 물론 자네가 최면에 안 걸렸으면 하네. 그냥 자네의 착각이었으면 좋겠구먼”“고맙습니다.”하준은 일어서서 연 교수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연구실에서 나온 하준은 바로 운전하지 않고 교정을 거닐었다. 다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머릿속은 온통 새하얬다.모든 것이 자신의 억측이길 바랐다.‘지안이가 내 뇌를 다 망가트릴 가능성을 알고도 그런 최면을 걸다니….아닐 거야. 지안이가 그렇게까지 못된 인간은 아닐 거야.’하지만 모든 게 사실이라면 3년간 보여주었던 그 온화하고 선한 모습을 떠올리니 하준은 목덜미의 솜털이 쭈뼛했다.‘안 되겠어. 진상을 파야겠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해도 내 기억의 어디에 문제가 생긴 건지는 알아야겠어.’하준은 바로 비행기 표를 사서 동성으로 향했다. 이 일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어려서부터 굳게 믿었던 지안이에게도 당했는데 이제 누굴 믿을 수 있겠는가?******비행기가 동성에 착륙하자 최란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언제 출근할래?”“저 지금 동성입니다.”“뭐라고?”최란이 불같이 화를 냈다.“오늘 가디언그룹 이사장 만난다고 어제 얘기 다 했잖니? 지금 온 나라의 재벌들이 가디언이랑 협력을 못 해서 난리인데 넌 말도 없이 동성은 왜 갔어? 대체 뭐 하는 짓이니?”“중요한 볼일이 있어서요.”하준이 낮은 소리로 답했다.“대체 이거 보다 중한 일이 뭐가 있어? FTT보다 더 중요한 일이란 말이니?”최란은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네.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하준은 다시 강조했다.최란은 대체 하준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난 몰겠다. 일 마치면 최대한 빨리 돌아와라. 네가 나한테 회사를 맡겨 놔서 지금 매일 미친 듯이 일하고 있다고. 이러다 내가 과로사하길 바라는 게냐?”“
“아, 이모님? 너무 오래돼서 어떨지 모르겠다. 기다려 봐.”지훈이 가사도우미 업체에 전화를 걸었다. 한참을 찾은 후에야 임옥희의 연락처를 받을 수 있었다.“이모님이 지금은 다른 집에서 근무하신다네.”지훈이 하준에게 주소를 하나 주었다.“내가 데려다줄게.”“됐어.”하준이 주소를 받아들었다.“고맙다.”“별소릴. 야, 근데 네가 이러니까 적응 안 된다.”지훈이 차 키를 하준에게 던져주었다.“이거 끌고 가라. 이따 저녁이나 같이 먹자.”“웬일이냐?”하준이 지훈을 흘끗 쳐다보았다.“요즘 우리랑 연락도 뜸했잖아? 서울 와도 우리랑 같이 밥도 안 먹고 동성에 처박혀서 우린 쳐다도 안 보더니?”어쩐 일인지 갑자기 지훈이 부러웠다.동성이 비록 조그마한 도시이긴 해도 지훈은 여기서 서울처럼 온갖 풍파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고 거의 동성의 패주나 다름이 없이 살고 있었다.지훈이 싱글싱글 웃었다.“너희가 항상 시아랑 백지안을 데리고 나오니까 그랬지. 난 걔들 별로 안 좋아하거든. 난….”그러더니 지훈은 입을 다물었다.“아니다. 그냥 그렇다고.”“말해 봐.”하준이 세게 말했다. 옷은 예전보다 힘이 많이 빠진 패션이라 해도 미간에 올라오는 카리스마는 여전했다.“우리도 오랜 세월 친구였는데 말 돌릴 거 뭐 있어? 까놓고 말해 봐.”“뭐. 그래. 난… 네가 써머한테 좀 너무했다고 생각하거든. 그리고 백지안은 내가 뭐 원래 친하지도 않았거니와 아마도 난 네가 써머랑 다니던 모습이 익숙해서 그런지 네 옆자리가 백지안으로 바뀌어 있는 게 영 이상하더라. 그리고 주혁이는 어쩌자고 시아 같은 애랑 다니냐? 걔는 진짜 괜찮은 애가 아니야. 그리고 영식이는 또 어떻고? 허구한 날 지안이 바라기에 그저 백지안이 무슨 말만 하면 교주처럼 따르고. 눈에 콩깍지도 뭐 그런 콩깍지가 끼어서는…. 그것도 다 그렇다고 쳐. 그런데 너희가 계속 걔들 둘을 데리고 나오는데 난 영 불편해서 같이 밥 먹자고 부르기도 뭣하더라고.”지훈은 솔직하게 다 털어놓았다.“특히 요즘은 너
사람이 살면서 몇 가지 기억이 모호해질 수는 있다지만 그렇게 사랑했던 사람과 관련된 기억이 모두 사라진다는 것은 너무나 기이한 일이다.여름을 구하기 위해서 자신이 그렇게 몇 번이나 목숨을 걸었다니 너무나 뜻밖이었다.게다가 속이 다 뒤집어졌을 텐데 매운 음식을 먹으러 다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자극적으로 매운 음식은 절대로 입에도 대지 않는데….대체 예전에는 강여름이 어떤 의미였던 걸까?어서 자세히 여름과의 과거를 파헤쳐보고 싶었다. 그러나 불현듯 두려운 마음도 들었다.그렇게나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기억이 다 편집되어서라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매몰차게 버리고, 아이들까지 잃게 만들었다.생각했던 것보다 여름에게 너무나 깊은 상처를 남긴 것이 아닌가!30분을 차에 가만히 앉아서 망설이다가 결국 임옥희를 찾아가기로 했다.임옥희는 전화를 받고는 곧 낡은 공책을 하나 들고나왔다. 하준을 보더니 반신반의하며 불렀다.“최 변호사님…?”“절 기억 하시나요?”임옥희의 얼굴을 보니 하준은 확실히 기억이 났다.“아유, 당연하죠. 제가 그 오랜 세월 남의 집 일을 했어도 두 분 같은 분들은 잊을 수가 없…”말을 하다 말고 임옥희가 갑자기 뭔가 잘못한 사람처럼 입을 막더니 다시 물었다.“죄송해요. 제가 주책맞게 그만 전 사모님 얘기를 꺼내 가지고….”“괜찮습니다.”하준은 심장에 욱신거리는 아픔을 애써 참았다.임옥희가 안절부절했다.“그런데 저는 왜 갑자기 찾아오셨어요?”“제가 전에 병을 앓으면서 동성에서 있었던 일을 거의 기억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좀 여쭤보려고요.”적당히 핑계를 댔다.“저와 강여름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좀 이야기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하준의 말을 듣더니 임옥희는 깜짝 놀라며 동정의 시선을 보냈다.“그러셨구나. 두 분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야 저도 자세히는 잘 모르죠. 집안일 하는 사람이니까요. 그냥 제가 봤던 것만 말씀드릴게요. 어쨌든 두 분은 애증의 관계였달까요? 좋을 때는 그냥 뭐 죽도록 좋아하고 안 좋을 때는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