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최악의 최면이군요.”무릎에 놓인 하준의 손이 떨렸다.“그렇지.”연 교수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복잡한 눈으로 하준을 쳐다보았다.“의심 가는 대상이 있다면 그 사람을 가까이 하지 말게. 물론 자네가 최면에 안 걸렸으면 하네. 그냥 자네의 착각이었으면 좋겠구먼”“고맙습니다.”하준은 일어서서 연 교수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연구실에서 나온 하준은 바로 운전하지 않고 교정을 거닐었다. 다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머릿속은 온통 새하얬다.모든 것이 자신의 억측이길 바랐다.‘지안이가 내 뇌를 다 망가트릴 가능성을 알고도 그런 최면을 걸다니….아닐 거야. 지안이가 그렇게까지 못된 인간은 아닐 거야.’하지만 모든 게 사실이라면 3년간 보여주었던 그 온화하고 선한 모습을 떠올리니 하준은 목덜미의 솜털이 쭈뼛했다.‘안 되겠어. 진상을 파야겠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해도 내 기억의 어디에 문제가 생긴 건지는 알아야겠어.’하준은 바로 비행기 표를 사서 동성으로 향했다. 이 일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어려서부터 굳게 믿었던 지안이에게도 당했는데 이제 누굴 믿을 수 있겠는가?******비행기가 동성에 착륙하자 최란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언제 출근할래?”“저 지금 동성입니다.”“뭐라고?”최란이 불같이 화를 냈다.“오늘 가디언그룹 이사장 만난다고 어제 얘기 다 했잖니? 지금 온 나라의 재벌들이 가디언이랑 협력을 못 해서 난리인데 넌 말도 없이 동성은 왜 갔어? 대체 뭐 하는 짓이니?”“중요한 볼일이 있어서요.”하준이 낮은 소리로 답했다.“대체 이거 보다 중한 일이 뭐가 있어? FTT보다 더 중요한 일이란 말이니?”최란은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네.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하준은 다시 강조했다.최란은 대체 하준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난 몰겠다. 일 마치면 최대한 빨리 돌아와라. 네가 나한테 회사를 맡겨 놔서 지금 매일 미친 듯이 일하고 있다고. 이러다 내가 과로사하길 바라는 게냐?”“
“아, 이모님? 너무 오래돼서 어떨지 모르겠다. 기다려 봐.”지훈이 가사도우미 업체에 전화를 걸었다. 한참을 찾은 후에야 임옥희의 연락처를 받을 수 있었다.“이모님이 지금은 다른 집에서 근무하신다네.”지훈이 하준에게 주소를 하나 주었다.“내가 데려다줄게.”“됐어.”하준이 주소를 받아들었다.“고맙다.”“별소릴. 야, 근데 네가 이러니까 적응 안 된다.”지훈이 차 키를 하준에게 던져주었다.“이거 끌고 가라. 이따 저녁이나 같이 먹자.”“웬일이냐?”하준이 지훈을 흘끗 쳐다보았다.“요즘 우리랑 연락도 뜸했잖아? 서울 와도 우리랑 같이 밥도 안 먹고 동성에 처박혀서 우린 쳐다도 안 보더니?”어쩐 일인지 갑자기 지훈이 부러웠다.동성이 비록 조그마한 도시이긴 해도 지훈은 여기서 서울처럼 온갖 풍파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고 거의 동성의 패주나 다름이 없이 살고 있었다.지훈이 싱글싱글 웃었다.“너희가 항상 시아랑 백지안을 데리고 나오니까 그랬지. 난 걔들 별로 안 좋아하거든. 난….”그러더니 지훈은 입을 다물었다.“아니다. 그냥 그렇다고.”“말해 봐.”하준이 세게 말했다. 옷은 예전보다 힘이 많이 빠진 패션이라 해도 미간에 올라오는 카리스마는 여전했다.“우리도 오랜 세월 친구였는데 말 돌릴 거 뭐 있어? 까놓고 말해 봐.”“뭐. 그래. 난… 네가 써머한테 좀 너무했다고 생각하거든. 그리고 백지안은 내가 뭐 원래 친하지도 않았거니와 아마도 난 네가 써머랑 다니던 모습이 익숙해서 그런지 네 옆자리가 백지안으로 바뀌어 있는 게 영 이상하더라. 그리고 주혁이는 어쩌자고 시아 같은 애랑 다니냐? 걔는 진짜 괜찮은 애가 아니야. 그리고 영식이는 또 어떻고? 허구한 날 지안이 바라기에 그저 백지안이 무슨 말만 하면 교주처럼 따르고. 눈에 콩깍지도 뭐 그런 콩깍지가 끼어서는…. 그것도 다 그렇다고 쳐. 그런데 너희가 계속 걔들 둘을 데리고 나오는데 난 영 불편해서 같이 밥 먹자고 부르기도 뭣하더라고.”지훈은 솔직하게 다 털어놓았다.“특히 요즘은 너
사람이 살면서 몇 가지 기억이 모호해질 수는 있다지만 그렇게 사랑했던 사람과 관련된 기억이 모두 사라진다는 것은 너무나 기이한 일이다.여름을 구하기 위해서 자신이 그렇게 몇 번이나 목숨을 걸었다니 너무나 뜻밖이었다.게다가 속이 다 뒤집어졌을 텐데 매운 음식을 먹으러 다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자극적으로 매운 음식은 절대로 입에도 대지 않는데….대체 예전에는 강여름이 어떤 의미였던 걸까?어서 자세히 여름과의 과거를 파헤쳐보고 싶었다. 그러나 불현듯 두려운 마음도 들었다.그렇게나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기억이 다 편집되어서라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매몰차게 버리고, 아이들까지 잃게 만들었다.생각했던 것보다 여름에게 너무나 깊은 상처를 남긴 것이 아닌가!30분을 차에 가만히 앉아서 망설이다가 결국 임옥희를 찾아가기로 했다.임옥희는 전화를 받고는 곧 낡은 공책을 하나 들고나왔다. 하준을 보더니 반신반의하며 불렀다.“최 변호사님…?”“절 기억 하시나요?”임옥희의 얼굴을 보니 하준은 확실히 기억이 났다.“아유, 당연하죠. 제가 그 오랜 세월 남의 집 일을 했어도 두 분 같은 분들은 잊을 수가 없…”말을 하다 말고 임옥희가 갑자기 뭔가 잘못한 사람처럼 입을 막더니 다시 물었다.“죄송해요. 제가 주책맞게 그만 전 사모님 얘기를 꺼내 가지고….”“괜찮습니다.”하준은 심장에 욱신거리는 아픔을 애써 참았다.임옥희가 안절부절했다.“그런데 저는 왜 갑자기 찾아오셨어요?”“제가 전에 병을 앓으면서 동성에서 있었던 일을 거의 기억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좀 여쭤보려고요.”적당히 핑계를 댔다.“저와 강여름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좀 이야기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하준의 말을 듣더니 임옥희는 깜짝 놀라며 동정의 시선을 보냈다.“그러셨구나. 두 분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야 저도 자세히는 잘 모르죠. 집안일 하는 사람이니까요. 그냥 제가 봤던 것만 말씀드릴게요. 어쨌든 두 분은 애증의 관계였달까요? 좋을 때는 그냥 뭐 죽도록 좋아하고 안 좋을 때는
“그러면 저랑 여름이랑… 부부관계도 좋았을까요?”하준이 낮은 소리로 물었다. 지금 자기 기억 속에는 여름이 너무 미워서 다가오거나 손대는 것조차 징그러웠다. 심지어 여름이 자신이 술에 취했을 때를 틈타서 임신을 했다고 생각했다.임옥희의 볼이 화끈 달아올랐다.“아이고, 그럼요. 뜨거웠죠. 사모님이랑 입 맞출 때마다 얼마나 좋아하셨다고요. 한 번은 변호사님이 다치셨었는데 사모님에게 뽀뽀를 해줘야 안 아프다고 거짓말까지 하셨다니까요. 사모님은 안 믿었지만…. 보는 제가 다 부끄러웠어요.”“고맙습니다….”하준은 한창 감상적인 기분이 된 채로 임옥희와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임옥희가 해준 말은 전혀 기억이 없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지훈이 했던 얘기처럼 모두 사실이라는 것을 알았다.그저 자기가 강여름이라는 사람을 너무나 사랑했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을 뿐.머릿속에는 그저 강여름과 관련된 나쁜 기억만 남아있었다.‘어쩐지 여름이가 다시 돌아왔을 때 먹어본 여름이 밥이 그렇게 맛있더라니. 이미 내가 뭘 좋아하는지 다 알고 있었던 거야.잠자리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건 기가 막히게 안다 싶었어.사랑했으니까.그런데 그렇게나 사랑하다가 잊었어. 잊어버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지안이랑 사귀면서 여름이에게 이혼협의서에 사인하라고 압박하고 대외적으로 협의 이혼했다고 발표하라고까지 했어.백지안은 그렇게 죽어라고 감싸고 보호하면서 여름이는 가둬놓고, 아이까지 잃게 만들고.제일 친한 친구는 다치게 만들고, 아버님 병 치료를 걸고 여름이를 협박했었잖아.그 모든 걸 딛고 여름이가 돌아왔었는데.또 백지안 말만 듣고는 여름이의 보디가드를 해치고 또 가두어버릴 뻔했었네.확실한 증거를 갖고 오지 않았더라면 난 아직까지도 여름이를 최고의 못된 인간으로 생각했을 거야.난 여름이를 사랑할 자격이 없네.그렇게 여러 번 심하게 상처를 준 걸로도 모자라서지난번에는 섬으로 끌고 갔잖아.’두 눈에서 줄줄 쏟아지는 눈물을 컨트롤할 수가 없었다.태어나서 처음으로 비 오듯 눈물을 쏟았다.
“사람이 살다 보면 실패할 때도 있고 그런 거지. 네 실력이면 법률 방면이든, 금융 방면이든, 뭘 해도 동성에서 금방 자리 잡고 내로라하는 인사가 될 거야.”“그런 게 아니야.”하준은 맥주를 따더니 벌컥벌컥 들이켰다. 눈시울은 붉어진 채였다.지훈이 깜짝 놀랐다.“야, 왜 이래?”하준을 알고 지낸 지 십수 년이지만 이렇게 낙담한 모습은 처음이었다.“네가 뭘 알아? 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다고.”하준이 고개를 들더니 씁쓸하게 말했다.“지훈아, 나랑 여름이가 만나고, 사귀고, 서로 사랑했던 이야기 좀 해 주라. 듣고 싶다.”“그러자. 네가 막 동성에 왔을 땐데….”하준이 왜 갑자기 여름의 이야기를 해달라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훈은 하나도 빼지 않고 자기가 아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결국 이야기를 듣던 하준은 잠이 들었다.지훈은 결국 송영식에게 전화를 걸었다.“너희들이 그러고도 친구냐? 하준이한테 그런 큰일이 생겼으면 너희들이 좀 더 바짝 붙어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 애가 얼마나 답답하면 동성까지 와서 술을 푸냐고?”“하준이 거기 갔어?”송영식은 속상했다. 아침에야 백윤택이 하석윤을 시켜 하준을 때렸다는 얘기를 듣고 백윤택의 행방을 쫓던 중이었다.“그래.”지훈이 답했다.“너랑 하준이가 백지안을 사이에 두고 좀 삐걱거린 건 알겠지만 너희도 어릴 때부터 친구잖냐? 우리가 언제 우리 중에 한 명에게 무슨 일 생겼을 때 서로 등 돌린 적 있었냐?”“넌 무슨 말을 그렇게 섭섭하게 하냐? 그래, 전에는 하준이가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이라고 생각했던 건 맞는데 지금은 하준이에게 큰일이 생겼잖아. 나도 이게 얼마나 심각한 건지는 안다고. 내가 무슨 기분 내키면 술이나 마시는 술친구 같은 건 줄 아냐?”“그래. 네가 그렇게 생각하면 됐다.”******서울.통화를 하고 나니 송영식은 화가 나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백윤택 때문이었다. 지난번에 윤서에게 흥분제를 먹인 일도 아직 벼르는 중인데 이번에는 감히 하준이를 건드리다
“네가 왜 사과를 해? 너한테 화난 게 아니야. 그냥 난 네 오빠가 이해가 안 돼서 그러지.”송영식이 이를 갈았다.“연락은 돼? 아, 미안하지만 이번에는 그냥 못 넘어가. 설마 날 안 도와주지는 않겠지?”“그런 소리 하지도 마. 이젠 진짜 한번 정신 차릴 때가 됐지, 그 인간이. 내가 전화 걸어서 상황 좀 볼게. 그런데 내 전화를 받으려나 모르겠네.”백지안이 백윤택에게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 백지안이 입술을 깨물었다.“이제 내 전화도 안 받네. 아, 쭌은… 지금 어쩌고 있어? 그래도 그간 친구로 지낸 정이 있어서, 나도 걱정이 된다.”“나 참, 지금 동성에 가 있어.”송영식이 한숨을 쉬었다.“갑자기 거긴 왜 갔는지 몰겠다. 지훈이랑 술 마시고 있다더라.”‘동성을 갔다고?’동성이라는 말에 백지안은 적잖이 놀랐다.하준과 여름의 관계가 시작된 곳이 동성이었다.‘뭔가 눈치챈 건 아니겠지?’“지안아….”송영식의 목소리에 백지안은 다시 정신을 차렸다.“아까 들어오면서 보니까 새 스포츠카가 있던데, 차 바꿨어?”“으응….”백지안은 자신의 과시욕이 들킬까 싶어 서둘러 핑계를 댔다.“전에 타던 차는 빨리 처분하고 싶더라고. 과거의 모든 것을 그냥 다 잊고 싶었어.”“아, 그래. 저기… 헤어질 때 하준이한테 위자료를 꽤 받았었잖아? 지금 하준이 상황이 너무 안 좋아. 당장 자금 조달이 시급하거든. 그래서 말인데…그걸 좀 하준이에게 돌려줄 수 있을까?”송영식이 과감하게 입을 열었다.다른 사람이면 그렇게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송영식은 백지안이 의리 있고 돈 밝히는 소인배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흔쾌히 동의하리라고 믿었다.결혼도 안 했는데 그런 위자료는 가히 천문학적이라 할 수 있었다.“아, 물론 다 달라는 건 아니고 그중에 한 60~70%만 해도 괜찮을 것 같아. 넌 이제 곧 나랑 결혼할 거잖아. 오슬란은 지금 점점 상황이 좋아지고 있으니까 앞으로 우리가 돈이 부족한 일은 없을 거야. 너는 내가 충분히 책임지
“아… 그렇구나.”송영식은 멍해졌다. 백지안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너무 예상 밖이었다.놀 때는 늘 같이 놀던 친구가 돈을 빌리려고 하는 순간 온갖 이유를 주워섬기며 빌려주지 않으려고 하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그럼 됐어. 늦었다. 난 이만 가볼게. 쉬어.”송영식이 손을 흔들었다. 더는 여기 있을 기분이 아니었다.“도움이 하나도 못 돼서 정말 너무 미안하다.”백지안은 미안해 죽겠다는 얼굴을 했다.“괜찮아. 하준이에게 필요한 자금은 나랑 주혁이가 어떻게든 해볼 수 있을 거야. 그냥 해본 소리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송영식은 그렇게 억지로 위로를 남기고 별장을 떠났다.차 문을 열려다가 별장을 다시 한번 돌아보았다. 이곳은 모래사장의 모래가 가늘고 파도가 넘실거려 풍경이 좋으면서 도심에서 접근성이 좋아 가장 비싼 부지에 속하는 곳이었다. 처음에 하준이 구입할 때 들인 비용도 상당했지만 지금은 몇 배로 값이 뛰어 있을 것이다.백지안과 헤어지면서 하준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이 집을 내주었다. 그런데 지금 하준이네 어르신들은 교외의 허름한 집에서 지내고 계셨다.한숨이 나왔다.‘뭐, 지안이 잘못은 아니지. 하준이가 주었으면 처분할 권리도 쟤한테 있는 거잖아. 그리고 몇천, 몇억도 아닌데 요즘처럼 돈이 무엇보다 중요한 세상에 아무리 지안이처럼 착한 애라도 선뜻 내놓기는 쉽지 않겠지.’******이때 이주혁에게서 전화가 왔다.“백윤택 잡았어.”“어디야? 당장 갈게.”송영식은 즉시 차에 타 주민그룹 소유의 어느 공장 부지로 향했다.도착해 보니 백윤택은 이미 묶인 채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고 고급 양복을 입은 이주혁은 그 옆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꼼꼼하게 안경을 닦고 있었다.송영식이 온 것을 보더니 크게 티 나지 않는 쌍꺼풀 진 눈으로 쓱 쳐다보았다. 평온한 시선이었지만 어쩐지 어둠이 넘실대고 있었다.“나 좀 살려줘.”백윤택이 송영식을 보더니 소리쳤다.“난 하석윤에게 최하준을 해치라고
“그동안 동생하고 우리 백만 믿고 온갖 못된 짓을 하고 다닌 걸 우리가 모를 거라고 생각한 건가?”입으로는 느긋하게 말하면서 손을 밟고 있는 발에는 더 무게를 지긋하게 실었다.“하준이가 그렇게 뒤를 봐줬으면 고마워해도 부족할 판인데 지금 하준이 상황이 그렇다고 뒤통수를 쳐?”백윤택은 너무 아파서 말도 할 수 없었다.“혼자서 생각해낸 거야, 아니면 누구의 지시로 벌인 짓인가?”이주혁이 갑자기 물었다.백윤택은 창백한 얼굴로 다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입을 열 정신도 없었다.백지안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가는 당장 본인뿐 아니라 지안이가 송영식과 결혼한 후 이번 일을 복수하려고 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제대고 손 좀 봐줘.”이주혁이 옆에 있던 수하에게 손짓했다.공포에 질려 백윤택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미처 한 마디 내뱉기도 전에 기절하고 말았다.송영식은 깜짝 놀랐다. 아무리 그래도 백지안의 오빠인데 한 대 후려치는 정도로 끝낼 생각이었던 것이다. “주, 주혁아. 하준이 구치소 사건은… 백윤택이 벌인 짓도 아니잖아….”“백윤택이 했다고 안 그랬는데.”이주혁이 소매를 털며 느긋하게 답했다.“경고 같은 거야. 하준이네와 FTT가 조금 위기에 처하진 했지만 감히 내 친구를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줘야지.”“하지만… 그렇다고 꼭 이렇게 피를 볼 필요가….”송영식이 혀를 내둘렀다.“그래도… 지안이 오빠잖아….”“지안이 오빠라….”이주혁이 한 마디 뱉었다.“저 자식이 지안이 오빠만 아니었으면 늙어 죽을 때까지 감옥에서 썩어야 했을걸. 요 몇 년 동안 저 자식이 저지른 짓을 생각해 봐. 대학생 자살했지, 여자 직원만 보면 건드렸지, 임윤서가 자기 마음대로 안 된다고 건달 끌고 가서 폭행했지, 흥분제 먹였지, 그런데도 우리 백만 믿고 이제는 남을 시켜서 사람까지 패고 말이야. 저 자식은, 인간 되기는 글렀어. 이렇게라도 해 놔야 더는 다른 사람 해치러 다니지 않는다니까.”송영식은 할 말이 없었다.가만히 생각해 보니 백윤택이 저지른 천인공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