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살다 보면 실패할 때도 있고 그런 거지. 네 실력이면 법률 방면이든, 금융 방면이든, 뭘 해도 동성에서 금방 자리 잡고 내로라하는 인사가 될 거야.”“그런 게 아니야.”하준은 맥주를 따더니 벌컥벌컥 들이켰다. 눈시울은 붉어진 채였다.지훈이 깜짝 놀랐다.“야, 왜 이래?”하준을 알고 지낸 지 십수 년이지만 이렇게 낙담한 모습은 처음이었다.“네가 뭘 알아? 난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다고.”하준이 고개를 들더니 씁쓸하게 말했다.“지훈아, 나랑 여름이가 만나고, 사귀고, 서로 사랑했던 이야기 좀 해 주라. 듣고 싶다.”“그러자. 네가 막 동성에 왔을 땐데….”하준이 왜 갑자기 여름의 이야기를 해달라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훈은 하나도 빼지 않고 자기가 아는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결국 이야기를 듣던 하준은 잠이 들었다.지훈은 결국 송영식에게 전화를 걸었다.“너희들이 그러고도 친구냐? 하준이한테 그런 큰일이 생겼으면 너희들이 좀 더 바짝 붙어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 애가 얼마나 답답하면 동성까지 와서 술을 푸냐고?”“하준이 거기 갔어?”송영식은 속상했다. 아침에야 백윤택이 하석윤을 시켜 하준을 때렸다는 얘기를 듣고 백윤택의 행방을 쫓던 중이었다.“그래.”지훈이 답했다.“너랑 하준이가 백지안을 사이에 두고 좀 삐걱거린 건 알겠지만 너희도 어릴 때부터 친구잖냐? 우리가 언제 우리 중에 한 명에게 무슨 일 생겼을 때 서로 등 돌린 적 있었냐?”“넌 무슨 말을 그렇게 섭섭하게 하냐? 그래, 전에는 하준이가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이라고 생각했던 건 맞는데 지금은 하준이에게 큰일이 생겼잖아. 나도 이게 얼마나 심각한 건지는 안다고. 내가 무슨 기분 내키면 술이나 마시는 술친구 같은 건 줄 아냐?”“그래. 네가 그렇게 생각하면 됐다.”******서울.통화를 하고 나니 송영식은 화가 나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백윤택 때문이었다. 지난번에 윤서에게 흥분제를 먹인 일도 아직 벼르는 중인데 이번에는 감히 하준이를 건드리다
“네가 왜 사과를 해? 너한테 화난 게 아니야. 그냥 난 네 오빠가 이해가 안 돼서 그러지.”송영식이 이를 갈았다.“연락은 돼? 아, 미안하지만 이번에는 그냥 못 넘어가. 설마 날 안 도와주지는 않겠지?”“그런 소리 하지도 마. 이젠 진짜 한번 정신 차릴 때가 됐지, 그 인간이. 내가 전화 걸어서 상황 좀 볼게. 그런데 내 전화를 받으려나 모르겠네.”백지안이 백윤택에게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 백지안이 입술을 깨물었다.“이제 내 전화도 안 받네. 아, 쭌은… 지금 어쩌고 있어? 그래도 그간 친구로 지낸 정이 있어서, 나도 걱정이 된다.”“나 참, 지금 동성에 가 있어.”송영식이 한숨을 쉬었다.“갑자기 거긴 왜 갔는지 몰겠다. 지훈이랑 술 마시고 있다더라.”‘동성을 갔다고?’동성이라는 말에 백지안은 적잖이 놀랐다.하준과 여름의 관계가 시작된 곳이 동성이었다.‘뭔가 눈치챈 건 아니겠지?’“지안아….”송영식의 목소리에 백지안은 다시 정신을 차렸다.“아까 들어오면서 보니까 새 스포츠카가 있던데, 차 바꿨어?”“으응….”백지안은 자신의 과시욕이 들킬까 싶어 서둘러 핑계를 댔다.“전에 타던 차는 빨리 처분하고 싶더라고. 과거의 모든 것을 그냥 다 잊고 싶었어.”“아, 그래. 저기… 헤어질 때 하준이한테 위자료를 꽤 받았었잖아? 지금 하준이 상황이 너무 안 좋아. 당장 자금 조달이 시급하거든. 그래서 말인데…그걸 좀 하준이에게 돌려줄 수 있을까?”송영식이 과감하게 입을 열었다.다른 사람이면 그렇게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송영식은 백지안이 의리 있고 돈 밝히는 소인배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흔쾌히 동의하리라고 믿었다.결혼도 안 했는데 그런 위자료는 가히 천문학적이라 할 수 있었다.“아, 물론 다 달라는 건 아니고 그중에 한 60~70%만 해도 괜찮을 것 같아. 넌 이제 곧 나랑 결혼할 거잖아. 오슬란은 지금 점점 상황이 좋아지고 있으니까 앞으로 우리가 돈이 부족한 일은 없을 거야. 너는 내가 충분히 책임지
“아… 그렇구나.”송영식은 멍해졌다. 백지안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동의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너무 예상 밖이었다.놀 때는 늘 같이 놀던 친구가 돈을 빌리려고 하는 순간 온갖 이유를 주워섬기며 빌려주지 않으려고 하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그럼 됐어. 늦었다. 난 이만 가볼게. 쉬어.”송영식이 손을 흔들었다. 더는 여기 있을 기분이 아니었다.“도움이 하나도 못 돼서 정말 너무 미안하다.”백지안은 미안해 죽겠다는 얼굴을 했다.“괜찮아. 하준이에게 필요한 자금은 나랑 주혁이가 어떻게든 해볼 수 있을 거야. 그냥 해본 소리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송영식은 그렇게 억지로 위로를 남기고 별장을 떠났다.차 문을 열려다가 별장을 다시 한번 돌아보았다. 이곳은 모래사장의 모래가 가늘고 파도가 넘실거려 풍경이 좋으면서 도심에서 접근성이 좋아 가장 비싼 부지에 속하는 곳이었다. 처음에 하준이 구입할 때 들인 비용도 상당했지만 지금은 몇 배로 값이 뛰어 있을 것이다.백지안과 헤어지면서 하준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이 집을 내주었다. 그런데 지금 하준이네 어르신들은 교외의 허름한 집에서 지내고 계셨다.한숨이 나왔다.‘뭐, 지안이 잘못은 아니지. 하준이가 주었으면 처분할 권리도 쟤한테 있는 거잖아. 그리고 몇천, 몇억도 아닌데 요즘처럼 돈이 무엇보다 중요한 세상에 아무리 지안이처럼 착한 애라도 선뜻 내놓기는 쉽지 않겠지.’******이때 이주혁에게서 전화가 왔다.“백윤택 잡았어.”“어디야? 당장 갈게.”송영식은 즉시 차에 타 주민그룹 소유의 어느 공장 부지로 향했다.도착해 보니 백윤택은 이미 묶인 채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고 고급 양복을 입은 이주혁은 그 옆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꼼꼼하게 안경을 닦고 있었다.송영식이 온 것을 보더니 크게 티 나지 않는 쌍꺼풀 진 눈으로 쓱 쳐다보았다. 평온한 시선이었지만 어쩐지 어둠이 넘실대고 있었다.“나 좀 살려줘.”백윤택이 송영식을 보더니 소리쳤다.“난 하석윤에게 최하준을 해치라고
“그동안 동생하고 우리 백만 믿고 온갖 못된 짓을 하고 다닌 걸 우리가 모를 거라고 생각한 건가?”입으로는 느긋하게 말하면서 손을 밟고 있는 발에는 더 무게를 지긋하게 실었다.“하준이가 그렇게 뒤를 봐줬으면 고마워해도 부족할 판인데 지금 하준이 상황이 그렇다고 뒤통수를 쳐?”백윤택은 너무 아파서 말도 할 수 없었다.“혼자서 생각해낸 거야, 아니면 누구의 지시로 벌인 짓인가?”이주혁이 갑자기 물었다.백윤택은 창백한 얼굴로 다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입을 열 정신도 없었다.백지안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가는 당장 본인뿐 아니라 지안이가 송영식과 결혼한 후 이번 일을 복수하려고 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제대고 손 좀 봐줘.”이주혁이 옆에 있던 수하에게 손짓했다.공포에 질려 백윤택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미처 한 마디 내뱉기도 전에 기절하고 말았다.송영식은 깜짝 놀랐다. 아무리 그래도 백지안의 오빠인데 한 대 후려치는 정도로 끝낼 생각이었던 것이다. “주, 주혁아. 하준이 구치소 사건은… 백윤택이 벌인 짓도 아니잖아….”“백윤택이 했다고 안 그랬는데.”이주혁이 소매를 털며 느긋하게 답했다.“경고 같은 거야. 하준이네와 FTT가 조금 위기에 처하진 했지만 감히 내 친구를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줘야지.”“하지만… 그렇다고 꼭 이렇게 피를 볼 필요가….”송영식이 혀를 내둘렀다.“그래도… 지안이 오빠잖아….”“지안이 오빠라….”이주혁이 한 마디 뱉었다.“저 자식이 지안이 오빠만 아니었으면 늙어 죽을 때까지 감옥에서 썩어야 했을걸. 요 몇 년 동안 저 자식이 저지른 짓을 생각해 봐. 대학생 자살했지, 여자 직원만 보면 건드렸지, 임윤서가 자기 마음대로 안 된다고 건달 끌고 가서 폭행했지, 흥분제 먹였지, 그런데도 우리 백만 믿고 이제는 남을 시켜서 사람까지 패고 말이야. 저 자식은, 인간 되기는 글렀어. 이렇게라도 해 놔야 더는 다른 사람 해치러 다니지 않는다니까.”송영식은 할 말이 없었다.가만히 생각해 보니 백윤택이 저지른 천인공
“추신은 이미 랜들을 잡았으면서도 만족을 모르는군.”하준이 싸늘하게 입을 열었다.“한도 끝도 몰라.”“국내 선두 기업이 되었으므로 이제는 글로벌 시장으로 진출하려는 모양입니다.”상혁이 덧붙였다.하준은 갑자기 입을 다물고 마땅찮은 눈으로 상혁을 바라보았다.“제, 제가 뭐 잘못 말씀드렸나요?”하준의 시선에 상혁이 불안한 듯 말했다.“자네는 내 곁에서 가장 밀접하게 붙어 있었던 친구 아닌가? 내가 어딜 가든 따라다녔지. 그러니 누구보다도 날 잘 알지.”하준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숨 막힐 듯 싸늘한 한기가 뿜어져 나왔다.“3년 전에 내가 갑자기 변한 걸 몰랐어?”순간 상혁의 동공이 흔들렸다.하준은 그 미세한 떨림을 놓치지 않고 담아주었다.“무…무슨 변화 말씀입니까? 내내 이러셨잖아요?”상혁은 곧 침착하게 대답했다.“김 실장, 내가 자네를 믿어도 되겠어?”하준이 일어섰다.“우리가 고용관계로 얽힌 사이라고 하지만 요즘 우리 회사에서는 중역들도 하나둘씩 사표를 던지고 나갔지. 비서실에서도 그만둔 직원들이 있잖나? 그런데 자네는 그만둘 생각을 안 해봤어?”상혁은 흠칫 놀라더니 고개를 저었다.“저는 열네 살에 처음 회장님을 만났습니다. 아시다시피 그때 저는 어머니께서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재혼을 한 뒤로는 절 돌보지 않으셨죠. 학비도 안 대주고 매일 맞기만 했습니다. 앞날이 캄캄하던 절 회장님이 나타나서 구해주셨습니다.학비도 대주시고 책값도 대 주셨어요. 이후로 저는 생 회장님을 따르기로 결심했습니다. 게다가 졸업하고 나서 경영 쪽에 그렇게 재능이 있지도 않았던 저를 일일이 가르쳐주면서 일을 시키셨습니다. 그 은혜는 평생 잊지 못합니다. 평생 회장님과 함께할 겁니다.”“평생을 함께한다고?”하준이 자조적으로 웃었다.“내가 이렇게 망해가고 있는데도 말인가?”“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회장님을 몰라도 저는 회장님이 얼마나 능력 있는 분인지 잘 압니다.”상혁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앞으로 FTT의 회장님이 아니시더라도 변호사가 되셔도 좋고
“하지만 회장님 마음속에는 강 대표님과 아이들이 있었죠. 그런데 어느 날 백지안 님에게 치료를 받고 나서 갑자기 강 대표님에게 너무나 싸늘해지셨습니다. 아이를 가진 강 대표님에게 이혼을 요구하셨어요. 그러면서 백지안 님하고만 지내셨죠. 그리고… 밤에도 백지안 님 집에서 주무셨잖아요.”주먹을 꽉 쥔 하준의 손등에 푸른 힘줄이 드러났다.‘그래. 그때 내가 여름이에게 엄청나게 잔인했었지. 여름이가 임신을 했는데도 늘 지안이랑 커플처럼 다녔어.’상혁이 한숨을 쉬었다. “이주혁 선생님과 송 대표님은 실제 회장님이 강 대표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모르고 백지안님에게 아직 감정이 남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백지안님이 돌아왔으니 백지안님을 더 좋아한다고 생각하셨겠죠. 하지만 제가 아는 회장님은 백지안님을 신경 쓰긴 하셨지만 강 대표님을 사랑했습니다. 아마도 백지안님과 재결합하더라도 강 대표님을 절벽으로 모는 것이 아니라 물러날 자리는 만들어 주셨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그렇지.”‘그런데 나는 왜 여름이를 가둬두고 그랬을까?’하준은 돌아섰다. 남에게 붉어진 눈시울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그다음에는…? 진상을 알고도 여름이는 왜 나에게 일언반구 없었을까?”“믿으셨겠습니까?”상혁이 반문했다. “당시 회장님은 백지안님에 대한 믿음이 절대적이었습니다. 말씀드렸다면 강 대표님을 나쁘게 생각하셨겠죠.”하준은 입을 다물었다.‘그래. 그때는 말해도 안 믿었을 거야.’상혁이 말을 이었다.“저희는 이 분야의 최고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 회장님의 상태에 대해 상담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선생님께서는 회장님이 고대 최면술에 걸린 것 같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 최면술은 치료할 수 있는 가능성이 희박하고 실패했다가는 영구적인 뇌 손상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셨습니다.그 말을 들은 강 대표님은 크게 낙담하셨습니다. 그리고 회장님께는 말씀드리지 말고 그대로 두라고 하셨어요. 그냥 이 관계에서 이혼을 하고 뒤로 물러나서 백지안님과 회장님이 함께할 수 있게 하자고
“나무라다니? 상황을 말 해줬더라도 아마 자네가 강여름에게 매수당했다고 생각했겠지. 자네의 선택이 옳았어.”하준이 중얼거렸다.“백지안이 그렇게 무서운 사람인지 몰랐어. 난 완전 백지안의 손에서 놀아났었군. 그간 백지안에게 순종하는 척 따르는 일도 자네에겐 쉽지 않은 일이었겠어.”“그 정도야, 뭐….”상혁이 고개를 숙였다. 잠시 생각해봤지만 역시 여울이 일은 하준에게 말하지 않기로 결심했다.이제 하준이 진실을 알았다고는 하지만 그간의 상처는 보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두 사람이 재결합을 한다고 해도 여름이 직접 해야 할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어쨌거나 그간 고생한 것은 여름이니 그 아이들이 하준의 자식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싶다면 여름이 직접 말하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차 대기 시켜. 해변 별장에 다녀와야겠어. 이제 내가 백지안에게 주었던 것을 모두 되찾아 올 때가 되었어.”하준이 차가운 얼굴로 상혁에게 말했다.“네.”상혁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하준이 백지안에게 그 거금을 위자료로 주었을 때 사실 부적절하다고 생각했지만 차마 말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하준이 자조적으로 웃었다.“난 정말 얼마나 바보였던 거야? 백지안이 날 완전히 가지고 놀면서 내 결혼 생활을 망치고 내 아이를 잃게 만들었는데 헤어지면서 그 많은 재산을 아무 생각 없이 넘겼다니. 이제 다시 빚을 돌려받을 때가 되었어.“하지만 그 사실이 알려지면 사람들이 회장님을 비난할 텐데요. 그리고 송 대표님은….”상혁이 팩트를 짚었다.“백지안 님은 위자료를 돌려주려고 하지 않을 겁니다. 평소에는 돈을 돌보듯 하는 척하지만 실은 누구보다도 배금주의자입니다. 회장님과 친구분들이 자신의 허영심을 눈치챌까 봐 늘 조심했을 뿐입니다.”“영식이는 예전의 나와 비슷한 상태야. 당장 정신 차리지 않으면 후회할 텐데.”하준이 냉소를 지었다.“어쨌든 난 이제 평판 따위는 신경 안 써. 지금 나에게 지킬 평판 따위가 남아있기나 한가?”******1시간 뒤, 상혁이 모는 차가 해변
하준은 주변을 휘 둘려보았다. 방금 들어올 때 상혁에게 이곳에서 하준과 여름이 함께 지냈으며 하준이 아팠을 때 여름이 성심껏 하준을 돌보았던 곳이라고 말해주었다.“내 집이지.”백지안이 이상하다는 듯 답했다.“뻐꾸기가 남의 새끼를 밀어 죽이고 둥치를 차지하는 것처럼 이제는 네가 차지했다는 말이군.”하준이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눈이 어둠이 내린 밤하늘처럼 어두웠다.“여긴 나와 여름이가 살았던 곳이야. 그러니까 네가 여기 들어온 건 남의 집을 빼앗은 셈이지. 넌 그런 데서 성취감을 느꼈나 보군.”백지안은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두려워하던 그 순간이 왔어. 하준이가 알아챈 거야.대체 어떻게 알았지?’“쭌, 대체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네?”백지안은 최대한 냉정한 척하며 말했다.“우린 이미 헤어진 사이인데 그런 소리를 해서 날 모욕하는 이유가 뭐야?”“아주 그럴싸한 척도 잘 하네. 그러니 나랑 주혁이랑 영식이가 모두 네 손 안에서 놀아났겠지만 말이야.”하준이 픽 웃으며 마치 처음 본다는 듯 백지안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네가 날 사랑한 적은 있니? 날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실상은 내 돈과 지위를 사랑한 거잖아?”“우린 이미 끝났어. 난 너무 상처를 많이 받아서 이제는 앞만 보고…”백지안은 말을 끝맺기도 전에 하준에게 팔을 잡혔다.하준은 백지안을 와락 눈앞으로 잡아당겼다.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백지안은 이미 백만 번은 죽었을 것이다.“그때 난 널 믿었는데 넌 병을 치료한다면서 나에게 최면을 걸었잖아?그것도 실패하면 내 뇌를 다 날려버릴 그런 악랄한 최면술을 말이야. 네가 바라는 것을 얻기 위해서 그런 위험을 안고서 나에게 최면을 걸었어. 네가 가지지 못하면 아무도 가지지 못하겠다는 마음가짐이었겠지.”“최면술이라니 무슨 소리야?”백지안이 소리쳤다.“내가 널 치료해 주지 않았으면 넌 아직도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었을 거야.”“차라리 입원하는 게 낫지. 최소한 내 아내와 아이를 잃지 않았을 거야.”하준의 눈은 분노에
“잠깐.”하준이 다시 입을 열었다.“아니야. 난 갈게. 어쨌든 넌 이제 예전의 하준이가 아니잖아. 예전 친구 따위가 뭐 그렇게 중요하겠어.”송영식은 한숨을 쉬었다.“잡지 마라.”“너 잡는 거 아니거든.”하준은 어이가 없어 하며 송영식을 쳐다보았다. ‘나에게 저런 신경질적인 친구가 있었다고?’송영식은 잠시 매우 민망해졌다.“…나 간다?”“앉아 봐.”하준이 옆이 의자를 가리켰다.송영식은 그제야 휘적휘적 가서 앉았다. 저도 모르게 시선이 하준의 노트북으로 향했다.“FTT 자료 보고 있었네?”하준은 그에 답하지 않고 미간을 찡그리고 있더니 물었다.“나랑 강여름은 어떤 사이였어?”“어떨 것 같냐?”송영식이 고소해하며 눈썹을 치켜올렸다.“맞추면 여기 앉아서 얘기해 줄 거야?”하준이 냉랭하게 물었다.“말 하기 싫으면 말고. 물어볼 사람이 너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내가 졌다.”송영식은 김이 빠졌다.“네가 느끼기에는 어떨 것 같은데?”하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전에는 노트북도 핸드폰도 만질 줄 몰랐지만 오늘 아침에 핸드폰으로 몰래 뒤져보았다. 성인 남녀 사이에 키스를 한다는 것은 둘이 굉장히 친밀한 사이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자신과 여름이 나눈 것은 프렌치 키스라는 것까지 알아냈다.그런 것을 알아내고 나자 하준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뜨거워졌다.“뭐 응큼한 생각하고 있구나?”송영식이 큭큭 웃었다.하준이 송영식을 싸늘하게 흘겨 보았다.“내 여자인구인가? 하지만 결혼했다던데? 아이도 있고. 난… 강여름의 정부인가?”“… 컥컥. 대단하네. ‘정부’ 뭐 그런 단어까지 알아냈어?”송영식이 엄지를 치켜 세웠다.“하지만 그 단어가 딱 적당한 것 같다.”그 말이 맞다는 뜻이었다.하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정말 내가 그렇게 내놓기도 부끄러운 정부야?’“그렇다고 화내지는 말고. 이 지경이 된 것도 다 네 인과응보라고.”송영식이 말을 이었다.“여울이하고 하늘이 아빠가 누군지는 아냐?”“내가 어떻게 알아?”하준은 짜증이 났다.
“요즘 쭌은 자신을 더 이상 두 살짜리 아기로 생각하지 않아. 쭌의 실제 나이는 나보다도 많다고 얘기해 줬거든. 요즘은 선생님들 모셔서 가르치는데 정말 빨리 배워. 앞으로 한 달 정도면 전에 배웠던 지식 수준은 따라잡을 것 같아.”“하지만… 그러면 뭐해? 너희들 사이에 있었던 애정 같은 건 다 잊었을 텐데.”윤서가 망설이면서 말했다.“널 잊어 버린 사람이 다시 널 사랑하게 만드는 게벌써 몇 번 째냐?”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다시 슬픈 기분이 되었다.‘그러네. 대체 이게 몇 번 째냐고….처음에 동성에서 만났을 때, 내가 죽을 힘을 다해서 최하준을 따라다닌 바람에 결국 최하준의 관심을 받는 데 성공했지.외국에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온갖 수단을 써서 백지안 옆에 있던 최하준이 날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성공했었고.그래, 매번 성공했어. 그래서 피곤했냐 하면, 그래. 정말 피곤했지.두 사람이 서로를 향하는 사랑은 나와는 거리가 멀었어.’“나도 모르겠어.”여름이 망연자실해서 말을 이었다.“전에는 기억에 착란을 일으켰던 거고 이번에는 완전히 어린애나 다름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애정 부분도 완전히 백지가 되어 버렸어. 사실 날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인생은 길잖아.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어. 다음에 또 이러지 않을까? 그 다음은? 내가 매번 이렇게 주동적으로 나서고 인내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나라고 무쇠로 만들어진 사람도 아니고, 나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네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뭐라고 한 적이 없지만, 너 이러는 거 보니까 나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난… 최하준은 자기 자신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인 것 같아. 혹시나 이번에 다시 고백 받거든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마.”윤서가 말을 이었다.“본인이야 그러고 싹 다 까먹어도 별 문제 없겠지. 하지만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날 그렇게 몇 번이고 잊어버린다면 그게 뭐 누구의 계략에 빠진 거든 뭐든 막 때려주고 싶을 것 같다. 아내랑 애가 있는
하마터면 윤서의 입술이 송영식의 코에 닿을 뻔했다. 순식간에 호흡이 엉키고 얼굴은 빨개졌다.“왜 이렇게 들이대?”“어떻게 사람이 말 한마디를 곱게 안 하냐?”송영식은 속상했다. 그런데 발그레해진 윤서의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이상하게 간질거렸다.요즘 윤서의 배가 점점 크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도 동그라니 뺨이 포동포동했다. 워낙 잘 먹여 놔서 피부도 촉촉해서 저도 모르게 한번 꼬집어 주고 싶었다.“좋은 말은 할 줄 알지만 당신한테는 안 쓸 거야.”윤서가 코웃음을 쳤다.“여름이가 장보러 간다니까 우린 좀 천천히 가자.”“마침 잘 됐네. 나도 올라가서 뭣 좀 해야 하거든.”송영식이 묘하게 웃더니 신이 나서 뛰어 올라갔다.송영식의 뒷모습을 보며 윤서는 어리둥절했다.*****1시간 뒤, 송영식이 차를 몰고 하준의 집으로 향했다.송영식의 집에서 하준은 집까지는 멀지 않아서 30분이면 닿았다.윤서는 하준의 집에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어마어마한 집을 보니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여기 너무 큰 거 아니야? 너희 집에 대니까 우리 집 너무 초라하다.”송영식이 반박했다.“그집이 어디가 초라해?”“그러게. 그런 좋은 집을 두고.”여름이 웃으며 답했다.“같이 한 바퀴 돌까? 그러면서 과일도 좀 따고.”“그래.”윤서가 송영식을 돌아보았다.“따라오지 말고 하준 씨한테나 가 봐요.”“누가 따라간대? 자기가 무슨 인기 연예인인 줄 아나?”송영식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흥, 앞으로는 절대로 나 따라다니지 말라고!”윤서가 싸늘하게 웃었다.송영식의 얼굴이 굳어졌다.“누가 따라다니고 싶어서 따라다니는 줄 아나? 워낙 덤벙대니가 아기 다칠까 봐 그러는 거지.”“고오맙네요. 백지안 때문에 밀치지 않아서. 내 아기는 누구보다 건강할 예정이거든요.”윤서가 비꼬았다.“대체 언제적 얘기를 아직까지…. 됐다. 내가 당신이랑 무슨 말을 하냐? 하준이한테나 가 봐야지.”송영식이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여름은 어이가 없었다.“너희 둘… 안
여름은 할 말을 잃었다. ‘아까부터 그거 때문에 의기소침한 거였어?’“그래. 완전히 탄복했지.”여름이 끄덕였다. 감탄한 것을 굳이 숨기고 싶지는 않았다.차진욱은 흑과 백을 넘나드는 사람이었지만, 여울이를 구해주고 나서부터는 내심 존경하는 마음이 커졌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차진욱은 남편으로서 아껴주었다. 그러나 무조건적으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다 하도록 방임하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차진욱이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발휘하여 처음부터 하준을 상대했다면 여름과 하준은 진작에 끝장이 났을 것이다.돈이 넘치는 사람은 쓸데없는 못된 버릇도 있기 마련인데 차진욱에게는 그런 결점도 딱히 없었다.강신희에 대해서도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아플 때도 결코 곁을 떠나지 않았다.여름은 강신희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런 사랑과 혼인 관계는 너무나 부러웠다.자신은 결혼 생활도 실패한 것 같았다. 하준은 차진욱처럼 아량이 넓고 포용력이 있지는 않았다. 오히려 백지안 같은 불여우에게 속아서 이용당하는 지경이었다.재결합한 뒤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둘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전에….여름은 슬픈 마음으로 하준을 돌아 보았다. 그런데 하준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우울한 모습이었다.“걱정하지 마.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거야. 여름이가 감탄할 수 있는 그런 사람.”하준이 진지하게 주먹을 쥐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FTT를 되찾아 올 거야.”여름이 빙긋 웃었다.“난 차 회장님의 패기 넘치는 스타일에 감탄한 게 아니야. 쭌은 아직 잘 모르네.”“그럼 뭔데. 말해 봐봐. 나도 배우게.”하준이 다급히 물었다.“배워서 뭐 하게?”여름이 하준을 흘겨 보았다.“혼인 관계에 대한 지조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포용력에 감탄한 거야. 그런 걸 쭌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건데?”하준은 흠칫했다.혼인이니, 사랑하는 사람이니, 다 하준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하준은 마음이 괴로웠다. 어제 이전에는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 사실 하준은 핸드폰에서 여름과 자신의 셀카
“이게…”“그리고, 월급 받는 전문 경영인 주제에 이사회의 결정을 듣지 않고 우리에게 반항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신이 회사를 침탈하려는 게 아닌가 의심할 수 밖에 없죠. 회사 중역은 죄다 당신이 심어놓은 사람이고 아무나 와서 기고 만장하단 말이야.”한마디 한마디 뼈가 시렸다. 맹원규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렸다. 하준은 그렇게 싸늘한 여름의 얼굴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너무 매력이 넘쳤다.맹원규가 싸늘하게 웃었다.“강여름 씨는 내 모가지를 쳐내고 내가 고용한 임원까지 싹 솎아내고 싶으신가 보군.”“그러면, 당신은 그만 두고 나갈 건가요?”여름이 비꼬았다.“당신 같은 사람은 철면피처럼 여기 어떻게든 붙어있을 걸.”맹원규는 화가 나서 주먹을 꽉 쥐었다.“절대로 안 비킬 줄 알았지.”여름이 말을 이었다.“하지만 내일부터는 최하준 씨가 회사에 와서 회장직을 수행할 겁니다. 당신은 직위 해제예요. 이사회의 절대적인 행사권 앞에서 당신은 일개 직원일 뿐이에요. 싫다고 말할 권리는 없습니다.”그렇게 말하더니 여름은 하준을 데리고 나갔다.막 문을 나서는데 안에서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여름이 하준에게 눈짓을 했다.하준은 바로 알아듣고 주먹을 쥐고 돌아섰다.두 사람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맹원규와 깨진 컵이 보였다.“어, 아주 잘나셨어?”하준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일개 직원이 이사 앞에서 컵을 깨고 눈을 부릅뜨다니?”“아닙니다. 제가 실수로 컵을 떨어트렸습니다.”맹원규가 뱉었다.“왜요? 내 안면 근육이 멋대로 수축하는 것도 안 됩니까?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데.”“직원이 오너보다 기고만장한 꼴을 다 보고. 당장 나가시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하준은 냉엄하게 내뱉고는 여름을 데리고 나갔다.가면서 맹원규의 그 얼굴을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내일 맹원규가 꺼질까?”여름이 웃었다.“그렇게 쉽게 나가겠어?”“그런가…?”하준의 어깨가 쳐졌다.“안 나갈 거야. 배후에 양유진이 있을 테니까. 양유진이 놈에게
차진욱의 변호사가 나섰다.“미안하지만 강여경이 FTT를 구매하는데 사용한 자금은 모두 강신희 여사님의 계좌에서 나온 돈입니다. 계속해서 당신이 FTT 주식을 상속하겠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법원에 주식의 동결을 신청할 수 밖에 없습니다.”“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어!”강태환이 다급히 외쳤다.“돈은 내 동생이 준 거라고. 신희를 불러와.”“강신희는 지금 병으로 입원 중이고, 나는 배우자로서 부부 공동의 자산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지.”차진욱이 몸을 앞으로 쑥 내밀었다.“그리고 난 당신들 셋이 사기범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아. 마침 강여경의 시신이 아직 냉동 보관 중이지? 그러면 이참에 DNA를 검출해서 친자확인을 해보자고. 난 재산도 되찾고 당신들을 사기로 고소도 해야겠어.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기쳤지. 아주 전세계 최고 사기액일 거야.”“헛소리! 우리는 사기 같은 거 치지 않았어!”강태환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사실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호흡이 가빠진 척하며 휠체어에 쓰러졌다.이사회를 개최했던 맹원규는 후다닥 일어나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구급차 오고 있나? 회의실에 또 한 명이 기절했어. 같이 실어 보내지. 어서. 사람 죽게 생겼다고….”전화를 끊고 나가 회의실은 쥐 죽은 듯 고요해 졌다.맹원규가 차진욱을 보고 웃었다.“주식에 이렇게 큰 문제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이번 회의는 취소하고 다음에 다시 논의하시죠. 아니면 두 분이 개인적으로 분쟁을 해결하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 나누십시다.”차진욱의 날카로운 시선이 맹원규를 훑었다.“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당신을 불렀지? 그 돈도 내 아내의 자금이야.”맹원규의 얼굴이 굳어졌다.사실 강여경이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고 맹원규를 초빙한 것은 사실이었다.“내 아내의 자금을 날려가며 불러온 게 겨우 이따위 쓰레기라니?”차진욱은 경멸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었다.“제가 뭘 잘못한 거라도 있는지요?”맹원규가 깊
기다리지.”차진욱은 셔츠를 정리하고 다시 앉았다.강태환은 바들바들 떨었다. 기절했으면 싶었다. 이제 양유진이 실려나갔으니 혼자서 어떻게 차진욱을 감당하겠는가?차진욱이 손이라도 댄다면 자신도 양유진 꼴이 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피범벅이 된 양유진을 생각하니 두려워졌다.‘기절한 척할까? 그러면 맹원규가 회의를 취소하겠지?’그런 생각을 하는데 여름이 갑자기 다정하게 다가왔다.“왜 그러세요? 놀라서 기절할 것 같은 건 아니겠죠?”“……”“기절하시면 안 돼요.”여름이 다정하게 말했다.“아빠가 기절하면 강여경의 주식을 어떻게 상속받아요?”강태환은 환장할 지경이었다. “강여경의 주식?”차진욱이 결혼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큭큭 웃었다.“그게 당신 차지가 되겠나? 범죄자 따위가 말이야.”차진욱의 말에 회의실은 묘한 정적에 빠져들었다.강태환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간신히 입을 열었다.“난 강여경의 아버지요. 여경이가 죽었는데 자식이 없으니 우리나라 법에 따라 부모가 재산을 상속받는 거지.”“강여경의 부모인 건 확실하고?”차진욱이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얼마 전 동성에 갔을 때 분명 강여경의 부모는 따로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강여경의 친엄마는 내 아내 강신희라고 말이야.”강태환이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그런가요? 내가 그런 소릴 했나? 어쨌든 법적으로는 걔가 내 딸이거든.”“그래?”차진욱이 옆에 있던 변호사에게 손짓했다.변호사가 바로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건넸다.차진욱이 서류를 강태환에게 들이 밀었다.“그러면 잘 보시지. 소위 당신의 딸이 일전에 내 아내의 재산을 어마어마하게 썼거든. 당신네 나라 법에 따라 강여경이 쓴 돈은 우리 부부의 공동 재산이라서 내게도 그 돈을 추심할 권리가 있어. 강여경이 죽었으니 그러면 그 돈은 법적인 아버지에게서 돌려받아야겠군”“무, 무슨 근거로?”서류의 숫자를 본 강태환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평생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거 참 우습구먼. 당신 딸이 죽어서 딸이 남긴 주식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와 아무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차진욱이 눈동자를 보자 양유진은 저도 모르게 몸이 덜덜 떨렸다.양유진은 자신이 차진욱을 완전히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다. 차진욱은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것도 강신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었다. 그러니 분명 매우 애지중지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양유진은 차진욱이 잔인함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양유진은 너무 아파서 입술에 핏기가 완전히 가셨다. 이마에서는 땀이 송글송글 솟아났다. 고통에 가득 찬 눈에 독기가 서렸다.“계속해 보시지. 그 대가로 아들 시체를 받게 될 거야. 난 놈을 아무도 없는 곳에 숨겨뒀어. 누구도 찾을 수 없게.”“그러시겠지.”차진욱은 큭큭 웃으며 양유진을 놓아주었다. 위협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난 이래서 가식적인 인간이랑 말을 섞기가 싫다고. 인질을 잡았으면 잡은 거지 왜 나랑 쇼를 하겠다는 건지?”양유진은 당황해서 비척비척 뒤로 물러났다. 부러진 손을 잡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차진욱! 당장 내게 사과해! 사과하지 않으면 아들놈을 죽여 버리겠어. 네놈은 이제 대가 끊기게 될 거다.”몸을 빼자마자 다시 차진욱을 협박하다니 너무나 양유진다웠다.맥퀸이 분노했다.“도련님을 다치게 했다가는 네 집안이 쑥대밭이 될 줄 알아!”“우리 집안이 차민욱 만큼 가치가 있지는 않지.”양유진은 화가 난 맥퀸을 보더니 다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차진욱, 스스로 손가락을 자르면 내가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말을 마치기도 전에 차진욱은 양유진을 걷어차 날려버렸다.양유진은 바닥에 엎어졌다. 목구멍에서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차진욱이 다가가 양유진의 얼굴을 밟았다.“그래도 체면을 좀 차리게 해주려고 했더니 끝간 데를 모르고 까부는군. 내가 뭐라고 했는지 잊어버렸나? 내 아들이 팔 다리 잃는 것쯤은 신경 안 쓴다고 했지? 살아만 있으면 된다. 잘 들어. 민우의 목숨은 네가 살수 있는 조건이다. 멋대로 날 협박할 생각은 버려. 난 협박을 아주 싫어하는 사람이야.”양유진은 전혀
“난 사람으로서 못할 짓을 한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전세계의 낙후된 국가에 의료 환경을 제공하고자 애썼습니다. 하루하루 병에 침식되어 목숨을 잃는 사람들의 고통을 아십니까?”여름은 구역질이 올라왔다.양유진의 연기는 그야말로 아카데미 주연상 수상감이었다.자기 친조카도 살해할 정도로 잔인한 인간이 병으로 고통받는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니….“윽!”옆에서 듣던 하준이 먼저 반응했다.“구역질이 나는군. 당신네 약은 선진국에 팔자면 무시 당할 수준이니 제3세계 국가에 가서 돈을 버는 수밖에 없지. 가난한 나라지만 의약품은 필수니까. 당신은 죽음에 직면한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거야. 말로는 성인군자인 것처럼 굴지만 사람들이 다 바보인줄 아나?”차진욱은 하준의 말에 웃음이 터졌다.“그래. 내가 살면서 별별 사람을 다 만나 봤지만 너처럼 구역질 나는 인간은 참 드물지.”자존심이 센 양유진은 그런 모욕을 당하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차진욱이 천천히 일어서 양유진에게 다가갔다.강태환은 양유진과 같이 있다가 차진욱의 거대한 몸이 다가오자 극도로 두려움을 느꼈다.그러나 휠체어에 앉아 있어 마음대로 물러날 수도 없었다. 그저 손잡이만 꼭 잡을 뿐이었다.“왜 이러시죠? 여기는 FTT그룹이고, 우리나라입니다.”양유진이 낮은 소리로 경고했다.“내가 모른다더니? 이제는 내가 이 나라 사람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나 보군, 그래?”차진욱은 느릿하게 소매 단추를 풀었다. 소매를 걷으니 그을린 팔뚝이 드러났다. 탄탄한 주먹만 봐도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누구 없나?”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이자 맹원규가 냅다 사람을 불렀다.그러나 맥퀸이 맹원규의 팔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머리를 테이블에 짓눌렀다.동시에 차진욱의 주먹이 양유진의 안면을 강타했다.180cm가 넘는 양유진의 몸이 그대로 벽까지 날아갔다. 입에서는 선혈이 흐르고 이빨도 몇 개가 부러졌다. 너무 아파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강태환은 완전히 넋이 나갔다.“머…멈춰요. 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