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은영은 어느 한 호텔 방 안에서 눈을 떴다. 욕실에서는 물줄기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고 진은영은 반투명한 유리를 통해 샤워하고 있는 유이준의 실루엣을 엿보기 시작했다. 근육질의 탄탄한 몸매를 가진 한 마리의 맹수와도 같은 유이준의 실루엣을 보는 것만으로 진은영은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진은영은 문득 어젯밤 뜨거웠던 시간이 떠오르기 시작해 얼굴이 화끈거렸다. ‘너무 미쳤었어.’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일들을 어제 유이준은 하나씩 다 시도를 했고 진은영은 그가 하자는 대로 다 맞춰줬다. ... 물줄기 소리가 뚝 멈췄고 유이준은 욕실 가운만 걸친 채로 당당하게 밖으로 걸어 나왔다. 검은 머리카락에는 물이 묻어있어 반짝이고 있었고 갓 샤워를 마친 유이준이기에 더욱 섹시해 보였다. 그는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툭툭 털며 침대맡으로 다가와 진은영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물었다. “왜 좀 더 안 자고 깼어요?” 진은영은 그의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유이준의 팔을 베고 누워버리더니 그를 꽉 끌어안았다. 이렇게 연약한 여자의 모습은 잘 보이지 않던 진은영이기에 유이준은 그녀를 볼 때마다 심장이 너무 뛰었다. 넘쳐나는 정력으로 진은영을 만족해주는 이런 사이도 유이준은 아주 편하다고 생각했다. 한참 뒤, 진은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준 씨, 저희는 지금...” “애인이죠!” “저는 대표님 말에 따르겠습니다. 저를 얼마든지 탐하셔도 되고 몇 번이고 잠을 자도 괜찮습니다. 진 대표님께서 만족하실 때까지 잠자리를 갖겠습니다.” ... 유이준의 입에 발린 말들을 진은영은 믿지 않았지만 그래도 지금 이런 사이로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무런 부담도 없고 상대가 화를 내지는 않을까 마음을 졸일 필요도 없거니와 언제 끝날지 모르는 사이에 불안해할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다. 진은영은 아마 지금 두 사람에게 제일 합리적인 관계는 바로 애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산에 있는 호텔에서 집으로 돌아간 진은영은
유이안과 강원영은 서로를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 날씨가 선선해지는 초가을이 되자 진별이는 또 학교로 향했다. 입학식이 있는 날, 유이준과 진은영은 진별이를 유치원까지 데려다주었고 차에서 내린 진별이는 폴짝폴짝 뛰면서 유치원 안으로 들어섰다. 선생님들도 진별이를 무척이나 예뻐했기에 아이가 대문에 들어설 때, 진별이의 손을 꼭 잡고는 함께 유치원 안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은 진별이의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자 나란히 차에 다시 올라탔고 진은영은 안전벨트를 매며 자연스럽게 말을 꺼냈다. “회사까지 데려다줘요. 오전에 회의가 있어서 가봐야 해요.” 유이준은 운전대를 꽉 잡고는 어딘가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 너무 오랫동안 안 한 거 아닙니까? 진은영 씨는 저랑 하고 싶지 않나 봅니다.” 그의 말에 진은영은 옆에 있는 유이준을 쳐다보다 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신호를 보냈다. “근데 저 오늘 일이 있어서 많아 봐야 2시간밖에 없어요.” 진은영이 허락하자 유이준은 온몸이 확 달아올랐는지 고개를 돌려 그녀에게 마구 키스하며 말했다. “2시간이요? 고작 그거로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저 진짜 오래 참았단 말입니다.” 진은영은 유이준의 목을 천천히 감싸안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쩌죠? 저 진짜 일이 있어요.” 그녀는 유이준을 가만히 바라보다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을 이어갔다. “이번 일만 잘 끝내면 하루 정도는 시간 빼서 같이 있어 줄 게요. 이준 씨, 제가 거느리고 있는 사람만 수천 명이에요. 아시잖아요? 제가 일을 안 하면 그 사람들은 다 굶어 죽을 거라고요.” 유이준이 자신의 말에 기분이 상해 입을 삐죽거리고 있겠다고 생각한 진은영이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진은영의 예상과는 달리 유이준은 진지하고 엄숙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은영 씨가 보기에는 제가 욕정에 미쳐서 사랑하는 여자의 기분도 상관하지 않는 사람인 것 같습니까?” 원래 진은영은 맞다는 대답을 하고 싶었지만 유이준
진은영이 느끼기에 오늘따라 유이준은 과묵했고 평소보다 더욱 흥분해 있었다. 한 차례 치러진 “전쟁”에서 유이준은 진은영에게 자신을 “여보”라는 호칭으로 부르라고 강박했다. 유이준은 원하는 것을 꼭 이뤄내고야 마는 고집 있는 남자였기에 진은영같이 자존심이 센 여자도 손쉽게 다뤘다. 관계를 끝낸 진은영은 침대에 가만히 누워 유이준의 체온을 느꼈다. 보름이라는 시간 동안 욕망을 꾹 참은 유이준이 오늘 날을 잡았으니 적어도 몇 번은 연속해서 할 줄 알았지만 딱 한 번의 관계를 끝으로 다른 요구는 하지 않았다. 진은영은 당연하게도 한 번의 관계로도 이미 기진맥진해졌고 샤워를 마친 유이준은 테라스에서 담배 한 대를 피우고는 진은영에게 옷을 입혀주려고 했다. “저 혼자 입을 수 있어요.” 진은영은 빨개진 얼굴로 유이준에게 말했다. 오늘따라 평소답지 않은 유이준을 본 진은영은 만약 남자로 생리를 한다면 유이준는 요즘이 생리 기간이겠다고 생각했다. “혹시 말이에요. 남자도 가끔 여자처럼 생리를 하나요?” 진은영이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유이준을 놀리자 그가 대답했다. “그럼 방금 전 그 행위들은 뭡니까? 부상 투혼? 아니면 피 터지는 전쟁?” 유이준의 대답에 진은영은 웃음이 터졌다. 그녀는 지금 속으로 만약 자기가 이렇게 바쁘지 않았다면 꼭 시간을 비워 유이준의 옆에 있어 주고 싶다고 생각했고 속상해 보이는 유이준이 너무 안쓰러웠다. 하지만 하나의 프로젝트에 문제가 생겨 두 번 이나 T시에 다녀왔지만 해결하지 못했다. 오늘 그쪽에서 담당자가 B시에 찾아오기로 약속한 상황이라 진은영은 기필코 끝을 내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지금 진은영은 유이준에 대한 사랑을 잠시 뒤로 미뤄야만 했다. 그렇지만 유이준이 이미 그런 진은영의 속내를 알아차렸다는 사실을 그녀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 늦은 밤, B시에 있는 제일 호화로운 비즈니스 클럽. 입구에는 고급 진 차 한 대가 멈춰 섰고 진은영이 천천히 내렸다. 불안한 마음에 그녀의 뒤를 따라오던 비서가
진은영은 유이준의 말에 더 멍해졌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된 진은영과는 달리 차 선생은 그녀에게 악수를 청하며 미소를 짓더니 입을 열었다. “진별이가 아빠를 조금 더 많이 닮은 모양입니다.” 차 선생의 조수가 다가와 아주 공손하게 자리에 앉으라고 안내해 줬지만 진은영과 함께 온 비서에게는 어딘가 모르게 어색한 분위기를 풍겼다. 진은영의 비서는 티 내지 않고 속으로 계속 감탄을 했고 기뻐했다. 오랜 시간 동안 차 선생이라는 분을 만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한 그녀이기에 꼭 잘 보여야만 했다. 상대는 좋은 “패”를 많이 소유하고 있었지만 유씨와 조씨 가문 같은 큰 부자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차 선생의 태도는 평소보다 더 공손하고 정중했다. 비록 유이준은 차 선생보다 훨씬 더 어리지만 늙은 여우와도 같은 그를 노련하게 대해 아무런 거리감과 어색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고작 몇 마디만으로 유이준은 진은영이 해결해야 했던 문제를 다 처리했고 기뻐하는 진은영의 비서와는 달리 진은영은 조금 우울해 보였다. 진은영은 유이준과의 사이가 또 예전처럼 변해 서로 도와주고 이익을 챙기다 전과 같은 불공평한 관계로 변할까 봐 두려웠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진은영은 이미 유이준이라는 사람을 잃기가 싫었고 그가 없는 삶은 상상도 하기 싫었다. 진은영은 누구보다 더 자신의 감정을 확신했고 이미 유이준을 많이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불안해했다. 그녀가 이런저런 생각으로 말도 못 하고 가만히 앉아 있을 때, 유이준은 아무도 몰래 상 밑으로 손을 뻗어 진은영의 손을 꼭 잡아줬다. 진은영은 자기 손을 살포시 잡은 유이준의 행동에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다. 그녀는 걱정과 근심을 내려놓고 유이준에게 모든 일을 넘겼고 그는 진은영의 기대에 맞물리게 차 선생과의 대화에서 완벽하게 원하는 것을 얻어냈다. ‘진짜 잘하네.’ 시간은 흐르고 흘러 밤 10시가 되자 차 선생은 정중하게 유이준에게 말했다. “정말 우연인지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유이준은 진은영의 귓가에 자신의 얼굴을 바짝 붙이며 애교를 부렸다. 진은영은 순간적으로 자기를 안고 있는 유이준을 진별이처럼 보호해 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고 그가 어린아이처럼 순수해 보였다. “은영 씨.” 유이준은 목소리가 심하게 잠긴 채로 입을 열었고 진은영에게 살짝 뽀뽀했지만 아직 술기운이 가시지 않아 머리가 어지러워 힘들었다. 처음으로 진은영의 이름을 이렇게 불러본 유이준이지만 이상하게도 원래 불렀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이미 오래전부터 이렇게 만나야 했던 두 사람이자 유이준은 진즉에 진은영의 남편이라는 신분으로 살아가야 했다. 유이준은 진은영을 홀로 남겨두어 스스로 곤란을 마주하게 해서는 안 됐고 행여나 감정이 변할까 봐 두려워하는 그녀를 무시한 채 아무런 도움도 안 주면 안 됐었다. 사업에 관한 일들에 대해 유이준은 지난 것은 지나간 대로 놔두는 스타일이었다. 오늘 밤 만약 진은영 혼자서 차 선생을 만났다면 술을 거하게 마셔야 했을 테고 그러다 보면 병원 신세를 피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유이준은 그 자리에서 진은영이 한마디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게 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 유이준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진은영에게 더 좋은 미래를 선사해 주고 싶었지만 그녀가 혹시나 싫어하고 거부할까 두려웠다. 그는 진은영을 꼭 끌어안고는 입으로 끊임없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고 팔다리가 다 저리기 시작해서야 낮은 소리로 말했다. “진은영 씨, 저랑 결혼합시다. 저는 당신의 합법적인 보호자이자 남편, 그리고 가족이 되고 싶습니다. 당신에게 위험이 들이닥치거나 힘든 일이 생겼을 때도 당당하게 나서서 도와주고 싶고 늘 옆에 있어 주고 싶습니다. 남편이라는 신분과 명분을 이용해 은영 씨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호되게 혼낼 자신도 있고요.” “진은영 씨, 이제부터는 제가 책임지고 챙겨드리겠습니다!” ... 유이준이 진은영에게 청혼을 하는 이유는 진별이나 고작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진
유이준은 반지가 끼워지는 순간부터 숨조차 편히 쉬지 못했고 진은영과 반지를 번갈아 보며 멍해 있었다. 차 안의 어두운 조명에도 반짝반짝 빛이 나는 백금 반지를 보며 두 사람은 속으로 서로에 대한 약속을 했다. 유이준은 한참 동안 움직임을 보이지 않더니 자신의 무명지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가만히 쳐다보다 천천히 불안하던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는 지금 진은영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신이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해 기뻤고 자신의 위치가 조진범이나 박준식보다 높아졌음에 만족했다. 하늘이 아무리 높고 땅이 아무리 넓다고 해도 진은영의 애인은 오직 자신뿐이자 다른 사람은 대체하지 못한다고 느꼈다. 순식간에 피가 끓어오른 유이준은 진은영의 손을 꼭 잡고는 어서 빨리 애정 표현을 많이 해달라고 재촉했고 사랑한다는 말을 끊임없이 반복하게 했다. 진은영은 어이가 없었지만 지금 덩치 큰 성인 남성이 자신을 위해 이렇게 떼를 쓰는 모습을 보니 내심 흐뭇하고 이 상황이 웃겼다. 그녀는 자리에 똑바로 앉더니 목걸이로 만들어 끼고 다니던 반지를 빼며 유이준에게 말했다. “아직 저한테 안 끼워주셨어요. 그럼 이 프러포즈는 절반만 하고 끝인 건가?” 유이준은 진은영의 말에 당황하더니 떼를 쓰던 것을 뚝 멈췄다. 그리고는 반지를 손에 들고 아주 세심하고 조심스럽게 진은영의 손에 끼워주며 뽀뽀했고 천천히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진은영 씨, 제가 많이 사랑했고 사랑하는 거 아시죠?” 유이준은 이미 오래전부터 진은영을 사랑하고 있었지만 늘 고백하지 못했었다. 그의 말속에 담긴 뜻을 알아차린 진은영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알고 있어요. 이준 씨.” 유이준은 조용히 진은영을 바라보며 무언의 재촉을 했고 그녀는 유이준의 볼에 뽀뽀를 하고는 함께 밤을 보내고 싶다고 말했다. 진은영의 말에 유이준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정말입니까?”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바로 유이준의 입술에 키스했고 평소 그가 하던 대로 열심히 따라 했지만 쉽지 않았다. “저번에 갔던
유이준과 진은영의 결혼식은 낙엽마저 무르익는 낭만적인 계절, 10월의 가을로 정해졌다. 추석 며칠 전, 유선우와 조은서는 직접 진씨네 저택으로 향해 약혼식을 치렀고 혼수로 10대나 되는 차를 선물했다. 하연은 손님맞이를 위해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진수성찬을 차렸는데 약간의 사심이 담겨있었다. 몸보신에 좋은 삼계탕을 끓인 하연은 특별히 사위가 될 유이준의 그릇에 큼지막한 닭 다리를 집어주었다. 조씨와 유씨 두 가문 다 유이준이 닭 다리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그의 눈치를 살폈지만 유이준은 환하게 웃으며 닭 다리를 맛있게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어머님, 삼계탕 정말 맛있게 하셨습니다. 완전 제 입맛에 딱 맞는데요?” 유이준은 아주 자연스럽게 하연을 “어머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렀고 그 자리에는 조진범과 진안영도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는가 싶더니 조진범은 자신의 그릇에 있던 또 다른 닭 다리를 유이준에게 집어주며 말했다. “형님도 이젠 몸보신 제대로 하셔야죠.” 유이준은 조진범을 살짝 째려보았지만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옛 사위가 좋다고 한들 새로 들어온 사위보다는 못하기에 하연은 어딘가 모르게 마음이 불편해졌다. 하지만 식사 자리의 분위기는 아주 화기애애했다. 조은서는 예전부터 사교성이 좋기로 유명했기에 하연은 그녀와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 만약 나중에 조은서가 몸을 담그고 있는 업계에 들어갈 기회가 생긴다면 딸아이를 위해서라도 열심히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 햇살이 눈부시게 비추는 오후, 진별이는 진아현의 손을 꼭 잡고 잔디밭을 뛰놀고 있었다. 아이들의 뒤에는 점박이 강아지 한 마리도 따르고 있었는데 그 강아지의 주인은 바로 옆집에 살던 장윤호였다. 강아지는 집을 아마 잘 못 들어왔는지 아이들이 있던 집 안으로 들어왔고 진아현은 예쁜 치마를 입은 채로 강아지에게 뭐라 말을 했다. 그러자 진별이는 강아지를 번쩍 안아 진아현에게 보여주었다. 진안영은 멀리서 자신의 딸과 조카를 번갈아 보다가
진은영은 유이준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선물 상자를 열자 안에는 초록색을 띠는 옥팔찌가 있었는데 족히는 10억이 넘는 귀한 액세서리였다. 팔찌와 함께 들어있는 한 장의 쪽지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있었다. [앞으로 행복하게 살길 바랍니다. -박준식.] 쪽지 내용을 확인한 진은영은 당황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진은영의 옆에 앉아 있던 유이준은 질투가 폭발한 듯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역시 이럴 줄 알았어요! 그 박준식 씨인가 뭔가 하는 사람이 주는 선물일 줄 알았다고요! 이제 어쩔 거예요? 말해 봐요.” 진은영은 선물을 보는 순간 조금 슬퍼지려 했지만 유이준이 옆에서 질투가 나 날뛰니 슬픈 감정이 서서히 사라져갔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유이준을 쳐다보며 물었다. “이준 씨는 어떻게 하고 싶으신데요?” 남자는 운전을 하고 있는 탓에 앞만 주시하고 있었지만 몇 가지 요구를 제시하기 시작했다. 그 요구들은 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뻔뻔하고 선을 넘는 것들이었다. 유이준은 살짝 옆으로 시선을 돌리며 진은영을 보더니 물었다. “어떠십니까?” 그는 자신의 말에 진은영이 무조건 불같이 화를 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필경 그녀는 아주 보수적인 사람이자 정직한 여자니까 말이다. 하지만 진은영은 오히려 아주 침착한 태도를 보이며 대답했다. “신혼 첫날 밤에는 가능해요.” 유이준은 그녀가 동의할 줄 몰랐기에 깜짝 놀랐고 앞으로 잘 달리는 차마저 한 번 삐끗했다. ‘결혼이라는 게 너무 좋은 거구나.’ ... 두 사람이 탄 차는 달리고 달려 유씨 저택에 도착했다. 그들은 저택에 있는 진별이를 데리고 새로 계약한 집에 갈 계획이었다. 700평이 넘는 커다란 별장에 6명의 도우미와 4명의 요리사, 그리고 2명의 정원관리사와 보안요안까지 고용했다. 그리고 유이준은 또 특별히 진별이를 위해 아이의 개인 가정교사도 고용했으니 그들의 월급만 합해도 수천이 넘는다. 진은영은 별장을 하나하나 둘러보고는
조은희는 진석을 빤히 바라보았다.진석은 낮게 웃으며 외투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블랙 카드를 한 장 꺼내 조은희의 손바닥 위에 가만히 올려놓았다.“내 카드야. 한도가 없으니까 마음껏 써.”조은희는 놀란 듯 작은 목소리로 외쳤다.“진석 씨, 정말 통 크시네요! 진 선생님, 감사합니다.”진석이 장난스럽게 그녀를 가볍게 툭 치자 조은희는 그의 목을 감싸안으며 웃었다.“스폰서 오빠, 감사합니다.”진석은 조은희의 장난스러운 말투에 웃음을 터뜨리더니 그녀의 작은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강렬하게 입을 맞추었다. 예전에는 학문적이고 온화했던 그의 이미지가 지금은 사업가다운 자신감으로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조은희의 장난스러운 태도에 그는 어쩔 수 없이 입맞춤 후 그녀의 귀에 낮고 거친 목소리로 농담을 던졌다. 조은희는 그 말을 듣고 묘하게 떨리는 감정을 느꼈다...진석은 그녀의 코끝을 장난스럽게 살짝 물었다.“넌 은근히 독특한 취향이네.”조은희는 더 이상 그를 자극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고 자세를 바로잡으며 운전하라고 했다. 진석은 그녀를 한 번 더 바라보고는 천천히 시선을 돌려 차를 출발시켰다...둘이 별장에 도착했을 때 진석의 어머니는 고향 요리로 한 상을 가득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에는 진석이 조은희가 좋아한다고 말해준 요리도 포함되어 있었다.진석의 아버지는 붉고 싱싱한 과일을 깨끗이 씻어 가지런히 접시에 놓고 있었다.진석의 차가 멈추자 그는 조은희를 데리고 내렸다. 진석의 부모는 반갑게 나와서 두 사람을 맞았다.아버지는 조은희가 가져온 선물을 받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는데요.”어머니는 차가운 바람을 느끼며 감기 조심하라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조은희의 피부는 밝고 투명하게 하얀 편이라 마치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진석의 부모 눈을 사로잡았다. 두 사람은 속으로 진석과 조은희가 아이를 낳는다면 남녀를 불문하고 정말 예쁘고 훌륭한 아이가 태어날 거로 생각했다.
진석은 조은희의 조심스러운 태도를 눈치챘다.진석은 미소를 지으며 조은희의 얼굴을 감싸안고 입을 맞췄다.“너와는 결혼 첫날까지 기다리겠다고 약속했었지! 게다가 방금 술을 마셨으니까 오늘은 아마 어려울 거야. 너에게 더 좋은 경험을 주기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해.”조은희는 얼굴이 빨갛게 변했고 진석의 품에 얼굴을 묻으며 중얼거렸다.“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참 묘했다!예전에는 그저 감정에서 비롯된 관계였고 항상 예의를 지키며 선을 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한 침대에 누워 서로의 몸이 밀착된 채로 있다는 것이 조금 부끄러웠다.조은희는 적어도 이런 경험이 처음이었다.진석은 조은희의 마음을 알아채고 그녀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며 부드럽게 속삭였다.“나도 처음이야! 결혼 첫날 밤을 준비하기 위해서 미리 배워둘게.”조은희는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사실 책을 보거나 동영상을 본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그녀는 더 이상 묻지 않고 그냥 진석의 품에 몸을 맡겼다.햇살이 창문 틈새로 스며들기 시작할 때쯤, 진석은 조용히 일어나 집을 떠났다. 조은희의 집이었기에 그 잠깐의 온기는 이미 지나쳐버린 상태였다...그들은 예전에는 갑자기 헤어졌지만, 지금 다시 함께하는 것이 너무 자연스럽게 느껴져 조은희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확실히 진석과 다시 함께하게 되었고 결혼에 대한 얘기도 나누고 있었다.그들은 연애를 건너뛰고 바로 결혼으로 나아가고 있었다.조은희는 조금 망설였다...조진범은 레드 와인을 손에 들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사실 일찍 결혼하는 것도 나쁘지 않네. 적어도 아이도 일찍 낳고 그 후엔 둘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을 테니.’진안영은 말했다.“아이를 낳으면 둘만의 시간은 더 이상 없지 않을까요?”조우현이 답했다.“다시 만난 연인들은 가장 먼저 혼인신고를 한다고요. 그게 아니면 후회할 거예요. 많은 시간을 허비할 테니까요. 사실 처음에 부소연과 결혼해야 했어요.”오빠들의 이야기를 듣고 조은희는 그 말
진석은 예의 있게 조은혁을 호칭했다.“아버님.”조은혁은 그를 난처하게 만들지 않았고 가볍게 기침하며 조은희를 보면서 말을 이었다.“먼저 올라가라. 네 엄마가 네가 돌아오기를 계속 기다리고 있었으니 아마 할 얘기가 있을 거다.”조은희는 처음엔 가만히 있었고 진석은 부드럽게 손을 내밀어 그녀를 밀면서 말했다.“먼저 올라가.”조은희는 그제야 움직였고 조은혁 옆에 다가갔다. 집에서 막내딸인 조은희는 가장 애교가 많았고 조은혁을 안고 인사한 후 아쉬운 듯 올라갔다.조은혁은 작은 딸을 안자 화난 기분이 어느 정도 풀리더니 진석을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앉아서 얘기해.”진석은 즉시 자리에 앉아 조은혁에게 차를 따랐고 조은혁은 일부러 그를 자극하는 듯한 말을 던졌다.“눈치가 빠르네.”진석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아버님 앞에서는 실수하지 않으려 합니다.”조은혁은 가볍게 코웃음을 치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그는 이제 두 사람이 다시 함께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며 여전히 아버지로서 딸의 미래를 걱정했다.“은희와 만나고 싶다면 지금은 조건은 없어. 하지만 요구 사항은 몇 가지 있네.”진석은 겸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조은혁은 진석의 태도를 만족스러워했지만, 하는 말은 전혀 봐주지 않았다.“첫째, 결혼을 하게 되면 은희는 너의 집에 가지 않고 결혼식과 생활은 모두 B시에 있어야 해. 둘째, 조씨 가문은 금전적으로 부족함이 없으니 결혼 때 충분한 축의금을 줘서 편하게 생활하게 할거야. 하지만 네가 결혼 후 벌어들인 모든 돈은 은희와 공동 재산으로 해야 하며 은희가 어떤 일을 하고 싶어도 간섭할 수 없어. 또한 아이를 가질지 안 가질지 은희의 선택을 존중해야 해.”이 조건들은 모두 합리적으로 보였지만 실제로 실행에 옮기기는 어려운 일이다.그렇지만 진석은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할 수 있습니다.”조은혁은 더 이상 그를 어렵게 할 수 없음을 깨닫고 진석을 보며 잠시 마음을 정리했다.사실 그도 같은 도시에서 사업을 하며 진석이 처음부터 얼마나 힘들었을
하지만 조은희는 그 답변에 만족하지 않았고 눈물이 맺힌 채 애처롭게 다시 물었다.“결혼했어요? 다른 사람이 있어요? 아직도 저를 좋아해요?”그녀가 물었을 때 처음보다 조금 더 고집스러워졌고 그 모습에 진석은 마음이 아팠다.진석은 그들이 헤어졌을 때 조은희가 세상 물정을 잘 모르는 소녀였다는 것을 기억했다.하지만 지금 조은희는 이렇게 직설적이고 노골적인 질문을 던지며 진석에게 묻고 있었다. 그녀가 점점 용감해질수록 그의 마음은 더 아팠다.진석은 더 이상 조은희를 놀리지 않았다.그는 조은희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진지하게 답했다.“결혼 안 했고 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없어. 약혼녀는 다리 치료를 마친 후 올 상반기에 결혼할 거야. 아직도 좋아해. 많이 좋아해.”...조은희의 눈가는 더욱 붉어졌다.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래도 그게 제가 진석 씨와 사귀겠다는 뜻은 아니에요. 아직도 화가 안 풀렸어요.”진석은 한 걸음 다가가 그녀 눈가의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5년이 지난 지금 조은희는 눈물이 많은 여린 여자가 되었다. 그는 예전 조은희가 항상 웃고 뒤에서 그를 끌어안으며 ‘진 선생님’이라고 달콤하게 불렀던 기억을 떠올렸다.그녀를 좋아하는 것 그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그때 그는 자신이 자격이 없다는 걸 알았지만, 여전히 그 감정을 시작했다. 그 후 조은희는 해외로 떠났고 진석은 B시에 남았다. 그 뒤 1년 동안 진석은 조은희가 아무 말 없이 떠난 것에 대해 그녀를 미워하기도 했었다. 자신을 먼저 유혹한 것도 조은희였기에 더 화가 났다.하지만 그가 나중에 생각하니 조은희는 겨우 20살이었다.진석은 조은희의 첫사랑이었고 그녀의 청춘 그 전부였다. 게다가 그녀는 진심으로 진석을 사랑했기에 그녀를 비난할 수 없었다.진석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울지 마. 알겠지? 우리의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 먼저 학교 관계자들과 저녁을 먹어야지. 도서관도 지어야 하잖아. 그곳도 우리가 갔던 곳이었지.”그는 조은희가 대답하기 전에
순간 조은희의 생각이 멈추고 머릿속이 새하얘졌다.조은희는 진석의 의도를 알 수 없었고 그가 굳이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이유도 이해할 수 없었다. 물어보고 싶었지만, 이미 진석은 그녀를 차에서 이끌어 내리고 있었다.학교에서 준비한 식당은 학교 근처에 있었고 과거에 조은희가 진석과 함께 와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별도로 방을 예약하지 않았었다.익숙한 장소를 다시 찾으니 묘한 감회가 밀려왔다.진석과 조은희는 나란히 안으로 들어섰다. 키가 185cm인 남자와 170cm인 여자는 잘생긴 남자와 아름다운 여자의 조합으로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들 사이의 과거를 아는 학교 관계자들은 자연스럽게 몇 마디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띄웠다.조은희는 약간 불편한 기색을 띠며 가볍게 입을 열었다.“어린 시절엔 철이 없었죠.”반면 최근 몇 년간 사업을 통해 단련된 진석은 여유로운 미소로 담담하게 응대했다.“과거의 인연을 다시 이어갈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것으로 보여요.”그 말이 나오자 학교 관계자들은 그 의미를 바로 알아챘다. 진석이 조은희 때문에 온 것임이 분명했다. 그 1억이 전부 조은희 덕분이었기에 학교 관계자들은 일부러 조은희를 진석의 옆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조은희에게 음료만 권하면서 농담을 건넸다. “잠시 후 진석이 취하시면 조은희가 집에 데려다줘야겠어. 그렇지 않으면 큰일 날 수도 있잖아.”조은희는 그들의 관계를 설명하려 했지만, 탁자 아래로 내려간 그녀의 손이 진석의 손에 잡혔다.진석의 손길은 매우 부드러웠고 남녀 간의 감정이 담긴 것 같지 않은 마치 어른이 아이를 다정하게 어루만지듯 따스한 느낌이었다.조은희의 붉은 입술이 약간 떨렸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후 손을 빼냈고 진석은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 그는 학교 관계자들에게 술을 따라주며 먼저 한 잔을 마셨다.교장은 여전히 예전의 그 교장이었고 진석의 이런 모습을 보고 깊은 감회에 잠긴 듯 말했다.“많이 변했구나.”감상적인 분위
그날 밤 조은희는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그 후 며칠 동안 그녀는 집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 조은혁은 그 시간 동안 새로 들인 취미인 거북이들을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박연희는 그 모습을 보며 농담을 던졌다. “늙으니까 이런 거나 만지고 있지.” 그날 밤 조은혁은 거북이들을 모두 방생하며 자신이 아직 늙지 않았음을 증명하려 들었다. 심지어 한 마리 거북이 등에 ‘진석’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으며 괜히 화풀이도 했다. 박연희는 그 모습을 보며 유치하다며 혀를 찼다. 조은희는 이 모든 일을 몰랐다. 그녀는 그저 아버지가 며칠째 자신에게 집에만 있지 말고 좀 나가보라며 걱정하고 있는 것만 알았다. 일주일이 지나며 휴가가 끝났고 조은희는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그녀는 대학에서 미술학과 학생들을 가르치며 그림 수업을 맡고 있었다. 가끔 그녀는 자신이 진석의 영향을 받은 게 아닐까 싶었지만 딱히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그래도 일하는 게 나쁘지는 않았다. 저녁 해 질 녘이었다. 조은희는 차 열쇠를 챙겼다. 차를 몰고 가 간단한 간식을 사서 집에 돌아와 드라마를 보며 먹을 계획이었다. 그녀의 일상은 단순했고 굳이 그것을 깰 생각도 없었다. 며칠 전에 그 일은 그냥 우연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저 진석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저녁노을이 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조은희의 얼굴은 노을빛에 물들어 더욱 맑고 투명해 보였다. 그녀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차 문을 열려던 순간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은희야.” 그 목소리는 진석이였다. 조은희는 천천히 돌아섰고 그곳에 서 있는 진석을 보았다. 그는 몇몇 교직원들과 함께 기부에 관한 대화를 하고 있었다. 조은희는 학교의 오래된 도서관 건물을 새로 짓기 위한 기부를 논의 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재회에 조은희는 순간적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진석의 눈빛은 깊고도 복잡했다. 이 학교는 그들이 과거에 함께 있었던 곳이었
휴게실에서 조은희는 진안영의 품에 안겨 억눌린 채로 울고 있었다. 진안영은 그녀의 부드러운 검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낮게 한숨을 쉬었다. “정말 좋아한다면 내가 대신 가서 말해줄게요.” 조은희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빠가 언니를 대역죄인이라고 할 거예요.” 진안영은 잠시 멈칫한 뒤 부드럽게 말했다. “진범 씨가 도와줄 거예요.” 조은희는 진안영의 품에 더욱 몸을 기댄 채 계속 울었지만 오늘이 조우찬의 첫돌 날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그래서 조금만 울고 말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누구나 젊은 시절에는 눈물을 흘리기 마련이니까. 그때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만 들어도 그 사람이 온화하고 점잖은 사람이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진안영은 그가 누군지는 몰라도 자기 남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문 열어볼게요.” 진안영이 문을 열었을 때 예상대로 문밖에는 진석이 서 있었다. 진안영은 그와 눈을 마주쳤지만 아무 감정 없이 그대로 서 있었다가 조용히 말했다. “두 분이 얘기하세요.” 진석은 고개를 끄덕였고 진안영은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휴게실 안은 여전히 조은희의 울음소리만 가득했다. 그녀는 왜 이렇게 슬픈 걸까. 다시 그 사람을 만나는 게 이렇게 슬픈 일일까? 아니면 이 몇 년 동안 계속 슬픔에 잠겨 있었던 걸까? 진석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5년 동안 떨어져 지낸 그녀에게 다가갔다. 사실 그들이 처음 함께했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첫 만남 이후 바로 헤어졌으니까. 조은희는 그때 겨우 18살의 어린 소녀였고 5년이 지난 지금 그녀는 많이 성숙해졌지만 여전히 그때의 소녀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언니...” 조은희는 그를 품에 안으며 애교를 부렸다. 처음엔 진안영인 줄 알았지만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진안영의 허리는 이렇게 강건하지 않았다. 분명히 남자의 허리였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름답고 온화한 듯하면서도 차가운 기운을 풍기
다음 해 8월. 조우현과 방유설의 아기가 첫돌을 맞았다. 방유설은 조우현에게 아들을 낳아주었고 그 아이의 이름은 조우찬으로 지어졌다. 이 이름은 큰아버지인 조진범이 지어준 것이었고 방유설은 이 이름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한편 조진범과 진안영의 막내아들의 이름은 조우진이었다. 조우찬과 조우진, 이 두 아이는 조씨 가문의 차세대 남자아이들이었다. 하지만 가문에서 첫 아이는 여전히 진아현이었다. 현재로서는 유일무이한 작은 공주님으로서 이 작은 소녀는 조은희 고모를 따라다니는 걸 좋아했다. 올해로 세 살 반이 된 진아현은 곧 유치원에 입학할 나이가 되었다. 조우찬의 돌잔치 날 조은희는 여전히 진아현을 데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 예상치 못한 옛사람을 마주쳤다.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해 그녀가 타국으로 떠난 이후로 가끔 스쳐 지나갈 뿐 이렇게 제대로 얼굴을 마주한 적은 없었다. 몇 년이 지났을까. 조은희는 차마 생각하기조차 두려웠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시간이 흐른 듯했다. 흐릿한 기억 속에서 벌써 4, 5년이 된 것 같았다. 진석은 옆에 아무도 없이 홀로 서 있었다. 그는 검은색 정장을 입고 행사장의 중앙에서 다른 이들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조씨 가문 사람들 사이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예전의 일은 잊은 듯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조은희 진아현의 손을 잡고 있었고 저절로 눈물이 고였다. 진아현은 고개를 들어 고모를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모, 저 사람 좋아해요?” “아니야.” 조은희는 순간 당황하며 빠르게 대답했다. 하지만 진아현은 그 말을 믿지 않는 듯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럼 왜 자꾸 그 사람만 보고 있어요? 물론 잘생겼긴 하지만 여자애들은 좀 더 절제해야 해요.” 조은희는 잠시 놀라며 물었다. “어디서 그런 걸 배웠어?” 진아현은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아빠가 그랬어요! 아빠가 항상 엄마한테 말했어요. 잘생겼어도 자기만 보면 안 된다고. 여
유이안의 말이 끝나자 조씨 가문 사람들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박연희였다. 그녀는 서둘러 유이안에 물었다. “유설이 상태는 괜찮아?” 유이안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외숙모, 걱정하지 마세요! 유설 씨 상태는 좋아요. 그냥 조금 놀란 것 같아요. 우현이가 안에서 곁에 있어 주고 있어요.” 박연희가 대답하기도 전에 옆에서 조은혁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뜻밖에 아이라니. 그게 좋은 거지! 좋은 거야.” 두 사람의 부부 사이는 원래도 좋았지만 부모라면 누구나 손주를 보고 싶어 하는 법이다. 게다가 조우현과 방유설의 외모가 워낙 출중하니 그 아이 역시 틀림없이 예쁠 거라는 생각에 조은혁은 그저 상상만으로도 격동되었다. 방유설을 닮은 귀여운 딸일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한참 지난 후 조우현이 방유설을 부축하며 나왔다. 방유설은 설탕물을 조금 마신 덕분에 정신을 차렸지만 집에 돌아가 며칠은 충분히 쉬어야 했다. 특히 임신 초기 3개월 동안은 모든 일을 미루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뜻밖에 찾아온 아이였지만 방유설은 그 아이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녀는 한 손으로 아직 평평한 아랫배를 감싸고 다른 손으로는 조우현의 목을 끌어안으며 마음속 깊이 행복이 가득 차올랐다.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절. 방유설도 한 번쯤은 행복을 상상해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행복은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꿈에서조차 감히 바랄 수 없을 정도의 행복이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조우현이 깊은 애정을 담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목소리가 약간 잠긴 채 말했다. “유설아, 우리에게 아이가 생겼어.” 결혼한 지 오래됐지만 조우현은 가끔은 철없고 유치한 모습을 보일 때도 있었다. 하지만 대체로 성숙했고 갈수록 더욱 성숙해졌다. 가끔 방유설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조우현은 젊은 나이에 결혼한 편이었고 자신의 가장 빛나는 시기를 모두 그녀에게 쏟아부은 것 같다고. 밤에 문득 잠에서 깨어날 때면 그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