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은 이 세상에 둘밖에 남지 않은 것처럼 오랫동안 눈을 맞추고 있었다.그렇게 오랜 시간 서로를 마주 보며 지내왔었지만 지금의 이 눈 맞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소중했다.온지유는 빨개진 눈으로 여이현을 바라보고 있었다.그가 무사하다니 다른 건 이제 아무 상관도 없어진 것 같았다.하지만 온지유는 제 감정을 억누르며 그에게로 다가가지는 않았다.다신 보지 못할 것 같은 사람을 이리 두 눈에 담았으니 온지유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여이현에 대한 미움도 그의 안전 앞에서는 그토록 작아져 있었다.그렇게 그 둘은 서로에게 다가서지는 않았지만 그리움 가득한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소대장님.”그때 움직이지 않는 여이현을 한 사병이 부르며 말했다.“다들 소대장님이 들어가시길 기다립니다.”“아, 그래.”짤막하게 대답한 여이현은 고민도 없이 들어갔고 그 모습을 보고서야 온지유도 그곳을 빠져나왔다.이미 이혼한 사이라는 건 알지만 여이현의 미련없는 뒷모습을 보니 또다시 실망스러운 감정이 앞섰다.하지만 여이현이 이혼서류를 내밀던 그때보다 더한 실망은 느껴지지 않았기에 온지유는 마음을 진정시키다가 천막으로 들어가지 않고 주위를 둘러보았다.그러자 멀지 않은 곳에서 타오르는 불과 연기가 보였는데 자세히 보니 그 위에는 검은 냄비도 놓여있었다. 아마도 병사들이 그곳에서 무언가를 삶아 먹는 것 같았다.허름한 이 마을에는 주방시설도 제대로 되지 않아 다른 집들도 다 불에 냄비를 올려 쌀을 끓이는 원시적인 방법으로 생활하고 있었지만 병사들은 그보다 더 원시적인 것 같았다.냄비도 남들이 쓰다가 버린 것 같은 걸 쓰고 있는 병사들이 안쓰러웠던 온지유는 그들에게로 다가갔다.그러자 온지유를 알아본 병사들이 그녀에게 친절하게 말을 걸어왔다.“상처는 다 나으셨어요?”“네, 괜찮아졌어요.”그에 온지유도 웃으며 말했다.“제 성은 온 이고 이름은 지유에요. 앞으로 온지유라고 불러주세요.”“네, 지유 씨.”“아직 식사 전이시면 같이 드세요.”병사들도 예의를 갖추며
겉으로 보기엔 괜찮았지만, 맛은 없었다.“자.”그 순간, 온지유는 고소한 밥 냄새를 맡게 되었다.고개를 들자 여이현은 그녀를 그윽한 눈길로 빤히 보고 있었다.그리고 그의 손에는 하얀 쌀밥이 담긴 밥그릇이 있었다.온지유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여이현은 반응도 없는 그녀를 보더니 밥그릇을 그녀의 앞에 내려놓은 뒤 수저도 건넸다.“먹어.”그는 다소 타버린 밥을 먹기 시작했다.온지유는 그를 빤히 보다가 물었다.“우리 이것만 먹는 거야?”여이현은 그녀의 곁에 앉았다.“응.”온지유는 입술을 틀어 물었다. 그가 많이 변한 것 같았다.생활 방식뿐만 아니라 식습관도 달라졌다.온지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예전에 그가 살던 곳과 하늘 땅 차이가 나는 것 같았다.그녀는 하얀 쌀밥을 보며 말했다.“난 입맛이 까탈스럽지 않아. Y 국에 왔으니까 여기 생활 방식에 적응할 수 있어. 그러니까 굳이 날 위해 흰쌀밥을 준비할 필요 없어.”여이현은 그녀를 힐끗 보았다.“흰쌀밥도 얼마 안 남았어. 음식 낭비하면 안 돼.”온지유는 그를 빤히 보았다. 그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그녀는 음식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밥그릇을 든 그녀는 천천히 밥을 먹기 시작했다.오랜만에 먹는 따듯한 밥이라서 그런지 온지유는 아주 맛나게 느껴졌다.설령 반찬을 먹지 않아도 밥은 아주 맛있었다.여이현은 양 볼 가득 넣어 밥을 먹고 있는 모습을 보더니 저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그리곤 옆에 있던 병사에게 눈빛을 보냈다.병사는 바로 달려와 따듯한 물을 따라주었다.“반찬도 먹어. 그러다가 체하겠어.”여이현은 온지유에게 말했다.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맛나게 먹고 있었다.비록 그들이 만든 음식은 요리사에게 견줄 정도로 맛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온지유는 살면서 먹은 밥 중 제일 맛있게 느껴졌다.병사들도 여자에게 다정한 모습을 보이는 여이현을 처음 보았다.그랬기에 궁금했다. 눈앞에 있는 여자가 대체 누군지.여하간에 그들은 온지유를 본 적 없었으니까.밖에 있던 몇몇
“네, 형님.”“너희들이 쑥덕대던 여자가 누군지 내가 한번 봐야겠군...”용경호는 여이현이 다른 여자를 좋아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여하간에 여이현이 좋아하는 사람은 따로 있었으니까. 그랬기에 궁금했던 용경호는 고개를 빼꼼 내밀어 안을 보았다. 여자의 뒷모습이 너무도 익숙했다.다시 여이현의 눈빛을 보았을 때 확실히 병사들이 얘기한 것처럼 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설마!'‘이거 들키면 큰일이 되는 거 아닌가?'용경호는 조급해졌다. 만약 이런 곳에서 다른 여자에게 반했다면 온지유는 어떻게 하겠는가!이때 병사들이 궁금한 듯 그에게 물었다.“형님, 어떠십니까?”용경호는 병사들의 머리를 꾹꾹 누르며 구경하지 못하게 했다.“다시는 입에 함부로 올리지 마! 대장님은 그런 분이 아니니까!”“네, 알겠습니다!”그들은 용경호의 말을 곧잘 따랐다.하지만 용경호는 누가 봐도 당황해 보였다.여이현을 걱정하는 듯한 눈빛이기도 했다.그러나 그는 여이현이 온지유를 얼마만큼 사랑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던지라 다른 여자에게 반했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여자의 뒷모습은 이상하게도 온지유와 닮은 것 같았다...‘설마!'‘대장님께서 대용품을 찾으신 건가?!'...온지유가 마침 식사를 마치고 나올 때 찰리가 숨을 헐떡이며 달려왔다.찰리의 머리엔 커다란 거즈가 붙어 있었고 손에는 붕대를 감았다.그녀는 하마터면 찰리의 존재를 잊을 뻔했다.“괜찮아?”“괜찮아요?!”찰리와 온지유는 동시에 물었다.온지유는 찰리의 두 눈에 담긴 자신을 향한 걱정을 읽어냈다.“난 별로 크게 다치지 않아서 괜찮아.”온지유는 그에게 말했다.“그러는 넌, 왜 뛰어온 거야. 밥은 먹었어?”찰리가 말했다.“눈 뜨자마자 달려왔어요. 괜찮다니 다행이네요.”온지유는 웃으며 말했다.“뭐야, 나 걱정했어? 정말 놀라운데?”찰리는 당연히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누가 걱정했다고 그래요! 그냥 저희는 협력 관계니까 와 본 거죠. 적어도 생사는 알아야 할 거 아니에요.”“아닌 척할 필
그의 말에 온지유는 다소 마음이 아팠다.그들이 겪고 있는 것은 이미 오래전에 끝났어야 할 일이었다.비록 온지유는 겪어보지 못했지만, 인터넷에서나 책에서 읽어본 적 있었던지라 공감 못 하는 것은 아니었다.나라의 발전이 아주 빠른 것에 고마움을 느꼈다.그래도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마침 두 사람의 모습을 막 나오던 여이현이 발견했다.그는 걸음을 멈추고 대화를 나누고 있는 온지유와 찰리를 보았다.온지유는 다정하게 찰리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하고 있었다.두 사람은 아주 친해 보였다.아마 알게 된 지 꽤 된 사이일 것이다.그는 저도 모르게 표정이 굳어지며 미간을 찌푸리게 되었다.찰리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온지유는 그를 친남동생 대하듯 달래주고 있었다.그녀는 찰리를 이끌고 의자에 앉았다. 찰리에게 어깨를 내어주면서 꺼진 희망을 다시 살려주고 싶었다.“괜찮아, 나라의 부흥을 위해 우리가 더 분투하는 거야!”온지유가 찰리를 보며 말했다.찰리는 그녀의 두 눈을 빤히 보았다. 힘이 넘치는 그녀의 모습에 다소 놀란 듯했다.“큼큼큼...”이때 누군가 헛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찰리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더니 본능적으로 경계했다.온지유는 느릿하게 걸어오고 있는 여이현을 발견했다.“미안해, 본의 아니게 대화를 방해하게 되었네.”여이현이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온지유가 답했다.“괜찮아.”찰리는 여전히 경계했다.“누구예요?”온지유는 찰리에게 여이현을 소개했다.“이 사람은 여이현이라고 해. 대장님이기도 하고 마을을 지켜준 사람이야. 너도 대장님이라고 불러도 돼.”여이현은 찰리를 빤히 보았다.찰리는 순간 깨달았다.“아, 그럼 사람들이 수호신이라고 부르던 사람이 바로 형이었네요!”여이현은 자신을 수호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난 수호신 같은 게 아니야. 그냥 군대를 이끄는 사람이지.”찰리가 말했다.“우리 마을을 지켜주었으니 당연히 수호신이죠. 저희 모두 고마워하고 있어요. 우리
“음?”온지유는 다소 의외라는 듯 그를 보았다.여이현은 그녀를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옷이 더러워졌기에. 목욕하고 싶을 것 같아서 말해뒀어.”온지유는 고개를 떨구며 옷을 살펴보았다.집에 있을 땐 그녀는 거의 매일 샤워했다.하지만 이곳에선 그때처럼 모든 것이 갖춰지지 않았던 터라 매일 샤워하는 것은 포기했다.샤워를 생략할 수 있으면 생략했다.폐허 속에 갇혀 있었던지라 그녀의 꼴이 깨끗할 리가 없었다.다만 여이현이 이렇게나 세심하게 목욕물까지 준비할 줄은 몰랐다.그녀는 저도 모르게 냄새를 킁킁 맡았다.“혹시 냄새나?”“아니.”여이현은 그윽한 눈길로 그녀를 보았다.“넌 항상 깨끗하게 하고 다녔으니까.”그의 말에 온지유는 멈칫했다.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보기엔 멀어 보였다. 여하간에 이혼까지 했으니 말이다. 여이현도 그녀를 더는 챙겨줄 필요가 없었다.그러나 그의 행동은 꼭 여전히 그녀에게 마음이 있는 것 같았다.온지유는 입술을 틀어 물다가 시선을 피했다. 아직 이 모호한 관계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응.”온지유는 간단히 대답했다.“그럼 먼저 가볼게.”“응.”온지유는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여이현은 그런 그녀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후에야 고개를 돌렸다.그러나 고개를 돌리자마자 구석에서 몰래 구경하고 있던 용경호를 발견했다.그는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지금 거기서 뭘 하고 있었던 거지?!”용경호는 이곳으로 오자마자 여자와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는 여이현을 발견했다.그는 온지유의 뒷모습밖에 보지 못했다.“닮았습니다.”용경호는 감탄하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확실히 닮은 것 같습니다.”여이현은 미간을 찌푸렸다.“무슨 말을 하는 거지?”“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용경호는 입을 벙긋거렸다. 이미 여이현이 온지유의 대용품을 찾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온지유와 멀리 떨어져 그리움에 버티지 못하고 온지유와 닮은 사람을 찾은 거라고
여자는 코웃음을 치며 다소 일그러진 얼굴로 말했다.“내가 한 거면, 뭐요?”온지유는 팔짱을 낀 채 심드렁한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나한테 음식을 만들어 가져온 이유는 뭐지? 이틀 전만 해도 날 여기서 쫓아내고 싶어 하지 않았나?”아린은 자존심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다시 고개를 들어 온지유를 보며 말했다.“그쪽이 굶어 죽을까 봐 가져온 거예요. 마을은 아수라장이 되어서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끼니를 제대로 못 챙겨 먹고 있거든요. 하루종일 안 보이길래 그래서 여기서 굶어 죽으면 어떻게 하나 해서 가져온 거예요. 전 우리 마을에서 누가 죽었다는 소리를 더는 듣고 싶지 않거든요.”이유는 핑계 같았다.온지유는 이틀 전의 보여주던 그녀의 행동과 그녀의 남동생을 구해준 일이 떠올랐다.아마 미안한 마음에 온지유에게 밥상을 차려준 듯했다.온지유는 앞으로 다가가 의자에 앉은 후 테이블 가득한 음식을 보았다.“고기도 있네. 설마 집에서 아껴 먹으려던 걸 전부 가져온 건 아니지?”“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아린도 다가왔다.“다들 이 정도로 먹어요. 전 차별 대우한 적 없다고요!”씩씩대는 모습을 보니 역시 어리긴 어리다고 생각했다. 전혀 감정을 숨기지 못했으니까.온지유는 굳이 직설적으로 말을 하지 않고 수저를 들어 음식을 먹어보았다.그러자 아린은 기대하는 얼굴로 그녀를 보았다.“어때요?”온지유는 고개를 끄덕였다.“맛있네.”아린은 기뻤다.“맛있죠? 저도 요리 꽤 한다고요.”아린은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말했다.온지유가 물었다.“넌, 밥은 먹었어?”아린은 배를 만졌다. 오늘은 그저 온지유를 위해서 음식을 만들었을 뿐이다.그녀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었으니까.너무 기대한 나머지 밥을 챙겨 먹는 것도 잊고 있었다.온지유가 묻자 그제야 배고픈 감이 들었다.온지유는 바로 눈치채곤 밥을 그녀의 앞으로 내밀었다.“먹어.”아린이 물었다.“제가 먹으면, 그럼 그쪽은 뭘 먹어요?”온지유가 답했다.“난 다이어트 중이라 쌀밥은 안 먹어.
여자는 다소 기대하는 얼굴이었다.“그럼 내일은 언제쯤 찾아오면 될까요?”“그건 저희도 모릅니다.”그러자 실망하는 기색을 보였다.내일 다시 찾아와 여이현과 함께 밥이라도 먹으려고 했으나 만나기 벌써 만나기 어려웠다.여자는 자신이 너무 늦은 시간에 찾아온 것이라고 생각했다.‘내일 일찍 찾아오면 만날 수 있지 않을까?'마침 용경호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여이현이 다른 여자를 온지유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으면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에이, 설마 아니겠지.”“하지만 목욕물까지 받아두라고 하셨잖아.”“대장님이 다른 여자에게 그렇게 다정하게 대할 리가 없어. 이건 말도 안 돼.”“우리 대장님은 그런 사람이 아니야.”용경호는 혼잣말로 자신을 설득하면서 여이현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여이현이 온지유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고 있었던지라 여이현이 온지유의 대용품까지 찾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온지유와 여이현은 이미 이혼했기에 안 될 건 없다고 생각했다.여자는 고개를 들자 마침 혼자 중얼거리고 있는 용경호를 발견하곤 얼른 불렀다.“경호 씨!”용경호는 고개를 들었다. 그들이 구해주었던 여자였다.이름은 제나.그들은 이곳에서 수많은 난민을 구해주었다.하지만 눈앞에 있는 여자의 남편은 사망했다. 남편은 그들과 같은 나라 사람이었다.여자는 5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를 데리고 가족을 찾고 싶어 했다.원래는 데리고 가지 말았어야 했다.난민이 가득한 곳에서 괴롭힘을 당하며 밥도 배불리 먹지 못하게 되었으니까.거기에다 제나의 남편은 죽기 전 그들에게 제나를 데리고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 달라고 했다. 자신의 부모님이 제나를 잘 돌봐줄 거라고 하면서 말이다.그래서 하는 수 없이 여자를 데리고 오게 된 것이다.오는 길 내내 제나는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가끔 병사들의 찢어진 옷을 바느질해주며 사소한 일을 많이 도와주었다.“제나였습니까.”용경호는 그녀에게 친절했다.“이렇게 늦은 시간에 여긴 어쩐 일이십
용경호가 말했다.“괜찮습니다. 전부 대장님을 위한 일이니 말입니다.”제나는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떠났다.용경호도 걸음을 옮겼다.다만 제나는 용경호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것을 잊지 않았다.너무도 궁금했다. 여이현이 관심을 보인다는 여자가 누군지.제나는 바로 처소로 가지 않았다. 근처에 서 있는 병사를 잡고 물었다.“전 마을 사람들을 도와주러 온 건데, 언제쯤 다시 출발할 수 있을까요?”“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제나는 이내 떠보듯 물었다.“대장님께서 다정하게 대했다는 여자분도 이 마을 사람인가요?”병사는 곰곰이 생각하곤 말했다.“아닙니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보였습니다.”제나는 병사의 말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같은 나라 사람이라니.'‘어쩐지 왜 쑥덕대나 했더니.'제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네, 고마워요.”그녀는 처소로 돌아갔다.아이는 이미 깬 상태였다.“엄마, 어디 갔었어요?”남자아이도 Y 국 사람이었던지라 피부색이 구릿빛이었고 Y 국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눈을 뜨지 제가나 없자 마음이 불안해졌다.제나가 돌아오자마자 아이는 바로 끌어안았다.제나는 아이에겐 다정한 엄마였다. 아이의 부드러운 머리칼을 넘기며 말했다.“대장님 만나러 잠깐 나갔다 왔어.”아이가 물었다.“그 멋있는 아저씨요?”“그래.”제나는 아이의 옆에 앉아 우유를 한잔 건넸다.“그 멋있는 아저씨가 행여나 네가 우유 먹을 수 없을까 봐 특별히 널 위해 젖소를 잡아 왔단다.”아이는 입맛을 다시더니 우유 잔을 들어 벌컥벌컥 마셨다.“엄마, 맛있어요.”아이에겐 우유란 아주 맛있는 것이었다. 만족한 듯 아이는 입가에 묻은 우유도 혀로 핥았다.제나는 손으로 아이의 입가를 닦아주었다.“멋쟁이 아저씨가 좋아?”“좋아요! 아저씨가 준 우유도 맛있어요!”아이는 잔뜩 흥분하며 말했다.그러자 제나는 미소를 지었다.“그래, 우리한테도 아주 다정하시지.”...어젯밤, 온지유는 따듯한 물에 목욕을 했다.따듯한 물에 몸을 담가본 적이 언젠지도
은서우는 깜짝 놀라며 급히 말했다.“원장님, 제가 알아볼 테니 먼저 가서 쉬세요.”그러나 인명진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은 선생님 먼저 쉬세요. 오늘 하루 종일 이동하느라 피곤했을 텐데 제가 알아서 할 게요.”은서우는 두 개의 침대가 놓인 객실을 바라보며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인명진의 배려가 고맙기도 했지만 동시에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대한 죄책감과 두려움이 그녀를 짓눌렀다.그녀는 침대 모서리에 앉아 두 손으로 옷자락을 꽉 쥐었다.머릿속은 온통 뒤엉킨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다.잠시 후 돌아온 인명진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근처 호텔에도 빈방이 없어서 방법이 없네요. 오늘 밤은 그냥 이렇게 지내야 할 것 같아요. 너무 신경 쓰지 말고 그냥 특수한 상황이라고 생각해요.”은서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네, 원장님.”인명진이 씻으러 들어가자 은서우의 시선은 탁자 위의 주전자에 멈췄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주머니로 가져가 약봉지를 만졌다.심장이 요동치고 이마에는 식은땀이 맺혔다.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었다.그녀는 약봉지를 손안에 단단히 움켜쥐었다.너무 세게 힘을 주어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갈등 속에서 은서우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렇지 않은 척 주전자 쪽으로 다가갔다.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약을 컵에 넣고 재빨리 물을 부었다.그 후 약이 빠르게 녹도록 조심스럽게 저었다.모든 것을 완성하고 물컵을 원래 자리에 돌려놓는 순간 인명진이 욕실에서 나왔다.그는 느슨한 가운 하나만 걸친 채였다.젖은 머리칼 몇 가닥이 이마에 흩어져 있었고 물방울이 그의 단단한 턱선을 따라 흘러내려 쇄골을 타고 가운 속으로 사라졌다.은서우는 무심코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순간적으로 심장이 멎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오른 그녀는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하지만 그녀는 다시 한번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인명진은 그녀의 반응을 눈치채지 못한 듯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은서우에게 다가왔다.목소리는 방금 샤워를 마친 사
이렇게 드문 해외 교류 기회를 얻는 것은 그녀의 전문 능력을 크게 인정받은 것이며 또한 시야를 넓히고 자신을 성장시킬 절호의 기회였다.하지만 그 인턴은 이 소식을 듣고 다른 속셈을 품게 되었다.그녀는 은서우를 찾아가 몰래 약봉지를 건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은 선생님, 이번에 원장님과 함께 가시죠? 기회를 봐서 이 약을 물에 타세요. 일이 끝나면 2천만 원 드릴게요.”은서우는 눈을 크게 뜨고 놀란 채로 연신 고개를 저었다.“안 돼요. 이건 불법이에요. 절대 할 수 없어요.”인턴 민지아는 어두워진 얼굴로 싸늘하게 협박했다.“전에 제 돈을 받고 제 부탁 들어주신 거 잊지 마세요. 안 하면 당신이 돈을 받고 원장님의 사진을 몰래 찍은 사실을 폭로해 버릴 거예요. 그러면 당신은 완전히 끝장나는 거죠. 그리고 소씨 가문 사람들이 가만있을 것 같아요? 이렇게 좋은 기회를 망쳐버리면 더 난리 칠걸요?”은서우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는 흰 종이처럼 순식간에 창백해졌다.그녀는 자신이 이 자리까지 오기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떠올렸다.‘이 선택 때문에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지만 민지아의 요구대로 하면 내 양심은 어떡하지? 원장님의 신뢰는 어떻게 보답하지?’민지아는 그녀가 망설이는 것을 보고 다시 유혹하듯 말했다.“그냥 약을 타기만 하면 돼요. 원장님은 전혀 눈치채지 못할 거예요. 잠들면 사진 몇 장만 찍으세요. 어렵지 않잖아요? 이것만 끝내면 우리 둘은 완전히 정리되는 거예요.”은서우는 피가 배어 나올 정도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고뇌 속에서 결국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민지아는 목적을 달성하자 만족스러운 냉소를 지으며 장난치지 말라는 경고를 남긴 뒤 급히 자리를 떠났다.은서우는 손에 약봉지를 꽉 쥔 채 혼자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출발일이 다가왔다.은서우는 무거운 짐을 끌고 인명진과 함께 공항으로 향했다.가는 길 내내 인명진은 그녀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이번 교류와 관련된 의학적
은서우는 인명진의 카카오톡을 추가한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하지만 동시에 긴장감이 엄습해 왔다.이제 남은 과제는 사진을 찍어 전달하는 것이었다.어느 날 병원 휴게실에서 그녀는 인명진이 혼자 앉아 자료를 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주변에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은서우는 심호흡하며 용기를 내어 조용히 다가가 그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그녀는 평소와 다름없이 핸드폰을 만지는 척했다.실제로는 몰래카메라를 켜 자연스럽게 각도를 조정한 뒤 빠르게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다행히도 인명진은 자료에 집중하고 있어 그녀의 행동을 눈치채지 못했다.은서우는 재빨리 사진을 인턴에게 전송했다.인턴은 그 사진을 보고 매우 만족스러워했다.[은 선생님. 잘하셨어요. 이 정도는 되어야죠.]그러나 안도의 순간도 잠시,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인명진이 카카오톡으로 메시지를 보내 학술 교류에 관련하여 질문한 것이다.당황한 은서우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그때 인턴도 들킬 우려가 있다고 생각한 것인지 은서우에게 카카오톡 아이디를 보내주며 인명진이 그녀를 추가할 수 있도록 지시했다.은서우는 난감했지만 어쩔 수 없이 인턴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그녀는 다시 인명진을 찾아갔다.“원장님, 한 인턴이 이번 수술에 대해 관심이 많더라고요. 학술 연구에서도 독특한 시각을 가지고 있는 친구인데 원장님께서도 얘기 나눠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건 그 친구 연락처입니다.”인명진은 의심스러운 눈길로 은서우를 바라보았지만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리고 그는 은서우와 학술 논의를 하기 시작했다.은서우는 탄탄한 의학적 지식과 침착한 분석 능력으로 빛을 발했고 인명진은 그런 그녀를 흥미롭게 지켜보았다.‘이상한 점도 있긴 하지만 확실히 능력은 있네. 한 번 키워봐도 되겠어.’인명진이 은서우를 보며 말했다.“은 선생님, 전문적인 역량이 기대 이상이군요. 앞으로 더 도전적인 케이스들을 맡겨볼 생각입니다. 그리고 연구 프로젝트에도 참여해 보면 어떻겠습니까?”은서우는 깜짝 놀랐
은서우는 심장이 조여오는 듯했지만 이번에 물러서면 평생 그들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나는 숨길 것도 두려울 것도 없어. 마음대로 해. 진실은 결국 밝혀질 테니까.”소태훈은 은서우가 조금도 흔들리지 않자 분노에 휩싸였다.그는 옆에 있던 테이블을 손으로 밀쳐버렸다.탁자 위의 찻잔과 유리병들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산산조각이 났다.깨진 유리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었고 날카로운 소리가 온 방 안을 가득 채웠다.“은서우! 넌 내 손바닥 안에서 벗어날 수 없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광기에 휩싸인 그의 행동은 방 안에 있던 다른 가족들의 분노까지 부추겼다.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덩치 크고 험악하게 생긴 중년 남성이 목소리를 높였다.“은서우! 네가 이 집에서 몇 년을 공짜로 먹고살았는데! 이제 와서 발을 뺀다고? 꿈도 꾸지 마.”말을 마친 남자는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거친 손으로 은서우의 옷깃을 움켜잡아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발이 바닥에서 떨어진 은서우는 목이 조여와 숨이 막혔지만 여전히 그 남자를 노려보며 외쳤다.“이건 불법 감금이에요! 놔요!”“불법 감금? 이건 가족 간의 일이야! 네가 태연이를 죽였으니 끝까지 책임져야 할 거 아냐.”그 장면을 목격한 인명진은 얼굴을 굳히고 이내 앞으로 나서서 중년 남성의 손목을 움켜잡으며 싸늘한 눈빛으로 노려봤다.“놔. 안 그러면 신고할 거야.”남자는 인명진의 기세에 눌려 주춤했지만 굽히지 않고 외쳤다.“넌 누구야? 뭔데 우리 가족 일에 끼어드는 거지?”인명진은 단호하게 대답했다.“은서우 병원 원장. 내 직원이 이런 식으로 위협받는 걸 두고 볼 수 없어. 사람이 많다고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생각하나? 법 앞에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명심해.”그제야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소상태가 다가와 사내의 팔을 붙잡았다.“이러다 일이 더 커지겠어요. 일단 놔요.”사내는 마지못해 손을 풀었다.갑작스럽게 자유로워진 은서우는 비틀거리며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인명진이
은서우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내가 그날 가자고 제안한 건 단순한 모임이었어. 그 누구도 그런 사고가 날 거라 예상하지 못했어. 그래도 나는 지난 몇 년간 계속해서 보상하려고 노력했어. 하지만 나도 내 삶이 있어. 더 이상 이 일에 끌려다닐 순 없어.”그 순간 소상태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오더니 손가락을 뻗어 은서우의 이마를 찌를 듯 들이밀었다.“이 배은망덕한 년아! 태연이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이렇게 배신해?”은서우는 고개를 돌려 그의 손길을 피하며 차분하게 말했다.“저도 태연이의 죽음이 너무나 가슴 아픕니다. 하지만 제가 저지르지도 않은 죄까지 짊어지고 살 순 없어요. 저도 할 만큼 했어요.”연희진이 흐느끼며 애원했다.“서우야, 한 번만 더 도와주면 안 되겠니? 태훈이 몸이 안 좋아서 치료비가 계속 필요해.”은서우는 자신을 거둬준 양모를 바라보며 심란함을 느꼈다.이전의 기억들이 밀물처럼 밀려 들어왔다.처음 이 집에 들어왔을 때 그녀는 감사한 마음뿐이었다.은서우는 조심스럽게 행동했고 진심으로 인정받는 가족이 되고 싶어 노력했다.하지만 모든 것이 변해버렸다.“엄마, 마지막이라고 말했잖아요. 제가 지난 몇 년간 드린 돈만으로 부족했나요? 단순한 사고였어요. 저도 태연이한테 그런 일이 발생할 줄 몰랐고 태훈이가 이렇게 될 줄도 몰랐어요.”그 말에 소태훈이 흥분하며 휠체어에서 몸을 기울였다.그의 눈빛에는 증오와 광기가 서려 있었다.“은서우! 그렇게 쉽게 벗어날 생각은 하지 마. 이 모든 게 왜 벌어진 줄 알아? 다 너 때문이야! 네가 내 마음을 받아줬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야!”은서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몸을 떨며 물었다.“뭐라고? 그 사고... 설마 일부러 낸 거야? 단지 내가 네 고백을 거절했다는 이유로?”소태훈은 비웃듯 콧방귀를 뀌었다.그는 이젠 감추는 것조차 귀찮다는 듯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그래! 너만 아니었으면 태연이가 죽을 일도 없었고 내가 장애인이 될 일도 없었겠지. 그러
“성북 쪽으로 가주세요. 도착하면 제가 길 안내할게요.”인명진은 은서우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내비게이션을 켜고 조용히 성북 방향으로 차를 몰았다.성북은 오래된 주택가가 밀집한 지역이었다.인명진은 한 번도 이곳에 온 적이 없었다.그가 경성에서 주로 활동하는 곳은 병원이었고 그게 아니면 여이현이 있는 지역에 가끔 방문할 뿐이었다.하지만 생활이 안정된 후로는 여이현이 있는 곳으로도 향하지 않았다.은서우가 아니었다면 그는 이곳에 올 일조차 없었을 것이다.마침내 그녀의 안내에 따라 차는 한 단칸방 앞에 도착했다.차를 세운 순간 안에서 격한 소란이 들려왔다.“왜 아직도 그 계집애 편을 들고 있어? 대체 무슨 생각이야! 그 애만 없었어도 우리 태훈이가 이렇게 되진 않았어!”“그 애가 우리한테 준 돈만 해도 충분해. 게다가 태훈이 사고는 그냥 예상치 못한 사고일 뿐이었어. 대체 언제까지 그 아이한테 책임을 떠넘길 거야?”끝없는 다툼.은서우는 이제 이런 광경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있었다.더는 아무런 감정도 남아 있지 않았다.인명진은 남의 사생활에 관여하는 타입이 아니었다.그는 은서우가 안전벨트를 풀고 내리려는 순간 무심하게 말했다.“가족 문제로 일에 지장 주지 마세요. 도저히 해결할 방법이 없으면 그냥 휴가 내세요. 그리고 차비는 안 받아요.”그건 분명 의도적인 언급이었다.인명진은 은서우를 쳐다보지도 않고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이제 더는 그녀와 이 문제로 말 섞고 싶지 않다는 신호였다.‘내일 현금을 들고 가서 감사 인사를 전해야겠지. 지금은 그런 것보다 당장 눈앞의 일을 해결하는 게 먼저야.’은서우는 얼른 집안으로 들어섰고 방 안은 깨진 유리 조각, 뒤집힌 가구들과 여기저기 널브러진 물건들로 인해서 엉망진창이었다.그녀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여기 이천만 원이에요.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거 기억하세요. 저도 이제 곧 서른이에요.”“곧 서른이라고? 그럼 태연이는 너 때문에 서른이 되기도 전에 죽었다는 거 알
이천만 원이라는 돈은 가뭄의 단비처럼 절실했다.‘하지만 원장님께서 이 일을 아시면 이 병원에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할 수도 있어.’“은 선생님, 1억이라도 원하시는 건 아니죠?”인턴은 어떻게든 인명진과 접촉하려 했지만 방법이 없었다.인명진의 비서와 접촉하는 건 꿈도 꿀 수 없었고 결국 선택한 차선책이 은서우였다.어차피 은서우는 돈을 받으면 부탁을 들어줄 것이었고 그 후 그녀가 병원에서 잘리든 말든 인턴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은서우는 머리가 지끈거렸다.“일단 급한 일부터 처리해야겠어요. 그 부탁은 내일 다시 얘기하면 안 될까요?”“내일이면 원장님 사무실에 가는 날이잖아요? 은 선생님, 그냥 지금 확실히 해두는 게 좋겠어요.”인턴은 끊임없이 떠들어댔고 그때 은서우의 폰이 다시 울렸다.“은서우! 지금 죽어야 할 사람은 너야! 네가 아니었으면 우리 가족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어!”전화를 받자마자 들려온 것은 분노에 찬 외침이었다.너무나 익숙한 소리에 그녀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숨이 막혀왔다.“진정 하세요. 지금 바로 갈게요. 원하는 것도 바로 가져다드릴게요.”은서우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눈앞이 핑 돌 정도로 현기증이 몰려왔다.전화를 끊자마자 그녀는 거의 본능적으로 인턴의 손을 꽉 붙잡았다.“이천만 원 준다고 하셨죠? 바로 주면 내일 부탁 처리해 줄게요.”“지금 바로 송금할게요.”인턴은 은서우가 결국 제안을 받아들이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그녀가 핸드폰을 꺼내는 순간 은서우는 그것이 최신형 아이폰이라는 걸 알아챘다.케이스조차 반짝이는 보석으로 장식된 명품이었다.‘그래. 돈 없는 사람이 이런 일에 이천만 원이나 쓸 리 없지.’계좌 번호를 불러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계좌로 이천만 원이 들어왔다.인턴은 신신당부했다.“전 고화질 사진이 필요해요. 그리고 카카오톡도 꼭 추가해 줘야 해요.”“그럼 제가 당신 카카오톡을 로그인해야 하지 않나요? 아니면 어떻게 추가해요?”“좋아요. 로그인하세요. 은서우 씨...”그때 인턴의
은서우가 뭐라 답하기도 전에 인명진은 이미 돌아서서 갈 길을 가고 있었다.비록 인명진이 병원의 원장이었지만 은서우는 회의 시간을 제외하고는 그를 본 적이 거의 없었다.오늘 처음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하는 것이었다.그는 수술용 멸균복을 입고 마스크와 모자를 착용하고 있었다.얼굴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깊고 차가운 그의 검은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수술 내내 상황이 아무리 긴박해도 인명진은 전혀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고 그의 침착함과 냉정함은 뛰어난 실력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은서우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이제야 왜 병원의 많은 여성 간호사, 인턴, 심지어 여의사들까지도 그에게 열광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은서우는 가볍게 몸을 풀며 수술실을 나왔다.막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한 동료가 그녀를 찾아왔다.가슴에 걸린 명찰을 보고 은서우는 상대가 인턴임을 알았다.은서우는 예의 바르게 물었다.“안녕하세요. 무슨 일이시죠?”“은 선생님, 방금 원장님과 함께 수술을 마치셨죠?”인턴의 질문에 은서우는 약간 의아했다.“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인턴은 자신의 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은 선생님, 저 좀 도와주세요. 원장님 카톡 좀 추가해서 저한테 넘겨주시거나 아니면 원장님 사진 몰래 몇 장만 찍어 주세요. 제가 이만큼 드릴게요.”인턴의 눈에는 기대감이 가득 차 있었다.은서우는 인턴의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제가 원장님 연락처를 넘긴다고 해도 원장님 입장에서는 그냥 낯선 사람일 뿐일 텐데 원장님이 연락 받아줄 것 같아요? 그리고 몰래 사진 찍는 건 불법인 거 모르나요? 고작 그 정도 푼돈으로 저를 이런 큰일에 끌어들이겠다고요? 당신이 미친 걸까요? 아니면 제가 미친 걸까요?”은서우는 거침없이 인턴을 몰아붙였다.인턴이 급히 덧붙였다.“아니에요, 은 선생님. 도와주시기만 하면 백만 원 아니 천만 원도 문제없어요.”‘천만 원에 사진 몇 장과 연락처? 저 인턴 진짜 제정신이 아니네.’은서우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이명진은 병원에서 만약 어떤 의료 사고라도 발생한다면 이 병원의 명성은 그대로 무너질 것으로 생각했다.그의 말에 한 간호사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대답했다.“원장님, 병원 내부 번호와 원장님 개인번호 모두 통화 중이셨어요. 원장님 인기가 지금 장난 아닌 걸 모르시는 건 아니시죠?”문 앞에 대기 중인 인턴들로도 모자라 소문 듣고 연락이 오는 환자도 있었고 학생들도 있고 심지어 부잣집 부인들도 어디서 개인번호를 얻었는지 매일 전화를 걸어 이명진의 전화는 항상 통화 중 상태였다.긴급 상황만 아니라면 인명진이 직접 나설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인명진은 간호사의 필요 없는 말을 들을 시간도 없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그가 문을 열자 밖에서 있던 인턴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했다.“진짜 너무 멋있고 젊잖아. 이렇게 젊으신데 원장 선생님이라고?”“너무 잘생겼어. 여자 친구도 없다 그러던데.”“많은 수술도 직접 하신대. 그리고 학술논문도 봐주고 기타 강의도 하신다고 들었어.”“이렇게 훌륭한 사람 품에 안겨있는 느낌은 어떤지 상상도 안 가.”그들은 미친 사람처럼 저마다 한마디씩 주고받고 있었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인명진에게 달려들어 길을 막고 있었다.“인 원장님, 저랑 사귀시면 이런 병원 몇 개라도 더 해줄 수 있어요. 당신을 경성의 의료센터에서 우두머리로 만들어 드릴게요.”“인 원장님, 저 사람 말 믿지 마세요. 저랑 사귀시면 더 많은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드릴게요.”“인 원장님, 저랑...”“다들 꺼져!”인명진은 평소에 이 사람들에게 무관심이었지만 지금은 급한 수술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한 간호사가 데리고 온 경호원들도 그녀들을 막을 수가 없었지만 항상 따뜻하고 우아하고 부드러운 말만 할 거로 생각했던 인턴들은 인명진의 화내는 소리 한 번에 더 이상 앞으로 다가서지 못했고 자리를 피해 길을 열어 주었다.인명진은 재빨리 수술용 무균복으로 갈아입고 소독한 후 바로 수술실로 들어갔다.수술실 안에서는 피비린내가 진동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