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온지유에게 말하였다.“빨리 가요. 이 숲에 독사가 있어요.”“알았어.”온지유는 감히 방심하지 못했다.그들은 무려 한 시간 이상 걸어서야 숲에서 나왔다.소년의 말처럼 숲의 출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한 마을이 있다.이 마을은 전에 본 것과 달리 모두 토담집이지만 주변에 닭, 오리, 그리고 채소밭이 있었다.문 앞에서 차를 몰고 물건을 파는 사람도 있었다. 소년은 그녀를 데리고 걸어갔다.소년은 은지유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사람과 소통하였다.잠시 후에 소년은 그녀에게 말하였다.“우리 먼저 여기서 안착을 해요. 그런데 난 돈이 없고 손도 다쳤어요. 누나는 마을 사람을 따라서 약재를 캐서 돈을 벌면 돼요.”“나 돈 있어.”온지유는 소년이 이렇게 빨리 자기의 뒤통수를 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녀가 Y국에 올 때 만전의 준비를 하였다. 그녀는 홍혜주에게 부탁해서 이쪽의 화폐로 환전한 다음에 늘 들고 다녔다.“그러면 제일 좋죠.”소년은 온지유에게 이렇게 말하고 나서 눈앞에 길을 묻는 남자와 몇 마디를 주고받았다.“먼저 돈을 내야 해요.”소년의 말을 듣고 온지유는 주머니에서 현지 화폐 100원을 꺼냈다.남자는 만족스럽게 받아 갔다.소년은 이렇게 말했다.“저 남자는 100원이면 열흘을 묶을 수 있대요. 그런데 누나는 법로를 찾으러 갈 때 나도 데려가야 해요.”“법로? 이곳의 신무열 선생은 법로의 사람을 알아. 법로를 찾으려면 신무열 선생을 찾아.”이 남자는 ‘법로’ 두 글자를 알아들었다.이에 소년은 안색이 급변했고 현지의 언어로 물었다.“화국어를 할 줄 아세요? 그리고 당신들은 법로를 위해 목숨을 바쳐서 일하고 있어요?”소년은 주먹을 꽉 쥐었다. 온지유는 그의 변화를 모두 눈여겨봤다.온지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녀는 현지 언어를 모르지만 소년과 남자의 거래가 결렬된 경향이 있는 것을 알아챘다.남자는 현지 언어로 소년과 대화했다.“우린 법로를 위해 목숨을 바쳐 일할 필요가 없어. 법로는 좋은 분이셔. 늘
온지유는 묵묵히 사색에 잠겼다.Y국 북부에서 법로의 부하들은 한 마을에서 살인, 방화, 약탈을 진행하였는데 이 마을에서는 법로의 도움을 받았다고 하니 그 차이가 너무나도 뚜렷했다.온지유의 직감에 따르면 여기에 무슨 꿍꿍이가 있을 것이다.그녀는 소년에게 눈짓을 하자 소년은 온지유의 뒤를 따랐다.온지유는 마당의 중심에 있는 할머니와 여자애의 옆에 다가갔다. 땅에 있는 약재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뿌리가 길었다.“이거 어떻게 하죠?”소년도 아주 똑똑해서 온지유의 말을 바로 통역해 주었다. 할머니는 말소리를 듣고 무의식적으로 온지유와 소년을 바라보았다.할머니의 눈에는 20여 살의 여성과 열 몇 살의 소년으로 보였다.“뿌리를 자르고 흙을 깨끗이 털어내. 그리고 20개를 하나로 묶으면 돼.”소년은 할머니의 말을 온지유에게 통역해 주었다.할머니는 그들에게 물었다.“자네들은 어쩐 일로 여기에 온 거야?”그들은 Y국 중부에 있고 여전히 Y국 사람이다. 그러나 이 국가는 내전이 있고 별로 안전하지 않으며 Y국 내부가 심각하게 분열되었다. 주변에 동맹군이 주둔하고 있기에 그들은 Y국의 북부 지역과 일찍이 이미 두 갈래로 갈라졌다. 소년이 말하는 어투는 바로 Y국 북부 지역에 속했다.소년이 멍을 때리고 있을 때 온지유는 그를 한번 끌어당겼다.“우린 도망쳐서 여기로 왔어요.”이곳의 Y국 사람은 마음속으로 법로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그들이 사실을 말하면 할머니는 반드시 믿지 않을 것이다.게다가 온지유는 아직 사건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서 일단 법로의 부하들이 마을 사람들을 도살하고 추격하는 일을 말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넌 Y국 사람이니 착하니까 우린 괴롭히지 않을 거야. 왔으면 여기에 있어. 당분간 나가지 않는 것이 좋아.”할머니는 약재를 정리하면서 소년에게 말했다.이에 소년은 이해하지 않는 듯이 물었다.“왜요?”할머니는 이렇게 답하였다.“주변에 서로 다른 동맹군이 주둔하고 있으니까. 우리는 법로의 비호를 받아서 살아남은 거
여자애들은 고무줄, 머리핀을 받았고 남자애들은 무릎보호대, 축구, 교과서를 받았다...좀 더 큰 여자애는 립스틱과 기초화장품을 받았다.이런 것을 종래로 본 적이 없는 한 여자애는 갈색 눈동자에 깊은 당혹감을 드러냈다.“신무열 선생님, 이건 뭐예요?”“립스틱이야. 피부 톤을 개선할 수 있어. 다른 나라에서 이것으로 피부 톤을 개선해서 더 예뻐 보이게 할 수 있는데 이 과정을 메이크업이라고 해. 이것은 파운데이션이야. 사용할 줄 모르면 내가 동영상을 찾아줄 테니까 따라 하면 돼.”신무열은 인내심을 가지고 여자애들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는 화국어로 말하면서 가끔 Y국 언어도 조금 섞어서 말했다. 그래서 온지유도 알아들었다.“신무열 선생님, 감사합니다!”여자애는 알 듯 말 듯 하지만 립스틱과 기초화장품을 보배로 간주하였다.아름다움을 사랑하는 것은 인간의 천성이니까. 그리고 아이들은 선물을 받아서 기뻤다.“신무열 선생님, 오늘 밤에 우리 집에 가서 식사하실래요? 오늘 엄마가 약재를 팔아서 계란과 고기를 사온다고 했어요!”“선생님, 우리 집에 가요. 우리 집에 감자가 있어요!”“선생님, 우리 집에 고구마가 있어요!”“선생님, 우리 집에 과자가 있어요!”...아이들은 손을 들고 마치 정답을 맞히려는 듯이 왁자지껄 떠들썩하게 이야기했다.이 마을은 소년의 마을보다 훨씬 나았다. 비록 그들이 무슨 풍성한 식사를 준비한다는 얘기를 못 들었지만 적어도 배를 채울 수 있었다.소년의 그 마을과 달랐다...온지유는 무의식적으로 소년을 바라보니 소년은 주먹을 꽉 움켜잡았고 손등에 핏줄이 불거져 나왔다.소년은 내심 불평불만이 많았다.‘왜 우리 마을은 그렇게 힘들게 살았지? 왜 이 마을은 동맹군의 감시하에 있으면서 배를 채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공부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지? 법로를 안다는 신무열의 정체는 뭐지?’온지유는 그의 손을 잡고 한쪽으로 데려갔다. “상황이 명확하기 전에 경거망동하지 마. 나에게 간단한 Y국 언어를 가르쳐줘.”아이들은 신무
온지유는 소년의 팔을 잡아당겼다. 소년의 마을 사람들은 모두 법로의 부하들에 의해 몰살당하였는데 눈앞의 신무열은 법로와 관련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였다.온지유는 소년이 마음속의 원한을 억누르지 못하고 진실을 알기도 전에 미리 폭로할까 봐 두려웠다.그녀는 소년이 정신을 차리게 하기 위해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고 나서 이렇게 말하였다.“용건이 없으면 우리 먼저 갈게요.”신무열의 입장에서 그들은 모두 외래인이었다.지금은 아마 그들을 살펴보고 있을 것이다.원래 신무열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려고 찾아온 것인데 신무열에게 들킬 줄은 몰랐다. 이들은 먼저 돌아가서 대책을 생각해야 할 것 같다.신무열은 말없이 웃었으나 온지유의 말을 묵인하였다.그들이 떠나자 신무열은 두 사람을 불렀다.그는 Y국 언어로 그들에게 지시했다.“저 두 사람을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온지유와 소년은 그들이 구한 집의 마당에 들어섰다. 그리고 집주인이 말했던 그 방으로 들어갔다.“우린 그 사람에게 찍혔어.”신무열과 말할 때 온지유는 신무열의 표정과 떠보려는 말투를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신무열은 틀림없이 그들의 상황을 감시하는 사람을 보낼 것이다.소년은 주먹을 꽉 잡고 뒤어금니를 악물며 화를 냈다.“그럼 먼저 그 놈을 잡어서 법로의 행방을 물을 겁니다!”“이 집의 주인은 그냥 신무열은 법로와 아는 사이라고 했어. 법로의 곁에는 절대로 신무열만 있는 것이 아니야. 그러니까 무모한 짓을 하지 마.”지금 온지유의 심정은 매우 안정적이었다.마음이 급하면 되는 일이 없다고 한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우선 체력을 보존하고 상황을 잘 알아본 다음에 신호가 있는 곳을 찾아서 전화하면 된다.온지유의 말이 효과가 있는지 소년의 살기가 서서히 약해졌다.이에 온지유는 말했다.“이따가 집주인이 돌아오면 핸드폰 충전기를 찾을 수 있냐고 통역 좀 해줘.”“알았어요.”소년은 대답한 후 이렇게 말했다.“누나에게 간단한 Y국 언어를 가르쳐드릴게요. 하지만 지금부터 어디로 가든 반드시
“알겠어요, 그럼 내일 신무열 선생님 뵈러 갈 때 지유 씨도 같이 가요.”자신도 화국인이라는 온지유에 똑같이 화국 말을 쓰는 신무열 선생님과 만나게 해주는 것도 좋은 일인 것 같아 주인장은 별로 생각하지 않고 허락했다.그리고 온지유가 요리 얘기도 꺼냈는데 만약 그녀가 한 요리가 신무열의 입에 맞다면 그 또한 신무열에게 감사를 표하는 방법일 것 같았다.“고마워요.”Y 국 사람들의 음식이 입에 맞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낯선 곳에서 잘 지내려면 체력은 필수일 것 같아 온지유는 으깬 감자요리를 꾸역꾸역 먹었다.밥을 다 먹은 온지유는 침대도 없는 작은방으로 들어갔다.침대 대신 주인장이 가져다준 종이 판자에 몸을 뉘인 온지유는 홍혜주는 잘 지내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그때 찰리가 온지유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내일 나도 같이 가요.”비록 온지유와 주인장의 대화에서 찰리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찰리는 반드시 가야만 했다.가서 신무열을 지켜보다가 혹시나 이상한 낌새가 보인다면 바로 행동을 시작해야 했다.“내일 일 해야 할 수도 있는데 너 손 다쳤잖아.”“나 할 수 있어요!”“알았어, 그럼 일찍 자.”당차게 말하는 찰리에 온지유도 더는 말리지 못했다.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 그들의 방문을 두드려서 찰리가 빠르게 종이 판자를 걷어내고 문을 열어보니 주인장이 하얀색 충전기를 들고 서 있었다.“네가 필요하다던 충전기.”“고마워요.”찰리는 웃으며 충전기를 온지유에게 건네주었지만 온지유는 충전기와 입구가 맞지 않는 자신의 핸드폰을 보더니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이걸로는 충전 못 해.”“우리 쪽에는 이런 충전기밖에 없어요. 신무열한테는 아마 누나가 필요하다고 한 게 있을 거예요. 내일 가서 물어봐 봐요.”온지유의 실망을 눈치챈 찰리가 그녀를 달래듯 말하자 온지유도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부탁 좀 할게.”주인장이 떠나자 온지유는 찰리를 보며 물었다.“근데 넌 아직도 나한테 이름을 알려줄 생각이 없는 거니?”“내 이름은
그때 아이들 중 하나가 신무열을 발견하고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무열 쌤!”그 소리에 따라 온지유도 고개를 움직이자 검은색 셔츠의 윗단추는 두 개는 풀어헤치고 옷소매는 걷어 올린 신무열이 보였다.햇빛 아래에 서 있던 신무열은 한 손은 주머니에 꽂아 넣고 다른 손엔 책 몇 권을 들고 있었다.금색 뿔테 안경 안의 검은 눈동자는 보일까말까 했는데 입가에 걸린 옅은 미소만은 선명히 보였다.그러자 신무열을 발견한 다른 아이들도 덩달아 그의 이름을 외치며 말하기 시작했다.“선생님, 이 사람이 이 글자도 읽을 줄 몰라요! 선생님이 저번에 ‘조’라고 말씀하셨잖아요!”“선생님, 우린 선생님 말만 믿어요!”“이 사람은 누구예요 선생님? 모르는 사람인데!”...아이들이 연달아 소리를 지르며 온지유에게 좋지 않은 시선을 보내왔고 그중의 하나는 온지유에게 돌을 던지기까지 했다.다행히 순발력이 좋은 온지유가 바로 피하기는 했지만 그 돌은 달려오느라 미처 피하지 못했던 신무열의 허벅지에 부딪혀버렸다.그에 신무열은 표정을 굳히고 아이를 보며 말했다.“케빈, 내가 평소에 어떻게 가르쳤지?”케빈이라 불린 아이는 고개를 숙이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다른 사람한텐 친절해야 하고 무력으로 일을 해결하려 하면 안 된다고 가르쳤어요...”신무열은 이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당지의 다른 이들에게도 아주 큰 가르침을 주고 있었다.그래서 찰리와 온지유도 그를 보러 여기까지 오게 된 건데 찰리는 Y 국 사람이라 더 오고 싶었던 것 같았다.그때 케빈은 Y 국 말을 쓰며 불만 섞인 소리를 했다.“하지만 저희의 선생님은 무열 쌤 한 분 뿐인데 저 여자가 뭔데 우릴 가르쳐요?”전에 찰리가 간단한 대화나 예의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되라고 온지유에게 Y 국 말을 조금 가르쳐준 적이 있었는데 방금 케빈의 원망스러운 눈빛을 보고 나니 그가 한 말도 자연스럽게 들리는 것 같았다.어젯밤에 혼자 연구한 보람이 있는 것 같았다.온지유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신무열은 표정을
신무열은 곧바로 온지유 옆에 걸터앉으며 챙겨온 치즈케이크를 건넸지만 온지유는 그걸 받지 않고 말했다.“애들이 방금 사과했어요.”“저 때문에 억지로 한 사과죠, 아까 바로 피하지 않으셨으면 돌에도 맞을 뻔했잖아요.”신무열은 계속 온지유의 옆에서 떠나지 않고 말을 걸었다.“근데 그러고 보니까 이름도 모르네요.”“... 온지유예요.”신무열의 집요한 시선을 느낀 온지유가 잠시 고민하다가 이름을 알려주었다.법로의 사람이 저를 찾고 있는데 제 한 몸 희생해서 무언가 좋은 쪽으로 발전할 수만 있다면 이름을 숨기는 것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그러자 신무열이 또 옅은 미소를 띠며 물어왔다.“어느 ‘유’자예요?”“기유 ‘유’자요.”신무열은 담담하게 대꾸하는 온지유의 손에 치즈케이크를 쥐여주며 또 입을 열었다.“여긴 환경도 별로 좋지 않은데, 어쩌다 여기까지 왔어요?”“아까 보니까 Y 국 말을 할 줄도 알고 듣기도 하는 것 같던데요?”신무열의 목소리는 차분하기 그지없었지만 온지유는 그가 저를 시험하는 걸 알아채고는 웃으며 말했다.“누구한테 팔려온 거예요. 그리고 말은 그냥 건너건너 조금 배운 거고요.”그 순간 갑자기 불어오는 바람에 온지유의 머리카락이 이마에 붙어버리자 온지유는 손을 들어 머리를 뒤로 넘겼다.그때 그녀가 하고 있던 비취 팔찌가 다시 한번 드러났고 햇빛 때문인지 더 반짝반짝 빛을 냈다.그걸 빤히 보고 있던 신무열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애들이 저를 무열 쌤이라고 부르는 건 들으셨죠? 저는 신무열이라고 합니다.”“제가 잠시 이곳을 떠나야 할 일이 생겨서 그동안 지유 씨가 애들 화국어 가르쳐주셔도 돼요. 월급은 화국 표준으로 책정해드릴게요. 그리고 혹시 뭐 필요한 거 있으시면 저한테 다 말씀하시면 되고요.”하지만 온지유는 직감적으로 신무열은 그냥 그의 가짜 이름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신무열도 별로 좋은 사람 같진 않았지만 법로가 나쁜 사람인 건 확실했기에 온지유는 티를 내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아까 보셨잖
신무열도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그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충전기를 챙겨 들었다.하지만 바로 가져다주지는 않고 그냥 보고만 있었는데 그때 갑자기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발신자를 본 신무열은 차가운 표정으로 전화를 받았다.수화기 너머에서는 신무열과는 전혀 다른 온도의 여성이 다정하게 말을 건네왔다.“오빠, 언제 와요?”“당분간 못가.”전화를 받는 신무열은 아까 아이들과 온지유를 대할 때의 그 신사답고 다정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쌀쌀맞은 신무열의 말에 수화기 너머의 여자는 잠시동안 정적을 유지하다가 다시 기대에 찬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오빠, 그럼 오기 전에 나한테 전화하거나 사람 시켜서 연락이라도 줘요.”“응, 난 바빠서 먼저 끊을게.”말을 마친 신무열이 전화를 끊어버리자 여자는 “뚜뚜” 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전화를 이렇게 빨리 끊은 신무열을 탓하기라도 하듯 화난 표정을 지어 보였다.아무래도 다정하지 않은 신무열이 불만이었던 것 같다....온지유는 찰리에 의해 바닥에 떨어진 케이크를 한번 보고 나서 찰리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다시 케이크를 주워 먼지를 털어내며 기분 나쁜 듯 말했다.“내가 몇 번이나 말했는데 넌 아직도 이렇게 욱하는구나.”온지유도 짜증이라는 게 있는 사람이기에 계속해서 제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하는 찰리를 보며 협업은 이쯤 해야 하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그럼 내가 누나처럼 행동했어야 해요? 그래요, 신무열이라는 사람 괜찮아 보여요, 누나랑 말도 잘 통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럼 둘이 여기서 같이 교사나 해요, 아주 잘 되겠네.”이를 악물며 말하는 찰리의 눈에는 그동안 참았던 원한에 대한 분노가 가득 서려 있었다.온지유는 찰리가 자신을 밀치며 뱀을 던지던 것도, 또 시골 주민들이 떼 죽임을 당할 때 보여줬던 그 강인하던 눈빛도 전부 다 기억하고 있었다.복수심은 정말 한 사람을 집어삼킬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지만 그래도 사람이라면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하는 법이다.참을 줄도 알아야 하
은서우가 뭐라 답하기도 전에 인명진은 이미 돌아서서 갈 길을 가고 있었다.비록 인명진이 병원의 원장이었지만 은서우는 회의 시간을 제외하고는 그를 본 적이 거의 없었다.오늘 처음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하는 것이었다.그는 수술용 멸균복을 입고 마스크와 모자를 착용하고 있었다.얼굴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깊고 차가운 그의 검은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수술 내내 상황이 아무리 긴박해도 인명진은 전혀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고 그의 침착함과 냉정함은 뛰어난 실력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은서우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이제야 왜 병원의 많은 여성 간호사, 인턴, 심지어 여의사들까지도 그에게 열광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은서우는 가볍게 몸을 풀며 수술실을 나왔다.막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한 동료가 그녀를 찾아왔다.가슴에 걸린 명찰을 보고 은서우는 상대가 인턴임을 알았다.은서우는 예의 바르게 물었다.“안녕하세요. 무슨 일이시죠?”“은 선생님, 방금 원장님과 함께 수술을 마치셨죠?”인턴의 질문에 은서우는 약간 의아했다.“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인턴은 자신의 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은 선생님, 저 좀 도와주세요. 원장님 카톡 좀 추가해서 저한테 넘겨주시거나 아니면 원장님 사진 몰래 몇 장만 찍어 주세요. 제가 이만큼 드릴게요.”인턴의 눈에는 기대감이 가득 차 있었다.은서우는 인턴의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제가 원장님 연락처를 넘긴다고 해도 원장님 입장에서는 그냥 낯선 사람일 뿐일 텐데 원장님이 연락 받아줄 것 같아요? 그리고 몰래 사진 찍는 건 불법인 거 모르나요? 고작 그 정도 푼돈으로 저를 이런 큰일에 끌어들이겠다고요? 당신이 미친 걸까요? 아니면 제가 미친 걸까요?”은서우는 거침없이 인턴을 몰아붙였다.인턴이 급히 덧붙였다.“아니에요, 은 선생님. 도와주시기만 하면 백만 원 아니 천만 원도 문제없어요.”‘천만 원에 사진 몇 장과 연락처? 저 인턴 진짜 제정신이 아니네.’은서우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이명진은 병원에서 만약 어떤 의료 사고라도 발생한다면 이 병원의 명성은 그대로 무너질 것으로 생각했다.그의 말에 한 간호사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대답했다.“원장님, 병원 내부 번호와 원장님 개인번호 모두 통화 중이셨어요. 원장님 인기가 지금 장난 아닌 걸 모르시는 건 아니시죠?”문 앞에 대기 중인 인턴들로도 모자라 소문 듣고 연락이 오는 환자도 있었고 학생들도 있고 심지어 부잣집 부인들도 어디서 개인번호를 얻었는지 매일 전화를 걸어 이명진의 전화는 항상 통화 중 상태였다.긴급 상황만 아니라면 인명진이 직접 나설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인명진은 간호사의 필요 없는 말을 들을 시간도 없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그가 문을 열자 밖에서 있던 인턴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했다.“진짜 너무 멋있고 젊잖아. 이렇게 젊으신데 원장 선생님이라고?”“너무 잘생겼어. 여자 친구도 없다 그러던데.”“많은 수술도 직접 하신대. 그리고 학술논문도 봐주고 기타 강의도 하신다고 들었어.”“이렇게 훌륭한 사람 품에 안겨있는 느낌은 어떤지 상상도 안 가.”그들은 미친 사람처럼 저마다 한마디씩 주고받고 있었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인명진에게 달려들어 길을 막고 있었다.“인 원장님, 저랑 사귀시면 이런 병원 몇 개라도 더 해줄 수 있어요. 당신을 경성의 의료센터에서 우두머리로 만들어 드릴게요.”“인 원장님, 저 사람 말 믿지 마세요. 저랑 사귀시면 더 많은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드릴게요.”“인 원장님, 저랑...”“다들 꺼져!”인명진은 평소에 이 사람들에게 무관심이었지만 지금은 급한 수술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한 간호사가 데리고 온 경호원들도 그녀들을 막을 수가 없었지만 항상 따뜻하고 우아하고 부드러운 말만 할 거로 생각했던 인턴들은 인명진의 화내는 소리 한 번에 더 이상 앞으로 다가서지 못했고 자리를 피해 길을 열어 주었다.인명진은 재빨리 수술용 무균복으로 갈아입고 소독한 후 바로 수술실로 들어갔다.수술실 안에서는 피비린내가 진동했
온지유는 그의 앞에 다가서며 말했다.“이건 한 사람의 인생이 걸린 문제인데 어떻게 생각할 겨를도 없을 수 있어요? 병원의 간호사나 의사들도 휴가가 있던데 명진 씨는 쉴 새 없이 돌아가는 기계에요? 당신 생각도 잘 알아요. 아이를 입양할 생각도 괜찮지만 그래도 결국 친자식은 아니잖아요.. 그런 생각할 에너지가 있으면 친자식을 낳으면 되잖아요.”지금은 좋은 마음으로 입양했다 하여도 커서 입양한 자녀들 간의 모순으로 불행하게 된 사람들도 너무 많아서 온지유의 걱정이 틀리진 않았다.인명진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그런 말은 왜 해. 너의 아이가 둘씩이나 있는데 내가 왜 다른 아이를 입양할 생각 하겠어? 법로가 나한테 너하고 별이를 잘 지켜달라고 부탁한 것도 있고 또 별이가 나중에 크면 이 삼촌이 외롭고 의지할 곳이 없는 것을 알고 그냥 내버려두진 않을 거잖아. 그때가 서 별이가 날 너희 별장으로 데리고 가면 우린 또 한 지붕 아래에서 살 수 있고 내가 곁에서 지켜줄 수 있잖아.”온지유는 인명진의 이런 생각에 너무 어이없어하며 말했다.“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어요? 우리 아버지가 어떤 임무를 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분명하게 알아둬야 할 것은 명진 씨 옆에는 반드시 돌봐줄 사람이 있어야 해요.”온지유는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집에 돌아오자마자 인명진의 자료를 만들었고 바로 소개팅 사이트에 올리려고 했지만 그 순간 망설이게 되었다.분명 좋은 마음으로 하는 건데 혹시나 인명진이 원하지 않으면 되려 부담이라도 될가봐 다시 자료들을 쓰레기통에 버려 버렸다.그때 여이현은 집에 돌아와 얼굴에 걱정이 가득한 온지유를 보며 말했다.“왜 그래? 요즘 항상 기분이 다운되어 있던데, 무슨 일 있는 거야?”온지유는 있는 그대로 털어 놓았다.“인명진 씨 땜에 그래. 우리 주변 사람들은 다 각자의 삶을 안정적으로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인명진 씨는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냥 혼자 살고 있잖아. 금방 그의 자료를 만들어 소개팅 사이트에 올리려 했
양시은은 더 이상 나도현에게 빌붙어 사는 작은 변호사가 아니었고 심지어 임다혜와의 앙금도 풀고 둘은 좋은 친구로 지내고 있었다.김혜연 쪽은 모든 것이 안정적이었다.온지유는 여름방학에 윤별을 데리고 Y 국으로 갈 계획이었고 인명진도 직접 나설 예정이었다.온지유의 곁에 있는 사람들은 다들 결혼도 하고 홍혜주는 출산도 앞두고 있었고 양시은과 나도현도 이젠 너무 행복하게 살고 있었지만 인명진만 미혼에 아직도 혼자였다.여이현은 여희영이 만난 남자를 처음엔 좋게 보지 않았지만 그 남자가 목숨을 걸고 사랑하는 것을 증명하자 안심되었다.심지어 나민우도 지난달 쌍둥이 아들을 낳았다고 연락이 왔고 결국 이제 남은 건 인명진뿐이었다.옆에서 자신을 지켜주고 많이 도와준 인명진을 가족으로 생각한 온지유는 그의 앞날이 걱정되어 하지 않으려던 말을 참지 못하고 내뱉고 말았다.“명진 씨, 제 주변을 돌아보면 다들 자기 행복 찾아 잘 살고 있는데 명진 씨도 이젠 그럴 때가 된 거 같아요. 명진 씨처럼 훌륭한 남자가 본인만 원한다면 좋은 사람은 많을 거잖아요.”인명진은 온지유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잘 알고 있었다.전에 여이현이 죽었다고 생각한 5년 동안은 인명진에게 가장 좋은 기회였지만 그가 아무리 노력해도 온지유의 마음을 얻지 못했고 그 뒤로 인명진은 뒤에서 지켜주는 것도 행복이라고 생각하며 항상 온지유의 그림자가 되어주었다.“난 지금 충분히 행복해. 네가 무슨 일이 있다고 하면 바로 나설 수 있어 좋고 더욱이 법로가 떠나시면서 옆에서 너를 잘 지켜주라고 특별히 당부하셨어.”“하지만 저는 명진 씨 인생의 전부가 아니잖아요. 명진 씨도 자신을 위한 인생을 사셔야죠. 홍혜주 씨도 출산을 앞두고 있다는데 이젠 정말 명진 씨만 남았어요. 그러면...”온지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인명진은 말을 끊고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인류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기 위해 사는 건 아니잖아. 율아, 난 지금 충분히 행복하게 살고 있어.”인명진은 항상 온지유가 행복하
현민아는 엉엉 울면서 말했다.“그건 내가 준 예물인데 나한테서 뺏어가려 하지 마요. 신용을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아빠가 말했잖아요. 근데... 아빠는 사기꾼이야.”현민아의 끝없는 투정 부림에 현민아의 아버지도 어쩔 수가 없었다.집 계약서도 돌려받았고 사람들 앞에서 더 이상 망신을 당하고 싶지 않은 현민아의 아버지는 현민아가 원하든 하지 않든 일단 둘러메고 집으로 들어갔다.양시은은 옆에 서 있는 하민이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너희들은 아직 어려서 아무것도 모르고 하는 말이니 이런 일로 어떤 스트레스도 받으면 안 돼. 유치원에서도 일부러 남을 냉정하게 대해서도 안 돼, 알았지?”“알겠어요.”하민은 양시은을 따라 집으로 돌아왔고 사건의 자초지종을 들은 최정숙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우리 귀염둥이 손자가 유치원에서 이렇게 인기가 있는 줄은 몰랐네.”그러고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말했다.“집 계약서 8권이면 재산도 적지 않은데 어려서부터 알고 지내는 것도 나쁘진 않은 거 같은데?”양시은은 최정숙이 이런 생각까지 할 줄은 몰랐다.“요즘 애들이 뭘 알겠어요. 애들끼리 뭔 생각을 못 하겠어요.”“엄마, 왜 어릴 때부터 그런 일을 만들어요. 아직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거에 정말 탄복해요. 집 계약서 8권이 뭐가 대단하다고, 우리 하민이랑 비기면 턱도 없는걸요. 그 여자아이는 단지 의도하지 않은 행동을 했을 뿐이에요.”지금 좋아한다고 해도 아직도 이십여 년이나 남았는데 사람의 마음은 당연히 변할 것으로 생각한 나도현은 아들이 어릴 때부터 혼약을 맺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그와 같이 직접 경험한 사람에게는 이런 일은 귀찮다고만 생각되었다.최정숙은 나도현의 말에 변명하며 말했다.“그냥 그럴 수도 있다는 거지 그렇게 하라고는 안 했잖아? 뭐가 그렇게 안 달아 할 지경이니?”“그럴 만도 했잖아요. 전에 저도 엄마가 벌려놓은 이런 일 때문에 편하게 지내지도 못했는데 제 아들까지 그렇게 할 수는 없죠.”나도현의 말에는 토하나라도
“제가 어제 집에 돌아와 하민이의 가방을 열어보니 이런 집 계약서들이 있었어요. 현민아가 가방에 집어넣었나 봐요.”알고 보니 하민이가 잘생겼다고 오랫동안 지켜본 현민아는 그와 친구가 되고 싶었지만 하민이가 평소에 말을 잘 안 한 것 땜에 삼촌한테 고민을 털어놓았었고 그런 행동이 귀여웠던 삼촌은 조롱하는 식으로 현민아에게 친구보다 결혼이 좋은 거라고 말해줬는데 그 말에 현민아가 몰래 집 계약서들을 학교에 가져가 예물이라면서 하민이의 가방에 넣어 준 것이었다.현민아의 아버지는 말을 듣고 더욱 난처해졌다.“우리 꼬마 아가씨, 넌 아직 어려서 예물이라는 것이 뭔지 몰라. 다음부터는 남의 책가방에 물건을 함부로 넣으면 안 돼.”현민아는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근데 난 하민이랑 친구 하고 싶단 말이에요. 친구가 되고 싶으면 뭐라도 보여줘야 내 마음이 진심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잖아요.”옆에서 듣고 있던 양시은도 현민아의 진지한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현민아의 아버지는 미안해하며 말했다.“하민 어머님, 정말 죄송합니다. 우리 민아가 어디서 어떤 말을 듣고 저런 행동까지 했는지 모르겠어요. 마음에 두시지 말았으면 좋겠어요.”“현민아 아버님, 여기 집 현민아가 넣어 둔 계약서들입니다. 맞는지 한번 확인해 보세요.”현민아의 아버지가 계약서를 확인하자 현민아는 기분 나빠하며 말했다.“전 돌려받기 싫어요. 아빠가 말했었잖아요. 이미 준 것은 곧 엎질러진 물이랑 같아 주워 담을 수 없다면서요. 그럼 책임을 져야잖아요. 이 물건들은 제가 이미 하민한테 줬고 하민이도 받아들이고 집에 가져갔으니 앞으로 제 사람이 될 건데 이렇게 다시 제가 준 예물을 회수하면 앞으로 저보고 어떻게 하민이랑 잘 지내라는 거예요? 아빠가 이렇게 하면 하민이 한테는 제가 신용이 없는 사람이 되잖아요.”현민아는 끊임없이 몸부림치며 울어댔다.요즘 아이들은 응석받이로 자라서 고집을 부리면 누구도 말릴 수 없어 현민아 아버지와 양시은도 현민아를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다만 양시은이 예상치 못했던
“어젯밤에 집에 도착했는데 네가 없길래 전화하려고 하자 마침 여이현 씨가 널 데려다주셨어.”나도현은 어제 마음이 심란하여 술을 많이 마신 게 분명했다.“여기 비타민이라도 좀 먹어.”양시은은 나도현이 깨어나기 전에 모든 것을 준비해 두었고 비타민 한 알을 건네주었다.나도현도 어제 양시은과 잘 소통하기 위해 많은 생각을 했고 심지어 양시은이 너무 바쁜 탓에 돌아오지 못하면 그녀가 간 도시를 찾으러 가려고 생각했지만 뜻밖에도 출장에서 돌아와 지금 옆에 있는 양시은을 보며 쓰디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시은아, 넌 이러는 내가 싫지?”“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넌 하나뿐인 내 남편인데 왜 싫겠어. 그리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 아직도 내 마음을 모르는 거야?”양시은은 항상 아이가 평안하고 나도현이 건강하고 그렇게 그들 세 식구가 행복하고 즐겁게 사는 것으로 매우 소박한 소원을 품고 지내왔다.“하지만 나...”“어제 여이현 씨가 널 데려왔을 때 나한테 둘이 잘 소통해 보라고 하길래 네가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지 예측했어. 혹시라도 다른 사람이 생겼다고 널 버릴까 봐 그러는 거지?”양시은은 나도현의 옆에 앉아 깊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녀는 나도현이 이렇게 불안해하는 것이 심리 건강에도 안 좋다고 생각되어 자신의 진심을 확실하게 말해주기로 했다.양시은의 말을 아니라고 부정하지 못한 나도현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하지만 전날 술자리에서 여이현과 배진호가 양시은의 우수함을 부정하지 말고 더욱이 양시은의 앞길을 가로막지 말라고 한 말이 생각나 머리를 숙이고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내 생각이 좀 많이 유치했던 것 같아.”“아니야, 날 사랑하는 표현이라는 거 잘 알아. 만약 내가 너라면 너보다 더 했을지도 몰라. 나도현, 내가 너에 대한 사랑을 의심하지 마. 지금 하고 있는 사업도 네가 옆에서 많은 도움을 줘서 여기까지 온 거잖아.”양시은이 진지한 표정으로 나도현의 두 손을 잡고 말하자 그는 더 부끄러워졌다.나도현의 도움과 격려하
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커갔고 착하게 자란 윤별은 초등학교에 간 지 며칠 되지 않아 선생님께 칭찬을 받았으며 여이현도 매우 기뻐했다.하지만 윤별은 항상 외할아버지를 기억하고 있었고 심지어 작은 빨간 꽃을 만들어 외할아버지가 있던 방에 붙여놨다.온지유는 윤별의 행동을 눈치채고 바로 다가가서 위로해 주며 말했다.“별아, 너무 슬퍼하지 마. 외할아버지는 지금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셔서 우리를 보고 계실 꺼야. 그리고 내년이면 외숙모 집에서 별이 남동생과 여동생도 태어날 거야.”“그런데요 엄마, 외할아버지께서 제가 1학년이 되어 글자를 배우면 공부를 가르쳐 주신다고 약속했어요. 그리고 외할아버지께서 또...”윤별은 말하다가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전에 윤별이가 브람을 따라갔을 때 브람은 매우 엄하게 대했지만, 온경준이 경성에 데려다 키우는 동안은 윤별에게 끝없는 사랑을 주면서 모든 것을 만족시켜 주었다.그리고 윤별의 몸이 허약하니 온경준은 옆에서 정성껏 보살펴 주었고 쓴 약도 잘 먹게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달래여 먹이면서 많은 추억을 쌓아 주었다.그때 윤별은 온경준에게 물었었다.“할아버지는 할아버지 집에 가고 싶지 않아요?”온경준의 집은 Y 국이었고 윤별의 말에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해 주었다.“별이랑 엄마가 어디에 있으면 할아버지 집은 거기에 있는 거야. 할아버지는 예전에 많은 잘못을 했고 그렇게 되어 너희 엄마와 오랫동안 떨어져 지냈었어. 이제 겨우 같이 살게 되였는데 할아버지가 어찌 Y 국에 다시 돌아가고 싶겠어? 게다가 이쪽에 오래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온경준은 그때 윤별이랑 함께 많은 수공예도 했고 병아리도 기르고 꽃을 심고 풀도 심었지만, 지금은 반 친구들 외에 하민 동생이 놀러 오고 평소에 윤별은 항상 혼자였다.온지유는 윤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부드럽게 말했다.“외할아버지는 그저 우리보다 먼저 다른 세계로 가신 거야. 모든 사람이 이 세상에 오면 사명이라는 걸 가지고 와. 그리하여 사람은 언젠가 죽을 것이고 앞으로 때가
여이현이 추천해 주겠다는 의사는 인명진이었다.인명진의 능력은 상당히 좋았다.당시 그와 지석훈이 하민에게 수술을 해주지 않았더라면 하민은 지금처럼 이렇게 빨리 낫지 않았을 것이다.“난 병이 없거든.”나도현이 자신의 심병을 인정하지 않자 여이현은 낮은 소리로 말했다.“지난 4년 동안 치료해 온 걸 아니까 너의 이런 심리는 이해는 할 수 있어. 근데 넌 배 비서가 말했듯이 양시은 씨의 우수함을 부정하면 안 돼. 그녀도 본인이 하고 싶은 일도 있을 텐데 네 옆에만 가둬 두고 있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게다가 네가 뭐 사랑을 강제로 시키는 대표도 아니고 결혼한 지 얼마 안 됐는데 이런 사소한 일로 다투지 마.”나도현은 여이현의 말을 다 알아들었지만 자신의 답답하고 복잡한 이 심정은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었다.그는 양시은이 모두에게 존중받는 것도 원하고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앞에서만 이뻤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마시다 보니 나도현은 술에 잔뜩 취해 있었다.양시은은 오늘 저녁에야 출장에서 돌아왔고 여이현이 만취한 나도현을 데려온 것을 보고 그녀는 갑자기 마음이 아팠다.“여이현 씨, 저의 남편 데려다줘서 고마워요.”“별말씀을요. 둘이 잘 소통해 봐요.”여이현의 한마디에 양시은은 바로 눈치채고 나도현이 열일곱 살 난 아이 같아 유치하다고 생각하며 웃음을 터뜨렸다.양시은은 도우미를 불러 나도현을 위층으로 옮기고 침대에 눕혀 신발을 벗기고 넥타이를 풀어줬다.금방 출장 다녀온 탓에 힘들었지만 인내성 있게 나도현을 돌보았고 혹시라도 토할까봐 곁에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그런데 뜻밖에도 나도현은 갑자기 양시은을 품에 안더니 그녀에게 입을 맞추며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양시은, 나 정말 널 너무 사랑해. 그래서 또 잃을까 봐 두려워.”“너의 마음을 나도 다 알고 있어.”“니가 너무 우수해서 다른 사람들이 눈여겨볼까 봐 겁이 나, 그리고...”양시은은 그의 등을 토닥여주며 말했다.“바보야, 너는 내가 인생에서 유일하게 사랑하는 남자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