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갖고 있어요. 호신용이에요.”홍혜주는 온지유가 망설이는 것을 보고는 거침없이 손에 들고 있던 것을 온지유의 손에 쥐여주었다.차가운 검은색 금속.온지유는 이 물건을 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주로 TV에서나 봤고 흉터남이 자신과 노승아를 납치했을 때도 본 적 있었다. 그 외에 여이현 주변의 성재민이나 용경호 같은 사람들은 항상 이 물건을 온지유 앞에서 멀리했었다.“전 다룰 줄 몰라요.”온지유는 손안에 들린 그 물건이 천근만근으로 느껴졌다.온지유는 이걸 사용해 본 적이 없었다. 잘못해서 발사되면 누군가 다칠 수도 있었다.홍혜주는 온지유의 우려를 알고 있었다.하지만 지금 그들이 있는 곳은 예전의 안전한 땅이 아니었다. 몸에 호신용 무기가 없으면 현지 주민들이나 폭력 조직이 눈독을 들이게 된다.그럼 그들은 그저 도마 위에 올려진 고기 신세가 될 뿐이었다.“다룰 줄 몰라도 가지고는 있어야 해요. Y국에 도착해서 자리를 잡으면 가르쳐 줄게요.”“그러면 언니가...”온지유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홍혜주는 그녀의 말을 끊었다.“이건 지유 씨가 갖고 있어요. 찾아온 것 중에서 가장 작은 거예요.”“알겠어요.”온지유는 어쩔 수 없이 물건을 받아 들었다.대화가 끝난 후 온지유는 방금 전화로 알아낸 위치에 관한 이야기를 홍혜주에게 전했다.홍혜주는 잠시 생각한 후 말했다.“절대 직접 가지는 마세요. 나도 지유 씨를 두고 혼자 가서 휴대전화를 가져올 수는 없어요. 다른 사람을 보내서 대신 찾아오게 해야겠어요.”홍혜주의 말은 옳았다. 이곳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은 위험했다. 타국에서 홍혜주는 달리 온지유의 안전을 맡길 사람이 없었다.“그래요.”온지유는 홍혜주의 판단에 동의했다.이윽고 그들은 호텔을 떠나기로 했다.Y국으로 가려면 차를 타야 했다. 홍혜주는 미리 차를 준비해 두었다. 그들이 호텔 로비에 도착하면 차가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을 예정이었다.그러나 차가 도착하기도 전에 둘은 한 무리의 아이들에게 둘러싸였다.아이들은 키가 작았고 옷도 제
지역의 일부 사람들은 외국인 관광객을 노려 선심을 이용해 음식이나 돈, 물건을 요구했다. 심지어 일부 과격한 난민들은 관광객을 외딴곳으로 유인한 뒤 기절시켜 장기를 빼내 팔기도 했다.온지유는 이곳에 오기 전에 Y국에 대한 조사를 철저히 했었다. Y국 주변의 작은 나라들은 모두 경제적으로 빈곤했다.지속되는 전쟁으로 인해 난민과 가난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사실도 온지유는 잘 알고 있었다.지금껏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지 못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눈앞에 놓인 살아있는 생명을 마주하고 나니 온지유는 그들을 모른 척할 수 없었다.보육원에서 자선 활동을 할 때도 국적 상관없이 도움을 줬었다. 이 아이들이 국내 아이들이 아니라고 해서 도와주지 말아야 할 도리는 없었다.온지유는 성녀가 될 마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아이들이 너무 어리고 불쌍했기 때문이었다.“알아요. 우리도 가지고 온 옷과 음식이 많지 않다는걸요.”온지유는 입술을 꽉 깨물고 홍혜주에게 눈빛을 보냈다.홍혜주는 온지유의 뜻을 이해했다.아이들이 음식을 서로 빼앗을까 봐 홍혜주는 차고 있던 총을 손에 들었다.그러자 아이들은 놀란 듯 순식간에 뿔뿔이 도망쳤다.온지유는 아이들이 마치 놀란 새처럼 흩어지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차는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다.멀리서 조심스레 지켜보는 다 벗은 아이들의 모습이 계속해서 온지유의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온지유는 그 아이들을 그저 방관할 수 없었다.홍혜주는 이미 음식과 옷을 꺼내 놓았고 온지유는 그녀에게 다시 눈짓을 했다.홍혜주는 바로 율리와 함께 온지유를 따라갔다. 율리는 아이들에게 통역해 주었다.“이건 먹을 거고 이 옷들은 여자아이들이 입어. 옷을 빨리 새 걸로 갈아입으렴. 하지만 줄 수 있는 건 이것뿐이야. 더는 도와줄 수 없어.”홍혜주가 총을 들고 있는 덕분에 아이들은 질서를 유지했다.하지만 음식을 받자마자 아이들은 방금 전의 일은 다 잊은 듯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그중 한 아이는 너무 급하게 먹다가 목이 막혀 얼굴이 빨갛게
군용 트럭이 다가오자 여인은 순간적으로 모든 행동을 멈췄다.온지유는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았다.멍하니 군용 트억이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며 머릿속에서 여이현의 얼굴을 그렸다. 차에서 나오는 사람이 여이현이기를, 여기서 바로 만날 수 있기를 바랐다.그러나 소망과는 달리 차에서 내린 사람은 몇몇의 낯선 얼굴을 한 구릿빛 피부의 군인들이었다.그들은 외국군이었다.여인은 그들을 보자마자 구세주를 만난 듯 아이를 안고는 손을 휘저으며 모든 책임을 온지유에게 돌렸다.곧 군인들은 온지유에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커다란 몸집은 마치 산처럼 압도적이었고 반면 온지유는 그들 앞에서 매우 작아 보였다.“무기를 갖고 있나?”그중 한 남자가 어설픈 화국어로 말했다.“갖고 있지만 누구도 해치지 않았어요. 저 여자의 아이는 제가 준 빵을 먹다가 목이 막혔을 뿐입니다. 저는 아이를 해치지 않았어요. 저 아이를 살리고 싶다면 막지 마세요.”온지유는 침착하게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며 말했다.그저 가여운 아이를 구하려고 했을 뿐인데 그 여인의 눈에서는 살기가 뿜어 나오고 있었다.아이들이 잘 먹고 옷도 다 갈아입으면 홍혜주에게 돈을 얼마 정도 바꿔오라고 할 예정이었다.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이 싹 가시고 말았다.좋은 마음씨를 갖고 있더라도 지나친 관심은 불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여인은 아이를 더 꽉 끌어안았다.그리고 온지유를 손가락질하며 말했다.“저 여자는 우리를 실험 대상으로 삼으려는 거예요. 그래서 내 아이가 이렇게 고통받는 거예요! 저건 악마예요!”여인의 말을 율리는 온지유의 뒤에서 실시간으로 통역해 주었다.온지유는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이곳에서 총기를 소지하는 것이 불법이라고 들은 적은 없습니다. 그리고 난 그 누구도 해치지 않았어요. 아이는 단지 목이 막힌 것뿐이에요. 그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도 결과는 같을 겁니다. 저희가 돕겠다는데도 이렇게 말한다면...”“굳이 도와줄 필요는 없겠네요.”율리는 눈치 빠르게 그 말을 그대로 통역해 주
여인은 아직도 대화를 시도하고 있었다...온지유도 한때 임신을 했었고 비록 시간은 짧았지만 어머니와 자식 사이의 연결고리는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었다.이 여인 역시 아이를 지키기 위해 그렇게 거세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아이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다.결국 온지유는 외면할 수 없어 아이를 안고 하임리히 응급처치법을 사용했다.처음에는 아무런 반응도 없던 아이가 갑자기 심하게 기침을 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목을 막고 있던 빵 조각이 튀어나왔다.여인의 눈에는 기쁨의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그녀는 온지유를 향해 두 손을 모으며 연신 말했다.“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온지유는 그녀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전해지는 마음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아이를 위해서일 뿐이에요.”온지유가 차분하게 말하자 율리가 곧바로 통역을 해주었다.하지만 온지유는 자신이 이런 간단한 응급처치를 했다는 이유로 군인들의 눈에 들 줄은 몰랐다.군인들은 급히 다가와 온지유를 둘러싸더니 말했다.“우리와 함께 가야겠소.”방금 전 어설픈 화국어로 말하던 군인이 말했다.“안 돼요! 당신들은 데려갈 수 없어요!”홍혜주가 온지유 앞을 막아서며 소리쳤다. 방금 아이를 안고 있던 여인도 온지유의 앞에 막아섰다.온지유가 도와주었던 아이들까지 앞에 뭉쳐서 막았다.“율리! 통역해 줘요!”홍혜주가 외치자 율리는 곧바로 그녀의 말을 통역하기 시작했다.“우리는 경성에서 온 사람들이고 우리 뒤에는 나라가 뒷받침해주고 있어요. 당신들이 강제로 데려가려 한다면 대사관에 보고를 할겁니다. 우리는 공직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무슨 일이 생기면 당신들도 무사하지 못할 거예요!”군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서로를 바라보았다.그리고 온지유와 홍혜주의 얼굴을 주의 깊게 살펴보더니 결국 합의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차에 올라 떠났다.하지만 온지유는 그들에게 이미 표적으로 되어있었다.홍혜주는 그들이 떠나자마자 전화를 걸어 기사를 재촉했다.약속했던 차는 아직도 오지 않았고 더 이상 도
차는 조금 전의 군용 트럭이 아닌 한 오프로드 차량이었다.차량 전체가 흙먼지로 뒤덮여 있었고 앞부분은 심하게 부딪혔는지 움푹 들어가 있었다.문이 열리자 용경호가 먼저 차에서 내렸다. 그는 뒷좌석으로 가 문을 열며 말했다.“대장님, K국에 도착했습니다. 호텔을 예약해 뒀으니 먼저 쉬고 계세요. 주소를 보내 이쪽으로 합류 시키겠습니다.”“그래.”여이현이 거의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일어나서 차에서 내리려는 그의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이를 본 용경호가 재빨리 손을 뻗어 그를 부축했다.여이현은 용경호의 부축을 받으며 차에서 내렸다.햇빛 아래에서 그의 얼굴은 거의 백지장에 가까웠고 얼굴에 드러난 혈관이 뚜렷하게 보일 정도였다.성재민은 먼저 차를 제대로 된 곳에 주차했다.그리고 먼저 나간 그들을 따라잡았다.용경호는 프런트 데스크에서 방 카드를 전해 받고, 이에 성재민이 말을 걸었다.“가서 먹거리와 지혈제를 사 오겠습니다. 먼저 방에서 기다리십시오.”이윽고 그들은 흩어졌다.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머무른 방의 이전 숙박 기록에 온지유와 홍혜주의 이름이 적혀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20분 뒤.성재민이 지혈제와 음식들을 들고 왔다.여이현은 침대머리에 기대어 앉아 있었고, 용경호가 그의 상처를 치료해 주고 있었다.여이현은 총상을 입었다.다행히 운이 좋게도 치명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총알은 그의 견갑골을 관통했다.“대장님, 수건을 한 장 드릴까요...”“괜찮아.”여이현은 용경호의 제안을 거절했다.과거 군 복무 시절부터 훈련 중에 마취 없이 부상을 치료받는 일은 흔했다.지금 유일한 걱정은 하나뿐이었다.“빨리 전화에 충전해 둬.”그날 배진호와 연락을 한 이후로 신호가 잡히지 않았고 휴대폰 배터리도 다 나갔다.온지유가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물어봐야 했다.성재민이 말했다.“대장님, 안심하십시오. 제가 이미 충전하고 있습니다. 곧 전화를 거실 수 있을 겁니다.”“그래.”용경호가 견갑골에 꽂힌 총알을 제거할
말을 마치고 여이현은 전화를 끊었다.휴대폰을 꽉 쥐고 머뭇거리던 여이현은 결국 온지유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온지유 측은 차량이 움직이는 가운데 신호가 전혀 잡히지 않았다.여이현이 건 전화는 그저 기계음만 울려 퍼질 뿐이었다,“지금 거신 전화는 당분간 통화 하실 수 없습니다...”이쪽은 전쟁 지역이었고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자칫하면 전쟁에 휘말릴 수도 있었다.온지유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곳에 왔단 말인가!“대장님, 조급해 하지 마세요. 이쪽에서 사람들에게 연락해 사모님이 어디 있는지 찾도롣 하겠습니다. 소식이 있으면 바로 알려 드리겠습니다. 지금은 잠시 쉬시죠. 다른 팀과 연락이 안 되는 이상 임무도 어차피 수행할 수 없으니까요.”용경호는 여이현의 바로 옆에 서 있었고, 여이현이 건 통화도 다 들었다. 용경호는 여이현의 조급한 마음을 잘 알았다.여이현은 원래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는 사람이었다.여이현의 곁에서 유일하게 신경이 흐트러지는 것을 본 건 모두 온지유와 연관된 일이었다.온지유는 여이현에게 있어 정말로 중요한 존재였다.“반드시 서둘러야 해.”여이현은 지금 당장이라도 직접 온지유를 찾으러 가고 싶었지만 오늘 이곳에 온 이유는 윗사람과 접선하기 위해서였다.지금은 나라를 위해 한 몸 바쳐야 했다.하지만 온지유의 안위를 걱정해 결국 용경호와 성재민에게 명령을 내렸다.“지유를 찾는 임무는 너희에게 맡기겠다. 지금 Y국으로 가는 중일 거야.”온지유가 Y국으로 온 목적은 분명 나민우와 여이현 자신일게 분명했다.온지유는 여이현이 이곳에 온 데는 공적인 임무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모른다.Y국은 남북으로 길게 분포되어 있다. 온지유를 빨리 찾지 못하면 여이현은 안심할 수 없었다.“제가 갈게요. 대장님 곁에도 누군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용경호가 자원해 일어섰다.성재민도 곧바로 동의했다.“맞습니다, 대장님. 사모님은 똑똑한 분이시니 절대 홀로 떠나시진 않았을 겁니다.”온지유의 곁에는 홍혜주가 있었다. 하
그들이 있는 사막은 한눈에 끝이 보이지 않는 드넓은 곳이었다.기사가 나가서 사람을 찾아온다 하더라도 얼마나 더 걸릴지 모르는 일이었다.낙타는 사막에서 가장 적합한 이동 수단이었다.온지유가 생각을 하고 있다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곁에 있던 여인이 손을 흔들며 무어라 소리를 치기 시작했다. 그녀의 아이도 그녀와 같은 동작을 하기 시작했다.율리가 해석했다.“지금 그들을 부르고 있어요.”온지유는 아무 말 없이 상황을 지켜보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이 낙타를 타고 그들이 있는 곳까지 다가왔다.여인은 몸짓으로 무리에게 온지유 일행을 가리켰다.온지유는 무리 사람들이 처음의 흥미롭던 시선에서 의심의 시선으로 바뀌는 것을 느꼈다.여인은 이 사람들과 몇 분간 대화를 나눈 후 온지유의 앞으로 다가와 흥분된 목소리로 줄줄이 말했다.율리가 통역을 했다.“지유 씨, 이 사람들은 같은 부족 사람이었나 봅니다. 낙타를 타고 함께 사막에서 나갈 수 있다 하네요.”“좋아요.”마침 그럴 생각이었다.사막에서 나와 다음 주소로 이동한 뒤 이족으로 가면 된다.기사는 그들의 대화를 모두 들었다.그는 급히 모두를 향해 외쳤다.“차가 고장 난 건 내가 어떻게 관여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낙타를 타고 떠나더라도 계약금은 돌려줄 수 없어요!”그 말에 홍혜주가 손을 휘휘 저었다.이윽고 무리 중 두마리의 낙타가 온지유 일행에게 주어졌다.홍혜주와 온지유가 한 마리, 율리가 여인을 데리고 타고 한 마리, 아이는 무리의 다른 남자와 함께 낙타를 나눠탔다.무리 사람들의 피부는 까맣고 얼굴에는 얼룩덜룩 색칠한 흔적이 있었다. 부족민 같았다. 모두가 말 없이 그저 사막을 가로질러 나아갔다.태양아래 모래는 붉게 달아올랐고 공기는 뜨거운 열기로 숨이 막혔다.홍혜주는 온지유에게 물을 따서 건넸다.“사막을 벗어나려면 몇 시간은 걸릴 것 같네요. 다음 목적지에 도착하면 푹 쉬어요. 탈수 증상이라도 오면 큰일이니까 물도 자주 마셔주고요.”“알겠어요.”온지유는 한시라도 빨리 나민우와
홍혜주는 약을 받아 들고 온지유의 볼을 잡아 그녀의 입속에 흘려 넣었다.“콜록콜록!”온지유는 심한 기침을 했다. 코를 찌르는 강한 냄새와 쓴맛이 느껴져 정신이 돌아왔다. 하지만 여전히 기운이 나지 않는지 온지유는 낙타 등에 기댄 채 숨을 몰아쉬었다.홍혜주는 온지유의 의식이 아직 불안정한 걸 보고 상태를 물었다.“지유 씨, 괜찮아요? 내 목소리가 들려요?”“들려... 요...”온지유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은 했지만 기운은 없어 보였다.온지유는 자신이 마치 뭍으로 올라와 죽어가는 물고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홍혜주는 온지유가 떨어질까 봐 계속 그녀의 허리를 잡고 있었다.마지막엔 홍혜주 자신조차 버티지 못하고 휘청거리기 시작했다.더 힘들어지기 전에 홍혜주는 얼른 방금 받은 그 흑목 즙을 마셨다.얼마나 지났을까, 홍혜주도 정신이 흐리멍덩해져 결국 율리와 부족 여인이 둘을 사막에서 나올 때 까지 지켜봐 줬다.사막에서 나와 도착한 곳은 황무지였다.이곳은 낮과 밤의 온도 차가 컸다.낙타 등에서 내려온 그들은 불을 피우고 텐트를 설치하기 시작했다.먹거리는 있었지만 물이 없었다.불을 쬐며 몸을 조금씩 녹이고 있던 그때 부족 여인이 물주머니를 건네줬다.“오늘은 여기서 못 나갈 것 같아요. 여기서 사람이 사는 곳 까지 가려면 또 세시간 정도 걸릴거예요. 하지만 오늘은 이미 하루 종일 이동했으니 지친 몸을 먼저 쉬게 하세요.”율리가 통역해 주었다.홍혜주는 물주머니를 받아 들었다.‘아우우-’온지유는 순간 깜짝 놀라 뛰어올랐다. 이곳에는 늑대무리가 있었던것이다.하지만 부족민들 손에는 총이 있었고, 본 지방 사람들이라 그런지 늑대 울음소리에 전혀 당황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홍혜주는 온지유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조금 더 불을 쬐고 있어요. 전 텐트를 치고 올게요.”온지유는 이런 상황에 익숙지 않을 테다. 겁에 질려 울지만 않았어도 충분히 강하게 버텨주고 있었다. 지금 둘은 부족민들과 한 몸이 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조금 지나면 그들과 교섭
하지만 감동보다는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문지원은 당장 얼굴이 일그러지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지석훈도 뒤따라 들어오며 물었다.“속이 안 좋아?”“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세 끼 식사도 꽤 규칙적으로 하고 날것 이거나 차갑거나 매운 음식도 먹지 않았는데...”문지원은 배를 움켜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지석훈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듯 방으로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가져왔다.문지원은 놀라며 물었다.“언제 산 거예요?”지석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문지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5분 후,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다시 나왔다. 한 손은 여전히 배 위에 올려져 있었고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임신한 것이다!그녀와 지석훈이 결혼한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임신하다니.지석훈은 오히려 태연해 보였다. 하지만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보면 그 역시 겉모습처럼 평온하지 않고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정말 임신한 거예요?”문지원은 아직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번 달 초에 생리가 끝났기 때문이다.“아마 생리가 끝난 후 며칠 사이일 거야.”지석훈의 목소리는 문지원에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니 그녀의 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결국, 그녀는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임신 테스트기는 가끔 틀릴 수도 있으니 이런 일은 직접 검사를 받아보고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손에 든 검사지를 보고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의사는 마침 지석훈과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축하합니다, 지 원장님. 부인께서 임신 2주 차입니다.”“감사합니다.”지석훈은 침착하게 그녀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병원 진료실을 막 나오자마자 지석훈은 문지원을 품에 안았다.“너무 좋아. 우리 아이가 생겼어.”문지원은 남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며 멍하
물론 손에 있는 일을 무턱대고 모두 남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과한 부담을 주는 일이다.문지원은 비서를 사무실로 불렀다.“올해 25살이죠?”비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나이는 모두가 다 아는데 문지원 회장이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혹시 소개팅을 시켜주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비서는 고마웠지만 거절하며 말했다.“문 사장님, 저는 아직 젊어서 당장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전 당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게 아니에요.”문지원은 펜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냥 평소에 잡다한 일들을 맡기고 싶어서요.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은 평소에 굳이 내게 제출하지 않아도 돼요.”비서는 그 뜻을 이해했다.이건 곧 그녀에게 승진과 급여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문지원이 그녀의 의견을 확인한 후 급여를 조금 올려줬고 비서에게 몇 명의 적합한 인재를 추가로 모집해서 예비 인력으로 두라고 지시했다.“평소에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보고하면 돼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 혼자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일정이 정리되자 문지원은 업무에서 상당 부분 해방되었다.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일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되어도 일이 끝나지 않고 긴급 통지가 오면 또 회의를 위해 야근을 해야 했다.이제는 오후 4시 반쯤이면 일을 마치고 퇴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비서가 몇 명을 더 찾아서 양성해 두었기에 업무가 적절히 분배되어 모두 바빠 죽을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딱 맞는 분량을 처리할 수 있었다.그 덕에 문지원은 지석훈과 함께 결혼 후의 삶을 더욱 즐길 수 있게 되었다.지석훈도 이에 매우 만족해했다.“널 주려고 선물을 챙겨왔어. 들어가서 한번 봐.”그가 집 문 앞에 다가서더니 걸음을 멈췄다.문지원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은 어두컴컴했다.“뭐 숨겨놨어요? 아직 불도 켜지 않았네요, 수상하게.”탁! 하며 불이 켜지자 거실의 모든
문지원은 이 주제가 다소 위험하다고 느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배석훈이 결혼한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돼지고기를 먹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돼지가 뛰어다니 것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문지원은 그러면서도 반쯤 빚어놓은 만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이에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희들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아이를 가져야지. 평소에 좀 더 노력해야 한단다.”문지원은 잔소리를 듣고 나서 나오니 기운이 다 빠져있었다.시어머니는 문지원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거의 마음을 쏟아붓는 수준이었다. 비록 문지원의 집안 사정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혼수 때 오랜 세월 모은 돈으로 집 한 채를 사서 선물해 주었다. 사실 지석훈도 자기 집이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선물하고 싶다고 하셨다. “너희 집도 너희의 것이지만, 이건 내가 어른으로서 선물하는 거란다.”게다가 그 집에는 문지원의 이름도 함께 올려져 있었다.그래서 시어머니의 출산 독촉에도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버텨야만 했다. 다행히도 시어머니는 어린 이들에게 엄격하게 구는 편은 아니었다. 만두를 빚을 때 한 번 그런 말을 했고 또 떠나면서도 지석훈을 불러 몇 마디 잔소리했다. 문지원은 그 모자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돌아가는 길에 문지원은 약간 궁금해져 지석훈에게 물었다.“나갈 때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정말 알고 싶어?”“네.”그러자 지석훈은 문지원의 머리를 숙이게 한 후 그녀의 흩어진 머리칼을 살며시 넘겨주며 귀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우리 아이를 빨리 낳으라고 하셨어.”남자의 낮고 진한 목소리는 얼굴을 붉히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약보다도 중독성이 강해 문지원의 귀가 금세 붉어지고 말았다.저녁이 되자 지석훈은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문지원의 머리를 받치고 이마를 맞대며 낮은 숨소리를 내쉬었다. 문지원은 마치 파도 속에 잠긴 것
그 눈빛 속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그 소유욕. 마치 옛 시대의 군벌과 그의 부인 같았다. 그리고 사진작가는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운 없는 사람이 되어 몰래 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자신의 상상에 자극받아 목소리가 떨렸다.“지석훈 씨,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봐주세요.”지석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진작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진작가는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그 후에도 그들은 여러 세트의 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들은 모두 문지원에게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문지원은 모든 사진에 다 만족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었다.“대략 며칠 안에 나오나요?” 그녀가 물었다.사진작가는 답했다.“빠르면 이삼 일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완성된 사진들을 택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두 분께서 응해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바로 아까 찍은 사진 중 몇 장이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서 사진관 벽에 걸어두고 싶습니다.”문지원은 사진관에 들어올 때 봤던 사진 벽이 생각났다.“그 벽에 걸어두시겠다는 건가요?”“네.”사진작가는 그 벽은 사진관의 특별한 기념 및 홍보 방법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잘 나온 사진들은 사진 주인에게 동의를 구한 뒤 동의하면 벽에 전시한다고 한다..문지원은 옆에 있던 지석훈을 바라봤다. “저는 괜찮은데, 당신은요?” 지석훈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마음대로 하도록 해.”며칠 후 문지원은 사진작가가 보내온 사진을 받아 소중히 간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 사진관 벽에 전시된 사진들이 곧 사람들의 눈에 띄어 사진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간 것이다.잘생긴 남성과 아름다운 여인의 조합과 최상의 촬영 기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네티즌들은 저마다 아아 소리를 냈고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마치 옛 시대의 군벌 부인 같다.”“완전 대박이다.”“3분 안에 그들의 모든 정보를 알고 싶다.” 하지만 이 모
문지원은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하지만 웨딩 촬영은 이미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섬에서 몇 세트 찍었고 그 후 결혼식 현장에서 또 몇 세트 찍어 셀 수 없을 정도였다.게다가 이번 촬영은 개인 예약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사진관이 꽤 유명하다고 들었다.물론 사진관 이름에 걸맞게 예약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이 정도면 지석훈이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 예약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웨딩사진만 찍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하지만 문지원 역시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몰랐다.“한번 보세요. 이건 저희가 예전부터 선보였던 스타일들이에요.”사진작가는 친절하게 앨범 한 권을 꺼내 보였다.앨범에는 이전 고객들이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담겨 있었는데 정말 다양한 스타일이 있었고 모두 아름다웠다.이 사진관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정말 최고였다.문지원은 그중에서도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요?”사진작가는 그녀가 가리키는 사진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됩니다. 먼저 메이크업하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직원들이 촬영 스튜디오를 설치할게요.”옷은 사진관에서 준비한 것으로 하고 지석훈의 요구에 따라 전부 새 옷이었다.사실 문지원은 소품용 옷을 입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한 번 입었다가 나중에 벗으면 되는 거고 몸에 달라붙지 않아서 안에 옷을 받쳐 입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석훈은 직업병이 발동했고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었다.결국,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급히 새 옷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원래 걸리던 시간에서 15분이 더 추가되었고 메이크업 등 기타 과정도 진행해야 했다.문지원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2시간이 지난 후였다.그러나 결과는 확실했다.곧은 치파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쌌고 문지원은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치 지난 옛 시대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결혼 후 문지원은 휴가를 내서 신혼여행을 갈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요즘 지석훈이 거의 계속 병원에 머무르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본의 아니게 한숨이 나왔다. 비록 이미 익숙해졌긴 했지만 실망을 감추기는 어려웠다.비서도 그녀에게 물었다.“문 사장님, 신혼여행 가고 싶지 않으세요? 제 동창 중 한 명이 며칠 전에 결혼했는데 요즘 여기저기서 신혼여행 정보를 알아보며 준비 중이에요. 신혼여행이 없는 결혼은 반은 실패한 거랑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제대로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비서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그렇지 않으면... 문 사장님, 지 의사님이 일하시는 곳에 한 번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어쨌든 문지원은 요즘 정신이 산만하여 업무에 집중할 기색도 없었다.문지원은 비서의 시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 동안 집에 돌아와도 지석훈을 보지 못해 한참 혼란스러워했던 자신을 깨달으며 약간 부끄러워졌다.“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기획서 한 부 복사해 가져다주세요.”점심 무렵, 문지원은 막 일을 끝내고 밥 먹으러 가려던 찰나, 핸드폰에 지석훈의 메시지가 떴다. 같이 밥을 먹자는 메시지에 문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이 장면을 본 직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문지원은 재빨리 열쇠를 챙기고 회사를 떠났다. 지석훈은 그녀를 새로 오픈한 가게로 데려갔다.식사를 마친 후 문지원은 지석훈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병원에 다시 돌아갈 거예요?”“응?”지석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고의적으로 물었다. “내가 돌아가길 바라는 거야?”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순간 당황했다. 사실 그녀는 지석훈이 자신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길 바랐는데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업무에만 매달려 밤에야 겨우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지석훈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지석훈은 항상 선을 지켰지만 오늘 밤엔 조금 달랐다. 그는 그녀를 침실에서 욕실로 다시 침대로 옮겨가며 몸 곳곳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문지원은 여전히 몸속 깊이 스며든 감각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그녀는 예상대로 휴가를 냈고 이틀이 지나서야 회사에 다시 나왔다.회사 사람들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문지원이 출근하자 하나같이 말했다.“문 사장님, 결혼 축하드려요.’문지원은 무려 사흘이나 결근했지만 다들 그 사흘 동안 무얼 했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짐작이 갔다.분명 부부 생활이 아주 좋았겠지, 아니었으면 일까지 내팽개치고 안 나왔을 리가 없다.문지원은 직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얼굴을 들 수도 없어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지난번에 당한 적이 있었던 터라 문지원은 이제 출근 전에 거울 앞에서 꼼꼼히 점검했다.몸에 키스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회사를 향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 흔적들을 들켰을 경우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문지원이 예상치 못했던 건 며칠 지나지 않아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이 회사로 배달됐다는 것이다.문지원은 처음에 여울이 보낸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어보니 아니었다.택배 상자의 외관을 살펴봐도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아 더욱 수상했다.“이거 가져온 사람이 누가 보낸 건지 말했어요?”문지원이 로비 직원에게 물었다.로비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두고 바로 가버렸어요.”문지원은 뭔가 직감적으로 찜찜한 마음이 들어 그 택배를 챙겼고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는 브로치 하나와 축하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문지원은 축하 카드를 집어 들어보니 카드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결혼 축하해요.”글씨체는 아주 정갈하고 예뻐 여성의 필체 같았다.그녀는 곧바로 짐작이 갔다.문지원은 그 브로치를 지석훈에게 보여주자 그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브로치
여울은 아직 최주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최주하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문지원이 알기로 여울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고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몰랐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도 괜히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게다가 얼마 전 지석훈이 슬쩍 귀띔하듯 말했다.“며칠 전에 여울 씨가 병원에 재검진받으러 왔는데 주하가 데리고 왔었어.”그 말을 듣고 문지원은 혀를 끌끌 찼다.평소에 말도 없고 조용하던 여울이 은근히 비밀 많은 타입이었던 모양이었다.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다음 달 중순이 되었다.지석훈은 아예 와인 농장을 통째로 빌려 며칠에 걸쳐 그곳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꾸며놓았다.결혼식을 올릴 장소는 바로 거기였다.그 와인 농장은 웬만한 호텔 못지않게 컸고 내부에는 수년간 숙성된 고급 와인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결혼식 날 손님들이 오면 바로 꺼내어 대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들은 결혼 소식을 널리 알리진 않았다.이건 문지원이 원한 방식이었다.그녀는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는 그런 결혼식보다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 초대해서 조용히 축하받는 걸 선호했다.행복은 굳이 남들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그런데 결혼식이 한창일 때 지석훈이 무대 위에서 다시 한번 프러포즈했다.해변에서 했던 프러포즈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진중한 분위기였다.“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예전엔 내가 사랑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렸던 순간이 많아. 이제는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앞으로 남은 인생... 너랑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그의 말이 끝나자 하객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문지원은 무대 위에서 입을 손으로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식이 끝날 무렵, 문지원은 멀리서 검은색 카이엔 SUV가 그녀의 친구 여울을 데리러 오는 걸 보았다.차창이 천천히 내려가자 예상대로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최주하였다
문지원은 문득 자신이 계획에 철저히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처음부터 계획한 거죠?”“응.”지석훈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실, 그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오래전부터 숨겨온 것이었다....해변에서의 프러포즈 이후 문지원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가 생겼다는 점이었다.이 반지는 지석훈이 특별히 맞춤 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보다가 두 달 전에 이미 주문이 들어가 있었다는 구매 기록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한 지석훈의 부모님은 곧바로 혼인신고부터 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지원은 우연히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타이르는 말을 듣게 되었다.“네 아빠랑 난 애초에 너한테 기대도 안 했어. 하루가 멀다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니 너 같은 애한테 누가 시집오겠나 싶었거든. 그런데 다행히 네가 능력 있어서 지원이 같은 좋은 아이를 데려왔으니 얼른 확실히 붙잡아야지. 빨리 혼인신고부터 해. 나중에 그 아이가 너 버리고 떠나버리면 그땐 어디 가서 울어도 소용없어!”문지원은 그 대화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신기한 건 지석훈이 워낙 점잖고 진지한 사람이어서 집안 분위기도 매우 조용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퇴직해 한가로운 성격으로 매일 독서나 산책을 즐기는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호탕한 성격으로 남편에게 엄격하면서도 친화력이 강한 사람이었다.두 분 모두 차분한 듯하면서도 내면에 장난기를 숨기고 있는 아들을 낳을 것 같진 않았는데 이게 바로 유전자의 신비인가 싶었다.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그녀를 좋아해 주는 모습에 문지원도 안심했다. 확실히 시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한편 문지원의 아버지는 지석훈과 따로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정확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