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얘기는 그만하자. 정말 조사해 보고 싶다면 개인 물품이라도 확보해야 해.”“다 검사해 봐야 해. 일상생활을 담은 동영상이 있으면 가장 좋을 거야.”“그래야 판단할 수 있거든. 그렇지 않으면 다른 것들은 다 소용없어.”지석훈은 몇 마디 하고는 바로 최주하를 돌려보내려고 했다.“날 놀리려고 온 거냐? 넌? 그쪽 상황은 어떤데?”지석훈도 사람을 비웃는 데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다.그 말에 최주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떠하긴. 당연히 다 정상이지. 나처럼 인내심이 있는 사람이 드물잖아.”최시후와의 싸움을 뜻하는 말이었다. 지석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그만 가. 나 이제 쉴 거야. 방해하지 말고 얼른 가. 얘기는 나중에 하자.”그는 귀찮은 듯 손을 저었다. 최주하도 별다른 얘기가 없이 어이없는 웃음만 지으며 돌아섰다.최주하가 떠난 후, 지석훈은 일어나 앉아 복잡한 표정으로 앞을 주시했다.아까 문지원이 있을 때, 그는 큰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복잡한 생각을 정리하려고 할 때, 최주하가 들이닥쳐 이런저런 쓸데없는 얘기를 하는 바람에 결국 생각을 정리하지 못하였다.이제는 사람들이 다 갔으니 드디어 조용히 생각해 볼 수가 있었다. 강윤슬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되짚어보았다.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마음이 쓰이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자존심 때문에 이러는 건지?그러나 무엇이 됐든 강윤슬이 그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을 보며 그는 안타까운 마음보다는 속으로 비아냥거렸다. 이 순간이 너무 어이가 없었다. 한편, 문지원은 차를 몰고 집으로 향했고 마침 비서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 “대표님, 지금 아주 심각한 상황입니다. 얼른 오셔야 할 것 같아요. 저도 뭐라 자세히 설명을 해드리리가...”전화기 너머로 비서는 우물쭈물했다.난감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집안에 문제가 생긴 바람에 회사는 지금 그녀 혼자 돌볼 수밖에 없었다.사실 문지원은 원래 회사의 임원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쩔 수 없이 그녀가 회사를 짊어지
그 말을 들으니 침착했던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어요. 하지만 이번 일은 내가 꼭 나서야 할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은 방법이 없고 난 이쪽의 책임자니까요.”그녀가 자신의 입장을 똑바로 밝히지 않는다면 상대방은 더욱 날뛰게 될 것이다.그러나 상대 쪽의 명단을 확인했을 때 그녀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엄우정이었기 때문이다. 지석훈과 이렇게까지 깊은 관계가 아니었을 때, 그녀는 엄우정을 만난 적이 있었다. 엄우정은 첫 만남에서 그들을 모욕했었다.지석훈에게는 강윤슬을 좋아한다면 선을 넘는 일은 하지 말라고 했고 문지원한테는 자신의 신분을 똑똑히 알아차리라고 했다. 뭣도 모르고 날뛰다가 결국 아무것도 얻는 게 없이 비참해지지 말라고 했는데 그 당시 문지원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더 이상 이런 사람들과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하였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녀는 어쩔 수가 없었다.약속 장소로 가니 엄우정 뿐만 아니라 강윤슬도 그 자리에 있었다. “어떻게 이런 우연이 다 있죠. 그 프로젝트에는 사인을 못할 것 같아요.”엄우정은 득의양양한 얼굴로 문지원을 쳐다보았다. “왜요? 왜 사인을 할 수 없는 건데요? 뭐 문제라도 있나요?”문지원은 문 앞에 서서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두 사람과 괜히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았다.강윤슬도 엄우정도 다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날 강윤슬의 처지가 딱해 보인 건 사실이지만 그건 지석훈과 강윤슬 두 사람 사이의 일이지 그녀의 회사와는 무관하다고 생각했다. “기분이 안 좋아서요. 기분이 안 좋으면 프로젝트에 큰 영향이 있거든요.”“지석훈이랑 윤슬 씨의 사이를 뻔히 알고 있으면서 어떻게 지석훈과 관계를 가져요? 이렇게 급한 일이면 차라리 지석훈을 찾아가지 그랬어요?”“이번 협력은 꼭 나를 찾아와야 한다는 걸 당신도 알고 있죠?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고분고분하지도 않았겠죠.”문지원은 화가 치밀어
“당신이 원하는 사과가 이런 거예요?”문지원은 통증이 몰려와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지만 저쪽에 서 있는 두 사람은 별다른 반응이 없어 보였다. 이미 이런 일이 몸에 밴 듯 익숙해 보였다. “묻고 있잖아요.”문지원은 아직도 반쯤 쭈그리고 앉아 있었고 손은 여전히 강윤슬의 발밑에 밟혀 있었다.“뭐 비슷해요.”엄우정은 문지원이 이렇게까지 고집이 셀 줄은 몰랐고 결국 계약서에 대충 사인을 해줬다.이번에는 어떻게든 회사가 잘 운영될 수 있게 되었다.문지원은 두 사람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난 두 사람 사이의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아요. 나랑 석훈 씨는 서로 원해서 그런 거예요.”“당신이랑 석훈 씨의 일에 대해 뭐라 평가하고 싶지도 않고요. 그러나 이렇게 해서는 진심을 얻을 수 없을 거예요.”말을 마친 문지원은 계약서를 들고 자리를 떴다.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고 엄우정은 벌컥 화를 냈다. “그냥 이대로 끝낼 거예요? 지석훈은 원래 윤슬 씨한테 충성을 다했어요. 일편단심 당신만 바라보던 사람이 문지원이 나타난 이후부터 딴사람이 되어버렸다고요.”그 말에 강윤슬은 가여운 척 연기를 했다. “그런 말 하지 말아요. 꼭 그런 것만은 아닐 거예요. 그리고 문지원은 이미 벌을 받았잖아요.”화가 난 엄우정은 펄쩍 뛰었다. “왜 그렇게 착해요? 지석훈이 보는 눈이 없네요. 윤슬 씨 같은 여자를 두고 어떻게...”두 사람은 한동안 계속해서 얘기를 나누었다. 한편, 문지원은 계약서를 회사에 가져다준 뒤 병원으로 향했다. 그런데 병원에 오자마자 수술하러 가는 지석훈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문지원의 손을 보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시간이 촉박해서 몇 마디밖에 물어볼 수가 없었다.“왜 이래? 일단 가서 치료받고 있어. 수술 끝나면 바로 갈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지석훈은 이미 의사들과 함께 수술실로 들어갔다.그녀는 접수를 마치고 한참을 기다린 끝에 손에 난 상처를 치료하였다. 조용한 곳을 찾아 그를 기다리고 있는데 얼마 지
“수술 일정이 이것밖에 없어서 바로 퇴근해도 돼. 가서 물어봐야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그는 더 이상 아무 말이 없었고 이내 차에 시동을 걸었다. 잠시 후, 차가 목적지에 도착하였고 차가 클럽 앞에 멈춰 섰다.문지원은 조마조마했다.이미 붕대를 감고 있긴 했지만 지석훈이 손을 살펴보는 도중에도 통증이 몰려왔다. ‘누구한테 관심을 받는다는 게 이런 느낌이었구나.’손이 밟혔을 때, 그녀는 단순히 계약이 성사되지 않을까 봐 걱정되었고 자신이 괜히 다친 건 아닌지 라는 생각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녀는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지석훈의 관심이 오히려 그녀의 마음을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 나랑 강윤슬이 어떻게 되든 이 일은 나랑 관련된 일이잖아. 나 때문에 당신이 이렇게 당하는 꼴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어.”말을 마친 그가 그녀를 데리고 룸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어보니 룸 안에는 강윤슬과 임혁수 그리고 몇몇 사람들이 한창 즐겁게 놀고 있었다.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갈 때, 강윤슬과 임혁수는 키스를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역시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니까. 이제 좀 그만해.”“그러니까. 그리 오래 만났으면 이젠 뜸할 때도 됐잖아.”이 상황이 어이가 없었던 지석훈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어젯밤까지도 울며불며 그한테 매달리던 강윤슬이, 그를 좋아한다고 하던 강윤슬이...이런 싸구려 진심이라니, 그가 테이블 위의 컵을 덥석 집어 바닥에 던졌다.신나게 놀던 사람들은 그를 향해 시선을 돌렸고 지석훈은 룸 안의 음악을 끄고 차갑게 입을 열었다.“뭐 하나만 물어볼게. 이게 뭐 하는 짓이야?”지석훈은 문지원을 손을 들어 올리며 강윤슬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에는 더 이상 이전의 애틋함을 찾아볼 수가 없었고 분노만 가득했다. “뭐 하는 거야? 여자 친구의 억울함이라도 풀어주려고 온 건가? 그런 거라면 잘못 찾아온 것 같은데? 네 여자 친구는 사업 때문에 스스로 다친 거야.”“그게 다른
“네, 이 산속이 맞습니다. 정 그렇게 믿기 어려우시다면 직접 가보시죠. 하지만 다른 정보는 저희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다른 상황에 비해 지금 이 상황이 제일 이해가 가지 않았다.“틀린 말은 아니지만 지금 이 정보로는 조금 어렵다고 생각되네요.”문지원은 탐정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만 사실 여전히 걱정되었다.“그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전에 있었던 일을 제외하곤 이번 조사에서는 충분히 알아보고 말씀드리는 것이니까요.”탐정이 말을 마쳤을 때도 그녀의 표정은 전보다 더 심각하게 일그러졌다.“네. 알겠어요.”전화를 끊은 문지원은 다소 조급한 얼굴로 앞을 보았다. 전에는 준비가 된 상태라 긴장하지 않았다면 지금은 조금 불안했다.“무슨 일이야?”“아, 우리 오빠예요. 우리 집안의 상황을 석훈 씨도 잘 알잖아요. 그동안 오빠와 연락이 안 되기에 탐정사무소로 찾아가 의뢰했는데 방금 그쪽에서 연락 온 거예요. 어느 산 쪽에서 오빠 소식을 알아냈다고 하는데 가야 할까 고민 중이었어요.”만약 다른 때였다면 문지원은 이렇듯 고민하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 상황은 너무도 예상 밖이었다.“만약 그럴싸한 정보라면 바로 사람을 보내서 알아보거나 제가 직접 가서 확인해볼 텐데 지금 상황이 조금 이상해서요.”지석훈은 조금 의아한 눈빛으로 문지원을 보았다.“정말로 산속에서 찾았다면 더 많은 소식이 들려왔어야 했을 텐데 왜 탐정이 고작 연락 한 통으로 위치만 알려준 거지? 그 탐정 믿을 만한 사람은 맞아?”지석훈이 이렇게 물으니 문지원은 다소 확신할 수 없었다.“네가 네 오빠를 걱정하고 있다는 거 알아. 다른 사람이었어도 너처럼 가족을 걱정했을 거야. 그런데 만약 이 모든 게 누군가 파 놓은 함정이라면? 내가 보기엔 분명 뭔가가 있어.”같은 시각 강윤슬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석훈이가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분명 나한테 푹 빠졌을 때는 그딴 일에 관심이 없었잖아. 그런데 왜 지금은 다른 사람 편을 들어주면서 일부러 이런 말로 나를 화나게 하는 거냐고!
그렇게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있을 때 다른 한편에서 최주하는 여울의 연락을 받게 되었다.“네?”여울은 자신이 손을 다쳤다는 사실과 최지후가 자신을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면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그에게 연락했다고 말했다.“네가 어떻게 되든 신경은 안 쓰지만 그래도 몸 정도는 챙겨.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벌어질 상황에 귀찮게 내가 직접 나서야 하잖아. 안 그래?”그 말을 들은 여울은 조금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제가 일부러 제 몸에 신경 쓰지 않는 건 아니에요. 최지후 씨가 그러는 게 조금 무서워요.”여울은 비록 2억을 손에 넣긴 했지만 끝까지 살아 있어야 그 돈을 쓸 기회가 있지 않겠는가. 이대로라면 그녀는 언제 죽게 될지도 모른다.“내가 말했잖아. 몸 하나는 알아서 잘 지키라고. 필요한 게 있으면 내가 최대한 맞춰줄 테니까 나 대신 일 좀 하나 해줘야겠어.”최주하는 원래 더 좋은 방법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기회가 제 발로 들어왔으니 당연히 놓치지 않고 이용해줄 생각이다.“또 뭘 해야 하죠?”예전이었다면 여울은 걱정하고 있었겠지만 지금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최주하가 이러는 것은 순수하게 최지후에게 보복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하지만 다른 것에는 알 리가 없었다.“나도 알아. 지금 네 상황이 확실히 불리하고 힘들다는 거. 그래도 내가 시키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네가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난 네가 해낼 거라고 믿어.”이 말을 한 최주하는 이내 잠깐 망설이다가 지석훈이 했던 말을 해주었다.“내가 이곳에 있는데 CCTV를 설치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그리고 CCTV 기계가 어떻게 생겼는지 너도 모르는 것도 아니고.”여울이 몰래 그에게 연락할 때부터 이미 긴장한 상태였다. 만약 정말로 최주하가 말한 대로 CCTV가 설치되어 있고 나중에 최지후가 그것을 발견한다면 그러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지 않겠는가.“내가 지금 선택의 기회를 줄게. 내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아도 돼. 하지만 나중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누구도 몰
“나도 방금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 네가 자꾸 이 시간에 수상하게 이런 모습으로 있는데 누굴 탓하겠어?”여울이 울먹거리자 최지후의 분노는 사그라들고 어느새 미안한 감정만 남았다. 그는 감정 표현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여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너무도 어색했다.“일단 손부터 치료해. 괜히 나중에 다른 사람이 보고 내가 널 학대했다고 오해하기 전에.”말을 마친 그는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떠나가는 최지후의 뒷모습을 보던 여울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일은 그녀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몰래 CCTV까지 설치하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최지후는 원래부터 의심병이 많은 사람이었기에 만약 무언가를 눈치채기라도 한다면 그 후과는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최주하가 시킨 일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그녀도 어쩔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또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일단 가까운 병원으로 찾아가 손부터 치료하기로 했다.“이번에는 또 왜 이렇게 된 거예요? 지난번까지 멀쩡했던 사람이 왜 이렇게 다친 거예요? 조심하라고 했잖아요. 앞으로 두 달간은 무거운 물건은 들지 말고 집에서 푹 쉬어요. 알겠어요?”의사의 당부에 여울은 씁쓸한 미소만 지었다. 그녀도 조심하고 싶지만 그녀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최지후는 원래부터 기분이 오락가락하는 사람이었던지라 그녀도 모르는 사이에 그의 심기를 거슬렀다면 절대 의사의 당부를 지킬 수 없을 것이다.하지만 그녀는 돈을 받고 남의 일을 대신 해주고 있었다. 최주하의 돈을 받았으니 집에서 가만히 푹 쉬는 것은 물 건너갔고 어떻게든 시킨 일을 완수해야 했다. 시킨 일만 빠르게 해내고 떠나버린다면 더는 이런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네, 선생님. 고마워요.”그러나 별장으로 돌아갔을 때 최지후는 떠나지 않았고 오히려 별장에 앉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그런 그가 다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여하간에 최지후가 어떤 성격인지 잘 알고 있었고 지금쯤이면 다른 곳에서 볼일을 보고
지석훈은 말하면서 다소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문지원을 보았다. 여하간에 문지원의 손은 강윤슬 때문에 다쳤으니까.“이 일로 나한테 죄책감 같은 거 느낄 필요 없어요. 나한테는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니까요. 그리고 저도 다른 일로 부담을 느낀 적 없어요. 시간도 이미 많이 지난 일이고 만약 예전이었다면 신경 썼을 텐데 지금은 정말로 아무렇지 않아요. 이제 저에겐 아무 의미도 없거든요.”문지원은 아주 진지한 얼굴로 말하고 있었지만 지석훈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왜 의미가 없는 건데? 설마 너한테 나는 다른 사람과 같은 존재인 거야?”왜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지석훈은 저도 모르게 진지해지게 되었다. 그의 말을 듣던 문지원은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아니요. 석훈 씨는 다른 사람과 다르죠. 다르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그동안 나한테 도움도 많이 줬는데 계속 석훈 씨한테 찰싹 붙어서 의지만 하고 살아갈 수는 없잖아요.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그리고 석훈 씨와 강윤슬 씨 사이 일도 내가 이러쿵저러쿵 평가할 자격은 없다고 생각해요. 이미 다 지나간 일인데 더 말해서 뭐하겠어요?”지석훈은 순간 침묵하고 말았다. 그는 문지원의 생각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단순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과장도 없어 오히려 자신의 생각이 더 편협하게 느껴졌다.“그래. 알았어. 얼른 쉬어.”일전에 이미 함께 잔 적이 있었던지라 둘 사이는 전보다 더 가까워졌고 이상하게도 뭐든 더는 서로가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오래전부터 만나 함께 생활했던 것처럼 말이다.지석훈은 사실 그녀에게 모든 사람에게도 이렇게 대하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녀의 뒷모습이 너무도 지쳐 보였기에 결국 침묵하기로 했다. 여하간에 어떤 일은 직접 말로 하기 어려웠고 자칫하면 상처 주기도 했으니까. 문지원도 그가 무엇을 궁금해하는지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같은 시각 강윤슬은 알게 된 소식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한 후 저도 모
하지만 감동보다는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문지원은 당장 얼굴이 일그러지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지석훈도 뒤따라 들어오며 물었다.“속이 안 좋아?”“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세 끼 식사도 꽤 규칙적으로 하고 날것 이거나 차갑거나 매운 음식도 먹지 않았는데...”문지원은 배를 움켜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지석훈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듯 방으로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가져왔다.문지원은 놀라며 물었다.“언제 산 거예요?”지석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문지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5분 후,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다시 나왔다. 한 손은 여전히 배 위에 올려져 있었고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임신한 것이다!그녀와 지석훈이 결혼한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임신하다니.지석훈은 오히려 태연해 보였다. 하지만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보면 그 역시 겉모습처럼 평온하지 않고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정말 임신한 거예요?”문지원은 아직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번 달 초에 생리가 끝났기 때문이다.“아마 생리가 끝난 후 며칠 사이일 거야.”지석훈의 목소리는 문지원에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니 그녀의 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결국, 그녀는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임신 테스트기는 가끔 틀릴 수도 있으니 이런 일은 직접 검사를 받아보고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손에 든 검사지를 보고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의사는 마침 지석훈과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축하합니다, 지 원장님. 부인께서 임신 2주 차입니다.”“감사합니다.”지석훈은 침착하게 그녀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병원 진료실을 막 나오자마자 지석훈은 문지원을 품에 안았다.“너무 좋아. 우리 아이가 생겼어.”문지원은 남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며 멍하
물론 손에 있는 일을 무턱대고 모두 남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과한 부담을 주는 일이다.문지원은 비서를 사무실로 불렀다.“올해 25살이죠?”비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나이는 모두가 다 아는데 문지원 회장이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혹시 소개팅을 시켜주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비서는 고마웠지만 거절하며 말했다.“문 사장님, 저는 아직 젊어서 당장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전 당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게 아니에요.”문지원은 펜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냥 평소에 잡다한 일들을 맡기고 싶어서요.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은 평소에 굳이 내게 제출하지 않아도 돼요.”비서는 그 뜻을 이해했다.이건 곧 그녀에게 승진과 급여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문지원이 그녀의 의견을 확인한 후 급여를 조금 올려줬고 비서에게 몇 명의 적합한 인재를 추가로 모집해서 예비 인력으로 두라고 지시했다.“평소에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보고하면 돼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 혼자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일정이 정리되자 문지원은 업무에서 상당 부분 해방되었다.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일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되어도 일이 끝나지 않고 긴급 통지가 오면 또 회의를 위해 야근을 해야 했다.이제는 오후 4시 반쯤이면 일을 마치고 퇴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비서가 몇 명을 더 찾아서 양성해 두었기에 업무가 적절히 분배되어 모두 바빠 죽을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딱 맞는 분량을 처리할 수 있었다.그 덕에 문지원은 지석훈과 함께 결혼 후의 삶을 더욱 즐길 수 있게 되었다.지석훈도 이에 매우 만족해했다.“널 주려고 선물을 챙겨왔어. 들어가서 한번 봐.”그가 집 문 앞에 다가서더니 걸음을 멈췄다.문지원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은 어두컴컴했다.“뭐 숨겨놨어요? 아직 불도 켜지 않았네요, 수상하게.”탁! 하며 불이 켜지자 거실의 모든
문지원은 이 주제가 다소 위험하다고 느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배석훈이 결혼한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돼지고기를 먹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돼지가 뛰어다니 것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문지원은 그러면서도 반쯤 빚어놓은 만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이에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희들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아이를 가져야지. 평소에 좀 더 노력해야 한단다.”문지원은 잔소리를 듣고 나서 나오니 기운이 다 빠져있었다.시어머니는 문지원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거의 마음을 쏟아붓는 수준이었다. 비록 문지원의 집안 사정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혼수 때 오랜 세월 모은 돈으로 집 한 채를 사서 선물해 주었다. 사실 지석훈도 자기 집이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선물하고 싶다고 하셨다. “너희 집도 너희의 것이지만, 이건 내가 어른으로서 선물하는 거란다.”게다가 그 집에는 문지원의 이름도 함께 올려져 있었다.그래서 시어머니의 출산 독촉에도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버텨야만 했다. 다행히도 시어머니는 어린 이들에게 엄격하게 구는 편은 아니었다. 만두를 빚을 때 한 번 그런 말을 했고 또 떠나면서도 지석훈을 불러 몇 마디 잔소리했다. 문지원은 그 모자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돌아가는 길에 문지원은 약간 궁금해져 지석훈에게 물었다.“나갈 때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정말 알고 싶어?”“네.”그러자 지석훈은 문지원의 머리를 숙이게 한 후 그녀의 흩어진 머리칼을 살며시 넘겨주며 귀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우리 아이를 빨리 낳으라고 하셨어.”남자의 낮고 진한 목소리는 얼굴을 붉히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약보다도 중독성이 강해 문지원의 귀가 금세 붉어지고 말았다.저녁이 되자 지석훈은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문지원의 머리를 받치고 이마를 맞대며 낮은 숨소리를 내쉬었다. 문지원은 마치 파도 속에 잠긴 것
그 눈빛 속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그 소유욕. 마치 옛 시대의 군벌과 그의 부인 같았다. 그리고 사진작가는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운 없는 사람이 되어 몰래 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자신의 상상에 자극받아 목소리가 떨렸다.“지석훈 씨,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봐주세요.”지석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진작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진작가는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그 후에도 그들은 여러 세트의 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들은 모두 문지원에게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문지원은 모든 사진에 다 만족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었다.“대략 며칠 안에 나오나요?” 그녀가 물었다.사진작가는 답했다.“빠르면 이삼 일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완성된 사진들을 택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두 분께서 응해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바로 아까 찍은 사진 중 몇 장이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서 사진관 벽에 걸어두고 싶습니다.”문지원은 사진관에 들어올 때 봤던 사진 벽이 생각났다.“그 벽에 걸어두시겠다는 건가요?”“네.”사진작가는 그 벽은 사진관의 특별한 기념 및 홍보 방법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잘 나온 사진들은 사진 주인에게 동의를 구한 뒤 동의하면 벽에 전시한다고 한다..문지원은 옆에 있던 지석훈을 바라봤다. “저는 괜찮은데, 당신은요?” 지석훈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마음대로 하도록 해.”며칠 후 문지원은 사진작가가 보내온 사진을 받아 소중히 간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 사진관 벽에 전시된 사진들이 곧 사람들의 눈에 띄어 사진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간 것이다.잘생긴 남성과 아름다운 여인의 조합과 최상의 촬영 기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네티즌들은 저마다 아아 소리를 냈고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마치 옛 시대의 군벌 부인 같다.”“완전 대박이다.”“3분 안에 그들의 모든 정보를 알고 싶다.” 하지만 이 모
문지원은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하지만 웨딩 촬영은 이미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섬에서 몇 세트 찍었고 그 후 결혼식 현장에서 또 몇 세트 찍어 셀 수 없을 정도였다.게다가 이번 촬영은 개인 예약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사진관이 꽤 유명하다고 들었다.물론 사진관 이름에 걸맞게 예약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이 정도면 지석훈이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 예약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웨딩사진만 찍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하지만 문지원 역시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몰랐다.“한번 보세요. 이건 저희가 예전부터 선보였던 스타일들이에요.”사진작가는 친절하게 앨범 한 권을 꺼내 보였다.앨범에는 이전 고객들이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담겨 있었는데 정말 다양한 스타일이 있었고 모두 아름다웠다.이 사진관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정말 최고였다.문지원은 그중에서도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요?”사진작가는 그녀가 가리키는 사진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됩니다. 먼저 메이크업하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직원들이 촬영 스튜디오를 설치할게요.”옷은 사진관에서 준비한 것으로 하고 지석훈의 요구에 따라 전부 새 옷이었다.사실 문지원은 소품용 옷을 입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한 번 입었다가 나중에 벗으면 되는 거고 몸에 달라붙지 않아서 안에 옷을 받쳐 입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석훈은 직업병이 발동했고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었다.결국,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급히 새 옷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원래 걸리던 시간에서 15분이 더 추가되었고 메이크업 등 기타 과정도 진행해야 했다.문지원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2시간이 지난 후였다.그러나 결과는 확실했다.곧은 치파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쌌고 문지원은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치 지난 옛 시대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결혼 후 문지원은 휴가를 내서 신혼여행을 갈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요즘 지석훈이 거의 계속 병원에 머무르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본의 아니게 한숨이 나왔다. 비록 이미 익숙해졌긴 했지만 실망을 감추기는 어려웠다.비서도 그녀에게 물었다.“문 사장님, 신혼여행 가고 싶지 않으세요? 제 동창 중 한 명이 며칠 전에 결혼했는데 요즘 여기저기서 신혼여행 정보를 알아보며 준비 중이에요. 신혼여행이 없는 결혼은 반은 실패한 거랑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제대로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비서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그렇지 않으면... 문 사장님, 지 의사님이 일하시는 곳에 한 번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어쨌든 문지원은 요즘 정신이 산만하여 업무에 집중할 기색도 없었다.문지원은 비서의 시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 동안 집에 돌아와도 지석훈을 보지 못해 한참 혼란스러워했던 자신을 깨달으며 약간 부끄러워졌다.“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기획서 한 부 복사해 가져다주세요.”점심 무렵, 문지원은 막 일을 끝내고 밥 먹으러 가려던 찰나, 핸드폰에 지석훈의 메시지가 떴다. 같이 밥을 먹자는 메시지에 문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이 장면을 본 직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문지원은 재빨리 열쇠를 챙기고 회사를 떠났다. 지석훈은 그녀를 새로 오픈한 가게로 데려갔다.식사를 마친 후 문지원은 지석훈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병원에 다시 돌아갈 거예요?”“응?”지석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고의적으로 물었다. “내가 돌아가길 바라는 거야?”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순간 당황했다. 사실 그녀는 지석훈이 자신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길 바랐는데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업무에만 매달려 밤에야 겨우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지석훈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지석훈은 항상 선을 지켰지만 오늘 밤엔 조금 달랐다. 그는 그녀를 침실에서 욕실로 다시 침대로 옮겨가며 몸 곳곳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문지원은 여전히 몸속 깊이 스며든 감각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그녀는 예상대로 휴가를 냈고 이틀이 지나서야 회사에 다시 나왔다.회사 사람들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문지원이 출근하자 하나같이 말했다.“문 사장님, 결혼 축하드려요.’문지원은 무려 사흘이나 결근했지만 다들 그 사흘 동안 무얼 했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짐작이 갔다.분명 부부 생활이 아주 좋았겠지, 아니었으면 일까지 내팽개치고 안 나왔을 리가 없다.문지원은 직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얼굴을 들 수도 없어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지난번에 당한 적이 있었던 터라 문지원은 이제 출근 전에 거울 앞에서 꼼꼼히 점검했다.몸에 키스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회사를 향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 흔적들을 들켰을 경우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문지원이 예상치 못했던 건 며칠 지나지 않아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이 회사로 배달됐다는 것이다.문지원은 처음에 여울이 보낸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어보니 아니었다.택배 상자의 외관을 살펴봐도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아 더욱 수상했다.“이거 가져온 사람이 누가 보낸 건지 말했어요?”문지원이 로비 직원에게 물었다.로비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두고 바로 가버렸어요.”문지원은 뭔가 직감적으로 찜찜한 마음이 들어 그 택배를 챙겼고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는 브로치 하나와 축하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문지원은 축하 카드를 집어 들어보니 카드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결혼 축하해요.”글씨체는 아주 정갈하고 예뻐 여성의 필체 같았다.그녀는 곧바로 짐작이 갔다.문지원은 그 브로치를 지석훈에게 보여주자 그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브로치
여울은 아직 최주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최주하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문지원이 알기로 여울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고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몰랐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도 괜히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게다가 얼마 전 지석훈이 슬쩍 귀띔하듯 말했다.“며칠 전에 여울 씨가 병원에 재검진받으러 왔는데 주하가 데리고 왔었어.”그 말을 듣고 문지원은 혀를 끌끌 찼다.평소에 말도 없고 조용하던 여울이 은근히 비밀 많은 타입이었던 모양이었다.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다음 달 중순이 되었다.지석훈은 아예 와인 농장을 통째로 빌려 며칠에 걸쳐 그곳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꾸며놓았다.결혼식을 올릴 장소는 바로 거기였다.그 와인 농장은 웬만한 호텔 못지않게 컸고 내부에는 수년간 숙성된 고급 와인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결혼식 날 손님들이 오면 바로 꺼내어 대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들은 결혼 소식을 널리 알리진 않았다.이건 문지원이 원한 방식이었다.그녀는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는 그런 결혼식보다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 초대해서 조용히 축하받는 걸 선호했다.행복은 굳이 남들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그런데 결혼식이 한창일 때 지석훈이 무대 위에서 다시 한번 프러포즈했다.해변에서 했던 프러포즈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진중한 분위기였다.“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예전엔 내가 사랑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렸던 순간이 많아. 이제는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앞으로 남은 인생... 너랑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그의 말이 끝나자 하객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문지원은 무대 위에서 입을 손으로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식이 끝날 무렵, 문지원은 멀리서 검은색 카이엔 SUV가 그녀의 친구 여울을 데리러 오는 걸 보았다.차창이 천천히 내려가자 예상대로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최주하였다
문지원은 문득 자신이 계획에 철저히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처음부터 계획한 거죠?”“응.”지석훈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실, 그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오래전부터 숨겨온 것이었다....해변에서의 프러포즈 이후 문지원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가 생겼다는 점이었다.이 반지는 지석훈이 특별히 맞춤 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보다가 두 달 전에 이미 주문이 들어가 있었다는 구매 기록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한 지석훈의 부모님은 곧바로 혼인신고부터 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지원은 우연히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타이르는 말을 듣게 되었다.“네 아빠랑 난 애초에 너한테 기대도 안 했어. 하루가 멀다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니 너 같은 애한테 누가 시집오겠나 싶었거든. 그런데 다행히 네가 능력 있어서 지원이 같은 좋은 아이를 데려왔으니 얼른 확실히 붙잡아야지. 빨리 혼인신고부터 해. 나중에 그 아이가 너 버리고 떠나버리면 그땐 어디 가서 울어도 소용없어!”문지원은 그 대화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신기한 건 지석훈이 워낙 점잖고 진지한 사람이어서 집안 분위기도 매우 조용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퇴직해 한가로운 성격으로 매일 독서나 산책을 즐기는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호탕한 성격으로 남편에게 엄격하면서도 친화력이 강한 사람이었다.두 분 모두 차분한 듯하면서도 내면에 장난기를 숨기고 있는 아들을 낳을 것 같진 않았는데 이게 바로 유전자의 신비인가 싶었다.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그녀를 좋아해 주는 모습에 문지원도 안심했다. 확실히 시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한편 문지원의 아버지는 지석훈과 따로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정확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