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진 씨 잘 막으세요.”은서우는 큰 소리로 외치며 인명진이 여자를 제지하는 틈을 다급히 길가에 세워진 살수차로 달려갔다.은서우는 이미 온몸이 기름에 젖어있었고 옷이 몸에 불편하게 붙어있는 것도 잊은 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그 모습을 본 여자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며 인명진의 제압에서 벗어나려 애썼고 목이 쉬도록 외쳤다."도망가지 마. 너희 다 죽일 거야."인명진은 철옹성처럼 여자를 붙잡았다. 이마에는 굵은 핏줄이 드러나면서 분노한 목소리로 외쳤다.“제발 진정해.”은서우는 살수차에 도달해 필사적으로 차 문을 열고 차에 올라탔다.차 문은 쿵 소리가 나며 굳게 닫혔고 그 소리는 고요한 밤공기 속에 울려 퍼졌다.은서우는 시동을 걸기 위해 장치를 찾았다. 긴장과 초조함에 두 손은 떨렸고 눈은 낯선 버튼과 다이얼을 빠르게 훑으며 찾았다. 은서우의 손은 끝없이 운전대를 더듬었지만 계속 미끄러지는 손 때문에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얼굴에 튄 기름은 눈을 자극해 아프게 느껴졌다.바로 그때 갑자기 뒷자리에서 기침 소리가 들렸다. 은서우는 놀라서 급히 뒤를 돌아보았고 원래 차 뒷좌석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운전기사는 시끄러운 소리에 깨어난 듯했다.운전기사는 아직 잠에서 깨지 못한 듯한 상태였지만 은서우는 운전기사에게 절박하게 외치며 도움을 요청했다."기사님 도와주세요. 뒤쪽에서 불이 났어요. 살수차를 빨리 작동시키지 않으면 모두 다 끝이에요.”운전기사는 은서우의 말에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며 창밖을 확인했다.여자가 미친 듯이 몸부림치고 있는 자리에서는 작은 불꽃이 바닥의 기름 웅덩이를 뚫고 솟구쳤다.그 불길은 빠르게 퍼져나가며 눈 깜짝할 사이에 살수차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매캐한 연기가 강하게 몰려들어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코를 찔렀다.운전기사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은서우 탓을 할 새도 없이 재빠르게 직업정신을 발휘했다.운전기사는 양손으로 조작 기구를 다루며 발로는 클러치와 가속 페달을 한
은서우는 여전히 두려움에 몸을 떨고 있었다. 인명진은 그녀를 조용히 품에 안고 그녀에게 살짝 기대었다.한 번, 또 한 번. 그는 그녀의 등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안심시켜 주었다.경찰차 안은 묵직한 침묵이 감돌았다. 차창을 통해 비치는 붉고 파란 경광등만이 차 안의 지친 얼굴들을 비추고 있었다.은서우는 얼굴을 인명진의 품에 깊숙이 파묻고 그의 안정된 심장 박동 소리에 귀를 울렸다. 심장 박동 소리는 은서우의 긴장된 마음을 조금씩 가라앉혔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있던 은서우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인명진의 걱정과 애정이 가득 담긴 눈을 보며 나직이 속삭였다.“우리 끝내 살아남았네요. 정말… 한순간만 더 늦었으면…”은서우는 울먹이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인명진은 그녀의 얼굴에 남아있는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주며 떨리는 목소리로 나직이 말했다.“걱정하지 마요. 다 지나갔어요. 내가 있잖아요.”간단한 몇 마디에 은서우는 안심이 되었다.전방에 앉아 있던 여경이 돌아보며 두 병의 물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부드럽게 말했다.“물 좀 드세요. 진정하시고 경찰서에 가서 진술서만 작성하시면 금방 집에 가서 쉬실 수 있습니다.”“감사합니다.”은서우는 물을 받아 들고 나직이 말했지만, 손은 여전히 인명진의 손을 꼭 쥐고 있었다.그의 손을 놓으면 그가 사라질 것만 같은 두려움이 밀려와서 놓을 수가 없었다.경찰서에 도착하자 눈이 부시게 밝은 조명이 그들을 맞았다. 두 사람은 경찰의 안내를 따라 진술실로 들어가 사건의 전후를 하나하나 세세하게 설명했다.위험한 순간들이 떠오를 때마다 은서우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졌다. 인명진은 조용히 그녀 곁에서 그녀의 손을 잡고 있었다.진술이 끝날 즈음, 하늘은 이미 새벽을 깨우며 밝아져 있었다. 경찰서 마당엔 아침 햇살이 가득 비추고 있었다.인명진은 택시를 잡고 은서우를 조심스럽게 뒷자리에 태운 후 자신도 뒤따라 탔다.차 안에서 은서우는 지친 몸을 인명진의 어깨에 기대고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그 익숙하면서도
그 말에 깜짝 놀란 은서우는 인명진을 향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한번 가볼래요?”어찌 됐든 아는 사이니 한 번쯤은 가볼 수 있는 일이었다.잠시 고민에 빠지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야죠.”무의식적으로 실망한 기분이 들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괜찮아졌다. 한편으로는 인명진이 정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정이 많다는 건 좋은 일이다.그렇게 자신을 위로하고 나니 기분이 많이 좋아졌다. 바로 그때, 인명진이 그녀를 향해 물었다.“갈이 갈래요? 마침 오늘은 일정도 없잖아요.”병원 원장이니 자연히 병원의 업무에 대해 대충 알고 있었다. 특히 은서우의 일정에 대해서는 가장 잘 알고 있었다.그의 말대로 은서우는 오늘 확실히 일정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제안에 깜짝 놀란 은서우는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나랑 같이요?”“네. 대학원에 들어가면 뇌의 질환에 관해서도 배우게 될 거예요. 좋은 경험이 될 거예요.”그녀는 한참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사실 가고 싶었다. 게다가 인명진이 말한 이유도 아주 합당했고 이 상황에서 안 가겠다고 내빼는 건 좀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흔쾌히 가겠다고 승낙했다. 이틀 뒤, 은서우는 인명진의 차를 타고 함께 이동했다. 염정아는 이미 병원에 없는 상태였고 전화를 마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요양원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이건 병원과 그녀의 가족이 결정한 일이 아니었다.그녀 스스로 요구한 것이었다.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 이런 요구가 있을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이미 말한 이상 가족들은 그녀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다행히 요양원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고 차로 몇 분 정도의 거리였다.“명진 오빠 보고 싶어요. 오빠를 찾아주세요. 오빠 말고 다른 사람은 아무도 원하지 않아요.”가까이 다가가자 목청껏 외치는 소리에 은서우는 순간 멈칫했다.옆에 있던 인명진도 그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그는 훨씬 침착했고 이런 광기 어린 고백을 들어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은서우가 안으로 들
간병인의 마음을 단번에 대변하는 말 한마디였다.간병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사람들도 덩달아 한숨을 내쉬었고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다만 어쩔 수 없죠. 어쨌든 이곳으로 온 환자이니 저희가 케어를 할 수밖에요.”간병인은 그제야 인명진 옆에 있는 은서우를 발견하였다. 은서우과 인명진 두 사람은 꽤 친한 사이 같아 보였다.보기에는 교류가 많지 않지만 서 있는 모습을 보면 얼핏 알 수 있었다. 은서우는 저도 모르게 인명진의 옆으로 가까이 다가갔고 서 있는 자세가 오른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었다. 아마도 그녀 자신조차도 그걸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간병인은 눈빛을 반짝이더니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어찌 됐든 사람을 데려오지 말아야 했습니다.”간병인은 침대에 누워있는 그 여자를 가리키며 말했다.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말했지만 사실 은서우는 다 들을 수 있었다.은서우의 속눈썹이 불안하게 떨렸고 그녀는 인명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인명진의 안색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들어가도 되겠습니까?”간병인은 자연히 그들의 앞길을 막지 않았고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갔다.침대에 누워있던 여자는 진정제의 효과인 것인지 그를 보고도 감정이 격해지지 않았다. 다만 그를 쳐다보는 눈빛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명진 오빠, 저 보러 온 거예요? 오빠가 올 줄 알았어요.”그녀는 그의 팔을 잡아당기며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애타게 기다렸는지 하소연을 늘어놓았다.반면, 그와 함께 온 은서우는 투명 인간이 되어버렸고 염정아의 눈에는 은서우가 전혀 보이지 않은 듯했다.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지만 인명진의 행동에 그런 마음도 이내 가라앉았다. 그가 약간 뒤로 물러서면서 그녀의 손길을 피했고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우린 네 병을 진찰하러 온 거야.”그는 은서우를 쳐다보며 유난히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의료 기계를 준비하라고 지시하였다.단번에 기분이 풀렸고 자신의 속마음을 들키기라도 한 듯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녀는 쪼그리
하지만 사람을 찾는 일은 지체하면 안 되었다. 더 늦으면 사고가 날 수도 있으니까.그들은 모두 흩어져서 요양원 안을 구석구석 다 뒤졌다.“염정아.”은서우는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여기저기 돌아다녔다.갑자기 앞에서 누군가 낮게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가려져 있어서 보이지가 않았지만 숨어 우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이곳은 각종 이상한 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이 있는 곳이었고 병원과 정신병원에 가기를 꺼리는 환자들을 위한 요양원이었다. 그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이거나 성격과 몸이 건강하지 않은 뇌전증 환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어느 쪽이든 무섭기는 마찬가지였다.그러나 용기를 내어 앞으로 다가갔다. 그들이 찾고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염정아? 염정아 맞아?”거의 다가갔을 때, 그녀의 앞에 갑자기 발 한 짝이 나타났고 그녀가 방심한 틈을 타서 그녀를 넘어뜨리려고 했다. 그러나 이런 장면은 드라마에서 있을 법한 장면이었다.대낮에 갑자기 눈앞에 발 하나가 튀어나오는데 어떻게 보이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은서우는 그 자리에서 멈추고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그만해, 염정아. 너인 거 알고 있으니까 이제 그만 숨어.”“짜증 나 죽겠네.”그녀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뒤에서 눈시울이 붉어진 여자가 눈을 비비며 눈앞에 나타났다. 염정아는 그녀를 노려보며 적개심과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나이가 어리고 통통한 얼굴이라 그런 표정을 짓고 있어도 전혀 밉지가 않았고 화도 나지 않았다.은서우는 다정하게 입을 열었다.“왜 여기 혼자 숨어 있어? 밖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찾고 있었는데. 네가 안 보여서 다들 걱정했잖아.”“제 걱정 해달라고 했어요? 그리고 그 사람들은 제 걱정 안 해요. 우리 부모님도 제 걱정을 하지 않는데... 부모님은 그저 제가 창피한 줄만...”말끝을 흐렸지만 은서우는 똑똑히 들었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다름이 아니라 자신의 처지가 떠
단 한 마디의 해명도 더 없었다.다행히도 사람들은 그 상황을 보고 더는 묻지 않았다. 그리고 염정아의 행동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할 수가 없었다.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돈을 내고 이곳에 있는 사람이고 그들은 단지 간병인일 뿐인데. 돈을 받고 일하는 입장에서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간병인들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를 떴다. 인명진은 의약 상자에 있는 장비를 꺼내서 은서우에게 검사를 하라고 했다.염정아가 평소처럼 저항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이번에는 콧방귀만 뀌더니 가만히 있었다. 그 반응에 인명진은 물론이고 은서우도 깜짝 놀랐다. 설마 그 몇 마디에 태도가 이렇게 바뀐 걸까?그건 아니었다. 검사를 마치고 난 뒤 염정아는 또 난리를 피우기 시작했고 은서우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선생님이 저한테 그런 말을 했다고 해서 제가 선생님을 좋게 생각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말아요.”“명진 오빠를 저한테 돌려주지 않는 이상 저도 선생님을 가만두지 않을 거니까. 여기서 나가면 첫 번째로 선생님을 찾아갈 거예요.”독한 말이긴 하지만 협박을 당해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은서우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겨우 열여덟짜리가 무슨 협박을 하겠는가?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그래. 기다릴게. 그러니까 얼른 나아.”말을 마친 그녀는 기록된 결과들을 보면서 염정아에게 주의 사항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염정아는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그날 오후, 두 사람은 요양원을 나섰고 염정아는 많이 아쉬워했다. 그러나 일하러 가겠다는 두 의사를 붙잡아둘 수가 없었다. 특히 원장인 인명진은 더 붙잡고 있을 수가 없었고 아무리 떼를 써도 소용이 없었다. 돌아가는 길, 은서우는 떠나기 전에 간병인을 찾아가 알게 된 정보를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자신이 한숨을 쉬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한 것 같다.그 소리에 인명진이 물었다.“왜 한숨을 쉬어요? 뭐 기분 나쁜 일 있어요?”은서우는 머뭇거리다가 그를 쳐다보았다. “염정
사실 인명진도 기회를 봐서 염정아의 집에 가보고 싶었다. 어쨌든 그도 염정아의 주치의라고 할 수 있으니까. 환자의 병세가 오랫동안 치료되지 않는 상황에서 주치의가 집에 와서 환자의 거주 환경을 확인하는 것은 매우 정상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초대도 없이 찾아가는 건 예의가 아닌 듯했고 섣불리 찾아갈 수가 없었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은서우도 같은 생각이라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일은 그만 얘기해요. 어차피 당분간은 염정아가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니까. 그동안은 우리가 많이 돌봐줘요.”그 후, 은서우는 자주 요양원으로 갔고 매번 갈 때마다 염정아한테 물건을 챙겨다 주었다.시간이 지나면서 염정아는 여전히 차가운 태도였지만 적어도 이전보다는 그녀를 대하는 태도가 훨씬 부드러워졌다. 어느 하루, 은서우는 똑같이 요양원으로 향했고 염정아가 좋아하는 오렌지도 챙겨갔다.오렌지는 특별히 과일 가게에 들러 먹음직스러운 것으로 몇 개 골랐다. 염정아가 오렌지를 보고 기뻐할 표정을 생각하니 은서우는 힘차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도착해서 문을 열기도 전에 안에서 원망의 소리가 들려왔다.“네 동생이 좋은 마음으로 널 보러 여기까지 왔는데 고맙다고는 하지 못할망정, 어떻게 이래? 내가 평소에 널 이렇게 가르쳤니?”“동생한테 잘하라고 한 말들은 귓등으로 들은 거니?”점점 더 입에 담기도 험한 말들을 쏟아냈다. 문밖에 서 있는 은서우도 그 소리를 듣고 마음이 차가워졌다. 그러나 병실 안의 사람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고 결국 참지 못한 은서우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만하세요.”문이 벽에 세차게 부딪혔고 엄청난 소리에 안에 있던 사람은 이내 입을 다물었다.그러나 병실 안에 있던 여자는 이내 얼굴이 일그러진 채로 들어오는 은서우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그쪽은 누구예요? 들어오기 전에 노크부터 하는 거 몰라요? 예의가 없네.”그녀는 말하면서 몸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아까 문밖에서는 이 여자의 모습이 잘 안 보였는데 이제 들어오니 잘 보였다.염
눈물을 닦아주고 은서우는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저들 때문에... 자신을 탓하지 마.”“네?”“저 사람들은 네가 이렇게까지 할 가치가 없는 사람들이야. 저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 노력하는 법을 배우는 게 아니라 너 자신을 사랑하고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해.”은서우는 염정아를 쳐다보면서 추억에 잠긴 듯했다. 아마도 예전 자신의 모습이 떠오른 것 같다. 소씨 가문에서의 지난날들, 그녀 또한 염정아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짓밟히고 힘들게 살았었다. 그때는 어려서 잘 몰랐다. 자신이 노력만 하면 소씨 가문에서 언젠가는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바뀌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그러나 많은 시련을 겪고 나니 깨닫게 되었다. 때로는 환심을 살 가치가 없는 사람도 존재한다는 것을. 어쩌면 그 사람한테 비굴하게 비위를 맞춰야 할 때면 두 사람 사이의 관계는 이미 끝난 것이 아닐까?“가끔은 포기하는 법을 배우는 것도 좋은 일이야.”방안은 한동안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얼마 후, 염정아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선생님도 예전에 이런 경험이 있었어요?”염정아가 예민한 것이 아니라 그녀의 말이 너무 티가 났기 때문이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자신의 경험을 차근차근 들려주었다.염정아는 옆에서 열심히 듣고 있었다. 다 듣고 나서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생각에 잠겼다.한편, 병원에 일이 있었던 은서우는 요양원에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염정아한테 최대한 그들을 상대하지 말라고 몇 마디 당부한 뒤 자리를 떴다. 병원에 돌아온 후, 그녀는 이전에 계속 내버려두었던 논문이 떠올랐고 그날 저녁 밤을 새워가면서 그 논문을 마무리 지었다.다음 날, 완성된 논문을 들고 그녀는 인명진을 찾아갔다. 논문을 읽으면서 인명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 모습에 은서우는 논문이 통과되지 않을까 봐 잔뜩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어때요?”그가 논문을 내려놓고 그녀를 향해 웃었다.“잘 썼네요. 이제는 선생님이 필요 없겠는데요
“왜? 마음이라도 아픈 거야?”“알았어요.”그녀는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잠시 후, 집으로 돌아와 불을 켜던 그녀는 소파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최지후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왜 불도 안 켜고 있어요?”여울은 놀란 가슴을 어루만지며 물었다. “어두컴컴한 게 좋아서.”그가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이리 와봐.”여울은 얌전히 다가가 살짝 몸을 숙여 그의 관자놀이를 주물렀다.“왜요? 기분 안 좋아요?”“응.”무심하게 대답하던 그가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당신은 나 배신하지 않을 거지?”그 말에 여울은 손끝이 살짝 떨렸다.‘설마 최지후가 뭔가 눈치라도 챈 걸까?’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에요?”“그냥 궁금해서.”그가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당연히 그럴 일 없죠. 난 지후 씨 곁에 평생 있을 거예요.”그녀는 예쁜 말로 골라서 했고 원하는 답을 들은 최지후는 이내 환하게 웃었다.“그래. 당신이 날 배신한다면 내가 당신을 지옥으로 끌고 갈 거야.”농담처럼 들리지만 왠지 모르게 등골이 오싹해졌다. ...“윤슬 씨, 나 어떡하죠? 최근에 회사의 프로젝트들이 지석훈 때문에 다 엉망이 되어버렸어요.”엄우정이 다급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지금 이 순간, 그녀는 문지원을 건드린 것이 엄청 후회되었다.강윤슬은 그녀를 보며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게 바보같이 왜 일을 만들어서는... 일이 틀어지니까 날 찾아와?’“윤슬 씨, 말 좀 해봐요. 내가 누구 때문에 그런 건데요?”강윤슬이 말이 없자 엄우정은 더 초조해졌다.이번 일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집에도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강윤슬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우정 씨, 석훈이는 이제 우정 씨가 알던 사람이 아니에요. 나도 우정 씨를 어떻게 도와줘야 할지 모르겠어요.”잠시 머뭇거리던 그녀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문지원 씨를 찾아간다면 어쩌면 되돌릴 수 있을지도 몰라요. 문지원 씨는 줄곧 우정 씨와 협력하고 싶어
최주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역시 그럴 줄 알았어. 문지원 씨 때문이 아니라면 네가 나한테 보자고 할 일도 없겠지.”“말해 봐.”한참을 망설이던 지석훈은 끝내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 못했다.“됐다. 술이나 먹으러 가자.”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 최주하도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술잔을 들자마자 최주하의 핸드폰이 울렸고 확인해 보니 여울한테서 걸려 온 전화였다. “잠깐 전화 좀 받게 올게.”지석훈은 고개를 끄덕였고 최주하는 밖으로 나오며 통화버튼을 눌렀다. “무슨 일이야?”“볼 일이 있어서요...”전화를 끊고 최주하는 다시 지석훈에게로 다가갔다. “미안하다. 일이 있어서 가 봐야 할 것 같아. 나중에 시간 되면 내가 술 살게.”“됐어. 일 있으면 가.”최주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섰다.혼자 술을 마시던 지석훈은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신한 그룹의 그 프로젝트, 나한테 넘겨.”전화를 끊은 후, 그는 눈앞의 술잔을 쳐다보며 깊은 생각에 빠져 버렸다. 자신이 왜 신한 그룹을 겨냥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모든 것이 본능에서 비롯된 것 같았다. 한편, 프라이빗한 호텔에 도착한 최주하는 흰 원피스를 입은 채 소파에 앉아 있는 꽃 같은 여인, 여울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의 눈빛은 아무런 파동이 없었다. “말해.”여울은 그를 쳐다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주하 씨, 최지후 씨가 저한테 마음을 완전히 연 것 같아요.”그녀의 말대로 확실히 성공적이었다. 현재 최지후는 여울을 완전히 신임하고 있었고 무방비 상태라 그녀에게 많은 편의를 제공한 것도 사실이다.“알아. 하지만 난 더 가치가 있는 것이 필요해.”최주하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왠지 모르게 갑자기 부담감이 확 밀려왔고 최주하가 만족할 만한 답을 내놓지 못한다면 자신의 처지가 곤란해질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저... 최지후 씨가 최근에 입찰을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입찰 문서를 손에 넣었어요.”그녀는 급히 입을 열
문지원은 이미 정신이 혼미해진 상태였고 온몸이 뜨겁게 달아올라 고통스러웠다. 지석훈에게 붙어있으면 조금은 편안해지는 느낌이었다.손을 뻗어 그의 목을 감싸고는 필사적으로 그를 향해 더 가까이 다가갔다. 부드러운 입술이 닿자 흠칫 놀라던 그의 눈빛이 갑자기 어두워졌다.그가 앞에 앉아 있는 운전기사를 향해 입을 열었다.“출발해요. 가장 가까운 호텔로 갑시다.”이내 가림막이 내려졌고 문지원은 여전히 끙끙거리며 그의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길에 그의 몸도 덩달아 뜨거워졌다. 얼마 후, 차가 호텔 앞에 멈춰 섰고 그가 그녀를 안아 들고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프런트 데스크에 다가가 블랙 카드를 꺼내며 한마디 했다.“스위트룸으로 잡아줘요.”프런트 데스크의 직원은 훤히 다 꿰뚫어 보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룸에 들어온 후, 그는 문지원을 침대에 눕혔다. 막 일어나 자리를 뜨려고 하는데 그녀가 그의 목을 감싸며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가지 마요.”그녀를 한참 동안 쳐다보고는 입을 열었다.“문지원, 이건 당신이 선택한 거야.”더 이상 그도 참지 않았고 들끓어 오른 욕정을 드러냈다. ...뜨거웠던 밤이 지나고 아침 햇살이 창문을 통해 들어왔다. 잠에서 깨어난 문지원이 몸을 움직이는데 갑자기 온몸이 쑤시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자마자 그녀는 바로 고개를 돌렸고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그가 천천히 눈을 뜨는데 눈빛은 평온하기만 했다.“깼어?”“저기... 우리...”그녀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지만 지석훈은 아주 자연스러웠다.“걱정하지 마. 책임질게.”“책임... 책임질 필요 없어요. 어젯밤 일은 사고였어요.”어젯밤의 일에 대해 기억이 남아있었고 자신이 약을 먹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이 일로 지석훈한테 뭔가를 요구하고 싶지 않았고 오히려 그한테 고마웠다. 그가 아니었다면 어젯밤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도 모르니까.“왜? 그렇게 나랑 선 긋고 싶은 거야?”그녀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그는 차갑게 입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럼 부탁 좀 드릴게요.”종업원은 바로 환하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부탁이라니요. 제가 해야 할 일입니다. 다른 분이셨다면 아마 저한테 드레스값을 배상하라고 했을 거예요. 제 형편에 그건 턱도 없는 일이죠. 정말 감사드립니다.”문지원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그냥 옷 한 벌일 뿐이에요.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그리고 그렇게 비싼 것도 아니에요.”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탈의실로 향했다.“바로 여기입니다. 들어가시죠.”그녀는 별생각 없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고 탈의실 안에는 아주 좋은 향이 났고 옷장에는 깨끗한 새 옷이 걸려 있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세련미가 넘치는 옷들이었다. 손을 뻗어 옷들을 어루만지며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연한 파란색의 긴 드레스를 선택했다. 입고 있던 드레스의 지퍼를 여는데 손이 지퍼에 잘 닿지가 않았다. 사람한테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지만 이곳은 사람이 흔히 드나드는 곳이 아니었다. 지퍼를 열려고 애를 쓰는데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내가 도와줄까?”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급히 고개를 돌리니 음흉한 얼굴의 남자가 눈앞에 서 있었다.딱 봐도 좋은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순식간에 그녀의 안색이 차가워졌다.“여긴 여자 탈의실이에요. 당장 나가시죠.”말을 마친 그녀가 밖으로 걸어 나가려는데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졌고 몸이 나른해지면 바닥에 쓰러졌다. 온몸이 뜨겁게 달아오른 그녀를 남자가 번쩍 안아 올리며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내가 많이 예뻐해 줄게.”아직 약간의 의식이 남아 있던 그녀는 몸부림치고 싶었지만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파티장 안, 엄우정은 일부러 무심코 한마디 했다.“방금 탈의실 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파티장에서 도대체 뭐 하는 짓인지.”다른 여자들도 그 소리를 듣고는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막았다. “설마요. 혹시 방금 문...”순간 그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사람들은
지석훈은 밖으로 나온 뒤 그녀를 놓아주었고 문지원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뭐 하는 거예요? 이번 협력이 나한테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그가 어두운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뭐 대단한 프로젝트도 아니잖아. 당신은 자존심도 없어? 그렇게 모욕을 주는 데도 왜 가만히 있는 건데?”그의 말을 듣고 나니 왠지 모르게 억울한 느낌이 들어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순간 당황한 지석훈은 얼른 휴지를 꺼내 건네주었다.“왜 울어?”방금 엄우정한테 그런 모욕을 당하고도 그녀는 울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지석훈의 말 몇 마디에 그녀는 억울한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나도 뭐 수모를 당하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아요? 하지만 방법이 없잖아요. 문정 그룹은 이번 협력이 필요하고 난 의지할 사람이 없어요.”“내가 다른 프로젝트를 찾아줄 테니까 나한테 의지해.”그가 갑자기 한마디 내뱉었다. 그 말에 문지원도 그도 모두 어리둥절해졌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가 다시 말을 이어갔다.“엄우정과의 협력을 내가 망쳤으니 당연히 내가 보상해 줘야지.”“준비하고 있어. 저녁에 나랑 같이 파티에 참석해.”말을 마치고 그는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문지원은 웃음이 저절로 나왔고 마음속이 따뜻해졌다. ...그날 저녁, 문지원은 지석훈을 따라 파티 장소로 향했다. 서먹해하는 그녀의 모습에 그가 팔을 뻗으며 입을 열었다.“팔짱 껴.”망설이고 있는데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팔짱 안 끼고 나 혼자 들어가게 둘 거야? 사람들이 날 비웃을 텐데?”입술을 오므리던 그녀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팔을 잡았다. 그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살짝 올라갔다.저도 모르게 본인이 웃었다는 사실조차 그는 자각하지 못한 것 같다. 파티장에 들어간 뒤, 지석훈은 그녀를 데리고 지인들과 인사를 나누었다.멀지 않은 곳, 강윤슬이 그 모습을 지켜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문지원, 이 여우 같은 년.”“지석훈이 문지원한테 푹 빠진 모양이네요.”이
고개를 숙이고 자세를 낮추는 그녀의 모습에 엄우정은 엄청 통쾌했다.“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기회를 줘야죠. 하지만...”잠시 말을 멈추던 엄우정은 끝내 뒷말을 계속하지 않았다. 반면, 그 어떠한 기회도 놓치기 싫었던 문지원은 이내 앞으로 다가서며 물었다.“하지만요?”엄우정은 악랄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카톡의 모든 남자 친구에게 당신이 다른 여자의 남자 친구를 빼앗은 나쁜 여자라고 문자를 보내요.”그 순간, 문지원은 분노에 가득 찬 눈빛을 보이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건 그녀에 대한 모욕이었다.마음속으로 대충 짐작이 된 그녀는 분노가 섞인 말투로 입을 열었다. “엄 대표님, 협력에 대해 얘기하는 자리입니다. 대표님께서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장난을 치시면 안 되죠. 사적인 감정을 업무에 끌어들이면 되겠습니까?”“그래요? 그럼 더 이상 할 말이 없을 것 같네요.”문지원의 말에 엄우정의 얼굴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문지원, 네까짓 게 뭔데...’“문성 그룹에서 이번 기회를 놓친 건 오롯이 당신 문지원 때문이라는 것만 알아둬요.”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말 한마디를 남긴 채 발걸음을 옮겼다.그 순간, 문지원이 그녀의 팔목을 덥석 잡았고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팔목을 잡고 있는 문지원의 눈빛이 조금은 차분해졌다. 침을 꿀꺽 삼키더니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방금은 제가 감정 조절이 잘 안됐습니다.”“그 뜻은 문자를 보내겠다는 말인가요?”그녀의 요구는 악랄했고 이번 협력에 대해 장난처럼 가볍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방법이 없었던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억지로 이 굴욕을 삼켰다. 그녀한테는 지금 이런 상황에서 제멋대로 할 수 있는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다. 문자를 보내는 것일 뿐, 어디가 덧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진실 게임을 한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피식 웃던 엄우정은 조롱이 가득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문지원 씨,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설마 달랑 문자 하나
최지후는 피식 웃었다. 눈앞의 여자가 순수하고 귀여웠다. “여울 씨 생각은?”여울은 그가 최주하와 생김새는 비슷하지만 최주하에 비하면 어리석고 오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쉽게 손에 잡히다니, 너무 시시한데...’잠깐 망설이던 그녀는 손을 떨며 치마 뒤에 있는 지퍼를 열었다. 지퍼를 반쯤 내리자 매끄럽고 하얀 등이 훤히 드러났고 그가 바로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여기서 말고.”모처럼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났으니 여기서 대충 관계를 가지고 싶지는 않았다.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그녀는 순순히 그를 따라 나갔다. 한편, 최주하는 핸드폰에 올라온 사진을 보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최지후가 이렇게 쉽게 걸려들 것이라는 건 진작부터 예상하고 있던 일이라 전혀 놀라지 않았다. 남들 앞에서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는 사생아의 신분이니 좋은 여자를 만나봤을 리가 있겠는가?그는 최지후 자신보다 최지후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었다. 잠시 후, 그가 핸드폰을 내려놓았다....캐슬 호텔.룸 안, 문지원은 두 손을 꼭 잡은 채 초조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녀는 가끔 고개를 숙이고 손목시계를 확인했고 약속된 시간을 이미 훨씬 넘긴 시각이었다. 미팅을 하기로 했던 협력자가 나타나지 않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심하게 찌푸렸다. 얼마 후, 문 앞에서 자물쇠가 비틀리는 소리가 들렸고 검은색 긴 드레스를 입은 차가운 여인이 안으로 들어왔다. “문 대표님, 죄송해요. 제가 좀 늦었네요.”문지원은 바로 고개를 들었고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협력은 그녀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었다. 오랜 기다림에 대한 분노는 온데간데없고 눈앞의 사람이 약속 장소에 나타난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문지원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저도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말을 하면서 문지원은 손을 뻗어 의자를 끌어당겼다. 그러나 눈앞의 여자는 자리에 앉지 않고 그녀를 쳐다보며 차갑게 웃었다 .“문지원 씨, 저랑 협력하고 싶은 거예요?”
방 안에 들어온 여자들은 저마다 다른 모습과 옷차림을 하고 있었지만 모두 예외 없이 눈빛 속에 욕망이 가득했다.최지후는 여자들을 한번 스쳐본 후 흥미를 잃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여자들은 흔히 보던 사람들이라 특별할 게 없었다.그는 차가운 태도로 매니저를 쳐다보며 물었다.“이게 네가 말한 새로 온 애들이야?”술집 매니저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최지후는 그의 중요한 고객이었기에 실수하면 큰일 날 수 있었다.“도련님 혹시 마음에 안 드시나요?” 술집 매니저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꺼냈다.최지후는 잠시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 없이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테이블에 놓인 술잔을 들어 매니저의 얼굴에 확 뿌렸다.“너 지금 나 무시하는 거지? 감히 이런 것들로 대충 넘기려고?”술집 매니저는 잠시 멈칫하다가 곧바로 반응했다. 그는 얼굴을 닦으며 더욱 기를 쓰고 웃음을 지었다. “그럴 리가요. 절대 아니에요.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러겠어요. 도련님 마음에 안 드신다면 바로 다른 사람들로 교체해 드릴게요.”그때 문이 열리며 한 여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여기 802호 맞나요?”최지후는 그 목소리에 곧바로 반응했다. 그는 목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봤고 그곳에 눈길이 멈췄다.여자는 흰색 긴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검은 머리는 어깨 위로 흘러내려 있었다. 얼굴에는 화장기가 전혀 없었지만 자연스러우며 청순해 보였다. 무엇보다 그녀의 눈에는 불안하고 긴장된 기색이 가득했다.그녀는 신임임이 분명했다.최지후는 술집 매니저를 놓으며 말했다. “이런 사람이 있으면 진작에 데려왔어야지. 왜 이제야 데려왔어? 좀 더 일찍 데려왔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술집 매니저는 최지후가 눈앞의 여자를 매우 만족스러워하는 것을 알아챘다. 그는 머릿속으로 그가 데려온 사람 중에 이 여자가 있었나 하고 잠시 생각해 보았다.그래도 그는 별로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어쨌든 최지후가 만족하면 그게 제일 중요했다.그는 재치 있게 말했다.“좋은 건 항
여자는 잠시 멈칫하다가 최주하가 너무 많은 금액에 당황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급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저도 알아요. 이 돈이 적은 금액은 아니라는 거... 하지만 저는...”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최주하가 말을 끊었다. 그는 다소 불쾌한 듯 여자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2억만 있으면 뭐든지 할 거야?”여자는 그 말에 희망의 불씨가 다시 피어났다. 그녀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저 뭐든지 할 수 있어요.”최주하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좋아. 도와줄 수는 있어. 그런데 너도 나를 위해 뭔가를 해야 해.”여자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어요.”그러자 그녀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일어나서 최주하의 옷을 풀려고 손을 뻗었다.최주하는 눈살을 찌푸리며 여자의 손목을 잡으며 제지했다.“뭐 하는 짓이야?”그의 눈에 드러난 혐오감에 여자는 순간 얼어붙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필요하지 않으신가요?”이건 서로가 알고 있는 은유적인 표현이었다. 여자의 의도는 두 사람 모두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여자는 지금 자신이 가진 것 중에서 최주하가 관심을 가질 만한 것은 이 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확실히 네 도움이 필요해. 하지만 그 대상은 내가 아니라 내 동생이야.”그렇게 말하며 최주하는 휴대전화에서 한 장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사진 속 남자는 최주하와 어느 정도 닮아 보였다.“내 동생이야. 내 동생을 유혹해서 그 옆에 남아있는 거야.”최주하는 간결하게 설명했다.여자는 혼란스러워하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조금은 꺼리는 눈치였다. 그녀의 목표는 분명 최주하였기 때문이다.최주하는 그녀의 태도를 보고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 “원하지 않는다면 그냥 나가. 강제로 시킬 생각은 없어.”“저 할게요. 하겠습니다.”여자는 곧장 마음을 다잡으며 간절히 말했다.최주하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실망하게 하지 마.”최주하의 말이 끝나자마자 여자의 휴대전화에는 1억이 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