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 도착한 인명진은 시끄러운 소리에 이끌려 은서우가 있는 사무실로 향했고 눈앞에 펼쳐진 아수라장을 보고 미간을 찌푸리며 빠른 걸음으로 연희진한테 다가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 저는 이병원 원장입니다. 일단 진정하시고 너무 위험하니까 거기서 내려오시죠. 이번 일에 대해서는 철저한 조사를 거친 뒤 전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지금 충동적으로 행동하시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상황이 더 악화할 수도 있어요.”인명진은 말하면서 옆에 있던 보안 요원에게 눈짓했고 그들은 창문 옆으로 살며시 다가가 연희진을 구할 기회를 살폈다.이어서 인명진은 몸을 돌려 소상태를 보며 말했다.“그리고 소 선생님, 어떻게 된 일인지 제대로 조사도 하기 전에 그런 조건으로 은 선생님을 협박하는 건 아니죠. 일방적으로 한쪽 말만 듣고 잘 잘못을 확정할 수는 없어요. 이는 분명히 법의 공정 원칙에도 어긋나는 일이에요.”소상태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인 원장님, 은서우한테 속지 마세요. 은서우가 우리 아들을 저렇게 만든 걸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요.”인명진은 냉정하게 말했다.“지금 소 선생님의 심정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병원에도 절차라는 게 있어요. 경찰들도 수사할 테니 진상은 분명히 밝혀지겠죠. 은 선생님은 지금까지 병원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줬었고, 아무 증거 없이 함부로 은 선생님 잘못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어요.”인명진은 또 병원 임원들을 향해 말했다.“여러분들도 너무 당황하지 마시고 경찰들이 와서 제대로 조사하기 전에는 맹목적으로 은 선생님을 비난하지도 마세요. 경찰 조사에 적극 협조하시고 남은 건 조사 결과가 나오면 다시 의논하죠.”임원들은 여전히 불만이 남아 있었지만, 병원장의 말이라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인명진은 이어서 소태훈의 부모를 향해 말했다.“소 선생님 그리고 사모님, 부모로서 지금 심정이 어떨지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극단적인 방법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요. 제가 직접 이 일에 관여할 거고 전문적인
소상태 등이 돌아간 후에도 이 사건은 사그라지지 않았다.아직 사실 여부가 밝혀지지 않았지만 대다수 사람들 눈에는 은서우가 이미 가해자로 보였다. 순식간에 그녀는 고립된 존재로 되었고 그녀를 예전처럼 대해 주는 사람은 오직 인명진뿐이었다.병원에서 누군가 험담을 늘어놓으면 인명진이 직접 나서서 막았고 그들에게 경고까지 해주었다.“병원은 환자를 치료하는 곳이지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곳이 아니에요. 떠들고 싶으면 다른 곳으로 가시죠.”그제야 사람들의 험담이 조금 수그러들었다....인명진은 사무실로 돌아왔다.은서우는 눈가를 적신 눈물을 훔치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평소처럼 미소를 지어 보였다.“원장님, 믿어 주셔서 감사해요.”인명진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그는 말했다.“웃고 싶지 않으면 억지 미소 짓지 마세요.”그 말을 들은 은서우는 순간 멍해졌다.“억지로 웃는 거 별로예요.”“죄송해요, 저...”은서우는 무의식적으로 사과하려 했다.최근 들어 그녀는 무슨 일이 생기든 먼저 사과부터 하는 습관이 생겨버렸다. 자기도 모르게 굽신거리는 것이었다.그걸 알아챈 인명진은 진지하고 단호하게 말했다.“저한테 미안해할 거 없어요. 서우 씨가 가장 미안해야 할 사람은 서우 씨 본인이에요. 다른 사람들이 그런 소문을 퍼뜨리는데 왜 반박하지 않으세요?”은서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참 후에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말했다.“설명해 봤자 아무도 믿지 않더라고요.”거짓 소문은 쉽게 퍼지지만 사실을 바로잡는 건 생각보다 많이 힘들었다.루머를 퍼뜨리는 사람들은 입을 열기만 하면 거짓말을 했고 진실이 무엇인지는 애초에 관심도 없었다.이번 일도 마찬가지였다.모두가 배은망덕한 인간이라며 그녀를 욕했다.소씨 가문에서 그녀를 입양한 것을 두고 눈이 멀었다면서, 어리석은 선택이었다면서 떠들었다.하지만 아무도 그녀가 소씨 가문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지, 소씨 가문 사람들이 그녀를 어떻게 대했는지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았다.세상의 모든 악의가
은서우는 어릴 때부터 소씨 가문 사람들에게 좋은 대우를 받지 못했다. 소태훈도 계속 그녀에게 장난만 쳤다. 그땐 아직 어렸기에 독한 마음을 먹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괴롭힌 건 사실이었다.흔히 말하는 인간 말종들은 크면서 갑자기 망가지는 게 아니라 애초부터 썩어 있었던 것일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어릴 때부터 은서우는 늘 그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소태훈은 가끔 일부러 그녀를 문밖에 가둬놓기도 했고 때론 그녀의 숙제를 일부러 잃어버려서 제출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결국 온서우는 학교에서 벌을 받고 집에 돌아와서 또 소상태에게 또 혼났다. 창피한 짓 하지 말라며 말이다.“서우 씨를 그렇게 대했다고요?”듣기만 해도 인명진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은서우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어릴 때는 이해 하지 못했어요. 크고 나서는 알게 되었죠. 제가 친자식이 아니라서 그랬다는 걸 말이에요.”인명진은 코웃음을 치며 차갑게 말했다.“그건 그냥 핑계예요. 애초에 제대로 키울 생각이 없었으면 왜 굳이 입양했어요?”은서우는 말문이 막혔다. 그녀도 그게 궁금했던 것이다. 십수 년 동안, 이 의문은 그녀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내가 싫으면서 왜 입양한 걸까...’인명진은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차갑고 창백한 그의 얼굴이 조명 아래서 옥처럼 빛났다. 긴 손가락은 마디마디가 뚜렷했고 그가 손가락을 움직이는 모습이 눈길을 사로잡았다.은서우가 무의식적으로 그의 손을 쳐다보던 순간, 갑자기 인명진이 툭 던지듯 물었다.“그래서 아직도 그 사람들이랑 얽힐 생각이에요? 친자식이 아니라는 걸 알았는데 친부모를 찾아볼 생각은 안 해봤어요?”그 말을 듣자, 은서우의 눈꺼풀이 살짝 떨렸다.‘역시 찾고 싶은 거겠지.’인명진은 속으로 생각했다.그는 책상 위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며 무심한 듯 말했다.“그날 있었던 일을 자세히 말해봐요.”인명진이 말하는 그날이란 소태훈이 사고를 당하기 전의 상황이었다.은서우는 시간을 들여 그날의 일을 하나하나 설명했다.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
은서우는 지금 당장이라도 소태훈을 찾아가서 따지고 싶었지만 인명진이 그녀를 막아섰다.“지금 가봐야 얻을 수 있는 건 없어요. 소태훈 씨는 중환자실에 있고 아직 깨어나지도 않았어요. 가봤자 괜히 문제만 생길 거예요.”그 말을 듣고 나서야 은서우는 감정을 가라앉혔다.지금 그녀의 모든 행동은 감시당하고 있었다. 병원 안의 소문은 사그라졌지만 여전히 많은 시선이 은서우를 주시하고 있었고 그녀는 아직 혐의를 벗지 못했다.소태훈이 깨어나기 전까지 그녀는 가까이 갈 수조차 없었다. 만약 무슨 일이 생기면, 또다시 그녀에게 책임이 돌아갈 테니 말이다.은서우는 다시 자리에 앉아 얼굴을 감싸 쥐고 잠시 침묵했다.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인명진을 바라보면서 말했다.“고마워요. 제가 너무 경솔했어요. 명진 씨가 있어서 다행이에요.”그 말에 인명진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더니 잠시 후 그가 입을 열었다.“제가 직접 고른 조수인데 당연히 도와야죠. 걱정 마요. 단순히 간단한 검사만 하면 알 수 있으니까요.”하지만 그 단순한 일조차 쉽지는 않았다. 소태훈에게 간단한 검사를 하겠다는 말을 듣자 연희진이 필사적으로 막아섰다.“우리 아들 그런 거 절대 못 해요. 은서우, 너 양심이 있으면 이 의사를 당장 돌려보내!”은서우는 미간을 찌푸렸다.“원장님은 단순히 검사를 하려는 것뿐이에요. 다른 의도가 있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막으시는 거죠?”“내 아들이 이렇게 된 건 다 너 때문이야! 네가 무슨 말을 한들 누가 믿겠어?”연희진은 인명진을 돌려보내기 싫어하는 그녀의 태도에 화가 난 듯, 갑자기 주변 사람들에게 소리쳤다.“다들 여기 봐요! 이 아이예요. 우리 집에서 거둬들여 키운 양녀인데 며칠 전 우리 아들을 병원에 보냈죠.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모자라서 지금 또 저희를 해치려 하고 있어요!”그녀의 큰 목소리에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누군가 은서우를 알아보고 손가락질했다.“저도 알아요. 진짜 그런 일이 있었거든요. 그냥 두 마디 정도 말을 걸었을 뿐인데 기분 나쁘다고 그
연희진의 얼굴빛이 극도로 어두워졌다.병실로 들어간 은서우는 멈칫하더니 제자리에 멈춰 섰다.“소태훈, 너 깨어난 거야?”그녀는 멍하니 소태훈을 바라보며 깜짝 놀랐다.‘깨어났는데 왜 아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걸까? 분명 간호사가 지켜보고 있었을 텐데...’인명진의 표정은 점점 더 싸늘해졌고 그는 고개를 돌려 뒤에 서 있는 간호사를 쳐다보았다.“당직 간호사가 누구죠?””소민이에요.”“그만두라고 하세요.”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아무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소태훈은 순간 당황스러운 듯했지만 이내 금세 진정하며 오히려 역으로 말했다.“너 여기는 왜 들어왔어? 아직도 날 해칠 생각이야? 여긴 병원이야. 함부로 날뛰지 마.”그러면서 그녀 뒤에 서 있는 인명진을 힐끗 바라보며 비웃는 어조로 덧붙였다.“진짜로 사람이 죽기라도 하면 네 남자 친구도 널 지켜줄 수 없을걸?”그 말에 은서우는 짜증이 확 났다.“소태훈, 말조심해. 말을 똑바로 못 하겠으면 내가 좀 가르쳐 줄까?”“이젠 나한테 대놓고 덤비는 거야? 대단하네. 배짱이 커졌나 봐?”소태훈의 눈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고 표정은 싸늘해졌다.그동안 인명진은 이미 간호사에게 검사 준비를 하게 했다.은서우는 그를 한번 쳐다보더니 더 이상 시간 낭비하지 않고 말했다.“일어나. 검사를 할 거야.”소태훈이 순순히 응할 리 없었다.‘내가 왜 협조해야 하지?’그는 느긋하게 은서우를 바라보며 말했다.“내가 검사를 받았으면 좋겠어? 그러면 네가 직접 날 모셔봐. 어차피 어릴 때도 많이 해봤잖아. 어때?”그 말을 듣자 은서우는 당장이라도 손에 쥔 시험관을 그의 입에 쑤셔서 넣고 싶었다.너무 역겨워서 그녀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바로 그때, 인명진이 소태훈을 단단히 붙잡았다. 곧이어 소태훈은 비명을 질렀다.“뭐야, 뭐 하는 거야? 난 환자라고! 이렇게 대해도 된다고 생각해?”인명진은 아무런 반응도 없이 그를 화장실로 던져 넣고는 재빠르게 문을 잠가 버렸다.안에서는 필
소태훈의 그날 증상은 마약의 부작용으로 판명되었고 이로써 은서우에게 씌워졌던 혐의는 완전히 벗겨졌다.하지만 소태훈은 끝까지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이건 조작이야! 은서우, 우리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너 어떻게 이럴 수 있어? 그러고도 사람이야?”경찰이 그를 끌어가려 했지만 소태훈은 끝까지 버티며 저항했다.그 소란에 병원 전체가 떠들썩해졌다.복도에는 사람들이 가득했고 수많은 시선이 은서우와 소태훈에게 쏠렸다.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은서우는 이제 신경 쓰지 않았다.그녀는 단단한 눈빛으로 소태훈을 바라보았다.“그래, 소씨 집안이 날 길러준 건 맞지. 그런데 그게 어쨌다고? 1200만 원은 이미 다 갚았어.”부유한 집안에 놓고 말하면 별것 아닐 수도 있지만 은서우에게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거액이었다. 평생 모아도 그런 돈을 마련할 수 없을 정도였다.‘소씨 가문 가족들이 나한테 써준 돈이 과연 1200만이나 될까? 아니, 100만이라도 될까? 학비도, 생활비도 다 내가 스스로 벌었는데... 소씨 집안 사람들이 날 조금이라도 챙겨준 적이 있었던가?’소씨 가문 사람 중에 그녀가 미련을 가졌던 건 오직 소태연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소태연도 세상에 없었다. 그렇다면 그녀도 더 이상 연연할 필요가 없는 곳이었다.소태훈은 소리를 질렀다.“그럼 내 동생은? 내 동생이 죽은 것도, 내 다리가 이렇게 된 것도 다 너 때문이야! 그것도 네가 갚아야 할 빚 아니야?”소태연을 떠올리는 순간, 은서우의 가슴속 깊은 상처가 다시 한번 아려왔다. 순간,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하지만 인명진을 떠올리는 순간, 그 불안한 감정은 점점 사라지는 것이었다.사실 그가 개입하지 않아도 온서우 혼자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 소태훈을 끌고 가 검사를 강제로 받게 하는 것쯤은 그녀 혼자서도 할 수 있었다.하지만 그럼에도 인명진은 나서서 그렇게 했다.깊이 생각해 보지는 않았지만 이제 와서 곱씹어보면 그는 온서우에게 방법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
가뜩이나 하얀 피부라 붉은 손바닥 자국이 얼굴에 아주 선명하게 생겨났고 이 장면을 목격한 이들은 모두 간담이 서늘해졌다.이때 기세등등했던 연희진이 갑자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죄책감 때문이 아니라 은서우의 눈빛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너 그게 무슨 눈길이야? 넌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하는 거니?”“아닙니다.”은서우는 얼굴에서부터 전해져오는 아릿한 통증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아주 평온해 보였다. 그 통증이 그녀를 현실로 다시 돌아오게 했기에 고맙기만 할 따름이었다.“제가 오히려 엄마에게 고마워해야 하죠.”얼굴에서 느껴지는 고통은 그녀가 가족에 대한 환상에서 완전히 깨어나게 해주었다.연희진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그녀는 은서우가 약해 보일 때엔 마음대로 손찌검을 할 수 있었는데 은서우의 눈빛이 날카로워지자 예전처럼 괴롭힐 엄두가 나지 않았다.은서우는 연희진이 저도 모르게 움츠러드는 모습을 보며 문득 과거를 떠올렸다. 그녀 기억 속의 연희진은 항상 이런 모습이었다. 소심하고 겁이 많으며 본분만을 지키는 사람.연희진은 그저 옛 세대의 방식대로 살아왔을 뿐이었다.남편과 아들의 말은 절대적이었고 아이들이 그녀를 어떻게 대하든 무조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저는 한때... 엄마가 불쌍하다고 생각했어요.”은서우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하지만 이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엄마의 고통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비롯된 것도 맞지만 그중 일부는 엄마가 자초한 거예요.”소상태는 두 사람의 대화를 더는 듣고 싶지 않았는지 헐떡이며 달려오더니 소리쳤다.“내 아들을 풀어줘!”은서우는 아무 표정 없이 무덤덤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죄송하지만, 그럴 수 없어요.”그녀의 대답에 화가 난 소상태가 손찌검을 들려 했다.그의 손이 은서우의 얼굴에 닿으려던 순간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인명진이 그 손을 잡았다.인명진의 얼굴은 평소와는 달리 분노로 가득 차 있었고 마치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았다. 그가 이 정도로 화가 나 있는 모습은 처음
인명진은 은서우가 멍하니 있는 모습을 보며 말했다.“은서우 씨가 해낼 수 없다고 생각하나요?”은서우는 인명진이 이미 자신에게 충분히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했기에 그의 제안을 거절하려 했다. 하지만 거절하려던 말을 꺼내기 직전 그녀는 마음속으로부터 들려오는 희미한 목소리를 들었다.그건 야망의 목소리였다.어떤 사람들은 그냥 안정적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며 살아가고 싶어 한다. 물론 그렇게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은서우는 아니다.그녀의 자신이 평범하게 살아가는 걸 받아들일 수 없었고 그 마음 덕분에 지난 몇 년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며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들일 수 있었다.어떤 사장님들은 그녀의 고용 기간이 끝나면 아쉬워하며 그녀를 붙잡기도 했다.은서우는 잠시 망설인 후 과감히 자신의 마음에 따라 결정했다.“아니요. 전 할 수 있어요.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제가 잘할 수 있어요.”은서우는 그 진단 기록을 오랫동안 연구했고 과거에도 이런 증상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적이 있었기에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그녀의 대답을 들은 인명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좋아요, 은서우 씨가 그렇게 말했으니 이번 수술은 은서우 씨한테 맡깁니다. 하지만 저는 은서우 씨를 도와주지 않을 거니까 열심히 해보세요.”은서우는 이미 이를 예상하였다.이 질병은 매우 희귀했다.환자는 몸속의 세포 분열 속도가 너무 빨라서 노화가 느려졌고 이상을 느껴서 병원에 와서 검사를 받았지만 병원에서도 이런 병을 본 적이 없었다.소문은 마치 바람을 타고 퍼지는 불꽃처럼 퍼져나갔고 이 병은 의학계에서 큰 화제가 되었다.병원은 이 병을 연구 프로젝트에 추가했고 치료를 진행하는 동시에 연구를 시작했다.주목할 만한 점은 이 프로젝트가 시작될 당시 여러 방면에서 방해를 받았다는 것이다. 정확히 누가 한 짓인지는 알 수 없지만 누군가가 이 프로젝트를 막으려 했고 환자를 치료하는 대신 연구만 하려 했다.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인명진이 어떤 큰 인물을 불러들였기에 이 프로젝트가 통과
하지만 감동보다는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문지원은 당장 얼굴이 일그러지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지석훈도 뒤따라 들어오며 물었다.“속이 안 좋아?”“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세 끼 식사도 꽤 규칙적으로 하고 날것 이거나 차갑거나 매운 음식도 먹지 않았는데...”문지원은 배를 움켜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지석훈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듯 방으로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가져왔다.문지원은 놀라며 물었다.“언제 산 거예요?”지석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문지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5분 후,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다시 나왔다. 한 손은 여전히 배 위에 올려져 있었고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임신한 것이다!그녀와 지석훈이 결혼한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임신하다니.지석훈은 오히려 태연해 보였다. 하지만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보면 그 역시 겉모습처럼 평온하지 않고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정말 임신한 거예요?”문지원은 아직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번 달 초에 생리가 끝났기 때문이다.“아마 생리가 끝난 후 며칠 사이일 거야.”지석훈의 목소리는 문지원에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니 그녀의 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결국, 그녀는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임신 테스트기는 가끔 틀릴 수도 있으니 이런 일은 직접 검사를 받아보고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손에 든 검사지를 보고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의사는 마침 지석훈과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축하합니다, 지 원장님. 부인께서 임신 2주 차입니다.”“감사합니다.”지석훈은 침착하게 그녀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병원 진료실을 막 나오자마자 지석훈은 문지원을 품에 안았다.“너무 좋아. 우리 아이가 생겼어.”문지원은 남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며 멍하
물론 손에 있는 일을 무턱대고 모두 남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과한 부담을 주는 일이다.문지원은 비서를 사무실로 불렀다.“올해 25살이죠?”비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나이는 모두가 다 아는데 문지원 회장이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혹시 소개팅을 시켜주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비서는 고마웠지만 거절하며 말했다.“문 사장님, 저는 아직 젊어서 당장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전 당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게 아니에요.”문지원은 펜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냥 평소에 잡다한 일들을 맡기고 싶어서요.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은 평소에 굳이 내게 제출하지 않아도 돼요.”비서는 그 뜻을 이해했다.이건 곧 그녀에게 승진과 급여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문지원이 그녀의 의견을 확인한 후 급여를 조금 올려줬고 비서에게 몇 명의 적합한 인재를 추가로 모집해서 예비 인력으로 두라고 지시했다.“평소에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보고하면 돼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 혼자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일정이 정리되자 문지원은 업무에서 상당 부분 해방되었다.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일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되어도 일이 끝나지 않고 긴급 통지가 오면 또 회의를 위해 야근을 해야 했다.이제는 오후 4시 반쯤이면 일을 마치고 퇴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비서가 몇 명을 더 찾아서 양성해 두었기에 업무가 적절히 분배되어 모두 바빠 죽을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딱 맞는 분량을 처리할 수 있었다.그 덕에 문지원은 지석훈과 함께 결혼 후의 삶을 더욱 즐길 수 있게 되었다.지석훈도 이에 매우 만족해했다.“널 주려고 선물을 챙겨왔어. 들어가서 한번 봐.”그가 집 문 앞에 다가서더니 걸음을 멈췄다.문지원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은 어두컴컴했다.“뭐 숨겨놨어요? 아직 불도 켜지 않았네요, 수상하게.”탁! 하며 불이 켜지자 거실의 모든
문지원은 이 주제가 다소 위험하다고 느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배석훈이 결혼한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돼지고기를 먹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돼지가 뛰어다니 것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문지원은 그러면서도 반쯤 빚어놓은 만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이에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희들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아이를 가져야지. 평소에 좀 더 노력해야 한단다.”문지원은 잔소리를 듣고 나서 나오니 기운이 다 빠져있었다.시어머니는 문지원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거의 마음을 쏟아붓는 수준이었다. 비록 문지원의 집안 사정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혼수 때 오랜 세월 모은 돈으로 집 한 채를 사서 선물해 주었다. 사실 지석훈도 자기 집이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선물하고 싶다고 하셨다. “너희 집도 너희의 것이지만, 이건 내가 어른으로서 선물하는 거란다.”게다가 그 집에는 문지원의 이름도 함께 올려져 있었다.그래서 시어머니의 출산 독촉에도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버텨야만 했다. 다행히도 시어머니는 어린 이들에게 엄격하게 구는 편은 아니었다. 만두를 빚을 때 한 번 그런 말을 했고 또 떠나면서도 지석훈을 불러 몇 마디 잔소리했다. 문지원은 그 모자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돌아가는 길에 문지원은 약간 궁금해져 지석훈에게 물었다.“나갈 때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정말 알고 싶어?”“네.”그러자 지석훈은 문지원의 머리를 숙이게 한 후 그녀의 흩어진 머리칼을 살며시 넘겨주며 귀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우리 아이를 빨리 낳으라고 하셨어.”남자의 낮고 진한 목소리는 얼굴을 붉히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약보다도 중독성이 강해 문지원의 귀가 금세 붉어지고 말았다.저녁이 되자 지석훈은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문지원의 머리를 받치고 이마를 맞대며 낮은 숨소리를 내쉬었다. 문지원은 마치 파도 속에 잠긴 것
그 눈빛 속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그 소유욕. 마치 옛 시대의 군벌과 그의 부인 같았다. 그리고 사진작가는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운 없는 사람이 되어 몰래 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자신의 상상에 자극받아 목소리가 떨렸다.“지석훈 씨,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봐주세요.”지석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진작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진작가는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그 후에도 그들은 여러 세트의 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들은 모두 문지원에게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문지원은 모든 사진에 다 만족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었다.“대략 며칠 안에 나오나요?” 그녀가 물었다.사진작가는 답했다.“빠르면 이삼 일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완성된 사진들을 택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두 분께서 응해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바로 아까 찍은 사진 중 몇 장이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서 사진관 벽에 걸어두고 싶습니다.”문지원은 사진관에 들어올 때 봤던 사진 벽이 생각났다.“그 벽에 걸어두시겠다는 건가요?”“네.”사진작가는 그 벽은 사진관의 특별한 기념 및 홍보 방법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잘 나온 사진들은 사진 주인에게 동의를 구한 뒤 동의하면 벽에 전시한다고 한다..문지원은 옆에 있던 지석훈을 바라봤다. “저는 괜찮은데, 당신은요?” 지석훈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마음대로 하도록 해.”며칠 후 문지원은 사진작가가 보내온 사진을 받아 소중히 간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 사진관 벽에 전시된 사진들이 곧 사람들의 눈에 띄어 사진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간 것이다.잘생긴 남성과 아름다운 여인의 조합과 최상의 촬영 기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네티즌들은 저마다 아아 소리를 냈고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마치 옛 시대의 군벌 부인 같다.”“완전 대박이다.”“3분 안에 그들의 모든 정보를 알고 싶다.” 하지만 이 모
문지원은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하지만 웨딩 촬영은 이미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섬에서 몇 세트 찍었고 그 후 결혼식 현장에서 또 몇 세트 찍어 셀 수 없을 정도였다.게다가 이번 촬영은 개인 예약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사진관이 꽤 유명하다고 들었다.물론 사진관 이름에 걸맞게 예약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이 정도면 지석훈이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 예약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웨딩사진만 찍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하지만 문지원 역시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몰랐다.“한번 보세요. 이건 저희가 예전부터 선보였던 스타일들이에요.”사진작가는 친절하게 앨범 한 권을 꺼내 보였다.앨범에는 이전 고객들이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담겨 있었는데 정말 다양한 스타일이 있었고 모두 아름다웠다.이 사진관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정말 최고였다.문지원은 그중에서도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요?”사진작가는 그녀가 가리키는 사진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됩니다. 먼저 메이크업하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직원들이 촬영 스튜디오를 설치할게요.”옷은 사진관에서 준비한 것으로 하고 지석훈의 요구에 따라 전부 새 옷이었다.사실 문지원은 소품용 옷을 입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한 번 입었다가 나중에 벗으면 되는 거고 몸에 달라붙지 않아서 안에 옷을 받쳐 입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석훈은 직업병이 발동했고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었다.결국,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급히 새 옷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원래 걸리던 시간에서 15분이 더 추가되었고 메이크업 등 기타 과정도 진행해야 했다.문지원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2시간이 지난 후였다.그러나 결과는 확실했다.곧은 치파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쌌고 문지원은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치 지난 옛 시대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결혼 후 문지원은 휴가를 내서 신혼여행을 갈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요즘 지석훈이 거의 계속 병원에 머무르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본의 아니게 한숨이 나왔다. 비록 이미 익숙해졌긴 했지만 실망을 감추기는 어려웠다.비서도 그녀에게 물었다.“문 사장님, 신혼여행 가고 싶지 않으세요? 제 동창 중 한 명이 며칠 전에 결혼했는데 요즘 여기저기서 신혼여행 정보를 알아보며 준비 중이에요. 신혼여행이 없는 결혼은 반은 실패한 거랑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제대로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비서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그렇지 않으면... 문 사장님, 지 의사님이 일하시는 곳에 한 번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어쨌든 문지원은 요즘 정신이 산만하여 업무에 집중할 기색도 없었다.문지원은 비서의 시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 동안 집에 돌아와도 지석훈을 보지 못해 한참 혼란스러워했던 자신을 깨달으며 약간 부끄러워졌다.“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기획서 한 부 복사해 가져다주세요.”점심 무렵, 문지원은 막 일을 끝내고 밥 먹으러 가려던 찰나, 핸드폰에 지석훈의 메시지가 떴다. 같이 밥을 먹자는 메시지에 문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이 장면을 본 직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문지원은 재빨리 열쇠를 챙기고 회사를 떠났다. 지석훈은 그녀를 새로 오픈한 가게로 데려갔다.식사를 마친 후 문지원은 지석훈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병원에 다시 돌아갈 거예요?”“응?”지석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고의적으로 물었다. “내가 돌아가길 바라는 거야?”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순간 당황했다. 사실 그녀는 지석훈이 자신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길 바랐는데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업무에만 매달려 밤에야 겨우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지석훈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지석훈은 항상 선을 지켰지만 오늘 밤엔 조금 달랐다. 그는 그녀를 침실에서 욕실로 다시 침대로 옮겨가며 몸 곳곳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문지원은 여전히 몸속 깊이 스며든 감각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그녀는 예상대로 휴가를 냈고 이틀이 지나서야 회사에 다시 나왔다.회사 사람들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문지원이 출근하자 하나같이 말했다.“문 사장님, 결혼 축하드려요.’문지원은 무려 사흘이나 결근했지만 다들 그 사흘 동안 무얼 했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짐작이 갔다.분명 부부 생활이 아주 좋았겠지, 아니었으면 일까지 내팽개치고 안 나왔을 리가 없다.문지원은 직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얼굴을 들 수도 없어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지난번에 당한 적이 있었던 터라 문지원은 이제 출근 전에 거울 앞에서 꼼꼼히 점검했다.몸에 키스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회사를 향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 흔적들을 들켰을 경우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문지원이 예상치 못했던 건 며칠 지나지 않아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이 회사로 배달됐다는 것이다.문지원은 처음에 여울이 보낸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어보니 아니었다.택배 상자의 외관을 살펴봐도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아 더욱 수상했다.“이거 가져온 사람이 누가 보낸 건지 말했어요?”문지원이 로비 직원에게 물었다.로비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두고 바로 가버렸어요.”문지원은 뭔가 직감적으로 찜찜한 마음이 들어 그 택배를 챙겼고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는 브로치 하나와 축하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문지원은 축하 카드를 집어 들어보니 카드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결혼 축하해요.”글씨체는 아주 정갈하고 예뻐 여성의 필체 같았다.그녀는 곧바로 짐작이 갔다.문지원은 그 브로치를 지석훈에게 보여주자 그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브로치
여울은 아직 최주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최주하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문지원이 알기로 여울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고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몰랐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도 괜히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게다가 얼마 전 지석훈이 슬쩍 귀띔하듯 말했다.“며칠 전에 여울 씨가 병원에 재검진받으러 왔는데 주하가 데리고 왔었어.”그 말을 듣고 문지원은 혀를 끌끌 찼다.평소에 말도 없고 조용하던 여울이 은근히 비밀 많은 타입이었던 모양이었다.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다음 달 중순이 되었다.지석훈은 아예 와인 농장을 통째로 빌려 며칠에 걸쳐 그곳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꾸며놓았다.결혼식을 올릴 장소는 바로 거기였다.그 와인 농장은 웬만한 호텔 못지않게 컸고 내부에는 수년간 숙성된 고급 와인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결혼식 날 손님들이 오면 바로 꺼내어 대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들은 결혼 소식을 널리 알리진 않았다.이건 문지원이 원한 방식이었다.그녀는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는 그런 결혼식보다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 초대해서 조용히 축하받는 걸 선호했다.행복은 굳이 남들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그런데 결혼식이 한창일 때 지석훈이 무대 위에서 다시 한번 프러포즈했다.해변에서 했던 프러포즈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진중한 분위기였다.“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예전엔 내가 사랑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렸던 순간이 많아. 이제는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앞으로 남은 인생... 너랑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그의 말이 끝나자 하객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문지원은 무대 위에서 입을 손으로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식이 끝날 무렵, 문지원은 멀리서 검은색 카이엔 SUV가 그녀의 친구 여울을 데리러 오는 걸 보았다.차창이 천천히 내려가자 예상대로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최주하였다
문지원은 문득 자신이 계획에 철저히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처음부터 계획한 거죠?”“응.”지석훈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실, 그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오래전부터 숨겨온 것이었다....해변에서의 프러포즈 이후 문지원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가 생겼다는 점이었다.이 반지는 지석훈이 특별히 맞춤 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보다가 두 달 전에 이미 주문이 들어가 있었다는 구매 기록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한 지석훈의 부모님은 곧바로 혼인신고부터 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지원은 우연히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타이르는 말을 듣게 되었다.“네 아빠랑 난 애초에 너한테 기대도 안 했어. 하루가 멀다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니 너 같은 애한테 누가 시집오겠나 싶었거든. 그런데 다행히 네가 능력 있어서 지원이 같은 좋은 아이를 데려왔으니 얼른 확실히 붙잡아야지. 빨리 혼인신고부터 해. 나중에 그 아이가 너 버리고 떠나버리면 그땐 어디 가서 울어도 소용없어!”문지원은 그 대화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신기한 건 지석훈이 워낙 점잖고 진지한 사람이어서 집안 분위기도 매우 조용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퇴직해 한가로운 성격으로 매일 독서나 산책을 즐기는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호탕한 성격으로 남편에게 엄격하면서도 친화력이 강한 사람이었다.두 분 모두 차분한 듯하면서도 내면에 장난기를 숨기고 있는 아들을 낳을 것 같진 않았는데 이게 바로 유전자의 신비인가 싶었다.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그녀를 좋아해 주는 모습에 문지원도 안심했다. 확실히 시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한편 문지원의 아버지는 지석훈과 따로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정확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