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시은은 돈을 내고 택시에서 내렸다.“기사님, 저 여기서 내릴게요. 감사합니다.”택시에서 내린 그녀는 얼른 검은색 차로 달려갔다.나도현은 창밖에서 나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고 그곳에는 양시은이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창문을 열자 양시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나도현, 문 열어줘.”나도현의 눈빛이 흔들리고 손을 뻗더니 문이 열렸다. 양시은은 얼른 차에 올라탔다.“왜 말 한마디도 없이 혼자 여기 온 건데? 하민이 하원 시간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잖아.”“그냥 오고 싶었어.”“비서님한테 이미 들었어.”나도현은 입술을 달싹이더니 아주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어. 누가 사주한 것인지.”그가 변호사 되기를 반대하고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나용민 뿐이었고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몰랐다.나용민은 나도현에게 아주 큰 기대를 하고 있었기에 나도현이 그저 평범한 변호사가 되는 것을 반대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 아들이 자신처럼 나진 그룹을 이끄는 사람이 되길 바랐다.“병문안 갈까 고려하고 있었으니 가기도 전에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치시네.”“미안해. 다 내 탓이야...”양시은은 그런 그가 안쓰러우면서도 죄책감이 들었다.“만약 내가 설득하려고 하지 않았다면 이런 기분을 느낄 일은 없었을 거야.”“네 잘못은 아니야. 내 잘못이지.”나도현은 담담하게 말했다. 애초에 조금이나마 기대한 그의 잘못이었다.양시은은 나도현의 냉담한 어투로 기쁨을 느낄 리가 없었고 그가 냉담하면 할수록 더 안쓰러웠다. 그동안 그가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을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말이다.만약 그녀가 나도현이었어도 자신의 아버지가 꿈을 방해한다면 숨이 턱턱 막힐 것이었다.“괜찮아. 내가 있잖아.”양시은은 그를 조심스럽게 안아주었다. 그날 밤처럼 자신의 따듯한 체온으로 차가워진 그의 마음을 녹여주려 했다.나도현은 그런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기사님, 병원으로 가주세요.”나도현의 입에선 뜻밖의 말이 나와 양시은은 멍한 눈빛으로 그
호텔 바닥은 아수라장이었다.잠에서 깬 지유는 온몸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지유는 미간을 주무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커다란 몸집을 가진 남자가 옆에 누워 있는 걸 발견했다.지나칠 정도로 잘생긴 얼굴은 조각과도 같았고 눈매도 깊고 진했다.아직 깊은 잠이 들어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지유가 몸을 일으키자 이불이 그녀의 몸에서 미끄러져 내렸고 뽀얗고 매혹적인 두 어깨에 어젯밤 남긴 흔적이 보였다.지유가 앉았던 자리에 선명한 핏자국이 보였다.시간을 보니 어느새 출근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지유는 바닥에 널브러진 출근룩을 다시 집어 들어 얼른 갈아입었다.스타킹은 이미 남자에 의해 찢겨 있었다.지유는 스타킹을 돌돌 말아 쓰레기통에 버리고는 하이힐을 신었다.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깔끔하게 차려입은 지유는 어느새 워커홀릭 비서로 완전히 돌아왔고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들어온 사람은 청순한 미녀였다.지유가 부른 사람이었다.이현의 취향이 이런 여자였다.지유가 그 여자에게 이렇게 말했다.“침대에 누워서 대표님 깨나길 기다리면 돼요. 다른 건 한마디도 하지 마요.”지유는 고개를 돌려 아직 단잠에 빠진 남자를 힐끔 쳐다봤다. 억울한 마음에 코끝이 찡해졌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방에서 나왔다.지유는 두 사람이 어젯밤 잠자리를 가졌다는 사실을 이현이 아는 게 싫었다.그들 사이에 계약에 의하면 아무도 모르게 3년간 결혼을 유지하면 바로 이혼할 수 있었다.이 기간에 선을 넘는 행동은 그 어떤 것도 용납되지 않았다.지유는 7년째 이현의 비서로, 3년째 이현의 와이프로 있었다.졸업한 그날부터 이현의 곁을 한시도 떠난 적이 없었다.같은 날, 이현은 지유에게 두 사람은 그저 상사와 부하의 관계일 뿐 이 관계를 뛰어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지유는 복도 창가에 서서 어제 일을 떠올렸다. 이현은 그녀를 안고 침대에 누워 ‘승아’라는 이름을 연신 불러댔다.지유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승아는 이현의 첫사랑이었다.이현은 지유를 승
이에 지유가 화들짝 놀라며 하마터면 발을 삐끗할 뻔했다.중심을 잘 잡지 못한 지유는 그렇게 이현의 몸에 기댔다.이현은 지유의 몸이 앞으로 쏠리자 손으로 지유의 허리를 잡아줬다.뜨거운 체온이 전해지자 지유는 어젯밤 그가 저돌적으로 그녀를 덮치던 화면이 떠올랐다.지유는 가까스로 진정하고 고개를 들어 이현의 깊은 눈동자를 마주 봤다.이현의 눈동자는 매우 진지했고 그 속엔 질문과 의혹도 담겨 있었다. 눈빛은 지유를 뚫어버릴 것만 같았다.지유는 심장이 벌렁거렸다.이현과 더는 눈을 마주칠 엄두가 나지 않아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아까 나간 그 여자라고 생각했을 때도 이현은 불같이 화를 냈는데 여기서 만약 지유가 자신이었음을 인정한다면 후과가 그리 좋지는 않을 것이다.하지만 아니라고 하기엔 억울했다.만약 어젯밤 잠자리를 가진 사람이 지유라는 걸 이현이 알게 된다면 결혼 생활을 조금이라도 더 이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그래도 지유는 그와 눈을 마주치는 게 겁나 고개를 숙인 채로 물어봤다.“그건 왜 묻는 거예요?”지유는 사실 남몰래 기대하고 있었다.하지만 이현이 코웃음을 치더니 이렇게 말했다.“너는 그런 용기가 없을 것 같아서.”지유는 멈칫하더니 시선을 아래로 축 늘어트렸다.어쩌면 이현은 어젯밤 잠자리를 가진 사람이 지유가 아니길 더 바랄지도 모른다. 계약 결혼일뿐이니 말이다.게다가 며칠만 더 지나면 계약도 끝나간다순간 이현이 지유의 손을 힘껏 낚아챘다.지유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이현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심사하듯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지유는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발버둥 치며 손을 빼려 했지만 이현이 지유를 전신 거울 앞으로 바짝 몰아갔다.“뭐 하는 거예요?”지유는 애써 침착한 척했지만 떨리는 목소리가 그녀의 긴장과 두려움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너 정말 사무실에서 잠들었어?”지유는 칠흑같이 어두운 이현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혹시나 들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3년 전, 결혼한 첫날 밤, 지유는
고개를 들어보니 승아가 앞치마를 두르고 손에 국자를 들고 있었다.지유를 본 승아는 표정이 살짝 굳었다가 다시 부드럽게 인사했다.“아주머니 손님이에요? 마침 삼계탕을 조금 더 끓였는데 같이 와서 먹어볼래요?”승아의 느긋한 태도는 마치 그녀가 이곳의 안주인인 것 같았다.오히려 지유가 멀리서 찾아온 손님처럼 보였다.하긴 얼마 지나지 않아 지유는 곧 이 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 된다.지유는 이런 거지 같은 상황에 미간이 찌푸려졌다.이현과 결혼할 때 모든 사람에게 알렸고 승아도 축복을 보내왔기에 지유가 이현의 와이프라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승아는 지유가 문 앞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자 얼른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왔으면 손님이죠. 얼른 들어와요.”승아가 가까이 다가오자 옅은 재스민 향이 풍겨왔다. 이현은 작년 생일에 지유에게 똑같은 향수를 선물했다.지유는 목구멍이 점점 메어와 숨쉬기가 힘들었고 다리가 천근만근인 듯 움직이기 힘들었다.여진숙은 지유가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움직이지 않자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지유야, 여기 서서 뭐 하는 거야? 손님이 왔으면 차라도 내와야지.”지유는 승아와 겨뤄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물었다.“어머님, 승아 씨가 왜 우리 집에 있는 거예요?”여진숙이 답했다.“승아도 오랜만에 귀국했으니 한 번쯤은 나 보러 와야 할 거 아니니? 왜? 승아가 우리 집에 오면 안 돼? 현이도 뭐라 안 하는데 네가 뭐라고 시비야?”“그런 뜻 아니에요.”지유가 고개를 푹 숙였다.“아, 지유 언니였구나. 이현 오빠가 결혼사진을 보여준 적이 없어서 못 알아봤네요. 기분 상했다면 죄송해요.”지유는 환하게 웃는 승아를 뚫어져라 쳐다봤다.‘허.’하긴 자기가 제일 사랑하는 여자에게 다른 여자와 결혼한 사진을 보여줄 리가 없지.이때 여진숙이 호통치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얼른 승아한테 차를 내주지 않고 뭐 해?”지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 놓은 주전자를 들었다.승아는 여진숙과 웃고 떠들며
“지유 언니 오늘 기분이 별로 안 좋다면서 오기 싫다고 해서 내가 올 수밖에 없었어요.”승아는 얼른 손에 난 덴 자국을 일부러 보여주며 말했다.“오빠도 지유 언니 너무 미워하지 마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닐 거예요. 일을 그르친 건 아니죠?”지유가 회사의 서류를 다른 사람에게 넘긴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이현은 안색이 너무 어두웠지만 승아 앞이라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넥타이를 살짝 풀며 덤덤하게 말했다.“아니야.”이현은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렸다.“왔으니 앉아.”이현의 말에 승아는 내심 기뻤다. 그녀를 받아준다는 건 그래도 미워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회의하러 간다면서요? 내가 방해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이현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이렇게 말했다.“회의 시간 뒤로 30분 미루세요.”승아는 입꼬리가 올라갔다. 전에 인사도 없이 떠나서 혹시나 이현이 원망하면 어쩌지 했는데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심각한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잃어버린 시간은 다시 메꾸면 된다.소파에 앉은 승아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해명하려 했다.“오빠,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요. 그때 내가 인사도 없이 떠난 거 잘못한 거 알아요. 근데 지금은 다시 돌아왔으니까...”“먼저 일 처리 좀 할게.”이현이 승아의 말을 잘라버렸다.승아는 하려던 말을 다시 삼킬 수밖에 없었다 바빠 보이는 이현의 모습에 승아는 별수 없이 이렇게 말했다.“오빠 일 끝나는 거 기다릴게.”승아는 방해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남은 반 시간 중 얼마나 더 앉아 있어야 마주 보고 앉아 얘기를 나눌 수 있을까.약간 이현의 속내를 맞히기 어려웠다.진호가 안으로 들어와서야 이현은 하던 일을 멈췄다.이현이 걸어오자 승아가 웃으며 말했다.“오빠, 나...”“손은 아직도 아파?”그녀의 상처를 발견했다는 건 그녀를 걱정한다는 걸까?승아가 잽싸게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이제 안 아파요.”“응.”이현이 가볍게 대답하더니 진호의 손에서 한약을 받아왔다.“귀국해서 계속 속이 안 좋다며, 목
지유는 걸음을 멈췄다. 이현과는 부부 관계에서 오는 조화로움보다는 위계질서에서 오는 거리감이 더 컸다.“대표님, 지시 사항 있으신가요?”이현이 고개를 돌리더니 거리감이 느껴지는 지유의 얼굴을 보며 명령조로 말했다.“앉아.”지유는 이현이 무엇을 하려는지 몰랐다.이현이 지유 쪽으로 걸어갔다.지유는 자신과 가까워지는 이현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순간 이현이 어딘가 달라 보였고 이에 지유는 숨이 가빠졌다.긴장하기도 하면서 어딘가 이상했다.그녀가 딱히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이현이 먼저 그녀의 손을 잡았다.이현의 따듯한 손이 지유의 몸에 닿자 그녀는 마치 데이기라도 한 것처럼 얼른 손을 빼려 했다. 하지만 이현이 너무 꽉 잡고 있어 빼려고 해도 뺄 수가 없었다. 이현은 지유를 확 끌어당기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손 다쳤잖아, 몰랐어?”이현의 관심이 지유는 퍽 의외였다.“난... 괜찮아요.”“수포까지 났어.”이현이 물었다.“왜 나한테 얘기하지 않은 거야?”이현이 큰 손으로 그녀의 상처를 살폈다. 지유는 그런 이현을 물끄러미 쳐다봤다.3년이라는 시간 동안 지유는 이현의 손을 잡고 그가 따듯함으로 그녀를 이끌어주기를 바랐다.하지만 그럴 기회가 없었다.지유가 포기하려 할 때마다 이현은 다시 희망을 주었다.“큰일 아니에요. 며칠이면 나아요.”지유가 대답했다.“연고 좀 가져오라고 할게.”지유는 눈시울이 붉어지는 걸 느꼈다. 몇 년의 기다림 끝에 이제 좀 보상받는 것 같았다.하지만 지유는 이성적이었다. 이현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이현은 연고를 가져와 그녀의 상처에 발라줬다. 지유는 그녀의 앞에 쪼그리고 앉은 어딘가 조심스러워 보이는 이현에 혹시 자신도 그가 아끼고 사랑하는 여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상처가 나니 그래도 눈길을 주는 이현이었다.7년이나 옆을 지키면서 극진하게 챙겨주기보다 차라리 조그마한 상처를 내는 게 그의 이목을 끄는 데에는 더 낫겠다는 우스운 생각까지 들었다.다친 게 아깝지 않았다.하염없이
지유는 눈앞이 까매지며 어지러웠다. 그때 누군가 다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이런 실수를 하면 어떡해요? 온 비서님, 온 비서님...”그 목소리가 점점 가물가물해졌고 지유는 그대로 쓰러졌다.다시 깨어나 보니 병원이었다. 하얀 천정을 보고 있노라니 아직도 머리가 어지러웠고 깨질 듯이 아팠다.“온 비서님, 깨셨어요?”윤정이 눈시울을 붉히며 의자에서 일어나 다급하게 그녀의 상황을 확인했다.“어디 불편한 데 없어요? 의사 부를까요?”지유는 아직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윤정을 보며 몸을 일으켰다.“저는 괜찮아요. 공사장은 어떻게 됐어요? 다른 부상자는 없어요?”윤정이 말했다.“일단 공사장 일은 상관하지 마세요. 떨어진 유리에 뇌진탕이 왔대요. 어찌나 놀랐는지. 저는 온 비서님 못 깨어나는 줄 알았어요.”윤정은 다시 눈물을 훔치기 시작했다.윤정은 지유를 따라다니며 일을 돕는 비서와도 같은 존재였기에 평소에 지유는 윤정을 많이 아꼈다.아직 젊은 윤정은 이런 상황을 맞닥트려본 적이 없어 많이 놀란 것 같았다.“저 이제 깼잖아요. 걱정하지 마요.”지유가 그런 윤정을 다독였다.머리를 만져보니 머리엔 붕대가 감겨 있었고 아직 통증이 느껴졌다. 지유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렇게 물었다.“공사장은 괜찮아요?”갑자기 일어난 사고로 시공에 영향줄까 봐 무서운 지유였다.“괜찮아요. 온 비서님, 이렇게 심하게 다쳤는데 그깟 공사장이 무슨 대수에요? 평소에도 힘들게 일하시면서 저까지 신경 써 주시는데 이참에 얼른 누워서 쉬세요.”윤정은 너무 죄책감이 들었다. 자신이 재촉하지만 않았더라면 지유가 이런 사고를 당할 일도 없다고 생각했기에 업무와 관련된 일은 아무것도 보고하고 싶지 않았다.지유는 이미 습관된 것 같았다.몇 년간 업무를 수행하는 기계처럼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이현의 기분을 생각해 업무 전반을 다 챙겼다.그러니 자기도 모르게 업무부터 걱정했다.게다가 여씨 집안에 빚진 20억도 있으니 마음 편히 있을 수가 없었
지유는 병실에 조금 더 누워 있다가 슬픔을 안은 채 병원을 나섰다.“지유야!”지희는 창백한 지유의 얼굴과 머리에 난 상처를 보며 얼른 그녀를 부축했다.“헐,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지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이 시간이면 출근 중이었을 텐데 이거 산재 아니야?”지희가 물었다.“여이현은?”“몰라.”지희는 어딘가 이상한 지유의 표정에 그녀가 머리만 다친 게 아니라는 걸 눈치채고 코웃음을 쳤다.“그 사람을 위해 이렇게 열심히 일하면서 다치기까지 했는데 남편이라는 사람이 코빼기도 안 보이는 게 말이 돼? 죽은 거나 다름없는 남편이네.”“곧 남편도 아니야.”“뭐? 이혼하재?”지희의 표정이 삭 변했다.“내가 이혼하고 싶은 거야.”이에 지희의 태도가 또 한 번 변했다.“그래, 지금 당장 해!”지희가 경고했다.“재산 절반 나눠 가지는 거 잊지 말고. 총명한 여자라면 사람을 가질 수 없으면 돈이라도 가져야지. 돈이 있는데 좋은 남자를 못 찾겠어? 위자료 받으면 찾을 수 있는 만큼 찾는 거야. 착한 놈, 잘 챙겨주는 놈 찾아서 맨날 대접받고 사는 거지.”사실 처음부터 계약뿐인 결혼이라 이혼한다 해도 아무것도 차례지는 게 없었다.“지유야.”지희가 갑자기 지유의 이름을 부르며 미간을 찌푸렸다.“근데 왜 갑자기 이혼을 결정한 거야? 오랫동안 좋아했잖아. 여이현이 바람을 피우지 않는 이상 쉽게 포기하지 않았을 텐데.”지유는 안색이 좋지 않았다. 그러더니 이내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기사 못 봤어? 노승아 씨 귀국했잖아.”“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붙어먹은 거야?”지유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이현을 계속 헐뜯었다.“혼내 외도라, 그럼 죄가 더 무거워지는 거지. 위자료 더 받을 수 있겠다. 지유야, 진짜 경고하는데 마음 약해지면 안 된다. 아무것도 따지지 마. 결혼이 유효한 이상 여이현의 재산 중 절반은 네 거야. 그래 뭐 절반은 아니더라도 3분의 1 정도는 있겠지. 게다가 외도라니, 못 들어주겠다고 하면 모든 사람이 알게 판
양시은은 돈을 내고 택시에서 내렸다.“기사님, 저 여기서 내릴게요. 감사합니다.”택시에서 내린 그녀는 얼른 검은색 차로 달려갔다.나도현은 창밖에서 나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고 그곳에는 양시은이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창문을 열자 양시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나도현, 문 열어줘.”나도현의 눈빛이 흔들리고 손을 뻗더니 문이 열렸다. 양시은은 얼른 차에 올라탔다.“왜 말 한마디도 없이 혼자 여기 온 건데? 하민이 하원 시간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잖아.”“그냥 오고 싶었어.”“비서님한테 이미 들었어.”나도현은 입술을 달싹이더니 아주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어. 누가 사주한 것인지.”그가 변호사 되기를 반대하고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나용민 뿐이었고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몰랐다.나용민은 나도현에게 아주 큰 기대를 하고 있었기에 나도현이 그저 평범한 변호사가 되는 것을 반대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 아들이 자신처럼 나진 그룹을 이끄는 사람이 되길 바랐다.“병문안 갈까 고려하고 있었으니 가기도 전에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치시네.”“미안해. 다 내 탓이야...”양시은은 그런 그가 안쓰러우면서도 죄책감이 들었다.“만약 내가 설득하려고 하지 않았다면 이런 기분을 느낄 일은 없었을 거야.”“네 잘못은 아니야. 내 잘못이지.”나도현은 담담하게 말했다. 애초에 조금이나마 기대한 그의 잘못이었다.양시은은 나도현의 냉담한 어투로 기쁨을 느낄 리가 없었고 그가 냉담하면 할수록 더 안쓰러웠다. 그동안 그가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을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말이다.만약 그녀가 나도현이었어도 자신의 아버지가 꿈을 방해한다면 숨이 턱턱 막힐 것이었다.“괜찮아. 내가 있잖아.”양시은은 그를 조심스럽게 안아주었다. 그날 밤처럼 자신의 따듯한 체온으로 차가워진 그의 마음을 녹여주려 했다.나도현은 그런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기사님, 병원으로 가주세요.”나도현의 입에선 뜻밖의 말이 나와 양시은은 멍한 눈빛으로 그
대체 누가 나도현의 심기를 건드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싸늘해진 분위기부터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고 양시은도 협조적이었다.점차 그들의 분위기도 바뀌면서 룸 안은 열기로 가득해졌다. 이때 누군가 무심코 물었다.“양 비서님, 나중에 결혼 계획 있으세요?”나도현은 차가운 눈길로 입을 연 사람을 보았고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비서는 더 긴장하게 되었다.다행히 양시은은 대충 둘러 말했다.“마음이 맞는 사람이 있으면 아마 할 것 같네요. 하지만 아직은 결혼 계획은 없네요.”주문한 음식이 나오고 그들은 배불리 먹고 즐긴 후 돌아갔다.많은 사람들이 술을 마셨던지라 해롱해롱한 상태였고 비서는 그들을 집으로 전부 돌려보랬다. 물론 양시은도 술을 마셨지만 두 잔만 마셨던지라 그저 얼굴만 불그스레한 상태였다.“양 비서님은 혼자 돌아갈 수 있죠? 혼자 갈 수 있으면 전 이만 먼저 가볼게요.”비서는 술에 취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직원을 등에 업고 있었고 그 직원은 비서의 뺨을 찰싹찰싹 때렸다.그런 그의 모습을 보니 양시은은 괜스레 측은한 마음이 들어 그의 부담을 덜어주고 싶었다.“네. 전 혼자 갈 수 있어요.”“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비서는 얼른 자리를 떠나버렸다. 양시은이 위험할지 안 할지는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나도현이 곁에 있는 한 양시은이 절대 위험할 리가 없었으니까.직원들이 떠나고 나니 두 사람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나도현은 자연스럽게 양시은의 가방을 들어주며 말했다.“데려다줄게. 가자.”양시은은 자신의 가방을 돌려받고 싶었지만 그의 모습을 보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차피 돌려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으니까.뒷좌석에 앉은 양시은은 뒤늦은 취기에 머리가 어질거렸다. 나도현은 한참 지나도 들리지 않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양시은은 손을 들어 턱을 괸 채 눈을 감고 있었고 잠든 것 같았다.“대표님, 차가 좀 막힐 것 같습니다.”운전기사가 눈치 없이 말하자 나도현은 바로 눈치를 주었다.“목소리를 낮추세요. 길 막히면 다른
양시은은 입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어떻게든 말을 해야 했다. 그들은 서로 남의 돈으로 회식을 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으니 말이다.“할 말이라도 있는 거야?”나도현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양시은은 그가 이렇듯 빨리 눈치챌 줄 몰랐던지라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할 말이 있긴 해. 사실 직원들이 회식하고 싶어 해.”그녀는 빠르게 할 말을 꺼냈고 조용히 나도현의 반응을 기다렸다. 하지만 남자는 눈썹을 꿈틀거리기만 할 뿐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그것뿐이야?”이내 그는 빠르게 회식을 허락해 주었다. 양시은이 나도현의 말을 직원들에게 전해주자 직원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세상에. 대표님이 회식을 허락하셨다고요...”“전 회식 허락 안 해줄 줄 알았어요. 평소에도 일만 하시는 분이잖아요. 매일 회사로 출근한 뒤에 쉬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는데 이렇게 쉽게 허락해 주시다니.”비서들은 서로 믿기지 않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나도현이 이렇듯 쉽게 허락해 줄 줄 몰랐기 때문이다. 어쩌면 양시은이 말을 꺼내서 허락해 준 것일 수도 있었다.그렇게 회식은 오성급 호텔에서 하게 되었고 직원들은 아주 흥분하고 있었다. 나도현은 양시은에게 찾아와 꾸미고 가지 않겠냐며 물었다. 그러자 양시은은 의아한 듯 되물었다.“왜 꾸미고 가야 하는데?”나도현은 그녀를 위아래 훑어보았다. 사실 양시은의 옷차림은 아주 정상적이었고 흔한 직장인의 모습이었다.“이렇게 입고 가기엔 조금 대충 입은 것 같아서. 어쨌든 첫 회식이잖아.”그 말을 들은 양시은은 기분이 이상했지만 일리가 있는 것 같았다. 첫 회식이니 대충 입고 가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럼 뭘 입고 가?”양시은은 자신의 옷장을 열어보곤 훑어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입고 갈만한 예쁜 옷이 없었다.나도현은 그런 그녀를 위해 미리 준비해둔 쇼핑백을 꺼냈다. 보아하니 전부터 사둔 것인 것 같았다.“이걸 입어. 며칠 전에 맞춤제작 한 거야.”양시은은 쇼핑백에 있는 로고를 보았다. 그것은 무난한 옷을 만
사실 양시은의 직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나도현이 알아서 결정할 것이라고.다만 지금 중요한 것은 나진 그룹이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닌 나용민의 건강 상태였다.양시은은 다시 나도현의 안색을 살폈다. 비록 여전히 담담한 표정이긴 했지만 정신은 다른 곳에 팔려있는 것 같았다.“사실 아까 낮에 네 아버지가 입원하셨다고 들었어.”나도현은 멈칫했다.“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난 그냥 네가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말한 거야. 네 아버지니까.”양시은이 말을 마친 후에도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행여나 그가 화가 난 것은 아닐까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폈지만 화가 난 모습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그녀의 예상이 맞았던 것 같았다...순간 긴장이 풀린 그녀는 나도현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는 늘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마음은 아주 여린 사람이었으니까. 그가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슬프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슬픔은 모두 마음속에 꾹꾹 눌러 담아 속으로 끙끙 앓고 있을 뿐이다.“걱정되는 거라면 병문안이라도 가보는 건 어때. 물론 가기 싫으면 안 가도 돼. 난 그냥 그러면 더 좋을 것 같다고 제안을 하는 것뿐이야.”양시은은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듯한 부드러운 어투로 말했다. 그녀는 아버지를 여의었기에 그 마음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있을 때 잘해야 후회가 없는 법이니 아직 살아 있을 때 주변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해 잘하는 것이 좋았다.나도현의 찌푸려진 미간이 점점 풀리고 나중에는 생각해 보겠다고 대답했다.양시은은 더는 강요하지 않았다. 이미 생각해 보겠다는 대답이 나온 것으로 만족하고 있었으니까....오성 구역에서 벌어진 장이정 일가의 사건을 돌파구로 나도현은 바로 뚝심을 지키던 단골들을 찾아가 천천히 설득한 덕에 점차 진전이 보이기 시작했다.보름 정도 지나자 유진혁이 나오게 되었고 그들은 더는 유진혁의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그와 계약했던 사람들도 계약 해지를 요구했고 그와 더는 계약하지 않겠다며 돌아섰다.
박은희는 예전에 자신이 양시은에게 했던 만행 탓에 고개를 숙이는 수밖에 없었고 본인도 자신이 그간 얼마나 심하게 대했는지 알고 있었다.양시은은 손을 들어 그녀의 잔에 물을 따라주었다.“사모님, 말씀하셔도 돼요.”박은희는 그녀를 보더니 멍한 얼굴로 물잔을 받은 후 한참 머뭇거리다가 말했다.“그동안 내가 한 일들은 사과하마. 그래서는 안 됐었는데. 나도 내가 얼마나 악랄했는지 알고 있단다. 나조차도 견디기 힘들었을 거야.”“사모님,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시은 씨, 나 대신 도현이 좀 설득해줘.”박은희는 심호흡하곤 이틀간 있었던 일들을 말해주었다. 나도현이 집을 나간 뒤 두 사람 사이엔 단 한 마디의 대화도 오가지 않았고 나진 그룹에 있던 나용민의 사람들마저 전부 해고했다고 한다.“도현이 아빠가 지금 화가 많이 난 상태야. 원래부터 몸도 안 좋았는데 혈압이 올라가면서 결국 입원하게 되었어. 지금도 병원에 누워 있어.”박은희는 한숨을 내쉬었고 양시은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나용민이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병원에 입원했다는 사실이 너무도 놀라웠기 때문이다.“그럼 지금은 괜찮으신 거예요?”“지금은 괜찮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도현이가 한번은 만나줬으면 해서 그래.”박은희는 뜸을 들이다가 그녀를 보며 말을 이었다.사실 양시은은 그녀의 마음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와 아들이 싸웠으니 난처한 사람은 중간에 낀 박은희였다. 남편의 편을 들기도, 아들의 편을 들기도 난감했고 두 사람이 싸우는 모습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다만...“죄송해요. 사모님. 다른 건 도와드릴 수 있어도 이건 도와드리지 못할 것 같아요. 이건 도현이의 선택에 달린 문제니까요.”양시은은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입장을 바꿔서 만약 그녀가 나용민의 자식이었다면 나용민을 용서할 수 있겠는가.아무리 생각해도 양시은은 그 답을 얻지 못했기에 나도현을 도와줄 수 없었고 그가 스스로 그 답을 찾아야 했다.박은희는 조금 실망한 기색이었지만 이미 예상하고 왔던지라 현
문해미는 고개를 끄덕였고 도우미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꼭 어린아이를 달래는 기분이었다.도우미가 주방으로 들어갔을 때 문해미는 다소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짓고 있어 양시은이 말했다.“괜찮아요. 이틀 뒤에 다시 오실 거예요.”문해미는 그녀의 말을 알아들은 것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고개를 푹 숙인 채 음식을 먹는 것에만 집중했다. 비록 정신 연령은 다섯 살 어린아이와 같다고 하지만 문해미의 행동은 여전히 어른과 같은 것을 보아 아마 몸이 기억하는 것 같았다.양시은은 자신의 어머니가 음식을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이때 초인종이 울리고 문해미에게 간단히 말을 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어주었다. 현관문이 열리는 순간 그녀는 당황하고 말았다. 하지만 하민이는 그런 그녀의 기색을 눈치채지 못한 것인지 박은희의 품에서 해맑게 그녀와 인사했다.“엄마, 하민이가 너무 보고 싶었어요.”양시은이 박은희에게 시선을 돌리자 박은희가 설명했다.“하민이가 자꾸 네가 보고 싶다고 그러더구나. 집에서도 하루 종일 즐겁게 보내지 못하는 것 같아서 데리고 온 거란다.”양시은은 어찌할 바를 몰라 멍하니 현관에 서 있었다. 박은희는 그런 그녀의 상태를 눈치챘지만 하민이는 너무 기쁜 나머지 그대로 양시은의 품으로 달려들었고 이내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다.그렇게 하민이는 문해미와 만나게 된 것이다.박은희는 밥그릇을 들고 있는 문해미를 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양시은을 보았다. 두 사람이 닮았다는 것을 보아냈지만 대놓고 물어볼 수 없었고 아직 어렸던 하민이는 본 대로 말했다.“엄마, 이 아주머니는 누구예요?”천진난만한 아이의 모습을 보니 양시은은 순간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줄곧 하민이에게 숨기며 살았으니까. 하민이의 아빠든 할머니든 전부 숨기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외할머니의 존재도 숨기고 있어 아무것도 몰랐다.그렇게 생각한 양시은은 가슴이 아파졌고 죄책감에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심호흡한 뒤 그녀는 아이에게 알려주기로 마음먹었다.“하민아, 이 아주
양시은은 처음부터 끝까지 문해미의 곁에 있어 주었고 검사 결과를 들고 온 의사는 안경을 추켜올렸다. 그의 표정은 아주 복잡해 보였다.“아마 어떤 약물 때문에 뇌에 심한 손상을 준 것 같네요. 환자가 대체 무슨 일을 겪은 거죠?”양시은은 불안한 듯 손가락을 꾹꾹 누르며 말했다.“엄마는 아주 오래전에 실종되었어요. 그래서 저도 잘 몰라요...”진실을 말하는 것 같은 모습에 의사는 그제야 의심을 거두었다.“아마 사라졌던 그동안 누군가에게 약물을 투여받은 것 같군요.”“그럼 저희 엄마는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인가요?”의사의 말에 양시은은 목구멍이 막히는 것 같았다. 문해미가 평생 이런 모습으로 사는 모습을 상상하기조차도 싫었다...의사는 잔뜩 긴장한 그녀의 모습에 누그러진 어투로 말했다.“걱정하실 건 없어요. 정성스럽게 보살피면 회복할 가능성이 있으니까요.”양시은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의사가 해준 말은 인명진이 해준 말과 같았다. 설령 그녀가 평생 문해미를 보살피면서 산다고 해도 아마 매 순간 문해미의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이 미어질 것이다.여하간에 아무도 자신의 어머니가 정신을 놓고 사는 모습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문해미는 하민이의 외할머니였고 아직 어린 하민이에겐 문해미의 모습은 충격일 것이다.그렇게 생각한 양시은은 다시 기장해졌다. 어젯밤 일부러 하민이를 피하며 박은희에게 보냈다.다행히 주말이었던지라 그녀는 걱정할 것이 없었고 하민이는 주말 내내 나씨 가문에 머물고 있었다. 하지만 주말이 지나면?평생 외할머니와 만나지 못하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병원에서 나온 양시은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고 혼자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 하며 끙끙대고 있었다.나도현은 그런 그녀를 힐끗 보더니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양시은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나도현을 보았다.“하민이는 착한 아이니까 네가 잘 얘기해주면 이해할 거야.”“응.”양시은은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 나도현의 말처럼 하민이는 어른스러운 아이였고 어쩌면 그녀가 쓸
“나도 엄마가 왜 그곳에 있었는지 몰라. 내가 발견했을 때 잘 지내지 못한 것 같았어. 누더기를 입은 채 구석에서 쓰레기를 뒤적거리고 있더라고.”말을 꺼내는 양시은의 목소리엔 떨림이 가득했다. 나도현은 그런 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익숙한 온기에 양시은은 점차 진정되기 시작했고 두 사람은 거실로 돌아와 소파에 앉아 대화를 나누었다.“그해 아주머니가 실종되었을 때부터 어딘가 이상했어. 하지만 아직 상태도 안 좋으신 것 같으니까 내일 인명진 씨를 불러 봐달라고 하자.”“나도 그렇게 생각했어.”양시은은 문해미가 있는 방을 힐끗 보았다. 나도현은 그런 그녀의 손을 잡아주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녀를 달래주려고 했다.“괜찮을 거야. 아주머니를 찾은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기쁜 일이잖아.”양시은은 그의 위로에 고개를 끄덕였다.다음 날 오후, 인명진은 집으로 방문해 진찰해달라는 나도현의 부탁이 담긴 연락을 받게 되었다.비록 그는 정신과 의사가 아니었지만 난치병에 관해서는 계속 이런저런 연구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해미를 보게 되었을 때 그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그런 그의 모습을 본 양시은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지만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우리 엄마는 어떤 상태인 거예요?”“상태가 아주 나빠요. 거의 한계에 달했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뇌 신경 쪽에 일정한 정도의 손상을 입은 것 같아요. 비록 추측이긴 하지만 80, 90% 확신하고 있어요.”인명진이 솔직하게 말해주자 옆에 있던 테이블이 흔들렸다. 나도현은 얼른 양시은은 부축해주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양시은은 이미 테이블과 함께 중심을 잃고 쓰러졌을 테니까.“어떻게 그럴 수가...”그녀는 넋을 잃은 표정을 지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눈물이 주체하지 못하고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분명 애타게 찾던 문해미를 찾았건마는, 겨우 어머니와 만나게 되었건마는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응당 기뻐하고 좋아해야 할 순간에 자신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양시은은 행여나 그 사람이 사라지게 될까 봐 얼른 달려갔다.“엄마, 여기는 왜 여기에 계시는 거예요?”그녀는 노인을 붙잡으며 눈에 눈물을 머금은 채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상대가 자신을 반겨줄 거라고 생각했지만 상대는 그녀를 엄청 두려워하고 있었다.“때리지 마세요. 바로 자리를 옮길 거니까 때리지 말아 주세요.”“엄마, 제가 엄마를 왜 때려요. 저 시은이잖아요. 엄마 딸 양시은.”“전 그쪽을 몰라요...”양시은은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을 모른다니... 어떻게 그럴 리가 있겠는가. 그녀는 절대 사람을 착각했을 리가 없었고 눈앞에 있는 사람은 분명 그녀의 어머니였다.속이 뒤집힐 것 같았지만 자신을 너무도 두려워하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최대한 다정하고 온화한 어투로 말했다.“전 엄마를 해치지 않아요. 그러니까 다시 한번 제 얼굴 봐주세요.”그 말을 들은 뒤 한참 지나서야 상대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사실 세월의 흔적이 많은 얼굴은 아니었다. 다만 몸에 맞지 않는 남루한 옷 탓에 행색이 더러워 보였을 뿐이었다. 양시은은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그녀의 어머니는 아주 오래전에 실종되었다. 줄곧 찾아다녔지만 아무런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고 죽기 전까지 어머니를 다시 만날 수 없을 것 같았지만 이곳에서 어머니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처음에는 엄청난 기쁨을 느꼈지만 어머니의 행색과 상태를 보니 너무도 가슴이 아팠다. 대체 그간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상대는 양시은을 멍하니 보았다. 어딘가 익숙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양시은, 시은아... 시은이니?”“네, 엄마. 저 시은이에요.”양시은은 감격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택시를 잡자 기사는 옷차림이 초라한 그녀의 어머니 문해미를 대놓고 싫어하는 티를 냈다.“아가씨, 대체 어디서 이런 쓰레기를 주워온 거예요? 이런 쓰레기는 내 차에 태울 수 없어요.”“왜 태울 수 없는 건데요. 이미 제 돈을 받으셨잖아요. 그런데 이제 와서 태울 수 없다고요?”양시은은 차가운 눈빛으로 운전기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