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시은은 있는 힘껏 나도현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힘 차이가 있었던지라 뿌리치지 못했다.나도현은 안간힘을 쓰고 있는 양시은을 보았다. 화를 내면서 버둥거리고 있는 것 외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하지만 허효진이 분명 말했었다. 양시은이 녹음해서 그를 구해준 것이라고. 그의 어머니도 같은 말을 했었지만 양시은은 딱히 그 일을 언급하지 않았다.나도현은 그녀의 목적이 궁금해졌다.“양시은, 대체 뭐 하자는 거야? 그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녹음을 하고 아들이 인질로 잡혔는데도 나를 위해 녹음 파일을 내놓았다고. 그런데 지금은 또 나한테 동생이랑 잘살라고 하네? 네가 뭔데? 네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야?”나도현은 양시은을 뼛속까지 원망하는 섬뜩한 눈빛으로 보았다. 양시은은 그가 진실을 알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알게 된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지 않은가.그녀는 전부 원해서 한 일이었고 절대 원하는 것이 있어 한 것이 아니었다.“내 동생의 배 속에는 네 아이가 있어. 게다가 이미 약혼도 했잖아. 나도현, 네가 일을 벌였으면 책임져. 내 동생은 널 아주 사랑하고 있으니까.”양시은의 말에 나도현은 어처구니가 없었다.“나더러 책임을 지라고? 양시은, 네가 그런 말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그러는 너는 날 책임졌나?”양시은은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만약 상황이 심각한 것이 아니었다면 누가 사랑하는 사람을 포기하고 돈을 선택하겠는가.그녀는 입꼬리를 올리며 비꼬아 말했다.“나도현, 이미 지나간 일인데 왜 자꾸 신경 쓰는 거야? 아직도 나한테 미련이 남아서 다시 잘해보길 바라는 건 아니지?”양시은은 나도현이 자신을 사랑한 만큼 원망하고 있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애당초 그녀의 배신으로 그녀를 원망하고 있는 것이었기에 그녀도 딱히 탓할 것도 없었다.하지만 나도현은 이 일에 양채은을 끌어들였고 임신까지 시켰으니 당연히 양채은을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다.나도현은 원래부터 양시은을 원망하고 있는 데다가 양시은의 말을 들으니 화가 치밀었다.
양시은은 씁쓸함이 물 밀듯 밀려왔고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채은이는 내 동생이니까 내가 더 잘 알아. 어떻게든 잘 설명할 거야.”나도현은 순간 취기가 올라 붉어진 눈으로 그녀를 빤히 보았다.“그러면 나는? 나는 뭐가 되는데? 네가 쉽게 버린 나는 뭐가 되냐고!”양시은은 그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볼 엄두가 나지 않아 고개를 돌린 뒤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이미 지나간 일이고 이젠 의미 없잖아.”나도현은 담담한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그 순간 자신이 그녀를 그리워했던 시간이 가소롭게 느껴졌다.“이미 모든 걸 내려놓은 사람에게 당연히 의미 없게 들리겠지. 하지만 상처를 받지 않고서야 내 마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그 말을 끝으로 그의 눈빛이 싸늘하게 돌변하더니 그녀의 가느다란 목을 꽉 잡고 거칠게 키스해버렸다. 양시은은 점차 숨이 쉬어지지 않아 뒷걸음질을 쳤다.“나도현, 취했어? 정신 좀 차려! 난 채은이가 아니라고!”그는 당연히 눈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동안 사무치게 그리워했던 사람이었으니까. 그녀의 손을 꽉 제압한 뒤 사무소 문을 열고 들어갔다.양시은은 결국 화를 내고 말았다.“지금 대체 뭐 하자는 거야? 넌 채은이 약혼자야. 나한테는 매제가 될 사람이라고.”그녀의 매혹적인 목소리가 그의 두 귀로 흘러들어왔다.“하, 그래? 양시은, 넌 돈이 더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나? 그런 사람이 도덕은 잘 알고 있네. 어이없게도 말이야. 그럼 내 내연녀 노릇 해. 돈을 줄 테니까.”그는 끝이 보이지 않는 심연 같은 풀려버린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양시은은 다가오는 그의 단단한 가슴을 밀어내며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변호사 일도 잘 풀리고 예쁜 아내도 있는데 뭐하러 아이도 있는 나를 내연녀로 삼는데? 네가 듣기에도 어처구니없지 않아?”그녀가 말을 하고 있는 와중에 나도현은 이미 그녀를 자기 사무실 책상까지 밀고 왔다.그는 몸을 굽히며 마디마디 선명한 손가락으로 천천히 그녀의 보드라운 살결을 만졌다. 손가
나도현의 갈라진 목소리는 마음에 꾹꾹 눌러 담고 있던 것을 억지로 쥐어짜 내는 것처럼 들려와 양시은은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고 자신이 이 상황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그때 그녀는 확실히 그를 떠났고 그와의 감정을 포기했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사정이 있었다.“나도현, 나는...”양시은이 입을 열려던 순간 나도현이 말을 잘랐다.“그만 말해! 듣고 싶지 않으니까!”나도현은 격한 반응을 보이며 그녀의 말을 잘랐고 마치 무언가로부터 회피하려는 듯했다.양시은은 다시금 눈물이 맺혔고 무력감이 밀려왔다. 더는 할 말이 없었던 그녀는 고개를 돌려 모든 걸 받아들였고 수치심과 절망을 느꼈다.나도현이 원하던 바를 이루려던 그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사무실의 적막을 깨버렸다.“도현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충격을 받은 듯한 목소리에 나도현과 양시은은 모두 당황해했다.고개를 돌리니 문 앞에서는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고 양채은이었다.양채은의 안색은 창백해졌고 두 눈을 커다랗게 뜬 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두 사람을 보고 있었다. 핸드폰을 들고 있던 손에 힘이 얼마나 많이 들어갔는지 손가락이 하얗게 될 정도였다.“두 사람...”그녀는 엄청난 배신감을 느끼게 되었다. 자신의 약혼자와 친언니가 함께 있지 않은가.양시은은 살면서 이렇듯 당황하게 된 건 처음이었고 황급히 옆에 있던 옷을 잡아 몸을 가렸다.“채은아, 내가 다 설명할게. 절대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양채은이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양시은의 뺨을 때리곤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소리를 질렀다.“안 들어! 안 들을 거라고! 양시은, 이 사기꾼! 넌 지금도 날 속이고 있었던 거야! 절대 용서 안 해!”말을 마치자마자 양채은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며 창백한 얼굴엔 절망이 보였다.그런 그녀의 모습을 본 양시은은 가슴이 너무도 아팠고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힘없는 목소리로 변명만 할 뿐이다.“채은아, 나도현은 그냥 취해서 날 너로 착각했을 뿐이야.
양채은은 고개를 돌리자 눈 부신 빛을 보게 되었다. 황급히 뒤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너무 다급하게 움직였던 탓에 중심을 잃고 그만 넘어져 버렸고 작은 트럭은 휘청이며 달리더니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등을 스치며 뒤에서 멈추었다.‘아파!'온몸의 온기가 빠져나가며 점차 의식이 흐릿해졌다. 이마에선 어느새 식은땀이 가득했다. 복부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통증에 그녀는 본능적으로 손을 올려 만져보았고 하체에선 붉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트럭 운전자는 자신이 사고를 쳤다는 것을 알아챘는지 그녀를 힐끗 보더니 바로 시동을 걸며 도망쳐 버렸다.차가운 밤바람이 텅 빈 도로 위로 불어오고 있었고 그녀는 혼자 있었다. 살이 찢어질 듯한 고통이 그녀의 이성을 붙잡고 있었고 가슴 속에선 증오의 불씨가 피어올랐다.양시은은 급하게 따라 나왔지만 양채은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다. 늘 일을 그르치는 자신을 탓하며 원망하듯 머리를 때렸다.핸드폰을 들어 양채은에게 전화를 걸어보아도 양채은은 받지 않았고 아마도 여전히 자신을 원망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아마 더는 그녀의 연락을 받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그렇다면 양채은이 진정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린 후 다시 만나 대화를 해보기로 했다. 그녀와 나도현은 더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말할 생각이다.게다가 나도현은...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생각을 그만하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때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낯선 번호였지만 전화기 너머로는 나도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양시은...”양시은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나 힘들어. 채은이가 지금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겠고 할 말이 있으면 채은이 찾은 뒤에 해.”나도현은 흥미롭다는 어투로 말했다.“아, 그래? 양채은을 찾은 뒤에 삼자대면하고 싶은 건가?”양시은은 그가 너무도 원망스러웠지만 이를 빠득 갈며 그를 설득하는 수밖에 없었다.“채은이랑 결혼하기로 했으면 그럼 잘해줘. 채은이는 좋은 사람이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의사 선생님께 알려드릴게요.”자신을 도와주는 사람의 말을 들은 양채은은 그제야 마음이 놓여 눈을 감을 수 있었다.나도현은 어둠 속에서 양시은을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고 술도 몇 잔 마셨지만 정신은 점점 더 멀쩡해졌다.똑똑똑.이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공허한 사무실에 더 크게 울려 퍼졌다. 그는 안 올 줄 알았던 양시은이 돌아온 것이라 생각하고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나 문을 열자 그 미소는 사라지고 싸늘함만 남게 되었다.“누구시죠?”라이더 복을 입은 남자는 느껴지는 서늘한 한기에 저도 모르게 몸을 덜덜 떨었다. 그는 얼른 들고 있던 쇼핑백을 건넸다.“나도현 씨 맞으시죠? 퀵 서비스입니다.”‘하, 머리를 쓰긴...'나도현은 눈을 가늘게 접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쇼핑백을 받은 후 문을 닫아버렸다.‘괜찮아.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까 두고 보자고!'배달 기사는 그제야 안도하며 서둘러 1층으로 내려갔다.야심한 밤 응급실은 전체 도시에서 가장 바쁜 곳이었고 의사와 간호사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보호자는요?”간호사가 달려 나와 물었지만 젊은 커플은 고개를 저었다.“저희도 몰라요. 우연히 길에 쓰러져 있는 걸 발견해서 데리고 온 거예요. 배 속에 아이가 있다고 하니까 아이도 살려주세요.”“저희는 현재 산모분의 안전만 확보할 수 있습니다.”간호사는 조급해 미칠 지경이었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신고였다. 다른 건 몰라도 일단 산모의 목숨부터 살려야 했으니까.밤새 치료한 끝에 양채은의 상태는 겨우 안정되었고 날 밝기 전에 그녀는 깨어나게 되었다. 눈앞에 보이는 하얀 천장에 자신이 어디로 실려 왔는지 깨닫고 황급히 약을 갈러 와준 간호사의 팔을 잡았다.깜짝 놀란 간호사는 그녀가 깨어난 것임을 확인한 후에야 진정했다.“아직 상태가 좋은 건 아니니 푹 쉬고 있으세요. 제가 담당 선생님을 불러드릴게요.”그러나 양채은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고 빤히 보면서 거의 히스테리를 부
하민이의 말을 들은 양채은은 속으로 비웃으면서 담담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표정은 다소 음험하게 보였다.“날 괴롭힌 사람이 네 엄마라면?”하민이는 순간 당황하고 말았지만 작은 목소리로 설명했다.“우리 엄마는 이모를 괴롭히지 않을 거예요.”양채은은 그저 차갑게 웃기만 할 뿐이다.왜 양시은의 아이는 멀쩡히 살아있는데 자신의 아이는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해보고 이렇듯 조용히 하늘나라로 갈 수밖에 없는 걸까. 마음속에 원망만 남은 그녀는 양시은을 절대 가만히 두지 않으리라 생각했다.이상함을 감지한 하민이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엄마는요? 이모, 엄마 보러 갈래요.”양채은은 그런 하민이가 시끄럽게 느껴졌고 인내심 있게 말했다.“이모는 그냥 하민이랑 농담을 던진 거야. 이따가 도착하면 이모가 엄마한테 연락해줄게.”하민이는 그녀의 말에 바로 기분이 풀어져 즐거운 얼굴로 창밖의 풍경을 보았다.양시은은 아침 내내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는 양채은에 너무도 걱정되었다. 양채은은 항상 혼자 속으로 끙끙 앓으며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으니까. 뭐가 어찌 됐든 어젯밤 일에 관해서 그녀는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도 큰 희망을 품지 않고 전화를 걸었지만 뜻밖에도 양채은은 전화를 받아주었다. 양시은은 서둘러 설명했다.“채은아, 어젯밤 일은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양채은의 목소리엔 떨림이 느껴졌다.“아직도 날 속이려고 그러는 거야? 너랑 나 사이엔 예전에도, 지금도 온통 거짓뿐인데 내가 어떻게 널 믿으라는 거야?”양시은은 목구멍이 막힌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채은아, 그럼 내가 하민이를 데리고 떠날게.”그녀는 힘겹게 이 말을 꺼냈다.“내 인생을 이미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고.”양채은은 이를 빠득 갈며 말을 이었다.“떠나겠다고? 양시은, 난 네가 내 인생에서 영원히 사라져줬으면 좋겠어.”“내가 어떻게 하면 화가 풀릴까?”양시은은 느껴지는 무력감에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양채은은 고개를 숙이더니 핸드폰을 혼
양시은은 뭔가를 할 기분이 아니었고 하민이의 안전만 걱정되었던지라 거의 울면서 애원했다.“하민이는 네 친조카잖아. 대체 뭐 하려는 거야? 하민이로 협박하지 않아도 난 널 언제든지 도와줄 수 있어.”양채은 피식 차갑게 웃었다.“양시은, 넌 뼛속까지 가식적인 사람이야. 손에 쥐고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면서 뭘 어떻게 도와주겠냐는 거지?”양시은은 그녀를 설득하고 싶었지만 입을 열기도 전에 짜증이 극에 달한 양채은이 먼저 말을 가로챘다.“됐어. 쓸데없는 말 듣고 싶지 않으니까 나도현이나 불러.”양시은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뭐 하려고?”양채은은 픽 웃었다.“그건 나와 도현 씨 일이야.”양시은은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나랑 나도현은 이미 서로 뼛속까지 증오하고 있는 사이라 내가 불러도 안 올 수도 있어.”양채은의 목소리는 너무도 냉랭했다.“그건 네 사정이고. 하민이 무사하길 바라면 어떻게든 불러와.”양시은 침묵했다.지금의 양채은은 이미 이성을 잃어버린 상태였고 얼른 하민이를 데리고 오지 못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지 아무도 몰랐다. 어떻게든 일단 양채은을 안심시켜야 한다.“그래, 알았어. 하지만 매일 하민이 목소리를 들려줘. 영상 통화도 하게 해줘.”양채은은 흔쾌히 답했다.“좋아. 하지만 신고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알린다면 네가 얼마나 멍청한 짓을 했는지 직접 보여줄 거야.”양시은은 침을 꿀꺽 삼키며 멈추지 않는 떨림을 억누르고 진지하게 대답했다.“알았어.”이내 침묵이 흐르면서 전파 소리만 들려왔다. 그녀는 양채은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그녀가 먼저 뜸을 들이며 입을 열었다.“채은아, 나는...”말을 마치기도 전에 신호음 소리가 들려왔다. 양채은은 전화를 끊어버린 것이다. 끊겨버린 전화를 보며 양시은은 머릿속이 하얘졌다.손가락을 움직이며 한참 망설이다가 결국 나도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민이를 위해서라면 아무리 난처한 일이라고 해도 그녀는 어떻게든 해야 했다.번호를 누른 순
나도현은 차 키를 챙기고 외출하려고 하자 비서가 그에게 다가와 물었다.“변호사님, 지금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아직 일정이 남아 있습니다만...”“오후 일정을 전부 뒤로 미루세요.”나도현은 말을 마친 후 성큼성큼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에 올라탄 그는 심지어 자신을 원망하기도 했다.‘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양시은이 한 말 때문에 고분고분 찾아간다고?!'그는 다시 한번 고민하다가 결국 찾아가 보기로 했다.이때 검은색 차에 앉은 흉악한 얼굴의 두 남자가 나도현을 지켜보고 있었고 그중 한 사람이 옆에 있던 파트너의 어깨를 툭툭 쳤다.“이봐요, 저 사람 맞아요?”고개를 푹 숙인 채 핸드폰으로 문자를 주고받던 남자는 고개를 확 들어 호화로운 차에 올라타는 나도현을 보더니 이를 빠득 갈았다.“맞아요. 저 사람이에요. 저 사람 때문에 내 아들이 형량 아주 많이 받았다고요. 내가 죽어 재가 되어버린다고 해도 저 사람만큼은 절대 잊지 않을 거예요.”“그럼 지금 혼자 차에 올라탄 이 시점이 아주 좋은 기회가 아닌가요?”두 사람은 그렇게 몰래 나도현의 뒤를 따라가게 되었고 조수석에 앉은 사람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보아하니 동료를 호출하는 것 같았다.양시은이 말한 무스 카페는 아주 외진 곳에 있었던지라 나도현은 내비게이션을 틀어서야 찾을 수 있었다. 카페 안으로 들어갔을 때 양시은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입꼬리를 올리더니 이내 미간을 확 구겼다.‘이 여자가 설마 또 날 속인 건가?'가슴 속에 분노가 슬금슬금 피어올랐지만 고개를 돌리니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양시은을 발견했다.양시은은 양채은이 무슨 이유로 나도현을 부르라고 한 것인지 몰랐기에 일단 그에게 다가가는 수밖에 없었다.“왔어?”“어젯밤에는 신고하겠다고 협박하더니 오늘은...”나도현은 픽 소리를 내며 웃었다.“양시은, 이번엔 또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거지?”“난...”양시은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참 후 그녀는 안을 가리키며 말했다.“일단 안으로 들
양시은은 입술을 짓이겼다. 피가 많이 흘러나왔던지라 안색이 창백해져 자조적으로 웃었다.“나는 내 주제를 알아. 그런데 내가 어떻게 너한테 상처를 주겠어?”나도현은 가슴이 갑갑해졌고 커다란 돌덩이가 가슴을 누르고 있는 것처럼 불편했다. 그는 눈을 가늘게 접으며 싸늘한 한기를 내뿜고 있었다.“양시은, 너 정말 뻔뻔하다.”박은희는 찬 바람만 부는 두 사람 사이를 보며 속으로 기뻐했고 이내 맞장구를 쳤다.“그깟 돈 때문에 너를 버리는 여자인데 왜 미련을 가지고 있는 거니.”“그만 하세요.”나도현의 눈빛이 어두워지며 다시 냉정함을 되찾았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다.“이 여자에게 돈을 줄 필요도 없습니다. 그럴 만한 가치도 없으니까요.”그는 시선을 돌려 양시은을 차갑게 보았다. 박은희는 속으로 아주 기뻐했다.“네가 정신을 차렸다니 마음이 놓이는구나. 세상엔 좋은 여자는 많고 많단다. 너랑 결혼할 여자는 더 많고.”“나가서 말하죠.”나도현은 차갑게 말을 내뱉으며 밖으로 성큼성큼 나가버렸다.양시은은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더는 참을 수 없어 침대에 털썩 엎드리게 되었다. 상처를 금방 치료했던지라 여전히 아팠고 바늘로 꿰맨 곳이 찢어질 듯 아팠다.하지만 하민이는 여전히 양채은의 손에 있었기에 마음 놓고 편히 있을 수 없었다. 결국 비틀대며 병원을 나선 뒤 양채은에게 전화를 걸어보려고 했다. 모든 일은 그녀 때문에 일어난 것이고 하민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병실 밖을 나가자마자 누군가 그녀의 팔을 잡아주었고 청량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조심해요.”“고맙습니다.”양시은은 고개도 들지 않고 상대의 손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상대는 다시 그녀를 잡았다.“양시은?”상대의 목소리에선 놀라움과 반가움이 묻어나 이어 그녀는 창백한 얼굴을 들 수밖에 없었다.그녀의 눈앞에는 잘생긴 얼굴이 있었고 품이 좀 너른 의사 가운은 유난히도 남자에게 잘 어울려 보였다. 익숙한 얼굴이었지만 양시은은 조금 생각이 나지 않아 뜸을 들이며 말했다.
양시은은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지만 나도현이 자신을 포기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8억보다는 아니라니...나도현이 강태경으로 살 때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돈을 아껴 쓰라는 말을 한 적 없었고 나중에 나도현이 된 후에도 손에 돈이 부족했던 적이 없었다. 하지만 양시은의 말을 들으니 두 사람이 쌓았던 감정이 전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고 가소로웠다.“양시은, 돈이 필요하면 나한테 말해. 내 기분만 맞춰주면 8억보다 더 많은 돈을 얻을 수 있지 않나?”나도현은 상처받은 두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양시은이 한 말이 제발 전부 거짓이길 바랐다. 그녀는 나도현이 자신에게 잘해줬던 시절은 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입을 열려던 순간 밖에서 콰당 소리가 났다. 박은희가 있는 힘껏 문을 밀어 연 것이다.엄청난 기세를 내뿜던 박은희는 바로 양시은에게 시선을 돌렸다. 양시은은 그녀가 좋은 의도로 찾아온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입을 꾹 다문 채 박은희가 먼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박은희는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지 않고 문에 서 있었다. 거리가 조금 있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쩌렁쩌렁하게 들려왔다.“양시은 씨, 전에 8억 주면서 내가 뭐라고 했지? 내 아들 곁에서 떨어지라고 했잖아. 난 지금도 내 아들이랑 함께 있는 꼴 보고 싶지 않으니까 서로 좋게 합의 보자고. 얼마를 원하는지 말해.”박은희는 나도현이 양시은을 향한 마음을 접길 바랐다. 그래서 나도현이 보는 앞에서 양시은에게 얼마나 요구를 하는 것이냐고 물은 것이다. 양시은도 박은희가 대놓고 물어볼 줄은 몰랐다. 목구멍에 커다란 돌멩이가 막힌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고 가슴이 미어질 듯 아팠다. 하지만 그녀에겐 다른 선택은 없었다.“그때는 8억이지만 지금은 적어도 2배 정도는 주셔야 할 거예요. 하지만 전에 거래한 것이 있으니 12억만 주시면 영원히 눈앞에서 사라져 드릴게요. 아니, 죽으라고 하셔도 돼요.”양시은은 한 글자씩 내뱉을 때 나도현을 똑바로 바라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 아이는 양채은이 나도현과의 유일한 아이였다.이때 나도현이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나도현의 전화에 그녀는 당연히 바로 받았다. 다만 그녀는 하민이에게 비참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자리를 옮겼고 전화기 너머로 여전히 차가운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양채은, 내가 예전에 쓰던 이름으로 네게 접근한 걸 인정해. 하지만 난 너한테 상처 주는 일은 한 적 없어. 네 배 속에 있는 아이는 내 아이가 아니야.”나도현의 말에 양채은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의 아이가 나도현의 아이가 아니라면 누구의 아이란 말인가. 게다가 그날 그녀의 옆에 있던 사람은 분명 나도현이었다.그러나 나도현은 그녀에게 영상 하나를 전송했고 그 영상 속엔 악취미로 가득한 재벌들이 있었다. 양채은은 바로 진실을 알게 되었다.나도현이 지금 이런 때에 그녀에게 진실을 알려주고 있다는 건 그녀가 아무런 잘못도 없는 아이에게 화풀이하지 않기를 바라서였다. 하민이도 그녀가 예전에 온 힘을 다해 지켜주려고 했던 아이였으니까.아무리 이성을 잃었다고 해도 그녀는 직접 아이에게 손을 댈 만큼 미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결국은 어느 날 갑자기 그녀의 곁에 나타난 나도현은 그녀 때문이 아니라 양시은 때문이었다는 것이다.나도현은 그녀에게 이용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고 심지어 본명도 알려줄 생각도 없었다. 그녀에게 잘해주었던 것도 전부 그의 연기였다는 사실에 그녀는 역겨웠다.양채은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그럼 마지막으로 한 번만 만나줄래요?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그래요. 얼굴 마주 보면서 하고 싶거든요.”나도현은 이미 이 지경이 되었던지라 양채은과 만나 자세하게 얘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랬기에 그녀의 요구를 받아들였다.“그래.”양채은은 먼저 시간을 알려주었다.“그럼 사흘 뒤에 봐요.”말을 마친 양채은은 전화를 끊어버렸고 나도현은 양채은과 했던 대화를 양시은에게 알려주었다. 침대에 힘없이 누워있는 양시은은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이미 양채은과 좋게 얘기가 끝났고 하민이와도 사이
나도현은 양시은이 자신을 위해 대신 칼에 맞아줄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당황하고 있던 순간에 양시은이 그의 손을 잡으며 애원했다.“나도현, 제발 하민이를 구해줘...”...양시은이 다시 눈을 떴을 땐 병원이었다. 그녀는 눈을 뜨자마자 양채은에게 문자를 보냈다.[양채은, 죽어야 할 사람은 나야. 내가 죽을 테니까 하민이는 살려줘. 하민이는 아무 잘못도 없잖아. 그리고 넌 하민이가 제일 좋아하는 이모잖아.]양채은은 지금 이성을 잃은 상태였던지라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그간 쌓은 정으로 설득하는 것이다. 아이를 잃은 양채은에게 당연히 통할 리가 없었다.양시은과 나도현의 아이는 멀쩡히 살아있었다. 양시은이 그녀를 동생으로 여기고 나도현을 본 순간 나도현의 정체를 알려주면서 그녀를 이용하려는 것 같다고 말했었더라면 이 정도까지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양시은은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녀가 나도현에게 푹 빠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결국 그녀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이도 없고 나도현은 애초에 그녀를 사랑하지도 않았다. 모든 건 양시은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녀는 죽게 되는 한이 있어도 양시은이 죽는 것보다 못한 삶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고 싶었다.“이모, 우리 여기에 며칠 동안 있는 거예요? 엄마가 보고 싶어요. 이모, 혹시 하민이가 잘못한 거 있어요? 왜 하민이랑 놀아주지 않는 건데요?”아이들은 감정에 민감했다. 양채은이 자신을 이곳으로 데리고 온 뒤 자신과 거리를 두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 순간 양채은은 마음이 누그러지며 아이는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하민아, 만약 이모랑 엄마가 싸우면 하민이는 누구를 선택할 거야? 이모 말 믿어 줄 거야?”양채은은 양시은을 증오하고 있었지만 하민이 앞에서는 완전히 냉랭해질 수 없었다. 하민이는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조카였기 때문이다.전에 학교 다닐 때도 그녀는 학교 끝나자마자 하민이를 데리고 나와 간식도 사주면서 돌봐주었다. 심지어 돈만 생기면 하민이의
나도현은 차 키를 챙기고 외출하려고 하자 비서가 그에게 다가와 물었다.“변호사님, 지금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아직 일정이 남아 있습니다만...”“오후 일정을 전부 뒤로 미루세요.”나도현은 말을 마친 후 성큼성큼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에 올라탄 그는 심지어 자신을 원망하기도 했다.‘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양시은이 한 말 때문에 고분고분 찾아간다고?!'그는 다시 한번 고민하다가 결국 찾아가 보기로 했다.이때 검은색 차에 앉은 흉악한 얼굴의 두 남자가 나도현을 지켜보고 있었고 그중 한 사람이 옆에 있던 파트너의 어깨를 툭툭 쳤다.“이봐요, 저 사람 맞아요?”고개를 푹 숙인 채 핸드폰으로 문자를 주고받던 남자는 고개를 확 들어 호화로운 차에 올라타는 나도현을 보더니 이를 빠득 갈았다.“맞아요. 저 사람이에요. 저 사람 때문에 내 아들이 형량 아주 많이 받았다고요. 내가 죽어 재가 되어버린다고 해도 저 사람만큼은 절대 잊지 않을 거예요.”“그럼 지금 혼자 차에 올라탄 이 시점이 아주 좋은 기회가 아닌가요?”두 사람은 그렇게 몰래 나도현의 뒤를 따라가게 되었고 조수석에 앉은 사람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보아하니 동료를 호출하는 것 같았다.양시은이 말한 무스 카페는 아주 외진 곳에 있었던지라 나도현은 내비게이션을 틀어서야 찾을 수 있었다. 카페 안으로 들어갔을 때 양시은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입꼬리를 올리더니 이내 미간을 확 구겼다.‘이 여자가 설마 또 날 속인 건가?'가슴 속에 분노가 슬금슬금 피어올랐지만 고개를 돌리니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양시은을 발견했다.양시은은 양채은이 무슨 이유로 나도현을 부르라고 한 것인지 몰랐기에 일단 그에게 다가가는 수밖에 없었다.“왔어?”“어젯밤에는 신고하겠다고 협박하더니 오늘은...”나도현은 픽 소리를 내며 웃었다.“양시은, 이번엔 또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거지?”“난...”양시은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한참 후 그녀는 안을 가리키며 말했다.“일단 안으로 들
양시은은 뭔가를 할 기분이 아니었고 하민이의 안전만 걱정되었던지라 거의 울면서 애원했다.“하민이는 네 친조카잖아. 대체 뭐 하려는 거야? 하민이로 협박하지 않아도 난 널 언제든지 도와줄 수 있어.”양채은 피식 차갑게 웃었다.“양시은, 넌 뼛속까지 가식적인 사람이야. 손에 쥐고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면서 뭘 어떻게 도와주겠냐는 거지?”양시은은 그녀를 설득하고 싶었지만 입을 열기도 전에 짜증이 극에 달한 양채은이 먼저 말을 가로챘다.“됐어. 쓸데없는 말 듣고 싶지 않으니까 나도현이나 불러.”양시은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뭐 하려고?”양채은은 픽 웃었다.“그건 나와 도현 씨 일이야.”양시은은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나랑 나도현은 이미 서로 뼛속까지 증오하고 있는 사이라 내가 불러도 안 올 수도 있어.”양채은의 목소리는 너무도 냉랭했다.“그건 네 사정이고. 하민이 무사하길 바라면 어떻게든 불러와.”양시은 침묵했다.지금의 양채은은 이미 이성을 잃어버린 상태였고 얼른 하민이를 데리고 오지 못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지 아무도 몰랐다. 어떻게든 일단 양채은을 안심시켜야 한다.“그래, 알았어. 하지만 매일 하민이 목소리를 들려줘. 영상 통화도 하게 해줘.”양채은은 흔쾌히 답했다.“좋아. 하지만 신고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알린다면 네가 얼마나 멍청한 짓을 했는지 직접 보여줄 거야.”양시은은 침을 꿀꺽 삼키며 멈추지 않는 떨림을 억누르고 진지하게 대답했다.“알았어.”이내 침묵이 흐르면서 전파 소리만 들려왔다. 그녀는 양채은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 없었다.한참 지나고 나서야 그녀가 먼저 뜸을 들이며 입을 열었다.“채은아, 나는...”말을 마치기도 전에 신호음 소리가 들려왔다. 양채은은 전화를 끊어버린 것이다. 끊겨버린 전화를 보며 양시은은 머릿속이 하얘졌다.손가락을 움직이며 한참 망설이다가 결국 나도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민이를 위해서라면 아무리 난처한 일이라고 해도 그녀는 어떻게든 해야 했다.번호를 누른 순
하민이의 말을 들은 양채은은 속으로 비웃으면서 담담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표정은 다소 음험하게 보였다.“날 괴롭힌 사람이 네 엄마라면?”하민이는 순간 당황하고 말았지만 작은 목소리로 설명했다.“우리 엄마는 이모를 괴롭히지 않을 거예요.”양채은은 그저 차갑게 웃기만 할 뿐이다.왜 양시은의 아이는 멀쩡히 살아있는데 자신의 아이는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해보고 이렇듯 조용히 하늘나라로 갈 수밖에 없는 걸까. 마음속에 원망만 남은 그녀는 양시은을 절대 가만히 두지 않으리라 생각했다.이상함을 감지한 하민이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엄마는요? 이모, 엄마 보러 갈래요.”양채은은 그런 하민이가 시끄럽게 느껴졌고 인내심 있게 말했다.“이모는 그냥 하민이랑 농담을 던진 거야. 이따가 도착하면 이모가 엄마한테 연락해줄게.”하민이는 그녀의 말에 바로 기분이 풀어져 즐거운 얼굴로 창밖의 풍경을 보았다.양시은은 아침 내내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는 양채은에 너무도 걱정되었다. 양채은은 항상 혼자 속으로 끙끙 앓으며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으니까. 뭐가 어찌 됐든 어젯밤 일에 관해서 그녀는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도 큰 희망을 품지 않고 전화를 걸었지만 뜻밖에도 양채은은 전화를 받아주었다. 양시은은 서둘러 설명했다.“채은아, 어젯밤 일은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야.”양채은의 목소리엔 떨림이 느껴졌다.“아직도 날 속이려고 그러는 거야? 너랑 나 사이엔 예전에도, 지금도 온통 거짓뿐인데 내가 어떻게 널 믿으라는 거야?”양시은은 목구멍이 막힌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채은아, 그럼 내가 하민이를 데리고 떠날게.”그녀는 힘겹게 이 말을 꺼냈다.“내 인생을 이미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고.”양채은은 이를 빠득 갈며 말을 이었다.“떠나겠다고? 양시은, 난 네가 내 인생에서 영원히 사라져줬으면 좋겠어.”“내가 어떻게 하면 화가 풀릴까?”양시은은 느껴지는 무력감에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양채은은 고개를 숙이더니 핸드폰을 혼
“걱정하지 말아요.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의사 선생님께 알려드릴게요.”자신을 도와주는 사람의 말을 들은 양채은은 그제야 마음이 놓여 눈을 감을 수 있었다.나도현은 어둠 속에서 양시은을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고 술도 몇 잔 마셨지만 정신은 점점 더 멀쩡해졌다.똑똑똑.이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공허한 사무실에 더 크게 울려 퍼졌다. 그는 안 올 줄 알았던 양시은이 돌아온 것이라 생각하고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나 문을 열자 그 미소는 사라지고 싸늘함만 남게 되었다.“누구시죠?”라이더 복을 입은 남자는 느껴지는 서늘한 한기에 저도 모르게 몸을 덜덜 떨었다. 그는 얼른 들고 있던 쇼핑백을 건넸다.“나도현 씨 맞으시죠? 퀵 서비스입니다.”‘하, 머리를 쓰긴...'나도현은 눈을 가늘게 접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쇼핑백을 받은 후 문을 닫아버렸다.‘괜찮아.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까 두고 보자고!'배달 기사는 그제야 안도하며 서둘러 1층으로 내려갔다.야심한 밤 응급실은 전체 도시에서 가장 바쁜 곳이었고 의사와 간호사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보호자는요?”간호사가 달려 나와 물었지만 젊은 커플은 고개를 저었다.“저희도 몰라요. 우연히 길에 쓰러져 있는 걸 발견해서 데리고 온 거예요. 배 속에 아이가 있다고 하니까 아이도 살려주세요.”“저희는 현재 산모분의 안전만 확보할 수 있습니다.”간호사는 조급해 미칠 지경이었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신고였다. 다른 건 몰라도 일단 산모의 목숨부터 살려야 했으니까.밤새 치료한 끝에 양채은의 상태는 겨우 안정되었고 날 밝기 전에 그녀는 깨어나게 되었다. 눈앞에 보이는 하얀 천장에 자신이 어디로 실려 왔는지 깨닫고 황급히 약을 갈러 와준 간호사의 팔을 잡았다.깜짝 놀란 간호사는 그녀가 깨어난 것임을 확인한 후에야 진정했다.“아직 상태가 좋은 건 아니니 푹 쉬고 있으세요. 제가 담당 선생님을 불러드릴게요.”그러나 양채은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고 빤히 보면서 거의 히스테리를 부
양채은은 고개를 돌리자 눈 부신 빛을 보게 되었다. 황급히 뒤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너무 다급하게 움직였던 탓에 중심을 잃고 그만 넘어져 버렸고 작은 트럭은 휘청이며 달리더니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등을 스치며 뒤에서 멈추었다.‘아파!'온몸의 온기가 빠져나가며 점차 의식이 흐릿해졌다. 이마에선 어느새 식은땀이 가득했다. 복부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통증에 그녀는 본능적으로 손을 올려 만져보았고 하체에선 붉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트럭 운전자는 자신이 사고를 쳤다는 것을 알아챘는지 그녀를 힐끗 보더니 바로 시동을 걸며 도망쳐 버렸다.차가운 밤바람이 텅 빈 도로 위로 불어오고 있었고 그녀는 혼자 있었다. 살이 찢어질 듯한 고통이 그녀의 이성을 붙잡고 있었고 가슴 속에선 증오의 불씨가 피어올랐다.양시은은 급하게 따라 나왔지만 양채은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했다. 늘 일을 그르치는 자신을 탓하며 원망하듯 머리를 때렸다.핸드폰을 들어 양채은에게 전화를 걸어보아도 양채은은 받지 않았고 아마도 여전히 자신을 원망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아마 더는 그녀의 연락을 받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그렇다면 양채은이 진정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린 후 다시 만나 대화를 해보기로 했다. 그녀와 나도현은 더는 아무런 사이도 아니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말할 생각이다.게다가 나도현은...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생각을 그만하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가려던 때 갑자기 핸드폰이 울렸다. 낯선 번호였지만 전화기 너머로는 나도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양시은...”양시은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나 힘들어. 채은이가 지금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겠고 할 말이 있으면 채은이 찾은 뒤에 해.”나도현은 흥미롭다는 어투로 말했다.“아, 그래? 양채은을 찾은 뒤에 삼자대면하고 싶은 건가?”양시은은 그가 너무도 원망스러웠지만 이를 빠득 갈며 그를 설득하는 수밖에 없었다.“채은이랑 결혼하기로 했으면 그럼 잘해줘. 채은이는 좋은 사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