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연아.”신무열은 쉰 목소리로 김혜연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눈에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고통이 서려 있었다. 왜 이런 불행이 두 사람에게 닥쳐야 할까?둘은 아이의 탄생을 누구보다 기다렸다. 작은 옷도 잔뜩 마련했고 이름까지 거의 정해뒀다. 그러나 세상일은 뜻대로 흘러주지 않았다.“무열 씨, 저 정말 괜찮아요. 그렇게 바라보지 말아줘요. 그러면 제가 더 마음이 아파요.”김혜연은 끊임없이 그를 달랬다. 그러나 그녀가 이럴수록 신무열의 가슴은 더욱 무거워졌다.신무열의 시선은 그녀의 얼굴에서 아래로 내려가 결국 그녀의 배에 닿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볼록했던 배가 이젠 평평해져 있었다.그는 이 사실을 말해야 할지 말지 고민했다.만약 사실대로 말하면 그녀가 이 충격을 어떻게 견디겠나 싶었다. 하지만 숨긴다고 해도 결국 언젠가 알게 될 것이다.잠시 입술을 뗀 신무열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무열 씨, 그렇게 보지 말라니까요. 저 어디 불편한 데도 없어요...”참다못한 김혜연이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떨궈보았다. 단 한 번의 확인만으로 그녀는 모든 걸 깨달았다.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배를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우리 아이... 어디로 간 거죠? 말도 안 돼요. 이건 믿을 수 없어요. 무열 씨, 어서 말해봐요. 아이가 어디로 사라진 거예요?”질문이 쏟아지자 신무열은 그녀를 힘껏 끌어안고 낮은 목소리로 달랬다.“아이는 또 가질 수 있어. 분명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가 찾아올 거야.”“왜요? 제가 대체 뭘 잘못했길래 이런 일이 일어난 거예요?”김혜연의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내렸다.처음 임신 소식을 듣고부터 그녀는 모든 찬 음식을 멀리할 만큼 아이에게 온 신경을 쏟았다. 그렇게까지 조심했는데도 결국 아이를 지켜내지 못했다.정말로 인연이 아니었던 걸까?“넌 아무 잘못도 없어. 네 탓이 아니야. 그저 예기치 못한 사고였을 뿐이야.”신무열의 목소리에는 깊은 자책과 슬픔이 배어 있었다.평소에 더 신경 쓰고 보살폈더라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
신무열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의사가 들어올 때까지 김혜연을 꼭 끌어안고 있기만 했다.의사는 보고서를 신무열에게 건네며 말했다.“검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산모님은 빈혈에 영양불량이 있었고, 그중에서도 최근 과로한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과로요?”신무열은 김혜연이 자신을 위해 했던 일이 떠올랐다. 이런 결과가 생길 줄 알았더라면 밤을 새우더라도 스스로 모든 일을 다 했을 것이다. 김혜연의 도움은 절대 받지 않았을 것이다.‘만약 혜연이를 무리하게 하지 않았더라면 아이도 지킬 수 있었을까?’이런 생각과 함께 신무열이 물었다.“과로 때문에 유산하게 된 건가요?”“일정한 영향을 주기는 했지만 유일한 이유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부모의 신체적 이유도 있으니까요. 부모 중 어느 한 쪽의 상태가 안 좋든 다 아이한테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의사는 자세히 설명해 줬다.전통적인 가정 환경에서 아이에게 문제가 생기면 모든 책임을 산모에게 미루기 마련이다. 그건 산모에게 너무 불공평한 일인데도 말이다.“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몸 회복에 좋은 영양제를 처방해 주세요.”신무열은 김혜연의 건강이 빨리 회복하기만을 바랐다. 그러나 김혜연 본인은 다른 문제를 걱정했다.“선생님, 저 앞으로 다시 임신할 수 있을까요? 인터넷에서는 어떤 사람은 유산이 체질이라고 하더라고요. 유산이 거듭되면 불임이 될 수도 있다고 하던데요.”만약 그렇게 되면 그녀에게는 재앙이 덮친 것과 다름없었다. 그녀는 아이를 더 바라지도 못했다. 그냥 아이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만족할 수 있었다.“산모님은 아직 젊으니까 몸조리 잘하시면 다시 임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조리를 정말 신경 써서 해야 할 겁니다. 적어도 반년이 지난 다음에 다시 임신을 시도하시고요. 그래야 아이가 더 건강하게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의사가 당부했다.그 뒤로도 의사는 계속해서 말했지만 김혜연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완전한 슬픔 속에 잠겨서 가장 나쁜 결과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고 난 뒤 신무열은 김혜연에게 알려주었다.“의사는 체질 문제라고 하던데 이건 네 혼자만의 문제는 아니야. 더구나 우리 둘은 아이를 가지지 못하는 것도 아니잖아. 그런데 왜 자꾸 날 밀어내는 거지?”김혜연이 막무가내인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저 엄청난 슬픔에 잠시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어 이성적이지 못한 행동을 한 것이다.하지만 괜찮았다. 어차피 그가 김혜연의 곁에 있어 주면서 건강을 회복할 수 있게 도와주면 되니까.“우리에게도 아이가 있을 거야. 날 믿어. 내 직감은 단 한 번도 틀린 적 없었거든. 우리에겐 귀여운 아이가 있을 거야.”신무열은 계속 확신 가득한 어투로 그녀에게 말해주었지만 김혜연은 여전히 걱정되었다.“만약에, 만약에 없으면 어떻게 해요?”“없으면 없이 사는 거지 뭐. 지유한테 아들이랑 딸이 있잖아. 지유는 내 동생이니까 지유 자식도 우리 자식이나 마찬가지인 거지. 지유네가 바쁘거나 할 때 우리가 대신 그 아이들을 돌봐주면 되니까 안 생겨도 괜찮아. 나중에 우리가 늙으면 둘이서 행복하게 세계 여행 떠나도 되잖아. 안 그래?”신무열은 아이들을 좋아했지만 둘만 떠나는 세계 여행도 아주 좋을 것 같았다.둘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좋지 아니하겠는가.그의 설득에 김혜연은 점차 걱정을 내려놓게 되었고 병실에 남아 몸조리를 하였다. 신무열은 돌아와 바쁘게 업무를 보았던지라 온지유에게 전화를 걸어야 한다는 것을 깜빡 잊고 있었다....한편 온지유는 오늘 여이현이 바쁘지 않은 날이었기에 가족들과 함께 법로를 만나러 갔다.들어가자마자 법로는 여이현이 품에 안고 있는 온하윤을 발견했다. 아기를 안는 여이현의 자세가 아주 정확하고 능숙해 집에서 자주 안아주는 듯했다. 그랬기에 온하윤의 표정도 평온할 수 있는 것이었다.법로는 온지유가 여이현과 함께 살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여이현과 함께라면 그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으니까.“오늘은 넷이 왔구나. 갑자기 넷이 오니까 병실이 작은 것 같구나. 너희들 덕에
온지유는 속으로 남몰래 한숨을 쉬었다. 역시나 법로에게 이 방법이 먹혔다.아이들을 언급하니 법로는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병실을 바꾸고 며칠 더 입원하겠다고 말했다.지난번 병실로 찾아왔을 때 그녀는 법로가 종이를 베개 밑에 숨기는 것을 보았고 검사 결과인 것이 분명했다. 여이현과 법로가 온하윤에게 정신을 팔고 있을 때 온지유는 슬쩍 법로의 뒤로 간 뒤 베개 밑으로 손을 쑥 넣었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법로가 이미 그 종이를 다른 곳으로 치워버린 것이다. 어떻게든 그들에게 숨기려고 하고 있으니 그녀는 다른 방법을 생각해낼 수밖에 없었다.그 순간 온하윤은 입술을 삐쭉 내밀더니 큰소리를 내어 울기 시작했고 온하윤을 안고 있던 법로는 당황해 어찌할 바를 모르는 모습을 보였다.“내가 안고 있는 게 불편한가?”그는 여러 번 자세를 바꾸며 안아보았지만 온하윤은 눈물을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더 크게 울어댔다. 결국 여이현이 먼저 문제를 눈치챘다.“아마 배가 고픈 것 같네요.”“분유는? 얼른 분유 줘. 우리 손녀 배가 고프면 안 되지.”법로는 다급하게 분유를 찾았다. 아직 어린 아기인데 배를 곯게 하면 쉽게 병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여이현은 얼른 가방을 뒤졌지만 한참 후에야 무언가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지난번 온하윤을 데리고 외출했을 때 배고파진 온하윤에게 분유를 먹이다가 분유병을 그 가방 안에 넣어두었다.집으로 돌아간 후 그 일을 깜빡 잊고 있었던 그는 이번 외출에서 분유를 미처 챙겨오지 못했다.만약 지금 그가 집으로 돌아간다면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었으니 차라리 온하윤을 데리고 집으로 가는 것이 나았다.“분유를 깜빡하고 챙겨오지 못했네요. 제가 일단 데리고 가서 먹이고 올게요.”여이현은 온하윤을 안으며 달랬다.“하윤이 착하지. 아빠랑 얼른 집으로 가서 맘마 먹자.”“그냥 지유랑 별이랑 돌아가거라. 오늘 나 보러 와준 것만으로도 괜찮았으니까 얼른 가. 나한테 시간을 낭비할 필요 없단다.”법로는 먼저 입을 열며 집으로 돌아갈 것을
간호사는 드레싱 카트를 밀며 법로의 옆으로 간 뒤 약을 건넸고 이내 수액도 갈아주었다.“정말로 치료 안 하실 생각이세요? 이 약들은 부작용이 심해요. 특히 환자분 같은 나이 많으신 분한테는 더 그렇고요.”좋게 말하면 보존치료였고 나쁘게 말한다면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다.그녀는 정말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안 할 거예요. 지금처럼 약만 먹으면 됩니다.”법로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앞으로 날 자꾸 설득할 필요도 없습니다. 어차피 병으로 머리가 이상해진 것도 아니고 내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그래도 검사는 정기적으로 할 생각입니다.”법로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을 보탰다. 정기 검진은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적어도 자신이 언제 죽는지 구체적인 시간을 알 수 있었고 미리 죽기 전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었으니까.간호사는 능숙하게 수액을 바꿔준 뒤 나가자마자 병실 앞에 서 있는 온지유와 마주치게 되었다. 온지유가 환자의 딸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던 간호사는 딸에게 절대 자신의 상태를 알리지 말라던 법로의 말도 떠올랐다.환자의 선택이자 부탁이었으니 그녀는 당연히 환자의 결정을 존중해야 했지만 온지유가 문 앞에서 듣고 있지 않았는가. 이건 그녀의 탓이라고 할 수 없었다.간호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온지유를 보지 못한 것처럼 태연하게 드레싱 카트를 밀며 가버렸다.어쩌면 법로는 원치 않아도 치료를 받아야 할 것이다.온지유는 문 앞에 서서 한참이나 방금 들은 소식에 받은 충격을 소화해야 했다.법로는 역시 병에 걸린 것이 맞았고 심지어 심각한 상태였다. 암 말기였으면서 그녀에게 숨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항암 치료까지 거부하고 있었다.그녀는 어떻게든 법로를 설득해 치료받게 해야겠다고 생각한 후 문을 열고 들어갔다.“정말로 치료 안 받을 생각이세요?”“네, 안 받을 겁니다. 아픈 사람은 나인데 왜 자꾸 치료받겠느니 안 받겠느니 하는 거죠? 여기 병원은 간호사들이 오지랖이 많은가 봅니다. 환자에게 관심을 주는 건
“말은 그렇다고 하지만 그래도 치료는 받으셔야죠. 설령 완치하지 못한다고 해도 고통은 덜 수 있고 더 오래 살 수 있잖아요. 아버지는 의학 지식도 있으면서 왜 이런 것도 모르시는 거예요?”온지유는 진지하게 말했다.여하간에 가족이었던지라 그녀는 법로가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대충 짐작하고 있었고 직설적으로 물었다.“혹시. 항암 치료를 받으면서 탈모로 머리카락이 전부 빠질까 봐 그러시는 거예요? 머리카락이 없으면 추해질까 봐요?”법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이 죽을 땐 멋진 모습으로 죽이길 바랐고 초췌한 몰골로 죽고 싶지 않았다.나중에 자신의 두 아이가 보고 놀랄까 봐 말이다.“아니, 대체 왜 그런 생각을 하신 거예요? 20대도 아니고 왜 외모에 그렇게 신경 쓰시는 건데요?”온지유는 어처구니가 없었다.“머리카락이 없으면 어때서요. 어차피 아버지는 나이가 많으셔서 탈모가 와도 정상적인 거라고요. 길가에 나가보시면 대부분 어르신들이 머리숱이 없어요.”“자연적으로 탈모하는 거와 아예 없는 거와는 다르단다.”법로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올려 자신의 머리를 만졌다. 이미 꽤나 빠졌지만 만약 남아있는 머리카락마저 사라진다면 얼마나 추하겠는가.더구나 항암 치료의 부작용에는 탈모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구체적인 것은 항암 치료를 시작한 뒤에야 할 수 있었다.“그러면 아버지는 두 아이들한테 외할아버지가 영원히 사라져도 괜찮은 건가요? 다른 아이들처럼 할아버지 할머니 사랑 듬뿍 받고 자라지 않아도 된다는 건가요? 저랑 이현 씨를 제외하고 아이들한테 진심으로 사랑을 주고 아껴주는 사람이 아버지인데, 정말로 어느 날 말도 없이 떠나신다면 아이들은 어떻게 하라고요? 별이랑 하윤이가 아버지를 많이 좋아한다는 걸 아버지도 알고 계시잖아요.”온지유는 계속 설득했다.“저도 아버지가 오래 살아계셨으면 좋겠어요. 설령 항암 치료의 효과가 고작 1년 반을 더 살게 된다고 해도 더 오래 살아계셨으면 좋겠다고요.”“정말로 내가 살기를 바라는 거니?”법로는 고개를 들어 딸을
온지유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 후 주치의를 불러와 법로의 상태에 관해 자세히 물었다.“선생님, 아버지가 치료를 받으시겠다고 마음을 바꾸셨어요.”“정말 대단하세요. 저와 간호사들이 그동안 꾸준히 설득했는데도 치료 안 받으시겠다고 하셨거든요. 역시 이런 문제는 자식들한테 맡기면 되는 거였네요.”주치의는 온지유를 보며 따라 웃음을 지었다. 사람이 눈앞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것보다 역시나 최선을 다해 살려보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어떤 치료를 받게 될지 설명을 들은 후 온지유는 법로와 조금 더 대화를 나누다가 병실을 나섰다.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바로 신무열에게 영상 통화를 걸었지만 한참 지나서야 연결이 되었다. 화면에 나타난 초췌한 얼굴을 보니 온지유는 순간 걱정되었다.“요즘 공무가 많은 거예요?”“그래. 이 자리에 직접 올라와 보니 알겠더라고. 얼마나 부담스럽고 힘든 자리인지를.”신무열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비록 김혜연의 자연 유산은 배아 상태와 어느 정도 관련이 있었지만 그는 만약 두 사람 모두 바쁜 나날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그 아이가 먼저 그들의 곁을 떠날 리가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지금은 아이를 잃었고 김혜연은 계속 병원에서 입원하며 몸조리를 하고 있었으니 그가 가장 바쁠 때였다.그러나 그는 병원으로 가서 아내의 곁에 오래 있어 줄 수 없었다.처리해야 할 일은 산더미처럼 많았고 설령 오늘 할 일을 마친다고 해도 하룻밤만 지나면 또 새로운 일거리가 산처럼 쌓였다. 이 자리에 앉았으면 할 일은 해야 했던지라 그는 쉽사리 공무를 내팽개칠 수 없었다.“그래도 가끔은 쉬면서 해요. 그러다가 병나면 어떻게 하려고요. 혜연 씨는요?”김혜연을 찾는 온지유에 신무열은 가슴 아픈 표정을 지었다.그의 표정을 본 온지유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기우이길 바라면서 그가 말하기를 기다렸다.“혜연이는 지금 병원에 있어. 우리 아이가 우리 곁을 떠났어.”이 말을 꺼내는 신무열의 눈가가 촉촉해졌고 온지유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어떻게 그럴 수
온지유는 당연히 두 사람의 선택을 존중해야 했다. 그녀의 인생이 아니었으니 선택권은 그들에게 있었고 동생으로서 해줄 수 있는 것은 슬플 때 곁에 있어 주는 것과 위로뿐이었다.그녀는 신무열과 간단히 대화를 나눈 뒤 법로의 상태를 말해주었다.“아버지가 암에 걸렸다고 병원에서 그러더라고요. 그것도 간암 말기래요.”“뭐?”신무열은 멍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법로가 출국하기 전까지만 해도 건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마 지났다고 간암 말기라니 믿을 수 없었다.온지유도 이 모든 것이 가짜이길 바랐지만 다시 검사를 해봐도 하얀 종잇장엔 간암 말기라는 충격적인 글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그게 어떻게 가짜이겠는가.“아버지는 원래 치료를 포기하려고 하셨어요. 그래서 매일 약만 드시면서 버티고 계셨는데 제가 겨우 설득해서 다시 치료받으시기로 했어요.”온지유는 사실 신무열이 자신이 있는 곳으로 와 법로를 만나길 바랐다. 여하간에 신무열은 법로의 아들이었으니까. 비록 법로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분명 신무열이 그리워하고 있을 것이었다.그러나 신무열의 상황도 좋지 않았기에 그녀는 말을 꺼낼 수 없었고 결국 신무열이 먼저 입을 열었다.“일단 며칠 동안 네가 아버지를 잘 보살펴줘. 난 최대한 빨리 일을 마무리하고 갈 테니까.”“알겠어요. 의사 선생님께 물어봤는데 아직은 별 큰 문제는 없다고 했어요. 치료를 잘 받기만 한다면 무조건 효과를 볼 수 있을 거라고 했어요.”온지유는 그를 재촉하지 않았다.전화를 끊은 후 신무열은 반 시간 만에 손에 쥐고 있던 업무를 마치고 병원으로 달려갔다.김혜연은 혼자 창가에 앉아 밖에서 뛰어다니며 놀고 있는 아이들을 보았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도 대체 언제쯤이면 남들처럼 걱정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걸까?“혜연아, 나 왔어. 네가 좋아하는 과일 사 왔어.”신무열이 문을 열고 들어오며 과일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깨끗한 그릇을 꺼내 과일을 씻은 뒤 껍질을 까서 그릇에 담아 놓았다.소리를 들은
하지만 감동보다는 오히려 속이 울렁거렸다.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에 문지원은 당장 얼굴이 일그러지며 화장실로 달려갔다. 지석훈도 뒤따라 들어오며 물었다.“속이 안 좋아?”“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요즘 세 끼 식사도 꽤 규칙적으로 하고 날것 이거나 차갑거나 매운 음식도 먹지 않았는데...”문지원은 배를 움켜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지석훈도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한 듯 방으로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가져왔다.문지원은 놀라며 물었다.“언제 산 거예요?”지석훈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문지원은 아무 말이 없었다.5분 후, 그녀는 복잡한 얼굴로 다시 나왔다. 한 손은 여전히 배 위에 올려져 있었고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정말 임신한 것이다!그녀와 지석훈이 결혼한 지 겨우 3개월밖에 안 되었는데 이렇게 빨리 임신하다니.지석훈은 오히려 태연해 보였다. 하지만 입가에 감출 수 없는 미소를 보면 그 역시 겉모습처럼 평온하지 않고 흥분을 억누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정말 임신한 거예요?”문지원은 아직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번 달 초에 생리가 끝났기 때문이다.“아마 생리가 끝난 후 며칠 사이일 거야.”지석훈의 목소리는 문지원에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니 그녀의 귀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결국, 그녀는 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임신 테스트기는 가끔 틀릴 수도 있으니 이런 일은 직접 검사를 받아보고 확인해야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그녀는 손에 든 검사지를 보고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의사는 마침 지석훈과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축하합니다, 지 원장님. 부인께서 임신 2주 차입니다.”“감사합니다.”지석훈은 침착하게 그녀를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병원 진료실을 막 나오자마자 지석훈은 문지원을 품에 안았다.“너무 좋아. 우리 아이가 생겼어.”문지원은 남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모습을 보며 멍하
물론 손에 있는 일을 무턱대고 모두 남에게 맡기는 것은 너무 과한 부담을 주는 일이다.문지원은 비서를 사무실로 불렀다.“올해 25살이죠?”비서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그녀의 나이는 모두가 다 아는데 문지원 회장이 갑자기 이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혹시 소개팅을 시켜주려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비서는 고마웠지만 거절하며 말했다.“문 사장님, 저는 아직 젊어서 당장은 결혼할 생각이 없습니다.”“전 당신더러 결혼하라고 하는게 아니에요.”문지원은 펜으로 탁자를 두드리며 말했다.“그냥 평소에 잡다한 일들을 맡기고 싶어서요. 확인이 필요한 문서들은 평소에 굳이 내게 제출하지 않아도 돼요.”비서는 그 뜻을 이해했다.이건 곧 그녀에게 승진과 급여 인상을 주려는 것이다. 문지원이 그녀의 의견을 확인한 후 급여를 조금 올려줬고 비서에게 몇 명의 적합한 인재를 추가로 모집해서 예비 인력으로 두라고 지시했다.“평소에 내가 처리하지 못한 일들을 대신 처리해주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그때마다 보고하면 돼요.”비서는 한숨을 쉬며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녀 혼자서 이렇게 많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일정이 정리되자 문지원은 업무에서 상당 부분 해방되었다.예전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바쁘게 일하다 보면 퇴근 시간이 되어도 일이 끝나지 않고 긴급 통지가 오면 또 회의를 위해 야근을 해야 했다.이제는 오후 4시 반쯤이면 일을 마치고 퇴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비서가 몇 명을 더 찾아서 양성해 두었기에 업무가 적절히 분배되어 모두 바빠 죽을 정도가 아니라 적당히 딱 맞는 분량을 처리할 수 있었다.그 덕에 문지원은 지석훈과 함께 결혼 후의 삶을 더욱 즐길 수 있게 되었다.지석훈도 이에 매우 만족해했다.“널 주려고 선물을 챙겨왔어. 들어가서 한번 봐.”그가 집 문 앞에 다가서더니 걸음을 멈췄다.문지원은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안은 어두컴컴했다.“뭐 숨겨놨어요? 아직 불도 켜지 않았네요, 수상하게.”탁! 하며 불이 켜지자 거실의 모든
문지원은 이 주제가 다소 위험하다고 느꼈다. 비록 그녀의 아버지가 그녀에게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과 배석훈이 결혼한 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돼지고기를 먹어보지 않았다고 해도 돼지가 뛰어다니 것을 본 적은 있을 것이다. 문지원은 그러면서도 반쯤 빚어놓은 만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이에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너희들도 이제 나이가 들었으니 아이를 가져야지. 평소에 좀 더 노력해야 한단다.”문지원은 잔소리를 듣고 나서 나오니 기운이 다 빠져있었다.시어머니는 문지원에게 정말 잘해주었다. 거의 마음을 쏟아붓는 수준이었다. 비록 문지원의 집안 사정이 좋은 것을 알면서도 혼수 때 오랜 세월 모은 돈으로 집 한 채를 사서 선물해 주었다. 사실 지석훈도 자기 집이 있었지만, 시어머니는 선물하고 싶다고 하셨다. “너희 집도 너희의 것이지만, 이건 내가 어른으로서 선물하는 거란다.”게다가 그 집에는 문지원의 이름도 함께 올려져 있었다.그래서 시어머니의 출산 독촉에도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버텨야만 했다. 다행히도 시어머니는 어린 이들에게 엄격하게 구는 편은 아니었다. 만두를 빚을 때 한 번 그런 말을 했고 또 떠나면서도 지석훈을 불러 몇 마디 잔소리했다. 문지원은 그 모자간의 대화를 듣지 못했다.돌아가는 길에 문지원은 약간 궁금해져 지석훈에게 물었다.“나갈 때 어머니께서 뭐라고 하셨어요?”“정말 알고 싶어?”“네.”그러자 지석훈은 문지원의 머리를 숙이게 한 후 그녀의 흩어진 머리칼을 살며시 넘겨주며 귀 옆에서 낮게 속삭였다.“우리 아이를 빨리 낳으라고 하셨어.”남자의 낮고 진한 목소리는 얼굴을 붉히고 심장을 뛰게 만드는 약보다도 중독성이 강해 문지원의 귀가 금세 붉어지고 말았다.저녁이 되자 지석훈은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문지원의 머리를 받치고 이마를 맞대며 낮은 숨소리를 내쉬었다. 문지원은 마치 파도 속에 잠긴 것
그 눈빛 속에서 조용히 터져 나오는 그 소유욕. 마치 옛 시대의 군벌과 그의 부인 같았다. 그리고 사진작가는 우연히 그 장면을 목격한 운 없는 사람이 되어 몰래 촬영을 하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자신의 상상에 자극받아 목소리가 떨렸다.“지석훈 씨, 고개를 들어 카메라를 봐주세요.”지석훈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사진작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사진작가는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그 후에도 그들은 여러 세트의 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들은 모두 문지원에게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문지원은 모든 사진에 다 만족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든 것은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었다.“대략 며칠 안에 나오나요?” 그녀가 물었다.사진작가는 답했다.“빠르면 이삼 일정도 걸릴 겁니다. 그때 완성된 사진들을 택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개인적인 부탁이 하나 있는데 혹시 두 분께서 응해주실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바로 아까 찍은 사진 중 몇 장이 제가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어서 사진관 벽에 걸어두고 싶습니다.”문지원은 사진관에 들어올 때 봤던 사진 벽이 생각났다.“그 벽에 걸어두시겠다는 건가요?”“네.”사진작가는 그 벽은 사진관의 특별한 기념 및 홍보 방법의 하나라고 설명했다. 잘 나온 사진들은 사진 주인에게 동의를 구한 뒤 동의하면 벽에 전시한다고 한다..문지원은 옆에 있던 지석훈을 바라봤다. “저는 괜찮은데, 당신은요?” 지석훈도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마음대로 하도록 해.”며칠 후 문지원은 사진작가가 보내온 사진을 받아 소중히 간직했다. 하지만 그녀는 몰랐다. 그 사진관 벽에 전시된 사진들이 곧 사람들의 눈에 띄어 사진이 찍혀 인터넷에 올라간 것이다.잘생긴 남성과 아름다운 여인의 조합과 최상의 촬영 기술 덕분에 순식간에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다.네티즌들은 저마다 아아 소리를 냈고 많은 사람이 댓글을 달았다. “마치 옛 시대의 군벌 부인 같다.”“완전 대박이다.”“3분 안에 그들의 모든 정보를 알고 싶다.” 하지만 이 모
문지원은 약간 마음이 움직였다.하지만 웨딩 촬영은 이미 여러 번 한 적이 있었다. 그때 섬에서 몇 세트 찍었고 그 후 결혼식 현장에서 또 몇 세트 찍어 셀 수 없을 정도였다.게다가 이번 촬영은 개인 예약으로 진행되었는데 이 사진관이 꽤 유명하다고 들었다.물론 사진관 이름에 걸맞게 예약은 거의 하늘의 별 따기라고 한다..이 정도면 지석훈이 얼마나 큰 노력을 들여 예약을 잡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웨딩사진만 찍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 아까웠다.하지만 문지원 역시 이런 곳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을 찍어야 할지 몰랐다.“한번 보세요. 이건 저희가 예전부터 선보였던 스타일들이에요.”사진작가는 친절하게 앨범 한 권을 꺼내 보였다.앨범에는 이전 고객들이 이곳에서 찍은 사진들이 담겨 있었는데 정말 다양한 스타일이 있었고 모두 아름다웠다.이 사진관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정말 최고였다.문지원은 그중에서도 민국 시대 주제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이렇게 찍을 수 있을까요?”사진작가는 그녀가 가리키는 사진을 한 번 살펴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됩니다. 먼저 메이크업하고 옷을 갈아입으세요. 직원들이 촬영 스튜디오를 설치할게요.”옷은 사진관에서 준비한 것으로 하고 지석훈의 요구에 따라 전부 새 옷이었다.사실 문지원은 소품용 옷을 입는 것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쨌든 한 번 입었다가 나중에 벗으면 되는 거고 몸에 달라붙지 않아서 안에 옷을 받쳐 입을 수도 있었다.하지만 지석훈은 직업병이 발동했고 그런 건 용납할 수 없었다.결국, 문지원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급히 새 옷을 가져와야 했기 때문에 원래 걸리던 시간에서 15분이 더 추가되었고 메이크업 등 기타 과정도 진행해야 했다.문지원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왔을 때는 이미 2시간이 지난 후였다.그러나 결과는 확실했다.곧은 치파오가 그녀의 아름다운 몸매를 감쌌고 문지원은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렸다. 마치 지난 옛 시대의 그림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결혼 후 문지원은 휴가를 내서 신혼여행을 갈까 고민해 본 적이 있었다.하지만 요즘 지석훈이 거의 계속 병원에 머무르며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을 떠올리며 본의 아니게 한숨이 나왔다. 비록 이미 익숙해졌긴 했지만 실망을 감추기는 어려웠다.비서도 그녀에게 물었다.“문 사장님, 신혼여행 가고 싶지 않으세요? 제 동창 중 한 명이 며칠 전에 결혼했는데 요즘 여기저기서 신혼여행 정보를 알아보며 준비 중이에요. 신혼여행이 없는 결혼은 반은 실패한 거랑 마찬가지라고 하더라고요.”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제대로 볼 생각조차 들지 않았고 비서는 무언가를 눈치챈 듯했다.“그렇지 않으면... 문 사장님, 지 의사님이 일하시는 곳에 한 번 가보시는 건 어떠세요?”그녀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어쨌든 문지원은 요즘 정신이 산만하여 업무에 집중할 기색도 없었다.문지원은 비서의 시선 속에서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 동안 집에 돌아와도 지석훈을 보지 못해 한참 혼란스러워했던 자신을 깨달으며 약간 부끄러워졌다.“그건 나중에 얘기하고 기획서 한 부 복사해 가져다주세요.”점심 무렵, 문지원은 막 일을 끝내고 밥 먹으러 가려던 찰나, 핸드폰에 지석훈의 메시지가 떴다. 같이 밥을 먹자는 메시지에 문지원은 미소를 지었다. 멀리서 이 장면을 본 직원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터뜨렸다.문지원은 재빨리 열쇠를 챙기고 회사를 떠났다. 지석훈은 그녀를 새로 오픈한 가게로 데려갔다.식사를 마친 후 문지원은 지석훈을 바라보며 머뭇거리다가 물었다.“병원에 다시 돌아갈 거예요?”“응?”지석훈은 눈썹을 치켜들며 고의적으로 물었다. “내가 돌아가길 바라는 거야?”그 말을 들은 문지원은 순간 당황했다. 사실 그녀는 지석훈이 자신과 좀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주길 바랐는데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임에도 불구하고 각자 업무에만 매달려 밤에야 겨우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하지만 수줍음이 많은 그녀는 그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지석훈은
예전에는 이런 일이 있을 때면 지석훈은 항상 선을 지켰지만 오늘 밤엔 조금 달랐다. 그는 그녀를 침실에서 욕실로 다시 침대로 옮겨가며 몸 곳곳에 뜨거운 입맞춤을 했다.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도 문지원은 여전히 몸속 깊이 스며든 감각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그리고 그녀는 예상대로 휴가를 냈고 이틀이 지나서야 회사에 다시 나왔다.회사 사람들은 이미 예상이라도 한 듯 문지원이 출근하자 하나같이 말했다.“문 사장님, 결혼 축하드려요.’문지원은 무려 사흘이나 결근했지만 다들 그 사흘 동안 무얼 했는지는 굳이 말 안 해도 짐작이 갔다.분명 부부 생활이 아주 좋았겠지, 아니었으면 일까지 내팽개치고 안 나왔을 리가 없다.문지원은 직원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에 얼굴을 들 수도 없어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그래도 지난번에 당한 적이 있었던 터라 문지원은 이제 출근 전에 거울 앞에서 꼼꼼히 점검했다.몸에 키스 자국이 드러나지 않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회사를 향했다.그렇지 않았다면 그 흔적들을 들켰을 경우 정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문지원이 예상치 못했던 건 며칠 지나지 않아 결혼을 축하하는 선물이 회사로 배달됐다는 것이다.문지원은 처음에 여울이 보낸 거라고 생각했지만, 물어보니 아니었다.택배 상자의 외관을 살펴봐도 발신자가 적혀 있지 않아 더욱 수상했다.“이거 가져온 사람이 누가 보낸 건지 말했어요?”문지원이 로비 직원에게 물었다.로비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두고 바로 가버렸어요.”문지원은 뭔가 직감적으로 찜찜한 마음이 들어 그 택배를 챙겼고 사무실에 들어와서야 상자를 열었다.그 안에는 브로치 하나와 축하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문지원은 축하 카드를 집어 들어보니 카드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결혼 축하해요.”글씨체는 아주 정갈하고 예뻐 여성의 필체 같았다.그녀는 곧바로 짐작이 갔다.문지원은 그 브로치를 지석훈에게 보여주자 그는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아무 말 없이 브로치
여울은 아직 최주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최주하도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문지원이 알기로 여울은 마음이 여린 사람이었고 결국 받아들이게 되는 건 시간문제일지도 몰랐다.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친구 일에 깊이 관여하는 것도 괜히 어색하고 조심스러웠다.게다가 얼마 전 지석훈이 슬쩍 귀띔하듯 말했다.“며칠 전에 여울 씨가 병원에 재검진받으러 왔는데 주하가 데리고 왔었어.”그 말을 듣고 문지원은 혀를 끌끌 찼다.평소에 말도 없고 조용하던 여울이 은근히 비밀 많은 타입이었던 모양이었다.그렇게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어느덧 다음 달 중순이 되었다.지석훈은 아예 와인 농장을 통째로 빌려 며칠에 걸쳐 그곳을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꾸며놓았다.결혼식을 올릴 장소는 바로 거기였다.그 와인 농장은 웬만한 호텔 못지않게 컸고 내부에는 수년간 숙성된 고급 와인들이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고 결혼식 날 손님들이 오면 바로 꺼내어 대접할 수 있을 정도였다.그들은 결혼 소식을 널리 알리진 않았다.이건 문지원이 원한 방식이었다.그녀는 온 세상에 떠들썩하게 알리는 그런 결혼식보다는 가까운 가족과 친구들만 초대해서 조용히 축하받는 걸 선호했다.행복은 굳이 남들에게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그런데 결혼식이 한창일 때 지석훈이 무대 위에서 다시 한번 프러포즈했다.해변에서 했던 프러포즈보다 훨씬 더 진지하고 진중한 분위기였다.“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지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어서... 예전엔 내가 사랑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렸던 순간이 많아. 이제는 더 이상 놓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내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워. 앞으로 남은 인생... 너랑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해.”그의 말이 끝나자 하객들 사이에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문지원은 무대 위에서 입을 손으로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식이 끝날 무렵, 문지원은 멀리서 검은색 카이엔 SUV가 그녀의 친구 여울을 데리러 오는 걸 보았다.차창이 천천히 내려가자 예상대로 그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최주하였다
문지원은 문득 자신이 계획에 철저히 걸려들었다는 생각에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처음부터 계획한 거죠?”“응.”지석훈은 미소 지으며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사실, 그는 그녀를 향한 마음을 오래전부터 숨겨온 것이었다....해변에서의 프러포즈 이후 문지원에게 찾아온 가장 큰 변화는 손가락에 반짝이는 반지가 생겼다는 점이었다.이 반지는 지석훈이 특별히 맞춤 제작한 것이었다. 그녀는 우연히 그의 휴대폰을 보다가 두 달 전에 이미 주문이 들어가 있었다는 구매 기록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다니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접한 지석훈의 부모님은 곧바로 혼인신고부터 하라고 재촉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지원은 우연히 지석훈의 어머니가 그를 붙잡고 타이르는 말을 듣게 되었다.“네 아빠랑 난 애초에 너한테 기대도 안 했어. 하루가 멀다고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니 너 같은 애한테 누가 시집오겠나 싶었거든. 그런데 다행히 네가 능력 있어서 지원이 같은 좋은 아이를 데려왔으니 얼른 확실히 붙잡아야지. 빨리 혼인신고부터 해. 나중에 그 아이가 너 버리고 떠나버리면 그땐 어디 가서 울어도 소용없어!”문지원은 그 대화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몰랐다.그런데 신기한 건 지석훈이 워낙 점잖고 진지한 사람이어서 집안 분위기도 매우 조용할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퇴직해 한가로운 성격으로 매일 독서나 산책을 즐기는 조용한 스타일이었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는 커리어 우먼이었고 호탕한 성격으로 남편에게 엄격하면서도 친화력이 강한 사람이었다.두 분 모두 차분한 듯하면서도 내면에 장난기를 숨기고 있는 아들을 낳을 것 같진 않았는데 이게 바로 유전자의 신비인가 싶었다.하지만 어머니가 그렇게 그녀를 좋아해 주는 모습에 문지원도 안심했다. 확실히 시부모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증거였다.한편 문지원의 아버지는 지석훈과 따로 대화를 나눈 이후부터 정확히 무슨 얘기를 했는지는 몰라도 그에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