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이현은 주변을 계속 돌며 온지유에게 전화를 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도 물어봤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바로 이때, 그가 거의 절망하려던 순간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여보.”온지유였다.여이현은 급히 돌아서서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가 단숨에 안아 올렸다.“걱정했잖아. 널 찾을 수도 없고 전화해도 안 받고, 무슨 일 생긴 줄 알고 너무 무서웠어.”만약 온지유에게 큰일이라도 났다면 그는 어떻게 살아갈까 싶었다. 아이들도 아직 어린데 엄마를 잃으면 어떻게 건강히 자랄 수 있겠는가.“미안해, 방금까지 경찰서에서 진술하느라 휴대폰을 무음으로 해놨어. 나 멀쩡하니까 걱정하지 마.”온지유는 부드럽게 달래며 그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정말 괜찮아.”“근데 피가 묻었잖아.”여이현은 그녀를 놓고 위아래로 살펴보다 원피스 군데군데 묻은 핏자국을 발견하곤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어디 다친 거야? 지금 당장 병원부터 가자.”“내가 다친 거 아니야. 이건 그 인간들 피가 묻은 거고 나는 멀쩡해. 믿기지 않으면 봐, 상처 난 데 있어 보여?”온지유는 일부러 소매를 걷어 올려 맨살을 보여주었다. 팔에는 약간의 멍 자국만 있을 뿐 큰 상처는 없었다.그렇다 해도 여이현은 여전히 안심할 수 없었다.“저 자식들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야. 분명 또 찾아올 텐데...”“물 들어오면 둑 막고, 적 오면 장수로 막는 거지. 난 안 무서워. 게다가 너도 있잖아. 네가 우릴 잘 지켜줄 거라고 믿어.”온지유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단단한 신념을 담아 말했다.어떤 조직이든 둘이 힘을 합치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그녀에게 있었다. 오늘도 결국 그녀가 괴한들을 제압하지 않았던가.“그놈들은 벌써 경찰서에 넘겼어. 아무 말도 안 하긴 했지만 내가 이걸 챙겨왔거든.”온지유는 가방을 열어 포장해 둔 주삿바늘을 꺼내 여이현에게 건넸다.“그놈들이 이걸 내 몸에 주사하려고 했는데 실패했어. 도리어 내가 그중 한 놈한테 주사해 줬지. 여기 약물 조금 남았으니까 뭐가 들
온지유는 지금 당장 모임을 할 마음이 없었다.조직 문제도 아직 해결되지 않았는데, 괜히 권다솔과 배진호를 만나면 그 조직의 눈길이 그들한테까지 옮겨 갈 수 있지 않겠는가. 그건 감사가 아니라 민폐를 끼치는 일이었다.“집에 가서 내가 진호 연락해 볼게. 마침 회사에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있는데 같이 해보고 싶었어.”여이현은 한편으로는 배진호를 도와주려는 마음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그의 성실한 인품을 믿었다.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맡기면 제대로 해낼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이다.“됐어, 운전에 집중해. 내가 그냥 다솔 씨한테 문자나 보낼게. 이 시간대면 두 사람 다 일하고 있을 수 있어.”온지유는 휴대폰을 꺼내 권다솔에게 귀여운 이모티콘 하나를 보냈다. 상대가 답장을 하지 않자 더는 방해하지 않고 휴대폰을 넣었다.곧 차가 집 앞에 도착했고, 온지유는 포장된 음식을 들고 들어갔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별이가 후다닥 달려왔다.별이는 온지유 손에 든 음식을 신경 쓰지 않고 곧장 매달렸다.“엄마,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걱정했잖아요. 혹시 엄마한테 무슨 일 생긴 줄 알고 엄청 무서웠어요!”“엄마 괜찮아. 네가 좋아하는 치킨 사러 갔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다 떨어졌었어. 그래서 새로 나오길 기다리느라 좀 늦어졌어.”온지유는 여이현과 눈이 마주치자 살짝 미소 지으며 선의의 거짓말을 했다. 두 사람 모두 아이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별이는 마치 어른처럼 깊은숨을 내쉬었다.“그렇다면 됐어요. 하지만 엄마 다음부터는 그런 상황이면 그냥 돌아와요. 굳이 거기서 기다릴 필요 없어요. 치킨 못 먹어도 상관없어요.”집에는 먹을 것도 많고 매일 식사도 푸짐하다. 굳이 치킨 하나 때문에 위험을 감수할 필요 없다.“우리 별이가 제일 착하네.”온지유는 별이를 번쩍 안아 한 바퀴 빙 돌았다.별이는 온지유에게 안겨 공중에서 빙글빙글 도는 느낌에 깔깔 웃었다. 그 모습에 온지유도 미소 지었다.한편 여이현은 온하윤 곁으로 다가가 그녀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손
“별이 아주 잘했어! 좋은 걸 나눌 줄도 알고. 우리 아들 정말 잘 크고 있네.”온지유는 아들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부모로서 그녀는 아들과 딸이 화목하게 잘 지내고 힘들 때 서로 도와주며 의지하길 바랐다.여하간에 부모를 제외한 두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가까운 사이였으니까.여이현은 딸을 안고 거실을 두어 바퀴 걸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아기 흔들이 의자에 눕혀 김명자에게 맡겼다.저녁은 이미 준비되었다. 세 사람은 함께 레스토랑으로 가서 즐겁게 저녁을 즐겼다.저녁을 먹고 난 별이는 애니메이션을 보러 갔고 심심해진 온지유는 핸드폰을 들었다.그러다가 우연히 권다솔이 보낸 답장을 보았다.[다음 주에 진호 씨랑 가정 법원에서 만나기로 했어요. 이혼할 거거든요.]온지유는 믿어지지 않아 눈을 비볐다.‘두 사람 사이가 좋지 않았었나? 얼마 전만 해도 다솔 씨가 나한테 임신한 소식을 알려줬었잖아. 그런데 갑자기 이혼한다고.?'그녀는 누군가 권다솔 핸드폰을 해킹한 것은 아닐까, 아니면 게임을 하다 져서 벌칙으로 이런 문자를 보낸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농담이죠? 다솔 씨, 이런 농담은 재밌지 않아요. 이혼이란 단어는 함부로 꺼내는 게 아니에요.][전 농담이 아니에요. 정말로 이혼할 거예요. 무조건 이혼할 거예요. 전 이미 이혼하기로 마음먹었으니까 누구도 절 말릴 수 없어요.]권다솔은 답장하면서도 답답한 가슴에 짜증이 솟구쳤다.만약 부모님께 이 사실을 알린다면 무조건 남태건을 칭찬하는 말만 가득할 것이다. 어차피 그들은 그녀가 다른 남자를 찾아 상처만 준 배진호를 잊기를 바랄 테니까.하지만 친구들에게 털어놓기엔 입이 떼어지지 않았다.결국 고민 끝에 온지유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게 된 것이다. 온지유에겐 아이가 둘이나 있었으니 그녀의 마음을 잘 이해해줄 것으로 생각했다.[혹시 전화 통화 가능해요? 아니면 영상 통화라도 가능할까요?]온지유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었다. 그녀는 핸드폰을 들고 안방으로 들어온 뒤 문을 꼭 닫았다. 그리고 영상
너무도 평평했다.“전에는 먹는 걸 좋아해서 뱃살이 좀 있었거든요. 거기에다 임신까지 하니까 티가 나진 않긴 했어도 이곳이 조금 불룩했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보세요. 아무것도 없어요.”뱃살뿐만 아니라 아기도 없었다.온지유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더욱 입을 열기가 힘들었다.“아기... 아기가 없는 거예요?”아기를 품은 엄마로서 인생에서 제일 고통스러운 것이 아기를 잃는 것이었다.권다솔은 전부터 아기가 태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사실을 온지유도 알고 있었기에 같은 아이의 부모로서 그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지금 이 순간 무슨 말을 해도 위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아이를 잃은 엄마에게 몇 마디의 위로의 말로 고통을 덜어줄 수 있을 리가 없었다.“네, 아기를 금방 유산했을 때 머리가 멍했어요. 머릿속이 백지장이었죠. 무슨 생각을 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어요. 그렇다고 해서 제가 바보라는 소리는 아니죠. 수술하고 나온 뒤에 전부 이해가 가더라고요. 배진호 씨 어머님이 얼마나 저를 싫어하셨는데 왜 갑자기 저한테 잘해줬겠어요?”시간을 되돌리는 능력만 있다면 권다솔은 그때로 돌아가 자신의 뺨을 때리고 싶었다. 정신을 차리라고.애초에 정미진에게 기대를 품은 것이 잘못이었다. 고작 화목한 집안을 만들고 싶다는 이유로 정미진에게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애를 썼지만, 누구나 다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정미진은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녀가 임신했든 말든 그녀는 영원히 정미진의 마음에 들지 않는 며느리였다.“그럼 진호 씨는요? 진호 씨는 뭐래요?”“몰라요. 그 사람이 뭐라고 하든 말든 저랑 상관없는 일이에요. 어차피 아기도 없는데 그 사람이랑 함께 살 이유는 없죠. 설령 어머님이랑 싸우고 연까지 끊는다고 해도 제 아기가 살아 돌아오는 건 아니잖아요.”권다솔은 이 부분에선 이성적이었다.더구나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지 않는가. 그랬기에 배진호와 정미진이 그 정도로 싸울 리가 없었다.그녀에겐 정미진이 그녀의 아기를 해쳤다는 증거
“전 두렵지 않아요.”그녀에겐 생각이 있었다.권다솔은 온지유에게 자기 생각을 손가락을 접으며 보여주었다.“첫째로 그 사람들이 지유 씨 가족을 노리고 있다는 건 분명 지유 씨네 인맥까지 알아봤을 거예요. 그리고 우리가 친구라는 것도 알아냈겠죠. 두 번째로 전 경호원을 데리고 가면 돼요. 제가 데리고 간 경호원과 함께 산다면 더 안전할 수 있으니까요.”그녀는 진심으로 집에 있고 싶지 않았다.남태건은 매일 찾아와 그녀의 부모님 앞에서 점수를 따려고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그녀는 정말이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하지만 남태건을 대할 때 진심으로 즐거운 표정을 짓는 부모님을 보면 권다솔은 남태건을 쫓아낼 수 없었고 심한 말도 할 수 없었다.이미 한번 그녀의 고집으로 부모님에게 상처를 주었었으니까. 게다가 이혼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어떻게 부모님에게 심한 말을 할 수 있겠는가.정말 그런다면 그녀는 불효자식이 되는 것이었다.그랬기에 이런 일은 마음속에 숨기고 끙끙 앓으며 혼자 소화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그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그럼 와요. 요즘 대부분 시간을 제가 집에서 보내고 있거든요. 저랑 얘기를 나눠도 되고 같이 취미 활동도 해도 되니까 와요. 적어도 다솔 씨가 그 집에 있는 것보단 덜 답답할 거예요.”온지유는 그녀를 환영했다.상의가 끝난 후 권다솔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빠르게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간단히 짐을 꾸리고 나서 방에서 나왔다.권용민과 김영은은 소파에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의 주제는 바로 권다솔과 남태건이었다.“우리 다솔이는 대체 언제쯤 그놈을 잊을까요? 지금 상태를 봐서는 매일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밥도 제대로 못 먹는 것 같던데... 볼 때마다 정말 속상해 죽겠어요.”김영은은 눈은 티브이에 가 있었지만, 마음은 권다솔에게 가 있었다.권용민은 옆에서 줄담배를 태우고 있었다.“다솔이한테 시간을 좀 더 주자고. 지금 법도 그래. 다솔이가 그간 얼마나 힘들었
“다솔아, 어디를 가는 거니?”김영은이 소파에서 일어나며 권다솔에게 다가갔다.권용민도 따라 일어나 권다솔이 든 짐을 들어주려고 했다.“네가 나가서 쇼핑하러 간다면 우린 말리지 않겠다. 하지만 오늘은 늦었잖니. 일단 오늘은 일찍 방에 가서 쉬어라.”“전 쇼핑하러 가는 게 아니에요. 친구 집에 가서 며칠 신세 지려고요. 지유 씨네로 가는 거예요. 두 분도 지유 씨 알고 계시잖아요.”권다솔은 부모님이 걱정할까 봐 일부러 온지유의 이름까지 말해주었다.두 사람은 확실히 온지유를 알고 있었다. 서로 시선을 주고받던 권용민과 김영은은 그래도 딸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애초에 권다솔과 배진호는 여진 그룹에서 일하다가 눈이 맞았기 때문이다.지금 겨우 이혼까지 오게 되었는데 권다솔이 온지유를 찾아갔다가 만약 옆에 배진호라도 있으면 한 달이 되기도 전에 마음이 바뀔까 봐 걱정되었다.두 사람은 절대 그렇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다솔아, 엄마는 네가 남의 집에 가서 민폐를 끼치지 않았으면 한단다. 지유 씨도 아이가 둘이나 있잖아. 아이들을 챙기느라 바쁠 텐데 네가 가면 방해가 되지 않겠니? 오늘 밤은 엄마랑 함께 자는 건 어떠니?”김영은은 다정하게 권다솔의 팔에 팔짱을 끼며 말했다.엄마로서 딸과 진지한 얘기를 하며 딸의 속마음을 알고 싶었다.권용민도 김영은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권다솔은 당연히 두 사람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한숨을 내쉬며 설명했다.“저 혼자 가는 거예요. 다른 사람은 없어요. 지유 씨가 바쁜 건 저도 알고 있어요. 그래서 며칠 신세 지면서 아이들을 돌보는 거 도와주려고 가는 거예요. 전에도 제가 하윤이를 돌본 적 있었어요.”“다솔아, 그럼 며칠 지내다가 올 거니?”정곡 찔린 김영은은 거기에다 권다솔이 아이 얘기까지 하니 가지 말라고 설득하기 어려웠다.권다솔을 낳기 전에 그녀도 아기를 유산한 적 있었기에 그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수술대에 누워 눈물을 흘리던 그 날을 그녀는 평생 잊을 수 없었다. 지금도 그때의 그 기억이 생생했다
남의 집에서 신세를 지게 되었으니 권용민은 여씨 가문으로 집안 도우미를 보내기도 어려웠다. 보내도 그 집안사람들이 기분 나빠할 것이 분명했으나 권다솔이 직접 음식을 만들어 먹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그래서 주방장을 보내겠다고 한 것이다.“역시 아빠는 세심하시네요.”권다솔은 가슴 한구석이 따스해지는 기분이었다. 감동을 받은 것이다.이렇게 좋은 부모님을 만나게 된 것도 행운이고 영광이라고 생각했다.권용민은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아빠가 세심한 게 아니라 아빠는 진심으로 널 사랑하고 걱정해서 그러는 거야. 정말로 너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네가 상처받는 걸 원치 않아. 이 말만 꼭 기억해.”권다솔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아빠.”그녀는 이미 충분히 상처를 받았다. 그럼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면 정말로 멍청한 것이었다.여씨 가문에 거의 도착할 때 즈음 권다솔은 온지유에게 문자를 보냈다.문자를 받은 온지유는 직접 마중을 나오며 권용민과 인사를 했다.“아저씨, 안녕하세요. 이렇게 늦은 시간에 여기까지 오셨는데 들어가서 따듯한 차라도 한잔하시고 가지 않으시겠어요?”“괜찮네요. 젊은이들끼리 있어야 대화가 통할 테니 나는 이만 집으로 돌아가서 아내와 시간을 보내야겠네요. 오늘부터는 드디어 둘만의 세계가 되겠어요. 하하하.”권용 만은 웃으며 말했다.다음 날 아침이 되면 권용민이 뽑은 경호원들이 도착할 것이다. 권용민은 경호원들에게 당부했다. 배진호가 나타나면 바로 자신에게 알리라고.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고 있는데 그가 걱정할 게 뭐가 있겠는가.권용 국민이 떠나는 모습을 두 사람은 눈으로 배웅한 뒤 권다솔은 온지유와 함께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가던 도중에 권다솔은 걸음을 멈추었다. 이미 어둑해진 하늘과 서늘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먼지가 그녀의 눈 안에 들어가고 말았다.그녀는 눈을 비비며 온지유에게 물었다.“저 너무 불효자식 같죠? 아빠랑 엄마랑 나이도 많으신데 여전히 제 걱정하게 하고 있잖아요. 제가 아니었으면 두 분
온지유는 두 팔을 벌려 권다솔을 꼬옥 안아주었다.“그런 생각은 하지 말아요. 지금 날 찾아왔으니까 우린 그냥 즐겁게 재밌는 얘기만 나누면 되는 거예요. 오늘 저녁은 우리 정원에서 함께 바비큐 파티를 하죠.”“네, 저 지금 지유 씨 아이들을 보러 가도 될까요?”권다솔은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온지유는 당연히 허락해 주었다.두 사람은 함께 거실로 들어왔다. 온하윤은 이미 잠에서 깬 상태였고 동그란 두 눈으로 신기한 듯 주위를 보고 있었다.“하윤아!”별이는 폴짝폴짝 뛰어가며 들고 있던 장난감을 좌우로 흔들었다. 그러자 장난감에서는 맑은소리가 났다.온하윤은 그 소리에 바로 꺄르륵 웃었다.아이는 작은 손을 뻗어 별이가 들고 있던 장난감을 가져오려고 했으나 별이는 바로 주지 않았다. 오히려 손을 높이 들며 말했다.“하윤아, 이거 가지고 싶으면 하윤이가 직접 일어나서 가져가.”온하윤은 이미 최대한으로 손을 뻗었다. 아직 어리고 몸도 작았기에 당연히 닿을 리가 없었다.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손가락도 닿지 않자 온하윤의 입이 슬금슬금 삐죽 나오기 시작했고 눈을 감더니 바로 큰소리를 내어 울어버렸다.“어어, 하윤아. 울지 마. 나는 그냥 하윤이랑 놀고 싶어서 그런 거야. 오빠가 되어서 우리 하윤이한테 안 줄 리가 없잖아, 응?”별이는 얼른 장난감을 온하윤의 손에 쥐여주며 달랬다.온하윤이 우는 것보다 웃는 것이 좋았던 별이는 어떻게든 눈물 멈추게 하려고 애를 썼다.장난감을 손에 넣은 온하윤은 천천히 울음을 그쳤고 이내 품에 꽉 끌어안았다.별이의 설명으로 온하윤도 장난감을 흔드는 방법을 알게 되었고 들리는 재밌는 소리에 온하윤은 다시 꺄르륵 웃었다.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웃음을 지으며 말이다.권다솔은 멀지 않은 곳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너무도 부러웠다.“지유 씨가 사는 삶이 제가 바라던 삶이었어요. 전 부귀영화 따위는 필요 없었어요. 그냥 행복하고 즐겁게 아이들과 살고 싶었을 뿐이에요.”“모든 게 다 괜찮아질 거예요. 나중에 다
은서우가 뭐라 답하기도 전에 인명진은 이미 돌아서서 갈 길을 가고 있었다.비록 인명진이 병원의 원장이었지만 은서우는 회의 시간을 제외하고는 그를 본 적이 거의 없었다.오늘 처음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하는 것이었다.그는 수술용 멸균복을 입고 마스크와 모자를 착용하고 있었다.얼굴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깊고 차가운 그의 검은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수술 내내 상황이 아무리 긴박해도 인명진은 전혀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고 그의 침착함과 냉정함은 뛰어난 실력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은서우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이제야 왜 병원의 많은 여성 간호사, 인턴, 심지어 여의사들까지도 그에게 열광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은서우는 가볍게 몸을 풀며 수술실을 나왔다.막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한 동료가 그녀를 찾아왔다.가슴에 걸린 명찰을 보고 은서우는 상대가 인턴임을 알았다.은서우는 예의 바르게 물었다.“안녕하세요. 무슨 일이시죠?”“은 선생님, 방금 원장님과 함께 수술을 마치셨죠?”인턴의 질문에 은서우는 약간 의아했다.“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인턴은 자신의 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은 선생님, 저 좀 도와주세요. 원장님 카톡 좀 추가해서 저한테 넘겨주시거나 아니면 원장님 사진 몰래 몇 장만 찍어 주세요. 제가 이만큼 드릴게요.”인턴의 눈에는 기대감이 가득 차 있었다.은서우는 인턴의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제가 원장님 연락처를 넘긴다고 해도 원장님 입장에서는 그냥 낯선 사람일 뿐일 텐데 원장님이 연락 받아줄 것 같아요? 그리고 몰래 사진 찍는 건 불법인 거 모르나요? 고작 그 정도 푼돈으로 저를 이런 큰일에 끌어들이겠다고요? 당신이 미친 걸까요? 아니면 제가 미친 걸까요?”은서우는 거침없이 인턴을 몰아붙였다.인턴이 급히 덧붙였다.“아니에요, 은 선생님. 도와주시기만 하면 백만 원 아니 천만 원도 문제없어요.”‘천만 원에 사진 몇 장과 연락처? 저 인턴 진짜 제정신이 아니네.’은서우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이명진은 병원에서 만약 어떤 의료 사고라도 발생한다면 이 병원의 명성은 그대로 무너질 것으로 생각했다.그의 말에 한 간호사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대답했다.“원장님, 병원 내부 번호와 원장님 개인번호 모두 통화 중이셨어요. 원장님 인기가 지금 장난 아닌 걸 모르시는 건 아니시죠?”문 앞에 대기 중인 인턴들로도 모자라 소문 듣고 연락이 오는 환자도 있었고 학생들도 있고 심지어 부잣집 부인들도 어디서 개인번호를 얻었는지 매일 전화를 걸어 이명진의 전화는 항상 통화 중 상태였다.긴급 상황만 아니라면 인명진이 직접 나설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인명진은 간호사의 필요 없는 말을 들을 시간도 없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그가 문을 열자 밖에서 있던 인턴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했다.“진짜 너무 멋있고 젊잖아. 이렇게 젊으신데 원장 선생님이라고?”“너무 잘생겼어. 여자 친구도 없다 그러던데.”“많은 수술도 직접 하신대. 그리고 학술논문도 봐주고 기타 강의도 하신다고 들었어.”“이렇게 훌륭한 사람 품에 안겨있는 느낌은 어떤지 상상도 안 가.”그들은 미친 사람처럼 저마다 한마디씩 주고받고 있었고 심지어 어떤 사람은 인명진에게 달려들어 길을 막고 있었다.“인 원장님, 저랑 사귀시면 이런 병원 몇 개라도 더 해줄 수 있어요. 당신을 경성의 의료센터에서 우두머리로 만들어 드릴게요.”“인 원장님, 저 사람 말 믿지 마세요. 저랑 사귀시면 더 많은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드릴게요.”“인 원장님, 저랑...”“다들 꺼져!”인명진은 평소에 이 사람들에게 무관심이었지만 지금은 급한 수술이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한 간호사가 데리고 온 경호원들도 그녀들을 막을 수가 없었지만 항상 따뜻하고 우아하고 부드러운 말만 할 거로 생각했던 인턴들은 인명진의 화내는 소리 한 번에 더 이상 앞으로 다가서지 못했고 자리를 피해 길을 열어 주었다.인명진은 재빨리 수술용 무균복으로 갈아입고 소독한 후 바로 수술실로 들어갔다.수술실 안에서는 피비린내가 진동했
온지유는 그의 앞에 다가서며 말했다.“이건 한 사람의 인생이 걸린 문제인데 어떻게 생각할 겨를도 없을 수 있어요? 병원의 간호사나 의사들도 휴가가 있던데 명진 씨는 쉴 새 없이 돌아가는 기계에요? 당신 생각도 잘 알아요. 아이를 입양할 생각도 괜찮지만 그래도 결국 친자식은 아니잖아요.. 그런 생각할 에너지가 있으면 친자식을 낳으면 되잖아요.”지금은 좋은 마음으로 입양했다 하여도 커서 입양한 자녀들 간의 모순으로 불행하게 된 사람들도 너무 많아서 온지유의 걱정이 틀리진 않았다.인명진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그런 말은 왜 해. 너의 아이가 둘씩이나 있는데 내가 왜 다른 아이를 입양할 생각 하겠어? 법로가 나한테 너하고 별이를 잘 지켜달라고 부탁한 것도 있고 또 별이가 나중에 크면 이 삼촌이 외롭고 의지할 곳이 없는 것을 알고 그냥 내버려두진 않을 거잖아. 그때가 서 별이가 날 너희 별장으로 데리고 가면 우린 또 한 지붕 아래에서 살 수 있고 내가 곁에서 지켜줄 수 있잖아.”온지유는 인명진의 이런 생각에 너무 어이없어하며 말했다.“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어요? 우리 아버지가 어떤 임무를 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분명하게 알아둬야 할 것은 명진 씨 옆에는 반드시 돌봐줄 사람이 있어야 해요.”온지유는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집에 돌아오자마자 인명진의 자료를 만들었고 바로 소개팅 사이트에 올리려고 했지만 그 순간 망설이게 되었다.분명 좋은 마음으로 하는 건데 혹시나 인명진이 원하지 않으면 되려 부담이라도 될가봐 다시 자료들을 쓰레기통에 버려 버렸다.그때 여이현은 집에 돌아와 얼굴에 걱정이 가득한 온지유를 보며 말했다.“왜 그래? 요즘 항상 기분이 다운되어 있던데, 무슨 일 있는 거야?”온지유는 있는 그대로 털어 놓았다.“인명진 씨 땜에 그래. 우리 주변 사람들은 다 각자의 삶을 안정적으로 행복하게 살고 있는데 인명진 씨는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냥 혼자 살고 있잖아. 금방 그의 자료를 만들어 소개팅 사이트에 올리려 했
양시은은 더 이상 나도현에게 빌붙어 사는 작은 변호사가 아니었고 심지어 임다혜와의 앙금도 풀고 둘은 좋은 친구로 지내고 있었다.김혜연 쪽은 모든 것이 안정적이었다.온지유는 여름방학에 윤별을 데리고 Y 국으로 갈 계획이었고 인명진도 직접 나설 예정이었다.온지유의 곁에 있는 사람들은 다들 결혼도 하고 홍혜주는 출산도 앞두고 있었고 양시은과 나도현도 이젠 너무 행복하게 살고 있었지만 인명진만 미혼에 아직도 혼자였다.여이현은 여희영이 만난 남자를 처음엔 좋게 보지 않았지만 그 남자가 목숨을 걸고 사랑하는 것을 증명하자 안심되었다.심지어 나민우도 지난달 쌍둥이 아들을 낳았다고 연락이 왔고 결국 이제 남은 건 인명진뿐이었다.옆에서 자신을 지켜주고 많이 도와준 인명진을 가족으로 생각한 온지유는 그의 앞날이 걱정되어 하지 않으려던 말을 참지 못하고 내뱉고 말았다.“명진 씨, 제 주변을 돌아보면 다들 자기 행복 찾아 잘 살고 있는데 명진 씨도 이젠 그럴 때가 된 거 같아요. 명진 씨처럼 훌륭한 남자가 본인만 원한다면 좋은 사람은 많을 거잖아요.”인명진은 온지유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잘 알고 있었다.전에 여이현이 죽었다고 생각한 5년 동안은 인명진에게 가장 좋은 기회였지만 그가 아무리 노력해도 온지유의 마음을 얻지 못했고 그 뒤로 인명진은 뒤에서 지켜주는 것도 행복이라고 생각하며 항상 온지유의 그림자가 되어주었다.“난 지금 충분히 행복해. 네가 무슨 일이 있다고 하면 바로 나설 수 있어 좋고 더욱이 법로가 떠나시면서 옆에서 너를 잘 지켜주라고 특별히 당부하셨어.”“하지만 저는 명진 씨 인생의 전부가 아니잖아요. 명진 씨도 자신을 위한 인생을 사셔야죠. 홍혜주 씨도 출산을 앞두고 있다는데 이젠 정말 명진 씨만 남았어요. 그러면...”온지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인명진은 말을 끊고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인류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기 위해 사는 건 아니잖아. 율아, 난 지금 충분히 행복하게 살고 있어.”인명진은 항상 온지유가 행복하
현민아는 엉엉 울면서 말했다.“그건 내가 준 예물인데 나한테서 뺏어가려 하지 마요. 신용을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아빠가 말했잖아요. 근데... 아빠는 사기꾼이야.”현민아의 끝없는 투정 부림에 현민아의 아버지도 어쩔 수가 없었다.집 계약서도 돌려받았고 사람들 앞에서 더 이상 망신을 당하고 싶지 않은 현민아의 아버지는 현민아가 원하든 하지 않든 일단 둘러메고 집으로 들어갔다.양시은은 옆에 서 있는 하민이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너희들은 아직 어려서 아무것도 모르고 하는 말이니 이런 일로 어떤 스트레스도 받으면 안 돼. 유치원에서도 일부러 남을 냉정하게 대해서도 안 돼, 알았지?”“알겠어요.”하민은 양시은을 따라 집으로 돌아왔고 사건의 자초지종을 들은 최정숙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우리 귀염둥이 손자가 유치원에서 이렇게 인기가 있는 줄은 몰랐네.”그러고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말했다.“집 계약서 8권이면 재산도 적지 않은데 어려서부터 알고 지내는 것도 나쁘진 않은 거 같은데?”양시은은 최정숙이 이런 생각까지 할 줄은 몰랐다.“요즘 애들이 뭘 알겠어요. 애들끼리 뭔 생각을 못 하겠어요.”“엄마, 왜 어릴 때부터 그런 일을 만들어요. 아직도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거에 정말 탄복해요. 집 계약서 8권이 뭐가 대단하다고, 우리 하민이랑 비기면 턱도 없는걸요. 그 여자아이는 단지 의도하지 않은 행동을 했을 뿐이에요.”지금 좋아한다고 해도 아직도 이십여 년이나 남았는데 사람의 마음은 당연히 변할 것으로 생각한 나도현은 아들이 어릴 때부터 혼약을 맺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그와 같이 직접 경험한 사람에게는 이런 일은 귀찮다고만 생각되었다.최정숙은 나도현의 말에 변명하며 말했다.“그냥 그럴 수도 있다는 거지 그렇게 하라고는 안 했잖아? 뭐가 그렇게 안 달아 할 지경이니?”“그럴 만도 했잖아요. 전에 저도 엄마가 벌려놓은 이런 일 때문에 편하게 지내지도 못했는데 제 아들까지 그렇게 할 수는 없죠.”나도현의 말에는 토하나라도
“제가 어제 집에 돌아와 하민이의 가방을 열어보니 이런 집 계약서들이 있었어요. 현민아가 가방에 집어넣었나 봐요.”알고 보니 하민이가 잘생겼다고 오랫동안 지켜본 현민아는 그와 친구가 되고 싶었지만 하민이가 평소에 말을 잘 안 한 것 땜에 삼촌한테 고민을 털어놓았었고 그런 행동이 귀여웠던 삼촌은 조롱하는 식으로 현민아에게 친구보다 결혼이 좋은 거라고 말해줬는데 그 말에 현민아가 몰래 집 계약서들을 학교에 가져가 예물이라면서 하민이의 가방에 넣어 준 것이었다.현민아의 아버지는 말을 듣고 더욱 난처해졌다.“우리 꼬마 아가씨, 넌 아직 어려서 예물이라는 것이 뭔지 몰라. 다음부터는 남의 책가방에 물건을 함부로 넣으면 안 돼.”현민아는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근데 난 하민이랑 친구 하고 싶단 말이에요. 친구가 되고 싶으면 뭐라도 보여줘야 내 마음이 진심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잖아요.”옆에서 듣고 있던 양시은도 현민아의 진지한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현민아의 아버지는 미안해하며 말했다.“하민 어머님, 정말 죄송합니다. 우리 민아가 어디서 어떤 말을 듣고 저런 행동까지 했는지 모르겠어요. 마음에 두시지 말았으면 좋겠어요.”“현민아 아버님, 여기 집 현민아가 넣어 둔 계약서들입니다. 맞는지 한번 확인해 보세요.”현민아의 아버지가 계약서를 확인하자 현민아는 기분 나빠하며 말했다.“전 돌려받기 싫어요. 아빠가 말했었잖아요. 이미 준 것은 곧 엎질러진 물이랑 같아 주워 담을 수 없다면서요. 그럼 책임을 져야잖아요. 이 물건들은 제가 이미 하민한테 줬고 하민이도 받아들이고 집에 가져갔으니 앞으로 제 사람이 될 건데 이렇게 다시 제가 준 예물을 회수하면 앞으로 저보고 어떻게 하민이랑 잘 지내라는 거예요? 아빠가 이렇게 하면 하민이 한테는 제가 신용이 없는 사람이 되잖아요.”현민아는 끊임없이 몸부림치며 울어댔다.요즘 아이들은 응석받이로 자라서 고집을 부리면 누구도 말릴 수 없어 현민아 아버지와 양시은도 현민아를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다만 양시은이 예상치 못했던
“어젯밤에 집에 도착했는데 네가 없길래 전화하려고 하자 마침 여이현 씨가 널 데려다주셨어.”나도현은 어제 마음이 심란하여 술을 많이 마신 게 분명했다.“여기 비타민이라도 좀 먹어.”양시은은 나도현이 깨어나기 전에 모든 것을 준비해 두었고 비타민 한 알을 건네주었다.나도현도 어제 양시은과 잘 소통하기 위해 많은 생각을 했고 심지어 양시은이 너무 바쁜 탓에 돌아오지 못하면 그녀가 간 도시를 찾으러 가려고 생각했지만 뜻밖에도 출장에서 돌아와 지금 옆에 있는 양시은을 보며 쓰디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시은아, 넌 이러는 내가 싫지?”“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넌 하나뿐인 내 남편인데 왜 싫겠어. 그리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 아직도 내 마음을 모르는 거야?”양시은은 항상 아이가 평안하고 나도현이 건강하고 그렇게 그들 세 식구가 행복하고 즐겁게 사는 것으로 매우 소박한 소원을 품고 지내왔다.“하지만 나...”“어제 여이현 씨가 널 데려왔을 때 나한테 둘이 잘 소통해 보라고 하길래 네가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지 예측했어. 혹시라도 다른 사람이 생겼다고 널 버릴까 봐 그러는 거지?”양시은은 나도현의 옆에 앉아 깊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녀는 나도현이 이렇게 불안해하는 것이 심리 건강에도 안 좋다고 생각되어 자신의 진심을 확실하게 말해주기로 했다.양시은의 말을 아니라고 부정하지 못한 나도현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하지만 전날 술자리에서 여이현과 배진호가 양시은의 우수함을 부정하지 말고 더욱이 양시은의 앞길을 가로막지 말라고 한 말이 생각나 머리를 숙이고 부끄러워하며 말했다.“내 생각이 좀 많이 유치했던 것 같아.”“아니야, 날 사랑하는 표현이라는 거 잘 알아. 만약 내가 너라면 너보다 더 했을지도 몰라. 나도현, 내가 너에 대한 사랑을 의심하지 마. 지금 하고 있는 사업도 네가 옆에서 많은 도움을 줘서 여기까지 온 거잖아.”양시은이 진지한 표정으로 나도현의 두 손을 잡고 말하자 그는 더 부끄러워졌다.나도현의 도움과 격려하
아이는 하루가 다르게 커갔고 착하게 자란 윤별은 초등학교에 간 지 며칠 되지 않아 선생님께 칭찬을 받았으며 여이현도 매우 기뻐했다.하지만 윤별은 항상 외할아버지를 기억하고 있었고 심지어 작은 빨간 꽃을 만들어 외할아버지가 있던 방에 붙여놨다.온지유는 윤별의 행동을 눈치채고 바로 다가가서 위로해 주며 말했다.“별아, 너무 슬퍼하지 마. 외할아버지는 지금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셔서 우리를 보고 계실 꺼야. 그리고 내년이면 외숙모 집에서 별이 남동생과 여동생도 태어날 거야.”“그런데요 엄마, 외할아버지께서 제가 1학년이 되어 글자를 배우면 공부를 가르쳐 주신다고 약속했어요. 그리고 외할아버지께서 또...”윤별은 말하다가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전에 윤별이가 브람을 따라갔을 때 브람은 매우 엄하게 대했지만, 온경준이 경성에 데려다 키우는 동안은 윤별에게 끝없는 사랑을 주면서 모든 것을 만족시켜 주었다.그리고 윤별의 몸이 허약하니 온경준은 옆에서 정성껏 보살펴 주었고 쓴 약도 잘 먹게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달래여 먹이면서 많은 추억을 쌓아 주었다.그때 윤별은 온경준에게 물었었다.“할아버지는 할아버지 집에 가고 싶지 않아요?”온경준의 집은 Y 국이었고 윤별의 말에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해 주었다.“별이랑 엄마가 어디에 있으면 할아버지 집은 거기에 있는 거야. 할아버지는 예전에 많은 잘못을 했고 그렇게 되어 너희 엄마와 오랫동안 떨어져 지냈었어. 이제 겨우 같이 살게 되였는데 할아버지가 어찌 Y 국에 다시 돌아가고 싶겠어? 게다가 이쪽에 오래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온경준은 그때 윤별이랑 함께 많은 수공예도 했고 병아리도 기르고 꽃을 심고 풀도 심었지만, 지금은 반 친구들 외에 하민 동생이 놀러 오고 평소에 윤별은 항상 혼자였다.온지유는 윤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부드럽게 말했다.“외할아버지는 그저 우리보다 먼저 다른 세계로 가신 거야. 모든 사람이 이 세상에 오면 사명이라는 걸 가지고 와. 그리하여 사람은 언젠가 죽을 것이고 앞으로 때가
여이현이 추천해 주겠다는 의사는 인명진이었다.인명진의 능력은 상당히 좋았다.당시 그와 지석훈이 하민에게 수술을 해주지 않았더라면 하민은 지금처럼 이렇게 빨리 낫지 않았을 것이다.“난 병이 없거든.”나도현이 자신의 심병을 인정하지 않자 여이현은 낮은 소리로 말했다.“지난 4년 동안 치료해 온 걸 아니까 너의 이런 심리는 이해는 할 수 있어. 근데 넌 배 비서가 말했듯이 양시은 씨의 우수함을 부정하면 안 돼. 그녀도 본인이 하고 싶은 일도 있을 텐데 네 옆에만 가둬 두고 있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게다가 네가 뭐 사랑을 강제로 시키는 대표도 아니고 결혼한 지 얼마 안 됐는데 이런 사소한 일로 다투지 마.”나도현은 여이현의 말을 다 알아들었지만 자신의 답답하고 복잡한 이 심정은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었다.그는 양시은이 모두에게 존중받는 것도 원하고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앞에서만 이뻤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마시다 보니 나도현은 술에 잔뜩 취해 있었다.양시은은 오늘 저녁에야 출장에서 돌아왔고 여이현이 만취한 나도현을 데려온 것을 보고 그녀는 갑자기 마음이 아팠다.“여이현 씨, 저의 남편 데려다줘서 고마워요.”“별말씀을요. 둘이 잘 소통해 봐요.”여이현의 한마디에 양시은은 바로 눈치채고 나도현이 열일곱 살 난 아이 같아 유치하다고 생각하며 웃음을 터뜨렸다.양시은은 도우미를 불러 나도현을 위층으로 옮기고 침대에 눕혀 신발을 벗기고 넥타이를 풀어줬다.금방 출장 다녀온 탓에 힘들었지만 인내성 있게 나도현을 돌보았고 혹시라도 토할까봐 곁에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그런데 뜻밖에도 나도현은 갑자기 양시은을 품에 안더니 그녀에게 입을 맞추며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양시은, 나 정말 널 너무 사랑해. 그래서 또 잃을까 봐 두려워.”“너의 마음을 나도 다 알고 있어.”“니가 너무 우수해서 다른 사람들이 눈여겨볼까 봐 겁이 나, 그리고...”양시은은 그의 등을 토닥여주며 말했다.“바보야, 너는 내가 인생에서 유일하게 사랑하는 남자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