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이현 쪽.회의를 마치고 나서 여이현은 온지유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다.시간상 지금쯤이면 온지유는 이미 집에 돌아가 있어야 했다. 그래서 여이현은 바로 집 전화로 전화를 걸었다.벨이 몇 번 울리고 받아 든 건 별이였다. 아이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아빠!”“별아, 네 엄마는 지금 뭐 하고 있어?”여이현은 별이와 이야기할 때 한결 부드럽게 말하는 편이었다.“저도 잘 모르겠어요. 엄마가 아직 안 돌아왔어요. 저는 아빠한테 묻고 싶었는데... 왜 엄마를 그렇게 오래 잡아줬어요?”별이는 살짝 불만스러운 듯한 톤으로 물었다.여이현은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뭔가 이상했다.온지유는 서류를 전달한 뒤 회사에서 나갔다. 설령 잠깐 다른 일을 보더라도 이 시각이면 이미 집에 돌아가야 했다. 그런데 왜 아직도 돌아가지 않았을까?“별아, 집에 무슨 일은 없어? 혹시 이상한 사람이 와서 문 두드린다거나 그런 거 없었어?”여이현은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아무래도 집에 직접 가봐야 할 것 같았다. 별일 없으면 좋겠지만 혹시 문제가 생기면 그라도 있어야 아이들이 안전했다.별이는 하품을 하며 휴대전화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가 집 안 모니터를 켰다. 화면 속 마당은 텅 비었고 경호원 두 명이 순찰 중이었다.“아무도 안 왔고 다들 괜찮아요. 동생도 방금 깨서 도우미 아주머니가 우유를 줬고, 제가 잠깐 놀아줬어요. 지금 다시 자고 있어요.”상황을 전부 설명한 뒤 별이는 잠시 고민했다. 여이현은 절대 쓸데없는 질문을 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그는 예전에 소미를 대사관에 보낼 때 차 안에서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의 대화를 직접 들은 적이 있었다. 혹시 그들이 다시 나타난 걸까 싶었다.그리고 집에는 아무 일이 없지만 온지유가 밖에 있었다.별이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아빠, 빨리 엄마를 찾아줘요. 저 엄마가 위험할까 봐 걱정돼요. 엄마가 치킨을 사 온다고 했는데... 한 번도 약속 어긴 적 없는데 이렇게 오래 안 돌아올 리 없어요. 분명 무슨 일
여이현은 주변을 계속 돌며 온지유에게 전화를 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도 물어봤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바로 이때, 그가 거의 절망하려던 순간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여보.”온지유였다.여이현은 급히 돌아서서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가 단숨에 안아 올렸다.“걱정했잖아. 널 찾을 수도 없고 전화해도 안 받고, 무슨 일 생긴 줄 알고 너무 무서웠어.”만약 온지유에게 큰일이라도 났다면 그는 어떻게 살아갈까 싶었다. 아이들도 아직 어린데 엄마를 잃으면 어떻게 건강히 자랄 수 있겠는가.“미안해, 방금까지 경찰서에서 진술하느라 휴대폰을 무음으로 해놨어. 나 멀쩡하니까 걱정하지 마.”온지유는 부드럽게 달래며 그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정말 괜찮아.”“근데 피가 묻었잖아.”여이현은 그녀를 놓고 위아래로 살펴보다 원피스 군데군데 묻은 핏자국을 발견하곤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어디 다친 거야? 지금 당장 병원부터 가자.”“내가 다친 거 아니야. 이건 그 인간들 피가 묻은 거고 나는 멀쩡해. 믿기지 않으면 봐, 상처 난 데 있어 보여?”온지유는 일부러 소매를 걷어 올려 맨살을 보여주었다. 팔에는 약간의 멍 자국만 있을 뿐 큰 상처는 없었다.그렇다 해도 여이현은 여전히 안심할 수 없었다.“저 자식들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야. 분명 또 찾아올 텐데...”“물 들어오면 둑 막고, 적 오면 장수로 막는 거지. 난 안 무서워. 게다가 너도 있잖아. 네가 우릴 잘 지켜줄 거라고 믿어.”온지유는 부드러운 목소리에 단단한 신념을 담아 말했다.어떤 조직이든 둘이 힘을 합치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그녀에게 있었다. 오늘도 결국 그녀가 괴한들을 제압하지 않았던가.“그놈들은 벌써 경찰서에 넘겼어. 아무 말도 안 하긴 했지만 내가 이걸 챙겨왔거든.”온지유는 가방을 열어 포장해 둔 주삿바늘을 꺼내 여이현에게 건넸다.“그놈들이 이걸 내 몸에 주사하려고 했는데 실패했어. 도리어 내가 그중 한 놈한테 주사해 줬지. 여기 약물 조금 남았으니까 뭐가 들
온지유는 지금 당장 모임을 할 마음이 없었다.조직 문제도 아직 해결되지 않았는데, 괜히 권다솔과 배진호를 만나면 그 조직의 눈길이 그들한테까지 옮겨 갈 수 있지 않겠는가. 그건 감사가 아니라 민폐를 끼치는 일이었다.“집에 가서 내가 진호 연락해 볼게. 마침 회사에 진행 중인 프로젝트가 있는데 같이 해보고 싶었어.”여이현은 한편으로는 배진호를 도와주려는 마음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그의 성실한 인품을 믿었다.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맡기면 제대로 해낼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이다.“됐어, 운전에 집중해. 내가 그냥 다솔 씨한테 문자나 보낼게. 이 시간대면 두 사람 다 일하고 있을 수 있어.”온지유는 휴대폰을 꺼내 권다솔에게 귀여운 이모티콘 하나를 보냈다. 상대가 답장을 하지 않자 더는 방해하지 않고 휴대폰을 넣었다.곧 차가 집 앞에 도착했고, 온지유는 포장된 음식을 들고 들어갔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별이가 후다닥 달려왔다.별이는 온지유 손에 든 음식을 신경 쓰지 않고 곧장 매달렸다.“엄마,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걱정했잖아요. 혹시 엄마한테 무슨 일 생긴 줄 알고 엄청 무서웠어요!”“엄마 괜찮아. 네가 좋아하는 치킨 사러 갔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다 떨어졌었어. 그래서 새로 나오길 기다리느라 좀 늦어졌어.”온지유는 여이현과 눈이 마주치자 살짝 미소 지으며 선의의 거짓말을 했다. 두 사람 모두 아이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다.별이는 마치 어른처럼 깊은숨을 내쉬었다.“그렇다면 됐어요. 하지만 엄마 다음부터는 그런 상황이면 그냥 돌아와요. 굳이 거기서 기다릴 필요 없어요. 치킨 못 먹어도 상관없어요.”집에는 먹을 것도 많고 매일 식사도 푸짐하다. 굳이 치킨 하나 때문에 위험을 감수할 필요 없다.“우리 별이가 제일 착하네.”온지유는 별이를 번쩍 안아 한 바퀴 빙 돌았다.별이는 온지유에게 안겨 공중에서 빙글빙글 도는 느낌에 깔깔 웃었다. 그 모습에 온지유도 미소 지었다.한편 여이현은 온하윤 곁으로 다가가 그녀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손
“별이 아주 잘했어! 좋은 걸 나눌 줄도 알고. 우리 아들 정말 잘 크고 있네.”온지유는 아들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부모로서 그녀는 아들과 딸이 화목하게 잘 지내고 힘들 때 서로 도와주며 의지하길 바랐다.여하간에 부모를 제외한 두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가까운 사이였으니까.여이현은 딸을 안고 거실을 두어 바퀴 걸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아기 흔들이 의자에 눕혀 김명자에게 맡겼다.저녁은 이미 준비되었다. 세 사람은 함께 레스토랑으로 가서 즐겁게 저녁을 즐겼다.저녁을 먹고 난 별이는 애니메이션을 보러 갔고 심심해진 온지유는 핸드폰을 들었다.그러다가 우연히 권다솔이 보낸 답장을 보았다.[다음 주에 진호 씨랑 가정 법원에서 만나기로 했어요. 이혼할 거거든요.]온지유는 믿어지지 않아 눈을 비볐다.‘두 사람 사이가 좋지 않았었나? 얼마 전만 해도 다솔 씨가 나한테 임신한 소식을 알려줬었잖아. 그런데 갑자기 이혼한다고.?'그녀는 누군가 권다솔 핸드폰을 해킹한 것은 아닐까, 아니면 게임을 하다 져서 벌칙으로 이런 문자를 보낸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농담이죠? 다솔 씨, 이런 농담은 재밌지 않아요. 이혼이란 단어는 함부로 꺼내는 게 아니에요.][전 농담이 아니에요. 정말로 이혼할 거예요. 무조건 이혼할 거예요. 전 이미 이혼하기로 마음먹었으니까 누구도 절 말릴 수 없어요.]권다솔은 답장하면서도 답답한 가슴에 짜증이 솟구쳤다.만약 부모님께 이 사실을 알린다면 무조건 남태건을 칭찬하는 말만 가득할 것이다. 어차피 그들은 그녀가 다른 남자를 찾아 상처만 준 배진호를 잊기를 바랄 테니까.하지만 친구들에게 털어놓기엔 입이 떼어지지 않았다.결국 고민 끝에 온지유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게 된 것이다. 온지유에겐 아이가 둘이나 있었으니 그녀의 마음을 잘 이해해줄 것으로 생각했다.[혹시 전화 통화 가능해요? 아니면 영상 통화라도 가능할까요?]온지유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었다. 그녀는 핸드폰을 들고 안방으로 들어온 뒤 문을 꼭 닫았다. 그리고 영상
너무도 평평했다.“전에는 먹는 걸 좋아해서 뱃살이 좀 있었거든요. 거기에다 임신까지 하니까 티가 나진 않긴 했어도 이곳이 조금 불룩했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보세요. 아무것도 없어요.”뱃살뿐만 아니라 아기도 없었다.온지유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더욱 입을 열기가 힘들었다.“아기... 아기가 없는 거예요?”아기를 품은 엄마로서 인생에서 제일 고통스러운 것이 아기를 잃는 것이었다.권다솔은 전부터 아기가 태어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사실을 온지유도 알고 있었기에 같은 아이의 부모로서 그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지금 이 순간 무슨 말을 해도 위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아이를 잃은 엄마에게 몇 마디의 위로의 말로 고통을 덜어줄 수 있을 리가 없었다.“네, 아기를 금방 유산했을 때 머리가 멍했어요. 머릿속이 백지장이었죠. 무슨 생각을 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어요. 그렇다고 해서 제가 바보라는 소리는 아니죠. 수술하고 나온 뒤에 전부 이해가 가더라고요. 배진호 씨 어머님이 얼마나 저를 싫어하셨는데 왜 갑자기 저한테 잘해줬겠어요?”시간을 되돌리는 능력만 있다면 권다솔은 그때로 돌아가 자신의 뺨을 때리고 싶었다. 정신을 차리라고.애초에 정미진에게 기대를 품은 것이 잘못이었다. 고작 화목한 집안을 만들고 싶다는 이유로 정미진에게 어떻게든 잘 보이려고 애를 썼지만, 누구나 다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정미진은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녀가 임신했든 말든 그녀는 영원히 정미진의 마음에 들지 않는 며느리였다.“그럼 진호 씨는요? 진호 씨는 뭐래요?”“몰라요. 그 사람이 뭐라고 하든 말든 저랑 상관없는 일이에요. 어차피 아기도 없는데 그 사람이랑 함께 살 이유는 없죠. 설령 어머님이랑 싸우고 연까지 끊는다고 해도 제 아기가 살아 돌아오는 건 아니잖아요.”권다솔은 이 부분에선 이성적이었다.더구나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하지 않는가. 그랬기에 배진호와 정미진이 그 정도로 싸울 리가 없었다.그녀에겐 정미진이 그녀의 아기를 해쳤다는 증거
“전 두렵지 않아요.”그녀에겐 생각이 있었다.권다솔은 온지유에게 자기 생각을 손가락을 접으며 보여주었다.“첫째로 그 사람들이 지유 씨 가족을 노리고 있다는 건 분명 지유 씨네 인맥까지 알아봤을 거예요. 그리고 우리가 친구라는 것도 알아냈겠죠. 두 번째로 전 경호원을 데리고 가면 돼요. 제가 데리고 간 경호원과 함께 산다면 더 안전할 수 있으니까요.”그녀는 진심으로 집에 있고 싶지 않았다.남태건은 매일 찾아와 그녀의 부모님 앞에서 점수를 따려고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그녀는 정말이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하지만 남태건을 대할 때 진심으로 즐거운 표정을 짓는 부모님을 보면 권다솔은 남태건을 쫓아낼 수 없었고 심한 말도 할 수 없었다.이미 한번 그녀의 고집으로 부모님에게 상처를 주었었으니까. 게다가 이혼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어떻게 부모님에게 심한 말을 할 수 있겠는가.정말 그런다면 그녀는 불효자식이 되는 것이었다.그랬기에 이런 일은 마음속에 숨기고 끙끙 앓으며 혼자 소화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그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그럼 와요. 요즘 대부분 시간을 제가 집에서 보내고 있거든요. 저랑 얘기를 나눠도 되고 같이 취미 활동도 해도 되니까 와요. 적어도 다솔 씨가 그 집에 있는 것보단 덜 답답할 거예요.”온지유는 그녀를 환영했다.상의가 끝난 후 권다솔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빠르게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간단히 짐을 꾸리고 나서 방에서 나왔다.권용민과 김영은은 소파에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의 주제는 바로 권다솔과 남태건이었다.“우리 다솔이는 대체 언제쯤 그놈을 잊을까요? 지금 상태를 봐서는 매일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밥도 제대로 못 먹는 것 같던데... 볼 때마다 정말 속상해 죽겠어요.”김영은은 눈은 티브이에 가 있었지만, 마음은 권다솔에게 가 있었다.권용민은 옆에서 줄담배를 태우고 있었다.“다솔이한테 시간을 좀 더 주자고. 지금 법도 그래. 다솔이가 그간 얼마나 힘들었
“다솔아, 어디를 가는 거니?”김영은이 소파에서 일어나며 권다솔에게 다가갔다.권용민도 따라 일어나 권다솔이 든 짐을 들어주려고 했다.“네가 나가서 쇼핑하러 간다면 우린 말리지 않겠다. 하지만 오늘은 늦었잖니. 일단 오늘은 일찍 방에 가서 쉬어라.”“전 쇼핑하러 가는 게 아니에요. 친구 집에 가서 며칠 신세 지려고요. 지유 씨네로 가는 거예요. 두 분도 지유 씨 알고 계시잖아요.”권다솔은 부모님이 걱정할까 봐 일부러 온지유의 이름까지 말해주었다.두 사람은 확실히 온지유를 알고 있었다. 서로 시선을 주고받던 권용민과 김영은은 그래도 딸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애초에 권다솔과 배진호는 여진 그룹에서 일하다가 눈이 맞았기 때문이다.지금 겨우 이혼까지 오게 되었는데 권다솔이 온지유를 찾아갔다가 만약 옆에 배진호라도 있으면 한 달이 되기도 전에 마음이 바뀔까 봐 걱정되었다.두 사람은 절대 그렇게 내버려 둘 수 없었다.“다솔아, 엄마는 네가 남의 집에 가서 민폐를 끼치지 않았으면 한단다. 지유 씨도 아이가 둘이나 있잖아. 아이들을 챙기느라 바쁠 텐데 네가 가면 방해가 되지 않겠니? 오늘 밤은 엄마랑 함께 자는 건 어떠니?”김영은은 다정하게 권다솔의 팔에 팔짱을 끼며 말했다.엄마로서 딸과 진지한 얘기를 하며 딸의 속마음을 알고 싶었다.권용민도 김영은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권다솔은 당연히 두 사람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기에 한숨을 내쉬며 설명했다.“저 혼자 가는 거예요. 다른 사람은 없어요. 지유 씨가 바쁜 건 저도 알고 있어요. 그래서 며칠 신세 지면서 아이들을 돌보는 거 도와주려고 가는 거예요. 전에도 제가 하윤이를 돌본 적 있었어요.”“다솔아, 그럼 며칠 지내다가 올 거니?”정곡 찔린 김영은은 거기에다 권다솔이 아이 얘기까지 하니 가지 말라고 설득하기 어려웠다.권다솔을 낳기 전에 그녀도 아기를 유산한 적 있었기에 그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수술대에 누워 눈물을 흘리던 그 날을 그녀는 평생 잊을 수 없었다. 지금도 그때의 그 기억이 생생했다
남의 집에서 신세를 지게 되었으니 권용민은 여씨 가문으로 집안 도우미를 보내기도 어려웠다. 보내도 그 집안사람들이 기분 나빠할 것이 분명했으나 권다솔이 직접 음식을 만들어 먹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그래서 주방장을 보내겠다고 한 것이다.“역시 아빠는 세심하시네요.”권다솔은 가슴 한구석이 따스해지는 기분이었다. 감동을 받은 것이다.이렇게 좋은 부모님을 만나게 된 것도 행운이고 영광이라고 생각했다.권용민은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아빠가 세심한 게 아니라 아빠는 진심으로 널 사랑하고 걱정해서 그러는 거야. 정말로 너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네가 상처받는 걸 원치 않아. 이 말만 꼭 기억해.”권다솔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아빠.”그녀는 이미 충분히 상처를 받았다. 그럼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면 정말로 멍청한 것이었다.여씨 가문에 거의 도착할 때 즈음 권다솔은 온지유에게 문자를 보냈다.문자를 받은 온지유는 직접 마중을 나오며 권용민과 인사를 했다.“아저씨, 안녕하세요. 이렇게 늦은 시간에 여기까지 오셨는데 들어가서 따듯한 차라도 한잔하시고 가지 않으시겠어요?”“괜찮네요. 젊은이들끼리 있어야 대화가 통할 테니 나는 이만 집으로 돌아가서 아내와 시간을 보내야겠네요. 오늘부터는 드디어 둘만의 세계가 되겠어요. 하하하.”권용 만은 웃으며 말했다.다음 날 아침이 되면 권용민이 뽑은 경호원들이 도착할 것이다. 권용민은 경호원들에게 당부했다. 배진호가 나타나면 바로 자신에게 알리라고.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고 있는데 그가 걱정할 게 뭐가 있겠는가.권용 국민이 떠나는 모습을 두 사람은 눈으로 배웅한 뒤 권다솔은 온지유와 함께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가던 도중에 권다솔은 걸음을 멈추었다. 이미 어둑해진 하늘과 서늘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먼지가 그녀의 눈 안에 들어가고 말았다.그녀는 눈을 비비며 온지유에게 물었다.“저 너무 불효자식 같죠? 아빠랑 엄마랑 나이도 많으신데 여전히 제 걱정하게 하고 있잖아요. 제가 아니었으면 두 분
남태건은 권다솔의 멘탈이 무너지고 아주 힘들어할 때 손을 내밀어줄 생각이었다. 그래야만 권다솔의 기억 속 그의 이미지도 뒤바뀔 것이고 철저하게 배진호를 증오하게 될 것이다.“네, 대표님. 그럼 전 이만 처리하라던 서류를 마저 하러 가겠습니다.”비서는 그의 마음이 완벽하게 이해가 가는 것은 아니었다.정말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람이 행복할 수 있게 해줘야 하는 것이 아닌가.악플의 위력은 어마무시했다. 그런데 남태건은 도와주지 않고 그저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었기에 비서는 남태건의 생각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다만 그는 일개 비서였고 월급쟁이였던지라 그가 끼어들 처지는 아니었다.비서가 나가자 남태건은 계속하던 일을 하면서 드문드문 여론을 확인했다.그는 아직도 미적지근한 사람들의 반응에 속으로 투덜댔다. 결국 성격이 급했던 그는 자기 지갑을 열어 여론을 만들었다....한편 권씨 가문.이혼 서류 신청하고 나온 뒤 권다솔은 비록 남태건의 차를 타고 오긴 했으나 오는 도중에 내렸다.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부모님에게도 말했다.“아빠, 엄마. 오늘 이혼 신청하러 갔으니까 이혼숙려기간만 지나면 완벽하게 남이 될 거예요. 그동안 전 아파트에서 혼자 살 거니까 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다솔아, 네가 혼자 나가 살고 싶다고 해도 엄마는 반대할 생각 없어. 하지만 너 혼자 짐을 다 옮길 순 없을 테니까 엄마랑 아빠가 함께 가주마.”김영은이 먼저 그녀에게 이사를 도와주겠다고 했다.권다솔은 원래 두 사람에게 부탁할 생각이 없었다.여하간에 나이가 많기도 했고 이사 업체에 연락하며 알아서 다 잘해주었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온 것도 모자라 이사까지 부탁하면 그녀는 자신이 불효녀인 것처럼 느껴졌다.그러나 두 사람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권다솔은 계속 거절만 하면 두 사람에게 상처가 될까 봐 걱정되었기에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엄마랑 아빠는 물건을 옮기실 필요 없어요. 제가 이사 업체에 연락해주면 알아서 옮겨줄 거니까 두 분은 그냥 저랑 함께
그런 두 사람을 뒷모습을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배진호였다. 배진호는 가슴이 찢어질 듯 괴로웠다.그는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권다솔에게 집에 가자고 하고 싶었다.하지만 지금 그에겐 그럴 자격이 없었다.“진호 씨, 전 권다솔 씨랑 같은 여자로서 잘 알아요. 권다솔 씨는 지금 새로운 남자친구를 사귀었음에도 진호 씨를 놓아주지 않으려고 해요. 전형적인 어장관리녀인 거죠.”석규리는 계속 말을 이었다.배진호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전 여자를 때리지 않아요. 하지만 계속 내 인내심의 한계에 도전한다면 지금 마지막 경고를 해두죠. 그 입 닥쳐요.”“진호 씨!”석규리는 여전히 포기할 수 없었다.배진호가 대체 왜 이토록 권다솔을 사랑하는 것인지 이해 가지 않았다.하지만 적당한 선에게 멈추어야 했다. 만약 여기서 ‘적당히'를 모르고 계속 나댔다간 배진호의 분노를 일으켜 더는 수습하지 못할 정도가 되어버릴 것이다.그녀는 입을 꾹 다물고 떠나가는 배진호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았다.곧이어 그녀는 미리 연락해둔 언론사에 다시 연락했다.“제가 찍으라고 한 건 전부 찍었죠? 제가 하라는 대로 하세요. 일이 끝나면 약속한 남은 돈을 입금할 테니까요.”그녀가 주겠다고 약속한 금액이 꽤나 많았다. 그러니 언론사에서도 당연히 거부할 리가 없었다.빠르게 인터넷엔 권다솔의 기사가 올라오기 시작했고 심지어 영상 편집본까지 첨부되었다.영상 속의 권다솔은 가정 법원에서 나오자마자 남태건의 꽃다발을 받는 모습이었다.거기에다 일전에 남태건이 김영은에게 전송했던 사진도 석규리는 언론사 기자에게 연락해 전부 기사로 내라고 했고 얼추 타임라인까지 정리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권다솔은 네티즌들의 악플 공격을 받게 되었다.[그러니까 권다솔이라는 사람이 이혼이 끝나기도 전에 다른 남자랑 바람을 피우기 시작했다는 거네요? 둘이서 바닷가도 가고 가정 법원에서 나온 뒤 꽃다발도 받고? 두 사람 뭐가 이렇게 급하대요?][정말 역겹네요. 설마 이혼 신청하고 나온 가정 법원 앞
“배진호 씨.”권다솔은 몸을 돌려 그를 보았다.“지금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그런 말을 하는 거죠?”배진호가 입을 열기도 전에 금방 택시에서 내린 석규리가 달려오며 대신 대답했다.“당연히 전남편의 자격으로 말하는 거죠. 권다솔 씨의 이혼이 완전하게 끝난 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그전까지는 기혼인 거죠. 그런 상태서 다른 남자의 장미 꽃다발을 받는다는 건 대놓고 바람을 피우겠다는 게 아닌가요?”권다솔은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지금 나더러 바람을 피운다고 한 거야?'‘그럼 배진호는? 본인들이 한 건 뭔데?!'그녀와 남태건의 사이는 떳떳했다. 여하간에 아무 짓도 하지 않았으니까. 설령 두 사람 사이에 정말로 뭔가가 있었다고 해도 유부남을 꼬신 석규리에게 입을 열 자격이 없지 않겠는가.“석규리 씨, 누가 여길 오라고 했죠?”배진호는 잔뜩 화가 난 눈길로 석규리를 보았다.‘왜 매번 석규리가 나타나서 자꾸만 내 일에 방해하는 거지!'그는 석규리를 밀쳐냈다.“그쪽이 끼어들 자리는 없으니까 당장 내 앞에서 사라져요!”“진호 씨,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이 여자가 이 남자를 만나고 다닌 게 어디 하루 이틀이겠어요? 진호 씨랑 이혼하기도 전부터 두 사람은 이렇게 만나고 다녔다고요. 아직도 모르겠어요?”석규리는 울면서 말했다.그녀는 배진호에게 보여줄 뿐 아니라 옆에 있던 연예부 기자들에게도 보여줄 생각이었다.정미진이 그녀를 이곳에 보낸 이유가 바로 둘 사이를 방해하라는 것이었다.하지만 방해만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배진호는 애초에 그녀의 방해에도 넘어오지 않았다. 설령 그녀가 가정 법원 앞에서 난동을 부린다고 해도 배진호 마음속에 있는 여자는 권다솔뿐이었다.난리를 피우려면 크게 피워야 하지 않겠는가. 그녀는 이미 이곳으로 오기 전에 언론사에 연락했었다. 권다솔의 스캔들인데 어느 언론사가 마다하겠는가.“석규리 씨!”배진호는 화가 나 미칠 것 같았다.그는 사랑하는 여자가 다른 사람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을 가만히 지켜
배진호는 권다솔의 비꼬는 말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그저 죄책감만 잔뜩 들었다.“미안해요, 다솔 씨. 내가 정말 미안해요.”“아니요. 사과할 필요 없어요. 굳이 나한테 시간을 낭비할 필요도 없고. 곧 우리 차례네요. 이혼을 신청하고 절차도 끝나면 배진호 씨는 당당하게 석규리 씨랑 함께 살 수 있을 거예요.”권다솔은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녀는 배진호와 함께 신청서 제출 창구로 간 후 직원에게 말했다.“안녕하세요, 저희는 이혼 신청서를 제출하러 왔어요.”“두 분 정말로 이혼하시려고요?”직원이 절차대로 다시 한번 확인하는 질문을 했다.권다솔은 고개를 끄덕였다.배진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얼굴에 이혼하기 싫다는 말을 써놓은 것처럼 그 기분이 그대로 드러났다.이혼숙려기간이 있는 이유는 이혼율을 낮추기 위함이었다. 직원은 그런 배진호의 마음을 눈치채고 하던 행동을 멈춘 채 계속 물었다.“부부간에 성격이 안 맞아서 싸우는 일도 있죠. 이건 다 흔한 일이에요. 그래도 이혼은 피하는 게 좋을 거예요. 저도 이 일 하면서 많은 부부를 봤거든요. 대부분 이혼하고 후회해서 다시 재혼하겠다는 부부가 많아요.”“저흰 이미 결정했으니까 그냥 그대로 진행해주세요.”권다솔이 직원의 말허리를 자르며 말했다.그녀의 태도는 확고했기에 직원도 하는 수 없이 계속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이혼숙려기간은 한 달이라는 거 아시죠? 그 기간 동안 후회가 된다면 언제든 와서 취소할 수 있어요. 이혼숙려기간이 지나면 두 사람은 완전한 남이 돼요.”권다솔은 직원에게 감사 인사를 한 후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문밖으로 나가자 남태건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한 손엔 붉은 장미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너무도 눈에 거슬렸다.그녀의 뒤를 따라 나오던 온지유는 당황한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돌려 배진호를 보았다. 그리고 뭔가를 깨닫게 되었다.원래부터 두 사람 사이에 찬 바람이 쌩쌩 몰아치던 차였다. 그런데 권다솔에게 다가가려는 남자가 있으니 배진호가 권다솔의 마음
“배진호 씨.”권다솔도 자꾸만 반짝이는 그의 핸드폰을 발견하고 먼저 입을 열었다.“전화 오면 받으면 돼요. 어차피 우린 곧 이혼할 거니까 굳이 날 신경 쓸 필요 없어요.”이제 이혼숙려기간만 지나면 두 사람은 완전히 남이 되는 것이다.그때가 되면 서로에게 더는 신경 쓸 필요 없었다.배진호는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정미진의 전화를 너무도 받고 싶지 않았기에 피곤한 목소리로 말했다.“네, 어머니. 무슨 일이세요?”“진호야, 이틀 동안 어디에 있었던 거니?”정미진은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배진호가 병실에서 홍경천 약재를 언급한 그 날 그녀는 얼른 남편을 집에 돌려보낸 후 배성연에겐 시간을 끌어보라고 했다.홍경천은 이미 성공적으로 처리해 버렸기에 배진호가 아무리 집안을 샅샅이 뒤져보아도 찾을 수 없었다.정미진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하지만 배진호는 그 뒤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를 보러 오지도 않았다.심지어 배성연의 전화도 받지 않았다.오늘은 배진호와 권다솔이 이혼 서류를 접수하는 날이었던지라 정미진은 어떻게든 배진호와 통화해 상황을 알아보려고 했다.“진호야, 오늘 가정 법원으로 가야 한다는 거 잊지 않았지?”“어머니, 그렇게 집요하게 전화를 거신 이유가 저한테 이 말을 해주시려고 그런 거예요? 가정 법원에 꼭 가라고요?”배진호는 이런 정미진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혼하러 온 부부도 있고 혼인 신고하러 온 커플도 있었다.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아들의 이혼을 바라며 연락하는 부모는 없었다. 정미진의 연락에 배진호는 실망을 느끼게 되었고 더는 그들과 함께 살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배진호는 자신이 이런 말을 해봤자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정미진이 그의 입장을 조금만 생각해줬더라면 일이 이렇게 되진 않았을 거니까.그는 마지막으로 권다솔을 보았다. 오늘이 지나면 권다솔과 다시 만나게 될 날은 한 달 뒤가 될 것이다. 그때부터 그는 아마도 기회조차 없게 된다.“전 이미
별이는 아는 게임을 전부 말했지만 아이는 계속 모른다며 고개를 저었다.아이는 더는 울지 않았다. 그저 커다란 눈으로 호기심 가득 별이를 보았다.“방금 네가 말한 게임들은 어떻게 하는 거야? 난 들어본 적도 없어.”“나랑 같이 어린이집으로 들어가면 알게 될 거야. 어린이집엔 친구들이 많거든. 그럼 내가 말한 게임도 여러 번 할 수 있어.”별이는 일부러 게임 정보를 전부 말해주지 않았다. 아이를 어린이집으로 유인하기 위해서 말이다.아이는 역시나 별이의 말에 홀랑 넘어갔다.바닥에서 떼를 쓰던 아이는 일어나 별이의 손을 잡았다.“그럼 너랑 같이 들어갈래. 방금 네가 말한 게임 전부 해보고 싶어!”아이의 부모들은 그제야 마음이 놓여 온지유에게 다가가 감사 인사를 하며 별이를 칭찬했다.“두 아이는 같은 반 친구일 뿐인걸요. 앞으로 아마 절친한 친구가 될 것 같으니까 그렇게 고마워하지 않으셔도 돼요.”온지유는 어린이집으로 들어가는 별이의 뒷모습을 보았다. 어딘가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그녀와 여이현은 별이를 아주 잘 키웠다.두 아이가 어린이집으로 들어가 더는 모습이 보이지 않자 온지유는 그제야 차에 올라탄 뒤 가정 법원으로 가자며 기사에게 말했다.조금 뒤면 배진호와 만날 생각에 권다솔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긴장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두 사람은 이미 며칠 동안 만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배진호가 그간 석규리와 함께 지낸 것은 아닌지 생각했다.게다가 정미진과 배상준은 배진호와 석규리가 결혼하길 바랐으니 아마 중간에서 계속 이어주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그녀의 부모님이 그녀와 남태건을 이어주려는 것처럼 말이다.어린이집에서 가정 법원으로 가는 길이 권다솔에겐 한 세기가 지나는 것처럼 느리게 느껴졌다. 드디어 차가 멈춰 섰다.온지유는 그녀와 함께 차에서 내렸다.두 사람은 가정 법원 앞에서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배진호가 나타났다. 그는 혼자였다.“다솔 씨, 오랜만이에요.”권다솔을 본 순간 배진호는 눈시울이 붉어졌다.두 사람은
“흥, 말만 잘하지.”온지유는 그를 살짝 째려본 뒤 그릇을 들고 주방에서 나갔다.만들어 둔 음식을 식탁에 내려놓자마자 별이를 불렀다.“별아, 아침밥 완성되었으니까 얼른 손 씻고 와. 손 씻고 먹는 거야.”“엄마, 전 이미 손도 씻고 왔어요.”별이는 손을 들어 온지유에게 보여주었다.“어린이집 선생님이 저한테 손을 깨끗하게 씻는 방법을 가르쳐줘서 깨끗하게 씻고 왔어요.”“별이 정말 말했네! 우리 별이 이젠 어른이 다 되었네!”온지유는 별이를 안아 의자에 앉힌 뒤 달걀을 까주었다.여이현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는 우유를 꺼내 권다솔의 컵에 따라주었다.“고마워요, 대표님.”권다솔은 얼른 감사 인사를 전했다.여이현은 그녀의 앞에서 배진호의 이름을 꺼내지 않았다.“뭘요. 얼른 들어요.”아침을 먹는 동안 권다솔은 아주 조용했다.그녀는 눈앞에서 웃으며 즐겁게 아침을 먹는 세 사람을 보았다. 부러움이 넘쳐 흘러나올 것 같았다.예전에 그녀도 배진호와 사이가 좋았을 때 이렇게 서로 마주 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었었다. 특히 임신했을 때 두 사람의 감정은 극에 달했다.만약 정미진이 두 사람 사이를 방해하지 않았다면 이미 아기를 낳고 눈앞에 있는 온지유 가족처럼 단란하게 지냈을 것이다.하지만 세상엔 만약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미 일은 벌어졌고 상처를 받았으며 두 사람의 결말은 이것뿐이었다.오늘 아침 여이현은 회사에 출근하지 않아도 되었기에 별이와 온지유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권다솔은 온하윤을 돌보는 것을 자처했다.품에 안은 아기를 보다가 거실에서 웃고 떠드는 세 사람을 보니 그녀는 마치 남의 행복을 구경하러 온 방청객 같았다.온하윤이 졸고 있자 권다솔은 온하윤을 다시 아기 흔들의자에 내려놓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그녀는 방에서 온 오후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을 먹을 때 즈음에야 나왔다.온지유가 묻자 권다솔은 대충 핑계를 댔다.“이틀 동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거든요. 너무 졸려서 그냥 잤어요.”저녁을 먹은 뒤 그녀는 계속
물론 권용민에게 사심도 있었다.만약 권다솔이 집을 나가 혼자 살게 되면 그들이 남태건과 이어줄 방법이 없지 않겠는가.“아빠, 그러면 제가 매일 집에 들르면 되는 거잖아요. 아니면 주방장이라도 보내서 하루 세 끼를 먹게 하면 되잖아요. 그러니까 허락해 주세요. 전 기분 전환이 필요해요.”권다솔의 요구에 권용민은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그날 밤 권다솔은 편히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침대는 편했지만, 마음을 뒤숭숭하게 만드는 일이 많았다.다음 날 아침 여이현은 온지유와 함께 아침을 만들었고 권다솔의 몫도 만들어 주었다.“지유야, 난 아무리 생각해도 배진호가 바람을 피웠다고 생각 안 해. 두 사람이 이렇게 된 거엔 분명 오해가 있을 거야.”온지유가 만든 음식을 식탁으로 가져가려던 때 여이현이 말했다.사실 온지유도 같은 생각이었다.두 사람은 사이가 아주 좋았기 때문이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이렇게 이혼하는 건 아쉬운 일이었다.하지만 그녀는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몰랐다.“다솔 씨는 금방 유산했어. 지금 심신이 힘든 상태라 같은 여자인 나도 지금 다솔 씨가 얼마나 힘든지 알 수 있어. 그래서 난 설득하기가 조금 어려워.”“그럼 내가 가서 배진호한테 물어봐? 일단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고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오해가 있는지 파악하는 거야. 그러면 두 사람을 더 정확하게 도와둘 수 있을 거야.”“아니야, 됐어. 일단 연락하지 마.”온지유는 곰곰이 생각했다.어차피 내일 그녀는 별이를 어린이집으로 데려다줘야 했기에 돌아오는 길에 권다솔과 함께 가정 법원으로 갈 생각이었다.그때가 되면 배진호와 만나게 될 것이고 직접 얼굴 보며 물어보는 것이 전화 통화해서 묻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다.“나도 석규리라는 사람이 궁금해. 어떻게 생겼는지도 궁금하고. 대체 왜 자기가 내연녀라는 거 알면서도 기꺼이 자처하는 지도 궁금해.”석규리를 언급하면서 온지유는 미간을 구겼다.세상에 자기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연녀를 자처하는 여자는
그녀의 결혼 생활은 이미 파탄이 났기에 여이현과 온지유만큼은 행복하게 이어가길 바랐다.“그럼 저녁엔 뭐 좀 먹었어요?”온지유는 권다솔이 걱정되었다.조금 전 권다솔이 엄청 힘들어했던 모습이 여전히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게다가 그녀의 집으로 온 이상 손님이지 않은가.손님을 그냥 방치할 수는 없었다.권다솔은 고개를 끄덕였다.“네, 걱정하지 말아요. 집에서 뭘 좀 먹고 왔어요. 저도 어른인데 당연히 몸 챙겨야죠.”“그럼 됐어요. 혹시라도 배가 고프게 되면 이모님한테 말씀드리면 돼요. 그럼 이모님이 야식거리라도 만들어 주실 거예요.”온지유는 다시 한번 당부했다.그러고 난 후 권다솔을 손님방으로 안내했다. 손님방은 아주 컸고 안에는 샤워실과 드레스룸도 있었다.“고마워요.”권다솔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온지유가 나간 뒤 권다솔은 혼자 방 안에 머물고 있었다.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열자 차가운 바람이 그녀의 얼굴로 불어왔다.이때 핸드폰이 울렸다. 권용민의 번호였다.권다솔은 통화 버튼을 눌렀다. 말을 하기도 전에 벌써 눈시울이 붉어졌다.“다솔아, 거기서 잘 지내고 있는 거니? 아빠가 이미 실력 좋은 경호원으로 뽑아뒀으니까 내일이면 도착할 거다. 그리고 주방장도 알아봐 뒀어. 남의 집이라고 해도 절대 끼니는 거르면 안 된다. 알겠지? 어떻게든 몸조리를 잘해. 아빠는 그래도 우리 딸이 건강하던 모습이 좋으니까.”권용민은 세심하게 당부했다.권다솔은 그의 걱정 가득한 목소리에 목이 메어왔다.“아빠,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돼요. 전 그냥 며칠만 지내다가 갈 거예요. 월요일에 이혼 절차가 끝나면 다시 돌아갈 거예요.”“목소리가 왜 그래? 그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아빠가 지금 바로 갈까?”권용민은 울먹이는 그녀의 목소리에 멍해졌다.권다솔이 온지유의 집에서 며칠 지내겠다고 했을 때 말리지 않은 이유는 권다솔이 기분 전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동의한 것이었다.하지만 지금 그는 생각이 바뀌었다.아빠로서 딸이 우는 목소리를 듣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