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 대표님.” 지성은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매번 서율부터 의심하는 건가요?” “지성 오빠, 이제 그만해.” 서율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지성은 원래 온화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었지만, 이 순간만큼은 도혁을 바라보며 은근한 경멸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무언가 더 말하려다, 결국 짧게 한 마디를 꺼냈다. “서율아, 네가 사람을 잘못 본 거야.” 서율은 쓴웃음을 지으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래, 나도 내가 이 정도로 눈이 멀었을 줄은 몰랐어. 다행히 지금은 눈이 멀쩡해졌거든.” 도혁은 연이어 서율에게 창피를 탓에 얼굴이 이미 어둡게 굳어 있었다. 서율과 지성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신을 두고 얘기하는 모습을 본 그는 어두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문서율.” 도혁은 서율의 손을 거칠게 잡으며 낮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와 잠깐 얘기 좀 하자.” 서율이 대답할 틈도 없이 도혁은 그녀의 손목을 쥐고 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 순간, 지성이 자리에서 일어나 둘 사이를 가로막았다. 도혁은 검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의 시선에 은근한 위협을 담았다. “지성 씨, 이건 부부 사이의 일인데, 혹시 참견하실 생각인가요?” 지성은 온화한 미소로 대답했다. “변 대표님, 서율은 아직 식사를 다 마치지 않았는데, 설마 그 정도의 여유도 없으신가요?” 도혁은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보며 말을 이어갔다. “지성 씨는 제 아내에게 너무 많은 관심을 보이는 것 같네요.” 지성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응수했다. “변 대표님, 아내에게 무관심하신 건 본인 탓이지, 다른 사람의 관심이 과하다고 탓할 자격은 없다고 봅니다.” “변 대표님이 소홀히 여기는 것이 사람이 누군가에게는 가장 소중한 존재일 수도 있으니까요.” 지성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저는 오늘 서율과 식사 약속을 잡은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고 싶습니다. 최소한 배고픈 상태로 보내드릴
지성이 먼저 도혁을 조롱한 것에 이어 서율과 지민의 뉴스까지... 도혁은 당분간 머리가 아플 일이 많을 듯했다. 그는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서율은 비밀번호가 여전히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어쩌면 그는 이번이 지난 번 이후로 처음 돌아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비밀번호를 바꾸지 않았을 것이다. 집안의 배치는 전혀 변하지 않았고, 서율이가 떠날 때 그대로였다. 서율이 이곳을 떠난 지는 오래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이곳에 왠지 모를 낯설음이 느껴졌다. 분명 이곳에서 거의 3년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과거의 비참함과 절망스러운 기억들이 뇌리를 스치자, 서율은 숨이 막힐 듯 가슴이 답답해졌다. 서율은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할 말이 있다면 빨리 끝내. 아, 참...” 서율은 도혁의 차갑고 고결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제발 모든 상황을 다 조사하고 나서 결정을 내려 주길 바랄게. 그래야 나중에 후회하지 않겠지.” 도혁은 서율의 비꼬는 말을 모를 리 없었다. 그는 서율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질문했다. “임호석 일, 그때 왜 나에게 말하지 않았어?” 서율은 고개를 들어 도혁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내가 왜 말하지 않았냐고? 나한테 사정도 묻지 않고 바로 사과하라고 했던 건 너였잖아.” “그날, 지민 씨랑 함께 날 비웃고 문제 삼았던 건 잊은 거야?” “니한테 해명할 기회조차 준적 있어?” 그날의 기억이 떠오르자 도혁은 한순간 말을 잇지 못하고 깊은 눈동자가 어두워졌다.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은 채,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얼마나 지났을까, 도혁의 낮고 차가운 목소리가 침묵을 깼다. “미안해. 그때 상황을 잘 몰랐어.” 서율의 목소리는 한층 차가웠다. “상황을 모르면 물어볼 수도 있었잖아. 그런데 넌 나한테 사과부터 하라고 했지. 난 도대체 너한테 어떤 존재인 거지?” “지민 씨야 그렇다 쳐도, 넌 나를 임호석 같은
도혁은 낮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과거의 일들 때문에 내가 너에게 많은 편견을 가졌어... 앞으로는 너를 믿도록 노력할게.” 서율은 고개를 저으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정말 미안하다고 생각한다면, 제발 이혼해줘.” 도혁은 미간을 찌푸리며 답했다. “이혼할 계획은 당분간 없어.” 서율은 실망했지만, 그가 그렇게 나오리란 건 이미 예상한 일이었다. 지민조차도 도혁더러 자신을 위해 지분을 포기하게 할 수 없었으니, 서율이야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Z국의 결혼 보호법은 지나치게 엄격해, 도혁조차도 멋대로 이혼을 강요할 수 없었다.소송을 통해 이혼을 진행하려 해도, 첫 번째 소송에서 한쪽이 동의하지 않으면 이혼 판결이 거의 나지 않는다. 두 번째 소송을 걸려면 6개월을 기다려야 하며, 모든 절차를 거치면 이혼이 확정되기까지 최소 2년이 걸린다. 서율은 합의 이혼이 가능하다면 그 방법을 택하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한 걸음 물러서며 말했다. “알아. SH그룹의 지분 상속을 마치는 데까지 3개월이 필요하다는 거. 회사 일을 정리할 시간을 줄 테니 3개월 후 깔끔하게 이혼해주길 바래.”도혁은 서율을 바라보며 문득 물었다. “그렇게까지 이혼을 서두르는 이유가 혹시 고지성 때문이야?” 서율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로 답했다. “지성 오빠랑 무슨 상관이야?” “지성 오빠? 두 사람이 그렇게 친했나?” 도혁은 두 사람이 단순히 아는 사이라는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서율은 담담하게 답했다. “널 만나기 전, 우연한 계기로 지성 오빠와 친구가 되었어. 우리는 그저 친구일 뿐이야. 걱정 마, 이혼하기 전까지는 절대 선 넘는 행동 보이지 않을 테니.”서율은 자신과 지성이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다는 사실을 굳이 밝힐 생각은 없었다. 도혁이 지나치게 예민한 사람이었기에, 그녀의 진짜 신분을 추측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혼이 확정되기 전까지 서율은 자신의 진실을 그에게 알려주고 싶지
“지민의 영상, 네가 올린 거야?” 서율은 발걸음이 멈춘 뒤 천천히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또 나한테 뒤집어씌우려는 건가?” 도혁은 조금 전만 해도 서율을 믿겠다고 했었다. 하지만 곧바로 서율을 의심하고 있었다. “아니.” 도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그저 물어본 것뿐이야.” 서율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난 지민 씨와 원한도 없고 그럴 시간조차 없어. 지민 씨 일로 인해 ZN그룹의 주가가 폭락하고, 주성철 씨의 명성도 완전히 추락했잖아.” “오히려 나한테 묻기보단 주성철 씨에게 직접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니야? 아무 잘못이 없다면 스스로 결백을 밝히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하려고 하겠지.” 서율은 지민과 관련된 일에 개입한 적이 없었다. 말 그대로, 전혀 득 될 게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주성철이 결백을 증명하려면 자신이 직접 증거를 찾을 것이기에, 서율이 굳이 이런 일에 휘말릴 필요는 없었다. 도혁은 서율에게 사과하고 그녀를 믿어보겠다고 말했지만, 지민과 얽히는 순간 그 모든 약속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문서율.”서율이 등을 돌리자 도혁은 다시 한번 그녀를 불렀다. “네가 알아야 할 게 있어.” 서율은 걸음을 멈추고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한 번에 할 말을 다 하면 안 돼?” 도혁은 단호하게 말했다. “이혼 문제는 3개월 후에 다시 이야기하자. 그러니 우리 결혼이 유지되는 동안, 너는 이 집으로 돌아와 아내로서의 역할을 해줬으면 좋겠어.” 서율은 참다 못해 웃음이 터졌다. “변도혁, 제정신이야?”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다면, 그렇게 생각해도 좋아.” 아내로서의 역할... 서율은 그의 의도를 모를 리 없었다. 결국 그녀를 잠자리 상대 이상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뿐이었다. 도혁은 집에 거의 오지 않는 데다, 오더라도 그녀와 잠자리를 갖는 것이 전부였다. 이제 서로 얼굴도 보기 싫은 상황에서, 서율이가 그렇게 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었다. 서율은 차가운
서율은 잠시 멍하니 서있었다. ‘내가 집에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야?’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가까운 데다가 자세가 다정했기에 서율은 마음이 불편했다. 분명 두 사람이 더 가까운 행동을 가진 적도 있었지만, 서율은 그의 몸에서 나는 향기를 맡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불쾌했다.도혁은 마치 바위처럼 서율 앞에 서서 그녀가 밀어내려 해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도혁은 서율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그윽한 눈동자에 그녀의 모습을 담았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이며 서율과의 거리를 좁혔다. 도혁의 특유의 향기가 더욱 짙어지며 서율의 숨결 사이에 섞였다. 서율의 마음속에 이상한 불안감이 솟아났다. “변도혁, 이만 돌아가 볼게.” “문서율, 난 분가 같은 건 받아들일 수 없어. 그러니까...” 도혁의 목소리는 낮았고 눈에는 욕망이 가득했다.“오늘 밤엔 그냥 여기서 자.” 서율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꼈다. 도혁을 피하려고 했지만, 그는 이미 서율의 입술을 덮쳤다. 서율의 얼굴이 굳어지며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그의 뺨을 때리려 했다. 그러나 도혁은 서율보다 한 발 앞서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도혁의 커다란 체구가 서율에게 밀착하며 서율은 어떤 저항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도혁의 입맞춤은 강렬하면서도 지배적이었다. 고요한 공간 속에 가빠진 숨소리만이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그것이 도혁의 숨소리인지, 서율의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서율은 도혁의 행동을 거부하려 했지만, 마치 무력하게 도살장에 올려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서율은 처음으로 남성과 여성 간의 힘의 차이를 이렇게 실감하며, 도혁의 입맞춤에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참다못해 도혁의 입술을 세게 물어야겠다고 생각하던 그때, 도혁의 핸드폰이 갑자기 울렸다. 전화벨 소리가 마치 구원처럼 들려왔고, 그녀는 안도하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도혁은 얼굴을 찌푸린 채 화면을 확인하고는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야?” 전화기 너
도혁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지민은 지금 어느 병원에 있어?” [제일병원에 계십니다.]도혁은 대답을 듣자마자 전화를 끊었다. 서율은 그가 지민을 보러 가려 한다는 걸 직감했다. 전화를 끊은 도혁이 돌아보자, 서율의 입가엔 비꼬는 듯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도혁의 눈빛이 한층 어두워지더니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나랑 같이 가.” “지민 씨가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넌데 왜 내가 같이 가야 하지?” 도혁은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너는 늘 나와 지민의 관계를 오해하고 있었잖아. 함께 가면 더는 오해할 일이 없겠지.” 서율은 비웃음을 참지 못하며 물었다. “오해? 그게 정말 오해일까?”서율이 그의 손을 뿌리치려 했으나 도혁은 여전히 서율의 손목을 놓지 않았다. “그래, 사실이 아니야. 네가 따라오지 않으면, 여기서 널 보내주지 않을 거야.” 서율은 잠시 도혁과 대치할까 생각했지만, 곧 이 상황을 떠올리며 생각을 바꾸었다. 도혁과 단둘이 있다 보면 그가 아까처럼 행동할 가능성도 있었고, 게다가 지민이 지금처럼 무너진 상태라면 자신을 더욱 보기 싫어할 거라고 생각했다.어차피 지민을 자극할 수 있다면 이 상황도 나쁘지 않다고 여긴 서율은 마침내 그의 요구에 응했다. “좋아, 같이 가.” 도혁은 서율의 대답에 표정을 살짝 풀었다. ...두 사람은 곧 병원에 도착했다. 도혁이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효연이 그에게 달려와 불만을 쏟아냈다. “도혁 오빠, 그 미친 사람들이 지민을 둘러싸고 욕을 퍼붓더니, 결국엔 다치게까지 했어요! 너무 심하잖아요!” “그 사람들 절대 놔두면 안 돼요. 감옥에 보내서 죗값을 치르게 해야 해요!” “그리고 이건 분명히 조직적으로 계획된 일이에요! 인터넷에서도 지민을 공격하는 글이 끊임없이 올라오고 있어요... 이건 지민을 질투하는 누군가가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게 틀림없어요. 지민이랑 아무런 원한이 없는 사람이 이런 짓을 할 리 없어요. 서율이 평소에
효연이 뭔가 더 말하려 하자, 도혁은 차가운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잘랐다. “정효연, 계속 헛소문을 퍼뜨릴 생각이라면 당장 나가.” 도혁은 효연이를 차갑게 쳐다보며 계속 말했다. “내 기억이 맞다면, 네가 내 앞에서 주성철이 지민을 성희롱했다고 딱 잘라 말했잖아?” 도혁의 차가운 시선에 효연이가 움츠러들며 아무 말도 못했다. 도혁은 최근 효연의 행동에 크게 화났다. 효연은 서율을 물에 빠뜨리거나 ZN그룹을 자극하는 등, 계속해서 문제를 일으켰다. 지민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도혁은 그녀를 이렇게 쉽게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다. “도혁 오빠, 사실 그게...” 효연은 변명하려 했으나, 도혁의 차가운 눈빛을 보자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지민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지민이 몇 마디라도 변호해 주길 바랬던 것있다.사실 그날은 지민이 주성철에게 갑작스럽게 질문을 던졌기에, 그녀는 그 상황을 오해하여 주성철이 성희롱을 했다고 판단했다. 그 후 지민은 이를 부인하지 않았고, 오히려 묵인하는 태도를 보였다. 지민은 잠시 망설였지만, 조용히 입을 열었다. “효연아, 잠시 나가 있을래?” 효연은 마음이 상했지만, 지민이 보내는 안심하라는 눈빛을 보고 마지못해 자리를 떠났다. 효연이 나간 후, 지민은 서율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서율 씨, 도혁과 할 말 있어 잠시 나가 주실 수 있을까요?” 서율은 차가운 목소리로 답했다. “아니요. 제가 효연 씨와 사이가 안 좋으니, 나가면 또 싸울 지도 몰라요.” 지민은 도혁을 바라보며 기대에 찬 눈빛을 보냈다. 그녀는 도혁이 한 마디만 하면 서율이 자리를 비울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도혁은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가 나눌 얘기는 감출 필요가 없어.” 지민은 당황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잠시 침묵했다. 서율은 미소를 지은 채 그녀의 연기를 지켜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침묵이 이어진 후, 지민은 눈가가 붉어진 채로 말했다. “도혁아, 미안해. 내가
“이 일은 저 때문이라서 제가 알아서 처리할게. 도혁아, HS그룹에 피해가 가는 일은 없도록 처리할게.” 지민은 결연한 표정으로 문밖으로 걸어갔다. 그러자 도혁이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물었다. “어디 가려고?” “주성철 씨를 찾으러 갈거야.” 눈물이 지민의 뺨을 타고 흐르고 있었고, 그녀의 얼굴에는 마치 죽음을 각오한 듯한 표정이 가득했다. “주성철 씨의 용서를 받을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어. 소처럼 일하든, 하녀처럼 섬기든... 그분이 원한다면 내 목숨마저도 바칠 수 있어.” 서율은 지민의 드라마틱한 연기에 거의 박수를 칠 뻔했다. HS그룹과 ZN그룹 간의 협력 관계가 얼마나 중요한지 서율은 잘 알고 있었다. 이번 사건은 도혁이 감정에 치우쳐 내린 결정으로 인해 득보다 실이 훨씬 많았다. ZN그룹과의 손실은 물론, HS그룹까지 영향을 받게 되었고, 그로 인해 도혁은 큰 대가를 치르게 된 셈이었다. 서율은 문득 지민이야말로 진정한 ‘재주꾼’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도혁과 결혼하게 된다면 HS그룹의 미래는 보나마나 뻔할 것 같았다. 지민의 마지막 말이 도혁의 마음을 흔든 듯했다. 도혁의 표정이 약간 부드러워지며 말했다. “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는 신경 쓰지 마.” “하지만...” “너는 내 목숨을 구해준 사람이야. 네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지금의 HS그룹도 없었을 거야.” 도혁은 차분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앞으로 효연과의 만남은 자제해.” 지민은 뭔가 더 말하려 했지만, 도혁이 먼저 말을 잘랐다. “넌 회복에만 신경 쓰면 돼. 난 이만 가볼게.” 지민은 도혁이가 더 이상 머물지 않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서율을 향해 미소를 지었는데, 그 미소에는 묘한 승리감이 담겨 있었다. “서율 씨, 죄송해요. 제가 또 도혁에게 신세를 지게네요.” 그녀의 미소는 한없이 순진한 듯했지만, 그 안에는 조롱이 담겨 있었다. 고작 눈물과 몇 마디 말로
어머니로서 자식이 행복하게 사는 것을 보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은 없다. 서율은 도혁의 ‘가식’이 정말로 불쾌했지만, 그가 사람을 달래는 데는 재주가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었다. 심지어 서율도 문미정을 그토록 행복하게 만들지 못했으니 말이다. 방으로 돌아와 문을 닫자, 서율의 얼굴에는 차가운 표정이 드리워졌다. “오늘 밤은 다른 곳에서 자. 내일 아침에 엄마한테 네가 일이 있어 먼저 출근했다고 말씀드릴게.” 도혁은 외투를 벗던 중 고개를 들며 눈썹을 살짝 올렸다. “뭐라고?” 서율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동안 도와준 것에 대해 고맙게 생각해.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우리가 지금처럼 지내는 간 합당하지 않은 것 같아.” “왜 합당하지 않지?” “우리는 곧 이혼할 사이니까...” 서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혁이 차분히 말을 끊었다. “문서율, 우리 아직 법적으로 부부라는 사실을 잊은 거야?” 서율은 차갑게 말했다. “곧 끝날 관계야.” “문서율.”도혁의 검은 눈동자는 깊고 차가웠다. 그는 서율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네가 이렇게 서둘러 이혼하려는 이유가 뭐지? 다른 사람이라도 생긴 거야?” 서율은 당황한 듯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도혁의 입가에는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눈에는 전혀 웃음기가 없었다. “고지성, 네가 새로 만날 아니야?” 처음에는 황당하게 들렸지만, 서율은 이내 웃음이 나왔다. “정말 어이가 없네!” 서율은 차갑게 도혁을 쳐다보며 말했다. “변도혁, 네가 더러운 짓을 했다고 해서 나도 그런 짓을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나는 너처럼 결혼 중에 불륜을 저지를 만큼 뻔뻔하지 않아.” 도혁은 차가운 눈빛으로 서율의 턱을 쥐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지성과는 언제부터 연락을 주고받았던 거야?” 서율은 그의 손을 떨쳐내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너랑 상관없어.” 도혁의 눈빛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도혁은 옆에 있는 안전벨트를 꺼내 그녀에게 채워주었다. 서율은 잠시 얼어붙었다. 곧 도혁의 차갑고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렸다. “안전벨트 매야지.” 이 광경을 지켜본 문미정은 도혁에게 더욱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율아, 조수석에 타더라도 안전벨트를 매야 한단다. 도혁이가 참 세심하구나.” 문미정이 없었다면, 서율은 아마 비웃었을 것이다. ‘하긴 세심하긴 해. 다른 여자의 물건이 당당하게 조수석에 잡을 정도로.’마치 지민이 그의 아내인 것처럼. 서율은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때 문미정은 도혁에게 슬며시 질문을 던졌다. “도혁아, 예전에 너한테 첫사랑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그 사람이 최근에 돌아왔다며?” 문미정의 말에 서율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도혁이가 지민과 함께 어울린다는 건 이미 비밀이 아니었다. 모두 도혁이가 지민에게 얼마나 신경을 쓰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문미정이 이 일을 알게 된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반면 도혁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매우 차분하게 인정하며 말했다. “네, 지금 HS그룹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래?” 문미정이 살짝 톤을 올리며 물었다. “그 아가씨가 어쩌다 HS그룹에서 일하게 된 거지?” “지민은 원래 무용을 전공했는데, 저를 구하다 다리를 다쳐 예전처럼 무용을 할 수 없게 됐습니다. 그래서 귀국한 뒤, 제가 HS그룹 내의 가벼운 일을 맡겼습니다. 지민이가 제게 은혜를 베풀었으니, 갚아야 마땅합니다.” 도혁의 말은 매우 합리적이었다. 문미정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서율 역시 그의 말에 딱히 흠잡을 곳을 찾을 수 없었다. 문미정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도혁아, S시에 네가 그 아가씨와 만난다는 소문이 돌던데... 아직 옛 정을 못 잊은 건 아닌지 걱정돼서 물어보는 거란다...” 도혁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저와 지민은 이미 끝난 관계입니다. 제가 서율과 결혼한 이
서율은 두 사람의 표정을 살피며 의아하게 물었다. “나에 대해 묻고 있었다고?” 도혁은 미묘한 눈빛을 보이며 말했다. “우리가 결혼한 지 3년이 되었지만, 고지성 씨만큼 잘 알지는 못하거든. 그래서 고지성 씨께 당신에 대해 좀 더 배우고 싶었어.” 지성과 서율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온 친구이니, 그들의 오랜 정은 부부 3년의 세월로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도혁의 말을 듣자 문미정은 도혁에 대해 고마운 마음이 들었고 지성에 대한 미안함이 들었다. 자신의 경쟁자에게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정보를 공유한다는 것은 지성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문미정은 서둘러 말했다. “시간이 늦었구나. 피곤하니 빨리 집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어.” 지성은 문미정의 앞에서 무언가 더 보여줄 수 없었기에 미소를 지으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차에 타려는 순간, 서율은 문미정과 함께 뒷좌석에 앉으려고 했다. 그때 도혁이 갑자기 조수석 문을 열어 그녀에게 타라고 손짓했다. 서율은 그를 흘깃 쳐다보며 마음속으로 비웃었다. ‘정말 연기 잘하네.’ 결혼한 3년 동안, 도혁은 한 번도 서율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고 조수석에 앉히지도 않았다. 한 번은 도혁과 함께 지옥순의 생신잔치에 참석할 때, 그녀가 조수석 문을 열고 앉으려 하자, 도혁은 차갑게 말했다. “뒷좌석에 타.” 그 이후로, 서율은 도혁과 함께 외출할 때 조수석에 앉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고, 언제나 뒷좌석에 앉았다. 이제 와서, 서율은 조수석에 앉는 것 따위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 벌어진 일로 인해 문미정의 마음은 점차 도혁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아까도 문미정은 서율에게 도혁과 다투지 말라고 계속해서 타일렀다. 문미정이 있는 자리에서 도혁이 그녀에게 문을 열어준 이상, 서율은 그의 체면을 깎지 않기 위해 조수석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안전벨트를 매려던 서율의 눈에 문 앞에 붙은 ‘전용 좌석’이라는 스티커가 들어왔다. 순간 멍하니
문미정은 서율을 쳐다보며 더 이상 숨기지 않았다.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도혁을 데리고 온 건 사실 네가 아닌 도혁을 시험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야. 네가 어릴 때부터 자존심이 강해서 힘든 일이 있어도 우리한테 잘 말하지 않잖니. 그래서 네가 도혁과의 관계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좋은지 의심스러웠거든.” “지성이는 참 괜찮은 아이야. 그동안 여자친구도 사귀지 않고, 부모님께서 아무리 결혼하라고 재촉해도 따르지 않았대. 그건 아마 아직 네가 마음속에 남아 있기 때문일 거야.” “도혁이가 너에게 진심이라면, 지성의 마음을 일찍 정리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서율은 잠시 침묵했다. 서율도 지난번 지성과의 만남에서 그가 여전히 자신에게 미련이 남아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지성이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서율은 그를 오빠처럼만 여겼다. 그렇지 않았으면 도혁과 결혼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도혁과 이혼한다고 해도, 지성과는 이어지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지성의 마음을 빨리 정리해주는 게 맞는 일이기도 했다. ... 지성은 계산을 마치자마자 뒤에 서 있는 도혁을 발견했다. 지성은 도혁을 보자마자 표정이 차가워졌다. 그건 서율과 문미정 앞에서 보여준 따뜻한 모습과는 달랐다. “변도혁 씨, 아주머니와 서율이랑 함께 있지 않고 왜 여기 와 있어요?” 도혁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어머니께서 지난번에 고지성 씨가 서율을 대접했다는 얘길 듣고, 이번에는 고지성 씨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며 저더러 계산하라고 하셨어요.” 도혁의 말에 담긴 도발을 느낀 지성은 쓴웃음을 지었다. “변도혁 씨, 아무리 연기가 완벽해도 결국엔 연기일 뿐이죠. 아주머니를 속이는 건 몰라도, 나한테 와서 이런 말 하는 건 좀 가식적이지 않나요?” 지성의 비꼼에도 불구하고, 도혁은 전혀 화를 내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연기라도 고지성 씨는 어머님을 어머님이라고 부를 수 없지만, 저는 부를 수
서율은 거짓말이 들통날 상황을 생각하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도혁은 변함없는 표정을 유지하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서율은 순간 당황하여 무의식적으로 도혁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도혁은 오히려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자신의 손을 밀어 넣으며 열 손가락을 깍지 끼듯 맞잡았다. 서율은 깜짝 놀라며 멍하니 몇 초간 움직이지 못했다. 도혁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메뉴를 주문했다. 서율은 도혁의 손짓에 온 신경이 쏠려 그가 무엇을 주문하는지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도혁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도혁은 손을 더 세게 쥐었고 서율은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었다. 도혁은 자신이 이 상황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걸 아는 듯, 더욱 장난스럽게 그녀의 손바닥을 간질였다. 서율은 당장이라도 화를 낼 뻔했지만, 간신히 참고 있었고 얼굴은 이미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지성은 서율의 변화를 눈치채고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서율아,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졌어? 더운 거야? 에어컨 온도를 좀 더 낮춰줄까?” 서율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 지금 온도가 딱 좋아.” 지성은 그녀가 거절하자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았다. 도혁도 서율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을 느낀 듯, 메뉴를 다 고른 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서율은 정말이지 그 자리에서 물컵을 들어 도혁의 얼굴에 물을 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지성과 문미정은 그들의 상황을 알아채지 못한 듯, 최근의 일상이나 업무에 대해 가벼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잠시 후,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며 웨이터가 음식을 가져왔다. 서율은 그제야 자신이 아까 도혁의 손에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메뉴 주문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율의 머릿속은 긴장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녀는 이제 문미정에게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웨이터가 가져온 음식을 본 순간, 서율은 할 말을
지성은 문미정과 서율을 보자마자 온화하게 인사를 건넸했다. “아주머니, 서율아.” 곧이어 그의 시선이 함께 온 도혁에게로 향했다. 이미 사전에 이야기를 들은 듯, 지성은 전혀 놀라지 않는 표정이었다. “변도혁 씨, 반갑습니다.” 도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지성 씨, 오랜 만이네요.” 지난번 만남의 기억이 아직 생생했다. 서율은 지성이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준 것에 대해 고마워하고 있었다. 그 일 이후로, 지성과 도혁 사이에는 은근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서율은 두 사람을 만나게 할 일이 없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이 다시 이렇게 마주치자 머리가 아팠다. 서율은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이미 결혼했는데, 엄마가 혹시 아직도 지성 오빠와 나를 이어주려는 건 아니겠지?’ ‘만약 그런 생각이라면, 왜 변도혁까지 데리고 온 걸까?’서율은 무심코 문미정을 흘끗 쳐다보았다. 문미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안심하라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문미정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이제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지성이가 예약한 방으로 들어간 네 사람은 각각 자리에 앉았다. 문미정은 먼저 지성의 할아버지와 부모님의 건강에 대해 물었고, 지성은 미소를 지으며 차근차근 대답했다. 이때 웨이터가 메뉴판을 가져와 주문을 부탁했다. 문미정은 메뉴판을 받아 들고 도혁에게 건넸다. “엄마랑 서율이 입맛이 비슷하니까, 서율이가 좋아할 만한 요리를 몇 가지 골라주면 돼.” 서율은 단번에 문미정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문미정은 그들이 연기한 행복한 부부의 모습을 쉽사리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런 방법으로 그들의 관계를 시험해보려는 것이었다. 도혁이가 서율이 좋아하는 음식을 모른다면, 그들이 친밀한 사이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서율은 지난번 식사 때 도혁이가 자신의 취향을 전혀 모르던 상황이 떠올라 마음이 답답해졌다. 아마 이번에도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모를 것이라 생각
서율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며 더 이상 도혁과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도혁도 말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기에, 둘은 묵묵히 차 안에서 시간을 보냈다. LJ그룹 건물에 도착하자, 서율은 간단히 감사 인사를 건네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무실로 향했다. ... 사무실에 도착한 서율은 바로 육경남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가 S시에 온 거 알고 있었어?” 핸드폰 너머에서 경남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들려왔다. [나도 어제 알았어. 엄마가 너 혼자 지내는 게 많이 걱정되셨나 봐. 네가 혹시 힘들어하고 있진 않은지 보러 오신 거래.] 서율은 잠시 머뭇거리다 물었다. “오빠, 나랑 변도혁이 곧 이혼할 거라는 걸 엄마에게 말해야 할까?” 경남은 미소를 머금은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가 이혼을 결심했다면, 이혼 후에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율은 그의 말에서 뭔가를 느끼고 다시 물었다. “오빠 말은, 지금 이혼한다고 하면 엄마 아빠가 반대할 거라는 뜻이야?” 경남의 목소리에는 가벼운 웃음이 담겨 있었다. [엄마 아빠는 그렇게 완고한 분들이 아니야. 하지만 네가 이혼을 하겠다고 하면 당연히 이유를 물어보시겠지. 단순히 성격 차이라고 말하고 넘기려는 건 거의 불가능할 거야.][네 잘못이라면 엄마 아빠는 결혼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며 널 혼낼 거야. 반대로 도혁의 잘못이라면, 엄마 아빠가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잖아.][게다가 변도혁이 이혼에 동의할지도 의문이야. 내가 보기엔 네 남편, 그렇게 쉽게 물러날 사람은 아니야. 변도혁이 진지하게 나오면 너 혼자 상대하기 어려울지도 몰라.] 경남의 말에 서율은 아침에 도혁이 자신을 유혹하려던 장면이 떠오르며 마음이 더 답답해졌다. 서율은 화제를 돌리며 말했다. “오빠, 엄마 보러 안 올 거야?” [이미 엄마랑 통화했어. 변도혁은 네가 누구인지 아직 모르는 것 같아서, 그 문제로 싸울까 봐 당분간 나서지 말자고 하시더라.] S시에 오기 전까지 경남은 부모와 함께
서율은 발걸음을 잠시 멈춘 뒤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무슨 일이야?” 서율은 그와 마주하고 싶지 않았지만, 표정은 완벽하게 차분함을 유지했다. 도혁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데려다 줄게.” “괜찮아.” 서율은 자기도 모르게 거절했다. “혼자 가도 돼.” “율아, 도혁이가 너를 데려다주겠다고 하니, 그냥 그렇게 해.” 문미정은 옆에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부부는 서로 미워할 시간이 없단다.” 문미정은 서율이 도혁에게 서운한 태도를 보이는 것을 두 사람이 다투었다고 오해한 듯했다. 서율은 거절하고 싶었지만, 문미정의 기대 어린 눈빛을 보고 차마 더 이상 거절하지 못했다. 집을 나서려는 순간, 도혁이 서율의 손을 잡았다. 서율은 깜짝 놀라며 표정이 굳어졌다. “변도혁, 지금 뭐 하는 거야?” 도혁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렇게 해야 어머니가 우리가 잘 지낸다고 믿으실 거야.” 그 말이 맞긴 했지만, 서율은 방금 일어난 일 때문인지 도혁에게 더 거부감이 들었다. 서율은 그의 손을 몇 번이나 뿌리치려 했지만, 도혁은 손을 놓지 않았다. 문미정이 뒤에서 보고 있는 상황에서 서율은 더 이상 무리하게 저항할 수 없었기에 결국 도혁의 손을 잡고 집 밖으로 나왔다. 서율은 도혁과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도혁은 여태껏 한 번도 서율의 손을 잡은 적이 없었다. 이런 식으로 손을 잡는 것은 서율에게는 처음이었다. 너무나도 가까운 스킨십이었기에,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문미정은 현관까지 나와 그들이 손을 맞잡고 떠나는 모습을 보고 흐뭇하게 웃었다. 차에 타자마자, 서율은 도혁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며 차갑게 말했다. “변도혁, 약속을 어겼네.” 도혁은 살짝 긴 속눈썹을 움직이며 서율을 보았다. “뭐?” 도혁이 모르는 척하자 서율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 “어젯밤에 나랑 약속했잖아. 나를 건드리지 않겠다고.”
똑똑. 그때 갑자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율아, 엄마가 아침 준비 다 했으니 얼른 내려와서 아침 먹어.” 서율은 문미정의 목소리를 듣고 당황하며 황급히 옷의 단추를 채웠다. 그녀는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오다가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도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잡아주려 했다. 그러나 서율은 그의 손길을 피했다. 이 방에선 단 1초도 더 있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서율이 답을 하지 않자, 문 밖에 있던 문미정은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듯했다. “율아, 일어났니? 빨리 안 일어나면 회사 늦겠어...”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엄마, 방금 일어났어요. 세수하고 금방 내려갈게요.” 서율의 모습을 본 문미정은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서율은 옷매무새가 엉망이었고, 입술은 붉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상황을 알아차린 문미정은 얼굴이 빨개지며 서율보다 더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너 출근 늦을까 봐 깨우러 왔지 뭐야... 어, 어서 준비해. 엄마는 먼저 내려갈게!” 그렇게 말하고는 도망치듯 떠났다. 서율이 다시 방으로 돌아왔을 때, 도혁은 이미 옷을 다 입고 평소처럼 평온하고 깔끔한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도혁은 서율이가 돌아온 것을 보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씻고 와. 난 먼저 내려가 있을게.” 서율은 그와 대화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녀는 급히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도혁은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보더니 방을 나섰다. 그가 떠난 후, 서율은 거울을 통해 자신의 엉망진창인 모습을 확인했다. 붉게 부어오른 입술, 잘못 잠근 셔츠 단추, 그리고 헝클어진 머리카락. 문미정이 자신을 보고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서율은 수치심에 눈을 질끈 감았다. 눈만 감으면 도혁과의 아찔한 순간이 떠올랐고, 그 기억이 그녀를 괴롭혔다. 만약 문미정이 문을 두드리지 않았더라면, 그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