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는 당연히 받아야 할 일이죠?” 임호석은 코웃음을 치며 가까운 승마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당신이 나에게 사과를 원하듯, 나도 마찬가지로 당신의 사과를 받고 싶은데요. 어떻습니까, 내기 한 번 할까요?”임호석의 눈빛이 차갑게 빛나며 날카로운 미소가 그의 입가에 스쳤다. “당신이 이긴다면 원하는 방식으로 사과해 드리죠. 하지만 제가 이긴다면...” 그는 서율을 비웃으며 말했다. “옷을 모두 벗고 여기 승마장을 한 바퀴 도는 겁니다.”서율은 미소를 지은 채 그를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경마라면 단순히 운에만 의존하니까 별 재미가 없네요. 저는 실력을 겨루는 걸 더 좋아해요. 차라리 기마 사격으로 대결하는 게 어떨까요?”그녀의 말이 떨어지자 주변에서 놀라움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말도 안 돼! 서율 씨가 임호석과 기마 사격으로 내기를 하겠다고?” “임호석이 기마 사격에서는 업계에서 실력자로 소문난 인물 아닌가? 아마추어 대회에서 우승도 했다고 들었는데.”“기마 사격은 경마보다 훨씬 어려워. 달리는 말 위에서 화살을 쏘는 거잖아. 차라리 경마로 겨뤘으면 몰라도, 그건 무모한 선택이야...”“기마 사격은 실력으로만 승부가 나는 거잖아.”임호석은 다른 재벌집 도련님처럼 놀음에 빠져 살았다.임호석은 경마와 관련된 모든 활동에 능했고, 특히 기마 사격 실력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수준으로 유명했다. 과거 프로 구단에서 스카우트 제안을 받았지만, 풍족한 환경 속에서 자란 그는 훈련의 고통을 감당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거절했다. 그런 그와 기마 사격으로 겨루겠다는 서율의 발언은 다소 무모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임호석은 서율을 비웃으며 말했다. “서율 씨, 내 경고를 무시하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이 내기를 시작한 이상 변 대표도 당신을 구해줄 수 없어요. 지금이라도 포기하는 게 어때요?”서율은 담담하게 말했다.“후회할 일은 하지 않아요. 그리고 임호석 씨도 약속을 지킬 줄 아는 남자라고 믿고 싶어요. 비겁하게
도혁은 멀어져가는 서율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어둡고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옆에 있던 지민은 그가 더 이상 따라가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서율이 이렇게 대담하게 나선 이상, 결과가 어찌되든 도혁의 체면을 완전히 구길 것이다. 만약 주변 사람들이 이 상황을 더욱 부추긴다면, 도혁조차도 그녀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어려울 것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서율이 모습을 드러냈다. 깔끔한 검은 기마복을 입은 그녀는 군더더기 없이 매끈한 몸매를 자랑하고 있었다. 긴 머리는 단정히 묶어 말아 올려 한층 날렵한 인상을 더했다. 서율의 모습을 본 임호석은 눈빛이 미세하게 빛나며 그녀를 아래위로 훑었다. 속으로는 비웃음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 ‘좀 있으면 제대로 볼 수 있을 텐데.’ 서율의 몸매는 모두의 시선을 끌어들였다.도혁은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문서율, 지금 그만 둬도 늦지 않았어.”서율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한 번 쳐다볼 뿐,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렸다. 도혁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경기의 규칙은 단순했다. 각 참가자는 아홉 발의 화살을 가지고 있으며, 세 개의 표적을 목표로 하여 말을 타고 질주하면서 사격을 해야 했다. 경기는 총 세 라운드로 진행되며, 각 표적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기록한 화살만을 합산해 최종 점수를 결정한다. 즉, 서율과 임호석에게는 총 여섯 번의 실수 허용 기회가 주어진 셈이었다. 하지만 기마 사격은 일반적인 사격과는 차원이 달랐다. 말을 제어하면서 동시에 몇 초 내에 정확히 화살을 쏴야 하는 만큼 높은 집중력과 기술이 요구되었다. 심지어 숙련된 선수들조차 표적을 벗어나거나 화살이 빗나가는 실수를 범하곤 했다. 세 개의 표적에 두 번씩 실수가 허용되지만, 신인에게는 이마저도 가혹할 수밖에 없었다.서율과 임호석은 번갈아가며 경기를 진행했고, 경기는 세 라운드에 걸쳐 치러졌다.임호석은 손쉽게 말을 선택하더니 서율에게 비꼬듯 물었다.
임호석은 서율을 쏘아보며 조소 섞인 눈빛을 드러냈다. 서율이 말에 오르는 모습만 보고 잠시 착각할 뻔했지만, 역시 그녀의 실력은 보잘것없었다. ‘감히 나한테 대들다니, 반드시 무릎 꿇고 사과하게 만들겠어.’임호석은 두 번째 라운드를 시작하며, 첫 라운드보다 더 뛰어난 실력을 뽐냈다. 세 발의 화살 모두 9점 이상을 기록하며 완벽에 가까운 실력을 보여주었다. “와, 임호석 오늘 진짜 대단하네! 이렇게 높은 점수는 처음 봐!” “서율 씨 이번엔 정말 큰일 났네!”도혁 옆에 있던 한 친구가 신경이 쓰이는 듯, 살짝 입을 열었다. “변 대표님, 이쯤에서 멈추는 게 좋지 않을까요? 임호석은 평소에도 작은 일로도 앙갚음을 하는 걸로 유명하잖아요. 만약 서율 씨가 진다면 상황이 아주 난감해질 텐데요...”도혁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뿐, 그 누구도 그의 속마음을 짐작할 수 없었다. 친구는 어찌할 바를 몰라 서율을 걱정해야 할지, 아니면 이 상황을 방관하는 도혁을 더 연민해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결국 일이 커지면 마무리는 도혁이 해야 할 것이 분명했으니.서율은 두 번째 라운드에서 전보다 높은 점수를 따냈다. 이번에는 모든 화살이 표적에 맞았지만, 점수는 고작 5점대에 머물렀다. 이 결과에 임호석은 자신감이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도발적으로 말했다. “서율 씨, 고작 이 정도 실력으로 저한테 도전을 한 거예요? 정말 겁도 없군요. 제가 기회를 드리죠. 한 바퀴 돌 필요는 없고, 그냥 여기서 무릎 꿇고 사과하면 이쯤에서 넘어가 주죠?”서율이 대답하기도 전에 주변에서 조롱 섞인 야유가 터져 나왔다. “그래, 인정해. 임호석에게 승복하고 사과해! 이만큼이나 관대하게 기회를 주는데 당장 고맙다고 해야지.” “임호석은 승마 실력으로도 유명하잖아. 상대도 안 되면서 괜한 자존심은 버리는 게 어때?”효연마저 비웃음에 동참하며 말했다. “어서 무릎 꿇고 사과해. 도혁 오빠에게 더 이상 망신 주지 말라고!”그러나
서율은 고개를 돌리다가 예상치 못하게 군중 속에서 도혁을 발견했다. 그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군중 속에 서 있었다. 그가 가진 품격과 고요한 아우라는 주위의 재벌 2세들과는 사뭇 달라 보였다. 비슷한 나이대임에도 도혁은 어느 하나 거친 구석 없이, 오히려 우아함과 품위를 더하고 있었다.도혁은 무표정하게 서율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깊고도 차가운 눈동자에는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으며, 마치 그녀를 평가하는 듯한 시선으로 보일 뿐이었다. 서율은 알고 있었다. 도혁도 다른 사람들처럼 그녀가 망신당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그런데도 도혁은 너무나 침착했다. 마치 구경하는 게 아니라, 서율을 평가하고 있는 것처럼.서율은 눈살을 찌푸린 뒤 시선을 옮겼다. 옆에 있던 지민은 도혁의 시선이 서율에게 고정된 것을 보며 불안한 감정을 느꼈다. 그때, 관중들 역시 충격에서 서서히 벗어나기 시작했다. “서율이 진짜로 임호석을 이겼다고? 게다가 마지막 라운드만으로 완벽하게 이겼다니!” “앞 두 라운드는 일부러 져준 거였던 모양이야. 오늘 임호석의 실력이 뛰어나긴 했지만, 서율을 이길 정도는 아니잖아.” “임호석이 서율한테 졌다니... 이제 제대로 망신이겠네!”임호석은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서율을 바라보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벌어진 승부였기에, 변명할 여지조차 없었다. 서율은 조용히 임호석 앞으로 다가가서 말했다. “임호석 씨, 아까 모두 앞에서 한 말 여전히 유효한가요?”임호석의 눈을 붉인 채 서율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서율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은 채 말했다. “저도 대단한 걸 바라지 않아요. 아까 약속한 대로 옷을 벗고, 무릎을 꿇고 한 바퀴 돌기만 하면 돼요. 어때요?”임호석의 얼굴은 일그러지며 험상궂은 표정을 지었다. “처음 두 라운드는 일부러 진 거였어?”서율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승산도 없는 경기를 감히 시작했겠어요? 초반 두 라운드는 그저 몸 풀기였죠.
임호석의 실력으로 서율을 이기기엔 어림도 없었다....바깥의 시끌벅적한 소란은 금방 끝이 났다. 임호석과 사이가 좋지 않은 몇몇 부잣집 도련님들은 그의 굴욕적인 사진을 찍어 퍼뜨리며 크게 비웃었다. 서율이 옷을 갈아입고 탈의실에서 나왔을 때, 문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서율은 발걸음을 잠시 멈췄다. 서율이 나온 걸 알아차린 남자는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문서율.” 도혁의 목소리는 차갑고 자석처럼 강한 울림이 있었다. “왜 그렇게까지 한 건데?” “그럼 어떻게 할까?” 서율은 차갑게 대답했다. “임호석에게 사과하고 그냥 넘어가라는 거야?” 도혁의 미간이 약간 찌푸려졌다. “문서율, 넌 이런 사람이 아니었잖아.” “그래서 널 위해 억울해도 참으라는 거야?” 도혁의 어두운 눈동자는 밤처럼 고요하고 깊었다. “임호석이 실수로 너에게 술을 쏟은 거고, 네가 뺨을 때렸으니 복수한 거나 마찬가지잖아. 굳이 일을 이렇게까지 극단으로 몰고 갈 필요가 있어?” 서율은 웃음을 터뜨렸다. “변도혁, 그래서 내가 잘못한 거라고 생각한 거야?” 도혁의 날카로운 시선이 서율의 얼굴을 뚫고 지나갔다. “임호석은 교활하고 악랄한 사람이야. 네가 임호석을 건드렸으니 화가 풀릴 때까지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서율은 비웃듯이 말했다. “네가 걱정하는 건 내가 아니라, 이번 일로 인해 SH그룹과 LS그룹 간의 협력이 잘못될 봐 그런 거겠지?” 아까 사람들이 수군대는 걸 들었는데, 이번 일로 인해 LS그룹은 SH그룹과 더 이상 협력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도혁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질 무렵 효연이 급하게 뛰어왔다. “도혁 오빠, 큰일 났어요! 방금 오빠와 협상을 하던, 주성철이라는 남자가 지민이가 방심한 틈을 타서 지민이를 만지려고 했어요. 빨리 가봐야 해요! 늦으면 문제가 생길지도 몰라요!” 도혁은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더 이상 서율을 신경 쓸 겨를도
주성철은 억울한 듯 변명했다. “지민 씨가 발목을 살짝 접질려서 넘어지다 보니 제 쪽으로 쓰러진 겁니다...” 그러나 효연이 그 말을 가로막으며 비웃었다. “됐어요! 아까 지민이가 서류를 건넬 때도 슬쩍슬쩍 손을 만졌잖아요! 도혁 오빠, 이런 사람과 함께 일하면 지민이한테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니까요!” 도혁은 차가운 시선으로 지민을 바라보며 물었다. “효연이 말이 사실이야?” 지민은 눈물이 맺혀서 금방이라도 흐를 듯했지만, 억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혁아, 나 때문에 일을 그르칠 필요 없어... 난 괜찮아, 정말이야...” 지민은 직접적으로 인정도 부인도 하지 않았지만, 마치 도혁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희생할 수 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효연은 서율을 향해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민이는 도혁 오빠의 회사를 위해 참고 있는데, 누구는 잘못하고도 뻔뻔하게 남들에게까지 피해를 주고 있네.” 도혁의 눈빛이 깊어지더니, 잠시 후 무표정하게 말했다. “ZN그룹과의 모든 협력을 취소하겠습니다.” 주성철은 충격을 받은 듯했다. “변 대표님, 전 정말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한번 조사해 보시면...” 하지만 도혁은 이미 그를 무시하고 있었다. 그는 지민에게 다정하게 물었다. “괜찮아? 병원에 가보지 않을래?” 지민의 두 뺨은 빨갛게 물들어 있었고, 도혁을 올려다보는 눈은 촉촉하게 반짝였다. 그녀는 마치 당장이라도 눈물이 흐를 듯한 연약한 모습이었다. 서율은 속으로 비웃었다. 방금 자신이 임호석에게 봉변당할 뻔했을 때는 도혁이 묻지도 않고 오히려 사과를 요구했었다. 그러나 지금 지민이 비슷한 일에 연루되자, 조사조차 하지 않고 지민의 말만 믿고 바로 협력을 끊기로 결정하다니. 도혁은 방금 전까지도 서율을 냉혹하다고 비난하더니, 이젠 지민을 위해 과감히 회사를 위한 협력까지 포기하였다. 도혁은 늘 이처럼 제멋대로였다.주성철이 다시 변명하려 했지만, 도혁은 이미 지민
[이 여자가 벌인 일이 그게 다가 아니래. 들리는 말로는, 얼마 전에는 변 대표님의 할머니를 화나게 해서 병원에 입원하게 만들었대!] [이 여자, 애초에 몸 팔아서 변 대표한테 시집간 거잖아. 뭘 믿고 저렇게 거만하게 구는 거야?][변 대표와 결혼한 걸로 이미 성공했지. 우리나라에서 이혼이 얼마나 어려운데, 저 여자가 이혼을 안 하겠다고 버티면, 변 대표라도 어쩌지 못할걸?] [이제야 알겠어. 변 대표가 왜 첫사랑과 계속 만나는 건지. 내가 남자라도 그런 아내는 쳐다보기도 싫을 듯.] [변 대표님, 빨리 이혼하고 지민 씨랑 사귀세요!]댓글을 다 읽기도 전에 서율의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을 보자 서율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녀는 조용히 전화를 받았다. [서율아.] 남자의 낮고 온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율은 핸드폰을 꼭 쥐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성 오빠.” [미안해. 며칠 전 할아버지가 편찮으셔서 병원에 계셨거든. 계속 간병하느라 연락을 못 했어.] “미안하긴 내가 미안해... 할아버지는 괜찮으신 거야?” [응, 이제는 괜찮아지셨어.] 지성이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말했다. [서율아, 뉴스는 내가 나서서 정리해 줄까?]“괜찮아. 나도 나름의 방법이 있으니까.” 어릴 때부터 서율과 함께 자라온 지성은 그녀가 자립적이고 주관이 강한 사람이라는 걸 잘 알았다. 서율이 이렇게 말하니, 지성은 더 이상 말리지 않고 차분하게 제안을 건넸다. [서율아, 내일 시간 괜찮아? 오랜만에 얼굴 보면서 이야기하고 싶어.]서율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약속을 잡았다. 통화를 끊고 나서 한참 동안 그녀의 마음은 여운에 잠겼다. ...다음 날, 서율이 식당에 도착했을 때 지성은 이미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율은 그의 앞에 다가가며 미소 지었다. “미안해, 지성 오빠. 내가 늦었네.”지성은 일어서서 그녀의 의자를 빼 주며 말했다. “아니야, 내가 너무 일찍 왔을 뿐이야.” 지성의 눈길
서율과 지성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가녀린 실루엣이 그들 앞에 다가섰고, 그 뒤로 차갑고 단호한 표정의 남자가 서있었다. “여기서 다 보네요.” 지민이 먼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서율 씨도 여기서 식사 중이신가요?” 서율은 그녀를 흘깃 바라보다가 무심하게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지민은 지성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 분은... 서율 씨 친구이신가요?” 서율은 담담하게 답했다.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 아닌가요?” 지민은 별로 개의치 않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유지하며 말했다. “여기서 서율 씨를 만나게 되어 반갑네요. 같이 식사해도 괜찮을까요?” 지성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거절하려 했으나, 서율이 먼저 대답했다. “좋아요.” 지성은 의아한 눈빛으로 서율을 바라보았다. 서율은 그에게 눈빛을 보내며 안심시켰고, 지성은 그제야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혁은 그들의 미묘한 교감을 지켜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 ‘지난 번 고지성이 문서율을 위해 나섰었는데, 둘이 꽤 친한 사이인 걸까?’도혁은 의자를 당겨 우아하게 서율의 옆자리에 앉았다. “지성 씨와 제 아내는 친한 친구인가 보군요?” 네 사람용 테이블에 서율과 지성이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도혁은 서율의 옆자리에 앉았고, 지민은 자연스럽게 지성의 옆에 앉았다. 지성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하지만 다 변 대표님 덕분이죠. 덕분에 서율 같은 멋진 친구를 사귀게 됐으니까요.” 서율은 약간 놀란 표정으로 지성을 바라보았다. 도혁의 눈빛이 잠시 어두워지며 물었다. “지성 씨 말은... 두 분이 얼마 전에서야 친해졌다는 건가요?” “네, 바로 지난번 연회 이후 친해지게 됐죠.” 지성은 부드럽고 따뜻한 미소로 말을 이어갔다. “그날 서율 씨를 도와주게 된 일로 오늘 식사 자리를 마련한 겁니다. 변 대표님, 오해하지 않으시길 바라요.” 도혁은 살짝 미간을 치켜세우며 물
어머니로서 자식이 행복하게 사는 것을 보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은 없다. 서율은 도혁의 ‘가식’이 정말로 불쾌했지만, 그가 사람을 달래는 데는 재주가 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었다. 심지어 서율도 문미정을 그토록 행복하게 만들지 못했으니 말이다. 방으로 돌아와 문을 닫자, 서율의 얼굴에는 차가운 표정이 드리워졌다. “오늘 밤은 다른 곳에서 자. 내일 아침에 엄마한테 네가 일이 있어 먼저 출근했다고 말씀드릴게.” 도혁은 외투를 벗던 중 고개를 들며 눈썹을 살짝 올렸다. “뭐라고?” 서율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동안 도와준 것에 대해 고맙게 생각해.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우리가 지금처럼 지내는 간 합당하지 않은 것 같아.” “왜 합당하지 않지?” “우리는 곧 이혼할 사이니까...” 서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혁이 차분히 말을 끊었다. “문서율, 우리 아직 법적으로 부부라는 사실을 잊은 거야?” 서율은 차갑게 말했다. “곧 끝날 관계야.” “문서율.”도혁의 검은 눈동자는 깊고 차가웠다. 그는 서율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네가 이렇게 서둘러 이혼하려는 이유가 뭐지? 다른 사람이라도 생긴 거야?” 서율은 당황한 듯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도혁의 입가에는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눈에는 전혀 웃음기가 없었다. “고지성, 네가 새로 만날 아니야?” 처음에는 황당하게 들렸지만, 서율은 이내 웃음이 나왔다. “정말 어이가 없네!” 서율은 차갑게 도혁을 쳐다보며 말했다. “변도혁, 네가 더러운 짓을 했다고 해서 나도 그런 짓을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나는 너처럼 결혼 중에 불륜을 저지를 만큼 뻔뻔하지 않아.” 도혁은 차가운 눈빛으로 서율의 턱을 쥐며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지성과는 언제부터 연락을 주고받았던 거야?” 서율은 그의 손을 떨쳐내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너랑 상관없어.” 도혁의 눈빛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도혁은 옆에 있는 안전벨트를 꺼내 그녀에게 채워주었다. 서율은 잠시 얼어붙었다. 곧 도혁의 차갑고 낮은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렸다. “안전벨트 매야지.” 이 광경을 지켜본 문미정은 도혁에게 더욱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율아, 조수석에 타더라도 안전벨트를 매야 한단다. 도혁이가 참 세심하구나.” 문미정이 없었다면, 서율은 아마 비웃었을 것이다. ‘하긴 세심하긴 해. 다른 여자의 물건이 당당하게 조수석에 잡을 정도로.’마치 지민이 그의 아내인 것처럼. 서율은 아무 말 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때 문미정은 도혁에게 슬며시 질문을 던졌다. “도혁아, 예전에 너한테 첫사랑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그 사람이 최근에 돌아왔다며?” 문미정의 말에 서율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도혁이가 지민과 함께 어울린다는 건 이미 비밀이 아니었다. 모두 도혁이가 지민에게 얼마나 신경을 쓰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문미정이 이 일을 알게 된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반면 도혁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매우 차분하게 인정하며 말했다. “네, 지금 HS그룹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래?” 문미정이 살짝 톤을 올리며 물었다. “그 아가씨가 어쩌다 HS그룹에서 일하게 된 거지?” “지민은 원래 무용을 전공했는데, 저를 구하다 다리를 다쳐 예전처럼 무용을 할 수 없게 됐습니다. 그래서 귀국한 뒤, 제가 HS그룹 내의 가벼운 일을 맡겼습니다. 지민이가 제게 은혜를 베풀었으니, 갚아야 마땅합니다.” 도혁의 말은 매우 합리적이었다. 문미정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서율 역시 그의 말에 딱히 흠잡을 곳을 찾을 수 없었다. 문미정은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도혁아, S시에 네가 그 아가씨와 만난다는 소문이 돌던데... 아직 옛 정을 못 잊은 건 아닌지 걱정돼서 물어보는 거란다...” 도혁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저와 지민은 이미 끝난 관계입니다. 제가 서율과 결혼한 이
서율은 두 사람의 표정을 살피며 의아하게 물었다. “나에 대해 묻고 있었다고?” 도혁은 미묘한 눈빛을 보이며 말했다. “우리가 결혼한 지 3년이 되었지만, 고지성 씨만큼 잘 알지는 못하거든. 그래서 고지성 씨께 당신에 대해 좀 더 배우고 싶었어.” 지성과 서율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온 친구이니, 그들의 오랜 정은 부부 3년의 세월로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다. 도혁의 말을 듣자 문미정은 도혁에 대해 고마운 마음이 들었고 지성에 대한 미안함이 들었다. 자신의 경쟁자에게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정보를 공유한다는 것은 지성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문미정은 서둘러 말했다. “시간이 늦었구나. 피곤하니 빨리 집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어.” 지성은 문미정의 앞에서 무언가 더 보여줄 수 없었기에 미소를 지으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차에 타려는 순간, 서율은 문미정과 함께 뒷좌석에 앉으려고 했다. 그때 도혁이 갑자기 조수석 문을 열어 그녀에게 타라고 손짓했다. 서율은 그를 흘깃 쳐다보며 마음속으로 비웃었다. ‘정말 연기 잘하네.’ 결혼한 3년 동안, 도혁은 한 번도 서율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고 조수석에 앉히지도 않았다. 한 번은 도혁과 함께 지옥순의 생신잔치에 참석할 때, 그녀가 조수석 문을 열고 앉으려 하자, 도혁은 차갑게 말했다. “뒷좌석에 타.” 그 이후로, 서율은 도혁과 함께 외출할 때 조수석에 앉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고, 언제나 뒷좌석에 앉았다. 이제 와서, 서율은 조수석에 앉는 것 따위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 벌어진 일로 인해 문미정의 마음은 점차 도혁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아까도 문미정은 서율에게 도혁과 다투지 말라고 계속해서 타일렀다. 문미정이 있는 자리에서 도혁이 그녀에게 문을 열어준 이상, 서율은 그의 체면을 깎지 않기 위해 조수석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안전벨트를 매려던 서율의 눈에 문 앞에 붙은 ‘전용 좌석’이라는 스티커가 들어왔다. 순간 멍하니
문미정은 서율을 쳐다보며 더 이상 숨기지 않았다.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도혁을 데리고 온 건 사실 네가 아닌 도혁을 시험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야. 네가 어릴 때부터 자존심이 강해서 힘든 일이 있어도 우리한테 잘 말하지 않잖니. 그래서 네가 도혁과의 관계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좋은지 의심스러웠거든.” “지성이는 참 괜찮은 아이야. 그동안 여자친구도 사귀지 않고, 부모님께서 아무리 결혼하라고 재촉해도 따르지 않았대. 그건 아마 아직 네가 마음속에 남아 있기 때문일 거야.” “도혁이가 너에게 진심이라면, 지성의 마음을 일찍 정리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서율은 잠시 침묵했다. 서율도 지난번 지성과의 만남에서 그가 여전히 자신에게 미련이 남아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지성이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서율은 그를 오빠처럼만 여겼다. 그렇지 않았으면 도혁과 결혼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도혁과 이혼한다고 해도, 지성과는 이어지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지성의 마음을 빨리 정리해주는 게 맞는 일이기도 했다. ... 지성은 계산을 마치자마자 뒤에 서 있는 도혁을 발견했다. 지성은 도혁을 보자마자 표정이 차가워졌다. 그건 서율과 문미정 앞에서 보여준 따뜻한 모습과는 달랐다. “변도혁 씨, 아주머니와 서율이랑 함께 있지 않고 왜 여기 와 있어요?” 도혁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어머니께서 지난번에 고지성 씨가 서율을 대접했다는 얘길 듣고, 이번에는 고지성 씨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며 저더러 계산하라고 하셨어요.” 도혁의 말에 담긴 도발을 느낀 지성은 쓴웃음을 지었다. “변도혁 씨, 아무리 연기가 완벽해도 결국엔 연기일 뿐이죠. 아주머니를 속이는 건 몰라도, 나한테 와서 이런 말 하는 건 좀 가식적이지 않나요?” 지성의 비꼼에도 불구하고, 도혁은 전혀 화를 내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연기라도 고지성 씨는 어머님을 어머님이라고 부를 수 없지만, 저는 부를 수
서율은 거짓말이 들통날 상황을 생각하자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도혁은 변함없는 표정을 유지하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서율은 순간 당황하여 무의식적으로 도혁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도혁은 오히려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자신의 손을 밀어 넣으며 열 손가락을 깍지 끼듯 맞잡았다. 서율은 깜짝 놀라며 멍하니 몇 초간 움직이지 못했다. 도혁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메뉴를 주문했다. 서율은 도혁의 손짓에 온 신경이 쏠려 그가 무엇을 주문하는지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도혁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도혁은 손을 더 세게 쥐었고 서율은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었다. 도혁은 자신이 이 상황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걸 아는 듯, 더욱 장난스럽게 그녀의 손바닥을 간질였다. 서율은 당장이라도 화를 낼 뻔했지만, 간신히 참고 있었고 얼굴은 이미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지성은 서율의 변화를 눈치채고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서율아,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졌어? 더운 거야? 에어컨 온도를 좀 더 낮춰줄까?” 서율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 지금 온도가 딱 좋아.” 지성은 그녀가 거절하자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았다. 도혁도 서율이 한계에 다다랐다는 것을 느낀 듯, 메뉴를 다 고른 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다. 서율은 정말이지 그 자리에서 물컵을 들어 도혁의 얼굴에 물을 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지성과 문미정은 그들의 상황을 알아채지 못한 듯, 최근의 일상이나 업무에 대해 가벼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잠시 후,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며 웨이터가 음식을 가져왔다. 서율은 그제야 자신이 아까 도혁의 손에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메뉴 주문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율의 머릿속은 긴장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녀는 이제 문미정에게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웨이터가 가져온 음식을 본 순간, 서율은 할 말을
지성은 문미정과 서율을 보자마자 온화하게 인사를 건넸했다. “아주머니, 서율아.” 곧이어 그의 시선이 함께 온 도혁에게로 향했다. 이미 사전에 이야기를 들은 듯, 지성은 전혀 놀라지 않는 표정이었다. “변도혁 씨, 반갑습니다.” 도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지성 씨, 오랜 만이네요.” 지난번 만남의 기억이 아직 생생했다. 서율은 지성이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준 것에 대해 고마워하고 있었다. 그 일 이후로, 지성과 도혁 사이에는 은근한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서율은 두 사람을 만나게 할 일이 없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이 다시 이렇게 마주치자 머리가 아팠다. 서율은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이미 결혼했는데, 엄마가 혹시 아직도 지성 오빠와 나를 이어주려는 건 아니겠지?’ ‘만약 그런 생각이라면, 왜 변도혁까지 데리고 온 걸까?’서율은 무심코 문미정을 흘끗 쳐다보았다. 문미정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그녀에게 안심하라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문미정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이제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지성이가 예약한 방으로 들어간 네 사람은 각각 자리에 앉았다. 문미정은 먼저 지성의 할아버지와 부모님의 건강에 대해 물었고, 지성은 미소를 지으며 차근차근 대답했다. 이때 웨이터가 메뉴판을 가져와 주문을 부탁했다. 문미정은 메뉴판을 받아 들고 도혁에게 건넸다. “엄마랑 서율이 입맛이 비슷하니까, 서율이가 좋아할 만한 요리를 몇 가지 골라주면 돼.” 서율은 단번에 문미정의 속셈을 알아차렸다. 문미정은 그들이 연기한 행복한 부부의 모습을 쉽사리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런 방법으로 그들의 관계를 시험해보려는 것이었다. 도혁이가 서율이 좋아하는 음식을 모른다면, 그들이 친밀한 사이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서율은 지난번 식사 때 도혁이가 자신의 취향을 전혀 모르던 상황이 떠올라 마음이 답답해졌다. 아마 이번에도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을 모를 것이라 생각
서율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며 더 이상 도혁과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도혁도 말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기에, 둘은 묵묵히 차 안에서 시간을 보냈다. LJ그룹 건물에 도착하자, 서율은 간단히 감사 인사를 건네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무실로 향했다. ... 사무실에 도착한 서율은 바로 육경남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가 S시에 온 거 알고 있었어?” 핸드폰 너머에서 경남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들려왔다. [나도 어제 알았어. 엄마가 너 혼자 지내는 게 많이 걱정되셨나 봐. 네가 혹시 힘들어하고 있진 않은지 보러 오신 거래.] 서율은 잠시 머뭇거리다 물었다. “오빠, 나랑 변도혁이 곧 이혼할 거라는 걸 엄마에게 말해야 할까?” 경남은 미소를 머금은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가 이혼을 결심했다면, 이혼 후에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율은 그의 말에서 뭔가를 느끼고 다시 물었다. “오빠 말은, 지금 이혼한다고 하면 엄마 아빠가 반대할 거라는 뜻이야?” 경남의 목소리에는 가벼운 웃음이 담겨 있었다. [엄마 아빠는 그렇게 완고한 분들이 아니야. 하지만 네가 이혼을 하겠다고 하면 당연히 이유를 물어보시겠지. 단순히 성격 차이라고 말하고 넘기려는 건 거의 불가능할 거야.][네 잘못이라면 엄마 아빠는 결혼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며 널 혼낼 거야. 반대로 도혁의 잘못이라면, 엄마 아빠가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잖아.][게다가 변도혁이 이혼에 동의할지도 의문이야. 내가 보기엔 네 남편, 그렇게 쉽게 물러날 사람은 아니야. 변도혁이 진지하게 나오면 너 혼자 상대하기 어려울지도 몰라.] 경남의 말에 서율은 아침에 도혁이 자신을 유혹하려던 장면이 떠오르며 마음이 더 답답해졌다. 서율은 화제를 돌리며 말했다. “오빠, 엄마 보러 안 올 거야?” [이미 엄마랑 통화했어. 변도혁은 네가 누구인지 아직 모르는 것 같아서, 그 문제로 싸울까 봐 당분간 나서지 말자고 하시더라.] S시에 오기 전까지 경남은 부모와 함께
서율은 발걸음을 잠시 멈춘 뒤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무슨 일이야?” 서율은 그와 마주하고 싶지 않았지만, 표정은 완벽하게 차분함을 유지했다. 도혁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데려다 줄게.” “괜찮아.” 서율은 자기도 모르게 거절했다. “혼자 가도 돼.” “율아, 도혁이가 너를 데려다주겠다고 하니, 그냥 그렇게 해.” 문미정은 옆에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부부는 서로 미워할 시간이 없단다.” 문미정은 서율이 도혁에게 서운한 태도를 보이는 것을 두 사람이 다투었다고 오해한 듯했다. 서율은 거절하고 싶었지만, 문미정의 기대 어린 눈빛을 보고 차마 더 이상 거절하지 못했다. 집을 나서려는 순간, 도혁이 서율의 손을 잡았다. 서율은 깜짝 놀라며 표정이 굳어졌다. “변도혁, 지금 뭐 하는 거야?” 도혁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렇게 해야 어머니가 우리가 잘 지낸다고 믿으실 거야.” 그 말이 맞긴 했지만, 서율은 방금 일어난 일 때문인지 도혁에게 더 거부감이 들었다. 서율은 그의 손을 몇 번이나 뿌리치려 했지만, 도혁은 손을 놓지 않았다. 문미정이 뒤에서 보고 있는 상황에서 서율은 더 이상 무리하게 저항할 수 없었기에 결국 도혁의 손을 잡고 집 밖으로 나왔다. 서율은 도혁과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도혁은 여태껏 한 번도 서율의 손을 잡은 적이 없었다. 이런 식으로 손을 잡는 것은 서율에게는 처음이었다. 너무나도 가까운 스킨십이었기에,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문미정은 현관까지 나와 그들이 손을 맞잡고 떠나는 모습을 보고 흐뭇하게 웃었다. 차에 타자마자, 서율은 도혁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치며 차갑게 말했다. “변도혁, 약속을 어겼네.” 도혁은 살짝 긴 속눈썹을 움직이며 서율을 보았다. “뭐?” 도혁이 모르는 척하자 서율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 “어젯밤에 나랑 약속했잖아. 나를 건드리지 않겠다고.”
똑똑. 그때 갑자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율아, 엄마가 아침 준비 다 했으니 얼른 내려와서 아침 먹어.” 서율은 문미정의 목소리를 듣고 당황하며 황급히 옷의 단추를 채웠다. 그녀는 서둘러 침대에서 내려오다가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도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무의식적으로 그녀를 잡아주려 했다. 그러나 서율은 그의 손길을 피했다. 이 방에선 단 1초도 더 있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서율이 답을 하지 않자, 문 밖에 있던 문미정은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듯했다. “율아, 일어났니? 빨리 안 일어나면 회사 늦겠어...”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엄마, 방금 일어났어요. 세수하고 금방 내려갈게요.” 서율의 모습을 본 문미정은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서율은 옷매무새가 엉망이었고, 입술은 붉게 부풀어 올라 있었다. 상황을 알아차린 문미정은 얼굴이 빨개지며 서율보다 더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너 출근 늦을까 봐 깨우러 왔지 뭐야... 어, 어서 준비해. 엄마는 먼저 내려갈게!” 그렇게 말하고는 도망치듯 떠났다. 서율이 다시 방으로 돌아왔을 때, 도혁은 이미 옷을 다 입고 평소처럼 평온하고 깔끔한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도혁은 서율이가 돌아온 것을 보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씻고 와. 난 먼저 내려가 있을게.” 서율은 그와 대화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녀는 급히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도혁은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보더니 방을 나섰다. 그가 떠난 후, 서율은 거울을 통해 자신의 엉망진창인 모습을 확인했다. 붉게 부어오른 입술, 잘못 잠근 셔츠 단추, 그리고 헝클어진 머리카락. 문미정이 자신을 보고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서율은 수치심에 눈을 질끈 감았다. 눈만 감으면 도혁과의 아찔한 순간이 떠올랐고, 그 기억이 그녀를 괴롭혔다. 만약 문미정이 문을 두드리지 않았더라면, 그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