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을 내려놓은 연미혜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노현숙에게 경민준이 저녁 석식 약속이 있다고 말했다.이날 밤, 경민준은 돌아오지 않았다.다음 날 아침, 경민준이 어젯밤에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안 노현숙은 잔뜩 화가 나 있었다.“민준이 이 자식! 일이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어떻게 집에 올 시간이 없어?”이 말을 들은 연미혜는 웃으며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경민준이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집에 올 시간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다만 경민준에게 휴식도 필요했다.어젯밤 전화기 너머로 들렸던 임지유의 목소리를 떠올린 연미혜는 경
연미혜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어쩌면 임지유에게 삼촌 집을 이사하게 하는 조건으로 경민준이 내 건 보상일 수도 있다.임지유에 대한 감정이 이렇게 깊은 사람이 연미혜를 돕기 위해 임지유에게 고통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김태훈이 말했다.“만약 정말로 실력을 숨기고 있었다면...”연미혜와 김태훈 모두 유명욱의 학생이었고 유명욱이 평소에 그들에게 냉담했지만 사실 유명욱과의 관계는 꽤 좋았다.유명욱은 겉으로는 엄격했지만 속은 부드러운 사람이었다.하지만 원칙이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만약 임지유의 능력과 재능이 정말로 뛰어나다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연미혜는 온천으로 가기 위해 옷과 필요한 물건들을 준비하기 시작했다.하지만 경민준의 물건은 건드리지 않고 자신의 물건만 챙겼다.비록 경민준이 그녀의 법적 남편이긴 하지만 이젠 그녀의 남자가 아니라 임지유의 남자였다.어쩌면 연미혜가 자기 물건을 만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다.그리고 연미혜도 이제는 그의 물건을 만지고 싶지 않았다.경다솜의 물건은 유순자가 챙겨줬다.예전 같았으면 그녀는 경다솜의 물건이 빠지지 않았는지 걱정했을 것이고 유순자가 도와줬더라도 다시 한번 확인했겠지만 지금은 자기 물건만 챙
연미혜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약간 불편함을 느꼈지만 속옷이 싫지 않았기에 그냥 입기로 했다.목욕가운을 입고 있던 연미혜는 자신을 바라보는 경민준의 시선이 느껴지자 저도 모르게 머릿속에 입고 있는 속옷이 떠올라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하지만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걸어갔다.온천 수영장 옆으로 가서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내려놓은 뒤 목욕가운을 벗었다.그녀가 입고 있는 속옷이 경민준의 눈앞에 완전히 드러난 순간 경민준은 순간 멈칫했다.연미혜는 이 속옷이 노현숙이 준 것임을 경민준이 알고 있다고 믿었다.이걸 입은
이때 다른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더니 그 안에서 정범규가 나왔다.정범규가 온천에 왔을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연미혜는 약간 놀랐다.하지만 노현숙과 경민준은 정범규가 온천에 온 것을 진작 알고 있었던 듯 전혀 놀라지 않았다.연미혜를 본 정범규는 눈썹을 치켜올리더니 노현숙에게 다정하게 말했다.“어르신, 벌써 가시려고요? 점심 먹고 가시지 그래요?”정씨 가문과 경씨 집안은 사이가 좋았다.정범규를 어릴 때부터 봐온 노현숙은 그의 말에 자상하게 웃으며 말했다.“됐어 됐어, 너희들끼리 잘 놀아.”그들은 노현숙을 배웅하기 위해 문밖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로 가던 직원은 경민준 일행과 마주쳤다.정범규가 물었다.“이 식사는...”직원이 즉시 대답했다.“사모님이 주문하신 겁니다.”직원이 사모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당연히 연미혜뿐이었다.그 말에 그들도 직원을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고 식사를 배달하러 가라고 했다.하지만 직원이 떠난 후 정범규가 웃으며 말했다.“보아하니 우리 밥 먹을 때 부를 필요는 없겠네.”경민준이 담담하게 말했다.“그래도 한번 불러는 봐야지.”이 말을 들은 임지유는 잠시 멈칫하더니 입술을 깨물며 경민준을 바라보았다.하승
아래층, 경다솜이 뛰어가서 경민준에게 말했다.“아빠, 엄마는 이미 먹고 있어서 안 내려올 거래요.”정범규가 눈썹을 치켜올렸다.‘생각보다 눈치가 있네.’하승태는 시선을 아래로 내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임지유는 몰래 미소를 지었다.임지유는 연미혜가 절대 내려오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이곳에 연미혜를 진심으로 환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연미혜가 내려온다 해도 모두의 조롱을 받으며 배척만 당할 뿐이었다.그렇다면 차라리 내려오지 않고 위층에 틀어박혀 있는 것이 나을 것이다.경다솜의 말을 들은 경민준이 한
온천 산장은 꽤 넓어서, 연미혜는 경민준 일행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그녀가 아래층으로 내려갔을 때도 그들은 보이지 않았다.해가 아직 완전히 지기 전, 연미혜는 직원 두 명을 데리고 산 위로 향했다.초가을의 바람은 제법 차가웠지만, 도톰한 외투를 걸친 그녀는 춥지 않았다.한참 바람을 맞으며 산을 올라 사과를 몇 개 땄더니 잔뜩 긴장됐던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았다.여럿이 함께하니 두세 상자 분량의 사과라도 금세 수확이 끝났다.하지만 연미혜는 바로 내려가지 않고, 오늘따라 유난히 아름다운 석양이 아쉬워 잠시 자리에 앉았다.
노현숙의 생일이 끝난 뒤, 도원시 상류층 사회는 그야말로 술렁였다.경민준이 이미 결혼한 적이 있는 데다가 여섯 살짜리 딸까지 있다는 사실이 퍼졌다. 그동안 임지유를 짝사랑하던 재벌가 자제들은 충격과 함께 안타까움에 휩싸였다.임지유가 경민준과 연인 사이라는 건 대부분이 알고 있었지만 ‘결혼 이력’과 ‘자녀 존재’까지는 처음 알려졌기 때문이었다.다음 날 아침, 여러 남성들이 세인티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임지유를 붙잡고 이쯤에서 그만두라며 설득하려 들었다.결국 장건식 등 측근들이 나서 겨우 임지유를 그 상황에서 벗어나게 도왔다.
정범규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연미혜의 과거를 아예 모르고 있는 거 아니야?”하승태는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예전엔 많은 사람들이 연미혜와 김태훈이 사귀는 줄 알았지만,그녀가 유명욱 교수의 제자라는 걸 알고 난 후 그는 두 사람의 관계를 유심히 지켜본 적이 있었다.그리고 그들 사이엔 남녀 간의 감정 따윈 없었다고 확신했다.이미연이 그런 말을 했던 건 정말로 김태훈과 이어지길 바랐던 건지, 아니면 단순히 체면을 지키려는 소리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의 연미혜라면 설령 한 번 결혼했고 아이가 있다 해도, 누구와
김태훈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경다솜은 다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삼촌 목소리도... 어디서 들어본 것 같아요.”그 순간 김태훈의 눈가가 살짝 떨렸다.설 연휴쯤, 연미혜와 스피커폰으로 몇 시간씩 업무를 논의하던 일이 떠올랐다.그때 경다솜이 바로 옆에서 레고를 조립하고 있었다.‘다솜이가 내 목소리를 기억 못할 리 없지.’하지만 그는 그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랬구나?”경다솜은 고개를 끄덕였다.“네.”“삼촌 목소리가 좀 흔한가 보네?”그 말을 듣고 있던 경민준은 가만히 코끝을 만지작거리며 웃음을 흘렸다.
노현숙의 생신날이 밝았다.경다솜은 아침이 되자마자 아빠에게 부탁해서 미리 준비해 둔 선물을 품에 안고 내려왔다.그리고 식탁에 도착하자마자 조심스레 선물을 건넸다.“증조할머니, 생신 축하드려요.”노현숙은 눈가에 잔잔한 주름이 잡히도록 웃으며 그녀를 끌어안았다.“우리 다솜이가 선물을 다 준비했어? 고맙다...”곧이어 경민준도 선물 상자를 건네며 말했다.“이건 저랑 미혜가 함께 준비한 겁니다. 생신 축하드립니다.”노현숙은 잠시 그를 찬찬히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때 김영수가 큰 상자를 들고 들어왔다.“어르신,
그날, 연미혜는 고씨 가문 저택에 머물며 고창완과 함께 차를 마시고 바둑을 두며 오후를 보냈다.경다솜은 하루 종일 연미혜 곁에 붙어 있었고, 밤에도 함께 연씨 가문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연미혜는 오후 늦게 잠시 자리를 비우고 경민준에게 문자를 보냈다.[오늘 밤 다솜이 데리러 와줘.]답장은 없었다.연미혜는 그냥 못 봤겠거니 생각했다.그런데 저녁 식사가 끝난 직후, 경민준 본인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경다솜을 데리러 온 차량은 정확히 시간을 맞춰 고씨 가문 저택 앞에 도착했다.경다솜이 차에 오르고 나서야 연미혜도 자신의 차를
넥스 그룹 사무실.연미혜는 여전히 자리에 앉아 데이터를 정리하던 중이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을 보고 그녀는 전화를 받았다.“하 대표님, 무슨 일이세요?”하승태는 그녀의 목소리를 듣자, 말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수연이가 요즘 미혜 씨를 못 본 지 좀 됐다더라고요. 이번 주말 시간 괜찮아요? 잠깐 산책이라도 같이할래요?”연미혜는 화면 속 데이터 모델링 파일을 힐끔 보며 말했다.“이번 주는 일정이 꽉 차 있어요. 다음 주면 괜찮을 것 같아요.”그녀의 대답에 하승태는 눈을 살짝 떨구며 대답했다.“그래요
경민준과 염성민이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연미혜는 알지 못했다.김태훈과 함께 식사를 마친 그녀는 곧장 회사로 돌아가, 남은 업무를 이어갔다.수요일 오후, 고창완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이번 주말에 우리 집에 들르지 않을래? 다솜이도 올 거야.”연미혜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네.”금요일 오후.회의 중이던 연미혜의 휴대전화가 잠깐 진동했다. 잠시 머뭇거리다 화면을 보려던 순간 전화는 이미 끊겨 있었다.회의 중이라 신경 쓰지 않았지만 발신자는 등록되지 않은 번호였다.전화를 건 사람은 강혜원이었다. 수요일부터 하원
말을 마친 연미혜는 더는 경민준을 상대하지 않았고 그저 돌아서 차로 향했다.경민준은 본능적으로 그녀를 붙잡으려는 듯 한 걸음 앞으로 나섰지만, 바로 그때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화면을 내려다본 그는 발걸음을 멈추었고 연미혜가 차에 타는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며 전화를 받았다.그 모습을 보고 있던 김태훈은 경민준이 또다시 연미혜에게 무슨 말을 꺼낼까 잠시 긴장하다가, 그가 스스로 물러서는 것을 확인하고는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아무 말 없이 말없이 연미혜가 탄 차량 반대편으로 돌아 올라탔다.차 안.조수석에 앉은 김
임지유는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임혜민에게 말했다.“승태가 전화 받기 어려운 상황인 것 같아요. 좀 있다가 다시 걸어볼게요.”시간이 흐르고 삼십 분쯤 지났을 무렵 임지유는 다시 하승태에게 전화를 걸었다.그러자 이번엔 전화가 연결되었다.“통화 괜찮아?”임지유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응. 괜찮아.”하승태는 짧게 대답했다.사실 그는 임지유가 처음 전화를 걸었을 때부터 화면을 보고 있었지만, 그때는 일부러 받지 않았다.“무슨 일이야?”하승태가 묻자, 임지유는 가볍게 웃으며 강혜원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지금 하원 그룹에서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