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개의 테이블을 두고 있었고, 하연은 단지 정다영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람이 여성이라는 것만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볼 때는, 경매 가능성은 없을 것 같아. 이 유물은 정씨 가문의 가보가 아닌 것 같아. 그렇다면 정다연 맞은편에 있는 저 여자가 바로 유물의 주인일 가능성이 커.” 가흔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계획을 세웠다. 그녀는 가흔과 함께 방 하나를 잡고, 근처에 있던 웨이터를 불렀다. “실례지만, 옆 테이블에 있는 두 여성분이 커피를 시키셨나요?” 웨이터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나갔다면, 한 잔씩 더 리필 해준다고 하면서 다시 주시겠어요.” 하연은 말하며, 미니카메라를 웨이터의 옷깃에 몰래 고정하고 돈을 그의 주머니에 넣었다. “당신이 잘 해낼 거라 믿어요.” 웨이터는 잠시 망설였지만, 돈의 액수가 꽤 컸기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10분 뒤, 웨이터는 돌아왔고, 임무는 성공적이었다. 카메라 화면 속, 정다영 맞은편에 앉아 있던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여자의 행동 하나하나에는 우아함이 묻어났고, 기품 있는 중년 여인의 풍모를 풍기고 있었다. 그 여자도 잠시 몰래 카메라를 쳐다보았다. 하연은 화면을 멈추고 가흔에게 물었다. “이 여자 본 적 있어?” “아니, 기억에 없는데.” 하연도 낯선 얼굴이어서 바로 그 여자의 사진을 찍어 하경의 이메일로 보냈다. [오빠, 이 사람 좀 조사해 줘.] 정다영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 게다가 F국에 흔적이 없는 사람이면 결코 평범하지 않을 터였다. 하연의 모든 연락은 하경의 특별 관리 대상에 포함되어 있었기에 그는 곧 메시지를 확인하고 신원을 조회했다. [허징인. 현지인이 아니야. 원래 화교 출신인데 결혼하고 동남아로 이주해서 지금까지 거기에 정착했어.]하경이 전화로 빠르게 하연에게 필요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허징인을 왜 조사해?] 하연은 잠시 고민하다 물었다. “허징인의 남편은 누구예요?”
사람들로 북적이는 복도. 벌써 많은 이들이 몰려들어 웅성거리고 있었다. 누군가 놀라 소리쳤다. “피가 난다!” 하연은 다급히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안으로 들어갔다. 커튼을 걷자, 화려한 귀부인 차림의 송혜선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녀의 허벅지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고, 상태는 심각해 보였다. “살인이다! 이건 살인이야!” 송혜선은 비명을 지르며 소리쳤다. “내 아이... 제발, 내 아이를 구해주세요!” 테이블 위에는 깨진 잔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실랑이가 벌어진 흔적이 역력했다. 조진숙은 침착하게 송혜선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119에 전화를 걸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지만, 태도는 단호했다.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억울한 일을 당했다면 곧 진실히 밝혀질 테니까. 내가 이렇게 만들지 않았어요... 여보세요, 여기는 XX로 카페입니다. 한 임산부가 유산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빨리 와주세요.” 전화를 끊고 나서도 조진숙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하연은 그녀 쪽으로 달려갔다. “진숙 이모, 괜찮으세요?” 조진숙은 하연을 보자 눈빛이 반짝였다. “하연아, 네가 여긴 웬일이니? 내가 이렇게 한 게 아니야. 그저 사고일 뿐이야...” 하지만 송혜선은 하연을 보더니 더 흥분하기 시작했다. “뭐야! 너희들! 이거 다 너희들이 짜고 한 짓이지! 너희들은 내 아이가 태어나면 상혁의 자리를 뺏길까 봐 두려운 거잖아! 상혁이가 혹시 너희들한테 이렇게 하라고 시켜서 이런 짓을 한 거지!” 하연은 송혜선의 감정을 자극하지 않으려 했고, 조진숙을 한쪽으로 부축해 앉혔다. “이모, 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조진숙은 두 손을 떨며 말했다. “송혜선 저 여자가 나를 초대했지만 내가 무시했다. 그런데 오늘 갑자기 찾아와서는 상혁이를 설득해서 아이를 낳게 해달라고 하잖아. 만약 내가 송혜선 저 여자가 임신한 줄 알았다면, 만나지도 않았을 거야.” 하연은 조진숙의 자존심을 알았다. 아무리 화가 나고 원망스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나요? 사고가 난 방의 CCTV가 고장 났다니요.” 상혁은 남준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남준도 질세라 맞섰다. “그 말은 제가 형님께 오히려 하고 싶은 말입니다. 형님, 그리고 진숙 이모.” 조진숙은 그 말을 듣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 했다. “부남준, 너도 잘 알잖아. 네가 여기에서 무사히 자란 건 다 내 덕분이라는 걸!” 만약에 조진숙이 정말 송혜선과 남준을 해치고 싶었다면,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지만, 그동안 한 번도 그런 수단을 쓰지 않았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여보, 여보...” 부동건이 조진숙을 진정시키며 막았다. “남준이가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야. 그냥 아직도 철이 없어서 조금 성급했을 뿐이야.” 그러나 조진숙은 부동건을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히 말했다. “이제 내가 직접 증명해야 하는 건가? 분명히 말하지만. 송혜선이 나를 어떻게 비난하든, 난 그런 짓을 한 적이 없다고.” 부동건은 조진숙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았지만, 켜진 수술실의 불빛은 눈이 부실 정도로 밝아서 부동건도 역시 마음이 조급했다. 부동건은 전화를 받고 병원에 가장 좋은 전문의를 요청해 송혜선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상혁은 카페 점장을 향해 차갑게 지시를 내렸다.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웨이터와 손님들을 조사하고, CCTV를 복원을 하던 당시의 진실을 찾아내도록 하세요. 그리고 반나절 안에는 답을 내놔야 해요.” 점장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막 떠나려는 점장을 상혁이 다시 불러 세웠다. “남준아, 네가 믿을 만한 사람 한 명을 붙여서 공정성과 투명성을 확보해.” 남준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잠시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형님이 공정하게 처리하실 텐데, 그 거면 전 충분해요. 그리고 굳이 저까지 나서서 그렇게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상혁은 단호히 덧붙였다. “아니야 꼭 필요해. 만약 어떤 실수라도 생긴다면, 그리고 그게 네 어
“친해졌냐니?” 하연은 얼버무리려 하며 코끝을 만졌다. “이야기 몇 번 나눈 적 있는 사이죠. 그냥 아는 사람 정도?” “그래? 그럼 난 남인가 보네. 그런 사실도 모르고 있고.” 상혁의 목소리는 냉랭해졌고, 기분이 상한 게 분명했다. 하연은 그 말에 피식 웃으며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부상혁 대표님, 질투하시나 봐요.” “나 같은 남하고 친하게 굴지 마.” 상혁은 그녀를 밀어냈지만, 하연은 더 강하게 안겼다. “당신이 남이라면, 내겐 ‘내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거죠.” 예전의 하연이라면 한 번 밀치면 더 다가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행동은 상혁의 기분을 한껏 들뜨게 했다. 상혁은 흥미로운 듯 하연의 긴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쓸어올렸다. “어떻게 오늘 커피숍에 있었던 거야?” 하연은 숨길 생각 없이 빠르게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정규인의 아내 허징인이 지금 여기에 있더라구요. 그런데 참 묘하죠. 고경수의 딸이 죽자마자 허징인이 나타났고, 게다가 정다영에게 도움을 요청하다니. 둘이 그렇게 친한 사이였을까요?” 상혁은 여전히 말없이 하연의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살며시 만지고 있었다. 하연에게 머리카락은 가장 소중한 것이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비단처럼 부드럽고 매끄러워 눈길을 사로잡았다.“왜 아무 말도 안 해요?” 하연은 그의 품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때, 상혁은 누구의 시선을 느끼며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마침 남준이 병원에서 나오고 있었고, 상혁이 타고 있는 차를 노려보고 있었다. “우리 안 만난 지 얼마나 됐더라?” 상혁이 갑작스레 물었다. 하연은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삼사일쯤 됐나요?” 사실 그렇게 오래된 건 아니었다. 상혁은 갑자기 하연의 머리를 손으로 고정시키며 입술을 맞추었다. 혀끝이 그녀의 입술을 열며 들어왔다. 상혁의 키스는 뜨겁고 부드러웠다. 하연은 얕은 신음을 내며 그의 셔츠를 움켜쥐었다. 상혁은 깊은 몰입 속에서 창문이 살
밤늦게 상혁은 조진숙의 호출을 받고 그곳으로 향했다. “상혁아, 그 여자... 임신한 거 넌 이미 알고 있었지?” “네.”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 조진숙이 분노로 목소리를 높였지만, 상혁은 여전히 차분했다. “말씀드렸다 한들, 어머니가 뒤에서 무슨 일이라도 꾸미셨겠어요? 게다가 어머니가 뒤에서 손을 쓰실 분도 아니시잖아요. 정작 마주하고도 아무런 행동을 안 하셨잖아요.”“예전에 내가 남준이를 건드리지 않은 건, 송혜선이 철벽처럼 남준이를 지켜주고 있었기 때문이야. 부씨 가문의 혈육이라는 든든한 배경을 등에 업고 있었으니 내가 함부로 나설 수 없었지. 하지만 지금은 고작 형체도 보이않는 뱃속에 있는 아이일 뿐이야. 내가 손을 쓰는 게 뭐가 그렇게 어렵겠니?”조진숙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거실을 오가며 발을 구르듯 걸었다. “미쳤나 봐. 네가 이사회 자리를 되찾은 것도 송혜선의 임신과 무관하지 않을 텐데.” 상혁은 대답하지 않았고,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가로등 아래, 차가 조용히 서 있었다. 하연은 뒷좌석에 기대어 잠들어 있었다. 원래 하연이도 상혁과 함께 들어가겠다고 했지만, 일이 복잡해질 것을 우려한 상혁이 그녀를 말렸다. 하루 종일 피곤했는지 깊이 잠든 하연의 모습을 바라보는 상혁의 마음은 괜히 짠했다.“반백의 나이에 늦둥이를 보겠다니, 네 아버지가 기뻐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야. 다만 송혜선 뱃속의 아이가 누구 아이인지나 확실히 알았으면 좋겠어.” 조진숙의 독설에 상혁은 눈길을 들었다. “어머니도 아시나요?” “뭘 안다는 거니? 그 여자가 얼마나 방탕한지를? 네 표정만 봐도 내 추측이 맞나 보네.” 조진숙은 비웃으며 몸을 돌렸다. “너희 아버지는 벌써 그 나이에 온갖 병을 달고 살잖니. 그런 상황에서 여자를 임신시킨다는 게 쉬운 일이겠니? 게다가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건, 송혜선이 외부에 다른 남자를 두고 있다는 말이잖아.” 그녀는 다시 묻듯 말했다. “상혁아, 이 일 어떻게 처리할
예전 같았으면 하연은 뭔가 이유를 붙여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말문이 막혀 주제를 돌렸다. “오빠, 주씨 가문 쪽에도 허락을 받았어요?” 이런 가문에서 자연스럽게 연애를 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인데, 가족들의 동의를 얻는 건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특히, 예전처럼 주씨 가문이 관대하지 않은 지금의 상황에서는 더욱 그랬다. “될 거야.” 하경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애초에 첫 만남부터 선 자리였잖아.” 하연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덧붙였다. “그런데 오빠, 진지하게 생각해봐요. 주슬기 씨가 상혁 오빠에게 호감을 보이는 것 같고, 오빠는 내 친오빠잖아요...” 하경은 하연의 말을 도중에 끊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걱정 마. 어떤 상황에서도 나는 네 편이야.” 하연은 순간 할 말을 잃었고, 대신 억지로 웃음만 지어 보였다....며칠 후, 송혜선은 병원에서 퇴원했다. [회장님, 저 이 상태로는 보름, 아니 열흘도 혼자 있는 건 불안해서 안되겠어요. 집에 의사 선생님 한 분이 계속 대기하게 하면 안 될까요?] “알고 있어. 이미 연락해뒀으니 집에 가서 푹 쉬기만 하면 돼.” 부동건은 전화를 받으며 바쁜 목소리로 답했다. 송혜선은 옆에서 사과를 깎던 부남준과 눈이 마주쳤다. 그 말은 곧 상혁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다.상혁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일을 보고받고 있었다. “진행 상황은 순조롭습니다. 이미 부씨 가문 본가로 성공적으로 들어갔습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상혁은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금융위원회에서 오늘 임시 회의가 열렸는데요. 명단을 보니 왕씨 가문의... 아, 한명준 씨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상혁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 사람이 왜 거기에 포함 되 있는 건데?” “지금 양국 간 신재생에너지 프로젝트를 맡고 있어서입니다. 한명준 씨는 이제 왕씨 가문으로 돌아가 신분 상승을 했으니, 명단에 들어가 있는 것이 이상하지는 않습니다.” 원신민은 자세히 설명을
공장은 대부분 외곽 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고, 수백 묘에 달하는 광활한 땅이 한눈에 들어와 장관을 이루었다. “부 대표님, 주 대표님, 보시다시피 이 공장은 이미 규모를 갖추었고, 지난 몇 년간의 성과는 누구나 인정할 만합니다. 올해 우리 시의 GDP에 기여한 비중도 상당할 겁니다.” 한 사장은 환하게 웃으며 자랑스러운 어조로 설명을 이어갔다. 참관하는 동안 눈여겨볼 점이 많았고, 하연은 뒤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꼼꼼히 메모를 남겼다. “조 사장님의 말씀, 제가 금융위원회 위원장님께 꼭 전하겠습니다.” 부 대표의 말에 한 사장은 얼굴이 환해지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부 대표님, 과찬이십니다. 저희는 부 대표님의 인정을 받는 것만으로도 이미 큰 영광입니다.” 너무 노골적인 아부에 하연은 차오르는 웃음을 억누르느라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옆에 있던 손이현이 하연을 흘끗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HD그룹의 프로젝트는 남산에 있습니다. 공장은 이미 기본적인 규모와 초석은 잘 갖춰졌으니, 나중에 하연 씨가 한 번 방문해서 조언을 주시면 좋겠습니다.” 하연은 입술을 살짝 다물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건 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네요. HD그룹은 업계 선배이고, 저희 회사는 이 분야에서는 아직 신입이라 드릴 조언이 없을 것 같아요.” 이현이 미소를 머금으며 덧붙였다. “이번 프로젝트는 제가 전적으로 맡은 것이고, HD그룹 본사는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이 말에 하연은 약간 놀라 눈길을 돌렸다. 이현이 독립적으로 프로젝트를 이끌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한참을 망설이던 하연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축하드려요.”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는 지나치게 눈길을 끌었다. 마침 이 장면을 스치듯 목격한 상혁이 시선을 돌려 말했다. “최 사장님.” “네!” 하연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며 대답했다. 상혁은 차분한 표정으로 이어갔다. “조 사장님이 방금 설명한 이 기계의 개념에
집을 나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아무도 하연을 못 찾고 있을 때, 오직 상혁만은 하연을 꼭 찾아냈다. 하연은 속상한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 날 너무 잘 아는 거 아니에요?” “널 잘 아는 게 나쁜 일이야?” “나도 내 사생활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오빠한테 그런 말을 다 하네.” 상혁은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하연은 과거를 떠올렸다. 이제 와서 보니, 자신은 진짜 상혁의 앞에서는 정말로 숨길 수 있는 게 없었다. “부 대표님, 자료입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주슬기가 다가오며 공손하게 말하며 일하는 중에는 철저히 선을 지키고 있었다. 하연은 눈치껏 한발 물러섰다. 그런 하연의 옆으로 손이현이 다가왔다. “여기에 오니까 옛날 추억들이 많이 떠오르죠?” “당연하죠 여기서 자랐으니, 잊을 수가 없죠.” 하연은 담담히 말했다. “예전에 제가 이곳을 하연 씨에게 넘기려 했는데, 하연 씨가 거절했었죠.” “지금도 거절할 거예요. 그땐 그때였고, 지금은 또 지금이니까요.” 하연은 두 손을 난간에 얹으며 말했다. “원 비서가 지적한 건 심각한 문제는 아니에요. 수정하면 해결될 거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두 사람은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마치 예전에 소울 칵테일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던 때로 돌아간 듯했다. 이현은 눈썹을 살짝 들며 물었다. “왜요? 제가 걱정돼서 그래요?” “손 선생님, 정말 모든 걸 포기하고, 다시 한명준으로 돌아가려고 한다면, 많은 걸 잃게 될 거예요.” 하연은 진지했다. “그렇게 안 할 테니까 걱정 마요.” 이현 역시 진지하게 답하면서 속으로 덧붙였다. ‘이게 하연 씨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길이야.’ “윗선에서는 정태산 어르신께서 뒤를 봐주실 테니까, 당신이 돌아가는 건 간단할 수도 있겠네요.” 하연의 말에 이현은 한낮의 강렬한 햇볕 아래 눈을 가늘게 뜨며 대답 없이 침묵했다. 방풍재킷을 걸친 그의 모습은 여전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정문 쪽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부동건이 고개를 돌리자, 최하연이 부상혁의 팔을 자연스럽게 끼고 등장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순간, 많은 이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렸다. 잘생긴 남자와 우아한 여자의 조합. 누가 봐도 완벽한 한 쌍이었다. ‘딱 봐도 좋은 그림이야. 저 둘은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눈길을 끌어...’ “회장님, 부상혁 대표님은 정말 복도 많으십니다. 최씨 가문의 따님과 이렇게 잘 어울리는 커플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누군가의 말에 부동건의 표정이 확 풀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묘하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부동건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피어났다. 부동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젊은 사람들이 서로 마음이 맞아 좋아하는 걸, 우리 어른들은 그저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줘야 하는 일일 뿐이지요.” “게다가 상대가 최씨 가문의 따님이라니, 정말 금상첨화가 아닙니까.” 부동건은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역시 상혁이다. 내 아들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 상혁은 오늘 이 자리에서 당당히 아버지의 체면을 세워주고 있었다. 한편, 송혜선도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방금 전까지 얼굴에 띄웠던 미소는 점점 사라져 갔고, 그녀의 시선은 어느새 하연에게 향했다. 오늘의 하연은, 나무나 예쁘고... 아니, 그냥 눈이 부실 만큼 찬란했다. 그리고 또렷한 이목구비에 윤기 흐르는 머릿결, 화사하게 피어난 얼굴빛까지. 하연의 행복함이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듯했다. 송혜선의 눈빛이 서서히 차가워졌다. ‘정다영... 그년, 나를 속였어.’ 그동안 하연 쪽에서 뭔가 반응이 있을 줄 알고 기다려 왔다. 하지만 소식은커녕, 정다영조차 자취를 감췄다. ‘다영이 걔가 하연이에게 약 먹이는 계획이 분명 실패한 거야. 그렇지 않고 선 지금 저렇게 멀쩡한 얼굴로 서 있을 수는 없어.’ 이대로 배가 불러오면, 섣불리 손도 쓸 수 없게 된다. ‘
이 질문에 송혜선은 눈을 반짝이며 부동건을 바라봤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젠 나를 당당히 소개해 줄 때가 됐겠지.’ 오늘 이 자리에서, 그녀는 부동건의 정식 아내로서 인정받기를 바라고 있었다. “회장님, 말씀 좀 해보세요?” 조금은 성급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자, 주변의 시선도 하나둘 송혜선과 부동건을 향했다. 모두 속으로는 뻔히 알고 있었다. 부동건이 과연 예전 애인을 진짜로 정실로 앉혔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했다. 부동건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숨기거나 피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담백하게 말했다. “오 회장님, 이 사람은 제 딸의 어머니입니다.” 순간, 송혜선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딸의... 어머니?’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이 살짝 흔들렸다. 금세 넘칠 듯한 와인, 애써 잡고 있는 감정. ‘지금... 이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억울함이 툭 하고 솟구쳤다. 심지어 손에 힘이 들어가며 하얗게 질린 손등이 떨렸다. 오병지는 단번에 눈치챘고, 싱긋 웃으며 더는 묻지 않았고, 대신 가볍게 말을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부 회장님, 여전히 복이 많으시네요.” 부동건은 공손하게 웃으며 송혜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 손길엔 무언의 위로가 담겨 있었다. “아닙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나중에 저와 이 사람의 결혼식엔 꼭 오셔서 축배 들어주세요.” 그 말에 송혜선의 눈이 번쩍 뜨였다. ‘결혼식...?’ 순간, 가슴이 쿵 하고 울렸다. 이어서 고개를 들며 수줍게 웃었다. “회장님...” 부동건은 말없이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더 이상의 말은 없었지만, 그 행동으로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주변의 사람들 시선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송혜선을 무시하거나 조롱하던 눈빛이, 지금은 선망과 부러움으로 가득했다. 결국, ‘부동건의 아내’라는 타이틀은 그 자체로 막대한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이름이었다.송혜선은 온
부지윤의 ‘한 달 잔치’는 그야말로 성대한 수준의 파티였다. 초대받은 인사들만 봐도, 그 위세가 느껴졌다. F국 재계의 실력자들, 정재계의 핵심 인물, 이름만 대면 아는 명문가 자제들이 대거 초청됐고, 심지어 부씨 가문 어른들에게도 한 사람도 빠짐없이 직접 청첩장을 보냈다. 이 정도면, 사실상 이 아이를 공식적으로 가문에 편입시키겠다는 의지나 다름없었다. 부동건이 이 아이에게 얼마나 애정을 집착하듯 쏟고 있는지, 이날 행사 하나로 증명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부동건은 스스로의 체면과 명예를 걸고, 딸을 세상에 내보이고 있었다. ...잔치 당일, 연회장은 유난히 붐볐다. 샹들리에의 조명이 화사하게 반짝였고, 고급스러움이 풍겨 나는 악단의 선율이 분위기를 감싸고 있었다. 송혜선은 산후조리를 마친 직후였지만, 여전히 그만의 풍채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예전보다 조금 살이 오른 듯했지만, 그 덕에 오히려 분위기가 더 너그러워 보였다. 그녀가 행사장에 들어서자, 평소 자주 어울리던 재벌가 부인들이 앞다투어 다가왔다. “혜선씨는 진짜 복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 고생 끝에 드디어 볕뜰날이 왔네요.” “부 회장님이 이렇게까지 챙기시는 거 보니까, 이제 정말 한 자리 하시겠어요.” “정말 이러다 조만간 ‘겹경사’ 나는 거 아니예요? 우리라도 미리 축하해줘야 하는 거야?” 송혜선은 그 소리에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얄미울 정도로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역시 사람은 자리가 높아야 대접 받는 거야.’ “지윤이는 회장님의 첫 딸이잖아요. 그러니까 귀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회장님이 우리 모녀를 절대 가볍게 보지 않으신다는 건, 여기 있는 분들도 느끼셨을 테고요.” 그 말에 다들 박수까지 치며 웃었다. “이제 우리도 호칭 바꿔야지, 사모님!” 누군가 먼저 그렇게 불렀고, 뒤이어 몇몇이 장난처럼 따라 불렀다. 송혜선은 그 말에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턱을 살짝 들며, 그 호칭이 제법 익숙
진윤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마침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부남준은 법을 무시하고, 사람을 죽였어요. 부씨 가문이 이 일에 개입한다면... 여론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감싸려 들면 들수록, 결국은 함께 나락으로 떨어지겠죠.” ‘이건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가문의 존망이 걸린 문제야.’ 맞은편 소파에 앉은 상혁은 다리를 꼬고, 한쪽 손으로 턱을 괸 채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눈빛엔 어떤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세속의 먼지 따윈 전혀 묻지 않은 사람처럼. 진윤의 말이 끝났지만, 상혁의 표정엔 미동 하나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부씨 가문은 항상 법의 테두리 안에서 움직여왔습니다. 그건 변하지 않습니다, 여사님.” 그는 손짓으로 테이블 위를 가리켰다. 거기엔 작은 검은색 USB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 안에... 고나희 씨가 남긴 게 있습니다. 여사님께 드리라고 하더군요.” 순간, 진윤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숨이 턱 막히는 듯한 표정으로, USB를 바라봤다. “지금... 뭐라고 하셨죠?” 그녀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희가... 뭔가를 남겼다고...?’ 사고는 너무도 갑작스러웠다. 딸의 마지막을 함께할 시간조차 없이, 그녀는 세상을 떠났고, 어떤 유언도, 한마디 말도 남기지 못한 줄 알았다. “나희... 그 애가... 무슨 말을 남겼다는 거예요...” 진윤은 입을 틀어막았다. 눈물은 이미 참을 수 없다는 듯 쏟아지려 하고 있었다. 상혁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사람이 떠난 건 바꿀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남겨진 마음은, 누군가가 반드시 전해야죠.” 그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거운 공기를 뒤로한 채, 조용히 방을 나섰다. 잠시 후.룸 안에서 낮고, 억눌렀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나희야...” 진윤은 USB를 손에 쥐고,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으로 울고 있
진윤은 송혜선이 내민 공백 수표를 내려다보며 손끝까지 떨렸다. 종이 한 장.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그녀의 심장을 조용히 갉아먹었다. ‘돈이란 게... 사람을 어디까지 비참하게 만들 수 있는 건지.’ 그녀는 허탈하게 웃었다. “돈, 참 좋은 거죠. 수많은 집이 그거 하나 때문에 무너지고, 사람 목숨도 스스럼없이 거래되고.” 그녀의 눈빛이 서서히 날카로워졌다. “고경수도 그랬어요. 결국 돈 때문에 스스로 감방에 들어갔고, 지금 당신은 그 돈으로 내 아이의 죽음을 사겠다는 거죠.” 진윤의 시선이 천천히 송혜선을 꿰뚫었다. “송 여사님의 눈엔... 돈이면 뭐든 다 해결돼요?” 송혜선은 대답하지 않았다. 진윤은 고개를 들었다. 쭉 뻗은 어깨, 흐트러지지 않은 눈빛으로 조용히 말했다. “근데, 저에게 그딴 건... 아무 의미 없어요.” 테이블 위의 수표는 그녀 눈엔 그저 휴짓조각에 불과한 쓰레기였다. ‘내 아이 이름 위에 적힌 숫자가 많을수록, 그 애는 더 억울해지는 거야.’ 그런 진윤의 단호함에, 송혜선도 이내 표정을 굳혔다. “정말 고집 세시네요, 여사님.”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조용히 진윤 쪽으로 다가섰다. 10센티미터도 채 되지 않는 거리에서, 송혜선은 하찮다는 듯이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며 진윤에게 시선을 내리꽂았다. “그 자존심,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지 볼까요?” 그 말투엔 이젠 더 이상 숨길 필요 없는 위협이 담겨 있었다. “당신에게는 지금, 아무것도 없어요. 남편은 감옥, 딸은... 하늘에 있어. 그런데도 이렇게 버티겠다고? 부씨 가문이 마음만 먹으면, 당신 같은 사람 하나쯤 사라지게 만드는 건 일도 아니에요.” 진윤은 순간 움찔했지만, 눈동자는 미동도 없이 그대로 송혜선을 바라봤다. 송혜선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참, 고경수 씨 말인데요. 그 사람, 아직 당신한테 마음 있더라. 감방에서 계속 당신 얘기만 했대요.”
“그저...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었을 뿐이에요. 여사님. 같은 여자로서, 제 처지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해해주시리라 믿어요.” 진윤은 피식, 코웃음을 쳤다. 커피잔을 천천히 들어올리더니,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 천천히 한 모금 머금었다. “이해? 아니요. 전 그런 거 몰라요.” 단칼처럼 냉정하게 잘라버린 말이었다. 그 한 마디에 송혜선의 입술이 경직되며 굳어버렸다. ‘이런, 내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아...’ 하지만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송혜선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진윤의 손등을 잡았다. “여사님... 따님 일에 대해서는, 정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윤이 빠르게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이내 터져나온 감정. “사과? 한 아이가 죽었는데, 고작 한 마디 사과로 끝내겠다고요?” “아니면... 송 여사님의 눈엔 제 딸 목숨이 그깟 아무렇게나 다뤄도 되는 값싼 거였어요?” 그 목소리는 카페 전체를 울릴 만큼 컸고, 송혜선은 순간 움찔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진윤의 눈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여사님. 흥분하지 마세요... 결국... 이 모든 건 우리 부씨 집안이... 정말 죄송합니다.” 진윤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 웃음 속에서,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결국 끌어 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웃으면서 울었다. 그 모습은 너무 아프고, 너무 무너져 있었다. 진윤은 눈물을 닦으려 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송혜선은 주섬주섬 가방에서 티슈를 꺼내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하지만 진윤은 그것조차 거부했다. “됐어요. 그런 거, 필요 없으니까.” “송 여사님, 솔직히 말해봐요 오늘 여기서 만나자고 한 것도 당신 아들 부남준이 꼬투리 잡혀서, 지금 당장 날 만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니까 이렇게 만나자고 한 거잖아요.”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 애 죽고, 그동안 단 한 번이라도 날
“닥쳐!!” 송혜선이 낮게 내뱉었다. “그 비밀, 평생 당신 뱃속에 묻어둬.”“아니면... 다시는 당신 딸 얼굴 못 볼 줄 알아.” 조봉규는 그제야 자신이 입을 잘못 놀렸다는 걸 깨달았다. 급히 손바닥으로 자기 입을 철썩 때리며 말했다. “화내지 마, 혜선아. 나도 그냥... 기분 좋아서, 그만...” “앞으로 이 집에서 그 얘긴 두 번 다시 꺼내지 않을게. 약속해.” 조봉규의 간절한 다짐에도, 송혜선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그를 한번 쏘아봤다. 곧이어, 목소리를 낮추며 화제를 돌렸다. “부동건, 딸한테 명분은 준다더니, 정작 혼인신고 얘긴 입도 안 뗐어. ‘이러다 또 마음 변하는 거 아니야?’” 그녀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안 돼. 남준이 일은 어떻게 해서라도 반드시 준비해야 해.’ 그 말엔 조봉규도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알아봤는데, 유가족 쪽에서 합의서만 받아낼 수 있으면, 그 사건도 다시 볼 여지가 있대.” 혜선의 눈이 번쩍 뜨였다. “진짜야?” “응. 듣자 하니까 고경수 와이프, 진윤... 아직 F국에 있다더라. 기회만 되면 한번 만나봐. 그쪽에서 합의서를 써주기만 하면, 다시 기회는 생길 거야.” “근데 지금 당신 산후조리 중이잖아. 몸이 먼저야.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하지만 혜선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남준이가 내 인생의 마지막 희망이야. 기회가 있다면... 어떤 수라도 써야 해.’ 며칠 후, 송혜선은 드디어 고경수의 아내 진윤과 연락이 닿았다. 하지만 의외로, 진윤은 단 한 마디 망설임 없이 만남을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평일 오전, 한산한 분위기의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커피 향이 은은하게 퍼진 실내엔 손님이 드문드문 앉아 있었고, 송혜선은 긴 트렌치코트에 머리까지 스카프로 단단히 감싸고 있었다. 밖에서는 누구도 그녀를 쉽게 알아볼 수 없게끔. 카페 입구에 들어선 그녀는 안쪽을 빠르게 훑었다. 한눈에 알아봤다. 구석 창가에 앉은, 수척한 얼굴의
조봉규의 말은 하나하나 송혜선의 마음을 쳤다. “정 안 되면, 우리도 그냥 확 뒤엎어. 어차피 잃을 게 없는 사람들이잖아. 신발 신은 놈들이야 겁낼 게 많겠지만, 우린 맨발이야.”‘맞아... 지금이라도 안 붙잡으면, 우린 끝장이야.’송혜선의 눈빛이 점점 확고해졌다. 그렇게 마음을 굳힌 채로, 그녀는 곧장 부동건을 찾아갔다.하지만 부동건은 송혜선의 말에 귀를 기울일 틈조차 없었다. 부남준의 사건이 악화로 치닫고 있었다. 갓 들어온 정보에 따르면, 결정적 증거들이 줄줄이 쏟아지고 있었고, 경찰 쪽 수사도 속도를 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건... 덮을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법 앞에선 아무리 부동건이라도 무력하군.’무거운 책임감과 죄책감이 부동건의 어깨를 짓눌렀다. ‘자식 교육을 제대로 못한 죄, 그건 부모의 몫이야...’그저 무기력하게,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 송혜선의 말은 부동건의 귀에 닿지도 않았다.그는 오히려 조용히 갓 인큐베이터에서 나온 막내딸을 품에 안았다. 부드러운 솜털이 보일 정도로 작고 여린 얼굴. 손가락 하나만 잡혀도 녹아버릴 듯한 느낌이었다.‘이 아이는... 내 마지막 기적일지도 몰라.’부동건은 딸을 안고 있을 때만큼은 세상의 복잡한 모든 것이 잠시 잊히는 듯했다. 그리고 눈가가 부드러워졌다.“딸아, 네 엄마랑 진짜 많이 닮았네. 크면 예쁘겠다... 아주.”그는 미소를 머금으며 속삭였다.“지윤이라고 이름 지었어. 복 많은 아이라고 하더라. 부씨 가문 첫 딸, 제대로 키울 거야. 우리 지윤이는, 아빠의 제일 소중한 딸이 될 거야.”‘그래... 남준이는 못 지켜도, 이 아이만큼은...’부동건의 얼굴은 어느새 기쁨으로 가득했다.하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는 송혜선의 속은 서늘했다.‘정작 내가 말하려던 건, 이게 아닌데...’그녀는 조용히 손을 뻗어 아이를 부동건의 품에서 안아올렸다.“조심해요, 아직 작아서... 그렇게 막 들면 안 돼요.”부동건은 걱정스러운 말투로 송혜선을 바라보며 말했다.“이
부동건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밝은색으로 혈기가 도는가 싶더니 이내 새파랗게 질리더니, 순식간에 붉어졌다.‘이게 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가...’조진숙은 그런 부동건의 반응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차갑고 단호한 말투로 말을 던지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섰다.“당신 입으로 한 말, 잊지 마.”철컥-곧이어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조진숙은 완전히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남겨진 부동건은 깊은숨을 내쉬었다.‘딱 한 발, 그 한 걸음이 이렇게까지 망가뜨릴 줄은 몰랐네...’하지만 그는 여전히 조진숙의 마지막 말이 담고 있던 진짜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평소처럼, 그저 ‘조심하라는 경고’ 정도로 여긴 것이다.그 후 부동건은 지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형사 전문 변호사를 찾았고, 부남준의 사건을 맡겼다. 그것뿐, 그 이상의 움직임은 없었다.소식을 들은 송혜선은 더 이상 산후조리고 뭐고 할 틈이 없었다. 벌떡 몸을 일으키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외쳤다.“남준이는 부동건 당신 아들이란 말이야. 그런데도 이 상황에서 이 사람이 저렇게 손 놓고 있는다고?”그녀에게 있어 부동건은 F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재벌이었다. 사람 하나 죽었든, 법을 어겼든, 그 모든 걸 덮는 것쯤은 그에게 있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그 정도 힘도 못 쓰는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내가 그 옆에 왜 있었겠어?’그런데도 부동건은 변호사 하나 붙인 걸로 끝이라니. 송혜선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안 돼. 내가 직접 가서 말해야겠어.”그녀가 일어나려는 순간, 조봉규가 급히 다가와 그녀를 막아섰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어조로 송혜선을 다독였다.“혜선아, 지금은 당신 몸이 먼저야. 다른 건 잠시 내려놔.”하지만 송혜선은 남자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남준이 내 아들이야. 내가 안 나서면 누가 나서? 그 애랑 나, 이 지경이 되도록 얼마나 참고 견뎠는지 몰라? 이제 와서 그냥 두라고?”송혜선은 황급히 신발을 신고, 나갈 채비를 했다. 그 옆에서 어쩔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