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도 잘 몰라요.” 정민의 권한은 고위급 기밀에 알 수 없었다. 하연은 그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증거를 정태훈에게 넘기자, 태훈이 바로 ‘까마귀’를 찾으러 갔다. 마침내 이틀도 지나지 않아 그 땅은 DS그룹의 소유가 되었다. 하지만, ‘까마귀’가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모두가 알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 일로 인해 정민도 더 이상 그곳에 있을 수 없었다. 하연이 정민을 다시 찾으러 갔을 때, 정민은 이미 그곳을 떠난 상태였다. 예전에 만났던 정민을 아는 ‘여자 동료’가 하연에게 말했다.“정민 언니... 고향으로 돌아갔어. 마치 무슨 급한 일이 있어서 도망치듯이 갔다던데. 그쪽 정민 언니의 사촌이라고 했잖아, 정말 몰랐어?” 하연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언니가 말하긴 했는데 이렇게 빨리 떠날 줄은 몰랐어요.” “정민 언니의 옛 애인 ‘까마귀’가 지금 언니를 온통 찾아다니고 있으니 빨리 도망가야지.” 하연은 그 말을 들으며 다시 한번 씁쓸하게 웃었다.“...”하연은 DL그룹 본사를 찾아갔다. 안내데스크 직원이 하연을 보고 전혀 놀라지 않으며 말했다. “최 사장님, 누구를 찾으셨나요?” 하연은 입을 열었다가 망설이며 말을 바꿨다. “부남준 상무님을 뵈러 왔어요.” 직원은 곧바로 부남준의 비서에게 연락을 취했고, 하연이는 대기실로 안내되었다. “상무님은 아직 바쁘셔서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하연은 대기실에서 부남준의 사무실을 볼 수 있었다. 그곳에는 중년 남성이 있었는데, 그는 다름 아닌 바로 하연이 그날 부씨 가문 저택의 서재에서 본 부건국이었다. 부남준은 부건국에게 친절한 듯 보였지만, 부건국은 다소 기가 죽은 모습이었다. 두 사람이 무슨 말을 나누고 있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부씨 가문 가족이 부남준을 이 정도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은 그의 권력이 점차 돌아오고 있음을 의미했고, 부남준이 DL그룹에서 차지하는 위치도 더 이상 간과할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시선을 돌린 하연은
연지는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괜찮아요, 제 잘못이에요.” 남자 직원은 바로 반발했다. “뭐가 연지 씨의 잘못이에요? 연지 씨가 뭘 잘못했는데요? 연지 씨가 피해자잖아요.” 연지는 남자 직원의 소매를 살짝 잡아당기며 조용히 말했다. “그만해요, 이분은 DS 그룹의 최하연 사장님이에요.” “최... 최...?” 남자 직원은 다시 하연을 바라보며 목소리를 한층 낮췄고, 연지를 데리고 가려 했다. “자, 내가 널 처리해 줄게요.” 이 상황이 되니 하연은 마치 권력을 휘두르는 자, 강압적인 자로 여겨지기 시작했다.하연의 머릿속이 아파지며, 그녀는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잠깐 서봐요. 황연지 씨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 여기서 딱 정확히 말해 봅시다. CCTV를 확인하면 다 알 수 있잖아요.” 연지는 사과하며 말했다. “최 사장님, 제 잘못이에요. CCTV까지는 필요 없어요. 죄송해요, 제가 당신까지 다치게 했네요.” “너...” 하연은 더 화가 났다. ‘차라리 황연지가 맞서 싸우면 모르겠지만, 이렇게 무조건 고개를 숙이며 순순히 사과하니 마치 내가 진짜 잘못한 사람처럼 보이잖아.’주변의 많은 시선들이 하연에게 집중되자, 하연은 더욱더 참을 수 없었다. “그래요. 기왕 내가 날 무서워한다면... 좋아요!! 내가 마음대로 하는 게 맞다고 치자. 아무튼 CCTV는 반드시 봐야겠어요!” 멀리서 상혁이 이쪽에서 나는 소란스러운 소리를 들었다. “저쪽에선 무슨 일이야?” 원신민이 발돋움하며 말했다. “무슨 소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층은 부남준의 영역이었다. 상혁은 입을 굳게 다물고 이쪽으로 걸어왔다.연지는 불쌍한 얼굴로, 머리에 커피가 묻어 있었다. “정말 괜찮아요...” 이때, 부남준 사람들 속에서 나와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일이야?” 하연은 남준과 마주할 생각이 없었지만, 그가 정말로 나타났다. “CCTV를 확인하면 되잖아. 확인해.”
부남준은 하연을 사무실로 끌어들인 뒤, 하연이가 믿기 힘들다는 듯 물었다. “왜 황연지를 해고한 거야?” 남준은 느긋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가 화상 입었잖아.” “내가 원하는 건 공평하고 공정한 처리야. 너의 독단적인 행동을 원한 게 아니라고.” “지금 상황에서 네 신분이 이미 밝혀졌는데, 그 사람들이 여전히 공평함을 믿을 것 같아?” 남준은 말하면서도 한 손으로는 비서에게 약상자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그는 면봉을 꺼내 하연에게 약을 발라주려고 해서 하연의 손을 억지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말이야, 최 사장님이 손을 다쳤다면, 황연지 한 명 해고하는 걸로 충분히 배상이 될 것 같아?” 하연 남준의 농담을 무시하며 말했다. “나도 일부러 황연지에게 부딪힌 게 아니야. 첫째로, 동기도 없었고, 둘째로, 내가 굳이 적을 죽이려다 내 몸도 해치는 일을 할 필요가 있을까?” 누가 더 잘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하자면, 하연이 당연히 연지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총애받았을 것이다.“바로 그 동기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네가 직원을 괴롭히는 건 너무나도 당연하고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할 거야.” 남준은 하연의 손에 약을 발라주며, 신중하게 말했다. “보통 사람들의 부유층에 대한 반감을 과소평가하지 마.” 하연은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앉아 손을 빼려 했지만, 남준은 계속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내가 듣기로는 DS그룹의 성적이 꽤 좋은데, 최 사장님의 정신이 이런 사소한 일들조차 이해하지 못하다니. 가족들은 확실히 너를 너무도 잘 보호했나 보군.” 하연은 그가 비꼬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비웃지 마.” 그녀는 대답하면서 손을 뺐다. “그러니까 왜 날 찾아왔어?”남준은 물었다.“그냥 길 지나가다가 목말라서 물 한 잔 마시러 들렀어.” 하연은 억지로 핑계를 댔지만, 남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고 웃으며 면봉을 던지고 화장실로 손을 씻으러 갔다.하연의 시선은 남준의 비서에게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하연의 몸은 완전히 굳어버렸다. 서로의 체온이 맞닿았고, 한쪽은 차갑고, 다른 쪽은 뜨거웠다. 하연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 “내 마음속에 있는 사람은 남자야, 네 그림과는 전혀 상관없어.” “그리기가 두려운 거야?” 남준은 그녀의 손을 잡고 그림 쪽으로 밀어붙였다. “그리기 두려우면, 내가 대신 그려줄까?” “날 놔!” 하연은 힘을 주어 저항하다가 잉크병을 쳐서 넘어뜨렸고, 남준은 즉각 그녀를 보호하려 하며 둘의 거리는 더 가까워졌다. 잉크는 그의 옷에 쏟아졌다. 하늘이 깜짝 놀라 숨을 들이마셨다. “상무님...” 그와 동시에, 문밖에서 낮은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연은 본능적으로 돌아보았고, 그곳에 서 있는 정다영을 보았다. 정다영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남준 씨...” 남준은 다영을 보자마자 안색이 순간에 어두워졌다. “다영 씨는 여기 왜 왔어요?” 그는 마치 무언가 방해받은 것처럼 짜증이 난 표정이었다. 다영은 선물을 들고 있었다. “이거 몸에 좋다고 우리 어머니가 남준 씨도 드셔보라고 하셨어요.”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그녀가 조심스레 선물을 내밀었다.사실 이 핑계는 다영이가 둘만의 시간을 만들기 위해 준비된 것이었지만, 자신이 들어왔을 때 다른 여자가 남준과 친밀한 화면을 목격한 것을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다.“필요 없어요. 그냥 돌아가요. 이 비서, 정다영 씨를 집까지 안전하게 모셔다드려.” “저... 남준 씨...” 다영은 말끝을 흐리며 떠나기 싫어하는 기색을 보였다. “남준 씨, 이분은 누구세요?” 하연은 남준과 엮이기 싫어 얼른 그를 밀어내고는 빠르게 나와서 말했다. “정다영 씨, 우리 나중에 개인적으로 이야기하자.” 하연이는 다영을 데리고 나가려고 했지만, 다영은 움직이려 하지 않고 눈물을 글썽이며 남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준은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나도 이따가 회의가 있어요. 먼저 옷을 갈아입고 갈
하연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멍하니 서 있었다. 다영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최씨 가문은 혼인을 통해서가 아니더라도 후손들이 영원히 번영할 수 있는 가문이었다. 마찬가지로, 상혁도 역시 그런 혼인의 필요가 없었다. 부남준은 달랐다. 그는 차남이었고, 어머니 집안의 지원이 없었기에 혼인을 통해서라도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공고히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다영에게는 이 모든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어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최하연 씨, 만약에 남준 씨를 좋아하지 않으신다면 거리를 두세요. 괜한 오해를 피하려면 말이에요.” ‘이미 오해는 깊어진 것 같아.’하연은 무력하게 생각했다. ‘내가 지금의 문제는 부남준이 나랑 거리를 두지 않으려 한다고 말할 수도 없잖아.’“정다영 씨의 뜻은 이해했습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알고 있으니, 조언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미래는 정다영 씨가 스스로 잘 판단하시길 바랍니다.” 하연이 최대한 체면을 유지하며 말했다. “하지만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부남준은 그렇게 겉보기만큼 단순한 사람이 아닙니다.” “단순하지 않다면 오히려 더 좋아요. 제가 좋아하는 사람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여자들은 강한 남자에게 끌리기 마련이다. 부남준의 성격을 마주할 때마다, 다영 역시 어느새 그의 매력에 빠져들고 말았다.둘은 주차장의 동남쪽 모퉁이에서 발생한 작은 소리를 듣지 못했다. 여자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목에는 끔찍할 정도로 붉게 번진 화상 자국이 있었다. 남자는 차 안 뒷좌석에 앉아 문을 열어두고 있었다. 그는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경멸하는 표정을 지었다. “누가 너를 시켜서 덫을 놓았냐?” “아무도 시키지 않았습니다.” 황연지가 흐느끼며 대답했다. “저는 그저 대표님과 최 사장님의 소문을 들었고, 오랫동안 지시를 받지 못해 불만이 쌓였을 뿐이에요. 그래서 일부러 덫을 놓고 복수하고 싶었던 거예요.” 이를 듣고 상혁은 고개를 돌
“이 정도의 약점을 부남준이 쉽게 너를 놓아줄 하연 없을 텐데?” “그건 제 추측일 뿐이에요!” 연지는 급히 상혁의 다리를 붙잡고 말했다. “그 재무 보고서에는 부남준과 다른 이사들, 특히 정규인과의 결탁을 증명할 수 있는 많은 세부 사항이 있어요.” 상혁은 정규인의 이름이 나오자 살짝 눈을 들었다. “어디에 있지?” “제 금고 안에 있어요.” “원신민.” 원신민이 재빨리 다가와 연지를 일으켜 세웠다. “내가 같이 가서 가져오지.” “대표님...” 상혁은 허락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연지의 머리카락을 살짝 잡아들며 라이터를 켰다. 불길이 일면서 머리카락이 재가 되어 날아갔고, 연지는 공포에 찬 표정을 지었다. 원신민이 연지의 입을 재빨리 막아 그녀가 소리 지르지 못하게 했다. 다행히 머리카락은 한 움큼만 탔을 뿐이었다. “알다시피, 황연지, 날 배신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겠지.” 연지는 공포에 질린 눈물 속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하연은 다영과 헤어진 뒤 자신의 차로 걸어가던 중, 갑자기 한 차량이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는 한 발짝 물러섰다. 마치 상혁이 항상 타고 다니고 있는 차였다. 하연의 가슴이 쿵쾅거렸다. 차 문이 열리자 운전기사가 내려왔다. “부상혁 대표님께서 모시길 원하십니다.” 하연이 입술을 굳게 다문 채로 검게 칠해진 방탄유리를 바라보았는데, 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차 안은 향이 피워져 있었고, 정신을 안정시키는 듯한 상쾌한 향이었다. 남자는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으며, 그의 잘생긴 얼굴이 희미한 조명 속에서도 돋보였다. “무슨 일로 부르셨나요?” 하연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다음 순간, 손목이 붙잡혔고, 그녀는 한순간에 상혁의 품에 안겨버렸다. 남자의 강한 향이 공기 중에 가득 퍼졌다. 그러자마자 차가 출발하면서 뒤로 밀리는 힘 때문에 하연은 더욱 상혁의 가슴에 밀착되었다. 상혁은 하연의 머리를 감싸 안으며 눈을 떴다. “내 회사
하연은 잠깐 당황했지만 곧바로 상혁의 귀에 속삭이듯 다가가며 말했다. “아직도 반응이 있네, 부 대표님은 아무나 거절하지 않는 건가요? 오늘 만약 다른 여자가 여기 앉아 있었다면...” 그녀의 농담과 향기가 귀를 간지럽히자, 상혁은 잠시 고개를 돌려 미묘하게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다른 사람은 없을 거야.” “그럼 나만?” 하연의 말에 상혁은 약간 무너지는 듯했지만 이내 그녀를 밀어내며 대꾸했다. “나의 의미는, 너도 아니야.” 하연의 얼굴에 순간 실망이 떠올랐다. 그녀는 입술을 내밀며 차 안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상혁은 잠시 침묵하며 그가 느끼던 생리적 반응이 가라앉길 기다린 후 차분히 말했다. “내려.” “당신은 의사한테 가는데, 내가 왜 내려야 해요?” “다시 붕대 싸매.” 상혁은 이 말을 던지며 차에서 내렸다. 하연도 그제야 그 의미를 깨닫고는 피식 웃으며 따라나섰다.F국에 돌아온 후 상혁의 위장병이 계속 재발하고 있었다. 불규칙한 생활과 식사가 병을 악화시켰고, 의사는 그의 상태를 보고 좋지 않은 얼굴을 했다. “부 대표님, 몸이 재산입니다. 이렇게 무리하다가는 일이 끝나기도 전에 몸이 망가집니다.” 하연은 밖에서 간호사가 다시 붕대를 감아주는 동안 그 말을 들었다. 상혁은 숨을 고르며 가볍게 대답했다. “제 몸 상태는 제가 잘 알아요. 약만 먹으면 돼요.” 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계속 잔소리를 했다. “위장은 쉬게 해야 하는데, 아플 때 약을 먹는 건 이미 늦은 겁니다. 평소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혹시 비서도 없으십니까?” 상혁도 많은 비서가 있긴 했지만, 바쁜 스케줄 때문에 제대로 된 식사를 거의 하지 못했다. 비서가 가져다준 음식은 몇 시간 동안 방치되곤 했다. 오늘도 병원에 온 것은 원신민의 강력한 요구 때문이었다.의사가 잔소리를 멈추자, 상혁은 미세하게 당황하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의사는 밖을 힐끗 보며 한마디 더 덧붙였다.“밖에 계신 아가씨는 대표님의..
하연은 말한 대로 다음 날 아침, 집에서 일하는 요리사에게 부탁해 위장에 좋은 닭죽을 끓였다. 요리사는 하연이가 이렇게 식단에 신경 쓰는 걸 처음 본 듯 의아해하며 물었다. “아가씨, 이걸 회사에 가져가실 건가요?” 하연은 조금 머쓱해하며 말했다. “내가 먹는 게 아니에요.” 요리사는 놀란 듯 물었다. “아가씨, 남에게 주는 거면, 직접 요리해 보시는 게 어때요? 남자가 감동할 거예요.” 하연 웃으며 대답했다. “그거 알아요. 근데, 시간이 좀 필요해요.” 그녀는 쑥스러워하면서도, 손에 들린 수프 냄비를 들고 바로 DL그룹으로 향했다. 마치 비밀 작전을 수행하듯, 하연은 원신민에게 말했다. “다른 사람한테 들키지 않게 해줘요.” 원신민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긁적이며 말했다. “최 사장님, 부 대표님은 아직 회의 중이신데요.” “언제 끝나요?” “아마도 두 시간은 더 걸릴 것 같습니다.” 하연 시계를 보며 말했다. “이제 점심시간이 다 됐잖아요. 이렇게 직원들까지 압박하는 거 아니에요?” 원신민은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회사 일이니까요.” 하연 한참을 생각하다가 손짓하며 말했다. “내가 너희 대표님은 밥을 먹게 할 방법이 있는데, 들어볼래요?” 원신민은 귀를 기울였다.5분 후, 비서가 회의실로 들어와서 말했다. “대표님, 문제가 생겼습니다.” 상혁은 불쾌해하며 말했다. “바로 말해.” “대표님 책상 위에 있는 백란화에 뱀이 말려들었습니다...” 회의실은 갑자기 소란스러워졌고, 몇몇이 외쳤다. “그런 건 부하 직원들이 처리하면 되지 않나? 굳이 부 대표님께서 나설 일은 아니지 않나?” 하지만 상혁의 안색은 오히려 좋지 않았다. 부동건은 난초를 매우 사랑했고, 그 백란화는 상혁이 부동건에게 물려받은 소중한 것이었다. 백란화를 돌보는 일은 상혁이 DL그룹을 물려받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머리가 아파져 오던 상혁은 잠시 쉬기로 결심하며
“당신!!!” 정규인은 이를 악물고 상혁을 노려보았지만, 결국 어쩔 도리가 없었다. “대표님, 정말 이렇게까지 하셔야만 합니까?” 정규인의 목소리에는 억울함이 섞여 있었다. 상혁은 태연하게 무시하며 차분히 말했다. “정 사장님, 남은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상혁의 기세도 날카롭고 위압적이며 가벼운 미소를 띠며 돌아서서 차가운 뒷모습을 남겼다. 오늘 정규인의 협력 논의는 완전히 결렬되었고, 수천억의 손실은 이제 발 빠르게 처리하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정규인의 다리가 휘청거렸고, 굵은 땀방울이 이마에서 떨어졌다. 비서가 급히 달려와 그를 부축하며 물었다. “사장님,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정규인은 손으로 땀을 닦아내며 상혁이 사라진 방향을 노려보았다. “내가 시킨 일은 어떻게 됐어?” “이미 사람을 보내 확인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감시해. 누가 배신했는지 밝혀내기만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바쁜 하루를 마친 하연은 회사 밖으로 나왔다. 멀리서 익숙한 남자의 모습을 발견하자 놀란 눈빛이 잠시 스쳤다. 곧바로 미소를 띤 하연은 기쁘게 뛰어가 남자의 품에 안겼다. 상혁은 하연을 받아들이며 힘껏 안아주었다. “어쩐 일이에요?” “내 약혼녀를 데리러 왔지!” 상혁의 입에서 나온 ‘약혼녀’라는 말에 하연의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오래 기다렸어요? 왜 미리 전화 안 했어요?” “바쁜 것 같아서 방해하고 싶지 않았어.” 상혁은 하연의 손을 자연스럽게 잡고 차로 향했다. 차 안은 히터가 켜져 있어 따뜻했고, 하연은 외투를 벗으며 환히 웃으며 말했다. “하경 오빠가 말하길, 크리스마스에 아린 씨에게 청혼할 계획이라던데, 우리도 축하하러 가요.” “그래.”상혁은 짧게 대답하며 바로 동의했다. 기쁨에 휩싸인 하연은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고, 상혁의 눈은 점점 깊어졌다. “자기야...” 갑자기 그는 하연을 품에 끌어안았다.
회의가 끝나고, 사람들이 하나둘 줄지어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상혁은 나가기 전, 노크하듯 책상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남준, 축하한다. 약혼, 행복하길.” 남준은 자리를 떠나지 않고 앉은 채로 고개를 들어 상혁을 바라보았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상혁은 언제나 자신감 넘치고 모든 것을 손아귀에 쥔 듯한 모습이었다. “형은 언제 형수님 댁으로 예물을 보내나요?” “다음 달. 약혼식도 다음 달로 잡았다. 그때 제수씨 데리고 와서 축하해줘.” 남준은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은 채 짧게 대답했다. “네 물론 그렇게 해야죠.” 남준의 사무실에서, 정규인은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수천억의 구멍을 제가 어떻게 메우라는 겁니까? 도대체 회장님께서 어디서 이런 소식을 들으신 거죠?” 남준은 피곤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정 사장님 주변에 배신자가 있다는 뜻이에요.” 정규인은 충격에 휩싸여 잠시 말을 잃었다. “제 주변에요?”...DS그룹 쪽에서는 하연은 요즘 신재생 에너지 프로젝트에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손이현과 자주 부딪쳤다. 늘 일부러 피했지만, 이번엔 그러지 못했다. 이현은 먼지를 뒤집어쓴 듯 급히 찾아왔고, 정태훈이 이현을 막아섰다. “한 상무님, 여기서 뭘 하십니까?” 이현은 급하게 들고 온 재킷을 벗어 손에 쥔 채,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하연을 향해 물었다. “하연 씨, 제가 들었는데, 약혼한다면서요?” 하연은 순간 멍해졌지만, 숨길 이유는 없었다. “네, 부상혁하고요.”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이현은 거의 좌절한 표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왜 저를 기다려주지 않은 거죠? 저도 충분히 하연 씨한테 어울 릴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데요.” 하연은 천천히 걸어가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 “무얼요? 부상혁과 같은 위치에 서는 걸요?” “하지만 사랑이란 건 저울과 같잖아요. 이미 한쪽으로 기울어버렸어요.”
부남준의 약혼식은 대단히 성대했다. 정씨 가문은 이 결혼을 매우 중시했기에 준비에도 열과 성을 다했다. 송혜선은 원래 약혼식에 직접 참석하려 했으나, 출발 전 넘어지는 바람에 큰 위기를 겪었다. 만약 조봉규가 곁에 없었다면 태아를 잃을 뻔했다. 부동건은 강경한 태도로 말했다. “당신은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집에서 태교나 해.” “남준이 약혼식인 큰 행사인데, 어머니로서 참석하지 않으면 말이 안 되잖아요!” 송혜선은 억울한 듯 반박했지만, 부동건은 사적인 의도가 있는 듯 대답을 피했다. “예법은 모두 갖췄어. 집사가 경험도 풍부하니 걱정하지 마. 이 정도 일은 실수 없이 처리할 거야.” 송혜선은 분노로 인해 어지러움에 휩싸일 지경이었다. 정신을 다잡은 그녀는 조봉규에게 화를 쏟아냈다. “내가 넘어진 거, 당신이 밀어서 넘어진 거 아니야?” 조봉규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 표정으로 급히 부인했다. “내가? 말도 안 돼! 내가 왜 당신한테 그런 짓을 해?” 송혜선은 이를 악물며 낮게 중얼거렸다. “참나! 그럼 분명히 누군가가 날 해하려고 하고 있다는 거잖아요. 지금은 증거가 없지만 난 절대 이대로 당하지 않을 거야!”...정씨 가문에 예물을 전달하러 갔을 때, 예법은 철저히 갖춰졌지만 부씨 가문의 두 어른은 참석하지 않았다. 정지철 부부는 속으로 불만을 품고 있었다. “남준이, 네가 아무리 DL그룹 이사회에서 하위권에 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까지 하는 건 우리를 너무 가볍게 보는 게 아니냐?” 정다영의 어머니 하미주는 불만을 숨기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남준은 얕은 미소를 지었을 뿐 대답하지 않았고, 그의 곁에 있던 집사가 대신 나섰다. “사모님께서는 태교 중이시고, 부 회장님께서는 중요한 일로 인해 참석하지 못하셨습니다. 대신 저를 통해 예를 갖추셨습니다. 결혼식 때는 꼭 참석하시겠다고 전하셨습니다.” 하미주의 불만을 눈치챈 정다영이 바로 나서서 분위기를 풀었다. “엄마, 남준 씨
“모르겠어요! 고나희가 우리와 관련된 많은 일을 알고 있었잖아요. 혹시 모든 내용들을 기록해둔 건 아닐까요? 그런 것들이 남아 있다면 우린 큰일 날 겁니다.” 정규인은 얼굴이 창백해지며 완전히 패닉 상태에 빠졌다. 그동안 둘이 손을 잡고 DL 그룹에서 상당한 부당한 이익을 취했고, 그 외에도 수많은 불법적인 흔적들이 남아있었다. 그 흔적들이 한순간에 빛을 보게 된다면, 그들에겐 끝없는 나락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상무님, 잊지 마세요. 고나희의 죽음은...” “그만해요!” 남준은 거칠게 말을 끊었다. 그의 눈에는 불꽃 같은 분노가 번뜩였고, 목소리는 한층 낮아지며 날카로워졌다. “지금 상황이 충분히 복잡합니다. 정 사장님, 더 혼란스럽게 만들고 싶습니까? 부상혁이 곧 최씨 가문의 지지를 받아 약혼하게 될 겁니다. 그러면 DL 그룹의 미래 실권자가 되는 건 이제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보아하니, 이제 우리에게는 승산이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 정규인은 그 말을 듣고 크게 숨을 들이쉬며 한 걸음 물러났다. 그의 입술이 떨리고 있었고, 두 눈에는 불안이 가득했다. “저도 더 이상 도박할 수 없어요. 최근에 제 모든 일이 폭로된 건 부상혁이 우리를 견제하려는 신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상무님, 혹시 부상혁이 이미 우리가 계획했던 모든 걸 알고 있는 게 아닐까요?” 부남준은 정규인을 쏘아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차가운 시선은 마치 단검처럼 날카롭게 빛났고, 얼굴에는 혐오와 피로가 가득 서려 있었다. “정 사장님, 그 입 잠시만이라도 좀 닫아 주실래요. 지금 우리 그렇게 여유롭게 추측이나 할 시간 같은 건 전혀 없습니다.”남준의 말에 정규인은 입술을 꾹 다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둘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은 날이 선 유리처럼 위태로웠고, 조금만 건드려도 산산이 부서질 듯했다....한낮의 겨울 햇살 아래, 남준이 흔들의자에 누워 있을 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이는 바로 정다영이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상혁과 하연의 약혼은 그렇게 결정되었다. 최씨 가문과 부씨 가문은 모두 명망 높은 집안이었다. 약혼이 결정된 이상, 번복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부씨 가문에서도 반대 의견은 없었고, 어쩌면 감히 반대할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저녁 식탁에서 상혁이 드물게 자리를 함께했다. 그는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버지, 저와 하연이 약혼하게 되었습니다.”순간 식탁 위의 젓가락들이 멈췄다. 송혜선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갑작스럽네요. 둘이 헤어졌다고 들었는데요?” 상혁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천천히 입을 닦으며 대답했다. “아... 외부 소문을 들으셨나 봅니다.” “그런 뜻이 아니야. 네가 가정을 이루고 자리 잡는 건 좋은 일이지. 그런데 네 어머님 쪽도 이미 알고 계셔? 최씨 가문에서도 반대는 없었고?” 부동건은 식탁에 앉아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말했다. “하연이는 진숙이가 키운 아이야. 진숙이도 기뻐할 일이지 반대할 일은 없을 거야. 다만 최씨 가문은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거야. 그 가문은 과거에도 항상 자신들의 가문이 주도권을 잡아오면서 살아왔지. 지금도 하민과 하연이 이끌면서 더 번창하고 있다. 네가 이런 관계를 잘 조율할 수 있겠니?”부동건은 하연에 대해 별다른 반대는 없었다. 하연은 반쯤 자신의 딸처럼 여겨졌고, 과거 두 사람을 반대한 이유는 상혁의 일에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장애물이 사라졌다면 반대할 이유도 없었다. 상혁은 단호히 말했다. “제가 하연이하고 약혼하려고 하는 건, 저희 관계가 더 나아가고 가까워지고 싶어서이지, 가문 간의 관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송혜선은 약간 날카로운 어조로 말했다. “그렇게 말은 하지만, 결혼을 하게 되면 그 관계는 불가피하게 얽히게 될거야.” 상혁은 차분히 송혜선을 바라보며 말했다. “혹시 지금 저희 약혼에 의견이 있으신가요?” 송혜선의 뒤에 서 있던 조봉규가 송혜선의 팔을 살짝 건드렸다. 그녀는 곧바로 표정을
“부 대표님, 부 대표님이 방금 말씀하신 대로라면, 유혹과 남자가 바람을 피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고 하셨죠. 그럼 대표님은요? 혹시 그런 적 있으신가요?” 뜻밖의 질문이었다. 허징인은 나이가 더 많았지만, 상혁 앞에서는 무의식적으로 존댓말을 썼다. 상혁은 미동도 없이 대답했다. “제 마음은 이미 ‘주인’이 있습니다.” 즉, 자신은 절대 바람을 피우지 않을 거라는 뜻이었다. “정규인도 저와 결혼할 때 사랑한다고 말했었죠.” ‘하지만 그 후 10여 년의 결혼 생활은 완전히 엉망이었어.’ ...지금 차 문은 열려 있었고, 바깥에서 들리는 똑딱거리는 하이힐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하연이 일을 마치고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상혁은 그녀를 힐끔 바라보았다. 문서를 들고 걸어오는 하연은 여전히 소녀와 여인의 매력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참으로 매혹적인 모습이었다. 그는 문득 말을 꺼냈다. “만약 최악의 상황에서 제가 다른 여자와 결혼하게 됐다고 하면, 그때 제가 누군가와 바람을 피운다면, 그 상대는 반드시 최하연일 거예요.” 허징인은 입을 떼려다 멈췄다. 상혁의 말투는 단호하고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요즘 들어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다. 부상혁과 최하연은 다시 화해했고, 곧 다시 함께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그리고 이제 상혁도 이 사실을 전혀 숨기려 하지 않았다. ...하연이 차에 다가왔을 때, 허징인은 이미 떠난 뒤였다. 하연은 문서를 덮으며 물었다. “무슨 얘기 했어요?” 상혁은 직접적인 대답 대신 그녀를 반쯤 안으며 말했다. “문서를 보면서 걸으면 어떻게 해. 잘 못해서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우리 회사 쪽에서 급하게 처리 일이 들어와서 어쩔 수 없었어요.” 하연은 그의 무릎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드레스는 살짝 가슴선을 드러냈고, 상혁은 장난스레 물었다. “색깔은?” 하연은 얼굴이 빨개지며 그의 손을 쳐냈다. “안 입었어요!” 상혁은 웃음을 터뜨렸다
허징인은 미소를 지었다. “부부는 원래 한 나무에 깃드는 새와 같다고들 하죠. 하지만 부 대표님도 아실 겁니다.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결혼은 사랑보다는 이익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요.” “게다가, 이런 일이 이번이 처음도 아니니까요.” ...과거에도, 정규인은 다른 여자와의 사진이 언론에 보도된 적이 있었다. 허징인은 그 뉴스를 보고 충격으로 멍해졌다. 남편은 술에 취한 채 집에 돌아왔고, 지친 얼굴로 무릎을 꿇었다. “정말로 술에 취해 작업 당한 거야. 그 여자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어. 제발 날 용서해줘, 여보.” 허징인은 한때 분노로 집 안의 모든 것을 부수며 울부짖었다. “처음 만났을 때 약속했잖아. 평생 나만 사랑해준다고!” 정규인은 말끝을 흐리며 대답했다. “너한테 잘해주려고 노력한 건 사실이야. 하지만 남자와 여자의 문제는, 특히 비즈니스 세계에서는 피하기 어렵다는 걸 이해해줘.” 그의 목소리에는 죄책감과 함께 야망이 스며들어 있었다. 결국 정규인은 다시 허징인에게 애원했다. “미안해, 여보. 정말 미안해.” 허징인은 울고불고 난리를 쳤지만, 뒤에는 가족과 양가 부모님들이 있었다. 그녀는 이혼이라는 선택지를 쉽게 꺼낼 수 없었다. 며칠 뒤, 정규인은 어렵게 말을 꺼냈다. “하나만 부탁하자. 내일 기자회견에 나와서 이 일을 해명해줬으면 해. DL그룹 본사에서도 이 사안을 설명해야 해.” 그는 체면이 필요했고, 허징인은 처음으로 남편의 불륜 문제를 공개적으로 처리했다. 그러나 그 일이 시작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 이후로도 정규인의 불륜 사건은 계속 이어졌고, 다만 언론이 아닌 그녀의 핸드폰 알림으로 조용히 찾아왔다. ...허징인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부대표님께 솔직히 말씀드리죠. 저는 정규인과 젊은 시절부터 알고 지냈습니다. 우리 둘 다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지만, 함께 DL그룹에 들어가 미래를 꿈꾸며 나아갔죠. 결혼 후 저는 가정을 위해 한 발 물러섰고, 남편은 앞에서 능숙
“정 사장님은 DL그룹의 핵심 인재입니다. 사모님께서 가족이라는 이유로 저와 정 사장님의 관계를 추측하며 선을 넘으시는 건 지나칩니다. 이제 돌아가십시오.”상혁은 단 한 번도 허징인의 말에 흔들린 적이 없었다. 차 문을 열고 뒷좌석에 앉은 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했다.“출발해.”차량이 빠르게 움직였고, 하연은 백미러 너머로 점점 멀어지는 허징인의 모습을 바라보았다.그 모습은 이내 아주 작은 점으로 사라졌다.하연은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허징인이 나중에 당신한테 증거를 보내겠죠?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성의’를 보일까요?”상혁은 미소 없이 담담하게 답했다.“나한테만 보내지 않을 거야. 아주 많은 사람들이 허징인의 ‘성의’를 확인하게 될 가능성이 크지.”...이틀 후, 서여은의 잡지에 실린 한 기사가 모든 이목을 사로잡았다.[자산 10억의 DL그룹 지사장, 불륜 의혹 제기!]기사에는 흐릿한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고, 호텔 복도에서 한 여성을 껴안고 있는 정규인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여성의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되었지만, 가까운 사람들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이 기사는 순식간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상혁은 사무실에서 분노를 터뜨리며 소리쳤다.“정 사장을 본사로 불러와. 반드시 해명을 들어야겠어.”...동남아에서 급히 귀국한 정규인은 사무실에서 굳은 얼굴로 서 있었다.“이 사진은 AI로 합성된 겁니다! 절대 제 사진이 아닙니다. 누군가 저를 모함하려고 이런 짓을 한 거예요!”상혁은 천천히 눈을 들어 정규인을 응시했다.“정 사장님, 아직도 그런 연기가 통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상혁은 서랍에서 사진 한 묶음을 꺼내어 테이블 위에 던졌다.그 사진들은 모자이크 없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이 소문이 퍼지기 전에 제가 미리 알아내 막았습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지금 언론의 반응이 이 정도로 끝났을까요? 정 사장님 우리 아버지께는 뭐라고 설명할 실 건데요?”상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규인에게 다가가며 차가
허징인의 그 말은 진윤에게 보내는 경고였다. 만약 진윤이 더 심하게 나선다면, 허징인도 이제 모든 것을 털어놓겠다는 결심으로 전면전을 선언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미였다.하연은 긴장한 표정으로 상혁의 소매를 살짝 잡았다.진윤은 자신이 함정에 빠졌음을 깨달았지만, 애써 평정을 유지하며 말했다.“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내가 아는 건, 우리 딸은 생전에 당신 같은 친구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사실뿐이에요. 그러니 지금 당장 나가주세요.”허징인은 차분하게 대응하며 소란을 피우지 않았다.“향 한 번 올리고 바로 떠나겠습니다.”진윤은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냈지만, 어떤 두려움에 사로잡힌 듯 보안팀에게 물러서라고 지시하며 허징인이 향을 올리게 했다.허징인은 향을 올리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너무 일찍 떠나버렸네요. 정말 안타깝습니다.”그 말을 들은 하연은 무의식적으로 진윤을 쳐다보았다.진윤의 손은 분노로 인해 꽉 쥐어져 있었고, 눈에는 강렬한 증오가 서려 있었다.하연은 조용히 속삭였다.“혹시 사모님이 허징인이 딸을 죽인 범인으로 의심하고 있는 걸까요?”사실 그전까지 하연도 같은 생각이었다.하지만 오늘 장례식에서 허징인이 직접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녀의 혐의를 상당 부분 씻어내는 듯 보였다.진짜 범인이라면 이렇게 당당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죄책감이 없다면 가능한 일이었다.상혁은 하연의 손을 가볍게 쥐며 안심시키듯 말했다.“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런 의심을 품는 게 당연해.”허징인은 향을 올리고 나서 더 이상 자리를 오래 지키지 않고 조용히 떠났다.상혁과 하연 역시 음식을 먹지 않고 조용히 낮은 자세로 장례식을 빠져나갔다.그러나 부상혁 대표와 최하연 사장이 함께 있는 모습은 결국 매체의 눈을 피하지 못했다. 뒷모습만 담긴 사진이었지만, 두 사람이 다시 재결합하는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부 대표님.”차 앞에서 누군가 상혁을 불렀다.원신민이 즉각 앞으로 나와 막아섰다.“허징인 씨, 지금 부 대표님께서는 바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