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하연의 몸은 완전히 굳어버렸다. 서로의 체온이 맞닿았고, 한쪽은 차갑고, 다른 쪽은 뜨거웠다. 하연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 “내 마음속에 있는 사람은 남자야, 네 그림과는 전혀 상관없어.” “그리기가 두려운 거야?” 남준은 그녀의 손을 잡고 그림 쪽으로 밀어붙였다. “그리기 두려우면, 내가 대신 그려줄까?” “날 놔!” 하연은 힘을 주어 저항하다가 잉크병을 쳐서 넘어뜨렸고, 남준은 즉각 그녀를 보호하려 하며 둘의 거리는 더 가까워졌다. 잉크는 그의 옷에 쏟아졌다. 하늘이 깜짝 놀라 숨을 들이마셨다. “상무님...” 그와 동시에, 문밖에서 낮은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연은 본능적으로 돌아보았고, 그곳에 서 있는 정다영을 보았다. 정다영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남준 씨...” 남준은 다영을 보자마자 안색이 순간에 어두워졌다. “다영 씨는 여기 왜 왔어요?” 그는 마치 무언가 방해받은 것처럼 짜증이 난 표정이었다. 다영은 선물을 들고 있었다. “이거 몸에 좋다고 우리 어머니가 남준 씨도 드셔보라고 하셨어요.”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그녀가 조심스레 선물을 내밀었다.사실 이 핑계는 다영이가 둘만의 시간을 만들기 위해 준비된 것이었지만, 자신이 들어왔을 때 다른 여자가 남준과 친밀한 화면을 목격한 것을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다.“필요 없어요. 그냥 돌아가요. 이 비서, 정다영 씨를 집까지 안전하게 모셔다드려.” “저... 남준 씨...” 다영은 말끝을 흐리며 떠나기 싫어하는 기색을 보였다. “남준 씨, 이분은 누구세요?” 하연은 남준과 엮이기 싫어 얼른 그를 밀어내고는 빠르게 나와서 말했다. “정다영 씨, 우리 나중에 개인적으로 이야기하자.” 하연이는 다영을 데리고 나가려고 했지만, 다영은 움직이려 하지 않고 눈물을 글썽이며 남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준은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나도 이따가 회의가 있어요. 먼저 옷을 갈아입고 갈
하연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멍하니 서 있었다. 다영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최씨 가문은 혼인을 통해서가 아니더라도 후손들이 영원히 번영할 수 있는 가문이었다. 마찬가지로, 상혁도 역시 그런 혼인의 필요가 없었다. 부남준은 달랐다. 그는 차남이었고, 어머니 집안의 지원이 없었기에 혼인을 통해서라도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공고히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다영에게는 이 모든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어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최하연 씨, 만약에 남준 씨를 좋아하지 않으신다면 거리를 두세요. 괜한 오해를 피하려면 말이에요.” ‘이미 오해는 깊어진 것 같아.’하연은 무력하게 생각했다. ‘내가 지금의 문제는 부남준이 나랑 거리를 두지 않으려 한다고 말할 수도 없잖아.’“정다영 씨의 뜻은 이해했습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알고 있으니, 조언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미래는 정다영 씨가 스스로 잘 판단하시길 바랍니다.” 하연이 최대한 체면을 유지하며 말했다. “하지만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부남준은 그렇게 겉보기만큼 단순한 사람이 아닙니다.” “단순하지 않다면 오히려 더 좋아요. 제가 좋아하는 사람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여자들은 강한 남자에게 끌리기 마련이다. 부남준의 성격을 마주할 때마다, 다영 역시 어느새 그의 매력에 빠져들고 말았다.둘은 주차장의 동남쪽 모퉁이에서 발생한 작은 소리를 듣지 못했다. 여자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목에는 끔찍할 정도로 붉게 번진 화상 자국이 있었다. 남자는 차 안 뒷좌석에 앉아 문을 열어두고 있었다. 그는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경멸하는 표정을 지었다. “누가 너를 시켜서 덫을 놓았냐?” “아무도 시키지 않았습니다.” 황연지가 흐느끼며 대답했다. “저는 그저 대표님과 최 사장님의 소문을 들었고, 오랫동안 지시를 받지 못해 불만이 쌓였을 뿐이에요. 그래서 일부러 덫을 놓고 복수하고 싶었던 거예요.” 이를 듣고 상혁은 고개를 돌
“이 정도의 약점을 부남준이 쉽게 너를 놓아줄 하연 없을 텐데?” “그건 제 추측일 뿐이에요!” 연지는 급히 상혁의 다리를 붙잡고 말했다. “그 재무 보고서에는 부남준과 다른 이사들, 특히 정규인과의 결탁을 증명할 수 있는 많은 세부 사항이 있어요.” 상혁은 정규인의 이름이 나오자 살짝 눈을 들었다. “어디에 있지?” “제 금고 안에 있어요.” “원신민.” 원신민이 재빨리 다가와 연지를 일으켜 세웠다. “내가 같이 가서 가져오지.” “대표님...” 상혁은 허락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연지의 머리카락을 살짝 잡아들며 라이터를 켰다. 불길이 일면서 머리카락이 재가 되어 날아갔고, 연지는 공포에 찬 표정을 지었다. 원신민이 연지의 입을 재빨리 막아 그녀가 소리 지르지 못하게 했다. 다행히 머리카락은 한 움큼만 탔을 뿐이었다. “알다시피, 황연지, 날 배신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겠지.” 연지는 공포에 질린 눈물 속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하연은 다영과 헤어진 뒤 자신의 차로 걸어가던 중, 갑자기 한 차량이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는 한 발짝 물러섰다. 마치 상혁이 항상 타고 다니고 있는 차였다. 하연의 가슴이 쿵쾅거렸다. 차 문이 열리자 운전기사가 내려왔다. “부상혁 대표님께서 모시길 원하십니다.” 하연이 입술을 굳게 다문 채로 검게 칠해진 방탄유리를 바라보았는데, 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차 안은 향이 피워져 있었고, 정신을 안정시키는 듯한 상쾌한 향이었다. 남자는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으며, 그의 잘생긴 얼굴이 희미한 조명 속에서도 돋보였다. “무슨 일로 부르셨나요?” 하연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다음 순간, 손목이 붙잡혔고, 그녀는 한순간에 상혁의 품에 안겨버렸다. 남자의 강한 향이 공기 중에 가득 퍼졌다. 그러자마자 차가 출발하면서 뒤로 밀리는 힘 때문에 하연은 더욱 상혁의 가슴에 밀착되었다. 상혁은 하연의 머리를 감싸 안으며 눈을 떴다. “내 회사
하연은 잠깐 당황했지만 곧바로 상혁의 귀에 속삭이듯 다가가며 말했다. “아직도 반응이 있네, 부 대표님은 아무나 거절하지 않는 건가요? 오늘 만약 다른 여자가 여기 앉아 있었다면...” 그녀의 농담과 향기가 귀를 간지럽히자, 상혁은 잠시 고개를 돌려 미묘하게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다른 사람은 없을 거야.” “그럼 나만?” 하연의 말에 상혁은 약간 무너지는 듯했지만 이내 그녀를 밀어내며 대꾸했다. “나의 의미는, 너도 아니야.” 하연의 얼굴에 순간 실망이 떠올랐다. 그녀는 입술을 내밀며 차 안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상혁은 잠시 침묵하며 그가 느끼던 생리적 반응이 가라앉길 기다린 후 차분히 말했다. “내려.” “당신은 의사한테 가는데, 내가 왜 내려야 해요?” “다시 붕대 싸매.” 상혁은 이 말을 던지며 차에서 내렸다. 하연도 그제야 그 의미를 깨닫고는 피식 웃으며 따라나섰다.F국에 돌아온 후 상혁의 위장병이 계속 재발하고 있었다. 불규칙한 생활과 식사가 병을 악화시켰고, 의사는 그의 상태를 보고 좋지 않은 얼굴을 했다. “부 대표님, 몸이 재산입니다. 이렇게 무리하다가는 일이 끝나기도 전에 몸이 망가집니다.” 하연은 밖에서 간호사가 다시 붕대를 감아주는 동안 그 말을 들었다. 상혁은 숨을 고르며 가볍게 대답했다. “제 몸 상태는 제가 잘 알아요. 약만 먹으면 돼요.” 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계속 잔소리를 했다. “위장은 쉬게 해야 하는데, 아플 때 약을 먹는 건 이미 늦은 겁니다. 평소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혹시 비서도 없으십니까?” 상혁도 많은 비서가 있긴 했지만, 바쁜 스케줄 때문에 제대로 된 식사를 거의 하지 못했다. 비서가 가져다준 음식은 몇 시간 동안 방치되곤 했다. 오늘도 병원에 온 것은 원신민의 강력한 요구 때문이었다.의사가 잔소리를 멈추자, 상혁은 미세하게 당황하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의사는 밖을 힐끗 보며 한마디 더 덧붙였다.“밖에 계신 아가씨는 대표님의..
하연은 말한 대로 다음 날 아침, 집에서 일하는 요리사에게 부탁해 위장에 좋은 닭죽을 끓였다. 요리사는 하연이가 이렇게 식단에 신경 쓰는 걸 처음 본 듯 의아해하며 물었다. “아가씨, 이걸 회사에 가져가실 건가요?” 하연은 조금 머쓱해하며 말했다. “내가 먹는 게 아니에요.” 요리사는 놀란 듯 물었다. “아가씨, 남에게 주는 거면, 직접 요리해 보시는 게 어때요? 남자가 감동할 거예요.” 하연 웃으며 대답했다. “그거 알아요. 근데, 시간이 좀 필요해요.” 그녀는 쑥스러워하면서도, 손에 들린 수프 냄비를 들고 바로 DL그룹으로 향했다. 마치 비밀 작전을 수행하듯, 하연은 원신민에게 말했다. “다른 사람한테 들키지 않게 해줘요.” 원신민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긁적이며 말했다. “최 사장님, 부 대표님은 아직 회의 중이신데요.” “언제 끝나요?” “아마도 두 시간은 더 걸릴 것 같습니다.” 하연 시계를 보며 말했다. “이제 점심시간이 다 됐잖아요. 이렇게 직원들까지 압박하는 거 아니에요?” 원신민은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회사 일이니까요.” 하연 한참을 생각하다가 손짓하며 말했다. “내가 너희 대표님은 밥을 먹게 할 방법이 있는데, 들어볼래요?” 원신민은 귀를 기울였다.5분 후, 비서가 회의실로 들어와서 말했다. “대표님, 문제가 생겼습니다.” 상혁은 불쾌해하며 말했다. “바로 말해.” “대표님 책상 위에 있는 백란화에 뱀이 말려들었습니다...” 회의실은 갑자기 소란스러워졌고, 몇몇이 외쳤다. “그런 건 부하 직원들이 처리하면 되지 않나? 굳이 부 대표님께서 나설 일은 아니지 않나?” 하지만 상혁의 안색은 오히려 좋지 않았다. 부동건은 난초를 매우 사랑했고, 그 백란화는 상혁이 부동건에게 물려받은 소중한 것이었다. 백란화를 돌보는 일은 상혁이 DL그룹을 물려받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머리가 아파져 오던 상혁은 잠시 쉬기로 결심하며
하연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원 비서한테 우유로 바꾸라고 했어용!” 상혁의 얼굴은 조금 어두워졌지만, 하연은 능숙하게 일어섰다. “나도 오후에 회의가 있어서 먼저 가야 해요. 커피는 더 이상 마시면 안 돼요. 저녁에 또 올게요.” 상혁은 여전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저녁이면 이미 퇴근했을 텐데.” “그럴 리가 있나요? 나 원 비서한테 물어봤는데... 당신은 요즘 새벽까지 매일 야근한다면서?” 하연이 문가에 서서 농담처럼 말했다. “부 대표님, 총책임자가 하는 일 정말 쉽지 않죠?” 상혁은 얼굴을 돌리며 미소를 숨겼다. “내일 당장 원신민 해고해야겠군.” ‘원 비서 감히 이렇게 빨리 날 배신했더니...’하연은 오늘도 신에너지와 관련된 회의를 준비하고 있었고, 이번에는 B시에서 온 조사팀과의 회의였다. 제대로 된 홍보팀이 없는 상황이라, 하연은 CS그룹의 몇몇 직원을 빌려와 회의를 진행했다. 그 결과, 저녁 만찬에서 성공적으로 계약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국장님,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오늘 낮잠은 잘 주무셨나요? 방은 만족하셨는지요? 만약 문제가 있었다면 제가 바로 시정하겠습니다.” 하연 웃으며 인사하며 방으로 들어섰다. 양국성은 친근하게 하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정말 만족스러웠습니다. 최 사장님께서 세심하게 신경 써주신 덕분에 일이 아주 순조로웠어요. 그리고 정태산 지사님께서도 최 사장님께 안부 꼭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한 마지막 말은 하연에게 작게 속삭였다. 하연의 얼굴에 잠시 어두운 기색이 스쳤고, 정태산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지사님께 제 안부 전해주시고, 부상혁 대표님께서도 잘 지낸다고 말씀드려주세요.” “부상혁 대표님이요?” 양국성이 놀라며 물었다. “아, 최 사장님께서 오해하신 것 같네요. 그날 제가 보고하러 갔을 때 한 검사장님도 계셨거든요. 그분이 최 사장님에 대해 언급하셨습니다.” ‘한창명? 의외의 인물이었
이현의 말을 듣고 옆에 있던 양국성도 조금 의외였다.경쟁이 격해지는 상황은 많이 봐왔지만, 이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양국성은 이현의 제안에 맞장구를 치며 웃으며 말했다.“그래요, 오늘은 제가 한턱 낼게요.”사실 이현의 정체에 대해서는 이미 소문이 퍼져 있었고, 양국성도 ‘한명준’에 대해 들은 바가 있었다.게다가 이번에 오기 전, 정태산에게도 은밀히 말을 들은 터라, 양국성은 자신의 권한 내에서 최대한 ‘한명준’을 도우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현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양국성도 이미 자신을 설득하기 시작했으니 하연은 살짝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이현을 한 번 쳐다보고 나서 대답했다. “좋습니다.” 차 안에서, 정태훈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분명히 가기 싫어하셨잖아요.” 하연이 대답했다. “한명준이 이 사업을 맡게 된 건 예측했지만, 남산을 선택할 줄은 몰랐어. 만약 내가 그때 남산 땅을 받아들였더라면, 이 사람이 어디를 선택했을지 궁금해.” 하연은 곰곰이 생각하며 말했다. “이건 혹시 속내를 감추기 위한 선전술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차에서 내리자마자, 하연이도 이현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녀는 하이힐을 신고 계단을 오르고 있었고, 이현은 손을 뒤로 살짝 뻗어 그녀를 가볍게 받쳐주었다. “이모가 이번 사업을 저한테 맡기면서, 사업하는 법을 배우게 하려는 거예요. 이제 저도 더 이상 가게만 운영하던 ‘손이현’이 아니에요.” 하연은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건 이미 알고 있어요. 다시 상기시킬 필요는 없어요.” 이현은 깊은 눈빛으로 하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하연 씨가 기억하는 손이현은 더 이상 없어요. 이제부터 돌아온 건 과거의 한명준만 있어요.” 그제야 하연이 그를 흘깃 쳐다보며 쏘아붙였다. “과거의 한명준은 의기양양하고 당당한 청년이었죠. 지금 당신의 모습이 그 당당한 청년과 닮은 게 뭐가 있어요?” 그녀가 기분이 나쁘면 말이
전용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해 문이 천천히 열리자마자 주슬기가 눈에 들어왔다.“부 대표님.” 슬기는 공손하게 인사하며 미소를 띠고 다가갔다. “우연히 지나가는 길에 들러봤는데, 이렇게 마주치다니 운이 좋네요.”상혁은 코트를 들고 약간 무심한 태도로 말했다. “무슨 일이 있나요?”“원래는 없었는데요... 지금은 저녁 식사나 함께할까 해서요. 몇 가지 상의할 일이 있거든요.” 슬기는 재빠르게 대답하면서도 적절한 거리를 유지했다.상혁은 본능적으로 거절하려다가 잠시 생각한 뒤, 뜻밖에도 승낙했다.“좋아요, 장소는 제가 정하죠.”슬기는 의아했지만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네, 좋아요.”곧 원신민이 급하게 와서 상혁의 지시를 받았다. “오늘 당장 시내에서 가장 큰 식당에 방을 예약해.”그곳의 방은 최소한 3일 전에 예약해야 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기에, 원신민은 바쁘게 움직였다. 슬기는 이 상황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의할 게 큰일은 아닌데, 이렇게 정식으로 예약할 필요는 없을 텐데요.”상혁은 태연하게 말했다. “업무 관련된 일이라면 허술하게 할 수 없죠.”상혁은 대수롭지 않게 밖으로 나갔고, 그가 탄 엘리베이터와는 다른 엘리베이터가 마침 내려오고 있었다.“부 대표님의 비서가 낯이 익어요. 어디서 본 적 있죠?” 슬기가 호기심을 보였다.이 업계에서, 특히 이사급의 비서라면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닐 것이다. 원신민은 과거에 이씨 가문의 장남을 도와주면서 정계와 조직폭력배 쪽 모두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준 인물이었다. 방을 예약하는 것은 그에게 쉬운 일이었다.그 식당의 매니저가 직접 나와 원신민을 맞이했다. “원 비서님, 이렇게 갑자기 방문해 주셔서 정말 영광입니다. 방을 예약하신다고요? 1층과 2층은 이미 만석이지만, 최상층에 있는 방은 아직 비어있습니다. 그곳을 부 대표님께 해 드리면 좋을 것 같습니다.”원신민은 상혁이 슬기와의 식사에 그렇게 화려한 공간이 필요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손으로 테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정문 쪽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부동건이 고개를 돌리자, 최하연이 부상혁의 팔을 자연스럽게 끼고 등장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순간, 많은 이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렸다. 잘생긴 남자와 우아한 여자의 조합. 누가 봐도 완벽한 한 쌍이었다. ‘딱 봐도 좋은 그림이야. 저 둘은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눈길을 끌어...’ “회장님, 부상혁 대표님은 정말 복도 많으십니다. 최씨 가문의 따님과 이렇게 잘 어울리는 커플이 어디 또 있겠습니까?” 누군가의 말에 부동건의 표정이 확 풀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미묘하던 분위기가 사라지고, 부동건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피어났다. 부동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두 사람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젊은 사람들이 서로 마음이 맞아 좋아하는 걸, 우리 어른들은 그저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줘야 하는 일일 뿐이지요.” “게다가 상대가 최씨 가문의 따님이라니, 정말 금상첨화가 아닙니까.” 부동건은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역시 상혁이다. 내 아들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 상혁은 오늘 이 자리에서 당당히 아버지의 체면을 세워주고 있었다. 한편, 송혜선도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방금 전까지 얼굴에 띄웠던 미소는 점점 사라져 갔고, 그녀의 시선은 어느새 하연에게 향했다. 오늘의 하연은, 나무나 예쁘고... 아니, 그냥 눈이 부실 만큼 찬란했다. 그리고 또렷한 이목구비에 윤기 흐르는 머릿결, 화사하게 피어난 얼굴빛까지. 하연의 행복함이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듯했다. 송혜선의 눈빛이 서서히 차가워졌다. ‘정다영... 그년, 나를 속였어.’ 그동안 하연 쪽에서 뭔가 반응이 있을 줄 알고 기다려 왔다. 하지만 소식은커녕, 정다영조차 자취를 감췄다. ‘다영이 걔가 하연이에게 약 먹이는 계획이 분명 실패한 거야. 그렇지 않고 선 지금 저렇게 멀쩡한 얼굴로 서 있을 수는 없어.’ 이대로 배가 불러오면, 섣불리 손도 쓸 수 없게 된다. ‘
이 질문에 송혜선은 눈을 반짝이며 부동건을 바라봤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젠 나를 당당히 소개해 줄 때가 됐겠지.’ 오늘 이 자리에서, 그녀는 부동건의 정식 아내로서 인정받기를 바라고 있었다. “회장님, 말씀 좀 해보세요?” 조금은 성급한 목소리로 말을 꺼내자, 주변의 시선도 하나둘 송혜선과 부동건을 향했다. 모두 속으로는 뻔히 알고 있었다. 부동건이 과연 예전 애인을 진짜로 정실로 앉혔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했다. 부동건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숨기거나 피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담백하게 말했다. “오 회장님, 이 사람은 제 딸의 어머니입니다.” 순간, 송혜선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딸의... 어머니?’ 손에 들고 있던 와인 잔이 살짝 흔들렸다. 금세 넘칠 듯한 와인, 애써 잡고 있는 감정. ‘지금... 이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억울함이 툭 하고 솟구쳤다. 심지어 손에 힘이 들어가며 하얗게 질린 손등이 떨렸다. 오병지는 단번에 눈치챘고, 싱긋 웃으며 더는 묻지 않았고, 대신 가볍게 말을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부 회장님, 여전히 복이 많으시네요.” 부동건은 공손하게 웃으며 송혜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 손길엔 무언의 위로가 담겨 있었다. “아닙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나중에 저와 이 사람의 결혼식엔 꼭 오셔서 축배 들어주세요.” 그 말에 송혜선의 눈이 번쩍 뜨였다. ‘결혼식...?’ 순간, 가슴이 쿵 하고 울렸다. 이어서 고개를 들며 수줍게 웃었다. “회장님...” 부동건은 말없이 그녀를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더 이상의 말은 없었지만, 그 행동으로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주변의 사람들 시선이 바뀌었다. 예전에는 송혜선을 무시하거나 조롱하던 눈빛이, 지금은 선망과 부러움으로 가득했다. 결국, ‘부동건의 아내’라는 타이틀은 그 자체로 막대한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이름이었다.송혜선은 온
부지윤의 ‘한 달 잔치’는 그야말로 성대한 수준의 파티였다. 초대받은 인사들만 봐도, 그 위세가 느껴졌다. F국 재계의 실력자들, 정재계의 핵심 인물, 이름만 대면 아는 명문가 자제들이 대거 초청됐고, 심지어 부씨 가문 어른들에게도 한 사람도 빠짐없이 직접 청첩장을 보냈다. 이 정도면, 사실상 이 아이를 공식적으로 가문에 편입시키겠다는 의지나 다름없었다. 부동건이 이 아이에게 얼마나 애정을 집착하듯 쏟고 있는지, 이날 행사 하나로 증명되고 있었다.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부동건은 스스로의 체면과 명예를 걸고, 딸을 세상에 내보이고 있었다. ...잔치 당일, 연회장은 유난히 붐볐다. 샹들리에의 조명이 화사하게 반짝였고, 고급스러움이 풍겨 나는 악단의 선율이 분위기를 감싸고 있었다. 송혜선은 산후조리를 마친 직후였지만, 여전히 그만의 풍채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예전보다 조금 살이 오른 듯했지만, 그 덕에 오히려 분위기가 더 너그러워 보였다. 그녀가 행사장에 들어서자, 평소 자주 어울리던 재벌가 부인들이 앞다투어 다가왔다. “혜선씨는 진짜 복이 많은 사람이에요. 그 고생 끝에 드디어 볕뜰날이 왔네요.” “부 회장님이 이렇게까지 챙기시는 거 보니까, 이제 정말 한 자리 하시겠어요.” “정말 이러다 조만간 ‘겹경사’ 나는 거 아니예요? 우리라도 미리 축하해줘야 하는 거야?” 송혜선은 그 소리에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얄미울 정도로 여유롭게 미소 지었다. ‘역시 사람은 자리가 높아야 대접 받는 거야.’ “지윤이는 회장님의 첫 딸이잖아요. 그러니까 귀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회장님이 우리 모녀를 절대 가볍게 보지 않으신다는 건, 여기 있는 분들도 느끼셨을 테고요.” 그 말에 다들 박수까지 치며 웃었다. “이제 우리도 호칭 바꿔야지, 사모님!” 누군가 먼저 그렇게 불렀고, 뒤이어 몇몇이 장난처럼 따라 불렀다. 송혜선은 그 말에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턱을 살짝 들며, 그 호칭이 제법 익숙
진윤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마침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부남준은 법을 무시하고, 사람을 죽였어요. 부씨 가문이 이 일에 개입한다면... 여론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감싸려 들면 들수록, 결국은 함께 나락으로 떨어지겠죠.” ‘이건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가문의 존망이 걸린 문제야.’ 맞은편 소파에 앉은 상혁은 다리를 꼬고, 한쪽 손으로 턱을 괸 채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의 눈빛엔 어떤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세속의 먼지 따윈 전혀 묻지 않은 사람처럼. 진윤의 말이 끝났지만, 상혁의 표정엔 미동 하나 없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부씨 가문은 항상 법의 테두리 안에서 움직여왔습니다. 그건 변하지 않습니다, 여사님.” 그는 손짓으로 테이블 위를 가리켰다. 거기엔 작은 검은색 USB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 안에... 고나희 씨가 남긴 게 있습니다. 여사님께 드리라고 하더군요.” 순간, 진윤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숨이 턱 막히는 듯한 표정으로, USB를 바라봤다. “지금... 뭐라고 하셨죠?” 그녀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나희가... 뭔가를 남겼다고...?’ 사고는 너무도 갑작스러웠다. 딸의 마지막을 함께할 시간조차 없이, 그녀는 세상을 떠났고, 어떤 유언도, 한마디 말도 남기지 못한 줄 알았다. “나희... 그 애가... 무슨 말을 남겼다는 거예요...” 진윤은 입을 틀어막았다. 눈물은 이미 참을 수 없다는 듯 쏟아지려 하고 있었다. 상혁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사람이 떠난 건 바꿀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남겨진 마음은, 누군가가 반드시 전해야죠.” 그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거운 공기를 뒤로한 채, 조용히 방을 나섰다. 잠시 후.룸 안에서 낮고, 억눌렀던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나희야...” 진윤은 USB를 손에 쥐고,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으로 울고 있
진윤은 송혜선이 내민 공백 수표를 내려다보며 손끝까지 떨렸다. 종이 한 장.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그녀의 심장을 조용히 갉아먹었다. ‘돈이란 게... 사람을 어디까지 비참하게 만들 수 있는 건지.’ 그녀는 허탈하게 웃었다. “돈, 참 좋은 거죠. 수많은 집이 그거 하나 때문에 무너지고, 사람 목숨도 스스럼없이 거래되고.” 그녀의 눈빛이 서서히 날카로워졌다. “고경수도 그랬어요. 결국 돈 때문에 스스로 감방에 들어갔고, 지금 당신은 그 돈으로 내 아이의 죽음을 사겠다는 거죠.” 진윤의 시선이 천천히 송혜선을 꿰뚫었다. “송 여사님의 눈엔... 돈이면 뭐든 다 해결돼요?” 송혜선은 대답하지 않았다. 진윤은 고개를 들었다. 쭉 뻗은 어깨, 흐트러지지 않은 눈빛으로 조용히 말했다. “근데, 저에게 그딴 건... 아무 의미 없어요.” 테이블 위의 수표는 그녀 눈엔 그저 휴짓조각에 불과한 쓰레기였다. ‘내 아이 이름 위에 적힌 숫자가 많을수록, 그 애는 더 억울해지는 거야.’ 그런 진윤의 단호함에, 송혜선도 이내 표정을 굳혔다. “정말 고집 세시네요, 여사님.” 그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조용히 진윤 쪽으로 다가섰다. 10센티미터도 채 되지 않는 거리에서, 송혜선은 하찮다는 듯이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며 진윤에게 시선을 내리꽂았다. “그 자존심,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지 볼까요?” 그 말투엔 이젠 더 이상 숨길 필요 없는 위협이 담겨 있었다. “당신에게는 지금, 아무것도 없어요. 남편은 감옥, 딸은... 하늘에 있어. 그런데도 이렇게 버티겠다고? 부씨 가문이 마음만 먹으면, 당신 같은 사람 하나쯤 사라지게 만드는 건 일도 아니에요.” 진윤은 순간 움찔했지만, 눈동자는 미동도 없이 그대로 송혜선을 바라봤다. 송혜선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참, 고경수 씨 말인데요. 그 사람, 아직 당신한테 마음 있더라. 감방에서 계속 당신 얘기만 했대요.”
“그저...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었을 뿐이에요. 여사님. 같은 여자로서, 제 처지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해해주시리라 믿어요.” 진윤은 피식, 코웃음을 쳤다. 커피잔을 천천히 들어올리더니,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 천천히 한 모금 머금었다. “이해? 아니요. 전 그런 거 몰라요.” 단칼처럼 냉정하게 잘라버린 말이었다. 그 한 마디에 송혜선의 입술이 경직되며 굳어버렸다. ‘이런, 내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아...’ 하지만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송혜선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진윤의 손등을 잡았다. “여사님... 따님 일에 대해서는, 정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윤이 빠르게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이내 터져나온 감정. “사과? 한 아이가 죽었는데, 고작 한 마디 사과로 끝내겠다고요?” “아니면... 송 여사님의 눈엔 제 딸 목숨이 그깟 아무렇게나 다뤄도 되는 값싼 거였어요?” 그 목소리는 카페 전체를 울릴 만큼 컸고, 송혜선은 순간 움찔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진윤의 눈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여사님. 흥분하지 마세요... 결국... 이 모든 건 우리 부씨 집안이... 정말 죄송합니다.” 진윤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 웃음 속에서,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결국 끌어 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웃으면서 울었다. 그 모습은 너무 아프고, 너무 무너져 있었다. 진윤은 눈물을 닦으려 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송혜선은 주섬주섬 가방에서 티슈를 꺼내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하지만 진윤은 그것조차 거부했다. “됐어요. 그런 거, 필요 없으니까.” “송 여사님, 솔직히 말해봐요 오늘 여기서 만나자고 한 것도 당신 아들 부남준이 꼬투리 잡혀서, 지금 당장 날 만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니까 이렇게 만나자고 한 거잖아요.”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 애 죽고, 그동안 단 한 번이라도 날
“닥쳐!!” 송혜선이 낮게 내뱉었다. “그 비밀, 평생 당신 뱃속에 묻어둬.”“아니면... 다시는 당신 딸 얼굴 못 볼 줄 알아.” 조봉규는 그제야 자신이 입을 잘못 놀렸다는 걸 깨달았다. 급히 손바닥으로 자기 입을 철썩 때리며 말했다. “화내지 마, 혜선아. 나도 그냥... 기분 좋아서, 그만...” “앞으로 이 집에서 그 얘긴 두 번 다시 꺼내지 않을게. 약속해.” 조봉규의 간절한 다짐에도, 송혜선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그를 한번 쏘아봤다. 곧이어, 목소리를 낮추며 화제를 돌렸다. “부동건, 딸한테 명분은 준다더니, 정작 혼인신고 얘긴 입도 안 뗐어. ‘이러다 또 마음 변하는 거 아니야?’” 그녀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안 돼. 남준이 일은 어떻게 해서라도 반드시 준비해야 해.’ 그 말엔 조봉규도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알아봤는데, 유가족 쪽에서 합의서만 받아낼 수 있으면, 그 사건도 다시 볼 여지가 있대.” 혜선의 눈이 번쩍 뜨였다. “진짜야?” “응. 듣자 하니까 고경수 와이프, 진윤... 아직 F국에 있다더라. 기회만 되면 한번 만나봐. 그쪽에서 합의서를 써주기만 하면, 다시 기회는 생길 거야.” “근데 지금 당신 산후조리 중이잖아. 몸이 먼저야. 너무 무리하지는 말고...” 하지만 혜선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남준이가 내 인생의 마지막 희망이야. 기회가 있다면... 어떤 수라도 써야 해.’ 며칠 후, 송혜선은 드디어 고경수의 아내 진윤과 연락이 닿았다. 하지만 의외로, 진윤은 단 한 마디 망설임 없이 만남을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평일 오전, 한산한 분위기의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커피 향이 은은하게 퍼진 실내엔 손님이 드문드문 앉아 있었고, 송혜선은 긴 트렌치코트에 머리까지 스카프로 단단히 감싸고 있었다. 밖에서는 누구도 그녀를 쉽게 알아볼 수 없게끔. 카페 입구에 들어선 그녀는 안쪽을 빠르게 훑었다. 한눈에 알아봤다. 구석 창가에 앉은, 수척한 얼굴의
조봉규의 말은 하나하나 송혜선의 마음을 쳤다. “정 안 되면, 우리도 그냥 확 뒤엎어. 어차피 잃을 게 없는 사람들이잖아. 신발 신은 놈들이야 겁낼 게 많겠지만, 우린 맨발이야.”‘맞아... 지금이라도 안 붙잡으면, 우린 끝장이야.’송혜선의 눈빛이 점점 확고해졌다. 그렇게 마음을 굳힌 채로, 그녀는 곧장 부동건을 찾아갔다.하지만 부동건은 송혜선의 말에 귀를 기울일 틈조차 없었다. 부남준의 사건이 악화로 치닫고 있었다. 갓 들어온 정보에 따르면, 결정적 증거들이 줄줄이 쏟아지고 있었고, 경찰 쪽 수사도 속도를 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건... 덮을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법 앞에선 아무리 부동건이라도 무력하군.’무거운 책임감과 죄책감이 부동건의 어깨를 짓눌렀다. ‘자식 교육을 제대로 못한 죄, 그건 부모의 몫이야...’그저 무기력하게, 결과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 송혜선의 말은 부동건의 귀에 닿지도 않았다.그는 오히려 조용히 갓 인큐베이터에서 나온 막내딸을 품에 안았다. 부드러운 솜털이 보일 정도로 작고 여린 얼굴. 손가락 하나만 잡혀도 녹아버릴 듯한 느낌이었다.‘이 아이는... 내 마지막 기적일지도 몰라.’부동건은 딸을 안고 있을 때만큼은 세상의 복잡한 모든 것이 잠시 잊히는 듯했다. 그리고 눈가가 부드러워졌다.“딸아, 네 엄마랑 진짜 많이 닮았네. 크면 예쁘겠다... 아주.”그는 미소를 머금으며 속삭였다.“지윤이라고 이름 지었어. 복 많은 아이라고 하더라. 부씨 가문 첫 딸, 제대로 키울 거야. 우리 지윤이는, 아빠의 제일 소중한 딸이 될 거야.”‘그래... 남준이는 못 지켜도, 이 아이만큼은...’부동건의 얼굴은 어느새 기쁨으로 가득했다.하지만 그 모습을 바라보는 송혜선의 속은 서늘했다.‘정작 내가 말하려던 건, 이게 아닌데...’그녀는 조용히 손을 뻗어 아이를 부동건의 품에서 안아올렸다.“조심해요, 아직 작아서... 그렇게 막 들면 안 돼요.”부동건은 걱정스러운 말투로 송혜선을 바라보며 말했다.“이
부동건의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밝은색으로 혈기가 도는가 싶더니 이내 새파랗게 질리더니, 순식간에 붉어졌다.‘이게 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가...’조진숙은 그런 부동건의 반응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차갑고 단호한 말투로 말을 던지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섰다.“당신 입으로 한 말, 잊지 마.”철컥-곧이어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조진숙은 완전히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남겨진 부동건은 깊은숨을 내쉬었다.‘딱 한 발, 그 한 걸음이 이렇게까지 망가뜨릴 줄은 몰랐네...’하지만 그는 여전히 조진숙의 마지막 말이 담고 있던 진짜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냥 평소처럼, 그저 ‘조심하라는 경고’ 정도로 여긴 것이다.그 후 부동건은 지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형사 전문 변호사를 찾았고, 부남준의 사건을 맡겼다. 그것뿐, 그 이상의 움직임은 없었다.소식을 들은 송혜선은 더 이상 산후조리고 뭐고 할 틈이 없었다. 벌떡 몸을 일으키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외쳤다.“남준이는 부동건 당신 아들이란 말이야. 그런데도 이 상황에서 이 사람이 저렇게 손 놓고 있는다고?”그녀에게 있어 부동건은 F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재벌이었다. 사람 하나 죽었든, 법을 어겼든, 그 모든 걸 덮는 것쯤은 그에게 있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그 정도 힘도 못 쓰는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내가 그 옆에 왜 있었겠어?’그런데도 부동건은 변호사 하나 붙인 걸로 끝이라니. 송혜선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안 돼. 내가 직접 가서 말해야겠어.”그녀가 일어나려는 순간, 조봉규가 급히 다가와 그녀를 막아섰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어조로 송혜선을 다독였다.“혜선아, 지금은 당신 몸이 먼저야. 다른 건 잠시 내려놔.”하지만 송혜선은 남자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남준이 내 아들이야. 내가 안 나서면 누가 나서? 그 애랑 나, 이 지경이 되도록 얼마나 참고 견뎠는지 몰라? 이제 와서 그냥 두라고?”송혜선은 황급히 신발을 신고, 나갈 채비를 했다. 그 옆에서 어쩔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