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로비의 대형 스크린에는 이번 항공기 사고가 실시간으로 보도되고 있었다. 최하연은 세 명뿐인 생존자 중의 하나로 두 다리에 붕대를 감은 채 중환자실 병상 위에 누워 있었다.그때, 손에 들린 핸드폰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고객님께서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다음에 다시 걸어주세요.”사고가 나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남편 한서준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설마 그가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여객기 사고를 모를 일은 없었다. 사고 당시, 현장에는 승객들의 시신이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그녀는 사고의 충격과 죽음의 공포로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결혼한 지 3년이나 되었지만 남편은 그녀가 가장 필요로 하는 순간 연락이 되지 않았다.하연은 마음 한 켠이 시려 오는 것을 느꼈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들려왔다. 한참이나 멍하게 있던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발신자를 확인했다. 할머니였다. 하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여보세요.”그녀가 잔뜩 쉰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전화 건너편에서 친절하면서도 연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우리 하연이, 이 할미가 너 때문에 너무 놀라서 제 명에 못 죽겠구나. 어디 다친 데는 없고? 서준이가 옆에 같이 있지?]강영숙은 서준의 친할머니로 한씨 집안 사람들 중 유일하게 하연에게 관심을 갖는 분이었다. “서준 씨는...”머뭇거리는 그녀의 말에 강영숙이 무언가를 눈치 챈 듯했다. [이런 정신 나간 놈을 봤나! 비서로 또 아내로, 해외 출장간 남편 일을 다 봐주고 있는데 이렇게 큰 사고가 터졌는데도 코빼기도 안보여? 기다려봐라! 이 할미가 정신나간 그 녀석을 가만 두나!]그녀가 다시 물었다.[지금 어느 병원에 있어? 집사를 보낼 테니 기다리렴!]하연이 병원 주소를 알려주자 강영숙은 전화를 끊었다.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하연은 두 달 전, 1주일 정도 출장 일정이 잡혀 있던 한서준의 일정보고서가 생각났다.핸드폰을 쥐고 있는 그녀의 손이 떨려왔다.‘그 때 생긴 아이인 거야?’그녀는 한서준의 숨겨진 아내로 오래 전부터 비밀계약을 맺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껏 남편의 스캔들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한서준 사장이 여자친구에게 참 각별한 것 같아... 저 여자는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봐. 보아하니 곧 공식발표가 날 것 같은데?”“그러게. 나도 아까 검색해 봤어. 네 생각엔 저 사람이 여자친구가 맞는 것 같아?”카트를 밀고 가던 젊은 간호사가 옆에 있는 간호사에게 핸드폰 속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그녀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맞아, 맞아! 이 여자야! ST그룹 둘째 딸! 한서준이랑 너무 잘 어울리지 않아? 하늘이 맺어준 커플 같아!”두 사람은 호들갑을 떨며 반대편으로 걸어갔다.‘ST 그룹이라...’퇴원 수속을 마친 하연은 집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면서도 마음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반쯤 열린 창문 아래 핸드폰 화면의 불빛이 창백한 하연의 얼굴을 비췄다. 수 없이 검색해 봤지만 한서준과 ST 그룹과의 연관성은 전혀 찾을 수 없었다.‘B시의 잘 나가는 두 명문가 집안이 이런 식으로 엮이다니 이상해.’서준의 본가에 도착하니 거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눈엣가시 같은 시누이 대신 서준의 할머니인 강영숙 여사가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우리 하연이 왔구나! 네가 복이 많아서 그 큰 사고 중에도 무사했구나.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숨이 넘어갈 뻔했지 뭐냐.”“할머니, 전 괜찮아요.”하연은 올라가 쉬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웃으며 말했다.“할머니, 사실 저 좀 피곤해요.”“그래, 그래. 얼른 올라가서 쉬어라. 서준이한테 연락해 놨으니까 곧 올 거다.” 하연은 몸을 숙이는 순간 심한 통증이 몰려와 얼굴이 일그러졌다.강영숙은 하연이 괴로워하는 모습의 이유가 서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연의 머릿속에 서준의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당신이랑 그 여자, 대체 언제부터 만난 거야?”하연이 겨우 몸을 추스르며 침대에 기대앉았다.서준은 그녀가 3년전 혼인신고를 할 때보다 훨씬 말랐다는 것을 알아챘다. 어찌나 야위었던지 바람이 불면 날아가버릴 것 같았다.“당신 내 뒷조사를 한 거야?”그의 안색이 변했다.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으로 보여요? 내가 입원했던 병원에서 내 두 눈으로 당신들 두 사람을 봤어요.”그녀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지만 그 어느때보다 딱 부러지는 말투였다.순간, 하연은 심장이 찢기는 듯한 괴로움을 느꼈다.하지만 서준의 얼굴에는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그는 하연이 사고가 난 것을 알면서도 걱정해하는 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가 하는 말들을 들으며 혐오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부부로 살았던 3년이라는 시간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며느리로서 일을 열심히 했지만 하는 일 마다 트집잡는 시어머니와 자신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시누이에게 하연은 정성을 다했다. 집에서는 주부로 또 회사에서는 헌신적인 비서 역할을 도맡았다. 그녀는 서준의 할머니 강영숙 여사의 뜻에 따라 아들, 딸 잘 낳는 좋은 손자며느리가 되려고 노력했다.3년 동안 그만큼 했으면 강영숙 여사에게 가족으로서의 의리는 충분히 지킨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떠한가?3년간 하연은 서준의 몸에 손가락 하나도 댈 수가 없었다. 한 방을 쓰고 있었지만 침대는 따로 썼기 때문이었다. 하연은 밀려오는 통증을 참으며 차가운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그러다 무슨 용기가 났는지 소리를 내어 가볍게 웃었다.“당신 어머니는 내가 애도 못 낳으면서 결혼한 양심도 없는 여자라고 했죠. 그런데 지금 당신이 밖에서 다른 여자와 아이를 가진 걸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죠?”간신히 침대에 기대고 있는 그녀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하지만 고개를 꼿꼿하게 쳐들고는 그의 옷깃을 잡았다.하지만 곧바로 굵은 그의 손에 잡히고 말았다.한서준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혜경이는 내 세컨드
하연은 서준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그리고 그의 복근을 따라 내려가며 입을 맞추었다. 오랫동안 감춰온 서준의 대한 갈망 탓인지 귀밑까지 붉어졌다.그녀는 손놀림을 멈추지 않은 채 쉰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어떻게 이 집의 작은 안주인이 되었는지 잊었냐고요?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요. 제 임무는 당신의 아이를 낳는 거예요. 지금 나는 내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거고요.“어떻게 그런 말을?!”화를 내는 서준의 탄탄한 복근이 울룩불룩 움직였다.“방 안에 최음제를 좀 뿌렸어요. 조금만 참으면 곧 괜찮아질 거예요. 저는 제 임무를 위해 아이를 가지려는 것뿐이에요.”그녀는 더 대담하고 과감하게 행동했다. 전에는 한번도 보여준 적 없는 요염한 모습이었다.하연의 적극적인 도발에 그의 몸이 본능적으로 반응하기 시작했고 호흡도 거칠어졌다.그는 이것이 최음제 때문인 것을 알고는 이성을 되찾았다. 그리고는 하연의 거침없는 손을 꽉 움켜 잡았다.“최하연, 너 정말 역겨워.”서준의 말에 그녀의 끓어오르던 욕망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하연은 눈에 눈물이 고인채로 마지막으로 물었다. “나를 안는 게 그렇게 구역질나요?”“그래!”서준은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녀를 밀쳐냈다.더는 그녀와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았다. 서준은 하연이 벗긴 옷을 집어 들고 다시 입기 시작했다.그는 단추도 잠그지 않은 채 성큼성큼 걸어 나가버렸다. 방문이 ‘쾅’하고 닫히면서 주위가 다시 조용해졌다.하연은 그가 나가자 긴장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눈에는 서준을 원망하는 눈빛이 가득했다. 서준은 방을 나서며 생각했다.‘이 정도로 했으면 있던 마음도 없어지겠지...’...다음날 아침, 하연은 아직 성치 않은 다친 다리를 절뚝거리며 짐을 싼 여행가방을 끌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집안 살림을 돕는 가정부가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강영숙 여사는 새벽기도를 드리러 가느라 집을 비운 상태였다.“어머, 새언니! 죽다 살아난 지 얼마
이수애 여사는 하연이 전과는 완전히 다른 투로 말하는 것을 보고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그녀는 커다란 사파이어가 박힌 반지를 낀 손가락으로 하연을 가리켰다.“너 지금 그게 무슨 태도야!? 방금 했던 말 다시 한번 해봐!”하지만 하연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그녀를 똑바로 쳐다봤다.“민혜경이라는 여자가 집에 들어오면 그 여자한테 집안일을 시키세요. 저는 앞으로 하지 않을 거예요.” 하연은 앵두처럼 붉은 입술로 또박또박 말했다. 말을 하고 나니 속이 시원했다. 이 여사는 그녀의 말에 벌컥 화를 냈다.“너!”“엄마, 엄마!”서영이 흥분한 엄마의 팔을 붙잡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새언니 화난 거 맞죠? 어젯밤에 오빠가...”그녀는 불난 집에 부채질이라도 하려는 듯 어젯밤 일을 꺼내려고 했다. 그 모습을 보니 하연의 화를 돋우려는 의도가 충분히 보였다.이 여사는 딸의 의도를 금방 알아채고 다시 차분해졌다. 그녀는 특유의 거들먹거리는 투로 말했다. “남편 하나 붙잡지 못하는 주제에 별 억지를 다 부리네. 감히 시어머니 탓을 해?”하연은 느릿느릿 짐을 끌고 나오다가 저택 입구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심장박동이 빨라지면서 머리가 쪼개질 듯 아팠다.그녀는 고개를 돌려 욕을 퍼붓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며 차갑게 말했다.“지난 3년동안 아이가 없었던 게 다 저 때문이라고 하셨죠? 절 의심하기 전에 서준 씨에게 비뇨기과 진료를 받으라고 하는 편이 빠를 거예요. 그러면 임신이 안됐던 원인이 과연 누구 쪽에 있는지 알 수 있을 거예요.”“너, 니가 감히!”하연의 말에 이 여사와 서영 둘 다 깜짝 놀랐다. 이 여사는 머리 끝까지 화가 치밀었다.“최하연! 난 너랑 우리 서준이하고 꼭 이혼시키고 말 테니 두고 봐!”그동안 하연은 서준의 할머니 강영숙 여사와의 정을 생각해서 한씨 집안 사람들과 다툼을 피했다. 왠만해선 자기 의견을 내세우지 않고 원만하게 지내왔다.지금까지는 집안 사람들과 갈등이 생길까 봐 두려워하며 지냈지만 이제는 신경 쓰
공항 로비에 서 있던 최하연은 잠잠해진 핸드폰에 숨이 트이는 기분이었다.아마도 오랫동안 한씨 가문에게 억압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온몸이 가벼웠다.오가는 여행객들을 보던 하연은 생각에 잠겼다.‘B시를 떠난다고 생각하니 좀 싱숭생숭하네.’‘그래도 괜찮아, 더 이상 힘든 일은 없을 거야.’그녀는 단순히 한서준의 사랑이 식었다고만 생각했지만, 지금은 이 모든 게 다 그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차라리 깔끔하게 떠나주는 게 더 나아.’하연은 곧장 공항 카운터로 가서 체크인을 했고, 이미 D국행 티켓을 예매한 상태였다.처음 그녀는 가족을 떠나 신분을 숨기고 B시에 머물렀다.이번에 D국에서 열린 국제 병원 및 헬스테크 박람회 프로젝트만 아니었다면 할아버지는 그녀와 서준을 만나고 싶어하셨을 것이고, 이 프로젝트를 HT그룹을 승인하지 않았을 것이다.그러나 서준은 감사해하기는커녕 그녀 혼자 보냈다.이제 하연 차례였다.“안녕하십니까, 손님. 이 티켓은 현재 잠겨 있어 당분간 처리할 수 없습니다.”비즈니스 카운터 직원은 정중하게 거절했다.“잠겨 있다고요?”믿을 수 없던 하연은 온몸이 얼어붙었다.“그럴 리가 없는데..., 다시 한번 확인해 주시겠어요?”“회사 계좌로 예매하셨나요? 방금 환불한 것으로 확인되는데, 신분증 좀 보여주시겠습니까?”...하연은 문득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그녀는 서준의 비서였기에 회사에서 만들어준 대부분의 계좌는 HT그룹이 관리했다.그리고 신분증은...얼마전 회사 인사부에서 어떤 것을 등록해야 한다며 들고 간 상태였다.하연은 너무 긴장해 손이 덜덜 떨렸다.그녀는 상처밖에 남지 않은 이 도시를 하루 빨리 떠나고 싶어 체계적이지 못한 부분이 많았다.“죄송해요, 제가 전화해서 물어볼게요.”그녀는 가장자리로 걸어가 휴대폰을 꺼내 HT그룹 인사팀에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는 걸리지 않았고, 사용할 수 없는 번호라는 메시지만 떴다.하연은 머리속이 새하얘졌다.‘어떻게 내
한서준의 약혼자?최하연과 한서준은 비밀 결혼을 했기에 회사 사람들은 그녀가 서준의 비서라는 것만 알고 있었다.‘그럼 민혜경을 가리키는 건가?’하연의 이혼협의서에 잉크도 마르기 전에 혜경은 HT그룹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나중에 그녀는 한때 하연이 잤던 침대에서 잠을 자고 서준과 잠자리를 가지기도 할 것이다.이 생각에 하연은 손이 떨리기 시작했지만 겉으로는 담담하게 대답했다.“고마워요.”그리고 그녀는 곧바로 인사팀 사무실을 나갔다.제이슨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하연의 뒷모습을 바라봤다.‘아이고, 최 비서가 대표님을 좋아하는 건 바보가 아닌 이상 모두가 다 알 수 있는데, 해고되지 않는 게 더 이상하지.’그는 컴퓨터를 보며 말했다.“아, 또 재밌는 일이 생기겠네~”대표실이 있는 층에 도착한 하연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구동후를 만났다.“최 비서님, 오셨네요.”그녀의 캐리어를 본 동후는 틀림없이 하연이 신분증을 찾기 위해 왔다는 것을 알고 신분증이 있는 회의실을 가리켰다.“비서님 신분증은 대표님께 드렸어요. 아직 회의 중이신데, 아직 세 번째 회의예요. 급하시면 제가 말씀드릴까요?”“아뇨, 그럴 필요 없어요.”하연은 무덤덤하게 말했다.“여기서 기다릴게요.”“네, 알겠습니다. 커피 한 잔 갖다 드릴까요?”동후는 서준이 그녀를 해고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하연은 많은 일을 담당하고 있었고, 중요한 프로젝트가 많아 그녀를 해고하면 당장 적당한 직원을 찾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하연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전보다 훨씬 부드러워졌다.“K국식 핸드드립 커피예요, 배운지 얼마 안 됐지만요.”“전 정말 괜찮아요.”서준과 깔끔하게 헤어지고 싶었던 하연은 주위 사람들에게 곁을 내어주지 않았다.이 말을 들은 동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두운 얼굴로 회의실에 들어가 서준에게 서류를 건넸다.하연은 대표실 앞을 지나가다 회의실 쪽을 힐끗 쳐다봤다.문틈사이로 보인 회의실 내부에는 여러 사람이 테이블을 중심으로 앉아 있었다.그녀는
최하연은 이미 사직서를 냈으니 민혜경의 말을 들을 의무가 없어 거절했다.그리고 민혜경의 부탁은 거의 명령에 가까웠기에 그녀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하지만 하연의 신분증이 아직 한서준에게 있으니 마지막으로 잡다한 일을 맡기로 했다. 더불어 커피를 가져다주면서 자연스레 그에게 말을 걸 수도 있었다.하연은 심호흡을 한 뒤 동의했다.“알겠습니다.”“그럼 부탁할게요.”그렇게 말한 후 혜경은 화장실을 나갔다.임신 후 모성애가 그녀를 감싸는 순간이 잠시 있었지만, 여전히 혜경에게서 풍겨 나오는 자신감과 화려함은 하연과 대조적이었다.과거 하연은 부유한 집안의 그늘 아래 혜경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하지만 몇 년이 흐른 지금, 하연은 초라한 신세였다.엄청난 격차에 그녀는 제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깊은 한숨을 내쉬며 감정을 추스린 후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화장실에서 나온 하연은 탕비실로 가서 커피를 만들었다.서준은 흑설탕 3 티스푼과 우유를 넣은 아메리카노를 좋아했다.회의가 끝난 사람들은 하나 둘씩 회의실을 빠져나왔지만 그녀는 서준을 발견하지 못했다.‘벌써 대표실로 들어간 건가?’하연은 커피를 들고 대표실 문을 두드렸다.“들어오세요.”안에서 들려온 것은 서준의 차가운 목소리가 아닌 온화하고 부드러운 혜경의 목소리였다.하연은 손이 떨려 하마터면 커피를 쏟을 뻔했다.긴 고민 끝에 그녀는 마침내 용기를 내어 대표실 문을 열었다.문을 열자마자 그녀는 서준의 무릎에 앉아 그의 목을 껴안고 있는 혜경을 발견했다.어느정도 예상은 했지만 그 장면을 두 눈으로 보니 하연은 진정할 수 없었고 심장은 고통으로 뛰고 있었다.대표실로 들어온 하연을 본 혜경은 조금 당황한 듯했다.“여기에 두고 나가시면 돼요.”혜경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그녀는 다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하연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꽤 가까운 거리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서준의 눈과 마주쳤다.그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가 단숨에 자신을 삼켜버릴 것 같았다.그 순간 하연은 직감
전용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해 문이 천천히 열리자마자 주슬기가 눈에 들어왔다.“부 대표님.” 슬기는 공손하게 인사하며 미소를 띠고 다가갔다. “우연히 지나가는 길에 들러봤는데, 이렇게 마주치다니 운이 좋네요.”상혁은 코트를 들고 약간 무심한 태도로 말했다. “무슨 일이 있나요?”“원래는 없었는데요... 지금은 저녁 식사나 함께할까 해서요. 몇 가지 상의할 일이 있거든요.” 슬기는 재빠르게 대답하면서도 적절한 거리를 유지했다.상혁은 본능적으로 거절하려다가 잠시 생각한 뒤, 뜻밖에도 승낙했다.“좋아요, 장소는 제가 정하죠.”슬기는 의아했지만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네, 좋아요.”곧 원신민이 급하게 와서 상혁의 지시를 받았다. “오늘 당장 시내에서 가장 큰 식당에 방을 예약해.”그곳의 방은 최소한 3일 전에 예약해야 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기에, 원신민은 바쁘게 움직였다. 슬기는 이 상황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의할 게 큰일은 아닌데, 이렇게 정식으로 예약할 필요는 없을 텐데요.”상혁은 태연하게 말했다. “업무 관련된 일이라면 허술하게 할 수 없죠.”상혁은 대수롭지 않게 밖으로 나갔고, 그가 탄 엘리베이터와는 다른 엘리베이터가 마침 내려오고 있었다.“부 대표님의 비서가 낯이 익어요. 어디서 본 적 있죠?” 슬기가 호기심을 보였다.이 업계에서, 특히 이사급의 비서라면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닐 것이다. 원신민은 과거에 이씨 가문의 장남을 도와주면서 정계와 조직폭력배 쪽 모두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준 인물이었다. 방을 예약하는 것은 그에게 쉬운 일이었다.그 식당의 매니저가 직접 나와 원신민을 맞이했다. “원 비서님, 이렇게 갑자기 방문해 주셔서 정말 영광입니다. 방을 예약하신다고요? 1층과 2층은 이미 만석이지만, 최상층에 있는 방은 아직 비어있습니다. 그곳을 부 대표님께 해 드리면 좋을 것 같습니다.”원신민은 상혁이 슬기와의 식사에 그렇게 화려한 공간이 필요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손으로 테
이현의 말을 듣고 옆에 있던 양국성도 조금 의외였다.경쟁이 격해지는 상황은 많이 봐왔지만, 이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양국성은 이현의 제안에 맞장구를 치며 웃으며 말했다.“그래요, 오늘은 제가 한턱 낼게요.”사실 이현의 정체에 대해서는 이미 소문이 퍼져 있었고, 양국성도 ‘한명준’에 대해 들은 바가 있었다.게다가 이번에 오기 전, 정태산에게도 은밀히 말을 들은 터라, 양국성은 자신의 권한 내에서 최대한 ‘한명준’을 도우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현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양국성도 이미 자신을 설득하기 시작했으니 하연은 살짝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이현을 한 번 쳐다보고 나서 대답했다. “좋습니다.” 차 안에서, 정태훈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분명히 가기 싫어하셨잖아요.” 하연이 대답했다. “한명준이 이 사업을 맡게 된 건 예측했지만, 남산을 선택할 줄은 몰랐어. 만약 내가 그때 남산 땅을 받아들였더라면, 이 사람이 어디를 선택했을지 궁금해.” 하연은 곰곰이 생각하며 말했다. “이건 혹시 속내를 감추기 위한 선전술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차에서 내리자마자, 하연이도 이현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녀는 하이힐을 신고 계단을 오르고 있었고, 이현은 손을 뒤로 살짝 뻗어 그녀를 가볍게 받쳐주었다. “이모가 이번 사업을 저한테 맡기면서, 사업하는 법을 배우게 하려는 거예요. 이제 저도 더 이상 가게만 운영하던 ‘손이현’이 아니에요.” 하연은 앞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건 이미 알고 있어요. 다시 상기시킬 필요는 없어요.” 이현은 깊은 눈빛으로 하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하연 씨가 기억하는 손이현은 더 이상 없어요. 이제부터 돌아온 건 과거의 한명준만 있어요.” 그제야 하연이 그를 흘깃 쳐다보며 쏘아붙였다. “과거의 한명준은 의기양양하고 당당한 청년이었죠. 지금 당신의 모습이 그 당당한 청년과 닮은 게 뭐가 있어요?” 그녀가 기분이 나쁘면 말이
하연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원 비서한테 우유로 바꾸라고 했어용!” 상혁의 얼굴은 조금 어두워졌지만, 하연은 능숙하게 일어섰다. “나도 오후에 회의가 있어서 먼저 가야 해요. 커피는 더 이상 마시면 안 돼요. 저녁에 또 올게요.” 상혁은 여전히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저녁이면 이미 퇴근했을 텐데.” “그럴 리가 있나요? 나 원 비서한테 물어봤는데... 당신은 요즘 새벽까지 매일 야근한다면서?” 하연이 문가에 서서 농담처럼 말했다. “부 대표님, 총책임자가 하는 일 정말 쉽지 않죠?” 상혁은 얼굴을 돌리며 미소를 숨겼다. “내일 당장 원신민 해고해야겠군.” ‘원 비서 감히 이렇게 빨리 날 배신했더니...’하연은 오늘도 신에너지와 관련된 회의를 준비하고 있었고, 이번에는 B시에서 온 조사팀과의 회의였다. 제대로 된 홍보팀이 없는 상황이라, 하연은 CS그룹의 몇몇 직원을 빌려와 회의를 진행했다. 그 결과, 저녁 만찬에서 성공적으로 계약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국장님,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오늘 낮잠은 잘 주무셨나요? 방은 만족하셨는지요? 만약 문제가 있었다면 제가 바로 시정하겠습니다.” 하연 웃으며 인사하며 방으로 들어섰다. 양국성은 친근하게 하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정말 만족스러웠습니다. 최 사장님께서 세심하게 신경 써주신 덕분에 일이 아주 순조로웠어요. 그리고 정태산 지사님께서도 최 사장님께 안부 꼭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그가 한 마지막 말은 하연에게 작게 속삭였다. 하연의 얼굴에 잠시 어두운 기색이 스쳤고, 정태산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지사님께 제 안부 전해주시고, 부상혁 대표님께서도 잘 지낸다고 말씀드려주세요.” “부상혁 대표님이요?” 양국성이 놀라며 물었다. “아, 최 사장님께서 오해하신 것 같네요. 그날 제가 보고하러 갔을 때 한 검사장님도 계셨거든요. 그분이 최 사장님에 대해 언급하셨습니다.” ‘한창명? 의외의 인물이었
하연은 말한 대로 다음 날 아침, 집에서 일하는 요리사에게 부탁해 위장에 좋은 닭죽을 끓였다. 요리사는 하연이가 이렇게 식단에 신경 쓰는 걸 처음 본 듯 의아해하며 물었다. “아가씨, 이걸 회사에 가져가실 건가요?” 하연은 조금 머쓱해하며 말했다. “내가 먹는 게 아니에요.” 요리사는 놀란 듯 물었다. “아가씨, 남에게 주는 거면, 직접 요리해 보시는 게 어때요? 남자가 감동할 거예요.” 하연 웃으며 대답했다. “그거 알아요. 근데, 시간이 좀 필요해요.” 그녀는 쑥스러워하면서도, 손에 들린 수프 냄비를 들고 바로 DL그룹으로 향했다. 마치 비밀 작전을 수행하듯, 하연은 원신민에게 말했다. “다른 사람한테 들키지 않게 해줘요.” 원신민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긁적이며 말했다. “최 사장님, 부 대표님은 아직 회의 중이신데요.” “언제 끝나요?” “아마도 두 시간은 더 걸릴 것 같습니다.” 하연 시계를 보며 말했다. “이제 점심시간이 다 됐잖아요. 이렇게 직원들까지 압박하는 거 아니에요?” 원신민은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회사 일이니까요.” 하연 한참을 생각하다가 손짓하며 말했다. “내가 너희 대표님은 밥을 먹게 할 방법이 있는데, 들어볼래요?” 원신민은 귀를 기울였다.5분 후, 비서가 회의실로 들어와서 말했다. “대표님, 문제가 생겼습니다.” 상혁은 불쾌해하며 말했다. “바로 말해.” “대표님 책상 위에 있는 백란화에 뱀이 말려들었습니다...” 회의실은 갑자기 소란스러워졌고, 몇몇이 외쳤다. “그런 건 부하 직원들이 처리하면 되지 않나? 굳이 부 대표님께서 나설 일은 아니지 않나?” 하지만 상혁의 안색은 오히려 좋지 않았다. 부동건은 난초를 매우 사랑했고, 그 백란화는 상혁이 부동건에게 물려받은 소중한 것이었다. 백란화를 돌보는 일은 상혁이 DL그룹을 물려받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머리가 아파져 오던 상혁은 잠시 쉬기로 결심하며
하연은 잠깐 당황했지만 곧바로 상혁의 귀에 속삭이듯 다가가며 말했다. “아직도 반응이 있네, 부 대표님은 아무나 거절하지 않는 건가요? 오늘 만약 다른 여자가 여기 앉아 있었다면...” 그녀의 농담과 향기가 귀를 간지럽히자, 상혁은 잠시 고개를 돌려 미묘하게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다른 사람은 없을 거야.” “그럼 나만?” 하연의 말에 상혁은 약간 무너지는 듯했지만 이내 그녀를 밀어내며 대꾸했다. “나의 의미는, 너도 아니야.” 하연의 얼굴에 순간 실망이 떠올랐다. 그녀는 입술을 내밀며 차 안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상혁은 잠시 침묵하며 그가 느끼던 생리적 반응이 가라앉길 기다린 후 차분히 말했다. “내려.” “당신은 의사한테 가는데, 내가 왜 내려야 해요?” “다시 붕대 싸매.” 상혁은 이 말을 던지며 차에서 내렸다. 하연도 그제야 그 의미를 깨닫고는 피식 웃으며 따라나섰다.F국에 돌아온 후 상혁의 위장병이 계속 재발하고 있었다. 불규칙한 생활과 식사가 병을 악화시켰고, 의사는 그의 상태를 보고 좋지 않은 얼굴을 했다. “부 대표님, 몸이 재산입니다. 이렇게 무리하다가는 일이 끝나기도 전에 몸이 망가집니다.” 하연은 밖에서 간호사가 다시 붕대를 감아주는 동안 그 말을 들었다. 상혁은 숨을 고르며 가볍게 대답했다. “제 몸 상태는 제가 잘 알아요. 약만 먹으면 돼요.” 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계속 잔소리를 했다. “위장은 쉬게 해야 하는데, 아플 때 약을 먹는 건 이미 늦은 겁니다. 평소에 신경을 써야 합니다. 혹시 비서도 없으십니까?” 상혁도 많은 비서가 있긴 했지만, 바쁜 스케줄 때문에 제대로 된 식사를 거의 하지 못했다. 비서가 가져다준 음식은 몇 시간 동안 방치되곤 했다. 오늘도 병원에 온 것은 원신민의 강력한 요구 때문이었다.의사가 잔소리를 멈추자, 상혁은 미세하게 당황하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의사는 밖을 힐끗 보며 한마디 더 덧붙였다.“밖에 계신 아가씨는 대표님의..
“이 정도의 약점을 부남준이 쉽게 너를 놓아줄 하연 없을 텐데?” “그건 제 추측일 뿐이에요!” 연지는 급히 상혁의 다리를 붙잡고 말했다. “그 재무 보고서에는 부남준과 다른 이사들, 특히 정규인과의 결탁을 증명할 수 있는 많은 세부 사항이 있어요.” 상혁은 정규인의 이름이 나오자 살짝 눈을 들었다. “어디에 있지?” “제 금고 안에 있어요.” “원신민.” 원신민이 재빨리 다가와 연지를 일으켜 세웠다. “내가 같이 가서 가져오지.” “대표님...” 상혁은 허락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연지의 머리카락을 살짝 잡아들며 라이터를 켰다. 불길이 일면서 머리카락이 재가 되어 날아갔고, 연지는 공포에 찬 표정을 지었다. 원신민이 연지의 입을 재빨리 막아 그녀가 소리 지르지 못하게 했다. 다행히 머리카락은 한 움큼만 탔을 뿐이었다. “알다시피, 황연지, 날 배신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겠지.” 연지는 공포에 질린 눈물 속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 하연은 다영과 헤어진 뒤 자신의 차로 걸어가던 중, 갑자기 한 차량이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는 한 발짝 물러섰다. 마치 상혁이 항상 타고 다니고 있는 차였다. 하연의 가슴이 쿵쾅거렸다. 차 문이 열리자 운전기사가 내려왔다. “부상혁 대표님께서 모시길 원하십니다.” 하연이 입술을 굳게 다문 채로 검게 칠해진 방탄유리를 바라보았는데, 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차 안은 향이 피워져 있었고, 정신을 안정시키는 듯한 상쾌한 향이었다. 남자는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으며, 그의 잘생긴 얼굴이 희미한 조명 속에서도 돋보였다. “무슨 일로 부르셨나요?” 하연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다음 순간, 손목이 붙잡혔고, 그녀는 한순간에 상혁의 품에 안겨버렸다. 남자의 강한 향이 공기 중에 가득 퍼졌다. 그러자마자 차가 출발하면서 뒤로 밀리는 힘 때문에 하연은 더욱 상혁의 가슴에 밀착되었다. 상혁은 하연의 머리를 감싸 안으며 눈을 떴다. “내 회사
하연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멍하니 서 있었다. 다영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최씨 가문은 혼인을 통해서가 아니더라도 후손들이 영원히 번영할 수 있는 가문이었다. 마찬가지로, 상혁도 역시 그런 혼인의 필요가 없었다. 부남준은 달랐다. 그는 차남이었고, 어머니 집안의 지원이 없었기에 혼인을 통해서라도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공고히 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다영에게는 이 모든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어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최하연 씨, 만약에 남준 씨를 좋아하지 않으신다면 거리를 두세요. 괜한 오해를 피하려면 말이에요.” ‘이미 오해는 깊어진 것 같아.’하연은 무력하게 생각했다. ‘내가 지금의 문제는 부남준이 나랑 거리를 두지 않으려 한다고 말할 수도 없잖아.’“정다영 씨의 뜻은 이해했습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알고 있으니, 조언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미래는 정다영 씨가 스스로 잘 판단하시길 바랍니다.” 하연이 최대한 체면을 유지하며 말했다. “하지만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부남준은 그렇게 겉보기만큼 단순한 사람이 아닙니다.” “단순하지 않다면 오히려 더 좋아요. 제가 좋아하는 사람은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여자들은 강한 남자에게 끌리기 마련이다. 부남준의 성격을 마주할 때마다, 다영 역시 어느새 그의 매력에 빠져들고 말았다.둘은 주차장의 동남쪽 모퉁이에서 발생한 작은 소리를 듣지 못했다. 여자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목에는 끔찍할 정도로 붉게 번진 화상 자국이 있었다. 남자는 차 안 뒷좌석에 앉아 문을 열어두고 있었다. 그는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경멸하는 표정을 지었다. “누가 너를 시켜서 덫을 놓았냐?” “아무도 시키지 않았습니다.” 황연지가 흐느끼며 대답했다. “저는 그저 대표님과 최 사장님의 소문을 들었고, 오랫동안 지시를 받지 못해 불만이 쌓였을 뿐이에요. 그래서 일부러 덫을 놓고 복수하고 싶었던 거예요.” 이를 듣고 상혁은 고개를 돌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하연의 몸은 완전히 굳어버렸다. 서로의 체온이 맞닿았고, 한쪽은 차갑고, 다른 쪽은 뜨거웠다. 하연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 “내 마음속에 있는 사람은 남자야, 네 그림과는 전혀 상관없어.” “그리기가 두려운 거야?” 남준은 그녀의 손을 잡고 그림 쪽으로 밀어붙였다. “그리기 두려우면, 내가 대신 그려줄까?” “날 놔!” 하연은 힘을 주어 저항하다가 잉크병을 쳐서 넘어뜨렸고, 남준은 즉각 그녀를 보호하려 하며 둘의 거리는 더 가까워졌다. 잉크는 그의 옷에 쏟아졌다. 하늘이 깜짝 놀라 숨을 들이마셨다. “상무님...” 그와 동시에, 문밖에서 낮은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연은 본능적으로 돌아보았고, 그곳에 서 있는 정다영을 보았다. 정다영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남준 씨...” 남준은 다영을 보자마자 안색이 순간에 어두워졌다. “다영 씨는 여기 왜 왔어요?” 그는 마치 무언가 방해받은 것처럼 짜증이 난 표정이었다. 다영은 선물을 들고 있었다. “이거 몸에 좋다고 우리 어머니가 남준 씨도 드셔보라고 하셨어요.”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그녀가 조심스레 선물을 내밀었다.사실 이 핑계는 다영이가 둘만의 시간을 만들기 위해 준비된 것이었지만, 자신이 들어왔을 때 다른 여자가 남준과 친밀한 화면을 목격한 것을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다.“필요 없어요. 그냥 돌아가요. 이 비서, 정다영 씨를 집까지 안전하게 모셔다드려.” “저... 남준 씨...” 다영은 말끝을 흐리며 떠나기 싫어하는 기색을 보였다. “남준 씨, 이분은 누구세요?” 하연은 남준과 엮이기 싫어 얼른 그를 밀어내고는 빠르게 나와서 말했다. “정다영 씨, 우리 나중에 개인적으로 이야기하자.” 하연이는 다영을 데리고 나가려고 했지만, 다영은 움직이려 하지 않고 눈물을 글썽이며 남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준은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나도 이따가 회의가 있어요. 먼저 옷을 갈아입고 갈
부남준은 하연을 사무실로 끌어들인 뒤, 하연이가 믿기 힘들다는 듯 물었다. “왜 황연지를 해고한 거야?” 남준은 느긋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가 화상 입었잖아.” “내가 원하는 건 공평하고 공정한 처리야. 너의 독단적인 행동을 원한 게 아니라고.” “지금 상황에서 네 신분이 이미 밝혀졌는데, 그 사람들이 여전히 공평함을 믿을 것 같아?” 남준은 말하면서도 한 손으로는 비서에게 약상자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그는 면봉을 꺼내 하연에게 약을 발라주려고 해서 하연의 손을 억지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말이야, 최 사장님이 손을 다쳤다면, 황연지 한 명 해고하는 걸로 충분히 배상이 될 것 같아?” 하연 남준의 농담을 무시하며 말했다. “나도 일부러 황연지에게 부딪힌 게 아니야. 첫째로, 동기도 없었고, 둘째로, 내가 굳이 적을 죽이려다 내 몸도 해치는 일을 할 필요가 있을까?” 누가 더 잘살고 있는지에 대해 말하자면, 하연이 당연히 연지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총애받았을 것이다.“바로 그 동기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네가 직원을 괴롭히는 건 너무나도 당연하고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할 거야.” 남준은 하연의 손에 약을 발라주며, 신중하게 말했다. “보통 사람들의 부유층에 대한 반감을 과소평가하지 마.” 하연은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앉아 손을 빼려 했지만, 남준은 계속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내가 듣기로는 DS그룹의 성적이 꽤 좋은데, 최 사장님의 정신이 이런 사소한 일들조차 이해하지 못하다니. 가족들은 확실히 너를 너무도 잘 보호했나 보군.” 하연은 그가 비꼬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비웃지 마.” 그녀는 대답하면서 손을 뺐다. “그러니까 왜 날 찾아왔어?”남준은 물었다.“그냥 길 지나가다가 목말라서 물 한 잔 마시러 들렀어.” 하연은 억지로 핑계를 댔지만, 남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고 웃으며 면봉을 던지고 화장실로 손을 씻으러 갔다.하연의 시선은 남준의 비서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