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아버님께서 모임에서 돌아오시고 내가 온 것을 보시고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지영아, 회사에서 일하는 거 고려 해 볼래?”아버님이 물었다.나는 조금 놀랐고 아버님은 자신의 생각을 말씀하셨다. 알고 보니 배인호에게 화학 공장 철거를 빨리 시작하라고 지시하셨다고 한다. 아버님께서 배인호가 한 여자애를 쫓아다니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배인호를 더 바쁘게 만들 방법을 생각하신 것이다.화학 공장의 철거 및 개발은 정부와 협력하는 큰 프로젝트다. 일단 시작되면 배인호는 다른 것에 정력을 쏟을 시간이 없을 것이다.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버님이 나에게 배씨 그룹에 출근하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도 본사에서 배인호와 일을 함께 하면 나쁜 의도로 접근한 여자도 떨어져 나갈 것이로 생각하신 듯 했다.사실 나쁜 의도가 있는 것은 배인호였다. 그리고 나는 일 경험도 없고, 현재 꿈은 첼리스트였다.전생에서 시부모님은 옳고 그름이 확실했고 가치관이 확실하셨지만 이렇게 편파적이었던 적은 없었다. 내가 선물한 한 쌍의 붓꽃 비취 팔찌와 비취 펜던트의 효과가 뚜렷한 듯 했다.“지영아, 우리도 너 비즈니스에 관심 없는 거 알아. 그렇지 않으면 너희 가문이 운영하는 회사에 들어갔을 테지. 배씨 기업에 합류할 필요는 없어. 단지 나와 너희 아빠는 너희 부부가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함께 늙어 가고 외부적인 원인으로 이 결혼이 끝나지 않길 바라. 신중하게 생각하렴. 성급하게 대답하지 않아도 된단다.”어머님이 부드럽게 말씀하셨다.나는 마음속으로 감동했다. 결국 배인호를 놓아줘야겠지만 오히려 시부모님과 멀어지는 게 정말 아쉽고 걱정되었다.“알겠습니다. 어머님 아버님. 잘 생각해 보고 말씀드릴게요.”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수다를 떨다 시간이 늦어져 방으로 돌아와 쉬었다. 이 방은 배인호의 방이다. 결혼 후 우리의 침실이 되었지만, 그와 내가 함께 오는 일도 적었고 같이 자는 일도 더욱 없었다.배인호의 방은 컸다. 욕실도 딸려 있었고, 드레스 룸, 베란
내가 마침내 사레가 멈췄을 때, 배인호는 계속 나를 지긋이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손을 흔들며 윤 집사에게 이만 가보시라고 했다.식탁에는 배인호와 나 두 명만 남았고 나는 침착하게 대답했다.“너무 깊이 생각한 거 아니에요? 배씨 가문이 그렇게 큰데 당신이 3%만 줘도 나는 한평생 풍족하게 살 수 있어요.”“그래?”배인호는 대꾸할 뿐 다시 시선을 거두고 식사했다.나도 더 이상 말하면 뭔가 들킬 것 같아 침묵을 선택하고 고개를 숙여 식사를 계속했다.저녁 식사 후에 악기 방으로 가서 첼로를 켰다.지난 보름 동안 배인호와 서란의 사이가 얼마나 진전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화학 공장 프로젝트가 가동되었으니 서란이 그에게 부탁할 때가 다가온 것일까?생각이 많아 집중 못하니 계속 음을 틀렸다. 결국 멈추고 마음을 먼저 진정시켰다.다행히 배인호는 밥을 먹고 회사로 갔다. 나는 다시 아래층으로 갔을 때 집에서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나는 한숨을 쉬고 온몸을 소파에 파묻었다. 조금 피곤해서 눈을 감고 살짝 잠들었더니 머릿속에 전부 전생과 현재가 비교되어 단편적인 그림들로 가득 차 있었다.나도 모르게 소파에서 잠이 들었고 윤 집사가 저녁 식사를 하라고 깨웠을 때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약간 기운이 없고 식욕도 벌로 없었지만, 몇 입 먹고 위층으로 올라가 쉬려고 했는데 기선우의 전화에 정신이 들었다.“누나, 지금 시간 있으세요? 저희 잠깐 볼 수 있어요?”기선우의 목소리가 평소와 조금 달랐다. 꼭 화를 참으며 차분한 척하는 듯했다.나는 물었다.“그래, 지금 어디야?”“저 지금 청담동 북쪽 입구에 있어요.”기선우의 대답에 나는 놀랐다.나는 급하게 신발을 신고 차를 몰고 청담동 북쪽 입구로 향했다. 마침 기선우가 보였다. 그는 길가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내가 차를 바꿔 나를 알아보지 못한 듯했다. 나는 그의 앞에 가서 차를 세우고 창문을 내리고 말했다.“선우야, 타. 무슨 일인지 천천히 얘기하자.”기선우는 놀란 눈빛을 숨기지 못했다.
나는 두 사람의 뒤를 따라갔다. 이우범의 차에 탔고, 기선우와 나는 뒷좌석에 앉았다. 나는 그가 이리저리 흔들리지 않게 잡아 주는 역할을 했다.이우범은 내게 물었다.“그 사람 집 주소가 어디예요?”나는 고개를 저었다.“몰라요. 근처에 호텔로 가죠.”“그래요.”이우범은 대답하고 가장 가까운 호텔로 향했다. 가는 길에 나는 편하게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꼭 덜미를 잡혀 끌려가는 것 같았다.호텔에 도착했고 이우범은 호텔에 방을 잡고 기선우를 재웠다. 기선우를 눕혀 놓고 나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이우범에게 말했다.“이 선생님, 죄송하지만 다시 저 좀 데려다 주세요. 제 차는 저기 있어요.”“제가 데려다 줄게요. 술 마셨는데 음주운전 하지 말고.”이우범은 나를 째려보았다. 눈빛에 흔들림이 없었다. 이렇게 잘생긴 얼굴을 하고 왜 웃지 않는 걸까?역시 배인호의 친구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인상을 쓰는 걸 잘했다.하지만 이우범의 말이 맞았다. 음주운전은 하면 안 된다. 이 기사님에게 내일 차를 가져다 달라고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나는 고마워서 대답했다.“좋아요. 감사합니다.”다시 이우범의 차로 돌아와 나는 조수석에 앉았다. 그는 차를 안정적으로 운전했고 나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어 거의 잠이 들 뻔했다.“왜 그 사람하고 술을 마신 거예요?”이우범은 갑자기 입을 열었고 나는 순간 정신이 들었다.“전화가 와서 여자 친구하고 싸웠다고 만나자고 해서요.”나는 피곤한 눈을 비비며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당신이 생각하기에는 적절한가요?”이우범은 또 물었다. 말 속에 비난하는 느낌이 들었다.나는 웃으며 말했다.“적절하고 부적절하고가 어디 있겠어요? 내 남편이 지금 그의 여자 친구를 좋아하고, 나는 그를 위로하는 것을 책임지고, 꽤 공평하잖아요?”이 말은 분명히 이우범의 마지노선을 건드렸을 것이다. 이우범은 핸들을 돌려 길가에 차를 세웠다. 그는 나를 진지한 얼굴을 하고 쳐다보았다.“허지영 씨, 왜 이렇게 변한 겁니까? 예전에 배
집에 도착하자 배인호는 윤 집사에게 술이 깨는 차를 부탁했다. 나도 한마디 더 보탰다.“윤 집사님, 많이 끓여 주세요. 저도 마시려고요.”윤 집사는 공손하게 대답했다.“네, 사모님.”배인호는 넥타이를 풀어 소파에 던져 놓고 머리를 뒤로 젖히고 잠시 눈을 감았다. 나는 그의 턱선을 바라보다 또 목젖을 바라보다 시선이 그의 목으로 향했다.검은색 셔츠 안으로 그의 하얀 피부에 키스 마크가 보여 야릇한 느낌이 들었다. 서란이 남긴 것일까? 아니다. 불가능했다. 서란이 주도적으로 그에게 키스 마크를 남겼다면 그건 그녀가 그를 받아들였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배인호는 분명히 황홀함에 빠져 이렇게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꼭 다른 여자가 남긴 것일 거라고 나는 속으로 분석했다. 아무튼 이런 일이 한두 번 발생한 것도 아니었다. 비록 가볍게 웃어넘길 때가 많았고 마지막 단계까지 간 적은 없었다. 하지만 나의 마음속은 불편했다. 지금은 아주 좋아졌다 오히려 이후의 서란이 걱정되었다. 이런 생활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하지만 그녀를 위해 배인호는 무심코 하는 행동도 거절할 것이다. 나는 속으로 나 자신을 비웃었다. 누가 나를 이렇게 불행하게 만든 것일까? 10년 동안 배인호가 나를 위해 해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됐어요. 난 차 마시지 않을래요.”나는 기분이 좋지 않아 중얼거리며 일어나서 위층으로 올라갔다. 침실로 들어와 옷을 갈아입고 샤워하려던 참에 배인호가 문을 열었다. 나는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배인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문을 닫고 잠근 후 나에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어리둥절하고 매우 불안한 느낌을 받았다.배인호는 술을 마셨을 뿐만 아니라 약간 흥분한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숙여 뜨거운 눈빛으로 내 입술에 천천히 키스했다. 나는 그를 밀어내고 싶었지만, 그의 손은 내 허리 뒤에 있었고, 그가 꽉 잡고 있어서 헤어날 수 없었다.“배인호, 당신 뭐 하는 거야?”그의 입술이 떨어지자 나는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터질
민정이의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모든 말은 차마 내뱉을 수 없었고,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세 단어를 건넸다.“축하해!”“지영아, 혹시 며칠 후에 산부인과 검사받으러 같이 가줄 수 있어? 나 테스트기로 임신이 된 건 확인했는데 아직 병원에는 가보지 못했거든. 다른 사람들 말로는 뭐 서류도 작성해야 한다던데?”민정이는 신난 상태로 나한테 임신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털어놓았지만, 내 머릿속은 온통 허겸이 다른 여자와 바람피우고 있는 장면뿐이었다.만약 내가 지금 민정이한테 진실을 얘기해줄 경우, 두 가지 결과만 존재할 뿐이다. 하나는 분노와 상처로 유산을 선택하고 허겸과 헤어지는 것, 두 번째는 그게 감정 때문이든 애기 때문이든 허겸을 용서하는 것이다.어떤 걸 선택하든 간에 민정이한테는 큰 상처일 뿐이다.“그래, 그럼 가기 전에 미리 알려줘.”나는 혼란스러운 생각을 뒤로 하고 입에 나오는 대로 승낙한 후, 몸을 일으키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럼 푹 쉬어, 난 일이 있어서 먼저 들어가 봐야 해.”민정이는 기분 나쁘다는 듯 입을 삐쭉이며 말했다.“뭐야, 겨우 앉은 지 10분밖에 안 됐는데!”“민정아, 너 임신한 거 일단 허겸 씨한테는 말하지 말고 이제 날 잡아서 성대하게 하는 건 어때?”나는 생각하다가 다시 말했다.민정이는 그가 있다는 사실에 별 의심조차 없이 바로 대답했다.“좋아! 내가 시간 정하면 그때 다시 너희들한테 알려줄게!”나는“OK” 사인을 건네고, 빠르게 민정이의 집을 떠났다.차에 돌아와 앉은 후 나는 한참이 지나서야 마음이 안정되었다. 정아, 세희, 민정이는 내가 사랑하는 친구들이다. 나한테 있어서 그녀들은 내 가족이나 다름없다. 나는 누군가가 그녀들을 다치게 하는 건 정말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내가 떠나려 하던 찰나, 허겸의 쉐보레가 멀지 않은 곳에서 나타났다. 그는 차에서 내린 뒤 손에는 흰색 주머니를 들고 다소 급한 기색을 보였다.“허겸 씨!”나는 그를 불러 섰다.나를 발견한 허겸은
배인호는 잠시 고민하더니 답했다.“생각해 볼게.”생각해 본다고 했으니, 바로 거절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알겠어요.”커피를 다 마신 후, 배인호는 본인 차는 기사님이 운전해 갔으니, 내 차로 같이 들어가자고 했다. 나도 그 말에 반대하지는 않았다.놀랍게도 우리는 가는 길에 서로 이야기도 나눴다. 물론 대부분은 내가 과거에 자존심 없이 그를 따라다녔던 일을 위주로, 나 자신을 비웃으며 말했지만, 배인호도 예전처럼은 나를 무시하지 않았다.빌라 문 앞까지 도착한 나는 감탄하며 말했다.“우리 둘이 이렇게 편하게 대화하는 날도 있네요.”“인생 살다 보면 이런저런 일도 있기 마련이지.”배인호는 담담하게 답했다.틀린 소리는 아니다, 나도 환생했으니 말이다!나와 배인호가 같이 들어오는 모습을 본 집사들은 의아해하며, 수군거리는 듯했다. 나는 윤 집사한테 점심을 부탁한 뒤 거실에 누워 민정이의 일에 대해 생각했다.민정이한테 말할지 말지 고민하던 나는 배인호한테 시선이 멈췄고,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인호 씨,저 물어볼 거 있어요.”“뭔데.”배인호는 내 맞은편에서 경제 매거진을 펼치며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그러니까 만약에 인호 씨가 나를 많이 사랑하고, 우리 둘 사이도 아주 좋아요. 근데 아직 결혼은 하지 않은 상태예요. 그러다 어느 날 당신이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걸 제가 알아버렸어요. 저는 임신까지 한 상태고요. 만약 제가 인호 씨를 용서한다면, 인호 씨도 죄책감과 아이에 대한 배려 때문에,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는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수 있어요?”나는 그에게 물었다.민정이는 진짜 친한 친구이기 때문에 “내 친구의 일이다”라고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말하는 순간 너무 쉽게 누군지 추측할 수 있을 것이고, 그나마 나를 예시로 들면, 배인호가 별 의심은 안 할 거기 때문이다. 예전부터 나는 만약이라는 바보스러운 질문으로 배인호한테 무시도 많이 당했었지만, 예전에 나는 그런 것조차도 즐겼었다.배인호
일단 시간을 오래 끌수록 상황은 더 안 좋아지니, 민정이가 허겸의 진짜 본색을 간파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우리 그냥 사실대로 말하자, 아마 듣고 멘붕이 올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지금처럼 계속 속이는 것보다는 낫잖아.”박정아는 언제나 모든 일에 대담한 편이었고, 이번 일도 마찬가지였었다.친구 간의 연이 끊어진다고 해도, 그녀는 이렇게 했을 것이다.자세히 생각해 보면 현재로서는 이게 제일 나은 방법 같았고, 나와 세희는 서로를 바라보면서 조용히 동의했다.민정이의 일로 우리는 긴 시간 논의를 했고, 밤늦게서야 그녀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오후에 너무 오래 잠을 잔 탓에, 저녁에는 오히려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아예 영화 한 편을 찾아보기로 했다.그러다 서란이 오늘 배인호한테 걸었던 전화가 생각났다. 나는 귀신에 홀린 듯이 핸드폰을 집어 들고는 기선우의 인스타에 들어갔다.나는 서란이랑도 친구라 할 수 있지만, 그녀의 연락처는 없고 기선우것만 알고 있다. 그 둘 사이의 일부 상황은 기선우의 인스타 게시물 업로드를 통해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기선우는 마치 본인의 여자친구를 온 세상에 자랑이라도 하고 싶은 듯, 게시물을 자주 업로드 하기 때문이다.기선우의 인스타 프로필사진은 서란과의 커플 사진에서, 농구 스타의 사진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상태 메시지도 바뀌었다.「모든 게 내 부족함 때문이야.」다시 보니, 그는 이미 며칠 동안 게시물을 업로드하지 않았다.“하아.”나는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 순수한 캠퍼스 사랑이 사악한 사회의 압박으로 인해 무너져 내렸으니 말이다.나는 기선우한테 문자 한 통 보냈다.「선우야, 자?」한참이 지난 후에야 기선우한테서 답장이 왔다.「아니요.」나는 이어서 물었다.「요즘 서란이랑은 잘 만나고 있어? 인스타 프로필 사진 바뀌었네?」선우는 이번에는 칼답으로 답했다.「누나, 저 서란이랑 헤어졌어요.」이 부분은 전생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설령 나의 참여가 있다고 해도, 기선우와 서란의
나는 민정이의 이성적인 태도와 정신을 차린 모습에 한편으로는 안심이 됐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위로의 말도 이제는 너무나 빈말 같았고, 내가 그녀를 도와 해줄 수 있는 건 바로 허겸에게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이다.민정이은는 침묵해 있다가 입을 열었다.“좋아, 그 사람이 날 배신했으니 나도 더 이상 간직할 옛 감정 같은 건 없어. 지영아, 나 네가 말하는 대로 하고 싶어.”나와 민정이는 병실에서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눴고, 그 대화를 통해 허겸에 대한 몰랐던 사실도 알게 되었다.허겸의 집안 배경은 평균 이하였고, 그의 고향은 어느 작은 마을이라고 한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그는 열심히 공부했고, 머리도 똑똑한지라 좋은 대학에 입학할 수 있게 되었다. 졸업하고 그는 지금의 회사에 입사하게 됐고, 최근에는 승진할 가능성도 있다고 했다.허겸한테 있어서, 현재 직장은 그가 서울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는 버팀목과도 같은 것이기에 아주 중요했다. 만약 이 직장을 잃는다면, 그는 이것보다 더 좋은 직장은 찾기 어려울 것이다.또한 민정이 말하길, 허겸의 부모님은 겨우 50세 초반인데 현재 집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생활비는 모두 허겸이 보내는 돈에 의지한다고 했다. 거기다 민정이도 이런 일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가 돈이 부족한 거도 아니고, 미래 시부모님한테 용돈 정도 주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이렇게 이야기를 끝낸 순간, 정아가 아주머니와 세희랑 함께 도착했다.“엄마!”자신의 엄마를 보자마자, 민정이의 눈에서는 눈물이 떨어졌다.민정이의 어머니도 얼른 달려가서는 안쓰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나는 정아와 세희를 병실 밖으로 불러냈고, 방금 민정이가 결심한 태도와 허겸의 상황에 대해 모두 그녀들에게 말해주었다.내 머릿속에는 대략적인 계획이 세워지긴 했지만, 이 계획은 배인호의 도움이 필요했다.병원에서 나온 나는 배인호한테 전화를 걸었다.“인호 씨, 저 좀 도와줄 수 있어요?”나는 직접적으로 물었
허지영은 이우범이 진심으로 배인호에게 말하는 것을 들어서야 마음 깊이 있던 궁금증이 드디어 풀렸다.그녀는 이것이 배인호와 이우범이 화해하는 발판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역시 배인호의 얼굴은 점점 더 편안해져 갔다. 잠깐의 침묵이 있었던 뒤 배인호도 말했다.“그래, 우리도 영원한 친구야.” 그는 말을 끝낸 후에 허지영을 바라보았다. 허지영은 그의 행동이 맞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배인호는 이 순간이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손에 넣고 우정도 되찾은 진정한 승리자가 된 것처럼 느껴졌다. 전화를 끊은 후, 배인호는 두 팔을 벌렸고 허지영은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품에 안겼다. 그들은 서로를 꽉 껴안았다. 빈이가 로아와 승현을 데리고 이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 아빠한테 책 좀 읽어달라고 해줘요~”로아가 낮은 목소리로 빈이를 재촉하였다.세 사람은 잠을 오지 않아서 내려가 배인호더러 그들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하려고 했다.그런데 세 사람은 내려오자마자 아빠와 엄마가 행복하게 안고 있는 것을 보자 조금은 부끄러워졌다.로아와 승현 두 아이는 너무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을 감출 수 없었고 빈이는 어른이 다 되였기 때문에 괜찮았다.“유니콘, 유니콘!”승현는 유니콘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계속 떠오르고 있었다. 배인호가 유니콘의 이야기를 승현에게 들려준 후부터 승현은 노래를 들을 때도《유니콘》만 듣고 싶어 했다.두 어린이는 빈이를 양쪽에서 감쌌고 포동포동한 손으로 그의 소매를 잡으며 기대로 가득 찬 큰 눈으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로아와 승현은 나이는 어리지만 똑똑해서 아빠와 엄마가 포옹하고 있을 때는 방해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가 그들보다 많은 빈이는 방해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빈이가 주저하고 있을 때 로아의 간절한 눈빛에 빈이는 말했다.“내가 너희들에게 책을 읽어주면 어때?”“형은 못 해! 못 해!”승현이가 거절했다. 왜냐하면 형한테 유니콘을 불러달라 했을 때 음정이 하나도 맞지 않아서였다.로아도 그렇
허지영은 자기 앞에 무릎을 꿇은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이것은 그녀가 오랫동안 사치하게 그리던 장면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일을 겪은 후에야 이룰 수 있었다.그녀의 눈시울도 붉어졌고 마침내 그녀는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요.”사람들은 열렬한 박수를 터뜨렸다. 모두 이 부부의 재결합을 기뻐했지만 아무도 인파 뒤에서 한 남자가 조용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그는 모자와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웠다. 그는 배인호가 반지를 허지영의 손가락에 끼우는 것을 보고 나서야 묵묵히 자리를 떠났다.그는 저택을 떠나 차에 올랐고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으며 차갑고 마른 얼굴을 드러냈다.이우범은 원래 해외에 있어야 했지만 참지 못하고 결국 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에 참석했고 오늘의 입장권도 박준이 그를 위해 비밀리로 얻어 주었다.이제 허지영이 행복을 찾았음을 직접 보았으니 이우범은 안심하고 떠날 수 있었다.이우범이 막 차를 몰고 떠나려고 할 때, 박준이 어느새 따라 나와 차 앞에 막아 섰다.“이우범, 왜 벌써 가려고?”다른 사람들은 이우범을 눈치채지 못했지만 박준은 그가 올때부터 알아 보았다.박준은 이우범이 아직 허지영을 놓지 못했고 분명히 그녀의 결혼식에 몰래 참석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넌 왜 나왔어?”이우범은 박준을 보고 조금 놀랐다.“내가 안 나오면, 너는 이렇게 가버릴 거잖아. 배인호는 안 보면 그만이지, 나와 노성민도 안 볼 거니?”박준은 화가 내면서 말했다.박준은 이우범이 지난 몇 년 동안 항상 해외에 머무르고 있어 국내 친구들과의 연락이 매우 뜸했고 이번에 어쩌다 한 번 돌아왔는데 그들과 밥 먹고 술 한 잔 안 하고 허지영만 보러 온 거에 서운해했다.“나 공항에 가봐야 해.”이우범은 약간의 미안함은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우범은 하루도 여기서 보낼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저녁에 같이 밥 먹고 가. 지금 떠나면 너랑 나 친구로 끝이야. 알겠어?”박준은 협박하듯 말했다.이우범은 어쩔 줄 몰
박정아의 말에 허지영, 오세희, 이민정은 적극 찬성했다.다른 사람과 또 식을 올린다면 쪽팔리겠지만 같은 사람과 두번 식을 올리는 건 무엇을 설명할까? 그들이야 말로 찐 사랑인 것이다.——두 달 뒤.배인호와 허지영의 결혼식은 준비가 거의 되어가고 있었다. 결혼식의 사치와 호화로움은 무수한 감탄과 부러움을 불러일으켰다. 허지영은 천만 원 가치의 수제 웨딩드레스를 입었을때 기묘한 감정이 들었다.허지영은 처음 배인호한테 시집갈 때를 떠올렸다.그때 허지영은 자기가 직접 고른 웨딩드레스를 입었고 지금 사치스로운 드레스와 비교도 안 됐다. 그때의 배인호는 결혼식은 하나의 미션 수행처럼 모든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그 후 몇 년이 지나고 그들은 다시 시작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허지영은 웨딩 드레스 위에 박힌 빛나는 다이아몬드를 가볍게 만졌고 그 순간 그녀는 찬란한 태양빛 처럼 화려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박정아를 포함한 친한 친구들은 연속 감탄했다.박정아는 허지영 주위를 돌면서 기쁨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말했다. “영아, 정말 예쁘다. 몇 년 동안 방황하더니 결국 네가 원하는 행복을 얻게 되었네.”“맞아, 나도 너의 용기에 감탄해. 다행히 배인호도 정말로 많이 변한 거 같애.”오세희도 연속 감탄했다. 이민정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개과천선했으니 앞으로도 쭉 그럴 거야. 너를 또 상처 입힐 일이 있으면 우리 몇 명이 가만두지 않을 거야!”이때, 허지영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다가왔다. 두 사람은 아름다운 딸을 바라보며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허지영은 그들이 가장 아끼는 보물같은 존재였고 그녀는 감정적인 고통을 겪은 후에야 재혼이라는 결정을 내렀다. 처음에 부모님은 반대했지만 지금 받아들이기까지 수많은 과정이 있었다.하지만 이 순간, 허지영이 행복해 보이자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아빠, 엄마.”허지영은 부모님이 오자 이상하게 코가 찡해진 듯했다. 아마도 그들의 힘든 모습을 보다가 이렇게 뿌듯해하는 모습을
허지영은 배인호와 다른 여자의 스캔들을 폭로한 댓글을 보니 마음이 철렁 거렸다. 허지영은 일어서서 배인호와 아버지 쪽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은 바둑을 두고 있었고 경기는 아주 치열했다. 허지영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배인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면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허지영도 따라서 웃었다. 허지영은 스캔들에 대해 바로 묻지 않고 옆에 의자를 두고 앉아 조용히 두 사람이 바둑을 두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핸드폰 화면에는 배인호와 한 여자 연예인 간의 스캔들이 적힌 댓글이 고스란히 써져 있었다. 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와 바둑 한 판을 두고 난 뒤, 눈길은 자연스럽게 허지영의 핸드폰이 자기의 앞에 놓여져 있는 것을 보았고 화면이 꺼지려 하면 허지영이 화면을 다시 켜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화면에 적힌 그 말은 무슨 뜻이지?’배인호는 허지영의 휴대전화를 가져와 댓글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순간, 바둑을 계속 두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그와 허지영의 재혼을 많은 사람들이 좋게 보지 않았으며 이미 준비 중인 결혼식도 성사되지 못할 것이라는 의심이 가득하였다.‘결혼식이 엄청 화려해서 준비시간이 조금 오래 걸린 것 뿐인데 이게 무슨... 그리고 나와 한 여자 연예인이 하룻밤을 같이 보낸 스캔들이라고?’그날 밤에는 최소 일곱-여덟 명의 사람이 있었고 남자 여자 다 있었다. 주로 투자에 관한 이야기하다가 여자들이 떠나고 남은 몇 명의 남자들이 룸에서 잠을 잔 것이다. ‘언론은 이렇게 근거 없이 아무렇게나 사건의 앞뒤도 맞지 않는 헛소리를 늘어놓다니...’배인호는 허지영의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아버지, 좀 이따 다시 바둑을 둬도 괜찮을까요? 지금 급하게 좀 해결해야 할 일이 생겼어요.”허지영의 아버지는 자초지종을 모르고 배인호의 말에 급한 일이겠거니 생각하고 동의했다. 그러고 나서 허지영의 아버지는 허지영의 어머니를 도와주러 주방으로 향했다.허지영의 아버지가 나가자마자 배인호는 바로 허지영의 손을 붙잡았다. 얼굴에는 억울함이 가득
거절당한 후, 배인호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마치 모든 욕망을 내뱉으려는 듯했다.허지영은 이불을 감싸안고, 배인호와 사이에 안전한 구역을 만든 다음, 다시 잠을 이루려 했다.“여보, 벌써 자정이 넘었어.”겨우 십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약간 쉰 듯한 배인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허지영이 방금 잠에서 깨어나려는 찰나, 어느새 안전 구역을 넘어온 손이 허지영을 강하게 끌어당겨, 뜨거운 품에 꼭 안았다.“뭐 하는 거예요? 배인호 씨, 당신...”허지영이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입술이 막혔다. 겨우 의식을 회복했지만 뜨거운 키스 때문에 다시 정신이 흐릿해졌다. 허지영은 저항을 포기했다. 오늘 밤은 편하게 지낼 수 없을 것 같았다. 다음 날 정오가 되어서야, 허지영은 온몸이 녹아내린 듯한 느낌과 함께 잠에서 깨어났다. 주변을 돌아보자 배인호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샤워를 한 후, 허지영은 아래층으로 내려가 배인호를 발견했다.그리고 노성민과 박성아는 언제 왔는지 모르게 도착해, 세 아이를 데리고 왔다. 그 시간에 노 씨 집에 세 아이는 허지영의 세 아이와 노는 중이어서, 거실은 매우 활기찼다.박성아가 머리를 들어 계단에서 내려오는 허지영을 보고 말했다. “아이고, 지영아, 너 드디어 내려왔네. 재결합해서 기쁜 건 알겠지만, 몸조심해야 해!”허지영은 박성아를 쏘아보며, 얼굴에 부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신의 옷깃을 조금 더 높이 당겼다. 그렇지 않으면 어젯밤 남은 흔적이 들킬 수 있다.그들은 다 같이 식사했다. 식사 도중, 박성아가 민설아의 일을 언급했다. “그래, 민설아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매우 뛰어난 변호사를 고용했어. 이 여자 정말 죽을 쑤고 있어, 지금도 판을 뒤집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자신이 감옥에 안 가고 바로 무죄로 풀려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민설아의 이름을 듣고, 허지영은 본능적으로 배인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배인호는 로아와 승현, 두 아이에게 옥수수알을 까주는 데 집중하고 있어, 박성아의 말은 아예 듣
허지영은 병원으로 옮겨진 후 응급처치를 했다.허지영의 부모님은 거듭 의사에게 수술의 가능 여부 혹은 새로운 치료 방법으로 딸의 이 짧은 생명을 이어나갈 수 있는지 묻고 있었다.그러나 그들이 얻은 대답은 모두 절망적인 것이었다.병상 앞에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부모님은 마치 하룻밤 사이에 10살이나 더 늙은 것 같았다. 두 사람은 병상에 누워있는 딸을 보며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졌다.“영아, 우리 놀라게 하지 말아줘. 빨리 깨어나, 강하게 버텨줘..”“우리는 다 널 응원할 거야. 네가 끈질기게 살아남을 거라고 했잖아... 버텨줘. 우리 같이 여행 가자. 응?”“넌 삼촌과 이모의 유일한 희망이야, 그들을 위해서라도 버텨야 해!”“영아, 우리 딸... 흑흑흑...”온갖 소리가 허지영의 귀에 들어왔다. 허지영은 몸에 아무런 힘도 없는 것이 느껴졌고, 눈앞은 어렴풋한 빛에 휩싸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부모님의 얼굴과 친구들이 슬퍼하는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몹시 의외인 것은 이우범도 거기에 있었다. 그는 사람들의 가장자리에 서있었지만, 키가 커서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었다.‘이우범이 왜 여기에 있지?’허지영은 입을 벌려보았지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고 온몸이 아프기만 하였다.“영아, 너 어떻게 우리를 버리고 떠날 수가 있어... 나랑 네 아빠는 어쩌고...” 어머니는 허지영이 깨어났지만 기뻐하기는커녕 더욱 슬프게 울고 있었다. 어머니는 자기 딸에게서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부모님은 허지영이 왜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지 전혀 모른다.“아빠, 엄마, 제가 불효자예요... 미안해요... 다음 생이 있다면 제가 그때 효도할게요...”허지영은 허약하게 몇 마디 하려고 노력했지만, 부모님을 더 슬프게 할 뿐이였다.극심한 슬픔에 부모님은 뒤돌아 병실을 나왔다. 자기 딸에게 이토록 처참한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박정아는 바로 앞장서서 허지영의 손을 꼭 잡았다.“영아, 너도 날 꼭 기억해야 해. 다음 생이 있다면 다시 나를 찾아줘.
허지영은 어린 시절부터 자기는 타고난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좋은 가문에 서로 사랑하는 부모님, 좋은 성적,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랑 결혼까지 했다. 그러나 서른도 안 되는 나이에 가정이 풍비박산나고 삶의 끝에 이르렀다.허지영은 부모님이 자신의 눈앞에서 눈물범벅이 된 모습을 지켜보고는 마음이 아려왔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를 속일 수가 없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고집스럽게 배인호를 그리워하고 있었다.‘배인호는 내가 유방암 말기라는 사실을 알면 보러 올까? 마음이 약해질까?’‘왜 지금 이때까지도 나는 그 잔인한 남자를 그리워하는 걸까?’허지영은 자신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현재 상태에서는 수술할 필요도 없고 방사선 치료와 안전하고 보수적인 치료 외에는 손쓸 방법이 없었다.허지영은 어떻게든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가고 나서 가장 먼저 배인호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늘 그렇듯 또다시 거절당했다.허지영은 다시 배인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나 유방암 걸렸는데 말기래요. 당신이랑 얘기 좀 하고 싶은데 괜찮을까요?”이번에는 배인호가 답장을 했다.“병 걸렸으면 제대로 치료받아. 나는 의사가 아니야. 널 치료 해줄 수 없어.”이토록 차갑고 매정한 답장을 보면서 허지영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배인호의 마음을 얻기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왜 이 지경에 이르러서도 배인호는 그녀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는 걸까?“영아, 더 이상 배인호 생각은 안 하면 안될까?” 박정아와 친구들이 토끼처럼 눈이 붉어져서 허지영의 집으로 찾아왔다.“우리랑 여행 가자. 우리랑 아름다운 곳에서 아름다운 풍경도 맘껏 즐기면서 몇몇 쓰레기 같은 사람들은 깔끔하게 잊는 거야. 더는 그 쓰레기들에게 상처받지마. 응? ”허지영의 병을 알게 된 이후로 허지영의 부모를 제외하고 가장 슬퍼했던 건 박정아와 3명의 친구들이였다. 거의 매일 슬픔에 잠겨 허지영의 만날 때마다 울음을 참지 못했다.친구들은 더이상 허지영이 고통받는 걸 지켜보기 싫어했다. 그들은 허지영의 좋은 친
배인호는 식탁 위의 아침밥을 흘깃 보고선 한마디 대답도 없이 넥타이를 묶으며 거실 방향으로 걸어갔다. 허지영은 뒤따라가 한 번 더 묻고 싶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배인호가 차에 올라타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는 모습뿐이었다.허지영은 입을 열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배인호는 크나큰 빙산이고 허지영은 작디작은 불씨였다. 허지영은 자신의 불씨로 빙산을 녹이려고 하였지만, 결국 그 작은 불씨는 빙산에 의해 꺼져버렸다.“허지영, 우리 이혼하자.”배인호는 어느날 드디어 허지영에게 처음으로 이혼을 얘기했다.허지영은 배인호가 간만에 집에 돌아왔다는 기쁨에 사로잡혀있었다. 허지영은 자신이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는 옷을 입고 저녁에는 무엇을 먹을지 계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혼합의서가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배씨 그룹 지분의 3%면 충분해?”“이혼이요?”허지영은 마치 날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배인호가 갑자기 이혼을 꺼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 둘은 결혼 이후 함께 지낸 시간은 적었지만, 허지영은 결코 배인호의 어떤 일에도 관여하지 않고 절대적인 자유를 주었다. 이것만으로도 모자라는가?허지영은 그 수많은 스캔들을 꿋꿋이 참아오면서 작은 꼼수를 부리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하려 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배인호는 이혼을 원하는 걸까.“맞아. 난 널 전혀 사랑하지 않아. 난 지금 지키고 싶은 여자가 생겼어.”배인호는 이 말을 할 때 차갑기 그지없었다. 마치 배인호와 5년 동안이나 결혼 생활을 해온 허지영이 생명이 없는 장난감일 뿐이며 그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존재로 여기며 아픔도 슬픔도 느끼지 않는 것처럼. 허지영의 목소리를 떨면서 말했다.“누굴 사랑하게 된 건데요? 누구예요?”하지만 배인호가 허지영에게 이런 일들을 얘기해줄 리가 없었다. 그는 차갑게 소매를 털며 말했다.“이혼 합의서 잘 살펴보고 괜찮은 것 같으면 사인해. 별로라면 나한테 연락해. 다시 얘기하자.”허지영이 말도 꺼내기 전에 배인호는
“인호 씨.”허지영은 먼저 배인호에게 인사를 건넸지만, 돌아오는 것은 상대방의 서늘하기에 그지없는 눈빛뿐이었다.그 순간 허지영은 그녀가 새신부가 아니라 철천지원수인 것만 같았다.허지영은 그 눈빛에 놀라 흠칫했다. 아마 배인호의 어머님이 때마침 나타나지 않았다면 계속 계단에 서서 멍만 때렸을 것이다.“지영아, 내려와서 아침밥 먹어야지.”배인호의 어머님이 인사를 건넸다.그제야 허지영은 정신을 차리고 조심스럽게 식당으로 걸어갔다.배인호는 처음부터 끝까지 허지영의 존재를 무시했고, 밤새 잠을 자지 않은 듯 턱에는 푸릇푸릇한 수염이 자랐고 눈은 약간 충혈되어 매우 피곤하고 짜증이 난 것같은 모습이었다.하지만 허지영은 감히 더 물어볼 수 없었고 물어보아도 대답도 안 해줄 것을 알고 있었다.그날부터 허지영은 배씨 가문의 사모님이 되었고 철저한 장식품이 되었다. 배인호는 심지어 결혼전 보다도 더 차갑게 굴었으며 종종 집에 오지 않았다.허지영은 신혼집 인테리어에 모든 심혈을 기울였고 청담동이라는 곳에 있는 별장이 바로 그녀와 배인호의 신혼집이었다. 기초 공사는 거의 끝마쳤지만 가구와 같은 인테리어도 천천히 골라야 했다.허지영은 6개월이라는 시간을 들여 청담동 별장을 꿈의 신혼집 모습으로 장식해 놓았다. 그녀는 배인호가 돌아오리라 생각했지만, 이 아름다운 집은 결국 그녀의 외로운 결혼의 무덤이 되어버렸다.“결혼한 지 얼마 됐다고 벌써 5명이나 스캔들이 생겨? 영아, 너 진짜 잘 참는다!”박정아의 전화 10통 중 9통은 배인호의 뒷담화였다.“그거 다 보여주기식일 거야.”허지영은 사실 배인호가 자신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마음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마치 자기의 가련한 자존감을 지키려는 듯 배인호의 편을 들어주었다.인정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날 것만 같아서 허지영은 끝내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하루 또 하루, 한 해 또 한 해가 지나면서 허지영은 혼자 청담동에서 망부석이 된 것만 같았다. 마치 웃음거리인 것처럼 다들 그녀에 대한 기억은 점점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