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중심을 잡은 민설아는 고개를 돌려 옆을 보았다. 남자는 검은색 턱시도를 입은 채 한 손은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고 있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더 시크한 느낌이었다.

홍현도의 존재는 그녀에게 진정제와 같았다. 그의 등장만으로도 민설아는 안심되었다.

민설아는 아랫입술을 틀어 물었다. 입을 열려던 순간 주위에서 수군대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사람들이 더 몰려온 것이다. 그들은 열심히 속닥거리고 있었다.

“세상에, 홍현도 대표님이잖아요!”

“네? 대체 언제 온 거죠? 이 파티에 왔다고요?!”

‘이게 무슨 소리야?!'

민설아는 다시 고개를 돌려 자신의 옆에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를 놀란 눈으로 보았다.

민씨 가문도 재벌 가문이기는 했지만, 유서 깊은 홍씨 가문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홍씨 가문에서 하는 사업은 그들과 같은 미약한 가문이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러니 그 가문의 사람과 접촉하게 될 일은 더더욱 없었다.

홍씨 가문에 관한 일을 민설아는 예전에 같이 어울려 놀던 친구들에게서 들은 적 있었다.

게다가 지금은 홍씨 가문의 산업이 중점 산업으로 되었고 둘째 며느리가 낳은 아들 홍현도가 가문을 장악하고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홍현도는 아내 운이 없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는 이미 두 명의 아내를 잃었을 뿐 아니라 매번 그와 결혼을 앞둔 신부들이 이유 없이 비참하게 죽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바로 그녀를 도와주고 있는 홍현도였다.

주위 사람들은 여전히 쑥덕대고 있었다.

“그런데 방금 홍 대표님이 민설아를 파트너라고 하지 않았어요?”

“송시윤 씨도 대단하네요. 감히 이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홍 대표님 파트너를 때린 거잖아요. 홍 대표님이 파트너를 위해 나서줄까요...?”

홍현도와 대화를 나눠본 사람이라면 대부분 홍씨 가문에서 벌어진 일을 알고 있었고 홍현도가 얼마나 매정하고 잔인한 사람인지도 알았다. 그런 그의 파트너를 때렸다니. 그건 그의 뺨을 때린 것과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그러니 그가 어떻게 그냥 넘어갈 수 있겠는가.

송시윤과 윤유진도 재계에서 활동하고 있었기에 당연히 홍현도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두 사람의 안색이 좋지 못했다.

이때 윤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홍 대표님, 저희는 민설아가 대표님 파트너인 줄 몰랐어요. 저희 대표님도 일부러 때린 것은 아니에요. 민설아가 먼저 무례하게...”

“저한테 사과할 필요 없습니다.”

홍현도는 윤유진의 말을 자르며 냉담하게 말했다.

“그냥 파트너일 뿐이니까요.”

그 말을 들은 민설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윤유진은 발로 홍현도가 한 말의 의미를 알아채고 긴장을 풀게 되었다.

심지어 그녀는 비웃기도 했다.

“설아야, 돈 필요하면 나한테 말해. 그래도 한때 친구였는데 그 정도는 나도 도와줄 수 있으니까. 자꾸만 예전처럼 민씨 가문 믿고 나대지 말고.”

그러자 주위 사람들이 웃기 시작했다.

“민설아도 참 웃기는 여자네요. 홍 대표님의 파트너가 되었다고 해서 기고만장해지다니, 안 그래요?”

“홍 대표님, 눈앞에 있는 여자에게 속지 마세요.”

사람들의 비웃는 목소리가 민설아에게 쏟아졌다. 그러나 홍현도는 그저 냉담하게 서 있을 뿐이다. 그는 입을 열지도 않았고 그저 그녀가 모욕을 당해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민설아는 점점 마음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사람들 무리를 헤쳐나와 초라한 모습으로 화장실로 뛰어갔다.

찬물로 세수를 두어 번 하고 나니 그제야 울렁이던 마음이 진정되었지만,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녀는 남자가 자신을 위해 나서 송시윤에게 복수해 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남자는 사람들에게 그저 단순한 파트너일 뿐이라고 말하며 윤유진이 비웃고 조롱해도 아무런 대응하지 않았다.

‘파티로 불러낸 이유가 모욕당하는 꼴 구경하려고 그랬던 거야?'

“민설아 씨.”

이때 누군가 화장실 문을 똑똑 두드렸다. 들려온 건 서민우의 목소리였다.

민설아는 휴지를 뽑아 얼굴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닦은 뒤 문을 열고 나갔다. 그녀의 목소리는 다소 잠겨있었다.

“제가 알아서 돌아갈게요. 데려다주실 필요 없으세요. 더러워진 드레스는 제가 나중에 돈을 벌면 그때...”

“민설아 씨, 복수하고 싶으시다면서요. 그런데 그렇게 나약하시면 어떻게 복수를 하시려고요.”

서민우는 고개를 저었다.

“남이 고작 몇 마디 했다고 버티지 못하고 뛰쳐나오시면 안 되죠.”

민설아는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짓이겼다.

“홍 대표님도 절 도와주지 않으시잖아요...”

“복수는 당연히 민설아 씨가 직접 하셔야죠.”

서민우는 핸드폰을 민설아에게 건넸다.

“대표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 민설아 씨가 기댈 수 있는 사람은 결국 민설아 씨 자신뿐이라고요.”

민설아는 자신이 며칠 전 별장에서 잠결에 똑같은 말을 들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럼 그때 대표님도 별장에 계셨던 건가?'

핸드폰에는 비밀번호가 걸려있지 않았기에 민설아는 손쉽게 핸드폰을 볼 수 있었다. 그녀는 궁금했다. 서민우가 자신에게 보여주려는 것이 무엇인지 말이다. 그녀는 핸드폰 갤러리에 동영상이 하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영상을 본 그녀는 그제야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답답했던 가슴도 뻥 뚫린 기분이었다.

민설아는 다시 파티장으로 돌아왔다. 직원을 찾아가 몇 마디 한 뒤 핸드폰과 함께 돈을 직원의 손에 쥐여주었다.

직원은 돈뭉치를 보더니 바로 알겠다고 대답하며 떠나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