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을 갈라놓으려는 사람들만 없었다면 좋았을 텐데.이엘리아를 떠올린 부승민의 눈빛이 서늘해졌다.연도진은 분명히 이엘리아가 강남에 남아있는 것을 원하지 않는 눈치였다.서정훈도 이엘리아를 필라시로 돌려보내고 싶어 했다.부승민은 그 둘에게 약간의 도움만 주면 되었다.“왜 왔어?”온하랑이 물었다.“숙모랑 송이랑 같이 놀고 싶어서 왔죠.’“오늘 오후에 어디 갔다 왔어?”부승민이 고개를 들어 잠시 온하랑을 바라보더니 이내 다시 고개를 숙여 노트북에 시선을 집중했다.“경찰서 다녀왔어. 추서윤이 죽었대. 사건 조사도 끝났고...”온하랑을 말을 하며 부승민을 빤히 쳐다보았다.“야.”“응?”부승민이 온하랑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추서윤이 죽었다고.”“알아, 일주일 전부터 알고 있었어.”“...”“전혀 슬프다거나 안타깝지는 않아? 그래도 한때는 연인이었잖아...”“넌 내가 추서윤 죽음에 안타까워하고 슬퍼했으면 좋겠어?”부승민이 눈썹을 들썩이며 온하랑을 바라보았다.온하랑은 부승민의 질문에 입만 꾹 닫은 채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돌려 부시아와 대화를 시도했다.부승민이 웃으며 몸을 일으켜 온하랑의 곁으로 자리를 옮겼다.“내가 사실대로 말했으면 좋겠어?”“그러든지 말든지.”부승민은 웃는 얼굴로 온하랑의 곁에 가까이 다가가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추서윤이 죽었다고 했을 때 감회가 좀 새롭더라고.”“그게 끝이야?”온하랑이 곁눈질로 부승민을 바라보았다.“그리고 조금 아쉬웠어.”“아쉽다고?”“응, 너무 늦게 죽은 것 같아서. 조금만 더 빨리 죽어줬으면 내가 걔 손에 놀아나는 일도 없었을 테고, 우리도 어쩌면 이렇게 남이 되지는 않았을 것 같아서.”온하랑이 아버지를 잃고 혼자 외로운 나날들을 버티고 있던 때, 부승민은 병원에서 그녀의 아버지를 죽인 범인 중 한 명인 추서윤의 간호를 해주고 있었다.그때까지만 해도 둘은 서로 모르는 사이였다.다만 인제 와서 생각해보니 그때의 온하랑이 너무 불쌍하게 느껴졌다.어쩌면 이건 부승민의
온하랑이 시계를 흘끔 쳐다보더니 말했다.“얼른 돌아가는 게 좋을 거야. 시연이가 곧 돌아올 예정이라서.”“시연 씨가 돌아오는데 우리가 왜 나가야 해?”부승민이 물었다.“그러니까요!”부시아가 동의하며 말했다.“시연이가 여기서 너희들이랑 마주치면 내가 좀 곤란해져.”부시아가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시연 아줌마 이제 저 안 좋아해요?”“아니, 시연이는 너희 아빠를 싫어하는 거야.”김시연은 어느 정도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그녀는 아무 죄 없는 아이에게 반감을 품지는 않았지만 항상 부시아가 이엘리아와 부시아의 아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있었다.“그럼 삼촌, 삼촌 혼자 돌아가는 건 어때요?”아이는 온하랑의 곁을 떠나기가 싫었다.부시아는 온하랑의 집에 남고 싶으면 남고, 함께 자고 싶으면 잘 수 있었던 예전이 그리웠다!부승민이 아이를 안아 들며 말했다.“그건 안돼. 너 혼자 여기 남는 건 숙모한테도 민폐야. 같이 가자.”“흥.”부시아는 어쩔 수 없이 부승민의 어깨에 얼굴을 기댄 채 온하랑에게 손을 흔들었다.“숙모, 안녕히 계세요.”“그래, 안녕.”두 사람이 집을 떠나기 무섭게 김시연이 캐리어를 끌고 집으로 돌아왔다.원래는 온하랑이 직접 공항까지 마중을 나갈 예정이었지만 임신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 운전기사를 따로 고용해 스스로 운전을 하지 않았다. 며칠 전, 촬영을 나갈 때도 운전기사가 데려다줬던 것이었다.이번에도 운전기사가 직접 공항까지 가 김시연을 데리고 왔다.“왔어?”“응.”김시연은 캐리어를 들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온하랑이 눈썹을 들썩였다. 오늘따라 김시연이 어딘가 이상해 보였다.예전 같았으면 김시연은 캐리어를 한쪽 구석에 버려두고 대자로 소파에 뻗어 자신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에 대해 하소연해야 했다. 왜 오늘은 아무 말도 없이 방으로 들어가는 거지?온하랑이 몸을 일으켜 김시연의 방문을 두드렸다.“시연아, 괜찮아?”“괜찮아.”방 안에서 김시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들어가도 돼?”“그래, 들어와.”온하랑이
“조건은, 연도진이랑 계약 결혼하는 거였어.”온하랑이 눈썹을 들썩이며 김시연을 바라보았다.“설마 흔들린 거야?”김시연은 온하랑의 등 위로 걸어가 그녀를 끌어안고는 턱을 온하랑의 어깨에 기댔다.“... 난 어느 정도 가능성 있다고 생각하는데, 넌 어때?”온하랑이 턱을 괸 채 잠시 생각했다.“법적으로 계약 결혼은 허용이 인정이 안 돼. 연도진이 서정훈이라는 엄청난 빽을 지고 그때 가서 너랑 한 계약을 파기하고 진짜 부부가 되려고 하기 십상이야.”연도진은 정말 똑똑한 사람이었다.하지만 연도진은 아마 진심으로 김시연을 도와주고 싶은 게 맞을 것이다. 다만 김시연과 몇 년 동안이라도 어떤 수단으로라도 함께 묶여있고 싶을 뿐이었다.두 사람에게는 옛정이라는 게 존재했고 연도진의 외모도 어디 가서 꿀릴 정도는 아니었으니 오랜 시간 동안 같은 지붕 아래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예전의 감정이 되살아나 불꽃이 붙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되면 계약 결혼이 진짜 결혼이 되어버리는 것이다.하지만 김시연이 이미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이상, 온하랑은 그녀를 막기보다 김시연을 위한 다른 방법을 생각해줄 것이다.“그럼 어떡해?”“만약 네가 그 조건을 받아들일 거라면 차라리 너희 결혼 증명서도 위조해서 너희 아빠랑 다른 사람들까지 같이 속이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냥 연도진을 사위의 신분으로 입사시켜. 그리고 재산이랑 회사에 대해서는 따로 변호사를 찾아서 계약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 알겠어.”김시연은 “쪽” 하는 소리와 함께 온하랑의 얼굴에 입술을 맞췄다.“하랑아, 내가 너 진짜 사랑하는 거 알지!”“...”다음날 월요일이 되자 부승민은 온하랑을 데리고 산부인과를 가기 위해 집 앞까지 찾아왔다.1층으로 내려온 온하랑은 자신의 차 옆에 서 있는 부승민을 발견했다.온하랑이 다가오는 것을 보자 부승민은 차 뒷좌석의 문을 열고 그녀를 부축했다.“조심해.”온하랑이 차에 올라타는 것을 확인한 부승민은 다른 쪽으로 가 그녀의 안전벨트를 매주었다.
병원에 도착한 온하랑은 의사에게서 진단서를 건네받고 태아 심장 박동 검사, 초음파 검사 및 다운증후군 검사를 받으러 이동했다.온하랑의 손에서 진단서를 건네받은 부승민은 진단서를 확인하는 순간 눈썹을 들썩였다.“16주?”“응.”온하랑의 표정은 평온했다.보아하니 부승민도 온하랑처럼 아이가 필라시에서 생겼을 것이라 예상한 모양이었다.부승민은 조용히 시간을 계산해 보았다.네 달 전이라면 혹시...두 시선이 공중에서 맞물렸다. 부승민의 눈빛에서 은근한 자랑스러움의 감정을 읽어낸 온하랑은 얼굴이 순간 화끈 달아올라 부승민의 옆구리를 세게 꼬집으며 시선을 피했다.“그래, 너 대단하다.”부승민은 입술을 꾹 다문 채 웃으며 온하랑의 허리를 끌어안고 몸을 숙여 그녀의 귓가에 조용히 무어라 속삭였다.온하랑의 두 뺨이 발갛게 달아오르더니 부끄러우면서도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화에 부승민을 노려보았다. 그러다 반짝이는 두 눈동자가 데구루루 구르더니 이내 배를 부여잡고 혹시라도 아이가 들을까 걱정하는 모습으로 말했다.“너 한 마디만 더 해봐?”“안 할게.”부승민은 온하랑에게 쫀 듯 바로 입을 다물었지만 눈가에는 미소가 번져있었다. 그녀의 애교 섞인 분노가 귀엽게만 느껴졌다.여기가 병원만 아니었더라면 부승민은 아마 온하랑의 살짝 올라간 붉은 입술에 바로 진득하게 입을 맞췄을 것이다.온하랑은 곧장 고개를 돌리더니 부승민이 따라서 오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앞으로 걸어갔다.차라리 따라오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이 사람 머릿속에는 온통 그런 생각 들 뿐인 것 같다.부승민은 큰 보폭으로 온하랑을 뒤쫓아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진료실 밖에 도착하자 온하랑은 자리를 찾아 자신의 차례가 되길 기다렸다.부승민은 그녀의 옆에 자리 잡고 앉아 온하랑의 손을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 가볍게 어루만졌다.그러다가 무언가 떠오른 듯 살짝 몸을 기울여 낮게 속삭였다.“다행이다. 아기 건강해서...”“응?”“우리 필라에서 고생 꽤 했잖아...”온하랑은 또다시
7시 5분, 편집장이 문을 열고 들어와 웃으며 말을 건넸다.“죄송해요, 오래 기다리셨죠. 방금 누구 한 명 마중 갔다가 오느라...”그렇게 말을 하는 그의 뒤로 한 남자가 따라 들어왔다. 상의는 캐주얼한 티셔츠에 하의는 무릎까지 오는 반바지를 입고 있던 남자의 팔뚝은 꽤 튼튼해 보였고 종아리 근육까지 뚜렷했다. 남자는 키도 크고 외모도 준수했다.“동철 오빠?”“서프라이즈라고 할까?”최동철이 웃으며 들어와 그녀의 옆자리에 있는 의자를 끌어당겨 자리에 앉았다.“네가 귀국했다는 걸 알고 연수한 편집장님께 추천했어.”온하랑이 웃으며 말했다.“그럼 저야 감사하죠, 동철 오빠. 어쩐지 연수한 편집장님께서 왜 저 같은 아마추어를 찾는지 궁금했는데, 다 동철 오빠 덕분이었네요.”모델은 그들의 옆에서 긴장감에 덜덜 떨고 있었다.조금 전 두 사람이 즐겁게 얘기를 나눌 때까지만 해도 온하랑이 젊고 유능한 사진작가라고 생각했다.지금 들어보니 그냥 낙하산이었네!촬영 결과물이 재앙 수준만은 아니길 빌어야 했다.“하랑 씨 너무 겸손하시네요. 저도 아무나 받는 사람 아닙니다.”연수한이 웃으며 말했다.“하랑 씨 작품 보고, 하랑 씨가 적임자라고 생각해서 연락 드린 겁니다.”편집장의 말을 들은 모델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그러셨군요. 그럼 전 편집장님의 신뢰에 감사드려야겠네요. 이렇게 주신 기회니까 기대 절대 저버리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그럼 저도 하랑 씨 작품 기대해볼게요.”“너 필라시에서 잘 지내고 있었잖아. 왜 돌아온 거야?”최동철이 느긋하게 몸을 뒤로하더니 한쪽 팔꿈치를 의자 등받이에 걸쳤다.온하랑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제가 돌아온 건 알면서 왜 돌아왔는지는 모르세요?”부승민이 승리를 쟁취하고 필라시로 갔던 일은 강씨 일가쪽 사람이라면 모를 리가 없었다.최동철이 입술을 다물더니 말을 꺼냈다.“둘이 화해하기로 한 거야?”최동철도 뒤늦게 온하랑과 부승민의 결별은 강씨 일가와의 싸움을 위한 연극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동철 오빠?”“우리 외삼촌 때문에...”최동철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술잔을 들어 술을 들이켜고는 천히 또 한 잔을 따랐다.“외삼촌이 너희 아버지 사건을 재조사하려던 부승민을 막아서... 죄를 부민재한테 덮어씌우려고...”“저번에 내가 그랬지, 강씨 가문이랑 부승민이 척을 졌던 이유가 단순히 이익 때문이라고... 사실은 그게 아니야.”온하랑이 입술을 달싹였다.귀국 후, 온하랑은 일부러 최동철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그와 거리를 두고 싶었다.“이거 봐. 딱히 부정도 안 하네. 내가 싫어진 거지?”“...”온하랑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싫어한다고까지는 못하지만, 그냥 이해가 안 될 뿐이에요.”필라시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온하랑은 최동철의 말을 굳게 믿었다.하지만 뒤늦게 부승민에게서 부승민과 강씨 일가의 싸움이 아버지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 시절 온하랑은 부승민이 강씨 일가의 소행을 모르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부승민이 온하랑에게 그 일에 관해 얘기할 때 어떻게 그토록 태연하게 강씨 일가를 위해 힘써야 한다고 얘기할 수 있었을까?하지만 지금 부승민은 자신이 온하랑을 속였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니 그때의 부승민도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이해가 안 된다면서 왜 직접 나 찾아와서 안 물어봤어?”최동철은 이마에 팔을 갖다 대더니 가늘게 실눈을 뜬 채 온하랑을 바라보았다.온하랑도 왜 최동철이 강씨 일가에 대한 조사를 막았는지 물어보고 싶었다.하지만 생각해보니 물어본다고 해서 딱히 달라지는 것도 없는 것 같았다.최동철과 온하랑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인연일 뿐, 최동철은 온하랑에게 모든 일에 대해 설명해줄 필요가 없었다.최동철이 몇 번 온하랑을 도와줬다고 해서 그녀의 모든 걸 다 도와줘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제가 아버지 사건에 얼마나 관심을 갖고 있는지 뻔히 아는 동철 오빠가 그런 선택을 했다는 건, 분명 그만한 이유가
여기까지 말을 꺼내자 최동철의 눈가가 촉촉해지더니 말끝을 흐렸다.그는 바로 눈을 질끈 감고 머리를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부승민의 성장배경을 다시 떠올려본 온하랑은 그제야 알아차릴 수 있었다.부승민이 바로 예전 부선월과 최국환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다.어머니가 세상을 떴지만, 어머니를 죽인 그 범인은 멀쩡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이게 최동철이 부씨 가문을 싫어하는 이유였다.그래서 강씨 일가가 사건 재조사를 꺼렸던 것이다. 부승민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기 위해. 어쨌든 판결만 내려지면 부씨 가문의 장남이 살인범이라는 소문이 빠르게 퍼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연스레 BX 그룹도 큰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그 기회를 틈타 최씨 가문과 강씨 가문은 물론이고 콩고물이라도 얻어먹으려는 사람들이 개떼처럼 달려들 게 뻔했다. 그렇게 되면 부씨 가문은 살아남는다고 해도 예전 같은 파워는 다시 얻을 수 없을 것이다.온하랑은 문득 예전에 자신과 최국환이 했던 통화를 떠올렸다.어쩐지 수화기 너머의 최국환이 지나치게 친절한 것 같았는데 그 이유가 이제야 밝혀졌다. 온하랑이 자신의 전 며느리였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임연지가 자신에게 자꾸 찝쩍댄 탓에 부승민이 직접 부씨 가문으로 찾아갔던 것도 한몫했던 것 같다.최국환이 그토록 쉽게 부승민의 부탁을 들어줬던 이유도 부승민이 자기 아들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동철 오빠, 저도 오빠 감정 어느 정도는 이해해요. 저도 어릴 때 엄마가 없었거든요. 다행히 저를 위해선 목숨도 기꺼이 내어줄 정도로 저를 사랑하는 아빠가 계셨죠. 그래서 저는 아빠가 왜 죽었는지 그 사건의 진상을 꼭 알아내야만 해요.”하지만 최동철은 온하랑처럼 운이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와 최국환의 관계는 그저 평범하고 서먹서먹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최동철의 입에서 자신의 유일한 친혈육인 최국환 대신 외삼촌, 외할머니 같은 단어들만 나올 리가 없었다.최국환이 조금만 더 책임감 있는 사람이었다면 이런 상황도 벌어질 이
온하랑은 자신의 옆방을 최동철에게 잡아주고 자신의 두 경호원을 시켜 최동철을 침대에까지 부축했다. 침대 위에 뻗어버린 최동철이 마음 놓고 잘 수 있도록 신발까지 벗겨주었다.온하랑은 내친김에 에어컨도 적정한 온도로 맞춰주고 주전자로 물까지 데워 침대 맡에 놓아두었다.이 모든 일을 끝내고서야 온하랑은 최동철의 방을 벗어나려 했다.그 순간, 최동철이 온하랑의 손목을 잡고는 두 눈을 꼭 감은 채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슬픈 꿈이라도 꾸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낮게 속삭였다.“가... 가지 마...”그 모습을 본 온하랑은 침대 곁에 앉아 부드러운 목소리로 최동철을 달랬다.“안 갈 테니까 편히 자요.”사실 진지하게 말하면 둘의 우정 관계에서는 최동철의 일방적인 도움이 더 컸다. 촬영 쪽으로도 그렇고 필라시에 있을 때도 그렇고 장국호를 다시 체포할 때도 최동철의 도움을 받았지만 온하랑은 최동철을 도운 적이 딱히 없었다.온하랑은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갖고 최동철을 착하고 좋은 오빠로 여겼다.저번 일로 온하랑은 최동철을 서서히 멀리하긴 했지만 그가 강씨 일가의 편에 섰다고 해서 최동철을 원망하거나 미워할 생각은 없었다.최동철은 온하랑을 책임져주는 사람도 아니었고 그러니 온하랑을 도울 의무도 없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하지만 이 일에는 부승민의 영향이 컸던 탓에 일부는 부승민 때문이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온하랑은 여전히 최동철에게 감사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가지 마...”최동철은 여전히 편히 잠들지 못했다. 그는 계속 입술을 달싹이며 미세한 목소리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온하랑은 몸을 숙여 자신의 귀를 최동철에게 가까이 갖다 대고 나서야 겨우 몇 글자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보고 싶어요, 어머니, 어머니...”아마 꿈에서 어머니를 만난 모양이다.어머니를 직접 본 적은 없었지만 강씨 집안 사람들이 말해준 어머니의 생전 이야기 덕분에 최동철의 머릿속에서 어머니의 모습이 구체화 된 듯했다.“...”온하랑은 최동철의 덕을 볼 생각은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