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들을 갈라놓으려는 사람들만 없었다면 좋았을 텐데.이엘리아를 떠올린 부승민의 눈빛이 서늘해졌다.연도진은 분명히 이엘리아가 강남에 남아있는 것을 원하지 않는 눈치였다.서정훈도 이엘리아를 필라시로 돌려보내고 싶어 했다.부승민은 그 둘에게 약간의 도움만 주면 되었다.“왜 왔어?”온하랑이 물었다.“숙모랑 송이랑 같이 놀고 싶어서 왔죠.’“오늘 오후에 어디 갔다 왔어?”부승민이 고개를 들어 잠시 온하랑을 바라보더니 이내 다시 고개를 숙여 노트북에 시선을 집중했다.“경찰서 다녀왔어. 추서윤이 죽었대. 사건 조사도 끝났고...”온하랑을 말을 하며 부승민을 빤히 쳐다보았다.“야.”“응?”부승민이 온하랑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추서윤이 죽었다고.”“알아, 일주일 전부터 알고 있었어.”“...”“전혀 슬프다거나 안타깝지는 않아? 그래도 한때는 연인이었잖아...”“넌 내가 추서윤 죽음에 안타까워하고 슬퍼했으면 좋겠어?”부승민이 눈썹을 들썩이며 온하랑을 바라보았다.온하랑은 부승민의 질문에 입만 꾹 닫은 채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돌려 부시아와 대화를 시도했다.부승민이 웃으며 몸을 일으켜 온하랑의 곁으로 자리를 옮겼다.“내가 사실대로 말했으면 좋겠어?”“그러든지 말든지.”부승민은 웃는 얼굴로 온하랑의 곁에 가까이 다가가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추서윤이 죽었다고 했을 때 감회가 좀 새롭더라고.”“그게 끝이야?”온하랑이 곁눈질로 부승민을 바라보았다.“그리고 조금 아쉬웠어.”“아쉽다고?”“응, 너무 늦게 죽은 것 같아서. 조금만 더 빨리 죽어줬으면 내가 걔 손에 놀아나는 일도 없었을 테고, 우리도 어쩌면 이렇게 남이 되지는 않았을 것 같아서.”온하랑이 아버지를 잃고 혼자 외로운 나날들을 버티고 있던 때, 부승민은 병원에서 그녀의 아버지를 죽인 범인 중 한 명인 추서윤의 간호를 해주고 있었다.그때까지만 해도 둘은 서로 모르는 사이였다.다만 인제 와서 생각해보니 그때의 온하랑이 너무 불쌍하게 느껴졌다.어쩌면 이건 부승민의
온하랑이 시계를 흘끔 쳐다보더니 말했다.“얼른 돌아가는 게 좋을 거야. 시연이가 곧 돌아올 예정이라서.”“시연 씨가 돌아오는데 우리가 왜 나가야 해?”부승민이 물었다.“그러니까요!”부시아가 동의하며 말했다.“시연이가 여기서 너희들이랑 마주치면 내가 좀 곤란해져.”부시아가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시연 아줌마 이제 저 안 좋아해요?”“아니, 시연이는 너희 아빠를 싫어하는 거야.”김시연은 어느 정도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그녀는 아무 죄 없는 아이에게 반감을 품지는 않았지만 항상 부시아가 이엘리아와 부시아의 아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있었다.“그럼 삼촌, 삼촌 혼자 돌아가는 건 어때요?”아이는 온하랑의 곁을 떠나기가 싫었다.부시아는 온하랑의 집에 남고 싶으면 남고, 함께 자고 싶으면 잘 수 있었던 예전이 그리웠다!부승민이 아이를 안아 들며 말했다.“그건 안돼. 너 혼자 여기 남는 건 숙모한테도 민폐야. 같이 가자.”“흥.”부시아는 어쩔 수 없이 부승민의 어깨에 얼굴을 기댄 채 온하랑에게 손을 흔들었다.“숙모, 안녕히 계세요.”“그래, 안녕.”두 사람이 집을 떠나기 무섭게 김시연이 캐리어를 끌고 집으로 돌아왔다.원래는 온하랑이 직접 공항까지 마중을 나갈 예정이었지만 임신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 운전기사를 따로 고용해 스스로 운전을 하지 않았다. 며칠 전, 촬영을 나갈 때도 운전기사가 데려다줬던 것이었다.이번에도 운전기사가 직접 공항까지 가 김시연을 데리고 왔다.“왔어?”“응.”김시연은 캐리어를 들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온하랑이 눈썹을 들썩였다. 오늘따라 김시연이 어딘가 이상해 보였다.예전 같았으면 김시연은 캐리어를 한쪽 구석에 버려두고 대자로 소파에 뻗어 자신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에 대해 하소연해야 했다. 왜 오늘은 아무 말도 없이 방으로 들어가는 거지?온하랑이 몸을 일으켜 김시연의 방문을 두드렸다.“시연아, 괜찮아?”“괜찮아.”방 안에서 김시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들어가도 돼?”“그래, 들어와.”온하랑이
“조건은, 연도진이랑 계약 결혼하는 거였어.”온하랑이 눈썹을 들썩이며 김시연을 바라보았다.“설마 흔들린 거야?”김시연은 온하랑의 등 위로 걸어가 그녀를 끌어안고는 턱을 온하랑의 어깨에 기댔다.“... 난 어느 정도 가능성 있다고 생각하는데, 넌 어때?”온하랑이 턱을 괸 채 잠시 생각했다.“법적으로 계약 결혼은 허용이 인정이 안 돼. 연도진이 서정훈이라는 엄청난 빽을 지고 그때 가서 너랑 한 계약을 파기하고 진짜 부부가 되려고 하기 십상이야.”연도진은 정말 똑똑한 사람이었다.하지만 연도진은 아마 진심으로 김시연을 도와주고 싶은 게 맞을 것이다. 다만 김시연과 몇 년 동안이라도 어떤 수단으로라도 함께 묶여있고 싶을 뿐이었다.두 사람에게는 옛정이라는 게 존재했고 연도진의 외모도 어디 가서 꿀릴 정도는 아니었으니 오랜 시간 동안 같은 지붕 아래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예전의 감정이 되살아나 불꽃이 붙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되면 계약 결혼이 진짜 결혼이 되어버리는 것이다.하지만 김시연이 이미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이상, 온하랑은 그녀를 막기보다 김시연을 위한 다른 방법을 생각해줄 것이다.“그럼 어떡해?”“만약 네가 그 조건을 받아들일 거라면 차라리 너희 결혼 증명서도 위조해서 너희 아빠랑 다른 사람들까지 같이 속이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냥 연도진을 사위의 신분으로 입사시켜. 그리고 재산이랑 회사에 대해서는 따로 변호사를 찾아서 계약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 알겠어.”김시연은 “쪽” 하는 소리와 함께 온하랑의 얼굴에 입술을 맞췄다.“하랑아, 내가 너 진짜 사랑하는 거 알지!”“...”다음날 월요일이 되자 부승민은 온하랑을 데리고 산부인과를 가기 위해 집 앞까지 찾아왔다.1층으로 내려온 온하랑은 자신의 차 옆에 서 있는 부승민을 발견했다.온하랑이 다가오는 것을 보자 부승민은 차 뒷좌석의 문을 열고 그녀를 부축했다.“조심해.”온하랑이 차에 올라타는 것을 확인한 부승민은 다른 쪽으로 가 그녀의 안전벨트를 매주었다.
병원에 도착한 온하랑은 의사에게서 진단서를 건네받고 태아 심장 박동 검사, 초음파 검사 및 다운증후군 검사를 받으러 이동했다.온하랑의 손에서 진단서를 건네받은 부승민은 진단서를 확인하는 순간 눈썹을 들썩였다.“16주?”“응.”온하랑의 표정은 평온했다.보아하니 부승민도 온하랑처럼 아이가 필라시에서 생겼을 것이라 예상한 모양이었다.부승민은 조용히 시간을 계산해 보았다.네 달 전이라면 혹시...두 시선이 공중에서 맞물렸다. 부승민의 눈빛에서 은근한 자랑스러움의 감정을 읽어낸 온하랑은 얼굴이 순간 화끈 달아올라 부승민의 옆구리를 세게 꼬집으며 시선을 피했다.“그래, 너 대단하다.”부승민은 입술을 꾹 다문 채 웃으며 온하랑의 허리를 끌어안고 몸을 숙여 그녀의 귓가에 조용히 무어라 속삭였다.온하랑의 두 뺨이 발갛게 달아오르더니 부끄러우면서도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화에 부승민을 노려보았다. 그러다 반짝이는 두 눈동자가 데구루루 구르더니 이내 배를 부여잡고 혹시라도 아이가 들을까 걱정하는 모습으로 말했다.“너 한 마디만 더 해봐?”“안 할게.”부승민은 온하랑에게 쫀 듯 바로 입을 다물었지만 눈가에는 미소가 번져있었다. 그녀의 애교 섞인 분노가 귀엽게만 느껴졌다.여기가 병원만 아니었더라면 부승민은 아마 온하랑의 살짝 올라간 붉은 입술에 바로 진득하게 입을 맞췄을 것이다.온하랑은 곧장 고개를 돌리더니 부승민이 따라서 오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앞으로 걸어갔다.차라리 따라오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이 사람 머릿속에는 온통 그런 생각 들 뿐인 것 같다.부승민은 큰 보폭으로 온하랑을 뒤쫓아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진료실 밖에 도착하자 온하랑은 자리를 찾아 자신의 차례가 되길 기다렸다.부승민은 그녀의 옆에 자리 잡고 앉아 온하랑의 손을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 가볍게 어루만졌다.그러다가 무언가 떠오른 듯 살짝 몸을 기울여 낮게 속삭였다.“다행이다. 아기 건강해서...”“응?”“우리 필라에서 고생 꽤 했잖아...”온하랑은 또다시
7시 5분, 편집장이 문을 열고 들어와 웃으며 말을 건넸다.“죄송해요, 오래 기다리셨죠. 방금 누구 한 명 마중 갔다가 오느라...”그렇게 말을 하는 그의 뒤로 한 남자가 따라 들어왔다. 상의는 캐주얼한 티셔츠에 하의는 무릎까지 오는 반바지를 입고 있던 남자의 팔뚝은 꽤 튼튼해 보였고 종아리 근육까지 뚜렷했다. 남자는 키도 크고 외모도 준수했다.“동철 오빠?”“서프라이즈라고 할까?”최동철이 웃으며 들어와 그녀의 옆자리에 있는 의자를 끌어당겨 자리에 앉았다.“네가 귀국했다는 걸 알고 연수한 편집장님께 추천했어.”온하랑이 웃으며 말했다.“그럼 저야 감사하죠, 동철 오빠. 어쩐지 연수한 편집장님께서 왜 저 같은 아마추어를 찾는지 궁금했는데, 다 동철 오빠 덕분이었네요.”모델은 그들의 옆에서 긴장감에 덜덜 떨고 있었다.조금 전 두 사람이 즐겁게 얘기를 나눌 때까지만 해도 온하랑이 젊고 유능한 사진작가라고 생각했다.지금 들어보니 그냥 낙하산이었네!촬영 결과물이 재앙 수준만은 아니길 빌어야 했다.“하랑 씨 너무 겸손하시네요. 저도 아무나 받는 사람 아닙니다.”연수한이 웃으며 말했다.“하랑 씨 작품 보고, 하랑 씨가 적임자라고 생각해서 연락 드린 겁니다.”편집장의 말을 들은 모델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그러셨군요. 그럼 전 편집장님의 신뢰에 감사드려야겠네요. 이렇게 주신 기회니까 기대 절대 저버리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그럼 저도 하랑 씨 작품 기대해볼게요.”“너 필라시에서 잘 지내고 있었잖아. 왜 돌아온 거야?”최동철이 느긋하게 몸을 뒤로하더니 한쪽 팔꿈치를 의자 등받이에 걸쳤다.온하랑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제가 돌아온 건 알면서 왜 돌아왔는지는 모르세요?”부승민이 승리를 쟁취하고 필라시로 갔던 일은 강씨 일가쪽 사람이라면 모를 리가 없었다.최동철이 입술을 다물더니 말을 꺼냈다.“둘이 화해하기로 한 거야?”최동철도 뒤늦게 온하랑과 부승민의 결별은 강씨 일가와의 싸움을 위한 연극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동철 오빠?”“우리 외삼촌 때문에...”최동철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술잔을 들어 술을 들이켜고는 천히 또 한 잔을 따랐다.“외삼촌이 너희 아버지 사건을 재조사하려던 부승민을 막아서... 죄를 부민재한테 덮어씌우려고...”“저번에 내가 그랬지, 강씨 가문이랑 부승민이 척을 졌던 이유가 단순히 이익 때문이라고... 사실은 그게 아니야.”온하랑이 입술을 달싹였다.귀국 후, 온하랑은 일부러 최동철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그와 거리를 두고 싶었다.“이거 봐. 딱히 부정도 안 하네. 내가 싫어진 거지?”“...”온하랑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싫어한다고까지는 못하지만, 그냥 이해가 안 될 뿐이에요.”필라시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온하랑은 최동철의 말을 굳게 믿었다.하지만 뒤늦게 부승민에게서 부승민과 강씨 일가의 싸움이 아버지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 시절 온하랑은 부승민이 강씨 일가의 소행을 모르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부승민이 온하랑에게 그 일에 관해 얘기할 때 어떻게 그토록 태연하게 강씨 일가를 위해 힘써야 한다고 얘기할 수 있었을까?하지만 지금 부승민은 자신이 온하랑을 속였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니 그때의 부승민도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이해가 안 된다면서 왜 직접 나 찾아와서 안 물어봤어?”최동철은 이마에 팔을 갖다 대더니 가늘게 실눈을 뜬 채 온하랑을 바라보았다.온하랑도 왜 최동철이 강씨 일가에 대한 조사를 막았는지 물어보고 싶었다.하지만 생각해보니 물어본다고 해서 딱히 달라지는 것도 없는 것 같았다.최동철과 온하랑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인연일 뿐, 최동철은 온하랑에게 모든 일에 대해 설명해줄 필요가 없었다.최동철이 몇 번 온하랑을 도와줬다고 해서 그녀의 모든 걸 다 도와줘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제가 아버지 사건에 얼마나 관심을 갖고 있는지 뻔히 아는 동철 오빠가 그런 선택을 했다는 건, 분명 그만한 이유가
여기까지 말을 꺼내자 최동철의 눈가가 촉촉해지더니 말끝을 흐렸다.그는 바로 눈을 질끈 감고 머리를 의자 등받이에 기댄 채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부승민의 성장배경을 다시 떠올려본 온하랑은 그제야 알아차릴 수 있었다.부승민이 바로 예전 부선월과 최국환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다.어머니가 세상을 떴지만, 어머니를 죽인 그 범인은 멀쩡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이게 최동철이 부씨 가문을 싫어하는 이유였다.그래서 강씨 일가가 사건 재조사를 꺼렸던 것이다. 부승민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기 위해. 어쨌든 판결만 내려지면 부씨 가문의 장남이 살인범이라는 소문이 빠르게 퍼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연스레 BX 그룹도 큰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그 기회를 틈타 최씨 가문과 강씨 가문은 물론이고 콩고물이라도 얻어먹으려는 사람들이 개떼처럼 달려들 게 뻔했다. 그렇게 되면 부씨 가문은 살아남는다고 해도 예전 같은 파워는 다시 얻을 수 없을 것이다.온하랑은 문득 예전에 자신과 최국환이 했던 통화를 떠올렸다.어쩐지 수화기 너머의 최국환이 지나치게 친절한 것 같았는데 그 이유가 이제야 밝혀졌다. 온하랑이 자신의 전 며느리였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임연지가 자신에게 자꾸 찝쩍댄 탓에 부승민이 직접 부씨 가문으로 찾아갔던 것도 한몫했던 것 같다.최국환이 그토록 쉽게 부승민의 부탁을 들어줬던 이유도 부승민이 자기 아들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동철 오빠, 저도 오빠 감정 어느 정도는 이해해요. 저도 어릴 때 엄마가 없었거든요. 다행히 저를 위해선 목숨도 기꺼이 내어줄 정도로 저를 사랑하는 아빠가 계셨죠. 그래서 저는 아빠가 왜 죽었는지 그 사건의 진상을 꼭 알아내야만 해요.”하지만 최동철은 온하랑처럼 운이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와 최국환의 관계는 그저 평범하고 서먹서먹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최동철의 입에서 자신의 유일한 친혈육인 최국환 대신 외삼촌, 외할머니 같은 단어들만 나올 리가 없었다.최국환이 조금만 더 책임감 있는 사람이었다면 이런 상황도 벌어질 이
온하랑은 자신의 옆방을 최동철에게 잡아주고 자신의 두 경호원을 시켜 최동철을 침대에까지 부축했다. 침대 위에 뻗어버린 최동철이 마음 놓고 잘 수 있도록 신발까지 벗겨주었다.온하랑은 내친김에 에어컨도 적정한 온도로 맞춰주고 주전자로 물까지 데워 침대 맡에 놓아두었다.이 모든 일을 끝내고서야 온하랑은 최동철의 방을 벗어나려 했다.그 순간, 최동철이 온하랑의 손목을 잡고는 두 눈을 꼭 감은 채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슬픈 꿈이라도 꾸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낮게 속삭였다.“가... 가지 마...”그 모습을 본 온하랑은 침대 곁에 앉아 부드러운 목소리로 최동철을 달랬다.“안 갈 테니까 편히 자요.”사실 진지하게 말하면 둘의 우정 관계에서는 최동철의 일방적인 도움이 더 컸다. 촬영 쪽으로도 그렇고 필라시에 있을 때도 그렇고 장국호를 다시 체포할 때도 최동철의 도움을 받았지만 온하랑은 최동철을 도운 적이 딱히 없었다.온하랑은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갖고 최동철을 착하고 좋은 오빠로 여겼다.저번 일로 온하랑은 최동철을 서서히 멀리하긴 했지만 그가 강씨 일가의 편에 섰다고 해서 최동철을 원망하거나 미워할 생각은 없었다.최동철은 온하랑을 책임져주는 사람도 아니었고 그러니 온하랑을 도울 의무도 없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하지만 이 일에는 부승민의 영향이 컸던 탓에 일부는 부승민 때문이었겠지만 그렇다고 해도 온하랑은 여전히 최동철에게 감사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가지 마...”최동철은 여전히 편히 잠들지 못했다. 그는 계속 입술을 달싹이며 미세한 목소리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온하랑은 몸을 숙여 자신의 귀를 최동철에게 가까이 갖다 대고 나서야 겨우 몇 글자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보고 싶어요, 어머니, 어머니...”아마 꿈에서 어머니를 만난 모양이다.어머니를 직접 본 적은 없었지만 강씨 집안 사람들이 말해준 어머니의 생전 이야기 덕분에 최동철의 머릿속에서 어머니의 모습이 구체화 된 듯했다.“...”온하랑은 최동철의 덕을 볼 생각은
수화기 너머로 임가희는 잠시 멍해 있다가 임연지가 충동적으로 행동했을까 봐 걱정하며 바로 물었다.“오늘 센트럴 백화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아? 모르셨어요?”간하림은 간단하게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따귀를 맞은 일로 설윤은 굉장히 화가 났어요. 그래서 지금 사모님께 복수할 생각만 하고 있다니까요.”그 말을 듣자 임가희는 안심했다.뺨 한 대 맞고 참지 못해 도망가는, 겨우 스무 살짜리 감정적인 계집애 따위는 신경 쓸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무심하게 말했다.“이틀 후에 너희 가게로 갈 거야. 그때까지 설윤을 잘 부추겨서 나한테 덤비게 만들어.”간하림은 곧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챘다.“알겠습니다. 사모님,”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드는 장면은 반드시 녹화되어 최국환에게 전달될 것이다.하지만 어떻게 하면 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들도록 만들 수 있을까?리우 그룹.최국환은 회의를 마치고 몇몇 오랜 친구들과 식사를 하러 갔다.모임이 끝나고 나서야 비서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찾았다.“오전에 사모님과 설윤 씨께서 전화하셨습니다. 설윤 씨는 가방을 사지 않겠다고 하시며 환불해 달라고 하셨습니다.”“갑자기 왜?”“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화에서 설윤 씨 목소리가 이상했어요. 울먹이는 것 같았습니다.”최국환은 한창 젊은 애인에게 푹 빠져 있던 터라 설윤에게 전화를 걸었다.거의 끊어지려는 순간, 전화가 연결되었다. 설윤의 목소리는 살짝 쉰 듯했다.“국환 씨.”“김 비서 말로는 가방 환불해 달라고 했다던데.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더니 왜 갑자기?”설윤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싫어졌어요. 이유는 없어요.”“이유가 없어? 그럼 목소리는 왜 그래? 누가 괴롭혔어? 누군지 말만 해. 감히 내 여자를 괴롭히다니!”“묻지 마세요. 저 때문에 국환 씨와 사모님 사이가 나빠지는 건 싫어요.”“오? 내 마누라와 관련된 일이야?”“말했잖아요, 묻지 마시라고요. 더 물으면 저 진짜 삐질 거예요.”“아이고, 또 어린애
“정말... 어이가 없어...”설윤은 시선을 피하며 돌아서려 했다.“어딜 가요? 방금 구매 기록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이제 와서 못 보여주는 건데요?”임연지는 설윤의 길을 막아서며 그녀 손에 든 선물 상자를 잡고 비꼬듯 말했다.“젊은 아가씨가 왜 이렇게 뻔뻔해요? 유부남인 거 뻔히 알면서 끼어들다니. 내 고모부가 그쪽 아빠보다 나이도 많은데, 역겹지도 않아요? 몸 팔아서 얻은 가방을 들고 다니니까 좋아요?” 마침 가게에 들어오던 손님 몇 명이 임연지의 말을 듣고 문 앞에서 수군거렸다.설윤은 수치심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임연지를 밀치고 가게를 나서 황급히 도망쳤다.간하림은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뒤따라갔다.“저기요. 설윤 씨, 가방은...”점원은 임연지의 손에 들린 선물 상자를 보고 두 번 불렀다.그러나 설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이게 다 무슨 일이래!“그만 불러요. 안 올 거예요.”임연지는 웃으며 손에 든 선물 상자를 내려다봤다.“저 여자가 싫다고 두고 갔으니 이 가방 저 주세요.”“임연지 씨, 죄송하지만 설윤 씨는 그런 말씀이 없으셔서...”“걱정 마세요, 분명히 환불할 거예요. 환불하면 이 가방 저한테 남겨 두세요.”임연지는 선물 상자를 점원에게 건넸다.점원은 임연지의 배경을 생각하며 마지못해 대답했다.“설윤 씨가 환불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네.”가방을 못 사서 한진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했는데 상황이 반전되고 내연녀까지 혼내주고 나니 임연지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윤아, 괜찮아?”마침내 매장 근처를 벗어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사라지자 설윤은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간하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넋이 나간 채 앞으로 걸어갔다.“윤아, 어디 가서 좀 앉을까?”설윤은 마침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근처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간하림이 그녀를 위로했다.“윤아, 너무 속상해하지
한진은 큰 도움을 주고도 단지 가방 하나 사달라는 부탁만 했을 뿐인데 실망을 안겨주게 생겼으니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심지어 가방을 선물해주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했는데 무슨 생각 할지 걱정되었다. 설마 공짜로 주기 싫어서 쪼잔하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임연지가 물었다.“다음번에 언제 입고되나요?”점원은 임연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정확하게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회원 가입하시면 나중에 재고를 확보할 때 연락드리고 있어요.”“그래요. 할게요.”임연지는 마지못해 동의했다.“연락처가 어떻게 돼요?”점원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물었다.임연지는 전화번호를 말하며 머릿속으로 한진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했다.“설윤 씨, 어서 오세요. 가방 찾으러 오셨죠? 잠깐 앉아 계시면 금방 가져다드릴게요.”다른 점원의 반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네, 고마워요.”소리의 출처를 따라 고개를 돌린 임연지는 젊은 여자 두 명을 발견하고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윤아, 여기 점원이랑 아는 사이야? 물건을 엄청 많이 샀나 보네? 부러워.”나지막이 속삭이는 여자 목소리가 임연지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이내 경멸이 담긴 표정으로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세상 물정 모르는 촌년들. 잠깐! 왼쪽에 있는 여자가 낯이 좀 익은데?’그리고 고개를 돌려 찬찬히 뜯어보았다.분명 어딘가 본 듯한 얼굴이다.기억을 되짚어보던 찰나 점원이 정교한 선물 상자를 들고나와 두 여자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뚜껑을 열고 안에 든 가방을 보여주었다.“설윤 씨가 구매한 가방이에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설윤은 가방을 꺼내 꼼꼼히 살펴보았다.“확인했어요. 고마워요. 먼저 가볼게요.”점원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불쾌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대뜸 울려 퍼졌다.“재고가 없다면서요? 분명 제가 먼저 왔는데 왜 저 사람한테 주는 거죠?”싸늘한 표정으로 따지는 임연지를 보자 점원이 서둘러 해명했다.“이 가방은 손님께서
일과를 마친 설윤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돌아갔다가 간하림과 다시 마주쳤다.이내 먼저 입을 열었다.“하림아, 내일 쉬는 날인데 같이 쇼핑하러 가지 않을래?”임가희가 부탁한 일을 떠올리자 간하림은 흔쾌히 동의했다.다음 날, 두 사람은 약속 시간에 맞춰 센트럴 백화점 근처의 카페에 도착했다.일단 만나자마자 설윤은 밀크티 두 잔을 주문했고, 백화점으로 걸어가면서 쪽쪽 빨아 마셨다.간하림이 말했다.“여긴 명품밖에 없을 텐데? 지난번에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발견했다가 가격 보고 기겁했잖아. 그나저나 꽤 익숙한 곳인가 봐? 여기 자주 와?”“내가 무슨 재주로? 국환 씨 따라 몇 번 다녀갔을 뿐, 며칠 전에 가방 하나 주문했는데 오늘 픽업하러 가는 거야.”“헐! 회장님 너무 근사하잖아.”설윤을 바라보는 간하림의 눈빛에 부러움이 가득했다.“그러니까 얼른 행동 개시해야 한다고. 사모님과 이혼시키고 너랑 결혼할 방법을 찾아야 해.”비록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질투심이 활활 타올랐다.목적을 이루기 위해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정이었다.사실 그녀는 속으로 뻔했다. 최국환과 임가희는 결혼 전에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설윤에게 준 돈은 부부의 공동 재산에 속하지 않는지라 다시 빼앗아 갈 자격이 없었다. 물론 최국환이 직접 개입하면 회수가 가능했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나중에 임가희가 설윤에게 본때를 보여주거나 최국환의 마음이 식는다고 해도 그동안 받았던 값비싼 선물은 여전히 가져갈 것이며 현금화하면 그래도 두둑이 챙길 수 있다.결국 임가희가 손을 쓰는 이상 설윤은 곧 최국환에게 찬밥 신세 당하므로 얼추 비슷한 액수의 보수를 받을뿐더러 임가희라는 인맥까지 확보하기에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였다.그제야 간하림은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설윤의 표정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어젯밤에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네 말이 맞아. 국환 씨 아내와 적이 된 이상 내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상대방이 봐주는 건 아니지. 고작 돈 몇 푼
“자, 이제 그만하고 출근하자. 아니면 매니저한테 또 혼날라.”설윤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탈의실을 나가려고 했다.“먼저 가. 나 립스틱만 바르고.”“알았어.”설윤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간하림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사모님이 부탁한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군.’...병원에 도착한 최동철은 올라가는 대신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온하랑은 부승민과 작별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유치원 확인하러 직접 다녀온다고 하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차에 타고 나서 메이슨을 데리러 갈 줄 알았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최동철이 말했다.“별장에 계신 이모님이 연락이 와서 오늘 메이슨이 일어나자마자 발이 아프다고 했다네. 아마도 어제 강행군이었나 봐. 그래서 집에서 쉬겠다고 해서 우리 둘만 가면 돼.”온하랑은 미안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어제 많이 걸어 다니긴 했죠. 메이슨을 말렸어야 했는데...”“네 탓 아니야. 내가 너무 바빠서 녀석이랑 놀아주지 못하는 바람에 무리한 거지.”이에 온하랑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동철 오빠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메이슨도 철이 들었고.”최동철이 피식 웃었다.“우리 사이에 남사스럽게 뭔.”이동하는 동안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면서 편안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했다.동언 국제 유치원에 도착하자 젊은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하며 소개와 함께 내부를 구경시켜주었다.“우리 유치원은 총 3개의 반으로 나뉘는데 최대 학생 수를 각각 20명 이내로 확보하여 교사들이 모든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게끔 노력하죠. 교실에는 멀티미디어 교육 장비가 구비되어 있으며 전용 독서 공간, 놀이 공간, 수공예 공간, 실내외 감시 카메라, 그리고...”꼼꼼하게 알아본 결과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온하랑은 꽤 만족했다.이내 유치원을 나서고 최동철에게 의견을 물었다.최동철이 말했다.“몇 군데가 노후한 것만 빼고 기본적인 인프라는 괜찮네. 시설 개조 명목으로 2억을 기부할 생각이야. 게다가 메이슨도 특별한 케이스라
설윤은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봤어? 다른 사람한테 절대 얘기하면 안 돼.”“당연하지.”간하림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나 몰라? 걱정 붙들어 매.”그리고 다정하게 설윤의 팔짱을 끼고 클럽 탈의실로 향했다.아직 아무도 없었고, 간하림은 옷을 갈아입으며 궁금한 듯 물었다.“윤아, 최 회장님과 어떻게 알게 되었어?”딱히 언급하고 싶지 않은 설윤은 대충 둘러댔다.“우연한 기회에 마주쳤어. 전에 일하던 곳에 놀러 왔다가 마침 내가 접대를 담당했거든.”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간하림은 부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내 손을 뻗어 설윤의 잘록한 허리를 꼬집었고, 뽀얀 피부에 선명한 붉은 자국을 바라보았다.“최 회장님이 네가 진짜 마음에 드나 봐. 직접 출근하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정말 좋겠네.”설윤은 피식 웃으며 옷을 갈아입었다.“너도 든든한 지원군이 있잖아.”“든든하긴 개뿔! 하늘과 땅 차이거든?”간하림이 툴툴거렸다.“가게에 오면 지명할 뿐이지 너처럼 최 회장님 전속 담당이 아니야.”심지어 손님마저 감히 설윤에게 집적거리지 못했고, 누가 봐도 사전에 단단히 경고한 게 분명했다. 반면, 그녀는 치근덕거리는 사람이 있어도 꾹 참아야만 했다.설윤은 웃으면서 아무 말 없이 거울을 보며 헤어스타일을 다듬었다.“윤아, 나중에 사모님이 되면 날 잊지 마.”“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가 뭐 하는 사람인지 정녕 몰라?”이내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바르더니 간하림을 흘겨보았다.“국환 씨가 싫증이 나기 전에 돈이라도 두둑이 챙기면 땡큐고, 사모님은 감히 넘보지도 않아.”간하림은 납득할 수 없는 듯 바짝 다가갔다.“우리가 뭐 어때서? 최 회장님 와이프도 결국에는 사모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했잖아. 그리고 며칠 전 기사 못 봤어?”“무슨 기사?”곧이어 출입구를 힐끗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누군가 최 회장님 와이프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해서 끔찍한 상처를 입었대.”“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임연지는 집에 도착하자 거실 소파에 앉아 굳은 얼굴로 손에 든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는 임가희를 발견했다.테이블에 놓인 등기 전용 서류 봉투 위에 여러 장의 사진이 널브러져 있었다.“고모, 왜 그래요?”말을 마치고 나서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고모부가...”이내 나머지 사진도 확인했는데 전부 어떤 젊은 여자와 다정한 스킨십을 하는 최국환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결코 가벼운 사이는 아닌 듯싶었다.“왜 이렇게 소란스러워?”임가희가 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흘겨보았다.임연지는 목을 움츠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임가희를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고모, 이제 어떡해요?”“어떡하긴?”임가희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모른 척해야지. 지금 네 고모부 덕분에 우리가 먹고 사는 거야. 괜히 추궁했다가 홧김에 쫓아내기라도 한다면 더 손해이지 않겠어?”그렇다고 마냥 당할 수는 없었다.지금껏 비슷한 사례가 여러 번 있었지만 하나같이 머리가 텅 빈 여자들이라 그녀의 도발에 넘어가서 부랴부랴 찾아와 따지기 급급했다. 나중에 울면서 최국환에게 하소연하면 정이 떨어진다며 다시는 만나주지 않았다.또한 최국환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도 신분과 집안, 그리고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다.어쨌거나 그 나이 먹고 결혼을 3번이나 하면서 웃음거리로 전락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본처의 자리를 위협받지 않은 이상 고작 여자 문제로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뭐 있겠는가? 뒤에서 몰래 처리하면 그만이었다.“그냥 넘어가려고요?”비록 고모의 말도 맞지만 그래도 왠지 꺼림칙했다.“넌 신경 쓰지 마. 고모부 앞에서도 티 내지 말고.”임연지는 사진 속 여자를 힐끗 쳐다보며 속으로 ‘여우 년’이라고 욕하고 마지못해 대답했다.“알았어요.”임가희는 사진을 모두 치웠다.무언가를 떠올린 듯 임연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참, 고모, 만약 이 여자가 임신하면 어떡해요?”“네 고모부의 컨
“침착해.”임연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호텔에서 제공한 가운을 느긋하게 껴입었다.“샤워했어? 나랑 같이 씻을래?”“꿈 깨.”이내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면서 문을 열자 알몸으로 나타나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으려는 오재원을 발견했다.“연지야.”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슬쩍 피했다.“호텔에서 푹 쉬어. 먼저 가볼게.”“아직 이른데? 좀 더 있다 가.”“안돼.”임연지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오재원을 스쳐 지나가 침대 옆으로 걸어가서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 들었다.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쌀쌀맞은 얼굴을 보자 오재원은 꼬리를 내렸다.“알았어. 그럼 언제 다시 올 거야? 그리고 원하는 집이 있으면 알려줘. 부동산에 물어볼게.”“방 3개, 풀옵션. 나머지는 알아서 해.”“그래.”임연지는 옷매무새와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방을 나갔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뒤돌아보며 혀를 찼다.‘역겨운 놈.’집으로 돌아가는 차에 몸을 싣고 한진에게 답장을 보냈다.[호텔을 벗어나니 공기마저 상쾌한 기분이야.]한진이 대답했다.[하하하! 참,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우리 오빠가 인맥을 동원해서 각 언론사에 수시로 주시하라고 했잖아. 그중에서 제보받은 회사가 있는데 편집장이 이메일을 보자마자 오빠한테 연락했대.]그러고 나서 이메일의 스크린샷을 보내주었다.본문의 첫 마디가 온하랑이 필라시에서 유학할 때 최동철과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었다.임연지는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대박인데? 고마워, 한진아. 오빠한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해줘. 네가 아니었다면 진짜 아프리카로 쫓겨났을지도 몰라.]그동안 한진의 오빠가 사전에 뉴스를 차단하지 못하고 자칫 폭로라도 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이제 결과를 확인한 이상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하지만 대체 누가 제보했단 말이지?한진이 다시 문자를 보냈다.[물론 메일 주소를 역추적한 결과 여전히 너희 집으로 되어 있어. 아마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가상 주소를 사용한 것 같아.][미친놈.]임연지는 화가 나서 머리카락을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임연지는 그 틈을 타서 오재원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오재원은 그녀를 따라 나가려고 했지만 잠시 뒤 자신이 들고 있던 캐리어를 떠올리고 그것을 끌며 엘리베이터를 나왔다.방에 들어가자 오재원은 서둘러 캐리어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임연지를 끌어안고는 침대 쪽으로 밀어붙였다. “연지야, 빨리 나 주라고. 더는 참을 수 없어.”“오재원! 이거 놔! 먼저 일어나!”“안 돼. 연지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그냥 즐기기만 하면 돼.” 그녀는 그를 힘껏 밀쳤고 마음속에서 강한 반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오재원의 힘이 너무 강해 벗어나기 힘들었다. “오재원, 내 말 들어봐. 우리 얘기 좀 해야 해.” 임연지는 차분하게 말하며 그가 자신의 말을 듣길 바랐다.하지만 오재원은 이미 욕망에 눈이 멀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임연지에게 입을 맞추려 했고 손은 그녀의 몸을 함부로 만지기 시작했다.“얘기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걸 알아. 우리는 지금 중요한 일을 하는 거야.” 그는 말을 마친 후 임연지의 입술을 막았다. “연지야, 잘 생각해. 네가 만약 나를 밀어내면 난 바로 나갈 거야.” 임연지는 속에서 역겨움이 밀려왔지만 그녀의 밀치는 손길은 결국 멈춰 섰다.“그래 이거지.”오재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는 충분히 즐겼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오재원은 임연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너 너무 향기로워. 연지야. 어쩌면 이제 우리 아이가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네.”임연지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더 이상 그를 피하지 않으면 정말로 오재원에게 뺨을 갈길 것만 같았다.화장실에 들어간 임연지는 핸드폰을 꺼내 한진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불만을 토로했다. [한진아, 살려줘. 진짜 그 사람이 너무 싫어!][돌아오자마자 나랑 자려고 하고 역겨워 죽겠어!][내가 기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