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아의 마지막 체리가 누구에게 향할지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하지만 그 시선들이 무색하게 아이는 마지막 한 알의 그 체리를 자신의 입속에 넣어버렸다. 부시아의 작은 입이 체리로 꽉 차 볼록하게 부풀어 올랐다.“어머, 시아야. 얼른 뱉어!”그 모습을 보던 서정훈의 아내는 혹시라도 체리가 아이의 목에 걸릴라 깜짝 놀라 외쳤다.“걱정하지 마세요, 사모님. 시아도 씨는 뱉어낼 줄 아니까요.”부승민이 말했다.서정훈의 아내는 그제야 안심하는 듯했다.“그래? 그럼 다행이고. 우리 시아 정말 똑똑하네.”부시아는 입술을 몇 번 오물거리더니 체리 씨를 뱉어 휴지통에 버렸다.부시아는 속으로 이게 뭐가 똑똑하다는 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과일에 씨가 있으면 뱉어내는 게 정상인데.부시아가 스스로 씨를 뱉어 휴지통에 넣는 모습을 본 부인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우리 시아, 쓰레기도 버릴 줄 아는 거야? 대단한걸.”부인은 아이가 이렇게 똑똑한 이유는 부승민을 닮아서일 것으로 생각했다.“...”“여보, 이거 좀 봐요. 시아 입, 희수 아가씨 닮지 않았어요?”서희수는 서정훈의 여동생으로 연도진과 이엘리아의 엄마였다.그 말에 서정훈이 부시아를 자세히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닮은 것 같네.”이엘리아가 웃으며 말했다.“제 딸이니까 저희 엄마를 닮은 거겠죠.”이엘리아는 그러면서도 속으로 정말 잘 됐다는 생각을 삼켰다.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부시아가 자신의 아이라는 걸 더 철석같이 믿을 게 분명했다.거실에 모여 한참 대화를 나누던 중, 서정훈이 말했다.“승민아, 나랑 잠시 올라가서 얘기 좀 하지.”“네.”부승민은 서정훈을 따라 몸을 일으키며 부시아에게 당부했다.“시아야, 외외종 할머니 말씀 잘 듣고 있어야 해, 알겠지?”“알았어요.”위층에 있는 서재에 도착하자 서정훈이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앉아, 승민아.”부승민은 서정훈의 건너편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도우미가 서재까지 찻잔과 차를 대령했다.부승민이 먼저 주전자를 들어
“주식은 바로 얼마 전에 양도 마쳤습니다. 의원님께서는 모르고 계시겠지만 저는 절대 시아 위축되게 하지 않을 겁니다.”서정훈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문서들을 한데 모아 옆에 두며 말했다.“이 성의는 내가 시아 대신 받아들이도록 할게.”부승민이 옅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만족하신다면 다행입니다.”“넌 이엘리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하구나.”서정훈이 느긋하게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어제 이엘리아가 모든 일을 얘기해주었을 때, 서정훈은 곧바로 경찰에 신고해 부승민의 책임을 물을 것을 요구했지만 이엘리아에 의해 제지당했다. 그녀는 오히려 우물쭈물하며 부승민도 피해자라며 감싸주었다.서정훈이 보기에도 이엘리아는 처음부터 부승민을 마음에 품고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자신이 낳았던 아이의 아버지가 부승민이라는 사실까지 알게 되자 뒤늦게 자신의 아이를 찾아간 모양이었다.만약 부승민에게 결혼 경력도 없고 따로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람만 없었다면 절대 결혼 상대로 부족한 사람이 아니었다.하지만 부승민은 이미 결혼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고 전 부인과도 재혼 생각을 품은 채 계속 만남을 이어가고 있었다.그러니 서정훈은 부승민이 마냥 곱게 보이지는 않았다.“그럼 나도 굳이 돌려 말하지는 않을게. 이엘리아가 단순하고 천진난만한 성격에 어릴 때부터 집에서 예쁨만 받고 자란 탓에 오만방자하거든. 그래서 난 이 아이를 거의 동생으로 생각하고 있어.”“그러니까 차라리 관계를 시원하게 끊어내는 편이 좋겠어. 더는 애한테 헛된 희망 품게 하지 마.”“저는 단 한 번도 희망을 품게 한 적 없습니다. 그저 일이 제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닐 뿐이죠. 이엘리아 씨는 시아 엄마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딸 보겠다고 찾아오는 이엘리아 씨를 막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그 말에 서정훈이 멈칫하더니 이내 고개를 숙여 생각했다.“난 너랑 시아 양육권 문제에 대해 얘기를 나눠보고 싶구나.”부승민의 표정이 덤덤했다.“저는 굳이 얘기해볼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른들 입
“아직이요.”“딱히 별다른 일만 없으면 하루빨리 재혼하도록 해.”이엘리아가 마음을 접을 수 있게 하라는 뜻이었다.부승민이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내쉬었다.“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에요. 하랑이도 원래 저랑 재혼하려고 했는데 이 일로 저한테 반감이 생긴 것 같아서 재혼이 조금 힘들어진 것 같네요.”서정훈은 온하랑을 총알받이로 쓰고 싶은 모양이었다.지금 부승민이 온하랑과 다시 재혼을 해버리면 이엘리아의 총구는 바로 온하랑에게 향하지 않겠나?이엘리아는 부승민에게 차마 무슨 짓을 벌일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교묘하게 방식만 바꿔 온하랑을 공격하려 할지도 모른다.임신한 상태의 온하랑에게는 이엘리아의 공격을 버텨낼 능력이 없었다.“...”“그러니까 의원님께서는 이엘리아 씨가 저한테 시간 낭비하는 게 싫으시다면 이엘리아 씨 좀 설득해보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그게 아니면 필라시로 돌아가서 잠깐 진정하는 편도 나쁘진 않겠네요.”연도진도 이엘리아를 필라시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중이었다.서정훈이 말했다.“생각 좀 해볼게.”...점심 식사를 마치자 부시아는 서정훈 가족들을 향해 작별인사를 건넸다.이엘리아는 이 기회를 틈타 두 사람과 함께 나가려 했지만 연도진 만큼이나 예리한 서정훈이 그녀가 하려는 짓이 무엇인지 예측하고 제지했다.그 때문에 이엘리아의 심기가 불편해졌다.차에 올라탄 부시아는 볼록한 작은 배를 문지르다가 용돈 봉투를 뜯어 한 장 한 장 세기 시작했다.“시아야, 외외종 할머니랑 외외종 할아버지 좋아?”“네, 좋아요.”부시아는 고개도 들지 않고 계속 돈을 세는 데에 집중하다가 뭔가가 떠오른 듯한 표정으로 말을 더했다.“외삼촌은 싫어요.”“...”“다음부터 삼촌이 자주 데리고 올게.”“네.”부시아가 웃으며 말했다.“외외종 할아버지네 집 경호원 아저씨 엄청 멋있어요!”부승민이 아이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그건 경호원이 아니라 경비원이었다.“시아야, 지금 숙모 보러 가자. 어때?”“좋아요!”부승민이 차를 몰고 더원파
하필이면 쓸데없이 약점만 잡혀서!임연지가 차에 올라타는 것을 본 미화원은 가슴을 살살 치며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눈빛이 어쩜 저리도 살벌한지.뱃속 아이에게 덕담을 해줬는데도 기뻐하긴커녕 계속 노려만 보니 말이다.딸을 갖고 싶은 거라 해도 사람을 이렇게까지 살벌한 눈빛으로 볼 필요가 있을까?차에 올라탄 임연지는 운전 기사에게 경주로 가달라고 분부했다.경찰에 체포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임연지는 보석으로 풀려났지만 이번에 다시 강남으로 소환되었다.임연지는 차 시트 등받이에 몸을 기대앉았다. 지금 그녀의 마음은 먹구름으로 가득 찬 끊이지 않는 장마철처럼 우울하고 답답했다.마치 거대한 바위에 가로막혀 끝이 보이지 않는 그녀의 삶과 같았다.기뻐할 만한 일이라고는 없었다.구치소에서 임신 소식을 알게 된 그녀는 진실을 거부하고 싶었다.그날 밤 차고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린 임연지는 구역질이 나 토할 것만 같았다. 마음 같아서는 이 작은 생명을 죽여버리고 싶었다.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이 작은 생명으로 보석으로 풀려나고 감형도 받아야 했고 형량이 정해진 후에도 어느 정도의 유예를 선고받아야 했다...그래서 무조건 이 아이를 낳아야만 했다!임연지가 주먹을 꽉 쥐었다.최씨 가문의 본가에 도착한 임지연은 친구들의 모임에 초대받게 되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심보도 악랄하고, 욕심도 많고, 쓸데없이 허영심만 많고 수치심도 없는 사람이라며 비난하는 것을 들어버렸다...그날 이후로 누군가가 귓속말을 주고받는 모습만 봐도 임지연은 사람들이 자신을 비난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누군가가 자신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이 자신을 조롱하고 있을 것이라는 피해망상이 생겨버렸다.임연지가 밤마다 불룩하게 올라온 자신의 배를 바라보며 당장이라도 칼을 찔러넣어 버리고 싶은 심정을 얼마나 힘들게 억제해왔는지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하지만 지금 임연지에게는 자신의 상황을 바꿀 방법이 없었다.지금 임연지는 아무것도 할 수
이들을 갈라놓으려는 사람들만 없었다면 좋았을 텐데.이엘리아를 떠올린 부승민의 눈빛이 서늘해졌다.연도진은 분명히 이엘리아가 강남에 남아있는 것을 원하지 않는 눈치였다.서정훈도 이엘리아를 필라시로 돌려보내고 싶어 했다.부승민은 그 둘에게 약간의 도움만 주면 되었다.“왜 왔어?”온하랑이 물었다.“숙모랑 송이랑 같이 놀고 싶어서 왔죠.’“오늘 오후에 어디 갔다 왔어?”부승민이 고개를 들어 잠시 온하랑을 바라보더니 이내 다시 고개를 숙여 노트북에 시선을 집중했다.“경찰서 다녀왔어. 추서윤이 죽었대. 사건 조사도 끝났고...”온하랑을 말을 하며 부승민을 빤히 쳐다보았다.“야.”“응?”부승민이 온하랑의 부름에 고개를 들었다.“추서윤이 죽었다고.”“알아, 일주일 전부터 알고 있었어.”“...”“전혀 슬프다거나 안타깝지는 않아? 그래도 한때는 연인이었잖아...”“넌 내가 추서윤 죽음에 안타까워하고 슬퍼했으면 좋겠어?”부승민이 눈썹을 들썩이며 온하랑을 바라보았다.온하랑은 부승민의 질문에 입만 꾹 닫은 채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돌려 부시아와 대화를 시도했다.부승민이 웃으며 몸을 일으켜 온하랑의 곁으로 자리를 옮겼다.“내가 사실대로 말했으면 좋겠어?”“그러든지 말든지.”부승민은 웃는 얼굴로 온하랑의 곁에 가까이 다가가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추서윤이 죽었다고 했을 때 감회가 좀 새롭더라고.”“그게 끝이야?”온하랑이 곁눈질로 부승민을 바라보았다.“그리고 조금 아쉬웠어.”“아쉽다고?”“응, 너무 늦게 죽은 것 같아서. 조금만 더 빨리 죽어줬으면 내가 걔 손에 놀아나는 일도 없었을 테고, 우리도 어쩌면 이렇게 남이 되지는 않았을 것 같아서.”온하랑이 아버지를 잃고 혼자 외로운 나날들을 버티고 있던 때, 부승민은 병원에서 그녀의 아버지를 죽인 범인 중 한 명인 추서윤의 간호를 해주고 있었다.그때까지만 해도 둘은 서로 모르는 사이였다.다만 인제 와서 생각해보니 그때의 온하랑이 너무 불쌍하게 느껴졌다.어쩌면 이건 부승민의
온하랑이 시계를 흘끔 쳐다보더니 말했다.“얼른 돌아가는 게 좋을 거야. 시연이가 곧 돌아올 예정이라서.”“시연 씨가 돌아오는데 우리가 왜 나가야 해?”부승민이 물었다.“그러니까요!”부시아가 동의하며 말했다.“시연이가 여기서 너희들이랑 마주치면 내가 좀 곤란해져.”부시아가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시연 아줌마 이제 저 안 좋아해요?”“아니, 시연이는 너희 아빠를 싫어하는 거야.”김시연은 어느 정도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그녀는 아무 죄 없는 아이에게 반감을 품지는 않았지만 항상 부시아가 이엘리아와 부시아의 아이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있었다.“그럼 삼촌, 삼촌 혼자 돌아가는 건 어때요?”아이는 온하랑의 곁을 떠나기가 싫었다.부시아는 온하랑의 집에 남고 싶으면 남고, 함께 자고 싶으면 잘 수 있었던 예전이 그리웠다!부승민이 아이를 안아 들며 말했다.“그건 안돼. 너 혼자 여기 남는 건 숙모한테도 민폐야. 같이 가자.”“흥.”부시아는 어쩔 수 없이 부승민의 어깨에 얼굴을 기댄 채 온하랑에게 손을 흔들었다.“숙모, 안녕히 계세요.”“그래, 안녕.”두 사람이 집을 떠나기 무섭게 김시연이 캐리어를 끌고 집으로 돌아왔다.원래는 온하랑이 직접 공항까지 마중을 나갈 예정이었지만 임신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 운전기사를 따로 고용해 스스로 운전을 하지 않았다. 며칠 전, 촬영을 나갈 때도 운전기사가 데려다줬던 것이었다.이번에도 운전기사가 직접 공항까지 가 김시연을 데리고 왔다.“왔어?”“응.”김시연은 캐리어를 들고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온하랑이 눈썹을 들썩였다. 오늘따라 김시연이 어딘가 이상해 보였다.예전 같았으면 김시연은 캐리어를 한쪽 구석에 버려두고 대자로 소파에 뻗어 자신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에 대해 하소연해야 했다. 왜 오늘은 아무 말도 없이 방으로 들어가는 거지?온하랑이 몸을 일으켜 김시연의 방문을 두드렸다.“시연아, 괜찮아?”“괜찮아.”방 안에서 김시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들어가도 돼?”“그래, 들어와.”온하랑이
“조건은, 연도진이랑 계약 결혼하는 거였어.”온하랑이 눈썹을 들썩이며 김시연을 바라보았다.“설마 흔들린 거야?”김시연은 온하랑의 등 위로 걸어가 그녀를 끌어안고는 턱을 온하랑의 어깨에 기댔다.“... 난 어느 정도 가능성 있다고 생각하는데, 넌 어때?”온하랑이 턱을 괸 채 잠시 생각했다.“법적으로 계약 결혼은 허용이 인정이 안 돼. 연도진이 서정훈이라는 엄청난 빽을 지고 그때 가서 너랑 한 계약을 파기하고 진짜 부부가 되려고 하기 십상이야.”연도진은 정말 똑똑한 사람이었다.하지만 연도진은 아마 진심으로 김시연을 도와주고 싶은 게 맞을 것이다. 다만 김시연과 몇 년 동안이라도 어떤 수단으로라도 함께 묶여있고 싶을 뿐이었다.두 사람에게는 옛정이라는 게 존재했고 연도진의 외모도 어디 가서 꿀릴 정도는 아니었으니 오랜 시간 동안 같은 지붕 아래에서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예전의 감정이 되살아나 불꽃이 붙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되면 계약 결혼이 진짜 결혼이 되어버리는 것이다.하지만 김시연이 이미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이상, 온하랑은 그녀를 막기보다 김시연을 위한 다른 방법을 생각해줄 것이다.“그럼 어떡해?”“만약 네가 그 조건을 받아들일 거라면 차라리 너희 결혼 증명서도 위조해서 너희 아빠랑 다른 사람들까지 같이 속이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냥 연도진을 사위의 신분으로 입사시켜. 그리고 재산이랑 회사에 대해서는 따로 변호사를 찾아서 계약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 알겠어.”김시연은 “쪽” 하는 소리와 함께 온하랑의 얼굴에 입술을 맞췄다.“하랑아, 내가 너 진짜 사랑하는 거 알지!”“...”다음날 월요일이 되자 부승민은 온하랑을 데리고 산부인과를 가기 위해 집 앞까지 찾아왔다.1층으로 내려온 온하랑은 자신의 차 옆에 서 있는 부승민을 발견했다.온하랑이 다가오는 것을 보자 부승민은 차 뒷좌석의 문을 열고 그녀를 부축했다.“조심해.”온하랑이 차에 올라타는 것을 확인한 부승민은 다른 쪽으로 가 그녀의 안전벨트를 매주었다.
병원에 도착한 온하랑은 의사에게서 진단서를 건네받고 태아 심장 박동 검사, 초음파 검사 및 다운증후군 검사를 받으러 이동했다.온하랑의 손에서 진단서를 건네받은 부승민은 진단서를 확인하는 순간 눈썹을 들썩였다.“16주?”“응.”온하랑의 표정은 평온했다.보아하니 부승민도 온하랑처럼 아이가 필라시에서 생겼을 것이라 예상한 모양이었다.부승민은 조용히 시간을 계산해 보았다.네 달 전이라면 혹시...두 시선이 공중에서 맞물렸다. 부승민의 눈빛에서 은근한 자랑스러움의 감정을 읽어낸 온하랑은 얼굴이 순간 화끈 달아올라 부승민의 옆구리를 세게 꼬집으며 시선을 피했다.“그래, 너 대단하다.”부승민은 입술을 꾹 다문 채 웃으며 온하랑의 허리를 끌어안고 몸을 숙여 그녀의 귓가에 조용히 무어라 속삭였다.온하랑의 두 뺨이 발갛게 달아오르더니 부끄러우면서도 단전에서부터 올라오는 화에 부승민을 노려보았다. 그러다 반짝이는 두 눈동자가 데구루루 구르더니 이내 배를 부여잡고 혹시라도 아이가 들을까 걱정하는 모습으로 말했다.“너 한 마디만 더 해봐?”“안 할게.”부승민은 온하랑에게 쫀 듯 바로 입을 다물었지만 눈가에는 미소가 번져있었다. 그녀의 애교 섞인 분노가 귀엽게만 느껴졌다.여기가 병원만 아니었더라면 부승민은 아마 온하랑의 살짝 올라간 붉은 입술에 바로 진득하게 입을 맞췄을 것이다.온하랑은 곧장 고개를 돌리더니 부승민이 따라서 오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앞으로 걸어갔다.차라리 따라오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이 사람 머릿속에는 온통 그런 생각 들 뿐인 것 같다.부승민은 큰 보폭으로 온하랑을 뒤쫓아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진료실 밖에 도착하자 온하랑은 자리를 찾아 자신의 차례가 되길 기다렸다.부승민은 그녀의 옆에 자리 잡고 앉아 온하랑의 손을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 가볍게 어루만졌다.그러다가 무언가 떠오른 듯 살짝 몸을 기울여 낮게 속삭였다.“다행이다. 아기 건강해서...”“응?”“우리 필라에서 고생 꽤 했잖아...”온하랑은 또다시
최국환의 말을 들은 온하랑은 멈칫했다.“최 회장님, 약속드릴 수 없습니다. 메이슨은 상황이 특별하기에 반드시 진심으로 그를 아껴주고 사랑해 주는 가족이 옆에서 보살펴 주어야 합니다.”‘동철 씨와 줄곧 사이가 좋지 않았던 최 회장님은 정성껏 메이슨을 보살필 수 있을까?’게다가 최씨 가문에는 임가희가 있기 때문에 온하랑은 그녀가 메이슨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최동림의 후계자 계승을 위하여 걸림돌인 그를 해칠 수 있다고 예측했다.메이슨은 최동림보다 두세 살 어렸다.“동철이가 현재 실종되었기에 나의 손자인 메이슨을 내가 반드시 잘 돌볼 거야. 이미 결정된 일이야. 하랑이 너랑 상의하려고 온 거 아니야.”최국환의 목소리는 무거웠다.온하랑이 엄마라는 점을 고려해 그가 직접 온 것이었다. 아니면 경호원더러 메이슨을 데려오라고 했을 것이다.온하랑은 최국환이 끝까지 막으면 그와 메이슨은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그렇다면 최 회장님께서 메이슨을 위하여 저의 몇 가지 조건을 들어주셨으면 합니다.”“말해봐.”“첫째, 제가 떠난 후 메이슨을 최씨 가문에 데려가서 아줌마와 미아 선생님이 계속 돌보게 해주세요. 최 회장님께서는 매일 시간을 내셔서 메이슨의 학습 상황을 물어봐 주세요.”온하랑이 없는 상황에서 최국환은 메이슨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 언젠가 임가희는 메이슨의 존재를 알게 될 것이기에 최국환의 옆에 둔다면 그녀는 자신의 명성을 위해서 섣불리 나서지 못할 것이다.메이슨이 계속 별장에 머물면 아줌마와 미아 선생님은 권력과 힘이 없기에 마음대로 할 수가 없을 것이며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그를 노릴 기회를 줄 수 있다.온하랑의 말을 들은 최국환은 머리를 끄덕였다.그는 메이슨을 옆에 두고 잘 가르칠 생각이었다. 만약 좋은 후계자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고 반대로 그가 자질이 평범해도 최국환은 그를 키울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잠시 후 최국환의 핸드폰이 울렸다.“잠깐만. 먼저 통화 좀 할게.”“네, 최 회장님. 편안한 대로 하세요.”통화 중
설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그를 바라보았다.“...네.”설윤의 쓸쓸한 모습을 본 최동철은 그녀에게 물었다.“함께 갈래요?”설윤은 돈을 좋아하기에 그도 그녀에게 많은 돈을 줄 수 있었다.그러나 설윤은 고개를 흔들었다.“아니요, 저 여기 더 있고 싶어요.”최동철은 눈살을 찌푸렸다.“그럼, 나중에는?”“나중에? 그때 다시 얘기해요.”설윤은 덤덤하게 말했다.“어차피 저 혼자예요. 저만 신경 쓰면 돼요.”최동철은 평온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최동철이 떠난 후 자신을 구해준 설윤에게 보답의 의미로 많은 금액의 돈을 송금해 주었다....회사에 처리할 일이 많았던 부승민은 첨단 연구소에서 스카우트한 사람들과 함께 강남시로 돌아갔다.경주에 며칠 더 머무른 온하랑은 여전히 최동철의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다.그녀는 최동철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오랫동안 경주에 머물렀던 온하랑은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어 메이슨을 데리고 강남시로 돌아가려고 했다.만약 최동철이 돌아온다면 온하랑은 메이슨을 다시 데려오면 되고 그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그녀가 메이슨의 유일한 보호자이다.아줌마에게 메이슨의 짐을 정리하는 것을 도와달라고 하던 중 별장에 불청객이 찾아왔다.거실에서 아줌마가 짐 정리하는 것을 지켜보던 메이슨은 최국환이 사람을 데리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바로 온하랑의 뒤로 숨어버렸다.“최 회장님, 어떻게 오셨어요?”최국환을 본 온하랑도 깜짝 놀랐다.“하랑아, 미리 약속도 없이 불쑥 찾아와서 미안해.”최국환은 온하랑 뒤에 숨은 메이슨과 땅에 놓인 캐리어를 보고 물었다.“메이슨을 데리고 강남시로 돌아간다고?”그는 오래전부터 메이슨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네, 맞아요. 동철 오빠가 돌아오기 전에 제가 메이슨을 강남시로 데려가 돌보려고 해요.”온하랑이 대답했다.“승민이는 동의한 거야?”온하랑은 머리를 끄덕였다.“혹시 어떤 일로 찾아오셨어요?”그녀는 눈길로 아줌마에게 먼저 메이슨을 데리고 위층으로 올라가
“설윤 씨, 일어났어요?”최동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소리에 따라 고개를 돌린 설윤은 최동철과 눈이 마주쳤다.최동철은 웃으면서 말했다.“일어났으면 와서 아침을 먹어요.”최동철은 이미 건조된 설윤의 옷을 가져왔다.“네.”설윤은 베갯머리에 두었던 핸드폰을 보고 열 시가 넘었음을 확인했다.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그녀는 이불로 가슴을 가리고 이불 밑에서 속옷을 찾아 천천히 입었다.최동철은 쓰레기통을 옆으로 걷어차고 설윤에게 칫솔 컵과 치약을 묻힌 칫솔을 건네주고는 그녀가 이를 닦은 후 따뜻한 수건도 건네주었다.서로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던 두 사람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 누구도 어젯밤 일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다.아침을 먹은 후 발목 찜질을 한 설윤은 이곳에서 며칠 더 머무를 수 있다는 생각에 쿠팡에서 옷을 구매하려고 했다. 집 앞까지 다음날 배송될 수가 있기에 아주 편리했다.옷을 몇 벌 고른 설윤은 소파에 앉아 있던 최동철을 보며 물었다.“최 대표님, 제가 쿠팡에서 옷을 구매하면 내일 도착하는데, 혹시 대표님도 필요하신가요?”조건이 우월한 최동철과 같은 귀공자는 사람을 시켜 필요한 물건을 살 수 있었기에 온라인으로 쇼핑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그녀의 말을 들은 최동철은 머리를 끄덕였다.“갈아입을 옷 두 벌만 골라주세요, 부탁드려요.”구체적인 요구는 없었다.“네, 알았어요.”머리를 끄덕인 설윤은 남성 의상을 검색하며 물었다.“사이즈는 얼마 입어요?”“신장은 185, 몸무게는 75킬로로예요.”“네.”설윤은 최동철이 말한 사이즈에 따라 내의 한 벌과 니트 및 팬티 두 벌을 고르고는 그에게 말해주었다.최동철은 설윤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말을 마친 후 방안은 조용하기만 했다.오후쯤 부하의 전화를 받은 최동철은 통화 중 계획 하나를 언급했으나 설윤은 이해하지 못했고 자신과 관련이 없기에 신경 쓰지도 않았다.저녁이 되자 설윤은 샤워 후 침대에 누웠다.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눈을 뜬 그녀는 최동철이 그의
방안은 어두웠고 쥐죽은 듯 조용했으며 가끔 바깥 거리에서 들려오는 기적 소리만 들렸다.설윤이 네 번째로 몸을 뒤척일 때 옆에서 최동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잠이 안 와요?”낮고 유혹적인 목소리가 깊은 밤의 정적을 뚫고 그녀의 고막을 가볍게 두드렸다.“... 네, 동철 씨도 잠이 안 와요?”“네.”최동철은 낮은 소리로 대답했지만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실내는 다시 조용해졌고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만 들렸다.집안의 난방이 너무 커서인지 설윤은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아 다치지 않은 발목으로 이불을 걷어차며 팔을 이불 밖으로 내밀었는데 조심하지 않고 최동철이 밖에 놓은 팔과 부딪혔다.피부가 닿는 순간 설윤은 재빨리 팔을 비켰으나 뜻밖에도 최동철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떠나지 못하게 했다.그의 손은 매우 컸다. 뜨거운 온도가 그녀의 몸에 닿는 순간 그 뜨거운 열기가 서서히 얼굴에 퍼지며 설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설윤은 머뭇거리다가 그의 손에서 손목을 빼려고 힘을 썼지만 실패했다.“뭐 하는 거예요?”“보통 운동 후에 몸이 피곤해서 잠이 잘 오는데, 한 번 시도해 보겠어요?”최동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어둠 속에서 그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설윤은 그의 차분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마치 아침에 무엇을 먹을지 묻는 것 같았다.몇 초 동안 머뭇거리다가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네.”그 목소리는 깃털처럼 가벼워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았다.그녀의 대답은 마치 닫힌 문을 여는 열쇠처럼 들렸다. 최동철은 그녀의 팔을 풀어주었는데 그녀가 손을 거둘 때 신속히 이불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남자는 공격적인 기운을 풍기며 달려들어 순식간에 그녀를 덮쳤다.설윤은 저도 모르게 또 겁이 났다.그녀는 숨을 죽이고 손끝을 그의 가슴에 떨어뜨린 채 천천히 위로 거슬러 올라가 어깨에 놓았다.“... 몸에 상처가 있는데 그럼...”“조심할게요.”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두 눈이 마주쳤다.서로의 눈 밑에는 빛을 볼 수
설윤이 차례로 밖에 씌워져 있는 랩과 붕대를 제거하니 몇 바늘 꿰맨 상처가 드러났다.그녀는 알코올로 주변을 부드럽게 닦은 후 다시 연고를 꺼내 면봉으로 고르게 발랐다.최동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드러난 옆모습은 매끄러운 얼굴 라인을 자랑했다. 아마 스무 살 어린 나이어서인지 볼에는 젖살이 있어 통통했고 피부는 희고 섬세해서 모공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거즈를 몇 바퀴 두른 후 설윤은 나비 모양으로 매듭을 지었다.“다 됐어요.”“고마워요.”“별말씀을요.”설윤은 자신의 발목을 내려다보았다.“난 샤워하러 가고 싶어요. 욕실에 걸상 하나 놔줄 수 있어요?”최동철은 몸을 일으켜 동그란 걸상을 들고 화장실로 갔다. 다시 나오면서 그는 다치지 않은 팔을 내밀려 말했다.“부축해 줄게요.”설윤은 느릿느릿 침대로 옮겨 한 손을 그의 팔에 얹고는 다치지 않은 발을 먼저 땅에 대고는 절뚝거리며 화장실로 갔다.그녀를 안쪽 욕실로 데려다준 후 최동철은 샴푸 등을 욕실 벽에 있는 선반 위에 놓아주고는 밖으로 나가며 문을 닫아 주었다.설윤은 느릿느릿 옷을 벗었다. 속옷은 팬티는 이거 하나밖에 없었다. 빨면 곧 마를 수 있겠지만 마르기 전에는 그저...이틀 전에는 혼자 살아서 괜찮았지만 지금은 곁에 남자가 한 명 많아졌다.그러나 씻지 않으면 위생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다.‘이럴 줄 알았으면 두 장 더 사는 건데...’고민 끝에 설윤은 속옷을 빨았다. 다 빤 후 드라이어로 말리면 10분 정도면 다 마를 수 있었다.이때 설윤은 문득 최동철이 나왔을 때 머리를 말리지 않은 것이 떠올랐는데 보아하니 드라이어로 팬티를 말린 것 같았다.간단히 샤워를 마친 후 설윤은 팬티를 씻고 말린 후 간단히 머리도 말렸다. 그런후 속옷과 팬티를 입고 목욕 수건을 둘렀는데 다행히도 이 수건은 충분히 길어서 가슴부터 무릎까지 감쌀 수 있었다.이때 밖에서 문소리가 들렸다.“다 씻었어요?”“...네.”“그럼 제가 들어갈까요?”
그녀의 최근 행동을 보면 물질, 환경, 품질 등에 큰 요구가 없는 것 같다."물론이죠."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부잣집 도련님은 일반인에게 돈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설윤은 회억에 잠겨 말했다.“제가 아주 어렸을 때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그때 이웃들이 그러는데 엄마 병은 고칠 수 있었지만 돈이 없어서 일찍 퇴원했기 때문에 병세를 끌어서 돌아갔다고 했어요.”엄마가 돌아간 후 집주인은 장례를 치러주고는 그녀를 보육원에 보냈다.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최동철은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미안해요.”그는 그녀의 신원을 조사한 적이 있는데 문서에는 간단히 ‘6살 때 생모 병으로 사망’으로만 적혀있었다. 그녀의 입을 통해 들으니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괜찮아요. 다 지나갔어요.”설윤은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혹시 동철 씨는 돈이 싫으세요?”최동철은 그녀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돈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왜 최국환과 임가희와 암투를 벌였을까?“돈은 나에게 있어 숫자일 뿐이죠. 어쩌면 우리가 다투는 것은 돈이 아니라 권력이에요. 더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권력이죠.”최동철이 덤덤하게 말했다.설윤은 아는 둥 마는 둥 고개를 끄덕였다. 호텔에서 최동철을 끌어들인 후 그는 주위를 살펴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가 처음으로 이렇게 허름한 곳에 왔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었고 선택의 여지가 없어 참았을 뿐이다.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었을 뿐인데 겨울 날씨여서 그런지 금세 어두워졌다.저녁을 먹은 후 설윤은 또 얼음찜질하고 연고를 한 번 더 발랐다.발목 부기가 많이 가라앉은 것 같았다.화장실에서 물소리가 나는 것을 보아 최동철이 샤워를 하는 모양이다.며칠 동안 피해 살다가 드디어 안전하고 안정된 환경에 이르자 그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어깨에 부상이 났다고 설윤이 일깨워주었지만 최동철은 신경 쓰지 않고 랩으로 상처를 감싼 후 씻으러 갔다.설윤은 저도 모르게 어젯밤에 본 화면이 떠올랐다.넓은 어깨와 가슴,
최동철은 잠시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그런데, 젊은이. 아내랑은 어떻게 알게 됐어? 정말 잘 어울리네.”둘 다 잘생기고 아름다웠으니까.“저희는... 대학 동기입니다.”“그래? 몰라보겠어. 아내는 참 어려 보이는데 벌써 스물여섯이라니.”최동철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네, 동안이라 자주 오해를 받습니다.”스물여섯은 설윤의 가짜 나이였다.집주인은 작은 양념병을 들고 나와 최동철에게 건넸고 우유 두 병도 함께 내주었다.돌아온 후, 최동철은 집주인 아주머니의 말을 설윤에게 전했다.설윤은 웃으며 말했다. “동철 씨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서로 잘 맞춰주니 완벽하네요.”최동철은 가볍게 웃으며 가스레인지의 밸브를 열었다.점심은 밥에 감자 볶음과 돼지고기였다.최동철의 요리 실력은 훌륭했다. 삼겹살을 바삭하게 볶아내 느끼함 없이 밥과 잘 어울렸다.다행히도 다친 쪽은 왼팔이라 오른손으로는 무리 없이 할 수 있었으나 속도는 다소 느렸다.식사 후, 설윤은 다시 한 번 발목에 냉찜질을 했다.냉찜질을 끝낸 후 최동철이 약을 가져오자 설윤이 말했다. “제가 할게요.”“그래요.” 최동철은 순순히 응했다. 한 손으로는 불편했으니까.바쁜 대도시의 일상에서 벗어나 외출할 수 없는 민박집 안, 두 사람은 갑자기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설윤은 침대에 기대어 휴대폰을 만지작거렸고 최동철은 소파에 앉아 눈을 감은 채 잠시 멍하니 있었다.설윤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옆모습은 뚜렷한 이마선과 오똑한 콧대가 더해져 눈매가 깊어 보였고 날카로운 턱선이 또렷했다.정말 잘생겼다.그의 이목구비는 최국환과 약간 닮았다.하지만 나잇살이 들어 퉁퉁해진 최국환과는 달리 최동철은 참으로 젊었다. 눈빛 속에도 서른 살 남자의 단단함으로 가득했고 이는 세상 물정에 밝고 노련한 최국환과 완전 달랐다.잠시 머뭇거리던 설윤이 말했다. “동철 씨, 피곤하면 여기서 주무세요.”그의 키는 너무 커서 작은 소파에선 편히 쉴 수 없었다.설윤은 발목 부상
최동철은 약품이 담긴 봉지를 찾아 안에서 멍과 부기를 가라앉히는 연고를 꺼냈다. 고개를 돌리니, 설윤이 느릿느릿 신발을 벗고 있었다.그는 연고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 그녀 앞에 쭈그려 앉았다. “내가 해줄게요.”신발과 양말을 벗자 뽀얗고 작은 발이 드러났다. 다섯 개의 발가락은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었고 동글동글 귀여웠다. 발톱은 깔끔한 곡선을 이루며 정리되어 있었으며 발등의 뼈선은 유려하게 흐르며 섬세한 곡선을 그렸다.발목 근처에는 큼직한 멍과 부기가 올라와 있었다.최동철은 그녀의 발바닥을 받쳐 들고 부은 부위를 살짝 눌러보았다.“앗...” 설윤이 숨을 들이마시며 얼굴을 찡그렸다.“아파요, 누르지 마세요.”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상태가 꽤 심각해 보이는데 내가 침대까지 옮겨줄 테니까 당분간은 움직이지 마요.”그렇게 말하며 일어나 그녀를 안으려 했다.“안 돼요!” 설윤은 급히 손으로 그를 막았다. “동철 씨도 팔 다쳤잖아요.”최동철은 몸을 숙여 다친 왼팔은 내리고 오른팔로 그녀의 다리 밑을 감싸 안았다. “두 손으로 내 목을 잡아요. 이쪽 팔은 힘을 쓰지 않을 거니까 안심해요.”한 손으로 안으려고?설윤은 그의 목에 양팔을 감고 조심스럽게 몸을 맡겼다.그는 오른팔로 그녀의 허벅지를 받치고 두 걸음 만에 침대 곁으로 가서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잠시만 기다려요. 집주인한테 얼음팩 좀 받아올게요.”“네.”최동철은 약 10분 뒤 얼음주머니 두 개를 들고 돌아왔다. 하나는 냉장고에 넣고 다른 하나는 그녀의 발목에 살며시 대주었다.얼음의 차가운 감촉에 설윤은 본능적으로 입술을 앙다물고 손으로 얼음주머니를 누르며 말했다.“너무 차가워요.”“20분은 찜질해야 해요. 하루에 세 번에서 네 번 정도로요.”설윤은 그에게 붕대를 가져와 얼음주머니와 발목을 단단히 감도록 했다.그녀는 침대 머리에 기대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우리 둘 다 밖에 나가지 말죠. 배달 앱으로 장을 보면 되니까요. 그런데 동철 씨,
의사는 최동철을 한번 쳐다보며 말했다. “젊은이, 앞으로는 아내 말 잘 들어요. 괜히 고집부리지 말고.”“여보, 들었지? 의사 선생님도 그러시잖아!”최동철은 잠시 입을 말없이 있다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겠어.”봉합이 끝난 뒤, 의사는 약을 처방해주었다.병원을 나서며 설윤은 최동철을 바라보았다. “이제 어디로 갈 거예요? 누가 데리러 와요?”최동철은 그녀를 한번 쳐다보고 짧게 대답했다. “당분간은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설윤은 의아해하며 물었다.“왜요?”“그건 알 필요 없어요.”설윤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래요.”그녀는 두 걸음 앞서 걸으며 말했다.“이 작은 도시는 꽤 조용하네요. 며칠 더 머물 생각인데, 동철 씨도 안 간다니까 같이 지낼까요? 서로 보호도 되고.”최동철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호텔은 눈에 띄니까 단기 임대 민박을 찾는 게 더 안전하고 편리할 거예요.”“좋아요.”“근데 검색해 보니까 민박은 대부분 더블침대 방이더라고요. 괜찮으세요?”“설윤 씨가 괜찮다면 전 상관없어요.”“그럼 예약할게요.”최동철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온라인으로 예약할 거예요?”대부분의 예약 앱은 신분증 정보를 입력해야 해서, 한 번 사용하면 위치가 노출될 위험이 있었다.설윤은 그의 걱정을 알아채고 휴대폰을 흔들며 말했다.“걱정 마세요. 이 폰은 제 이름으로 등록된 게 아니에요. 추적 못 할 거예요.”최동철은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준비가 철저하네요. 그런데 어떻게 임가희한테 이렇게 몰렸어요?”“임가희가 이렇게 빨리 제 존재를 눈치챌 줄 몰랐거든요. 그랬다면 좀 더 철저히 준비했을 텐데요.”최동철은 코끝을 만지작거리며 아무렇지 않은 척 먼 곳을 바라봤다. 마치 자신이 그녀의 정보를 넘긴 장본인이 아니라는 듯이.간단히 아침을 먹은 후, 두 사람은 예약한 민박으로 향했다.민박은 단일 방 구조로, 면적은 47㎡. 방에 들어서면 왼쪽에는 오픈형 주방이 있고 가스레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