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하랑이 이 일을 부승민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던 찰나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여보세요?”“밥 먹었어?”온라랑이 답했다.“방금 다 먹었어.”핸드폰 너머로 들려오는 부승민의 허스키한 목소리 외에 야근하는 듯 어렴풋이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도 들렸다.“하랑아, 일은 잘 정리했어? 언제 올 거야?”불과 몇 시간 전에 부승민이 직접 사진을 골라 잡지사에 피드백했기에 그쪽에서도 지금쯤 마무리 작업에 들어갔을 것이다.온하랑은 흠칫하더니 입술을 깨물며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시아도 본가에 있어?”갑작스럽게 말을 돌리는 온하랑의 모습에 부승민은 뭔가 예상이라도 한 듯 키보드를 치던 손을 멈추더니 쭈뼛거리며 물었다.“내가 데려왔어. 그래서 티켓은 언제 살 건데? 내가 데리러 갈게. 설마 안 오는 건 아니지?”온하랑은 도망칠 구석이 없음을 깨닫고 한숨을 내쉬며 솔직하게 고백했다.“당분간은... 못 갈 것 같아...”목소리는 점점 기어들어 갔다.“왜?”부승민은 단호하게 물었다.“스카웃 제의가 들어왔어. 의류 브랜드 신상을 찍어달라는 요청인데 잘되면 다음 주에 들어가고 잘 안되면...”말끝을 흐리자 부승민은 단번에 그녀의 생각을 알아차렸다.부승민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온하랑은 되레 큰소리치며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부승민, 지난번에는 여기서 일해도 된다며? 이미 그쪽에 하겠다고 얘기까지 했는데 이제 와서 어떻게...”온하랑의 경계 어린 말투를 듣던 부승민은 허탈함에 두손 두발 다 들었다.“난 아무 말도 안했 거든? 왜 제멋대로 몰아붙이는 거야. 내가 싫어하는 걸 알긴 하나 봐?”“누가 그런 말투로...”온하랑은 입을 삐죽이더니 이내 웃으며 그를 달랬다.“알았어. 역시 우리 승민이가 최고야. 솔직히 날 이해해 줄 줄 알았다니까? 이번 일만 마무리하고 금방 돌아갈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오랜만에 들은 ‘승민’이라는 호칭에 부승민은 심장이 마구 떨렸다.이때 핸드폰 너머로 앳된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삼촌, 숙모랑
삼촌과 조카의 대화는 핸드폰을 통해 고스란히 온하랑의 귀에 들어갔다.불과 몇 분 전만 해도 대인배처럼 동의하더니 이제 와서 조카를 앞세워 자기의 기분을 표현하는 부승민의 모습에 온하랑은 바로 욕설을 퍼붓고 싶었다.하지만 오랫동안 못 본 부시아를 생각하니 너무 보고 싶기도 하고 순간 마음이 약해져서 곧장 위로했다.“이번 촬영만 마시고 꼭 시아보러 갈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알겠지? 숙모가 이제 시아 선물 잔뜩 사 갈게.”부시아는 입을 삐쭉이며 답했다.“알겠어요. 그럼 시아는 숙모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게요.”온하랑은 부시아와 한참 동안 더 이야기를 나눴다.얼마 지나지 않아 안문희가 들어와 부시아를 씻기려고 데려갔고 조잘거리는 아기의 목소리가 사라지자 곧바로 허스키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하랑아, 너...”온하랑은 그가 말하기도 전에 전화를 끊었고 핸드폰에서는 쓸쓸한 연결음만 들려왔다.뚜두뚜두...허탈함에 힘이 쭉 빠진 부승민은 곧바로 핸드폰을 내려놨다.그러자 불과 2분도 안 되어 벨 소리가 울렸다.부승민은 발신자를 보자마자 망설임 없이 통화버튼을 눌렀다.“여보세요?”“대표님, 의원님 비서한테서 답장이 왔습니다.”연민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뭐래?”“내일 오후에 스케줄이 비니 방문하셔도 좋다고 합니다.”“그래, 알았어. 너무 눈에 띄지 않는 선물로 준비해.”어려운 상황인 만큼 부승민이 실수하기를 기다리며 지켜보는 눈들이 사방에 널렸다.“알겠습니다.”서씨 가문은 별장들로 이루어진 단독주택에 살고 있었다.입구를 지키는 보안의 검문을 지나 차는 마당으로 들어가 서정훈이 머무는 별장 앞에 멈춰 섰다.별장 앞에는 작은 마당이 있는데 그 안은 푸르스름하게 화초가 잔뜩 심어져 있었다.마침 꽃에 물을 주고 있던 도우미 아줌마는 누군가가 방문하자 곧바로 다가와 인사를 건네더니 신분을 확인한 후 거실로 안내했다.그 후 차 한잔을 건네며 공손하게 말했다.“차 좀 드세요. 의원님은 서재에서 업무를 보고 계십니다. 제가 지금 모셔
부승민은 이엘리아가 무슨 속셈인지 눈에 훤히 보였다.다가가고 싶은 마음은 있으나 자존심이 너무 강했다. 한번 무시를 당하자 예전만큼의 용기가 나오지 않았고 그럼에도 계속 엮이고 싶어 주위를 알짱거리니 참 모순적인 모습이다.부승민이 이런 행동을 마지막으로 접한 건 고등학교 때였다.그때 당시 한 여학생은 부승민에게 아침을 챙겨주었는데 부승민이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바로 거절하자 얼굴을 붉히더니 금세 태도가 돌변했다.“싫으면 말고. 솔직히 나도 너한테 주고 싶지 않았거든?”여학생은 다시는 말 안 걸 것처럼 짜증을 내며 자리로 돌아갔으나 쉬는 시간에 펜 하나를 들고 쫄래쫄래 뒤를 쫓아다녔다.“이거 바닥에서 주운 건데 혹시 네 꺼야?”이엘리아는 어려서부터 가족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티가 났다.이런 사람은 부승민의 눈에는 그저 어린아이로만 비쳤기에 아이에게 사적인 감정이 생길 리가 없다.“중요한 일이요.”애매한 답에 이엘리아는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하고 싶은 질문이 너무 많았지만 행여나 부승민이 눈치 없는 여자라고 생각할까 봐 차마 말도 못 한 채 본능을 억제했다.곧이어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남자는 쉰 살 남짓 되어 보였는데 세월의 우아함과 진중함이 깃든 얼굴에는 형용할 수 없는 위압감도 담겨 있었다.그를 본 부승민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웃음을 머금고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넸다.“오랜만에 찾아뵙습니다.”이엘리아는 고개를 돌리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삼촌.”“승민 씨, 이쪽으로 와서 앉아요.”서정훈은 온화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 돌려 이엘리아를 바라봤다. 명령하듯 말하는 건 아니었지만 차마 거절할 수 없게 만드는 카리스마를 뿜어냈다.“승민 씨랑 따로 할 얘기가 있으니까 넌 이만 올라가 봐.”이엘리아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10년 만에 이곳에 왔다. 비록 다들 겉으로는 매우 환영했지만 함께 지내다 보니 왠지 모를 거리감이 느껴서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할 수 없었다.서정훈은 위층으로 올라가는 이
이엘리아는 관심이 있는 사람처럼 최대한 열심히 듣는척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원장은 간단한 소개를 마치고 다시 물었다.“이엘리아 씨, 혹시 더 알고 싶은 게 있으실까요?”드디어 이엘리아에게 입을 열 기회가 왔다.“교실에 한번 가보고 싶네요.”“그럼 지금 바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마침 아이들이 수업하고 있으니 저희 유치원 선생님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바로 알게 될 겁니다. 분명히 마음에 드실 거라고 확신하죠.”이엘리아는 고개를 끄덕이고선 빠른 걸음으로 원장의 뒤를 따랐다.원장은 이엘리아를 상급반 교실 밖 창가로 데려가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소개했다.“지금 수업하고 있는 배 선생님은 저희 유치원에서 가장 훌륭한 선생님입니다. 심지어 우수상까지 받으셨는데...”이엘리아는 단번에 원장의 말을 잘랐다.“제 친구 아이가 4살이거든요. 그럼 보통 중급반이죠?”원장은 그 말의 의미를 이해했다.“그렇죠. 중급반도 한번 보실래요?”유치원에는 두 개의 중급반이 있었다. 이엘리아를 데리고 중급반 교실에 온 원장은 또 옆에서 뭔가를 소개했다.애초에 관심조차 없는 이엘리아가 원장의 말을 들었을 리가 없다. 그녀는 교실에 앉아 있는 아이들을 재빨리 훑어보더니 조용히 세어보았다.하나, 둘, 셋...부선월은 이엘리아에게 자기 딸이 두 번째 줄의 네 번째 자리에 앉는다고 얘기했었다.한참 후 이엘리아는 통통한 볼에 크고 동그란 눈을 가진 아이를 발견하게 되었다. 앵두 같은 입술과 작고 아담한 코는 귀엽기 그지없었고 딸기 머리끈으로 양 갈래까지 하고 있어 아주 치명적이었다.사뭇 진지하게 수업 듣고 있는 모습은 어찌나 귀여운지 이엘리아는 단번에 마음을 홀랑 뺏겼다.그녀는 천천히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가 창문으로 아이의 얼굴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날카로운 눈매는 부승민과 아주 판박이였다.부선월이 본인을 속이지 않았다는 생각에 이엘리아는 입술을 뜯으며 생각에 잠겼다.처음에는 부승민이 다른 여자랑 아이가 있는 게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어차피 생모는 이미 죽었기에
원장은 이엘리아의 시선이 부시아를 향해 있자 곧바로 입을 열었다.“BX 그룹 회장님네 아이예요. 어찌나 똑똑하고 예의가 바른지 아예 걱정이 없다니까요.”원장은 부시아의 칭찬을 늘어놓았다.부시아 외에도 유치원에는 잘나가는 명문가 집안의 아이들이 몇 명 있었는데 아무것도 할 줄 모르거나 성지리 고약해서 걸핏하면 눈물을 터뜨리기 일쑤였다.부시아는 편입해서 중급반으로 들어온 케이스다.다른 학교에서 전학해 온 아이는 보통 문제아가 많았다. 하여 원장도 폭탄 안을 준비를 하며 중급반 담임선생님에게 하소연했다.그러나 생각과 달리 부시아는 모든 선생님의 예쁨을 받았고 매번 수업 때마다 칭찬을 받는 우등생이었다.심지어 예의는 어찌나 바른지 원장을 볼때마다 꼭 공손하게 인사를 전하곤 했다.친구들과 노는거에 큰 감흥이 없었던 부시아는 원장을 보자마자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원장님, 안녕하세요.”감미롭고 부드러운 아이의 목소리를 듣자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시아야, 안녕. 왜 친구들이랑 안 놀아?”“그게... 마침 지금 가려고 했어요.”부시아는 원장 옆에 있는 이엘리아는 이상하게 생각했다.‘왜 계속 날 쳐다보고 있는 거지?’“잠깐만.”이엘리아가 갑자기 부르자 부시아는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렸다.“왜요? 저한테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세요?”“네가 너무 귀여워서 이모가 선물 하나를 주고 싶어.”말을 하던 이엘리아는 주머니에서 새로 산 열쇠고리를 꺼냈는데 그 위에는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작은 곰돌이 인형이 달려있었다.“자, 선물이야.”부시아는 단번에 거절했다.“아빠가 다른 사람이 주는 물건은 함부로 받으면 안 된다고 했어요. 갖고 싶은 게 있으면 어차피 아빠가 다 사주니까 이 선물은 사양할게요.”유치원에서만큼 부시아는 부승민을 삼촌이 아닌 아빠라고 불렀다.“이모가 주는 거니까 그냥 받아도 돼.”“싫어요. 원장 선생님, 그럼 전 이만 친구들이랑 놀러 갈게요.”부시아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선 후다닥 미끄럼틀로 달려갔다.아이들이 많이 몰려있어 차
“고모 부탁이요?”부승민은 반복하며 물었는데 의심스러운 말투였다.“저 사모님이랑 친한 사이예요. 못 믿겠으면 직접 전화해서 물어보셔도 좋고요.”이엘리아는 자신 있게 말했다.“이번에 친척을 만나려고 왔는데 사모님이 어르신이랑 시아 잘 지내는지 봐달라고 해서 온 거예요.”부승민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분한 눈빛에서는 도무지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이엘리아는 그런 눈빛을 바라보기만 해도 죄책감이 밀려오는지 곧바로 시선을 돌렸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아 부시아에게 말을 걸었다.“시아야, 할머니 보고 싶지?”부시아는 부승민을 힐끗 보고선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승민아.”김정숙은 못마땅한 듯이 부승민을 쳐다봤다.어찌 됐든 이엘리아는 손님인데 대접하기는커녕 되레 무례한 행동을 했으니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라고 생각했다.부승민은 눈을 내리깔고 별말 없이 옆에 있는 싱글 소파에 앉았다.때마침 도우미 아줌마가 주방에서 나와 부승민과 부시아가 좋아하는 메뉴 몇 개를 읊더니 이엘리아를 바라보며 물었다.“좋아하는 음식이 뭐예요? 제가 금방 차려드릴게요.”도우미 아줌마의 행동을 보니 김정숙은 그들이 오기 전부터 이미 이엘리아와 함께 점심 식사를 하기로 결정했던 모양이다.이엘리아는 김정숙과 부시아를 보러 온다는 명분으로 찾아왔다. 이제 부시아까지 왔으니 이곳에 남을 충분한 이유가 생긴 거나 다름없다.부승민은 심연처럼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묵묵히 이엘리아를 바라봤다.안절부절못하며 초조함이 밀려온 이엘리아는 애써 부승민을 무시하고 김정숙과 부시아에게만 말을 걸었다.그러다 한계에 이르렀는지 웃으며 김정숙에게 물었다.“어르신, 화장실이 어디예요?”“화장실은...”부승민은 단번에 김정숙의 말을 잘랐다.“위층에 있어요.”“위층에 있다고요?”이엘리아는 표정이 굳어졌고 김정숙도 당황한 듯 부승민을 바라봤다.“네. 얼마 전에 1층 화장실이 고장 났는데 수리할 시간이 없어서 아직
이엘리아는 부승민이 믿지 앉자 다급하게 말을 덧붙였다.“페이가 원해 사릴 스튜디오에서 일한 거 알죠? 제가 그 스튜디오에서 촬영했었거든요. 그때 페이가 제 목걸이를 훔쳐서 사릴 스튜디오에서 해고당했어요. 못 믿겠으면 스튜디오 사장님께 직접 물어보셔도 돼요.”부승민은 말없이 조용히 그녀를 바라봤다.“그날 레스토랑에서 승민 씨가 페이랑 같이 있는 걸 보고 정말 놀랐어요. 전 페이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거든요. 그 여자는 돈을 노리고 지금 승민 씨를 이용하는 거라니까요? 절대 속으면 안 돼요.”이엘리아가 했던 말 중에 부승민이 믿을 수 있는 건 한마디도 없었고 그는 자기보다 온하랑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없다며 늘 자부했다.부승민은 비웃었다.“도와준다는 게 이거였어요? 그럼 페이가 전재산을 기부해서 재단 설립한 건 알아요?”여전히 온하랑을 굳게 믿는 부승민의 모습에 이엘리아는 마음이 초조해졌다.“솔직히 페이가 갖고 있는 재산 전부 어르신이 물려줬잖아요. 원래 자기 것도 아닌데 기부해서 명성을 얻고 신임을 얻는 게 수지에 맞는다고 생각하세요? 재단 설립과 BX 그룹의 사모님 자리. 둘 중 뭐가 더 중요한 건지도 모르고 있잖아요.”부선월은 온하랑이 했던 모든 일을 그녀에게 말해줬다.하여 이엘리아는 온하랑이 음모를 꾸미는 데 능숙할 뿐만 아니라 여우처럼 교활한 면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편견을 바로잡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이를 본 부승민은 더 이상 그녀와 쓸데없는 대화를 하고 싶지 않은지 싸늘하게 경고하고선 곧장 자리를 떴다.“어떤 사람인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괜히 절 돕는다는 핑계로 그 여자를 해치면 이엘리아 씨를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물론 삼촌이 나선다 해도 소용없어요.”부승민은 시테니행 비행기에서 이엘리아를 만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단언컨대 그때까지 이엘리아는 부승민의 신분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 반응이었다.그리고 얼마 전 필라시에서 또 만나게 되었는데, 아마 그때쯤 부승민의 신분을 알게 되었고 온하랑과의 관계까지
이엘리아는 두 눈이 반짝였다.점심 식사를 마친 후 부승민은 본가에 잠시 앉아 있었다. 그러다가 부시아를 향해 손짓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김정숙에게 인사를 건넸다.“할머니, 전 시아랑 이만 가볼게요. 연락할 테니까 나중에 또 찾아뵐게요.”김정숙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시아랑 가서 즐거운 시간 보내.”말이 끝나자마자 이엘리아도 자리에서 일어섰다.“시아가 뭘 좋아할지 몰라서 올 때 빈손으로 왔어요. 선물도 못 줬는데 이참에 같이 쇼핑하러 가요. 시아야, 이모가 다 사줄 테니까 마음껏 골라.”“이엘리아 씨, 마음은 정말 고마운데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부승민은 경고의 눈빛으로 이엘리아를 바라봤다.순간 압도되는 눈빛에 겁을 먹은 이엘리아는 입만 벙끗할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부승민은 부시아와 함께 시내 중심가에 있는 대형 쇼핑몰로 향했고 마침 지하 1층에는 아이들이 뛰어놀 만한 놀이터가 있었다.줄곧 애어른 같던 부시아도 놀이터에 오자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아담하고 왜소한 체구와 달리 어찌나 체력이 좋은지 한 시간 동안 쉬지않고 놀았다.놀다가 지치자 부승민은 부시아를 데리고 쇼핑몰 3층에 있는 밀크티 가게로 가서 밀크티 한 잔을 시켰다.밀크티 가게는 장사가 아주 잘되어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대부분이 어린 여학생들인데 그들은 곁눈질로 부승민의 쳐다보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심지어 젊은 여자 일행도 부승민을 보고선 작은 목소리로 수군거렸다.“저기 좀 봐봐. 저 남자 엄청 잘생겼어.”옆에 있던 친구도 부승민을 힐끔힐끔 쳐다보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로 답했다.“딸이랑 같이 온 거 아니야? 아쉽네. 솔로였으면 바로 번호를 따는 건데.”“미쳤다. 잘생긴 데다가 심지어 가정적이야. 자기가 왕인 줄 알고 이것저것 지적질하는 내 남자 친구와 아예 딴판이네.”얼마 지나지 않아 알바생이 번호를 불렀고 부승민은 걸어가 밀크티를 가져오고선 빨대를 꽂아 부시아 앞에 놓았다.부시아는 토실토실한 손으로 컵을 안고선 벌컥벌컥 밀크티를 마셨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