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 싫어요! 저는 숙모가 떠나는 거 싫어요!”부시아는 두 눈이 붉힌 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왜 갑자기 해외로 가요? 삼촌이 숙모 괴롭혔죠! 삼촌 찾으러 갈래요!”시아가 짧은 다리를 버둥거리며 소파에서 뛰어내리려고 했다.온하랑이 그녀를 제지하며 나지막이 말했다.“시아야, 나랑 삼촌은 이제 같이 못 있어.”“왜요?”시아가 물기가 가득한 눈동자로 그녀를 보았다.‘분명 사이가 좋아졌는데... 조금만 지나면 화해할 것 같았는데...’온하랑이 시선을 내리며 답했다.“말하자면 길어. 네가 크면 알게 될 거야.”부시아는 여전히 부승민에게 기대야 하는 아이였다. 그런 아이 앞에서 부승민의 나쁜 말을 하여 부승민에 대한 증오를 부추길 필요는 없었다.애초에 부승민이 부시아를 남긴 이유도 일부는 온하랑때문이었다. 아이를 이용해 그녀를 꼬여 내기에서 이기기 위함이었다.이미 모든 게 밝혀진 상태에서 부승민이 부시아를 어떻게 대할지 모를 일이었다.목적을 달성한 부승민이 부시아를 더 이상 보살피지 않는다면 큰일이었다.온하랑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부시아를 달랬다. 가까스로 달래서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았지만, 눈시울은 여전히 촉촉한 상태로 처량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온하랑이 고개를 들어 안문희에게 물었다.“요 며칠 돌아온 적 있나요?”안문희는 애초에 온하랑과 부승민 사이에 문제가 있음을 눈치챘지만 간섭할 수 없었다.“며칠 전 사람을 시켜 대표님 물건을 빼갔습니다. 시아한테도 같이 갈 거냐고 물었지만, 시아가 거부해서 이곳에 남아있습니다. 며칠 전 와서 점심을 먹고 시아랑 함께 놀아주시기도 했죠.”부승민이 부시아를 방치하지 않았다는 소식에 온하랑은 겨우 마음을 내려놓았다.하지만 부시아가 이곳에 남아있는 것은 그녀 때문일 텐데, 그녀가 떠나니 이곳에 남는 것도 의미가 없었다.부승민한테 가거나, 본가로 가거나 둘 중 하나였다.“시아야, 숙모가 가면 너는 삼촌이랑 살고 싶어? 증조할머니랑 살고 싶어?”“저는 숙모랑 같이 살고 싶
어두워진 부승민의 얼굴을 본 온하랑은, 부시아가 그의 심기를 거스를까 봐 얼른 말을 잘랐다.“시아야, 숙모 가면 삼촌 말 잘 들어야 해. 시간 나면 시아 보러 다시 올게.”“숙모...”부시아가 몸을 기울였다. 시아는 온하랑이 떠나는 것을 막고 싶었다.“착하지. 앞으로는 숙모 말고 고모라고 불러.”온하랑은 부시아의 얼굴을 가볍게 꼬집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나갔다.애초에 부승민이 어떤 내기를 했는지 알았다면, 그녀는 절대로 부시아를 이곳에 남기지 않았을 것이었다.부시아가 남은 이유는 그녀와 부승민때문이었다.그녀가 떠나고, 부시아에게는 부승민남 남았다. 부승민이 부시아를 싫어한다면 그녀는 부선월의 곁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부선월은 더 이상 이전처럼 그녀를 맞아주지 않을 것이었다. 자주 환경을 바꾸는 것도 부시아에게 좋지는 않았다.부승민 혹은 부씨 일가의 본가에 남아있는 게 부시아에게는 제일 좋은 선택이었다. 그저 부승민에게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길 바랐다. 제일 나쁜 결과는 온하랑이 밖에서 정착한 후, 부시아를 데려가는 것이었다. 거기까지는 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한 층만 내려가면 됐었기에 온하랑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지 않고 계단으로 향했다. 절반쯤 내려왔을까, 뒤에서 문이 여닫기는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가 그녀를 불러세웠다.“온하랑.”온하랑이 발걸음이 멈췄다. 그녀는 두 손을 꽉 움켜쥔 채 평온한 모습으로 돌아서서 위쪽에 있는 부승민을 쳐다보았다.“무슨 일이야?”“어린아이까지 이용하다니, 너무한 거 아니야?”부승민이 비아냥거렸다.“내가 어떻게 이용했는데?”부승민이 자조적으로 웃으며 답했다.“네가 시아한테 무슨 말을 했는지는 네가 제일 잘 알겠지. 시아가 지금 새 숙모는 싫다고 난리 부리고 있어. 만족해?”‘나를 그렇게밖에 생각하지 못하는구나. 마음속으로 이렇게 싫어하면서 내 앞에서 그런 연기를 보여주다니... 사실인 것 같아서 나조차도 속아 넘어갔어. 정말 쉽지 않았겠어.’온하랑이 멈칫했다. 소매 아래 감춰둔
“네, 한번 찾아왔었어요. 하지만 저도 참지만은 않았어요.”온하랑이 최동철의 표정을 살펴보았다.“잘했어. 연지가 잘못했으니 상응하는 벌을 받아야지. 아주머니가 널 찾아가도 너는 다른 건 생각하지 말고 그냥 거절해.”“동철 오빠랑 최 회장님은 공정하신 분이신 줄 알고 있었어요.”최동철이 시선을 내리며 화제를 바꿨다.“왜 갑자기 출국하려고 결심한 거야?”“특별한 이유는 없어요. 그냥 여기 있기 싫어서요.”그렇게 쪽팔린 일은 꺼낼 리가 없었다.최동철이 온하랑의 표정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며칠 전 부승민이 추서윤 시랑 같이 연회에 참석하는 모습을 봤어. 보니까 보통 사이는 아닌 것 같던데.”온하랑이 차분히 답했다.“그 사람 얘기는 하지 말죠. 한잔 올릴게요.”“그래.”최동철은 온하랑의 태도를 보고 그녀가 외국으로 가는 이유가 부승민과 추셔윤이 재결합 때문임을 눈치챘다.비록 온하랑과 부승민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이야말로 그에게 절호의 기회였다. 임가희가 온하랑에게 약을 탄 사실만 없었다면 말이다.그 일이 있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온하랑에게 정을 운운했었다. 그것만으로 온하랑은 그가 임가희에게 지시했음을 눈치챘을 것이었다.하여 최동철은 당분간 더 마음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온하랑과 부승민이 갈라서고 외국까지 간다면 그에게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최동철이 주머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온하랑 앞으로 밀며 말했다.“바빠서 도무지 시간이 나지 않네. 아니면 널 그곳까지 바래다주고 다 해결해 주는 건데. 이건 스튜디오 작업실 명함이야. 사장은 내 친구고. 뉴욕과 필라시에 모두 지점이 있어. 너만 괜찮다면 내가 추천했다고 하고 한번 연락해 봐.”온하랑이 명함을 건네받고 웃으며 답했다.“알겠어요. 고마워요, 오빠.”재산을 기부한 이후 남은 거라고는 몇 년간 모아둔 월급뿐이었다. 비록 꽤 되는 돈이었지만 정착하기 위해 일부 쓰고 나면 한가롭게 집에 머물 수만은 없었다.”그렇다고 집에만 있을 생각을 한 것도 아
‘온하랑이 갑자기 간다니, 부승민이랑 사이가 틀어진 건가?’“모르겠어. 자신만의 선택이 있는 거겠지.”“나도 가도 돼?”서혜민이 기대 어린 표정으로 부현승을 바라보았다.“나도 하랑 씨 알아. 하랑 씨도 우리 사촌 언니를 알고 있어. 이렇게 가면 우리 결혼식에 참석하지도 못할 텐데 배웅해 주고 싶어.”비록 부현승이 그녀와 결혼하기로 약속하고 그녀를 데리고 결혼식장을 구경하고, 웨딩드레스 피팅하고 반지를 고르고 웨딩 사진을 찍으며 결혼에 필요한 모든 일을 했지만 정작 부모님에게 소개해 준 적은 없었다. 그리고 혼인신고서 얘기만 나오면 말을 돌렸다.한번은 그녀가 혼인신고 하러 가자고 암시했더니 부현승은 결혼식이 끝나면 집 한 채를 그녀의 명의로 넘겨주겠다고 했다.서혜민은 기쁨과 동시에 부현승의 뜻을 눈치챘다. 그는 그녀와 혼인신고를 할 생각이 없었다.결혼식을 올리는 것도 그저 아이에게 명분을 주기 위해서였고, 부현승이 원하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멈출 수 있는 그런 사이였다.하지만 부씨 일가에 발을 들일 수 있게 되었는데, 어찌 집 한 채와 몇억 정도의 재산만 탐을 낼 서혜민이였겠는가.그녀는 최선을 다해 영원히 부씨 일가에 머무를 계획이었다.하여 서혜민은 본가에 가보고 싶었다.결혼 전에 조금이라도 알아둔다면, 결혼 후에 적어도 까막눈은 아닐 것이었다.부현승은 서혜민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바라본 시간이 길어지자, 서혜민은 긴장되기 시작했다. 그녀의 속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만 같았다.하지만 어떨 때는 부현승이 지금과 같은 눈으로 쳐다봐도 그녀의 요구를 들어줬었다.“정말 가고 싶어?”서혜민은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응.”“가고 싶으면 가자.”하여 부현승이 서혜민을 데리고 왔다.그가 서혜민을 데리고 본가로 왔을 때, 둘째 숙부와 숙모는 아직 오지 않은 상태였다.온하랑은 서혜민도 올 줄은 몰랐다는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서혜민의 몸매는 여전히 가냘파 임신한 티가 나지 않았다.온하랑이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오
서혜민이 속으로 부인의 신분을 추측하고 있을 때, 부현승이 그녀의 손을 잡고 앞으로 갔다.“아버지, 어머니. 혜민이예요.”서혜민의 머리가 백지장이 되며 얼굴이 창백해진 채 급하게 인사드렸다.“안녕하세요. 아버님, 어머님.”서혜민은 긴장한 기색으로 둘째 숙모가 그녀를 못 알아보기를 바랐다.둘째 숙모는 온하랑과 말을 나누며 그저 서혜민을 흘깃 보고 대충 대꾸해 주며 계속하여 온하랑에게 당부의 말을 이어 나갔다.서혜민의 가슴이 철렁했다. 온하랑의 표정을 슬쩍 보니, 왠지 더 서러운 감정이 들었다.‘아무리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시지만, 굳이 다른 사람 앞에서까지 좋은 태도를 보여주시진 않으시네. 집에서라면 모르겠는데, 처음 부씨 일가 본가에 와서도 냉대를 받으면 앞으로 누가 날 제대로 대우해 줄까...’서혜민은 부현승을 쳐다보았다. 그가 나서서 대화를 이어 나가 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하지만 부현승은 못 본 척 그녀를 끌고 소파에 앉았다.서혜민이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본 온하랑은 왠지 모르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비록 일전 혼인 생활을 했었지만, 부영훈 부부가 일찍 세상을 떠나고 부선월은 외국에서 지내다 보니 시댁과의 모순은 겪은 적이 없었다.둘째 숙모도 그녀 앞에서는 언제나 온화한 모습이었지만 서혜민에게는 나쁜 시어머니의 형상이 보였다.둘째 숙모는 어른이다 보니 서혜민을 신경 쓰지 않아도 괜찮았지만, 온하랑은 서혜민에게 뭐라 하기 어려웠다. 특히 그녀한테 인사하러 온 서혜민이다 보니 그녀를 냉대하기 더 어려웠다.하여 대화하면서도 온하랑은 계속하여 서혜민에게 말을 걸었지만, 온하랑 앞에서 체면을 구겼다고 생각한 서혜민은 그녀의 말을 제대로 받아주지 않았다.점심 식사 시 서혜민이 용기를 내어 시어머니에게 반찬을 집어주었지만, 그녀는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며 젓가락을 대지도 않았다.서혜민의 안색은 유난히 창백해 보였다.그 모습을 본 온하랑이 생각을 이었다.‘부승민이 부영훈 아래에 이름을 올렸었다면 시어머니는 부선월일텐데, 아마 서혜민과 비슷
서혜민은 답답하다는 듯이 입을 삐죽였다. 말을 쉽지만, 그녀의 입장에서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그는 전혀 알지 못했다.“하지만... 그저 어머니가 날 좋아해 줬으면 좋겠어. 그러면 네가 중간에 겨서 힘들어하지 않아도 되잖아.”“그러지 않아도 돼. 어차피 너랑 우리 부모님은 잘 못 지낼 거니 굳이 가깝게 지내지 않아도 돼. 각자 알아서 잘 지내면 되지.”서혜민의 부현승의 차가운 얼굴을 보며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부씨 일가에서 그녀는 겨우 온하랑과 안면이 있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온하랑은 떠나는데 부현승은 다른 사람과 가깝게 지내지 않아도 된다고 하니 그녀는 더 겉도는 기분이 들었다.부현승은 여전히 평온한 표정으로 지금 이 상황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서혜민이 살고 있는 곳으로 온 부현승이 길가에 차를 세우며 말했다.“난 이만 갈게. 푹 쉬고, 내가 한 말 잘 생각해 봐.”서혜민은 콧방귀를 뀌고는 차에서 내렸다.부현승은 차를 돌려 회사로 향했다.한 골목에서 우회전할 때 눈앞에 갑자기 인영이 스쳐 부현승은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여자는 핸드폰을 들고 바닥에 주저앉은 채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다.길을 건널 때, 핸드폰이 떨어져 그녀는 바로 주워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핸드폰을 주워 일어서기도 전에 여자는 한 차가 자신을 향해 오는 것을 보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부현승이 얼른 안전벨트를 풀며 차에서 내려 안색이 창백한 채 주저앉아 있는 여자를 보았다.“부딪히셨나요?”여자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다 그의 질문을 파악하고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부딪쳤다는 거예요? 아니라는 거예요?”여자가 땅을 짚으며 일어서더니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놓고 아파지는 배를 부여잡았다.“안 부딪혔어요.”“앞으로 그렇게 위험하게 굴지 말아요.”부현승은 그녀를 쳐다보더니 몸을 돌려 운전석으로 가 자리를 떴다.“수현아, 깜짝 놀랐잖아.”친구가 얼른 앞으로 와 서수현의 팔을 부여잡았다.“아까 그 사람이 브레이크를 제때 밟아서 다행이지, 아니면
6월7일 10시쯤, 온하랑은 캐리어를 들고 강남국제공항으로 갔다. 김시연이 그녀를 배웅하러 나왔다.11시 30분 비행기로 두 번의 환승과 20시간의 비행을 거쳐야 필라시에 도착한다. 김시연은 온하랑과 함께 탑승 수속을 하러 갔다. 함께 체크인하고 보안 검색대를 통과한 후 대기실에서 기다렸다.11시가 되자 승객들은 탑승구에 줄을 서서 항공권을 확인하고 탑승할 준비를 했다. 이번에 온하랑이 가면 최소 몇 달은 볼 수 없었다. 김시연은 눈시울을 붉히며 온하랑을 껴안았다.“도착하면 꼭 전화해 줘. 혹시라도... 거기서 지내기 힘들면 다시 돌아와.”“그래.”김시연의 말을 듣던 온하랑은 코끝이 시큰해졌다.“아니면 나랑 같이 갈래?”두 사람의 관계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중 하나는 온하랑이 가장 힘들 때 김시연이 항상 옆에서 온하랑을 지지해 주고 그녀의 편이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온하랑은 무뚝뚝한 사람이라 단 한 번도 김시연에 대한 우정을 말로 표현 한 적이 없지만 마음속으로는 항상 김시연을 최고의 절친으로 여겼다. 이제 둘이 헤어지게 되자 온하랑은 매우 아쉬웠다. 김시연은 미소를 지었다.“엄마가 없었다면 무조건 너랑 같이 갔을 텐데, 우리 엄마가 여기 있잖아.”어머니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녀뿐이어서 김시연은 떠날 수 없었다.“그래, 아주머니 잘 돌봐. 자주 연락할게. 만약 아저씨가 또 선보라고 하면 나랑 말해야 해. 어떤 사람인지 내가 판단해 볼게.”“네가? 너의 안목을 믿지 못하겠는데?”김시연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웃었다.“하긴. 내 주제에 무슨.”온하랑은 멋쩍게 웃었다. 물러터진 성격으로 부승민에게 두 번이나 속았는데 김시연을 위해 남자를 봐준다니 웃기지도 않는 말이다.탑승이 시작되자 온하랑은 아쉬워서 계속 뒤돌아보았다.“그럼 갈게?”“그래. 도착하자마자 꼭 연락해.” “알았어.”김시연이 지켜보는 가운데 온하랑은 비행기로 통하는 통로로 걸어갔다. 부승민은 대기실의 기둥 뒤에서 온하랑의 뒷모습이
온하랑은 카톡으로 진도원과 대화를 하다가 우연히 진도원이 자신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생각해 보면 딱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최동철이 필라시에 있을 때부터 그녀를 알고 있었으니 진도원이 최동철의 친구인 이상 그녀를 알고 있는 것도 가능했다.진도원은 온하랑을 한인 협회에서 알았다고 했는데 두 사람은 친한 사이는 아니었고 최동철이 온하랑과 더 친했다고 말했다.챙겨야 할 사람이 오랜 지인이라는 사실에 진도원은 더 열정적이었고 귀찮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는 반 시간 전에 공항에 도착해서 온하랑에게 문자를 남겼다.[비행기에서 내리면 전화해.]메시지를 본 온하랑은 안내 표지판을 따라가 짐을 찾고 진도원에게 전화했다. 온하랑이 자신의 위치를 말하자 진도원은 그 자리에서 자신을 기다리라고 했다.온하랑은 캐리어 손잡이를 잡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짐을 찾고 차례로 떠나자 주변은 금세 조용해졌다. 멀지 않은 곳에 KFC가 영업 중이었고, 안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약 10분 후, 왼쪽에 검은 트렌치코트를 입은 키가 큰 남자가 온하랑과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온하랑?”“도원 오빠?”신분을 확인한 진도원은 앞으로 다가가 훑어보더니 주동적으로 온하랑 손에 들린 캐리어를 건네받았다.“내가 도와줄게. 이쪽으로 가면 가까워.”“네, 도원 오빠. 늦은 시간에 데리러 와줘서 정말 고마워요.”온하랑은 진도원을 바라보다가 왼쪽 귀에 피어싱과 한 단추를 풀어 헤친 셔츠 사이로 살짝 드러난 문신을 발견했다.진도원은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고맙긴 뭘, 같은 한국인끼리 도와야지. 여기서는 다 가족이나 다름없어. 앞으로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해.”이곳에 이민해 온 한국인은 많았지만 같은 민족끼리 정을 나누는 것은 불가피하므로 자발적으로 한인 협회를 만들어 서로 도우면서 살았다.“네, 그럼 사양하지 않을게요. 며칠 뒤에 집 구할 때도 오빠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요.”온하랑은 이 도시에 처음 온 거나 다름없었기에 이곳의 물가
수화기 너머로 임가희는 잠시 멍해 있다가 임연지가 충동적으로 행동했을까 봐 걱정하며 바로 물었다.“오늘 센트럴 백화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아? 모르셨어요?”간하림은 간단하게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따귀를 맞은 일로 설윤은 굉장히 화가 났어요. 그래서 지금 사모님께 복수할 생각만 하고 있다니까요.”그 말을 듣자 임가희는 안심했다.뺨 한 대 맞고 참지 못해 도망가는, 겨우 스무 살짜리 감정적인 계집애 따위는 신경 쓸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무심하게 말했다.“이틀 후에 너희 가게로 갈 거야. 그때까지 설윤을 잘 부추겨서 나한테 덤비게 만들어.”간하림은 곧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챘다.“알겠습니다. 사모님,”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드는 장면은 반드시 녹화되어 최국환에게 전달될 것이다.하지만 어떻게 하면 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들도록 만들 수 있을까?리우 그룹.최국환은 회의를 마치고 몇몇 오랜 친구들과 식사를 하러 갔다.모임이 끝나고 나서야 비서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찾았다.“오전에 사모님과 설윤 씨께서 전화하셨습니다. 설윤 씨는 가방을 사지 않겠다고 하시며 환불해 달라고 하셨습니다.”“갑자기 왜?”“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화에서 설윤 씨 목소리가 이상했어요. 울먹이는 것 같았습니다.”최국환은 한창 젊은 애인에게 푹 빠져 있던 터라 설윤에게 전화를 걸었다.거의 끊어지려는 순간, 전화가 연결되었다. 설윤의 목소리는 살짝 쉰 듯했다.“국환 씨.”“김 비서 말로는 가방 환불해 달라고 했다던데.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더니 왜 갑자기?”설윤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싫어졌어요. 이유는 없어요.”“이유가 없어? 그럼 목소리는 왜 그래? 누가 괴롭혔어? 누군지 말만 해. 감히 내 여자를 괴롭히다니!”“묻지 마세요. 저 때문에 국환 씨와 사모님 사이가 나빠지는 건 싫어요.”“오? 내 마누라와 관련된 일이야?”“말했잖아요, 묻지 마시라고요. 더 물으면 저 진짜 삐질 거예요.”“아이고, 또 어린애
“정말... 어이가 없어...”설윤은 시선을 피하며 돌아서려 했다.“어딜 가요? 방금 구매 기록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이제 와서 못 보여주는 건데요?”임연지는 설윤의 길을 막아서며 그녀 손에 든 선물 상자를 잡고 비꼬듯 말했다.“젊은 아가씨가 왜 이렇게 뻔뻔해요? 유부남인 거 뻔히 알면서 끼어들다니. 내 고모부가 그쪽 아빠보다 나이도 많은데, 역겹지도 않아요? 몸 팔아서 얻은 가방을 들고 다니니까 좋아요?” 마침 가게에 들어오던 손님 몇 명이 임연지의 말을 듣고 문 앞에서 수군거렸다.설윤은 수치심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임연지를 밀치고 가게를 나서 황급히 도망쳤다.간하림은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뒤따라갔다.“저기요. 설윤 씨, 가방은...”점원은 임연지의 손에 들린 선물 상자를 보고 두 번 불렀다.그러나 설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이게 다 무슨 일이래!“그만 불러요. 안 올 거예요.”임연지는 웃으며 손에 든 선물 상자를 내려다봤다.“저 여자가 싫다고 두고 갔으니 이 가방 저 주세요.”“임연지 씨, 죄송하지만 설윤 씨는 그런 말씀이 없으셔서...”“걱정 마세요, 분명히 환불할 거예요. 환불하면 이 가방 저한테 남겨 두세요.”임연지는 선물 상자를 점원에게 건넸다.점원은 임연지의 배경을 생각하며 마지못해 대답했다.“설윤 씨가 환불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네.”가방을 못 사서 한진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했는데 상황이 반전되고 내연녀까지 혼내주고 나니 임연지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윤아, 괜찮아?”마침내 매장 근처를 벗어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사라지자 설윤은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간하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넋이 나간 채 앞으로 걸어갔다.“윤아, 어디 가서 좀 앉을까?”설윤은 마침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근처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간하림이 그녀를 위로했다.“윤아, 너무 속상해하지
한진은 큰 도움을 주고도 단지 가방 하나 사달라는 부탁만 했을 뿐인데 실망을 안겨주게 생겼으니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심지어 가방을 선물해주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했는데 무슨 생각 할지 걱정되었다. 설마 공짜로 주기 싫어서 쪼잔하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임연지가 물었다.“다음번에 언제 입고되나요?”점원은 임연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정확하게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회원 가입하시면 나중에 재고를 확보할 때 연락드리고 있어요.”“그래요. 할게요.”임연지는 마지못해 동의했다.“연락처가 어떻게 돼요?”점원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물었다.임연지는 전화번호를 말하며 머릿속으로 한진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했다.“설윤 씨, 어서 오세요. 가방 찾으러 오셨죠? 잠깐 앉아 계시면 금방 가져다드릴게요.”다른 점원의 반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네, 고마워요.”소리의 출처를 따라 고개를 돌린 임연지는 젊은 여자 두 명을 발견하고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윤아, 여기 점원이랑 아는 사이야? 물건을 엄청 많이 샀나 보네? 부러워.”나지막이 속삭이는 여자 목소리가 임연지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이내 경멸이 담긴 표정으로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세상 물정 모르는 촌년들. 잠깐! 왼쪽에 있는 여자가 낯이 좀 익은데?’그리고 고개를 돌려 찬찬히 뜯어보았다.분명 어딘가 본 듯한 얼굴이다.기억을 되짚어보던 찰나 점원이 정교한 선물 상자를 들고나와 두 여자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뚜껑을 열고 안에 든 가방을 보여주었다.“설윤 씨가 구매한 가방이에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설윤은 가방을 꺼내 꼼꼼히 살펴보았다.“확인했어요. 고마워요. 먼저 가볼게요.”점원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불쾌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대뜸 울려 퍼졌다.“재고가 없다면서요? 분명 제가 먼저 왔는데 왜 저 사람한테 주는 거죠?”싸늘한 표정으로 따지는 임연지를 보자 점원이 서둘러 해명했다.“이 가방은 손님께서
일과를 마친 설윤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돌아갔다가 간하림과 다시 마주쳤다.이내 먼저 입을 열었다.“하림아, 내일 쉬는 날인데 같이 쇼핑하러 가지 않을래?”임가희가 부탁한 일을 떠올리자 간하림은 흔쾌히 동의했다.다음 날, 두 사람은 약속 시간에 맞춰 센트럴 백화점 근처의 카페에 도착했다.일단 만나자마자 설윤은 밀크티 두 잔을 주문했고, 백화점으로 걸어가면서 쪽쪽 빨아 마셨다.간하림이 말했다.“여긴 명품밖에 없을 텐데? 지난번에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발견했다가 가격 보고 기겁했잖아. 그나저나 꽤 익숙한 곳인가 봐? 여기 자주 와?”“내가 무슨 재주로? 국환 씨 따라 몇 번 다녀갔을 뿐, 며칠 전에 가방 하나 주문했는데 오늘 픽업하러 가는 거야.”“헐! 회장님 너무 근사하잖아.”설윤을 바라보는 간하림의 눈빛에 부러움이 가득했다.“그러니까 얼른 행동 개시해야 한다고. 사모님과 이혼시키고 너랑 결혼할 방법을 찾아야 해.”비록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질투심이 활활 타올랐다.목적을 이루기 위해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정이었다.사실 그녀는 속으로 뻔했다. 최국환과 임가희는 결혼 전에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설윤에게 준 돈은 부부의 공동 재산에 속하지 않는지라 다시 빼앗아 갈 자격이 없었다. 물론 최국환이 직접 개입하면 회수가 가능했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나중에 임가희가 설윤에게 본때를 보여주거나 최국환의 마음이 식는다고 해도 그동안 받았던 값비싼 선물은 여전히 가져갈 것이며 현금화하면 그래도 두둑이 챙길 수 있다.결국 임가희가 손을 쓰는 이상 설윤은 곧 최국환에게 찬밥 신세 당하므로 얼추 비슷한 액수의 보수를 받을뿐더러 임가희라는 인맥까지 확보하기에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였다.그제야 간하림은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설윤의 표정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어젯밤에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네 말이 맞아. 국환 씨 아내와 적이 된 이상 내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상대방이 봐주는 건 아니지. 고작 돈 몇 푼
“자, 이제 그만하고 출근하자. 아니면 매니저한테 또 혼날라.”설윤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탈의실을 나가려고 했다.“먼저 가. 나 립스틱만 바르고.”“알았어.”설윤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간하림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사모님이 부탁한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군.’...병원에 도착한 최동철은 올라가는 대신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온하랑은 부승민과 작별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유치원 확인하러 직접 다녀온다고 하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차에 타고 나서 메이슨을 데리러 갈 줄 알았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최동철이 말했다.“별장에 계신 이모님이 연락이 와서 오늘 메이슨이 일어나자마자 발이 아프다고 했다네. 아마도 어제 강행군이었나 봐. 그래서 집에서 쉬겠다고 해서 우리 둘만 가면 돼.”온하랑은 미안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어제 많이 걸어 다니긴 했죠. 메이슨을 말렸어야 했는데...”“네 탓 아니야. 내가 너무 바빠서 녀석이랑 놀아주지 못하는 바람에 무리한 거지.”이에 온하랑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동철 오빠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메이슨도 철이 들었고.”최동철이 피식 웃었다.“우리 사이에 남사스럽게 뭔.”이동하는 동안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면서 편안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했다.동언 국제 유치원에 도착하자 젊은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하며 소개와 함께 내부를 구경시켜주었다.“우리 유치원은 총 3개의 반으로 나뉘는데 최대 학생 수를 각각 20명 이내로 확보하여 교사들이 모든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게끔 노력하죠. 교실에는 멀티미디어 교육 장비가 구비되어 있으며 전용 독서 공간, 놀이 공간, 수공예 공간, 실내외 감시 카메라, 그리고...”꼼꼼하게 알아본 결과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온하랑은 꽤 만족했다.이내 유치원을 나서고 최동철에게 의견을 물었다.최동철이 말했다.“몇 군데가 노후한 것만 빼고 기본적인 인프라는 괜찮네. 시설 개조 명목으로 2억을 기부할 생각이야. 게다가 메이슨도 특별한 케이스라
설윤은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봤어? 다른 사람한테 절대 얘기하면 안 돼.”“당연하지.”간하림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나 몰라? 걱정 붙들어 매.”그리고 다정하게 설윤의 팔짱을 끼고 클럽 탈의실로 향했다.아직 아무도 없었고, 간하림은 옷을 갈아입으며 궁금한 듯 물었다.“윤아, 최 회장님과 어떻게 알게 되었어?”딱히 언급하고 싶지 않은 설윤은 대충 둘러댔다.“우연한 기회에 마주쳤어. 전에 일하던 곳에 놀러 왔다가 마침 내가 접대를 담당했거든.”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간하림은 부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내 손을 뻗어 설윤의 잘록한 허리를 꼬집었고, 뽀얀 피부에 선명한 붉은 자국을 바라보았다.“최 회장님이 네가 진짜 마음에 드나 봐. 직접 출근하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정말 좋겠네.”설윤은 피식 웃으며 옷을 갈아입었다.“너도 든든한 지원군이 있잖아.”“든든하긴 개뿔! 하늘과 땅 차이거든?”간하림이 툴툴거렸다.“가게에 오면 지명할 뿐이지 너처럼 최 회장님 전속 담당이 아니야.”심지어 손님마저 감히 설윤에게 집적거리지 못했고, 누가 봐도 사전에 단단히 경고한 게 분명했다. 반면, 그녀는 치근덕거리는 사람이 있어도 꾹 참아야만 했다.설윤은 웃으면서 아무 말 없이 거울을 보며 헤어스타일을 다듬었다.“윤아, 나중에 사모님이 되면 날 잊지 마.”“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가 뭐 하는 사람인지 정녕 몰라?”이내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바르더니 간하림을 흘겨보았다.“국환 씨가 싫증이 나기 전에 돈이라도 두둑이 챙기면 땡큐고, 사모님은 감히 넘보지도 않아.”간하림은 납득할 수 없는 듯 바짝 다가갔다.“우리가 뭐 어때서? 최 회장님 와이프도 결국에는 사모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했잖아. 그리고 며칠 전 기사 못 봤어?”“무슨 기사?”곧이어 출입구를 힐끗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누군가 최 회장님 와이프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해서 끔찍한 상처를 입었대.”“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임연지는 집에 도착하자 거실 소파에 앉아 굳은 얼굴로 손에 든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는 임가희를 발견했다.테이블에 놓인 등기 전용 서류 봉투 위에 여러 장의 사진이 널브러져 있었다.“고모, 왜 그래요?”말을 마치고 나서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고모부가...”이내 나머지 사진도 확인했는데 전부 어떤 젊은 여자와 다정한 스킨십을 하는 최국환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결코 가벼운 사이는 아닌 듯싶었다.“왜 이렇게 소란스러워?”임가희가 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흘겨보았다.임연지는 목을 움츠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임가희를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고모, 이제 어떡해요?”“어떡하긴?”임가희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모른 척해야지. 지금 네 고모부 덕분에 우리가 먹고 사는 거야. 괜히 추궁했다가 홧김에 쫓아내기라도 한다면 더 손해이지 않겠어?”그렇다고 마냥 당할 수는 없었다.지금껏 비슷한 사례가 여러 번 있었지만 하나같이 머리가 텅 빈 여자들이라 그녀의 도발에 넘어가서 부랴부랴 찾아와 따지기 급급했다. 나중에 울면서 최국환에게 하소연하면 정이 떨어진다며 다시는 만나주지 않았다.또한 최국환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도 신분과 집안, 그리고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다.어쨌거나 그 나이 먹고 결혼을 3번이나 하면서 웃음거리로 전락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본처의 자리를 위협받지 않은 이상 고작 여자 문제로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뭐 있겠는가? 뒤에서 몰래 처리하면 그만이었다.“그냥 넘어가려고요?”비록 고모의 말도 맞지만 그래도 왠지 꺼림칙했다.“넌 신경 쓰지 마. 고모부 앞에서도 티 내지 말고.”임연지는 사진 속 여자를 힐끗 쳐다보며 속으로 ‘여우 년’이라고 욕하고 마지못해 대답했다.“알았어요.”임가희는 사진을 모두 치웠다.무언가를 떠올린 듯 임연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참, 고모, 만약 이 여자가 임신하면 어떡해요?”“네 고모부의 컨
“침착해.”임연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호텔에서 제공한 가운을 느긋하게 껴입었다.“샤워했어? 나랑 같이 씻을래?”“꿈 깨.”이내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면서 문을 열자 알몸으로 나타나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으려는 오재원을 발견했다.“연지야.”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슬쩍 피했다.“호텔에서 푹 쉬어. 먼저 가볼게.”“아직 이른데? 좀 더 있다 가.”“안돼.”임연지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오재원을 스쳐 지나가 침대 옆으로 걸어가서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 들었다.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쌀쌀맞은 얼굴을 보자 오재원은 꼬리를 내렸다.“알았어. 그럼 언제 다시 올 거야? 그리고 원하는 집이 있으면 알려줘. 부동산에 물어볼게.”“방 3개, 풀옵션. 나머지는 알아서 해.”“그래.”임연지는 옷매무새와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방을 나갔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뒤돌아보며 혀를 찼다.‘역겨운 놈.’집으로 돌아가는 차에 몸을 싣고 한진에게 답장을 보냈다.[호텔을 벗어나니 공기마저 상쾌한 기분이야.]한진이 대답했다.[하하하! 참,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우리 오빠가 인맥을 동원해서 각 언론사에 수시로 주시하라고 했잖아. 그중에서 제보받은 회사가 있는데 편집장이 이메일을 보자마자 오빠한테 연락했대.]그러고 나서 이메일의 스크린샷을 보내주었다.본문의 첫 마디가 온하랑이 필라시에서 유학할 때 최동철과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었다.임연지는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대박인데? 고마워, 한진아. 오빠한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해줘. 네가 아니었다면 진짜 아프리카로 쫓겨났을지도 몰라.]그동안 한진의 오빠가 사전에 뉴스를 차단하지 못하고 자칫 폭로라도 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이제 결과를 확인한 이상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하지만 대체 누가 제보했단 말이지?한진이 다시 문자를 보냈다.[물론 메일 주소를 역추적한 결과 여전히 너희 집으로 되어 있어. 아마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가상 주소를 사용한 것 같아.][미친놈.]임연지는 화가 나서 머리카락을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임연지는 그 틈을 타서 오재원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오재원은 그녀를 따라 나가려고 했지만 잠시 뒤 자신이 들고 있던 캐리어를 떠올리고 그것을 끌며 엘리베이터를 나왔다.방에 들어가자 오재원은 서둘러 캐리어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임연지를 끌어안고는 침대 쪽으로 밀어붙였다. “연지야, 빨리 나 주라고. 더는 참을 수 없어.”“오재원! 이거 놔! 먼저 일어나!”“안 돼. 연지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그냥 즐기기만 하면 돼.” 그녀는 그를 힘껏 밀쳤고 마음속에서 강한 반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오재원의 힘이 너무 강해 벗어나기 힘들었다. “오재원, 내 말 들어봐. 우리 얘기 좀 해야 해.” 임연지는 차분하게 말하며 그가 자신의 말을 듣길 바랐다.하지만 오재원은 이미 욕망에 눈이 멀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임연지에게 입을 맞추려 했고 손은 그녀의 몸을 함부로 만지기 시작했다.“얘기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걸 알아. 우리는 지금 중요한 일을 하는 거야.” 그는 말을 마친 후 임연지의 입술을 막았다. “연지야, 잘 생각해. 네가 만약 나를 밀어내면 난 바로 나갈 거야.” 임연지는 속에서 역겨움이 밀려왔지만 그녀의 밀치는 손길은 결국 멈춰 섰다.“그래 이거지.”오재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는 충분히 즐겼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오재원은 임연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너 너무 향기로워. 연지야. 어쩌면 이제 우리 아이가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네.”임연지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더 이상 그를 피하지 않으면 정말로 오재원에게 뺨을 갈길 것만 같았다.화장실에 들어간 임연지는 핸드폰을 꺼내 한진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불만을 토로했다. [한진아, 살려줘. 진짜 그 사람이 너무 싫어!][돌아오자마자 나랑 자려고 하고 역겨워 죽겠어!][내가 기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