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이 되자 온하랑은 잠에서 깼다. 어느 정도 시차 적응도 되어 김시연에게 같이 저녁 먹으러 가자고 했다. 저녁 식사 후, 김시연은 밖으로 나가 산책 하자고 제안했다.주변에는 많은 사람이 오가고, 그중 많은 사람들은 여행을 온 관광객들로, 행복한 얼굴로 지칠 줄 모르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온하랑과 김시연은 부두 옆에 서서 시원하고 상쾌한 바닷바람을 맞았다. 밝은 불빛이 바다 위에 비쳐 파도가 금빛으로 반짝이는 것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두 사람은 이곳에서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온하랑은 갑자기 오싹해지며 누군가 뒤에서 그녀들을 지켜보는 것 같은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시테니 오페라 하우스 주변을 한 바퀴 돌고 호텔로 돌아갔다.이주혁은 이틀 후에 도착한다. 이틀 동안은 온하랑과 김시연만 있었다. 세 번째 날 두 사람은 빅토리아 빌딩에 갔다. 빅토리아 빌딩은 시테니에서 가장 큰 쇼핑센터였다. 건물 자체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유리 돔, 나선형 계단, 고전적인 분위기가 곳곳에 베어져 있었다. 쇼핑센터가 되기 전에도 관광 명소였으며 현재는 시테니의 여행 필수 코스로 자리 잡았다.이 빌딩에는 푸드 코트, 카페, 레스토랑이 들어서 있고, 현지 브랜드 외에도 글로벌 명품 매장들이 즐비했다. 온하랑이 이곳에 온 것은 관광 외에 또 다른 목적이 있었다. 바로 이곳에서 이주혁에게 돌려줄 선물도 사고 겸사겸사 기념품을 사가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온하랑은 이주혁에게 무엇을 선물해야 좋을지 몰랐다. 이때 김시연이 말했다.“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쇼핑하다 보면 적당한 것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어느 한 매장에서 고급스러우면서도 절제된 디자인이 돋보이는 시계가 온하랑의 눈에 들어왔다. 쇼핑 가이드는 시계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그 아름다움을 자랑하며 적극 추천했다.“시연 씨, 이주혁에게 이 시계를 선물하면 어떨까요?”“괜찮긴 한데, 꼭 선물해야 해요?”“답례품이니까 꼭 줘야 해요.”온하랑이 쇼핑 가이드
다음 날 점심, 돌아다니느라 지친 온하랑과 김시연은 한식집에서 식사했다.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온하랑은 휴대폰을 뒤적이며 의아해서 물었다.“주혁이 지금쯤 도착하지 않았을까요? 왜 아직도 소식이 없지?”이주혁이 보낸 항공편 정보에 따르면 오늘 오전 시테니에 도착했어야 한다. 온하랑의 뒤를 설핏 쳐다보던 김시연의 눈가에 미소가 스쳤다.“늦어졌나 보죠, 뭐. 더 기다려 봐요.”“그래요.”바로 그때 온하랑의 눈앞이 갑자기 어두컴컴해졌다. 커다란 손이 그녀의 눈을 가리고 있었다. 온하랑은 무의식적으로 눈앞에 있는 손을 움켜잡었다. 큰 손의 주인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내가 누구게? 맞히면 선물 줄게요!”목소리를 듣자마자 온하랑은 바로 알았다.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이주혁, 유치하게 뭐야?”이주혁은 온하랑을 놓아주며 아쉬운 듯이 말했다.“그렇게 티나?”“당연하지! 어느 쪽에 앉을래?”온하랑이 물었다. 그녀와 김시연의 옆에 모두 여분의 의자가 하나씩 있었다.“여기 앉을 게.”이주혁은 온하랑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그와 김시연은 잘 아는 사이가 아니었기에 매우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온하랑은 가방을 건너편 빈 의자에 올려놓고 이주혁을 바라보며 물었다.“언제 도착했어? 왜 아무 말도 안 했어?”이주혁은 앞에 놓인 수저를 정리하며 말했다.“너에게 서프라이즈 해주고 싶어서 그랬지.”“그럼 여긴 어떻게 찾았어?”이주혁은 김시연을 흘긋 쳐다보며 말했다.“알아맞혔어. 내가 시연 씨에게 이곳을 추천해 줬거든.”“꽤 똑똑한데. 일은 끝났어?”“응, 설날 전까지는 없어. 나머지는 다 내년에 있어.”내년이라는 말을 들은 온하랑은 감탄했다.“시간이 참 빨리도 지나네. 또 1년이 지났어! 그건 그렇고, 너 주려고 선물 샀어.”온하랑은 가방에서 정교한 상자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마음에 드는지 열어 볼래?”이주혁은 미소를 지으며 온하랑을 두어 번 쳐다보더니 서둘러 열지 않았다.“나도 선물 가져왔어.”그는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
온하랑은 그 어떤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한 번도 그 장신구들을 착용하지 않았다.“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이참에 우리 우정템으로 해요. 내일 가져올게요.”김시연이 상자를 챙기며 말했다.“하랑 씨가 준 선물 안 열어봐요? 어제 선물 사다가 미친 사람을 만났는데 그나마 가게 주인이 현명해서 다행이었어요.”이주혁은 탁자 위에 놓인 상자를 집어 들고 겉을 자세히 살펴보았다.“시계 아니야? 마침 요즘 시곗줄이 필요했는데.”그 말과 동시에 이주혁이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섬세하지만 튀지 않는, 점잖은 분위기의 시계가 들어 있었다.“와, 하랑이 너 눈썰미가 좋네! 이 시계 너무 맘에 드니까 빨리 나한테 해줘 봐.”이주혁은 시계를 온하랑의 손에 쥐여주며 손목을 테이블 쪽으로 내밀었다.온하랑은 시계를 집어 들고 이주혁의 손목에 채워주었다.그녀가 고개를 살짝 숙이자 귀에서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이주혁의 각도에서 보면 길고 풍성한 그녀의 속눈썹은 작은 부채가 팔락거리는 것 같았다. 온하랑의 얼굴 피부는 껍질을 벗긴 달걀처럼 하얗고 고와서 미세한 솜털까지 보였다.“됐어.”온하랑은 이주혁의 손목을 잡고 조절해 주었다.“괜찮지?”이주혁은 자신의 손목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좋네. 이대로 하고 있지 뭐.”온하랑은 웃다가 갑자기 등 뒤로 서늘한 한기를 느꼈다.설마 부승민이 근처에 있는 건가?아니겠지?온하랑은 식당 안에 부승민이 없는지 주위를 둘러봤다.착각이겠지.식당 맞은편 카페 2층 카페에서 이주혁의 모습을 본 부승민의 두 눈은 먹물이라도 떨어질 정도로 잔뜩 어두워져 있었다.이주혁이 왜 여기 나타났지?!정말 안 보일 때가 없었다.이윽고 부승민은 온하랑이 상자를 꺼내 이주혁에게 건네는 것을 봤다.그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선물 상자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어제 온하랑이 샀던 그 남성용 시계였다!그게 이주혁을 위한 것이었다니!오늘 이주혁이 온다는 걸 알고 있었던 걸까?둘이 데이트하는 거야?왜 이주혁에게 선물을 주는 거지?이주
“오늘 내가 안 왔으면 오후에 어디 갈 생각이었어?”이주혁은 웨이터가 건네는 음식을 가져와 테이블 가장자리에 놓았다.“유람선 탈 생각이었어. 배에서 오페라 극장과 하버 브리지를 촬영하면 더 예쁘다고 들어서.”온하랑은 생선구이 한 점을 집어 등뼈를 발라냈다. 입에 넣으니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러웠다.“그럼 유람선 타러 가자. 난 다 괜찮아.”이주혁은 온하랑의 빈 잔을 바라보며 물었다.“사이다 더 마실래? 내가 가져다줄게.”“그래.” 온하랑은 팽이버섯 두 조각을 한입에 넣었다.“자.” 이주혁은 컵을 온하랑 앞에 다시 놓고 자리에 앉았다.“고마워.”“며칠 동안 시테니는 거의 다 돌았지? 다음엔 어디로 가?”“사실 내일 밀버른에 가려고 했는데, 넌 오늘 와서 시테니도 못 돌아다녔잖아.”“괜찮아. 나 예전에 촬영할 때 시테니에 와서 재미있게 놀았어. 내일 바로 밀버른으로 가자.”이주혁이 말했다.“그래 그럼.”건너편 카페에 있던 부승민은 온하랑 옆에 앉아 이따금 온하랑에게 음료를 가져다주고, 음식을 집어주는 이주혁을 보며 화가 났다.원래 저 자리는 그의 것이어야 했다!식사를 했던 중식당이 부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산책을 하기로 했다.이주혁은 주동적으로 온하랑과 김시연의 가방을 들어주었다.가는 길에 그들은 입구 앞에 파라솔 몇 개가 설치되어 있고 그 아래에 동그란 의자가 놓여 있는 카페를 지나쳤다.이주혁이 말했다.“여기서 잠깐 기다릴래? 내가 커피 사줄게.”배 위에서 풍경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면 얼마나 좋을까.김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온하랑을 끌어와 의자에 앉혔다.“그럼 부탁 좀 할게요. 저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난 아이스 라떼, 얼음 많이 넣어서.”“알겠습니다. 두 분은 여기서 잠시 기다리세요. 저는 가서 줄을 서겠습니다.”이주혁은 커피숍으로 들어갔다.여자 가방 두 개를 몸에 걸치고 여자들 사이에서 줄을 서 있는 이주혁의 뒷모습에 김시연은 온하랑에게 웃으며 말했다.“서비스가
저 이주혁은 아주 음흉한 놈이다!“하랑 씨, 웃으면서 포즈 좀 취해봐요.”온하랑은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은 채 얼굴 옆으로 브이를 하는 단조로운 포즈를 취했다.“오케이! 다 찍었어요. 어떤지 볼래요?”김시연이 휴대폰을 흔들자 온하랑과 이주혁이 함께 모여들었다.사진 속 여자는 부드러운 인상에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차분한 분위기를 풍겼고, 남자는 잘생긴 외모에 맑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가지런하고 하얀 치아를 드러내고 있었다.뒤로는 청록색의 푸른 바다가, 저 멀리 왼쪽에는 화려한 시테니 극장이, 오른쪽에는 웅장한 하버 브리지가 펼쳐져 있었다.인물과 풍경이 서로 너무 잘 어우러져 어디를 봐야 할지 모를 정도였다.이주혁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고마워요. 아주 잘 찍었네요. 사진 찍을래요? 내가 찍어줄게요.”“좋아요!” 김시연이 온하랑을 난간으로 끌어당겨 포즈를 취했다.온하랑과 이주혁에 비해 김시연과 온하랑의 포즈가 더 다양했는데 주로는 김시연이 온하랑의 허리를 감쌌다가, 그녀의 어깨에 누웠다가, 입술을 내밀고 볼에 뽀뽀하는 등 다양한 포즈를 취했고, 온하랑은 그에 맞춰 표정만 지으면 그만이었다.온하랑 옆에 있는 사람이 김시연으로 바뀌자 그제야 부승민의 표정이 한결 나아졌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못해 다시 먹구름으로 뒤덮였다.사진을 찍고 난 뒤 온하랑과 김시연은 휴대폰을 둘러싸고 모여들었다.이주혁과 온하랑은 머리가 거의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분명 이주혁이 의도한 게 틀림없었다!이주혁이 투어에 합류한 이후부터 부승민의 얼굴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원래 저긴 그의 자리인데.온하랑과 함께 여행을 떠난다고 상상해 본다. 그녀와 함께 갑판 위에서 바닷바람을 맞으며 경치를 감상하고 또 그녀를 위해 사진을 찍어주는 건 얼마나 로맨틱한 일인가.하지만 안타깝게도 두 사람은 함께 여행을 간 적이 없었다. 혼인신고를 마치고 할아버지가 신혼여행을 다녀오라고 했지만 그가 거절했었다.얼마 전 연휴에도 그는 일하느라 바빠서 여행은커녕 그녀
다음날 온하랑 일행은 밀버른행 비행기를 탔다.저녁까지 놀다가 저녁을 먹기 위해 식당을 찾았다.식사를 하고 있을 때, 이주혁은 담당자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이주혁, 여행 계획은 물 건너갔어. 이틀 뒤면 썸머타임 촬영 시작하니까 빨리 귀국해.]이 메시지를 본 이주혁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그는 자신의 눈을 비비며 잘못 본 게 아닌지 거듭 확인했다.[형, 농담하는 거지? 썸머타임은 다음 해 촬영 들어가잖아.][방금 단톡방에서 시간 앞당겨졌다는 통보를 받았어.]이주혁은 전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왜 이렇게 갑자기?][나도 잘 몰라. 전에 얘기 들은 적도 없고. 매니저 시켜서 티켓 끊어놓을 테니까 내일 당장 들어와. 오프닝 때 얼굴 안 비추면 기자들 또 이리저리 추측한다.]내일 다시 돌아간다는 생각에 이주혁은 속이 다 무너져 내려서는 조심스럽게 물었다.[나 좀 쉬면 안 돼?][될 것 같아?]다른 조연이라면 며칠 뒤에 합류해도 되지만 이주혁은 남자 주인공 역할을 맡고 있었고, 더군다나 요즘 그에게 대본이 없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라 다른 스태프들도 이주혁의 시간을 다 파악해서 요즘 일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이주혁은 괴로운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어찌 되었든 속이 상했다.아직 여행을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끝나버렸다!이 모습을 본 온하랑은 입에 있던 음식을 삼키고 물었다.“주혁아, 표정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어?”이주혁은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의자 등받이에 힘없이 기댄 채 두 손은 갈 곳을 잃었다. 촬영 앞당긴 사람을 죽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무슨 일이에요?” 김시연도 물었다.이주혁은 슬픔에 가득 잠긴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내일 다시 돌아가야 해요.”“무슨 일이야? 대본 없다고 하지 않았어?”온하랑은 고기를 한 입 베어 물었다. 고소하면서도 연한 살은 느끼하지도 않아서 너무 맛있었다.“대본이 하나 있었는데, 다음 해 연초에 시작한다 하고 왜 갑자기 앞당겨졌는지 모르겠어.”말을 하며 이주혁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지만
온하랑은 걸음을 멈추었다.“아니면 그냥 여기까지 배웅해 줄게. 바로 저기 체크인 데스크니까 굳이 따라가지 않을게.”이주혁은 시계를 흘깃 쳐다보고는 아쉬운 듯 말했다.“그래, 이만 돌아가 봐. 괜히 여행하는 데 방해되겠다. 귀국하면 또 보자.”온하랑이 뭐라 말하려는데 멀리서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이주혁이다!”말이 떨어지자마자 뒤에서 무수히 많은 발소리가 이쪽을 향해 달려왔다.온하랑이 고개를 돌리는데 순식간에 개미 떼처럼 밀려드는 사람들로 인해 미처 반응할 겨를도 없이 그대로 사람들 틈에 끼어버렸다.수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지나치며 옴짝달싹 못 하게 만들었다.흥분한 누군가 강한 힘으로 온하랑과 부딪혔고 온하랑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놀란 비명 소리도 소음에 잠식된 채 곧바로 누군가 그녀의 다리를 밟았다.무수히 많은 발과 다리가 그녀를 지나쳤고, 누군가는 실수로 밟기도 하고 발로 차기도 했다.온하랑의 비명소리는 묻혀버렸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일어나려고 하는데 그녀의 등이 밟혔다.귀 가까이 다가온 하이힐은 하마터면 그녀의 머리까지 밟을 뻔했다.온하랑은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몸을 보호하며 사람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바닥의 공기는 희박했고 온하랑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머리가 어지러웠다.그러다 누군가 머리를 발로 찼고, 넘어진 그 사람은 온하랑을 발로 차며 욕설을 퍼부었다.“미친 거 아니야, 왜 바닥에 누워서 이래!”온하랑은 극심한 고통을 느끼며 눈앞에 별이 보이는 것 같았다.기절하려는 순간 갑자기 따뜻하고 넓은 품에 안겼다.온하랑은 공중에 들려 누군가에게 안긴 채 사람들을 지나쳤다.이 순간 온하랑은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에 속으로 안도했다.코끝에 익숙한 향기가 느껴져도 온하랑은 환각이라고 생각했다.그런데 그녀의 귀에서 무시할 수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여기 사람이 다쳤어요! 비켜요!”이 목소리, 왜 이렇게 익숙하지?온하랑이 고개를 들자 부승민의 차가운 얼굴이 보였다.반쯤 얼굴에 햇빛을 받은 그는 마치
부승민은 온하랑을 데리고 병원에 검사받으러 갔다.가는 길에 온하랑은 김시연에게 문자를 보냈다.[시연 씨, 괜찮아요? 난 사람들한테 밟혀서 지금 병원에 가요. 먼저 호텔로 돌아가서 기다려요.]김시연이 겨우 살았다는 이모티콘을 보냈다.[난 괜찮아요.][세상에, 사생들이 무슨 사이비 종교 같아요!][많이 다쳤어요?][심하게 다치진 않았어요. 걱정 마요.][혼자 병원에 간 거예요? 어디에요, 내가 갈게요.]온하랑은 옆에 운전석에 앉은 부승민을 흘끗 쳐다보았다.[나 지금 공항 나왔으니까 호텔로 돌아가서 기다려요.]몇 초 후, 김시연이 갑자기 답장을 보냈다.[하랑 씨, 저 아까 부승민 씨 본 것 같아요!]온하랑은 순간 심장이 살짝 철렁했다. 괜히 옆에 있는 부승민을 힐끗 보면서 현애인에게 전 애인 만나다 들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잘못 본 거겠죠. 그 사람이 왜 여기 있겠어요.]메시지가 전송된 후 온하랑은 멍한 표정으로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마음이 조마조마했다.[내가 잘못 본 것 같아요. 이 얘기는 그만 해요. 버스 왔어요. 호텔에서 기다릴게요.][그래요.]온하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검사 결과는 온하랑은 가벼운 뇌진탕으로 이틀 정도 쉬면 괜찮다고 했다.그 외에도 온하랑의 몸에는 푸른 멍이 들어 의사는 울혈을 없애주는 연고를 처방했다.부승민은 손에 연고를 든 채 온하랑에게 말했다.“가자, 내가 호텔로 데려다줄게.”온하랑이 몇 번이고 손에 든 연고를 쳐다봤지만, 부승민은 모른 척 연고를 주머니에 넣었다.그리하여 온하랑은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말했다.“연고 줘, 나 혼자 갈 거야.”부승민은 아니꼬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왜 사서 고생을 하지?”온하랑은 찔리는 게 있는 듯 눈을 피하며 일부러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검사했는데 아무 이상 없잖아. 나 혼자서 호텔로 돌아갈 수 있어. 네가 날 데려다주면 시연 씨가 볼 거야.”“보면 안 돼? 뭐가 부끄러워?”“네가 부끄러워.”부승민은 웃었다.“그럼 말을
수화기 너머로 임가희는 잠시 멍해 있다가 임연지가 충동적으로 행동했을까 봐 걱정하며 바로 물었다.“오늘 센트럴 백화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아? 모르셨어요?”간하림은 간단하게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따귀를 맞은 일로 설윤은 굉장히 화가 났어요. 그래서 지금 사모님께 복수할 생각만 하고 있다니까요.”그 말을 듣자 임가희는 안심했다.뺨 한 대 맞고 참지 못해 도망가는, 겨우 스무 살짜리 감정적인 계집애 따위는 신경 쓸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무심하게 말했다.“이틀 후에 너희 가게로 갈 거야. 그때까지 설윤을 잘 부추겨서 나한테 덤비게 만들어.”간하림은 곧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챘다.“알겠습니다. 사모님,”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드는 장면은 반드시 녹화되어 최국환에게 전달될 것이다.하지만 어떻게 하면 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들도록 만들 수 있을까?리우 그룹.최국환은 회의를 마치고 몇몇 오랜 친구들과 식사를 하러 갔다.모임이 끝나고 나서야 비서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찾았다.“오전에 사모님과 설윤 씨께서 전화하셨습니다. 설윤 씨는 가방을 사지 않겠다고 하시며 환불해 달라고 하셨습니다.”“갑자기 왜?”“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화에서 설윤 씨 목소리가 이상했어요. 울먹이는 것 같았습니다.”최국환은 한창 젊은 애인에게 푹 빠져 있던 터라 설윤에게 전화를 걸었다.거의 끊어지려는 순간, 전화가 연결되었다. 설윤의 목소리는 살짝 쉰 듯했다.“국환 씨.”“김 비서 말로는 가방 환불해 달라고 했다던데.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더니 왜 갑자기?”설윤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싫어졌어요. 이유는 없어요.”“이유가 없어? 그럼 목소리는 왜 그래? 누가 괴롭혔어? 누군지 말만 해. 감히 내 여자를 괴롭히다니!”“묻지 마세요. 저 때문에 국환 씨와 사모님 사이가 나빠지는 건 싫어요.”“오? 내 마누라와 관련된 일이야?”“말했잖아요, 묻지 마시라고요. 더 물으면 저 진짜 삐질 거예요.”“아이고, 또 어린애
“정말... 어이가 없어...”설윤은 시선을 피하며 돌아서려 했다.“어딜 가요? 방금 구매 기록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이제 와서 못 보여주는 건데요?”임연지는 설윤의 길을 막아서며 그녀 손에 든 선물 상자를 잡고 비꼬듯 말했다.“젊은 아가씨가 왜 이렇게 뻔뻔해요? 유부남인 거 뻔히 알면서 끼어들다니. 내 고모부가 그쪽 아빠보다 나이도 많은데, 역겹지도 않아요? 몸 팔아서 얻은 가방을 들고 다니니까 좋아요?” 마침 가게에 들어오던 손님 몇 명이 임연지의 말을 듣고 문 앞에서 수군거렸다.설윤은 수치심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임연지를 밀치고 가게를 나서 황급히 도망쳤다.간하림은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뒤따라갔다.“저기요. 설윤 씨, 가방은...”점원은 임연지의 손에 들린 선물 상자를 보고 두 번 불렀다.그러나 설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이게 다 무슨 일이래!“그만 불러요. 안 올 거예요.”임연지는 웃으며 손에 든 선물 상자를 내려다봤다.“저 여자가 싫다고 두고 갔으니 이 가방 저 주세요.”“임연지 씨, 죄송하지만 설윤 씨는 그런 말씀이 없으셔서...”“걱정 마세요, 분명히 환불할 거예요. 환불하면 이 가방 저한테 남겨 두세요.”임연지는 선물 상자를 점원에게 건넸다.점원은 임연지의 배경을 생각하며 마지못해 대답했다.“설윤 씨가 환불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네.”가방을 못 사서 한진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했는데 상황이 반전되고 내연녀까지 혼내주고 나니 임연지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윤아, 괜찮아?”마침내 매장 근처를 벗어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사라지자 설윤은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간하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넋이 나간 채 앞으로 걸어갔다.“윤아, 어디 가서 좀 앉을까?”설윤은 마침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근처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간하림이 그녀를 위로했다.“윤아, 너무 속상해하지
한진은 큰 도움을 주고도 단지 가방 하나 사달라는 부탁만 했을 뿐인데 실망을 안겨주게 생겼으니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심지어 가방을 선물해주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했는데 무슨 생각 할지 걱정되었다. 설마 공짜로 주기 싫어서 쪼잔하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임연지가 물었다.“다음번에 언제 입고되나요?”점원은 임연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정확하게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회원 가입하시면 나중에 재고를 확보할 때 연락드리고 있어요.”“그래요. 할게요.”임연지는 마지못해 동의했다.“연락처가 어떻게 돼요?”점원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물었다.임연지는 전화번호를 말하며 머릿속으로 한진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했다.“설윤 씨, 어서 오세요. 가방 찾으러 오셨죠? 잠깐 앉아 계시면 금방 가져다드릴게요.”다른 점원의 반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네, 고마워요.”소리의 출처를 따라 고개를 돌린 임연지는 젊은 여자 두 명을 발견하고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윤아, 여기 점원이랑 아는 사이야? 물건을 엄청 많이 샀나 보네? 부러워.”나지막이 속삭이는 여자 목소리가 임연지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이내 경멸이 담긴 표정으로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세상 물정 모르는 촌년들. 잠깐! 왼쪽에 있는 여자가 낯이 좀 익은데?’그리고 고개를 돌려 찬찬히 뜯어보았다.분명 어딘가 본 듯한 얼굴이다.기억을 되짚어보던 찰나 점원이 정교한 선물 상자를 들고나와 두 여자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뚜껑을 열고 안에 든 가방을 보여주었다.“설윤 씨가 구매한 가방이에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설윤은 가방을 꺼내 꼼꼼히 살펴보았다.“확인했어요. 고마워요. 먼저 가볼게요.”점원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불쾌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대뜸 울려 퍼졌다.“재고가 없다면서요? 분명 제가 먼저 왔는데 왜 저 사람한테 주는 거죠?”싸늘한 표정으로 따지는 임연지를 보자 점원이 서둘러 해명했다.“이 가방은 손님께서
일과를 마친 설윤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돌아갔다가 간하림과 다시 마주쳤다.이내 먼저 입을 열었다.“하림아, 내일 쉬는 날인데 같이 쇼핑하러 가지 않을래?”임가희가 부탁한 일을 떠올리자 간하림은 흔쾌히 동의했다.다음 날, 두 사람은 약속 시간에 맞춰 센트럴 백화점 근처의 카페에 도착했다.일단 만나자마자 설윤은 밀크티 두 잔을 주문했고, 백화점으로 걸어가면서 쪽쪽 빨아 마셨다.간하림이 말했다.“여긴 명품밖에 없을 텐데? 지난번에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발견했다가 가격 보고 기겁했잖아. 그나저나 꽤 익숙한 곳인가 봐? 여기 자주 와?”“내가 무슨 재주로? 국환 씨 따라 몇 번 다녀갔을 뿐, 며칠 전에 가방 하나 주문했는데 오늘 픽업하러 가는 거야.”“헐! 회장님 너무 근사하잖아.”설윤을 바라보는 간하림의 눈빛에 부러움이 가득했다.“그러니까 얼른 행동 개시해야 한다고. 사모님과 이혼시키고 너랑 결혼할 방법을 찾아야 해.”비록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질투심이 활활 타올랐다.목적을 이루기 위해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정이었다.사실 그녀는 속으로 뻔했다. 최국환과 임가희는 결혼 전에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설윤에게 준 돈은 부부의 공동 재산에 속하지 않는지라 다시 빼앗아 갈 자격이 없었다. 물론 최국환이 직접 개입하면 회수가 가능했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나중에 임가희가 설윤에게 본때를 보여주거나 최국환의 마음이 식는다고 해도 그동안 받았던 값비싼 선물은 여전히 가져갈 것이며 현금화하면 그래도 두둑이 챙길 수 있다.결국 임가희가 손을 쓰는 이상 설윤은 곧 최국환에게 찬밥 신세 당하므로 얼추 비슷한 액수의 보수를 받을뿐더러 임가희라는 인맥까지 확보하기에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였다.그제야 간하림은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설윤의 표정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어젯밤에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네 말이 맞아. 국환 씨 아내와 적이 된 이상 내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상대방이 봐주는 건 아니지. 고작 돈 몇 푼
“자, 이제 그만하고 출근하자. 아니면 매니저한테 또 혼날라.”설윤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탈의실을 나가려고 했다.“먼저 가. 나 립스틱만 바르고.”“알았어.”설윤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간하림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사모님이 부탁한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군.’...병원에 도착한 최동철은 올라가는 대신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온하랑은 부승민과 작별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유치원 확인하러 직접 다녀온다고 하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차에 타고 나서 메이슨을 데리러 갈 줄 알았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최동철이 말했다.“별장에 계신 이모님이 연락이 와서 오늘 메이슨이 일어나자마자 발이 아프다고 했다네. 아마도 어제 강행군이었나 봐. 그래서 집에서 쉬겠다고 해서 우리 둘만 가면 돼.”온하랑은 미안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어제 많이 걸어 다니긴 했죠. 메이슨을 말렸어야 했는데...”“네 탓 아니야. 내가 너무 바빠서 녀석이랑 놀아주지 못하는 바람에 무리한 거지.”이에 온하랑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동철 오빠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메이슨도 철이 들었고.”최동철이 피식 웃었다.“우리 사이에 남사스럽게 뭔.”이동하는 동안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면서 편안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했다.동언 국제 유치원에 도착하자 젊은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하며 소개와 함께 내부를 구경시켜주었다.“우리 유치원은 총 3개의 반으로 나뉘는데 최대 학생 수를 각각 20명 이내로 확보하여 교사들이 모든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게끔 노력하죠. 교실에는 멀티미디어 교육 장비가 구비되어 있으며 전용 독서 공간, 놀이 공간, 수공예 공간, 실내외 감시 카메라, 그리고...”꼼꼼하게 알아본 결과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온하랑은 꽤 만족했다.이내 유치원을 나서고 최동철에게 의견을 물었다.최동철이 말했다.“몇 군데가 노후한 것만 빼고 기본적인 인프라는 괜찮네. 시설 개조 명목으로 2억을 기부할 생각이야. 게다가 메이슨도 특별한 케이스라
설윤은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봤어? 다른 사람한테 절대 얘기하면 안 돼.”“당연하지.”간하림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나 몰라? 걱정 붙들어 매.”그리고 다정하게 설윤의 팔짱을 끼고 클럽 탈의실로 향했다.아직 아무도 없었고, 간하림은 옷을 갈아입으며 궁금한 듯 물었다.“윤아, 최 회장님과 어떻게 알게 되었어?”딱히 언급하고 싶지 않은 설윤은 대충 둘러댔다.“우연한 기회에 마주쳤어. 전에 일하던 곳에 놀러 왔다가 마침 내가 접대를 담당했거든.”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간하림은 부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내 손을 뻗어 설윤의 잘록한 허리를 꼬집었고, 뽀얀 피부에 선명한 붉은 자국을 바라보았다.“최 회장님이 네가 진짜 마음에 드나 봐. 직접 출근하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정말 좋겠네.”설윤은 피식 웃으며 옷을 갈아입었다.“너도 든든한 지원군이 있잖아.”“든든하긴 개뿔! 하늘과 땅 차이거든?”간하림이 툴툴거렸다.“가게에 오면 지명할 뿐이지 너처럼 최 회장님 전속 담당이 아니야.”심지어 손님마저 감히 설윤에게 집적거리지 못했고, 누가 봐도 사전에 단단히 경고한 게 분명했다. 반면, 그녀는 치근덕거리는 사람이 있어도 꾹 참아야만 했다.설윤은 웃으면서 아무 말 없이 거울을 보며 헤어스타일을 다듬었다.“윤아, 나중에 사모님이 되면 날 잊지 마.”“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가 뭐 하는 사람인지 정녕 몰라?”이내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바르더니 간하림을 흘겨보았다.“국환 씨가 싫증이 나기 전에 돈이라도 두둑이 챙기면 땡큐고, 사모님은 감히 넘보지도 않아.”간하림은 납득할 수 없는 듯 바짝 다가갔다.“우리가 뭐 어때서? 최 회장님 와이프도 결국에는 사모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했잖아. 그리고 며칠 전 기사 못 봤어?”“무슨 기사?”곧이어 출입구를 힐끗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누군가 최 회장님 와이프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해서 끔찍한 상처를 입었대.”“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임연지는 집에 도착하자 거실 소파에 앉아 굳은 얼굴로 손에 든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는 임가희를 발견했다.테이블에 놓인 등기 전용 서류 봉투 위에 여러 장의 사진이 널브러져 있었다.“고모, 왜 그래요?”말을 마치고 나서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고모부가...”이내 나머지 사진도 확인했는데 전부 어떤 젊은 여자와 다정한 스킨십을 하는 최국환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결코 가벼운 사이는 아닌 듯싶었다.“왜 이렇게 소란스러워?”임가희가 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흘겨보았다.임연지는 목을 움츠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임가희를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고모, 이제 어떡해요?”“어떡하긴?”임가희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모른 척해야지. 지금 네 고모부 덕분에 우리가 먹고 사는 거야. 괜히 추궁했다가 홧김에 쫓아내기라도 한다면 더 손해이지 않겠어?”그렇다고 마냥 당할 수는 없었다.지금껏 비슷한 사례가 여러 번 있었지만 하나같이 머리가 텅 빈 여자들이라 그녀의 도발에 넘어가서 부랴부랴 찾아와 따지기 급급했다. 나중에 울면서 최국환에게 하소연하면 정이 떨어진다며 다시는 만나주지 않았다.또한 최국환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도 신분과 집안, 그리고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다.어쨌거나 그 나이 먹고 결혼을 3번이나 하면서 웃음거리로 전락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본처의 자리를 위협받지 않은 이상 고작 여자 문제로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뭐 있겠는가? 뒤에서 몰래 처리하면 그만이었다.“그냥 넘어가려고요?”비록 고모의 말도 맞지만 그래도 왠지 꺼림칙했다.“넌 신경 쓰지 마. 고모부 앞에서도 티 내지 말고.”임연지는 사진 속 여자를 힐끗 쳐다보며 속으로 ‘여우 년’이라고 욕하고 마지못해 대답했다.“알았어요.”임가희는 사진을 모두 치웠다.무언가를 떠올린 듯 임연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참, 고모, 만약 이 여자가 임신하면 어떡해요?”“네 고모부의 컨
“침착해.”임연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호텔에서 제공한 가운을 느긋하게 껴입었다.“샤워했어? 나랑 같이 씻을래?”“꿈 깨.”이내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면서 문을 열자 알몸으로 나타나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으려는 오재원을 발견했다.“연지야.”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슬쩍 피했다.“호텔에서 푹 쉬어. 먼저 가볼게.”“아직 이른데? 좀 더 있다 가.”“안돼.”임연지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오재원을 스쳐 지나가 침대 옆으로 걸어가서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 들었다.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쌀쌀맞은 얼굴을 보자 오재원은 꼬리를 내렸다.“알았어. 그럼 언제 다시 올 거야? 그리고 원하는 집이 있으면 알려줘. 부동산에 물어볼게.”“방 3개, 풀옵션. 나머지는 알아서 해.”“그래.”임연지는 옷매무새와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방을 나갔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뒤돌아보며 혀를 찼다.‘역겨운 놈.’집으로 돌아가는 차에 몸을 싣고 한진에게 답장을 보냈다.[호텔을 벗어나니 공기마저 상쾌한 기분이야.]한진이 대답했다.[하하하! 참,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우리 오빠가 인맥을 동원해서 각 언론사에 수시로 주시하라고 했잖아. 그중에서 제보받은 회사가 있는데 편집장이 이메일을 보자마자 오빠한테 연락했대.]그러고 나서 이메일의 스크린샷을 보내주었다.본문의 첫 마디가 온하랑이 필라시에서 유학할 때 최동철과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었다.임연지는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대박인데? 고마워, 한진아. 오빠한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해줘. 네가 아니었다면 진짜 아프리카로 쫓겨났을지도 몰라.]그동안 한진의 오빠가 사전에 뉴스를 차단하지 못하고 자칫 폭로라도 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이제 결과를 확인한 이상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하지만 대체 누가 제보했단 말이지?한진이 다시 문자를 보냈다.[물론 메일 주소를 역추적한 결과 여전히 너희 집으로 되어 있어. 아마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가상 주소를 사용한 것 같아.][미친놈.]임연지는 화가 나서 머리카락을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임연지는 그 틈을 타서 오재원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오재원은 그녀를 따라 나가려고 했지만 잠시 뒤 자신이 들고 있던 캐리어를 떠올리고 그것을 끌며 엘리베이터를 나왔다.방에 들어가자 오재원은 서둘러 캐리어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임연지를 끌어안고는 침대 쪽으로 밀어붙였다. “연지야, 빨리 나 주라고. 더는 참을 수 없어.”“오재원! 이거 놔! 먼저 일어나!”“안 돼. 연지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그냥 즐기기만 하면 돼.” 그녀는 그를 힘껏 밀쳤고 마음속에서 강한 반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오재원의 힘이 너무 강해 벗어나기 힘들었다. “오재원, 내 말 들어봐. 우리 얘기 좀 해야 해.” 임연지는 차분하게 말하며 그가 자신의 말을 듣길 바랐다.하지만 오재원은 이미 욕망에 눈이 멀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임연지에게 입을 맞추려 했고 손은 그녀의 몸을 함부로 만지기 시작했다.“얘기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걸 알아. 우리는 지금 중요한 일을 하는 거야.” 그는 말을 마친 후 임연지의 입술을 막았다. “연지야, 잘 생각해. 네가 만약 나를 밀어내면 난 바로 나갈 거야.” 임연지는 속에서 역겨움이 밀려왔지만 그녀의 밀치는 손길은 결국 멈춰 섰다.“그래 이거지.”오재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는 충분히 즐겼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오재원은 임연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너 너무 향기로워. 연지야. 어쩌면 이제 우리 아이가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네.”임연지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더 이상 그를 피하지 않으면 정말로 오재원에게 뺨을 갈길 것만 같았다.화장실에 들어간 임연지는 핸드폰을 꺼내 한진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불만을 토로했다. [한진아, 살려줘. 진짜 그 사람이 너무 싫어!][돌아오자마자 나랑 자려고 하고 역겨워 죽겠어!][내가 기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