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승민이 지금 온하랑 얼굴의 화장을 지워주고 있는 건가?김시연은 뒤늦게 깨달았다. “하랑 씨 왜 이래요? 설마 당신 하랑 씨한테 약 먹인 건 아니죠?”대체 무슨 일인지 추측하던 김시연이 정색해서 물었다. 부승민은 눈을 치켜뜨고 김시연을 쳐다보았다. 침울하고 섬찟한 그의 눈빛을 마주한 김시연은 덜컥 겁이 났다.이 남자는 포스가 장난이 아니었다. 김시연은 도무지 당해낼 자신이 없었지만, 친한 친구를 위해서 용기를 내어 말했다.“하랑 씨 이미 당신이랑 이혼한 사이예요. 경고하는데 당신 만약 하랑 씨한테 상처 주는 짓이라도 한다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당신 가만 놔두지 않을 거예요!”이 말을 들은 부승민은 표정을 조금 풀었다. 이 김시연이란 여자는 계속 온하랑에게 새로운 남자를 만나라고 부추겨 몹시도 짜증이 났지만, 온하랑을 생각하는 마음만은 진심이었다. 온하랑의 얼굴을 봐서 부승민은 잠시 김시연을 내버려두기로 했다.“술을 조금 마셔서 잠들었어요.”부승민이 해명했다. 예전 같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김시연은 부승민의 태도가 조금 의외라고 생각했지만, 겨우 한시름을 덜었다.부승민이 손수건을 세숫대야에 담아 화장실로 들어가자, 김시연은 침대 옆으로 가서 온하랑의 이마를 만져보며 그녀의 호흡을 확인하고서야 걱정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여전히 경계하는 눈빛으로 화장실 방향을 바라보았다. 김시연은 부승민이 빈손으로 화장실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며 물었다.“하랑 씨는 오늘 저녁 육광태 씨랑 밥 먹기로 한 거 아닌가요? 왜 당신이랑 함께 있죠?”부승민은 대답하지 않고 문 앞으로 걸어갔다.“하랑이 잘 보살펴 주세요.”“에휴...”문을 열 때 부승민은 발걸음을 멈칫하더니 살짝 고래를 돌려 담담한 눈빛으로 김시연을 보며 말했다.“다시는 하랑이한테 당신 휴대폰에 있는 사진 보여주지 마세요!”“그게 그쪽이랑 뭔 상관인데요?”“사람 시켜서 당신 휴대폰 해킹할까요, 아니면 아예 박살 내버릴까요? 선택하세요.”“허...”김시연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렇다면 온
“응? 왜 인상이 깊지 않은데?”부승민의 눈동자에 설핏 어두운 빛이 스쳤다. 어쨌든 그곳에서 교환학생으로 1년 있었으니, 인상이 좋든 나쁘든 깊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온하랑은 이마를 문지르며 말했다.“사실 교환학생 생활이 끝나고 귀국하기 전에 교통사고를 당해 많은 일들이 기억나지 않아.”이제 보니 교통사고로 인해 기억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그의 추측과 비슷했다. 하지만 부승민은 여전히 여러가지 의문이 들었다.그럼 그 아이는 온하랑이 교통사고를 당하며 죽었을까? 아니면 다른 곳으로 보내졌을까?“어쩌다 사고가 났는데? 너 그때 많이 다쳤어?”“모르겠어. 기억이 안 나. 머리를 다쳤었는데, 깨어났을 때는 그때의 기억이 전부 어렴풋해졌어.” 온하랑은 공허한 눈빛으로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그녀는 그 일들을 기억해 내려고 부단히 애썼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도무지 기억나지 않아 끝내는 포기하고 말았다.부승민은 그 말을 듣고 미간을 구겼다. 온하랑의 설명에는 그 아이의 모습은 전혀 비치지 않았고, 그녀는 아이의 존재 자체를 아예 모르는 눈치였다.게다가 이 교통사고는 뭔가 석연치 않았다. 마치 일부러 사건을 뭉텅 잘라내기라도 한 것처럼 모든 일의 실마리를 잡기 어려웠다.누군가 온하랑이 교통사고를 당한 틈을 타 그 아이를 데려간 것일까? 아니면 온하랑이 교통사고를 당하기 전부터 그 아이는 이미 온하랑 곁에 없었던 것일까?곰곰이 돌이켜보던 부승민은 마침내 무언가 떠올랐다.“너 그래서 그때 여름 캠프에 갔다가 늦게 귀국한다고 말했던 거야?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걱정하실까 봐?”그해 여름 방학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야 온하랑은 해외에서 돌아왔다. 그녀는 조부모님께 전화해 학교의 여름 캠프에 참가한다고 했었다.부승민은 가끔 할아버지가 얘기하는 것을 들었다. 그때는 온하랑과 친구라고도 할 수 없었고, 낯선 사람보다 조금 나았을 뿐이지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다.할아버지에 대한 언급 때문인지 온하랑은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할아버
온하랑은 손을 훠이훠이 내저었다.“들어가 빨리. 잘 가!”그녀의 입가에는 여전히 옅은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지만, 그를 빨리 보내지 못해 안달 난 것 같았다. 부승민은 힘없는 표정으로 결국 온하랑을 향해 손을 흔들며 탑승구로 이동하기 위해 돌아섰다. 보안 검색대를 지나는 부승민의 모습이 사라지자 온하랑은 돌아서서 공항을 떠났다. 조금 전 부승민이 연신 고개를 돌리며 걸어가던 모습이 생각나 온하랑은 참지 못하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 모습은 마치 학교 앞에서 헤어지기 싫지만 마지못해 부모님과 작별 인사를 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그녀는 부승민의 이런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조금 우스꽝스럽고 심지어 귀엽기까지 했다. 실없이 웃고 있던 온하랑은 얼굴이 단번에 굳어지더니 웃음을 싹 거두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어떻게 부승민을 귀엽다고 생각할 수 있지?’이번에도 틀림없이 부승민이 꾸며낸 가식적인 모습일 것이다. 결혼 3년 동안 그의 거짓된 다정함에 그만큼 속아 넘어간 것도 모자라 또다시 속을 뻔했다.‘온하랑, 왜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 거야!’...버스를 타고 호텔로 돌아온 온하랑은 얼른 김시연과 주연에게 말했다. 온하랑을 보자 김시연이 대뜸 따져 물었다.“빨리 말해 보세요. 어젯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육광태를 만나러 간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부승민은 어떻게 된 일이죠?”온하랑은 간단명료하게 대답했다.“육광태의 친구가 바로 부승민이었어요.”이 한마디로 김시연과 주연은 모두 이해했다. 김시연은 주먹을 불끈 쥐고 욕설을 퍼부었다.“빌어먹을 자식, 부승민 정말 음흉하네요. 이런 수를 썼을 줄이야. 그러게, 가는 곳마다 육광태를 만난다고 했더니, 계속 우리를 미행하고 있었던 거군요!”욕을 한 김시연은 또 물었다.“어제 만났을 때 부승민이 괴롭히지는 않았죠?”괴롭힌다고?온하랑의 머릿속에 뜬금없이 부승민의 말이 떠올랐다.‘네 몸 어디를 내가 못 만져 봤는데.’그녀는 이내 이 말을 머릿속에서 떨쳐버렸다.
고개를 살짝 숙인 여자는 가느다랗고 예쁜 손가락으로 선글라스를 반쯤 내린 채 붉은 입술을 벌리며 영어로 말했다.“아는데요. 내 자리가 통로 옆이라 앉기 싫어서 그러는데, 우리 자리 바꿔요. 얼마면 돼요?”온하랑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미안하지만, 바꾸지 않을 거예요.”흘기는 눈으로 온하랑을 보던 여자의 시선이 온하랑의 가방에 머물렀다. 여자는 비웃음이 가득 담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당신 그 가방 백만 원 초과하지 않을 것 같은데 내가 백만 원 보상해 줄게요. 어차피 이 좌석들의 푯값은 동일하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백만 원은 당신이 공짜로 얻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온하랑은 그 여자의 시선을 따라 자기 가방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겨우 20만 원일 뿐이에요. 방금 말했다시피 자리는 안 바꿀 거예요.”여자의 눈동자에 경멸의 빛이 스쳤다. 이런 사람들을 그녀는 많이 보아왔다. 쥐꼬리만큼의 월급을 몇 년 동안 악착같이 모아서 그 돈으로 여행 가서 아름다운 사진을 찍어 인스타에 올리며 예쁘고 돈 많은 척하는 여자들을 말이다.“그래서 얼마를 원해요? 이백만?”“얼마가 됐든 안 바꿀 거라고요!”온하랑이 여전히 동의하지 않자, 여자는 얼굴이 굳으며 눈빛이 어두워졌다.“마지막 기회를 줄게요. 이백만 원을 이렇게 날려 버릴 건가요?”“안 바꾼다고요. 귀먹었어요? 계속 고집부리면 승무원 부를 거예요!”김시연은 영어로 그 여자의 말을 받아치고 다시 온하랑에게 한국어로 말했다.“뭐 이런 뻔뻔한 사람이 다 있죠. 참 나, 어이가 없어서. 격에 맞지도 않는 옷을 차려입고 교양이 하나도 없네요.”여자는 그 말을 듣고 분노에 찬 눈으로 김시연을 노려보았다.“뭐? 지금 누구더러 뻔뻔하고 교양 없다고 했어? 당신이야말로 교양 없어!”그 여자가 한국말을 알아듣는 걸 본 김시연은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고 팔짱을 끼며 말했다.“바로 당신 말이야! 돈도 많은데 왜 일반석을 사서는 난리야. 그냥 일등석으로 가지 그래. 일반석은 작아서 당신 같은 부자가 앉기
그녀는 겉으로는 차분한 척했지만, 내심 흥분을 금치 못했다. 손마저 이렇게 이쁘다니. 그녀는 오랫동안 이렇게나 마음에 쏙 드는 남자를 만나지 못했다. 만약 이대로 지나쳐 버린다면 정말 아쉬울 것 같았다.이런 남자를 또 어디에 가서 찾는단 말인가.비행기가 이륙하여 높은 상공에 이르자 평온을 되찾았다. 그녀는 참지 못하고 팔걸이에 걸친 팔꿈치로 실수인 척 옆에 남자를 건드렸다. 그리고 서둘러 영어로 말했다.“미안합니다.”“괜찮아요.”남자는 나지막이 영어로 대답했다. 여자의 마음이 날뛰고 있었다. 목소리마저 이렇게 듣기 좋을 수가. 그녀는 이 틈을 놓칠세라 냉큼 말을 걸었다.“어디 가세요?”“시테니요.”부승민은 잡지를 펼치며 말했다. 그는 온하랑이 이 비행기에 탑승한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온하랑은 부승민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 사실 그날 온하랑이 떠난 후 그는 비행기에 오르지 않았다. 이 바보 같은 녀석은 여전히 귀엽도록 순진했다. 그가 비행기에 오르는 모습을 직접 지켜보지 않았다니. 육광태는 귀국했다. 차라리 부승민 혼자서 온하랑 주변에 숨어서 미행하는 게 쉽고 편리했다. 여자는 기쁨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저도 시테니로 가요!”부승민은 그녀의 말을 듣지 못한 듯 진지하게 잡지를 보고 있었다. 여자는 계속 말했다.“실례가 안 된다면 혹시 어느 나라에서 오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그녀와 잡담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부승민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미안한데 책 보는 거 방해하지 마세요.”“네, 네... 보세요.”불타오르는 눈빛으로 부승민을 응시하던 여자는 그가 점점 좋아졌다. 어떤 남자들은 그녀가 먼저 말을 건네면 좋아서 달라붙는 꼴이 꼭 파리처럼 짜증 났다. 하지만 이 남자는 비굴하지도, 거만하지도 않으면서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와 돈에 끌려 아부하는 남자들보다 훨씬 마음에 들었다. 한 번 나와서 이런 최상품을 만날 거라고는 기대하지도 않았다. 이 남자의 구체적인 정보를 알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여자의 눈가에 실망감이 드리웠다
저녁이 되자 온하랑은 잠에서 깼다. 어느 정도 시차 적응도 되어 김시연에게 같이 저녁 먹으러 가자고 했다. 저녁 식사 후, 김시연은 밖으로 나가 산책 하자고 제안했다.주변에는 많은 사람이 오가고, 그중 많은 사람들은 여행을 온 관광객들로, 행복한 얼굴로 지칠 줄 모르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온하랑과 김시연은 부두 옆에 서서 시원하고 상쾌한 바닷바람을 맞았다. 밝은 불빛이 바다 위에 비쳐 파도가 금빛으로 반짝이는 것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두 사람은 이곳에서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온하랑은 갑자기 오싹해지며 누군가 뒤에서 그녀들을 지켜보는 것 같은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시테니 오페라 하우스 주변을 한 바퀴 돌고 호텔로 돌아갔다.이주혁은 이틀 후에 도착한다. 이틀 동안은 온하랑과 김시연만 있었다. 세 번째 날 두 사람은 빅토리아 빌딩에 갔다. 빅토리아 빌딩은 시테니에서 가장 큰 쇼핑센터였다. 건물 자체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유리 돔, 나선형 계단, 고전적인 분위기가 곳곳에 베어져 있었다. 쇼핑센터가 되기 전에도 관광 명소였으며 현재는 시테니의 여행 필수 코스로 자리 잡았다.이 빌딩에는 푸드 코트, 카페, 레스토랑이 들어서 있고, 현지 브랜드 외에도 글로벌 명품 매장들이 즐비했다. 온하랑이 이곳에 온 것은 관광 외에 또 다른 목적이 있었다. 바로 이곳에서 이주혁에게 돌려줄 선물도 사고 겸사겸사 기념품을 사가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온하랑은 이주혁에게 무엇을 선물해야 좋을지 몰랐다. 이때 김시연이 말했다.“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쇼핑하다 보면 적당한 것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어느 한 매장에서 고급스러우면서도 절제된 디자인이 돋보이는 시계가 온하랑의 눈에 들어왔다. 쇼핑 가이드는 시계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그 아름다움을 자랑하며 적극 추천했다.“시연 씨, 이주혁에게 이 시계를 선물하면 어떨까요?”“괜찮긴 한데, 꼭 선물해야 해요?”“답례품이니까 꼭 줘야 해요.”온하랑이 쇼핑 가이드
다음 날 점심, 돌아다니느라 지친 온하랑과 김시연은 한식집에서 식사했다.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온하랑은 휴대폰을 뒤적이며 의아해서 물었다.“주혁이 지금쯤 도착하지 않았을까요? 왜 아직도 소식이 없지?”이주혁이 보낸 항공편 정보에 따르면 오늘 오전 시테니에 도착했어야 한다. 온하랑의 뒤를 설핏 쳐다보던 김시연의 눈가에 미소가 스쳤다.“늦어졌나 보죠, 뭐. 더 기다려 봐요.”“그래요.”바로 그때 온하랑의 눈앞이 갑자기 어두컴컴해졌다. 커다란 손이 그녀의 눈을 가리고 있었다. 온하랑은 무의식적으로 눈앞에 있는 손을 움켜잡었다. 큰 손의 주인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내가 누구게? 맞히면 선물 줄게요!”목소리를 듣자마자 온하랑은 바로 알았다.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이주혁, 유치하게 뭐야?”이주혁은 온하랑을 놓아주며 아쉬운 듯이 말했다.“그렇게 티나?”“당연하지! 어느 쪽에 앉을래?”온하랑이 물었다. 그녀와 김시연의 옆에 모두 여분의 의자가 하나씩 있었다.“여기 앉을 게.”이주혁은 온하랑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그와 김시연은 잘 아는 사이가 아니었기에 매우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온하랑은 가방을 건너편 빈 의자에 올려놓고 이주혁을 바라보며 물었다.“언제 도착했어? 왜 아무 말도 안 했어?”이주혁은 앞에 놓인 수저를 정리하며 말했다.“너에게 서프라이즈 해주고 싶어서 그랬지.”“그럼 여긴 어떻게 찾았어?”이주혁은 김시연을 흘긋 쳐다보며 말했다.“알아맞혔어. 내가 시연 씨에게 이곳을 추천해 줬거든.”“꽤 똑똑한데. 일은 끝났어?”“응, 설날 전까지는 없어. 나머지는 다 내년에 있어.”내년이라는 말을 들은 온하랑은 감탄했다.“시간이 참 빨리도 지나네. 또 1년이 지났어! 그건 그렇고, 너 주려고 선물 샀어.”온하랑은 가방에서 정교한 상자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마음에 드는지 열어 볼래?”이주혁은 미소를 지으며 온하랑을 두어 번 쳐다보더니 서둘러 열지 않았다.“나도 선물 가져왔어.”그는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
온하랑은 그 어떤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한 번도 그 장신구들을 착용하지 않았다.“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이참에 우리 우정템으로 해요. 내일 가져올게요.”김시연이 상자를 챙기며 말했다.“하랑 씨가 준 선물 안 열어봐요? 어제 선물 사다가 미친 사람을 만났는데 그나마 가게 주인이 현명해서 다행이었어요.”이주혁은 탁자 위에 놓인 상자를 집어 들고 겉을 자세히 살펴보았다.“시계 아니야? 마침 요즘 시곗줄이 필요했는데.”그 말과 동시에 이주혁이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섬세하지만 튀지 않는, 점잖은 분위기의 시계가 들어 있었다.“와, 하랑이 너 눈썰미가 좋네! 이 시계 너무 맘에 드니까 빨리 나한테 해줘 봐.”이주혁은 시계를 온하랑의 손에 쥐여주며 손목을 테이블 쪽으로 내밀었다.온하랑은 시계를 집어 들고 이주혁의 손목에 채워주었다.그녀가 고개를 살짝 숙이자 귀에서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이주혁의 각도에서 보면 길고 풍성한 그녀의 속눈썹은 작은 부채가 팔락거리는 것 같았다. 온하랑의 얼굴 피부는 껍질을 벗긴 달걀처럼 하얗고 고와서 미세한 솜털까지 보였다.“됐어.”온하랑은 이주혁의 손목을 잡고 조절해 주었다.“괜찮지?”이주혁은 자신의 손목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좋네. 이대로 하고 있지 뭐.”온하랑은 웃다가 갑자기 등 뒤로 서늘한 한기를 느꼈다.설마 부승민이 근처에 있는 건가?아니겠지?온하랑은 식당 안에 부승민이 없는지 주위를 둘러봤다.착각이겠지.식당 맞은편 카페 2층 카페에서 이주혁의 모습을 본 부승민의 두 눈은 먹물이라도 떨어질 정도로 잔뜩 어두워져 있었다.이주혁이 왜 여기 나타났지?!정말 안 보일 때가 없었다.이윽고 부승민은 온하랑이 상자를 꺼내 이주혁에게 건네는 것을 봤다.그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선물 상자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어제 온하랑이 샀던 그 남성용 시계였다!그게 이주혁을 위한 것이었다니!오늘 이주혁이 온다는 걸 알고 있었던 걸까?둘이 데이트하는 거야?왜 이주혁에게 선물을 주는 거지?이주
“그렇다면 다행이네.”최국환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을 이었다.“동림이도 이 병원에 있어. 천식이 재발해서 입원 중인데 같이 가서 보러 갈래?”온하랑은 잔잔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전 또 일이 있어서요.”“바로 아래층인데. 금방이면 돼.”최국환이 설득하듯 덧붙였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고개를 저었다.“죄송해요. 회장님. 제가 좀 바빠서 이만 가볼게요.”그녀는 부드럽게 말을 맺고 최국환을 지나쳐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녀의 생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내가 필라시에서 메이슨을 낳았다는 얘기... 처음엔 믿기 어려웠지. 하지만 사진도 있었고 메이슨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온 뒤로는 받아들이게 됐어. 그렇다면 메이슨이 유실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온하랑은 몇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첫 번째 가능성은 출산한 후 며칠 지나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그 사고로 기억을 잃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이 갓난아기 메이슨은 집에 혼자 남겨졌고 우는 소리에 놀란 이웃이나 행인이 아이를 구조했다가 연락처를 찾지 못해 이리저리 떠돌다 양부모 손에 들어갔을 가능성 혹은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걸 틈타 누군가 아이를 빼돌렸을 수도 있었다.두 번째는 임신 후반기에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였다.병원에서 아이를 낳았지만 기억을 잃고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채 입원 생활을 이어갔고 아이는 병원의 판단이나 제삼자의 개입으로 다른 곳에 보내졌을 가능성도 있었다.특히 병원 측이 메이슨의 혈액형이 특이하다는 걸 알고 그 사실을 숨겼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무엇보다 그때 그녀에게는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온하랑은 두 번째 가능성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했다.사고로 깨어난 뒤 그녀의 휴대폰에는 최동철이나 벨라, 혹은 진도원 등 사람들의 연락처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그 사고에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다는 건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다.그리고 오늘 메이슨의 희귀 혈액형을 알게 된 뒤로
온하랑은 조심스럽게 일반 병실 문을 밀어 열었고 문틈 사이로 소독약 특유의 냄새가 훅하고 밀려왔다.병실 안에서는 운전기사가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 누워 있었고 오른쪽 다리는 깁스를 한 채 이마엔 붕대가 감겨 있었다.온하랑이 들어오자 기사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아가씨, 죄송합니다.”“움직이지 마세요.”온하랑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제지하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지금은 푹 쉬셔야 해요.”기사는 눈에 띄게 미안한 기색이었다. “다 제 잘못이에요. 제가 그때 반응이 조금만 더 빨랐더라면...”“기사님 잘못 아니에요.”온하랑은 그의 곁에 앉아 방금 사 온 과일 바구니를 건넸다. “CCTV 확인해 보니까 상대 차량이 고의로 신호를 어긴 게 맞아요. 경찰이 이미 수사에 들어갔어요.”기사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메이슨 도련님은요?”“아직 중환자실이에요.”온하랑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걱정은 고스란히 전해졌다.“하... 부디 별일 없어야 할 텐데요. 어서 나아야 할 텐데...”“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주실 거예요. 기사님께서 필요한 거 있으면 간병인이나 비서한테 바로 말씀하세요. 전 이제 아주머니 병실도 보고 올게요.”“네,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온하랑은 장 선생 병실을 나온 뒤 가정부 아주머니의 병실도 들렀고 마지막으로 메이슨이 있는 중환자실 앞으로 향했다.아직 깨어나지 않은 메이슨을 보기 위해 간호 스테이션에 들러 서류에 서명하고 푸른색 보호복과 마스크, 모자를 착용한 뒤 무거운 격리실 문을 밀었다.침대 위 메이슨은 생각보다 더 창백했다.그의 긴 속눈썹이 병실 조명 아래 거의 투명해 보였고 여러 장비와 관이 그 작은 몸을 감싸고 있었고 의료 기기에서는 규칙적인 삑삑 소리가 들렸다.온하랑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엄지로 손등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낮게 속삭였다.“메이슨...”그녀는 고개를 돌려 간호사에게 물었다.“언제쯤 깰 수 있나요?”“수술 끝난 지 이제 다섯 시간
온하랑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예전에 강남시에서 마주친 소년이 떠올랐고 고개를 살짝 저으며 말했다.“별로 가고 싶지 않아요.”그들은 비록 이복남매 사이지만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었다.게다가 지금 최동림이 입원 중이라면 보호자는 거의 확실하게 임가희일 것이고 온하랑은 그 여자를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그래. 그럼 내가 잠깐 내려갔다 올게.”“네.”최동철은 조용히 병실로 내려가 잠시 임가희와 인사를 나누고 최동림의 상태를 확인한 뒤 수술실 앞으로 돌아왔다.보모가 먼저 수술을 마쳤고 이어 병원에서 혈장을 수급해 수술이 이어졌으며 결국 메이슨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다.그는 현재 중환자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메이슨이 깨어나려면 대략 4~6시간 정도 걸릴 거라 설명했다.최동철은 곧장 비서 김지환과 간병인 두 명을 병동에 상주시키도록 지시했다.한편, 메이슨과 같은 희귀 혈액형을 가진 친구도 병원에 도착했다.비록 실제 수혈은 필요 없었지만 최동철과 온하랑은 감사의 의미로 음식을 대접하고 고급 담배와 술도 선물했고 연락처도 서로 교환했다.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레 희귀 혈액형 이야기가 나왔다.그 친구는 자신의 혈액형이 확인된 후 가족 전체가 무료 혈액형 검사를 받았고 그중 동생도 같은 혈액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현재는 희귀 혈액형을 가진 사람들의 상호 도움 단체에 가입해 있으며 메이슨도 가입해 두라고 권했다.지금은 어린 나이라 헌혈이 안 되지만 이후 혹시 모를 수혈 상황에 대비해 혈액 공급망을 넓혀 두는 게 좋다는 것이다.메이슨이 성인이 되면 직접 헌혈도 가능하기 때문이다.식사를 마친 뒤 온하랑은 협력사 미팅에 가야 했기에 최동철은 그녀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고 다시 자신의 업무로 향했다.협력사 미팅을 마친 온하랑은 다시 병원으로 돌아왔고 택시에서 막 내린 그녀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부승민이었다.온하랑은 병원 안으로 들어서며 전화를 받았다.“여보세요?”“어때? 장 대표님은 만났어?”수화기 너머에서 부승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온하랑은 지금 경주 출장을 온 상태였다.그는 오늘 막 도착해 협력사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체크인했지만 아직 현지 담당자와는 만나지 못한 상황이었다.원래는 저녁에 메이슨을 잠깐 보러 갈지 생각 중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최동철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메이슨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실려 갔다는 소식이었고 그래서 온하랑은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 입구에는 최동철이 먼저 도착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를 보자 온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며 다급히 물었다.“동철 오빠, 메이슨은 어때요?”그러자 최동철은 깊이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과다 출혈이 있어서 수혈이 필요해.”그 말에 온하랑은 아까 전화로 자신에게 혈액형을 물어본 이유가 떠올랐고 마음속 불안이 더욱 커졌다.“메이슨 혈액형이... 뭔가 문제라도 있어요?”“검사 결과, 메이슨은 Kidd 혈액형 중 Jk(a-b-)형이래. Rh 음성보다 더 희귀한 혈액형이야.”최동철의 목소리에는 짙은 걱정이 묻어 있었고 온하랑은 눈을 크게 뜨며 입을 벌렸다.“그런 혈액이... 혈액은행에 있긴 있어요?”“응. 병원에서 이미 확보 요청했어.”그래도 온하랑의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메이슨이 어쩌다 그런 희귀 혈액형을 갖게 된 거지? 혹시 혈액이 부족하면 어쩌지...’그러자 최동철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심시켰다.“걱정하지 마. 예전에 경주에서 같은 혈액형 가진 사람 중 헌혈 계약을 맺은 분들이 있어서 지금 연락 중이야. 메이슨 상태도 많이 안정됐고 잘 버틸 수 있을 거야.”만약 사고가 메이슨이 처음 귀국했을 때 터졌다면 정말 위험했을 거라고 그는 덧붙였다.병실로 가는 길에 최동철은 메이슨의 혈액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Kidd 혈액형은 ABO 혈액형과는 별개 체계로 서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ABO 혈액형상으로 메이슨은 O형이다.하지만 Kidd 혈액형 시스템에서는 적혈구 표면 항원의 존재 여부에 따라 Jk(a+b-), Jk(a-b+), Jk(a+b+), Jk(a-b-) 이렇게 네 가지로 나뉜다
아침이 밝고서야 최국환이 병원에서 돌아왔다.설윤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멓게 팬 걸 보고 곧바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조심스레 물었다.“동림이는요?”“원래 있던 증상이지. 의사 말론 어제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그랬다고 했어. 당분간 입원해서 안정 취해야 한대. 지금 병원에 동림이 엄마랑 하인이 같이 있어.” 최국환은 눈을 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온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와 그는 이제 더 이상 밤새우는 게 버겁다고 느꼈다.알레르기 유발성 천식과 감정 기복으로 인한 천식 발작은 증상이 조금 달랐다.경험 많은 의사가 문진과 혈액 검사 끝에 감정적 요인이 원인이라는 진단을 내린 것이다.“큰일 아니라니 다행이네요. 회장님도 아주 피곤해 보이세요. 아침 드시고 바로 좀 쉬시는 게 어때요?”설윤이 조용히 말하자 최국환은 고개를 끄덕였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그는 2층으로 올라가 휴식을 취했고 임연지는 외출해 오재원을 만나러 나갔다.집에 혼자 남은 설윤은 심심하던 차에 기사에게 부탁해 병원으로 향했다.명분은 최동림의 병문안이었지만 사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임가희의 신경을 긁어놓는 데 있었다.병원에 도착해 입원실 방향으로 걷던 중 그녀는 익숙한 뒷모습 하나를 발견했다.그 사람은 통화 중이었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설윤보다 먼저 병동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최동철? 설마 동림이를 보러 온 걸까?’설윤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엘리베이터에 올라 최동림의 병실이 있는 층으로 이동했다.창밖으로 병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최동림은 링거를 맞으며 누워 있었고 곁의 보호자 침대엔 임가희가 쉬고 있었다.설윤은 병실 문을 똑똑똑 세 번 두드렸다.아무런 응답이 없자 그녀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그 소리에 임가희는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켰고 그녀의 눈빛은 곧장 경계심으로 바뀌었다.“설윤 씨, 여긴 무슨 일이죠?”임가희는 빠르게 몸을 돌려 병상 앞을 가로막았고 설윤은 손에 든 과일 바구니를 살짝 흔들며 부드럽게 웃었다.“당연히 동
임연지는 설윤의 뒷모습을 노려보다가 분에 겨워 발을 굴렀다.‘진짜 싸가지 없는 여자야. 예전에 백화점에서 따귀 한 대 맞았을 땐 개처럼 쫄아서는 말도 못 하더니 지금은 고모부가 뒤를 봐준다고 어디 감히 자기를 상대로 맞불을 놓다니.’설윤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웠고 금세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런데 카카오톡 알림음이 울려 억지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한편, 임연지는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핸드폰을 들어 한진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그녀는 오늘 있었던 일을 죄다 털어놓았다.[이 년은 진짜 너무 교활해. 내가 못 봤으면 동림이는 완전히 넘어갔을 걸? 아무도 몰랐을 거야. 아까는 대놓고 동림이 알레르기 유발 물질이 뭐냐고 묻더라니까? 고모부는 갑자기 노망이 났는지 그냥 다 알려주라고 하질 않나.]그러자 한진의 답장도 빠르게 도착했다.[이 여자 수위가 장난 아닌데.] [그렇지. 내 말 맞지!] [너네는 못 이겨. 이런 애 상대하려면 그냥 권력으로 찍어 눌러야 해. 지금처럼 고모부가 뒷배 봐주니까 애가 깝치는 거지. 그러니까 넌 빨리 오재원이랑 결혼하는 게 답이야.][곧 할 거야. 오씨 집안에서도 이번 주 안에 날짜 잡자고 올라온다고 했어.][근데 결혼했다고 끝난 건 아니야. 오재원이 예전처럼 아무 능력 없는 철부지라면 권한도 없고 집안에서 힘도 없을걸.]임연지는 고개를 끄덕였다.오재원네 집안 권력은 오형일, 큰아들 오하운, 그리고 작은아버지 오정우에게 집중돼 있었다.사실 그녀도 예전엔 오재원의 형 오하운에게 접근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는 워낙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들고 간신히 만나도 말도 안 섞으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근데 솔직히 오재원은 회사에서 일할 깜냥도 안 돼.][그럼 그냥 가르치면 되지. 저 정도 집안이면 선생 몇 명 붙이는 거 일도 아니잖아. 회사 나가서 일하게 만들고 진심으로 개과천선은 못 해도 적어도 모양새는 갖춰야지. 부모님 눈에도 달라졌다고 보이게 말이야. 연지야, 지금은 오
“회장님! 동림 도련님이 천식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지금 병원으로 모시려는 중이에요. 어서 내려와 보세요.”복도에서 다급한 하인의 외침이 들려왔다.최국환은 눈을 번쩍 뜨고 곧장 침대 머리맡에 있는 스탠드 조명을 켠 뒤 겉옷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를 따라 일어난 설윤이 몸을 일으키자 그는 말했다. “그냥 자. 내가 가볼게.”하지만 설윤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동림이 천식이 있어요?”“응. 태어날 때부터 있었어.”“그럼 저도 같이 가볼게요.”설윤은 외투를 꺼내 입고 최국환과 함께 급히 방을 나섰다.1층 거실로 내려가 보니 최동림은 이미 약을 복용했지만 여전히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얼굴이 벌겋게 변해 있었다.곁에서 지키고 있던 임가희는 몹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도대체 왜 갑자기 발작이 난 거야?” 최국환이 조급하게 묻자 임가희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확실하진 않은데 혹시 알레르기 유발 물질에 노출된 게 아닐까 싶어요... 다만 의사 말로는 감정적인 변화 특히 슬픔이나 불안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천식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이런 감정이 심할 경우 몸속 자율신경 중 미주신경이 자극돼 기관지가 수축하고 천식 발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최동림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천식 판정을 받았고 그 뒤로 집안은 온통 방역과 청소, 위생 관리에 신경 써 왔다.최동림이 자라면서 체질도 좋아져 요즘엔 거의 발작이 없었고 학교에도 특이 사항을 알려 기숙사 생활을 하게 했던 터였다.“알레르기 때문은 아닐 거야. 아마 낮에 너무 놀랐던 것 같아.”최국환은 최동림 옆에 앉아 등을 두드리며 숨을 고르게 도와주었다.“동림아, 아빠가 너무 심했어. 미안해.”그때 임연지가 옆에서 코웃음을 치며 설윤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글쎄요, 고모부. 오늘 오후에 설윤 씨가 동림이 방에 다녀갔는데 혹시 몸에 뭐 안 좋은 걸 묻히고 온 건 아닐까요? 동림이 건강 생각하면 확인
방금까지 부모에게 혼나 속이 뒤집힌 상태였던 최동림은 설윤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다가온 그 순간 그녀에 대한 인상이 한껏 좋아졌다.그녀는 확실히 임가희가 지금껏 상대해 온 사람 중 가장 다루기 까다로운 상대였다.최동철 쪽과도 특별히 친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녀가 기대고 있는 건 허공에 떠 있는 최국환의 사랑 말고는 오직 최동림이라는 아들뿐이었다.그리고 설윤은 단번에 그 약점을 정확히 찔러 들어왔다.임가희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고는 조용히 말했다.“연지야, 넌 먼저 나가 있어.”임연지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최동림을 노려보다가 억지로 돌아섰고, 문을 쿵 하고 세게 닫고 나갔다.그러자 방 안에는 모자 단둘만 남았다.짙은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임가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아들 앞에 앉았다.어깨에 손을 얹으려 했지만 최동림은 피하듯 몸을 틀었다.허공에 멈춘 임가희의 손끝이 서글프게 떨리다가 조용히 내려왔다.“동림아.”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게임기... 엄마한테 줄래?”최동림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더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싫어요. 이건 제 거예요!”임가희는 눈빛을 거두며 일어섰다.“동림아, 엄마 정말 실망했어.”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엄마가 널 얼마나 아끼는지 몰라? 새 옷 사주고 장난감 사주고 아프면 병원에서 밤새 지켜봐 주고 늘 네 곁에 있었잖아. 그런데 네가 이런 식으로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해?”그 말에 최동림의 눈이 붉어지며 금세 눈물이 고였고, 그는 와락 게임기를 내려놓고 임가희를 안았다.“엄마, 미안해요... 게임기 필요 없어요. 제발 화 풀어요...”임가희는 아들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이며 말했다.“그래야 우리 동림이지.”그는 흐느끼며 품에 안겼고 임가희는 조용히 속삭였다.“아직 넌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어른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속셈이 오가는 거야. 설윤이란 여자는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은 달라. 그러니까 절대로 설윤한테 선물 받지 마. 가까이하
“누나, 무슨 일이에요?”최동림은 게임을 계속하고 싶어 속으로 짜증을 삼키며 물었다.“방금... 설윤이 여기 왔었지?”“네...”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최동림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어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안 왔어요.”임연지는 그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고 어딘가 어색했다. 그런데 정확히 뭐가 이상한 건지 콕 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그녀는 고개를 돌리려다 문득 책상 위의 선물 포장 상자와 그가 들고 있는 게임기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이 게임기는... 누가 사준 거야?”최동림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게... 엄마가... 사줬어. 왜?”“정말?”임연지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되물었다.“그럼 고모한테 물어볼게.”최동림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아, 잠깐만! 누나, 그게…”그의 말을 끊고 임연지는 단단히 다그쳤다. “동림아, 솔직히 말해. 이 게임기는 진짜 누가 사준 거야?” 최동림은 두 손으로 게임기를 꼭 쥐었고 손등이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그는 고개를 떨군 채 한참 말이 없다가 결국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설윤... 아줌마가 줬어.”“설윤... 아줌마?” 임연지는 말도 안 된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너 지금 그 여자를 아줌마라고 불러? 이렇게 비싼 걸 받았다고? 동림아, 설윤이 어떤 여자인지는 알고 있는 거야?”갑작스러운 고함에 최동림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설... 설윤 아줌마는 착한 사람이야. 그냥...” “착하다고?”임연지는 분노에 찬 얼굴로 코웃음을 쳤다.“그렇게 착한 여자가 남의 가정을 깨뜨리냐? 넌 그런 사람한테 선물 받으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그녀는 그대로 손을 뻗어 최동림의 품에 있던 게임기를 낚아채더니 바닥에 내리꽂았다.“쾅!”새 게임기는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 났다. 화면은 깨지고 기계 외관도 부서져 부품이 여기저기 흩어졌다.최동림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곧장 무릎을 꿇고 깨진 게임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