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티즌들은 원래부터 부승민이 먼저 바람을 피웠을 것이라 예상 중이었다. 그러던 와중 온하랑이 올린 페이스북 게시물은 그 추측을 결론으로 만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댓글 창에는 온하랑을 안타까워하는 댓글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힘내라는 말과 함께 부승민을 향한 악플들이 줄지어 달렸다.하지만 온하랑은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다.페이스북 게시글을 올리는 그 순간, 온하랑은 가벼워진 마음에 후련한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다시는 자신의 행동이 부승민의 빈정을 상하게 하거나 조금이라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까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그녀는 휴대전화를 엎어둔 뒤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온하랑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둔 곳에서 부승민이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할 것이다.결국 그는 몸을 일으켜 캐리어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안에서 일부러 챙겨온 온하랑의 옷을 꺼내 품에 끌어안고 나서야 비로소 잠에 들 수 있었다.퇴원하고 집으로 돌아왔던 그 날부터 부승민은 다시 안방으로 돌아와 온하랑이 잠을 청하던 침대 위에 누워 아직 은은하게 남아있는 그녀의 체향을 맡았다. 그래야만 겨우 얕은 잠에 빠져들 수 있었으니까.잠에 빠져들려던 그 순간, 그는 시끄럽게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에 눈을 떴다.연민우에게서 지금 당장 인스타 인기검색어부터 확인하라는 연락을 받았다.부승민은 곧바로 인스타에 접속했다. 접속하자마자 익숙한 이름이 인기검색어 1위에 올라있었다.#부승민_온하랑_이혼검색어를 클릭해보니 조금 전 온하랑이 올린 게시물이 눈에 들어왔다.부승민의 가슴은 누군가에게 세게 얻어맞은 듯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답답하고도 고통스러운 감각이 은은하게 퍼져왔다.‘이렇게까지 급하게 나랑 선을 긋고 싶어한다고? 이렇게까지 빨리 나한테서 벗어나고 싶었던 거야?’설마 정말 민지훈에게 관심이라도 생긴 것일까?그는 저도 모르게 침대 시트를 꽉 쥐었다. 당장이라도 온하랑이 있는 옆방으로 찾아가려는 충동을 억누르기 위해 노력
김시연은 부승민이 근처에 있다는 건 꿈에도 모른 채 소주 몇 병을 추가로 주문했다.“솔직히 예전에는 하랑 씨가 우리랑 같이 있어도 계속 어딘가 답답하고 우울해 보였잖아요. 드디어 벗어났네. 자, 한잔합시다. 온하랑 씨의 이혼을 축하합니다! 솔로의 세계에 온 걸 환영해요!”“자자자, 먹고 죽읍시다!”온하랑은 두 사람의 건배사에 해맑게 웃으며 자신의 잔에 술을 따랐다.“그럼 지금부터는 목숨 걸고 여러분들이랑 평생 친구 해야겠어요!”세 사람은 얘기를 나누며 한 잔 한 잔 술을 들이켰다.김시연은 이미 반쯤 취했는지 온갖 방언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하랑 씨 끅… 저는 진작에 부승민 그거 좋은 새끼 아니라는 거 알고 있었어요… 이만하면 하랑 씨가 진짜 오래 버텨준 거예요… 저였으면 진작에 수십 번이고 쥐어패고도 남았을 거예요. 이혼 위약금으로 모델 같은 남자 두 명 키워보는 거 어떻게 생각하세요?”“자자자, 여러분한테 제가 최초로 우리 애기 보여드립니다. 쉿… 어디 가서 얘기하면 안돼요. 아직… 아직 다른 사람한텐 보여준 적 없단 말이에요…”김시연은 술에 잔뜩 취해 알딸딸한 눈빛으로 휴대전화의 잠금을 풀어 비밀 갤러리를 보여주었다.“이거 보세요. 다들 내가 힘들게 모은 인터넷에서 유명한 애들이에요. 이 사진 좀 봐봐요. 가슴 근육 대따 큰 거 보이죠? 저보다 크다니까요…”“그리고 이것도요. 여기 근육 모양 보이세요? 미친, 폼 미쳤다…”“이것도, 이것도요. 엉덩이 힙업 제대로죠?”“잘생긴 스타일 다른 남자가 이렇게나 많은데 이 중에 하랑 씨 이상형 하나쯤은 있겠죠. 부승민 같은 자식은 썩 꺼지라고 하세요!”“…”김시연은 갤러리를 하나하나 넘기며 사진 속 남자들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말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대담해지는 듯싶었다.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힌 온하랑과는 달리 주현은 흥미롭다는 듯 김시연의 말에 집중했다.온하랑의 시선 역시 흥미롭다는 듯 김시연의 휴대전화에 집중했다. 한 장 한 장 사진을 넘길 때마다 온하랑은 무의식적으로 부승
방안은 적막 그 자체였다. 어두운 방 안에서는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별안간 딸깍, 하는 소리가 고요한 적막을 깨트리더니 방문이 열렸다가 다시 닫혔다.부승민은 천천히 온하랑이 누워있는 침대맡으로 걸어와 앉았다.그는 달빛을 빌려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곤히 잠든 온하랑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지금 이 순간, 부승민은 드디어 어디에도 숨지 않고 당당하게 거리낌 없이 온하랑을 바라볼 수 있었다.부승민은 진심으로 온하랑이 보고 싶었다.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온하랑의 뺨을 살살 어루만졌다. 그러다가 또 몸을 숙여 반질반질한 그녀의 이마 위에 가볍게 키스를 했다. 그러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의 체향을 마음껏 맡았다. 당연하게도 부승민의 콧속을 파고든 건 술 냄새였지만.이런 알쓰 같으니라고!부승민은 온하랑의 코도 가볍게 주물렀다.온하랑이 술집으로 가자는 제안을 거절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부승민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본인도 예상할 수 없었다.호텔 방의 난방이 커져 있었지만 온하랑은 여전히 두꺼운 패딩으로 중무장을 한 상태였다.너무 더운 나머지 그녀는 불편한 듯 가볍게 신음을 뱉으며 무의식적으로 옷가지를 하나하나 벗고 있었다.부승민은 그런 그녀가 벗기 편하도록 지퍼를 내려주었다. 부승민은 패딩 안에서 온하랑을 빼내는 데 성공하고 그 안에 입고 있던 스웨터까지 벗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하의로는 두꺼운 내복을 입고 있어 겉에 걸린 외출복을 벗어내야만 했다.온하랑에게는 한 겹의 보온 내복밖에 남지 않았다.취해서인지 더워서인지 알 수 없는 이유로 그녀의 두 볼은 발갛게 달아오른 채 발갛고 촉촉한 입술 사이로 하얀 이를 드러냈다. 그녀는 그 상태로 무의식적인 신음을 내뱉었다.몸에 딱 달라붙는 보온 내복은 그녀의 굴곡진 몸매를 더욱 두드러지게 만들었다. 그 자태는 극도로 유혹적이고 매혹적이었다.부승민은 별다른 생각 없이 오직 온하랑을 편하게 해줄 생각뿐이었다.하지만 지금, 부승민의 호흡이 점점 거칠어지기 시작하더니 입술
원녕, 딱 들어도 여자 이름이었다.부승민은 온하랑의 친구 중에 원녕이라는 이름을 가진 친구가 없다는 것쯤은 확신할 수 있었다.조금 전의 장면을 연상해보던 부승민은 원녕이라는 사람이 예전에 온하랑이 낳았던 그 아이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품었다.깊은 잠에 빠져든 온하랑은 입술만 오물거릴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부승민은 굴하지 않고 온하랑의 귓가에 가까이 다가가 속삭이며 물었다.“하랑아, 원녕이가 누구지?”“…원녕이가 누구…”온하랑이 낮게 읊조리기 시작했다.“그래, 원녕이가 누구야?”“원녕이는…”온하랑은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이마를 부여잡더니 몸을 웅크리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웅얼거렸다.“머리가 깨질 것 같아! 너무 아파!”부승민은 온하랑의 상태를 살피더니 손을 뻗어 그녀의 관자놀이를 살살 문질러주며 다정하게 말했다.“기억 안 나면 굳이 떠올리려고 할 필요 없어. 잘 자.”한참이 지나서야 온하랑은 다시 안정을 되찾고 편히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부승민은 곤히 자는 온하랑의 얼굴을 그윽한 눈동자로 바라보았다.그는 온하랑의 옷매무새를 정리해주고는 이불을 덮어주며 꽤 오랫동안 침대 맡에 앉아있다가 자리를 떴다.…다음 날 아침 6시, 하늘은 아직 깜깜했다. 온하랑은 비몽사몽 눈을 뜨며 깨질 듯 아픈 머리를 부여잡았다.그녀는 떴던 눈을 다시 감고 고통이 가라앉길 기다렸다가 다시 천천히 손으로 몸을 지탱해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녀는 최대한 어젯밤의 일을 기억해내려 애썼지만 필름이 끊겨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다만 희미하게 기억나는 건, 꿈속에서 부승민을 만났다는 것이다.보온 내복만 입고 있는 자신의 몸으로 미루어보아 아마도 주현과 김시연이 도와준 모양이었다.온하랑은 간단히 세수를 마치고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다 7시가 될 때쯤, 김시연에게 전화를 걸었다.응답이 없었다.곧이어 온하랑은 바로 주현에게 전화를 걸었다.역시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두 사람 모두 깊은 잠에 빠져든 게 분명했다.어젯밤, 마신 술은 많지만
실컷 놀다 보니 어느덧 시간은 오후 2시에 접어들고 있었다.세 사람은 점심을 먹기 위해 호텔로 돌아갔다.호텔 레스토랑으로 들어선 세 사람이 주문한 음식을 받으러 가던 중, 온하랑은 익숙한 누군가의 실루엣을 발견했다.자세히 그 사람을 바라보던 그녀는 별안간 놀란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육광태 씨?”온하랑의 소리에 뒤를 돌아본 육광태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정말 신기한 우연이네요.”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육광태의 표정에서 놀라움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정말 신기하긴 하네요. 여기까지 오셨을 줄은 몰랐어요.”“여기 엄청 유명한 곳이잖아요. 친구가 와보고 싶다고 하길래 같이 한 번 와봤어요.”온하랑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육광태의 등 귀를 바라보았지만 말로만 전해 듣던 그 잘생긴 훈남 친구를 찾지는 못했다.육광태는 그녀의 뜻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인지 재밌다는 표정으로 말했다.“친구는 잠깐 바람 좀 쐬고 싶다고 산책하러 나갔어요.”“아, 언제쯤 떠나실 생각이세요?”“글쎄요. 친구가 가고 싶다고 할 때 가야죠.”“그럼 노르웨이 여행 끝마치면 곧바로 귀국하실 예정이세요? 아니면 또 다른 나라로 가실 건가요?”“그것도 제 친구가 하자는 대로 해야죠.”“저희는 곧 링와스섬으로 떠날 예정인데, 같이 가실래요?”온하랑이 자신들까지 초대하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육광태의 눈빛에는 순간 놀라운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그는 큰 손을 꾹 말아쥔 채 입가로 가져가 헛기침을 한 번 하더니 말했다.“가서 친구한테 한 번 물어보고 올게요. 저희 카톡이라도 추가할까요? 돌아가서 같이 갈지 말지 알려드릴게요.”“좋죠.”온하랑은 육광태가 내민 카카오톡 QR코드를 스캔한 후, 그에게 메시지를 남기다가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질문을 던졌다.“광태 씨, 저 아시죠?”육광태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고개를 들어보니 의심스럽다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온하랑이 눈에 들어왔다, 육광태는 당황스러운 기색 하나 없이 침착한 태도로 말했다.“
설산에서 내려오던 길에 온하랑은 육광태에게서 온 메시지를 받았다.역시나 친구가 거절한 탓에 갈 수가 없게 되었다는 문자였다.온하랑이 답장을 보냈다.[아쉽네요.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꼭 같이 놀러 가요.]육광태는 이모티콘으로 대답을 대신했다.‘기회가 된다면’이라는 말에 부승민의 표정이 또다시 어두워졌다.온하랑 일행은 식사를 위해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레스토랑의 한쪽은 통유리로 되어있어 창밖의 풍경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었다.시간개념이 사라진 탓에 관광객들의 식사시간도 정해지지 않아 지금 레스토랑에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았다.식사를 절반 정도 마쳤을 때쯤, 누군가가 놀란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저기 좀 봐! 저거 오로라 아니에요?”짙은 남색의 하늘 위로 한 갈래의 초록빛이 나타났다. 하도 희미해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발견해내기 여간 쉽지 않았다.하지만 그런 풍경 역시 많은 관광객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는 충분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은 오로라로 꽉 차 마치 오로라 대폭발을 연상케 했다. 큼지막한 녹색 빛들이 하얀 은하수 별빛과 보랏빛 밤하늘과 어울려 창공을 아름답게 수 놓았다.호텔 방에서 휴식을 취하던 사람들도 밖으로 달려 나와 오로라를 구경했다.온하랑 일행도 식사하던 젓가락을 내려놓고 사진 촬영에 집중하기 시작했다.온하랑이 각도를 잡던 그때, 그녀는 순간적으로 날카로운 시선이 자신에게 내리꽂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치 어제 패키지여행 버스 안에서처럼 식사 자리가 급격히 불편해졌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자신을 향한 날카로운 시선의 출처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하지만 주위 사람들의 시선은 온통 그 오로라에 꽂혀있을 뿐, 그 아무도 온하랑에게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그녀는 곧바로 시선을 호텔 2층 테라스로 옮겨 그곳을 쓱 훑어보았다.그 순간, 자신에게 내리꽂히던 그 날카로운 시선이 한순간에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녀는 고개를 든 채 잠시 생각에 잠겨있는 듯싶더니 곧바로 다시 사진 촬영에 돌입했다.그 순
젊은 사내는 잠시 의아해했으나 이내 사건의 경과를 유추해 냈다. 온하랑이 이렇게 경각심이 높을 줄이야. 그는 웃으며 쟁반을 받아 들고는 직원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 뒤 방문을 닫았다.온하랑은 고개를 쏙 집어넣고는 벽에 바짝 붙어 섰다. 온하랑은 그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육광태였는데 그녀는 이 사람이 문제 있다고 진작 의심했었다. 아니나 다를까, 확실히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다. 아마 그날 밤 그녀를 감시한 것도 이 사내였으리라. 그리고 뉴스를 통해 그녀를 알았을 것도 같지 않았다.이때 온하랑의 핸드폰에 카카오톡 알림이 떴다. 육광태가 주동적으로 그녀에게 보낸 문자였다.[내가 혹시 배가 아픈가요?]그가 거리낌 없이 얘기하는 걸 보고 온하랑의 심장은 저도 모르게 반박자 멈추는 듯했다. 잠시 머뭇거리다 온하랑은 답장을 보냈다.[방에서 너무 오래 뜸 들이면서 안 나오길래 어디 몸이 안 좋은가 해서요. 저인 건 어떻게 알았어요?][아까 보고 있었으니까요. 내가 이 방에 묵는 건 어떻게 안 건데요?]온하랑은 육광태가 순순히 인정할 줄 몰랐다.[오전에 들어가는 걸 봤거든요.]그 메시지를 보고 육광태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고개를 들어 부승민을 힐긋 쳐다보고는 따로 부정하지 않았다.[저한테 관심 가져줘서 감사할 따름이네요. 오늘 확실히 몸이 별로 안 좋아서 일찍 잠들었거든요. 밖이 소란스럽길래 그저 커튼을 열어 힐긋 쳐다봤을 뿐이죠.]사실 그가 묵고 있는 방은 0208이었으나 오전에 확실히 온 적 있기는 했다. 육광태는 한쪽으로 타자하면서 한쪽으로 부승민에게 말했다.“꽤 경각성이 높은 것 같은데.”부승민은 핸드폰을 그의 손에서 뺏어내고는 온하랑에게서 온 문자를 확인했다.[그럼 쉬어요, 정말 우리랑 같이 안 놀래요?]온하랑은 육광태가 뭘 하고 싶은 건지 알아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 문자를 본 부승민의 안색이 어두워졌다.[네, 내 친구가 낯선 사람이랑 여행하는 걸 싫어해서요. 이번에 친구랑 온 거여서 아쉽게 됐네요, 친구를 버릴
부승민은 가슴이 철렁했다. 손이 떨려오고 온 몸이 마비되는 것 같은 감각을 뒤로 하고 부승민은 가까스로 세 글자를 써 보냈다.[아니요.]부승민은 핸드폰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한참 기다려도 온하랑한테서 답장이 오지 않자 그는 팽팽히 당겨진 줄처럼 긴장해졌고 슬슬 초조해나기 시작했다. 온하랑이 정체를 알아챌까 두렵기도 했고 다른 한편으로 정체를 아예 모를까 두렵기도 했다.핸드폰 화면을 보면서 온하랑의 의심은 더더욱 깊어졌다. 특히나 그 아니요 세 글자가 결정적으로 의심이 가게 만들었다. 정말 육광태 친구인 걸까? 만약 친구라면 왜 육광태를 대신해서 답장하는 걸까?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 친구... 온하랑의 뇌리에 불현듯 한 사람이 스쳐 지나갔다. 온하랑은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저으며 피식 웃었다. 하필 그가 생각날 건 또 뭐람?“하랑 씨, 지치신 거 아니셨어요? 왜 가서 쉬시지 않고 계세요.”주현과 김시연이 올라오면서 계단 입구에서 핸드폰을 들고 서있는 온하랑을 보고는 말을 걸어왔다.“아, 방에 있는 게 좀 답답해서 바람 좀 쐬려고요.”방이 답답하면 창문을 열면 되지 않나, 오로라도 보고. 김시연이 의아하다는 눈길로 온하랑을 바라봤다. 그녀는 쏜살같이 온하랑 곁으로 다가와 빠르게 핸드폰을 스캔했다. 온하랑이 재빠른 속도로 화면을 껐지만 김시연이 조금 더 빨랐다. 김시연은 연락하는 상대방 이름이 육광태라는 것을 피뜩 보고 장난기 가득하게 웃었다.“아~ 여기 숨어서 육광태 씨랑 얘기하고 있었던 거예요? 아이참!”온하랑은 김시연이 오해하는 걸 보고는 황급히 해석했다.“시연 씨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에요. 난 그냥...”온하랑의 해석은 김시연 눈에 그저 눈가림 수단으로만 보였다.“설명할 필요 없어요, 다 안다고요~ 육광태 씨 키 크죠, 잘생겼죠, 부승민 대표보다는 돈이 없겠지만 그래도 돈 많은 친구가 있는 걸 봐서는 모자랄 것 같지도 않고요. 한번 시도해 보는 것도 나쁠 건 없죠, 주요하게는 그 남자 딱 봐도 거기가 되게 커 보인다니까요..
온하랑은 머리가 복잡했다.‘메이슨이 나의 아이가 아니라면 그럼 그 아이는 어디에 있단 말인가?’메이슨에게 감정이 없었던 그녀는 엄마로서의 책임감 때문에 그를 보러 왔다. 하지만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메이슨에게 정들기 시작했을 무렵 누군가가 메이슨이 그녀의 친자가 아니라며 진짜 아이는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말했다.온하랑의 마음은 지쳐있었다.한순간 그녀는 지금처럼 메이슨을 자기 친자식처럼 키우며 모두 잊어버리자고 생각했다.그러나 그녀가 낳은 아이가 지금 어딘가에서 힘겹게 고군분투하며 구하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마음속으로 갈등하고 있었다.만약 그 아이를 찾지 못한다면 그녀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전화를 걸어온 부승민은 부드럽게 말했다.“다 봤어?”온하랑은 몇 초간 침묵을 이어갔다.“응, 봤어...동철 씨한테 잘 물어볼게.”“동철이가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어.”“그러나 혈연관계는 옳으면 옳은 거고, 아니면 아닌 거야. 유전자 검사를 다시 의뢰할 거야.”“그래, 내가 내일 갈게. 나와 함께 동철이를 만나러 가자.”부승민이 말했다.만약 계략이 탄로 나 화가 치밀어 오르면 최동철은 온하랑을 놓아주지 않을 수도 있다.부승민은 철저하게 최동철을 방어하며 그에게 그 어떤 기회도 주지 않았다.“그럴 일 없을 거야.”“불안해서 안 돼.”“...”부승민은 화제를 바꾸었다.“병원에 다녀왔는데 간호사가 원녕이의 검사 수치가 서서히 정상 수치로 돌아오고 있다고 했어. 보름 정도 지나면 퇴원할 가능성이 있대.”부승민에게서 원녕의 소식을 전해 들은 온하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럼 됐어. 수고했어, 승민아.”통화를 마치고 온하랑이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메이슨은 이미 여러 개의 곰 모형 쿠키를 만들어 놓았다.그 남자는 최동철이 유전자 검사서를 위조했다고 했다.하지만 온하랑은 메이슨의 신분을 의심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최동철은 친자확인서를 그녀에게 보여준 적이 없었다.온하랑은 메이슨이 그녀에게 경계심이 없기에 모낭이
반죽을 열심히 다루는 메이슨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온하랑의 마음속에서 복잡한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부승민의 말에 그녀는 마치 큰 바위에 가슴을 짓눌린 듯 숨이 막혔다.‘메이슨이 친자가 아니라면 최동철은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최동철은 어떻게 먼저 메이슨을 찾아서 그의 존재를 알렸을까? 그러면 진짜 아이는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그녀는 메이슨이 이상한 낌새를 느끼지 못하도록 애써 감정을 억눌렀다.“엄마, 이것 보세요. 곰돌이 같아요?”메이슨은 갓 눌러놓은 곰돌이 쿠키 틀을 들어 올리며 순진한 미소를 지었다.온하랑은 웃으면서 손을 뻗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곰돌이와 똑같아. 참 잘했어, 메이슨.”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인 메이슨은 머리를 숙여 계속 쿠키를 만들었다.그러나 온하랑은 더 이상 집중할 수가 없었다.부승민이 그녀 몰래 핸드폰 설정을 변경했을 당시 그 남자는 서우현의 핸드폰을 훔쳐 그녀에게 모든 것을 알렸다.비록 그가 말한 것이 모두 진실이었으나 그의 등장은 여전히 수상했다.‘예를 들어 그는 누구일까? 왜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일까? 왜 이제야 모든 진실을 알려주는 것일까?’심호흡을 한 그녀는 잠시 마음속의 의심을 가라앉혔다.그동안 함께 지내면서 온하랑은 그 남자가 메이슨이 겪었던 일에 대하여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고 확신했다.불쌍하고 죄가 없는 어린 메이슨은 복잡한 어른들의 세계에 휘말리지 말아야 했다.정신을 차린 온하랑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괜찮아, 아빠가 돌아오시면 네가 만든 쿠키를 보고 기뻐하실 거야.”그녀는 멈칫했다.“메이슨, 먼저 천천히 쿠키를 만들고 있어. 엄마가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위층에 다녀올게.”“네.”메이슨은 고개를 끄덕였다.태연하게 위층으로 올라와 방문을 닫자 온하랑의 가슴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이메일을 열고 망설이던 그녀는 결국 부승민이 보낸 동영상을 클릭했다.영상 속 심문실에는 마른 얼굴에 몇 군데가 찢어지고 피로 얼룩진 옷을 입고 있는 젊은 남자가 의자
온하랑은 쪼그리고 앉아 메이슨을 똑바로 바라보았다.“메이슨은 경주에 집이 있기에 낯선 강남시에 가고 싶지 않은 거잖아? 마찬가지로 엄마에게도 이곳은 낯선 곳이야, 엄마의 집은 강남시에 있어.”슬퍼하는 메이슨을 온하랑은 계속 달래주었다.“앞으로 엄마가 메이슨 보러 자주 올게. 메이슨도 엄마가 보고 싶으면 강남시에 찾아와도 돼.”그녀가 조산을 앞두고 있을 당시 부승민이 보낸 사람들이 한발 늦은 탓에 먼저 메이슨을 데려간 최동철이 각종 절차를 밟아 양육권을 가졌고 그 사이 메이슨도 이미 이곳에 적응해 버렸다.최동철은 온갖 정성을 쏟아서 메이슨을 돌봤으며 마음이 예민하고 내성적이었던 그는생활환경을 자주 바꿀 수 없으므로 여기에 머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메이슨은 의기소침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온하랑은 그의 주의력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이모가 만들었던 쿠키를 기억해? 엄마가 메이슨이 도움이 필요한데 함께 만들 수 있을까? 아빠가 돌아오시면 메이슨의 솜씨가 어떤지 맛보라고 하자.”기분이 언짢았던 메이슨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쿠키를 만들기 시작하자 곰돌이 모양의 틀로 반죽을 찍던 그는 천천히 빠져들기 시작했다.쿠키를 만들던 중 온하랑은 부승민의 전화를 받았다.그가 물었다.“출발했어?”“아니, 깜빡했어. 아까 최 회장님 다녀가셨는데 동철 오빠의 소식이 있다고 하셨어.이틀 더 머물다 그가 돌아오면 돌아갈게.”부승민은 몇 초간 침묵을 이어갔다.그가 기분이 언짢다고만 생각한 온하랑은 웃으면서 말했다.“며칠인데 못 기다리겠어?”“아니.”부승민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혹시 우현 씨 핸드폰을 훔쳤던 사람을 기억하고 있어?”“응, 기억해.”바로 서우현이 그 남자를 찾았고 그의 입에서 메이슨의 신분을 알게 되었다.온하랑은 식탁에서 쿠키를 열심히 만들고 있는 메이슨을 바라보았다.“그가 왜?”“줄곧 그가 나타난 것이 좀 이상하다고 의심하고 있었던 터라 사적으로 사람을 시켜 그를 찾으라고 했는데 며칠 전 그를 찾아서 잡고 심문하니 진
최국환의 말을 들은 온하랑은 멈칫했다.“최 회장님, 약속드릴 수 없습니다. 메이슨은 상황이 특별하기에 반드시 진심으로 그를 아껴주고 사랑해 주는 가족이 옆에서 보살펴 주어야 합니다.”‘동철 씨와 줄곧 사이가 좋지 않았던 최 회장님은 정성껏 메이슨을 보살필 수 있을까?’게다가 최씨 가문에는 임가희가 있기 때문에 온하랑은 그녀가 메이슨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최동림의 후계자 계승을 위하여 걸림돌인 그를 해칠 수 있다고 예측했다.메이슨은 최동림보다 두세 살 어렸다.“동철이가 현재 실종되었기에 나의 손자인 메이슨을 내가 반드시 잘 돌볼 거야. 이미 결정된 일이야. 하랑이 너랑 상의하려고 온 거 아니야.”최국환의 목소리는 무거웠다.온하랑이 엄마라는 점을 고려해 그가 직접 온 것이었다. 아니면 경호원더러 메이슨을 데려오라고 했을 것이다.온하랑은 최국환이 끝까지 막으면 그와 메이슨은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그렇다면 최 회장님께서 메이슨을 위하여 저의 몇 가지 조건을 들어주셨으면 합니다.”“말해봐.”“첫째, 제가 떠난 후 메이슨을 최씨 가문에 데려가서 아줌마와 미아 선생님이 계속 돌보게 해주세요. 최 회장님께서는 매일 시간을 내셔서 메이슨의 학습 상황을 물어봐 주세요.”온하랑이 없는 상황에서 최국환은 메이슨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 언젠가 임가희는 메이슨의 존재를 알게 될 것이기에 최국환의 옆에 둔다면 그녀는 자신의 명성을 위해서 섣불리 나서지 못할 것이다.메이슨이 계속 별장에 머물면 아줌마와 미아 선생님은 권력과 힘이 없기에 마음대로 할 수가 없을 것이며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그를 노릴 기회를 줄 수 있다.온하랑의 말을 들은 최국환은 머리를 끄덕였다.그는 메이슨을 옆에 두고 잘 가르칠 생각이었다. 만약 좋은 후계자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고 반대로 그가 자질이 평범해도 최국환은 그를 키울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잠시 후 최국환의 핸드폰이 울렸다.“잠깐만. 먼저 통화 좀 할게.”“네, 최 회장님. 편안한 대로 하세요.”통화 중
설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그를 바라보았다.“...네.”설윤의 쓸쓸한 모습을 본 최동철은 그녀에게 물었다.“함께 갈래요?”설윤은 돈을 좋아하기에 그도 그녀에게 많은 돈을 줄 수 있었다.그러나 설윤은 고개를 흔들었다.“아니요, 저 여기 더 있고 싶어요.”최동철은 눈살을 찌푸렸다.“그럼, 나중에는?”“나중에? 그때 다시 얘기해요.”설윤은 덤덤하게 말했다.“어차피 저 혼자예요. 저만 신경 쓰면 돼요.”최동철은 평온한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최동철이 떠난 후 자신을 구해준 설윤에게 보답의 의미로 많은 금액의 돈을 송금해 주었다....회사에 처리할 일이 많았던 부승민은 첨단 연구소에서 스카우트한 사람들과 함께 강남시로 돌아갔다.경주에 며칠 더 머무른 온하랑은 여전히 최동철의 소식을 들을 수가 없었다.그녀는 최동철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오랫동안 경주에 머물렀던 온하랑은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어 메이슨을 데리고 강남시로 돌아가려고 했다.만약 최동철이 돌아온다면 온하랑은 메이슨을 다시 데려오면 되고 그가 돌아오지 못한다면 그녀가 메이슨의 유일한 보호자이다.아줌마에게 메이슨의 짐을 정리하는 것을 도와달라고 하던 중 별장에 불청객이 찾아왔다.거실에서 아줌마가 짐 정리하는 것을 지켜보던 메이슨은 최국환이 사람을 데리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바로 온하랑의 뒤로 숨어버렸다.“최 회장님, 어떻게 오셨어요?”최국환을 본 온하랑도 깜짝 놀랐다.“하랑아, 미리 약속도 없이 불쑥 찾아와서 미안해.”최국환은 온하랑 뒤에 숨은 메이슨과 땅에 놓인 캐리어를 보고 물었다.“메이슨을 데리고 강남시로 돌아간다고?”그는 오래전부터 메이슨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네, 맞아요. 동철 오빠가 돌아오기 전에 제가 메이슨을 강남시로 데려가 돌보려고 해요.”온하랑이 대답했다.“승민이는 동의한 거야?”온하랑은 머리를 끄덕였다.“혹시 어떤 일로 찾아오셨어요?”그녀는 눈길로 아줌마에게 먼저 메이슨을 데리고 위층으로 올라가
“설윤 씨, 일어났어요?”최동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소리에 따라 고개를 돌린 설윤은 최동철과 눈이 마주쳤다.최동철은 웃으면서 말했다.“일어났으면 와서 아침을 먹어요.”최동철은 이미 건조된 설윤의 옷을 가져왔다.“네.”설윤은 베갯머리에 두었던 핸드폰을 보고 열 시가 넘었음을 확인했다.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그녀는 이불로 가슴을 가리고 이불 밑에서 속옷을 찾아 천천히 입었다.최동철은 쓰레기통을 옆으로 걷어차고 설윤에게 칫솔 컵과 치약을 묻힌 칫솔을 건네주고는 그녀가 이를 닦은 후 따뜻한 수건도 건네주었다.서로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던 두 사람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 누구도 어젯밤 일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다.아침을 먹은 후 발목 찜질을 한 설윤은 이곳에서 며칠 더 머무를 수 있다는 생각에 쿠팡에서 옷을 구매하려고 했다. 집 앞까지 다음날 배송될 수가 있기에 아주 편리했다.옷을 몇 벌 고른 설윤은 소파에 앉아 있던 최동철을 보며 물었다.“최 대표님, 제가 쿠팡에서 옷을 구매하면 내일 도착하는데, 혹시 대표님도 필요하신가요?”조건이 우월한 최동철과 같은 귀공자는 사람을 시켜 필요한 물건을 살 수 있었기에 온라인으로 쇼핑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그녀의 말을 들은 최동철은 머리를 끄덕였다.“갈아입을 옷 두 벌만 골라주세요, 부탁드려요.”구체적인 요구는 없었다.“네, 알았어요.”머리를 끄덕인 설윤은 남성 의상을 검색하며 물었다.“사이즈는 얼마 입어요?”“신장은 185, 몸무게는 75킬로로예요.”“네.”설윤은 최동철이 말한 사이즈에 따라 내의 한 벌과 니트 및 팬티 두 벌을 고르고는 그에게 말해주었다.최동철은 설윤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말을 마친 후 방안은 조용하기만 했다.오후쯤 부하의 전화를 받은 최동철은 통화 중 계획 하나를 언급했으나 설윤은 이해하지 못했고 자신과 관련이 없기에 신경 쓰지도 않았다.저녁이 되자 설윤은 샤워 후 침대에 누웠다.바스락거리는 소리에 눈을 뜬 그녀는 최동철이 그의
방안은 어두웠고 쥐죽은 듯 조용했으며 가끔 바깥 거리에서 들려오는 기적 소리만 들렸다.설윤이 네 번째로 몸을 뒤척일 때 옆에서 최동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잠이 안 와요?”낮고 유혹적인 목소리가 깊은 밤의 정적을 뚫고 그녀의 고막을 가볍게 두드렸다.“... 네, 동철 씨도 잠이 안 와요?”“네.”최동철은 낮은 소리로 대답했지만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실내는 다시 조용해졌고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만 들렸다.집안의 난방이 너무 커서인지 설윤은 온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아 다치지 않은 발목으로 이불을 걷어차며 팔을 이불 밖으로 내밀었는데 조심하지 않고 최동철이 밖에 놓은 팔과 부딪혔다.피부가 닿는 순간 설윤은 재빨리 팔을 비켰으나 뜻밖에도 최동철은 그녀의 손목을 잡고 떠나지 못하게 했다.그의 손은 매우 컸다. 뜨거운 온도가 그녀의 몸에 닿는 순간 그 뜨거운 열기가 서서히 얼굴에 퍼지며 설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설윤은 머뭇거리다가 그의 손에서 손목을 빼려고 힘을 썼지만 실패했다.“뭐 하는 거예요?”“보통 운동 후에 몸이 피곤해서 잠이 잘 오는데, 한 번 시도해 보겠어요?”최동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어둠 속에서 그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설윤은 그의 차분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마치 아침에 무엇을 먹을지 묻는 것 같았다.몇 초 동안 머뭇거리다가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네.”그 목소리는 깃털처럼 가벼워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았다.그녀의 대답은 마치 닫힌 문을 여는 열쇠처럼 들렸다. 최동철은 그녀의 팔을 풀어주었는데 그녀가 손을 거둘 때 신속히 이불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남자는 공격적인 기운을 풍기며 달려들어 순식간에 그녀를 덮쳤다.설윤은 저도 모르게 또 겁이 났다.그녀는 숨을 죽이고 손끝을 그의 가슴에 떨어뜨린 채 천천히 위로 거슬러 올라가 어깨에 놓았다.“... 몸에 상처가 있는데 그럼...”“조심할게요.”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두 눈이 마주쳤다.서로의 눈 밑에는 빛을 볼 수
설윤이 차례로 밖에 씌워져 있는 랩과 붕대를 제거하니 몇 바늘 꿰맨 상처가 드러났다.그녀는 알코올로 주변을 부드럽게 닦은 후 다시 연고를 꺼내 면봉으로 고르게 발랐다.최동철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고개를 숙이고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드러난 옆모습은 매끄러운 얼굴 라인을 자랑했다. 아마 스무 살 어린 나이어서인지 볼에는 젖살이 있어 통통했고 피부는 희고 섬세해서 모공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거즈를 몇 바퀴 두른 후 설윤은 나비 모양으로 매듭을 지었다.“다 됐어요.”“고마워요.”“별말씀을요.”설윤은 자신의 발목을 내려다보았다.“난 샤워하러 가고 싶어요. 욕실에 걸상 하나 놔줄 수 있어요?”최동철은 몸을 일으켜 동그란 걸상을 들고 화장실로 갔다. 다시 나오면서 그는 다치지 않은 팔을 내밀려 말했다.“부축해 줄게요.”설윤은 느릿느릿 침대로 옮겨 한 손을 그의 팔에 얹고는 다치지 않은 발을 먼저 땅에 대고는 절뚝거리며 화장실로 갔다.그녀를 안쪽 욕실로 데려다준 후 최동철은 샴푸 등을 욕실 벽에 있는 선반 위에 놓아주고는 밖으로 나가며 문을 닫아 주었다.설윤은 느릿느릿 옷을 벗었다. 속옷은 팬티는 이거 하나밖에 없었다. 빨면 곧 마를 수 있겠지만 마르기 전에는 그저...이틀 전에는 혼자 살아서 괜찮았지만 지금은 곁에 남자가 한 명 많아졌다.그러나 씻지 않으면 위생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다.‘이럴 줄 알았으면 두 장 더 사는 건데...’고민 끝에 설윤은 속옷을 빨았다. 다 빤 후 드라이어로 말리면 10분 정도면 다 마를 수 있었다.이때 설윤은 문득 최동철이 나왔을 때 머리를 말리지 않은 것이 떠올랐는데 보아하니 드라이어로 팬티를 말린 것 같았다.간단히 샤워를 마친 후 설윤은 팬티를 씻고 말린 후 간단히 머리도 말렸다. 그런후 속옷과 팬티를 입고 목욕 수건을 둘렀는데 다행히도 이 수건은 충분히 길어서 가슴부터 무릎까지 감쌀 수 있었다.이때 밖에서 문소리가 들렸다.“다 씻었어요?”“...네.”“그럼 제가 들어갈까요?”
그녀의 최근 행동을 보면 물질, 환경, 품질 등에 큰 요구가 없는 것 같다."물론이죠."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부잣집 도련님은 일반인에게 돈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설윤은 회억에 잠겨 말했다.“제가 아주 어렸을 때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그때 이웃들이 그러는데 엄마 병은 고칠 수 있었지만 돈이 없어서 일찍 퇴원했기 때문에 병세를 끌어서 돌아갔다고 했어요.”엄마가 돌아간 후 집주인은 장례를 치러주고는 그녀를 보육원에 보냈다.그녀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최동철은 슬픔을 느낄 수 있었다.“미안해요.”그는 그녀의 신원을 조사한 적이 있는데 문서에는 간단히 ‘6살 때 생모 병으로 사망’으로만 적혀있었다. 그녀의 입을 통해 들으니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다.“괜찮아요. 다 지나갔어요.”설윤은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고개를 갸웃했다.“혹시 동철 씨는 돈이 싫으세요?”최동철은 그녀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돈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왜 최국환과 임가희와 암투를 벌였을까?“돈은 나에게 있어 숫자일 뿐이죠. 어쩌면 우리가 다투는 것은 돈이 아니라 권력이에요. 더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권력이죠.”최동철이 덤덤하게 말했다.설윤은 아는 둥 마는 둥 고개를 끄덕였다. 호텔에서 최동철을 끌어들인 후 그는 주위를 살펴보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가 처음으로 이렇게 허름한 곳에 왔다는 것을 보아낼 수 있었고 선택의 여지가 없어 참았을 뿐이다.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었을 뿐인데 겨울 날씨여서 그런지 금세 어두워졌다.저녁을 먹은 후 설윤은 또 얼음찜질하고 연고를 한 번 더 발랐다.발목 부기가 많이 가라앉은 것 같았다.화장실에서 물소리가 나는 것을 보아 최동철이 샤워를 하는 모양이다.며칠 동안 피해 살다가 드디어 안전하고 안정된 환경에 이르자 그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어깨에 부상이 났다고 설윤이 일깨워주었지만 최동철은 신경 쓰지 않고 랩으로 상처를 감싼 후 씻으러 갔다.설윤은 저도 모르게 어젯밤에 본 화면이 떠올랐다.넓은 어깨와 가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