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온하랑이 아직 초보자인 탓에 한 번 내리막길에서 넘어진 이후로 다시 균형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다행히 근처에 있단 민지훈이 달려와 넘어져 있던 온하랑을 부축해 다시 일으켜 세웠다.온하랑은 민지훈의 부축 덕에 무사히 스키 스틱을 짚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그녀는 눈가에 묻은 눈가루를 털며 민지훈에게 얘기했다.“고마워요.”민지훈은 쑥스러운 듯 겸연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아니에요. 저기… 누나, 카톡 친추 좀 해도 될까요?”혹시라도 온하랑이 거절할까 봐 민지훈은 그녀의 대답이 돌아오기도 전에 다급하게 말을 덧붙였다.“아, 저 그게, 카카오페이로 세탁비 드리려고 그러는 거예요.”온하랑은 개의치 않다는 듯 답했다.“그럼요, 나중에 시연이한테 제 번호 달라고 하세요.”민지훈은 그제야 신난다는 듯 귀엽게 난 날카로운 두 덧니를 내보이며 배시시 웃었다.“네! 감사합니다, 누나!”지금 이 시기의 노르웨이는 낮이 아주 짧았다. 오후 3~4시밖에 안 된 시간인데도 하늘은 이미 어둑어둑 해가 지고 있었다.해가 지고 어두워지자 스키장에 있던 가로등이 하나둘씩 켜지기 시작했다. 스키장에 있던 눈들도 가로등의 불빛에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종일 스키장에 머물던 그들은 5시가 되어서야 지친 몸을 이끌고 스키장을 벗어났다. 몸은 기진맥진이었지만 마음만은 전혀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후련하다고 할 수 있었다.그들은 스키장을 벗어나 돌아가는 숙소로 돌아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김시연은 온하랑의 지쳤음에도 한껏 밝아진 표정을 바라보며 그녀의 어깨를 툭툭 쳤다.“어때요? 스키 재밌죠?”온하랑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네, 오늘 정말 재밌었어요.”“진작 이랬어야 해요.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재밌게 노는 데만 집중해요. 한 달 뒤면 부승민 그 눈치 고자는 깔끔하게 잊힐 거예요!”온하랑이 김시연의 말에 가볍게 웃어 보였다.둘의 대화를 들은 민지훈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온하랑과 김시연을 바라보았다. 둘의 대화로 대충 김시연이 얘기한
온하랑이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나중에 다시 얘기하죠.”온하랑은 민지훈에게 정말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숙소에 도착한 김지연은 바로 침대 위에 엎어져 미동도 하지 않았다.세 사람은 방에서 반 시간 정도 머물며 피로를 달랬다. 곧이어 식당으로 가 저녁 식사를 마친 그들은 옥상에 있는 온천에 몸을 담갔다.피로에 찌든 몸이 따뜻한 물에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순간적으로 혈액순환이 잘 되는 듯한 느낌과 함께 모공들이 열리며 온몸이 개운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온천욕 한 번에 이때까지 쌓였던 피로가 눈 녹듯 사라졌다.온천은 야외 온천으로 되어있었던 터라 온천 밖으로는 찬 바람이 매섭게 불어오고 있었다. 온하랑은 저도 모르게 목까지 깊이 담가 추위를 달랬다. 온천에 몸을 녹이며 호텔 옥상에서 보이는 바다의 풍경을 여유롭게 감상했다.온천을 나선 그들은 찜질방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만난 외국인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그들만의 낭만을 즐겼다.찜질까지 끝내고 방으로 돌아온 김시연은 침대에 누워 오늘 찍은 사진들을 보정 하고 있었다.그녀는 휴대전화를 만지작대며 온하랑에게 말을 걸었다.“맞다, 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뭔데요?”온하랑은 마스크팩을 하며 최대한 말을 아끼고 있었다.“우리 내일 오로라 보러 가는 거 말이에요. 렌터카 타고 우리끼리 갈까요, 아니면 패키지여행 신청할까요?”“우리끼리 운전해서 가기로 하지 않았어요?”주현은 순간 또 뭔가가 떠오른 듯 말을 이었다.“저희끼리 운전해서 가도 오로라 볼 수 있을까요? 우리 다 여긴 처음인데,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놓치면 어떡해요?”“저도 지금 그것 때문에 고민 중이에요. 원래는 우리끼리 차 렌트해서 가기로 했잖아요. 근데 방금 온천욕 하면서 보니까 요즘 날씨 엄청나게 흐리던데요? 구름도 두껍고. 일기예보 어플 봐도 오로라가 보일 확률이 엄청 낮다고 나와요. 그래서 말인데 패키지여행 신청해보는 건 어떨까요? 가이드가 우리보다 훨씬 더 잘 알지 않을까요?
그녀는 길고도 두꺼운 패딩으로 온몸을 펭귄처럼 꽁꽁 감은 것도 모자라 끈 달린 털장갑까지 낀 채 무의식적으로 팔을 벌려 몸을 팡팡 쳐댔다.눈앞에서 움직이는 온하랑의 실물을 본 부승민은 당장이라도 당당한 발걸음으로 다가가 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하지만 말도 안 되는 일이라는 걸 부승민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온하랑이 마음을 연 것도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 그녀의 앞에 부승민이 다시 나타난다면 온하랑은 여행 내내 또다시 무거운 마음을 짊어져야 할지도 몰랐다.시간에 맞춰 도착한 버스가 부승민의 시야를 가렸다.가이드가 온하랑 일행 세 명의 신분을 모두 확인한 후 곧바로 그들을 버스에 태웠다.버스에는 이미 열댓 명의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아시아인의 생김새로 미루어보아 미리 타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한국인이라고 추측할 수 있었다.앞장서서 버스에 올라탄 김시연은 아무도 앉지 않은 일렬로 이어진 좌석의 제일 안쪽에 자리를 잡았다. 온하랑은 김시연을 따라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고 주현은 그들과 통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앉게 되었다.김시연은 차량 내부 시설을 쭉 둘러보더니 온하랑에게 얘기했다.“이 버스 그래도 나름 좀 고급스러운 것 같지 않아요? 에어컨도 있고요. 전에 제가 우연히 인터넷에서 봤던 패키지 상품들은 다 엄청나게 작고 낡은 차에 간식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더라고요.”“그럼 이 패키지가 다른 것들보다 가격이 좀 더 되나 보죠?”온하랑이 김시연의 말을 듣고 추측하기 시작했다.왜인지 모르게 그녀는 호텔에서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계속 누군가의 시선을 느낀 탓에 여태껏 계속 좌불안석 상태였다. 그 느낌은 버스에 올라타서도 여전히 지속됐다.그녀는 어딘가 이상한 느낌에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별다른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다.앞 좌석의 승객이 둘의 대화를 우연히 엿들은 것인지 김시연과 온하랑에게 말을 걸어왔다.“아니에요, 가격은 다 같아요. 제가 전에도 한 번 와봐서 알거든요.”“그럼 이 패키지는 생긴 지 얼마
많은 승객이 휴대전화를 꺼내 사진을 찍기도 전에 오로라는 사라져버렸다.하지만 그 짧은 순간의 오로라는 승객들에게 큰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순식간에 차 안에 있던 모든 승객이 창문에 달라붙어 차창 밖에서 눈을 떼지 않고 각자 토론을 시작했다.20분 정도의 시간을 더 달리자 저 멀리 끝없이 아득히 펼쳐진 하늘 위로 신비한 초록빛과 보랏빛이 나타났다. 광선은 어두운 밤하늘을 밝게 수 넣은 것도 모자라 하늘 아래 산까지 아리따운 보랏빛으로 물들였다.차 안의 승객들은 모두가 잔뜩 들뜬 채 휴대전화를 꺼내 들어 차창 너머의 풍경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노력했다.그 오로라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사라지지 않고 밤하늘을 수 놓고 있었다.버스가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오로라가 점점 가까워졌다.얼마 지나지 않아 버스는 평평한 곳에 멈춰 섰고 승객들은 오로라를 보기 위해 빠른 속도로 차에서 내렸다.온하랑도 눈앞의 하늘을 보며 빠르게 뛰는 심장을 주체하지 못했다.넓디넓은 곳에서 끝없이 펼쳐진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바닥과 아주 가까워 손 뻗으면 금방이라도 닿을 것만 같았다.파란색, 보라색, 녹색들이 한데 모여 끝없이 펼쳐진 오로라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오로라 빛과 함께 펼쳐진 별들은 은하계처럼 오로라와 함께 운동하며 밤하늘의 자태를 수놓았다.그 모습은 정말 보는 이에게 이토록 넓은 우주에서 인간의 인생이 얼마나 작게만 느껴지는지를 실감하게 했다.오로라를 봤으니 사진을 남겨야 했다.차에서 내린 승객들 대부분이 전문적인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예를 들자면 바로 주현 같은 승객들 말이다.수십 장의 풍경 사진들을 찍은 후에야 김시연은 자신의 휴대전화를 온하랑의 손에 쥐여주며 오로라와 함께 사진을 찍을 준비를 했다.사진 촬영을 끝내고 온하랑에게서 휴대전화를 건네받은 김시연은 깜짝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하랑 씨, 너무 대단한 거 아니에요? 이 각도 진짜 너무 잘 찍었어요!”인물 사진만 잘 찍은 게 아니라 오로라까지 한 앵글 안에 담긴 완벽한 사진이었
김시연이 온하랑을 바라보며 말했다.“하랑 씨, 지금 취미가 없어서 고민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사진 촬영도 진짜 괜찮다고 생각하는데요, 저는. 어차피 하랑 씨 돈 없어서 굶을 걱정도 없잖아요. 카메라 한 대 마련해 놓으면 여기저기 놀러 다니면서 사진도 찍고 인생샷 건지고 싶어 하는 사람들 사진도 찍어주고 그럼 좋죠. 생각만 해도 얼마나 재밌는 일이에요!”온하랑이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네, 좋죠.”그녀의 인생에 부승민만 남기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부승민 때문에 버렸던 그녀의 것들을 이제 하나하나 다시 주워 담아야 할 차례였다.온하랑은 카메라를 들고 김시연과 주현을 위해 여러 장의 사진을 찍어주었다.마지막쯤엔 세 명이 단체로 기념사진을 남기며 사진 촬영을 마무리했다.신나게 즐기고 있는 관광객들과 달리 가이드와 운전기사는 한쪽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간식까지 옮겨오느라 분주해 보였다.온하랑 역시 오랜 시간 계속된 사진 촬영에 조금 지쳐 카메라를 주현에게 넘겼다. 그렇다고 다시 버스 안으로 들어갈 생각은 없었기에 바로 모닥불 옆으로 가 자리를 잡고 따뜻한 불을 쬐고 있었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한 관광객이 멀지 않은 곳을 가리키며 하는 말을 들었다.“저기 있던 차 말이야, 혹시 여기까지 혼자 운전해서 오로라 보러 온 건가?”온하랑은 관광객이 가리킨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온하랑의 눈에는 어딘가 익숙해 보이는 차량이 들어왔다.하지만 번호판에 노르웨이 번호판이 붙은 것을 확인하고는 온하랑은 그저 자신의 착각이라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조금 전의 들뜬 감정이 누그러지고 극 지대의 추운 바람이 느껴졌다. 갑자기 밀려드는 추위에 관광객들은 몸을 녹이기 위해 모닥불 옆으로 몰려들어 준비되어있던 간식들을 하나둘씩 골라 집었다.가이드가 대화 주제를 이끌어가며 자연스럽게 외향인들의 대화 참여를 이끌었다.모닥불 주위는 금세 시끌벅적해졌다.기타를 챙겨온 한 관광객이 공연을 시작하자 모두가 하나둘씩 영상촬영을 시작했다.한
부승민의 잘생김은 위엄 있는 잘생김이었다. 훤칠하게 큰 키에 차가운 인상의 카리스마 넘치는 고고한 느낌을 물씬 풍기는 그런 사람이었다.여자의 친구가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미친? 진짜로? 야, 우리끼리 한 번만 더 갔다 올래? 나도 훈남 좀 보자!”여자는 검은 차량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말을 꺼냈다.“난 못 가겠어. 딱 봐도 엄청 차가워 보였단 말이야!”“알겠어, 그럼.”여자의 친구는 아쉬운 듯 주차된 검은 차를 바라보며 답했다.서로에 대한 아무런 정보가 없는 상태에 가장 먼저 보는 것은 바로 서로의 얼굴이었다.훤칠하게 잘생긴 육광태는 오자마자 자연스럽게 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다.패키지여행에 참여한 많은 관광객이 먼저 육광태에게 다가가 말을 걸기 시작했다. 집은 어디에 있는지, 나이는 어떻게 되는지 같은 호구조사에 가까운 질문들이 대부분이긴 했다.육광태는 그런 질문들에 대답해줄 수 있는 선에서 다 대답해주었다. 조금 곤란한 질문들은 장난 섞인 말로 대충 얼버무리는 센스도 함께 겸비했다.또 누군가가 육광태에서 이곳에는 여행으로 온 것인지 일로 온 것인지를 물었다.육광태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일, 여행이요.”“그래서 일로 온 거예요, 여행으로 온 거예요?”육광태 역시 더는 해명할 생각이 없다는 듯 대충 얼버무리며 말했다.“친구랑 같이 와준 거예요. 최근에 실연을 당해서 좀 많이 힘들어하고 있거든요. 같이 여기저기 돌아다녀 주면 월급 준다길래 왔어요.”말을 마친 그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온하랑을 바라보았다.오래전부터 이미 자신을 잘 알고 있던 사람처럼 행동하는 육광태에 온하랑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방금 집이 강남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온하랑은 아마도 신문 같은 곳에서 자신의 얼굴을 보았으리라 예상했다.한 관광객이 부럽다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무슨 그런 친구가 다 있대요? 저도 소개 좀 해주시면 안 돼요? 저도 그런 친구 좀 사귀고 싶네요.”육광태를 데리고 왔던 여자와 그 여자의 친구는 자
시끄러운 분위기 속에서 불놀이가 끝났다. 관광객들은 함께 단체 사진을 찍고 다시 돌아가는 버스 위로 올라탔다.조금 전의 그 검은 차는 돌아가는 길에도 그들이 탄 버스 뒤를 계속 뒤따라갔다.호텔로 돌아와 보니 시간은 이미 새벽 4시가 다 되어있었다.늦은 시간이었지만 세 사람은 전혀 졸음이 오지 않아 조금 전 본 오로라를 떠올리며 찍었던 사진들을 쭉 확인해보았다. 신나게 웃고 떠든 덕에 호텔 방의 분위기가 달아올랐다.김시연은 이미 보정 해둔 사진 몇 장을 골라 인스타그램에 업로드 했다.일전 온하랑과 부승민의 열애 기사가 떴던 초반부터 온하랑의 편에 서서 글을 올렸던 김시연의 계정에는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악플이 달렸었다.하지만 부승민이 직접 사실을 밝히고 전세가 역전되자 김시연은 순식간에 의리녀로 거듭나면서 그녀의 계정 팔로워 역시 급속도로 늘어났다.물론 비아냥대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았다. 애초에 두 사람은 친구가 아니었다느니, 온하랑의 명성을 용한 것이라는 등의 루머를 퍼뜨리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지만 김시연은 아랑곳하지 않았다.본격적으로 여행을 떠나기 전, 그녀는 이미 자신의 인스타그램 피드에 여행에 관련된 여러 질문을 올렸고 많은 팬이 각자의 여행 후기들을 남겨주었다.오베니아를 떠날 때도 그녀는 이미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오베니아를 여행하면서 있었던 재미있는 에피소드와 함께 열심히 보정 한 사진들을 올렸다.김시연이 이번에 올린 사진은 아홉 장으로 구도를 맞춰 올렸다.오로라 밑에서 찍은 세 사람의 단체 사진 주위로 노르빈의 아름다운 풍경 사진과 오로라 사진들로 꽉 채워 올렸다.올린 지 얼마 되지 않아 댓글 수가 점점 늘어나기 시작했다.누군가는 오로라의 아름다움을 칭찬했고 또 누군가는 자신의 여행 후기를 공유해주기도 했다. 또 어떤 이들은 부러움과 질투 섞인 댓글을 달기도 했다.화목하고 따뜻한 분위기의 댓글 중 김시연은 의도치 않게 거슬리는 댓글을 하나 발견했다.[가운데 저 사진 말이에요. 제일 왼쪽에 서 있는 사람, 온하랑 씨 맞죠
네티즌들은 원래부터 부승민이 먼저 바람을 피웠을 것이라 예상 중이었다. 그러던 와중 온하랑이 올린 페이스북 게시물은 그 추측을 결론으로 만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댓글 창에는 온하랑을 안타까워하는 댓글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힘내라는 말과 함께 부승민을 향한 악플들이 줄지어 달렸다.하지만 온하랑은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기로 했다.페이스북 게시글을 올리는 그 순간, 온하랑은 가벼워진 마음에 후련한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다시는 자신의 행동이 부승민의 빈정을 상하게 하거나 조금이라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까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그녀는 휴대전화를 엎어둔 뒤 다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온하랑은 벽 하나를 사이에 둔 곳에서 부승민이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내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할 것이다.결국 그는 몸을 일으켜 캐리어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안에서 일부러 챙겨온 온하랑의 옷을 꺼내 품에 끌어안고 나서야 비로소 잠에 들 수 있었다.퇴원하고 집으로 돌아왔던 그 날부터 부승민은 다시 안방으로 돌아와 온하랑이 잠을 청하던 침대 위에 누워 아직 은은하게 남아있는 그녀의 체향을 맡았다. 그래야만 겨우 얕은 잠에 빠져들 수 있었으니까.잠에 빠져들려던 그 순간, 그는 시끄럽게 울려대는 전화벨 소리에 눈을 떴다.연민우에게서 지금 당장 인스타 인기검색어부터 확인하라는 연락을 받았다.부승민은 곧바로 인스타에 접속했다. 접속하자마자 익숙한 이름이 인기검색어 1위에 올라있었다.#부승민_온하랑_이혼검색어를 클릭해보니 조금 전 온하랑이 올린 게시물이 눈에 들어왔다.부승민의 가슴은 누군가에게 세게 얻어맞은 듯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답답하고도 고통스러운 감각이 은은하게 퍼져왔다.‘이렇게까지 급하게 나랑 선을 긋고 싶어한다고? 이렇게까지 빨리 나한테서 벗어나고 싶었던 거야?’설마 정말 민지훈에게 관심이라도 생긴 것일까?그는 저도 모르게 침대 시트를 꽉 쥐었다. 당장이라도 온하랑이 있는 옆방으로 찾아가려는 충동을 억누르기 위해 노력
수화기 너머로 임가희는 잠시 멍해 있다가 임연지가 충동적으로 행동했을까 봐 걱정하며 바로 물었다.“오늘 센트럴 백화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아? 모르셨어요?”간하림은 간단하게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따귀를 맞은 일로 설윤은 굉장히 화가 났어요. 그래서 지금 사모님께 복수할 생각만 하고 있다니까요.”그 말을 듣자 임가희는 안심했다.뺨 한 대 맞고 참지 못해 도망가는, 겨우 스무 살짜리 감정적인 계집애 따위는 신경 쓸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무심하게 말했다.“이틀 후에 너희 가게로 갈 거야. 그때까지 설윤을 잘 부추겨서 나한테 덤비게 만들어.”간하림은 곧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챘다.“알겠습니다. 사모님,”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드는 장면은 반드시 녹화되어 최국환에게 전달될 것이다.하지만 어떻게 하면 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들도록 만들 수 있을까?리우 그룹.최국환은 회의를 마치고 몇몇 오랜 친구들과 식사를 하러 갔다.모임이 끝나고 나서야 비서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찾았다.“오전에 사모님과 설윤 씨께서 전화하셨습니다. 설윤 씨는 가방을 사지 않겠다고 하시며 환불해 달라고 하셨습니다.”“갑자기 왜?”“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화에서 설윤 씨 목소리가 이상했어요. 울먹이는 것 같았습니다.”최국환은 한창 젊은 애인에게 푹 빠져 있던 터라 설윤에게 전화를 걸었다.거의 끊어지려는 순간, 전화가 연결되었다. 설윤의 목소리는 살짝 쉰 듯했다.“국환 씨.”“김 비서 말로는 가방 환불해 달라고 했다던데.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더니 왜 갑자기?”설윤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싫어졌어요. 이유는 없어요.”“이유가 없어? 그럼 목소리는 왜 그래? 누가 괴롭혔어? 누군지 말만 해. 감히 내 여자를 괴롭히다니!”“묻지 마세요. 저 때문에 국환 씨와 사모님 사이가 나빠지는 건 싫어요.”“오? 내 마누라와 관련된 일이야?”“말했잖아요, 묻지 마시라고요. 더 물으면 저 진짜 삐질 거예요.”“아이고, 또 어린애
“정말... 어이가 없어...”설윤은 시선을 피하며 돌아서려 했다.“어딜 가요? 방금 구매 기록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이제 와서 못 보여주는 건데요?”임연지는 설윤의 길을 막아서며 그녀 손에 든 선물 상자를 잡고 비꼬듯 말했다.“젊은 아가씨가 왜 이렇게 뻔뻔해요? 유부남인 거 뻔히 알면서 끼어들다니. 내 고모부가 그쪽 아빠보다 나이도 많은데, 역겹지도 않아요? 몸 팔아서 얻은 가방을 들고 다니니까 좋아요?” 마침 가게에 들어오던 손님 몇 명이 임연지의 말을 듣고 문 앞에서 수군거렸다.설윤은 수치심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임연지를 밀치고 가게를 나서 황급히 도망쳤다.간하림은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뒤따라갔다.“저기요. 설윤 씨, 가방은...”점원은 임연지의 손에 들린 선물 상자를 보고 두 번 불렀다.그러나 설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이게 다 무슨 일이래!“그만 불러요. 안 올 거예요.”임연지는 웃으며 손에 든 선물 상자를 내려다봤다.“저 여자가 싫다고 두고 갔으니 이 가방 저 주세요.”“임연지 씨, 죄송하지만 설윤 씨는 그런 말씀이 없으셔서...”“걱정 마세요, 분명히 환불할 거예요. 환불하면 이 가방 저한테 남겨 두세요.”임연지는 선물 상자를 점원에게 건넸다.점원은 임연지의 배경을 생각하며 마지못해 대답했다.“설윤 씨가 환불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네.”가방을 못 사서 한진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했는데 상황이 반전되고 내연녀까지 혼내주고 나니 임연지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윤아, 괜찮아?”마침내 매장 근처를 벗어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사라지자 설윤은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간하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넋이 나간 채 앞으로 걸어갔다.“윤아, 어디 가서 좀 앉을까?”설윤은 마침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근처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간하림이 그녀를 위로했다.“윤아, 너무 속상해하지
한진은 큰 도움을 주고도 단지 가방 하나 사달라는 부탁만 했을 뿐인데 실망을 안겨주게 생겼으니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심지어 가방을 선물해주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했는데 무슨 생각 할지 걱정되었다. 설마 공짜로 주기 싫어서 쪼잔하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임연지가 물었다.“다음번에 언제 입고되나요?”점원은 임연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정확하게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회원 가입하시면 나중에 재고를 확보할 때 연락드리고 있어요.”“그래요. 할게요.”임연지는 마지못해 동의했다.“연락처가 어떻게 돼요?”점원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물었다.임연지는 전화번호를 말하며 머릿속으로 한진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했다.“설윤 씨, 어서 오세요. 가방 찾으러 오셨죠? 잠깐 앉아 계시면 금방 가져다드릴게요.”다른 점원의 반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네, 고마워요.”소리의 출처를 따라 고개를 돌린 임연지는 젊은 여자 두 명을 발견하고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윤아, 여기 점원이랑 아는 사이야? 물건을 엄청 많이 샀나 보네? 부러워.”나지막이 속삭이는 여자 목소리가 임연지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이내 경멸이 담긴 표정으로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세상 물정 모르는 촌년들. 잠깐! 왼쪽에 있는 여자가 낯이 좀 익은데?’그리고 고개를 돌려 찬찬히 뜯어보았다.분명 어딘가 본 듯한 얼굴이다.기억을 되짚어보던 찰나 점원이 정교한 선물 상자를 들고나와 두 여자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뚜껑을 열고 안에 든 가방을 보여주었다.“설윤 씨가 구매한 가방이에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설윤은 가방을 꺼내 꼼꼼히 살펴보았다.“확인했어요. 고마워요. 먼저 가볼게요.”점원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불쾌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대뜸 울려 퍼졌다.“재고가 없다면서요? 분명 제가 먼저 왔는데 왜 저 사람한테 주는 거죠?”싸늘한 표정으로 따지는 임연지를 보자 점원이 서둘러 해명했다.“이 가방은 손님께서
일과를 마친 설윤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돌아갔다가 간하림과 다시 마주쳤다.이내 먼저 입을 열었다.“하림아, 내일 쉬는 날인데 같이 쇼핑하러 가지 않을래?”임가희가 부탁한 일을 떠올리자 간하림은 흔쾌히 동의했다.다음 날, 두 사람은 약속 시간에 맞춰 센트럴 백화점 근처의 카페에 도착했다.일단 만나자마자 설윤은 밀크티 두 잔을 주문했고, 백화점으로 걸어가면서 쪽쪽 빨아 마셨다.간하림이 말했다.“여긴 명품밖에 없을 텐데? 지난번에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발견했다가 가격 보고 기겁했잖아. 그나저나 꽤 익숙한 곳인가 봐? 여기 자주 와?”“내가 무슨 재주로? 국환 씨 따라 몇 번 다녀갔을 뿐, 며칠 전에 가방 하나 주문했는데 오늘 픽업하러 가는 거야.”“헐! 회장님 너무 근사하잖아.”설윤을 바라보는 간하림의 눈빛에 부러움이 가득했다.“그러니까 얼른 행동 개시해야 한다고. 사모님과 이혼시키고 너랑 결혼할 방법을 찾아야 해.”비록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질투심이 활활 타올랐다.목적을 이루기 위해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정이었다.사실 그녀는 속으로 뻔했다. 최국환과 임가희는 결혼 전에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설윤에게 준 돈은 부부의 공동 재산에 속하지 않는지라 다시 빼앗아 갈 자격이 없었다. 물론 최국환이 직접 개입하면 회수가 가능했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나중에 임가희가 설윤에게 본때를 보여주거나 최국환의 마음이 식는다고 해도 그동안 받았던 값비싼 선물은 여전히 가져갈 것이며 현금화하면 그래도 두둑이 챙길 수 있다.결국 임가희가 손을 쓰는 이상 설윤은 곧 최국환에게 찬밥 신세 당하므로 얼추 비슷한 액수의 보수를 받을뿐더러 임가희라는 인맥까지 확보하기에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였다.그제야 간하림은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설윤의 표정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어젯밤에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네 말이 맞아. 국환 씨 아내와 적이 된 이상 내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상대방이 봐주는 건 아니지. 고작 돈 몇 푼
“자, 이제 그만하고 출근하자. 아니면 매니저한테 또 혼날라.”설윤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탈의실을 나가려고 했다.“먼저 가. 나 립스틱만 바르고.”“알았어.”설윤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간하림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사모님이 부탁한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군.’...병원에 도착한 최동철은 올라가는 대신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온하랑은 부승민과 작별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유치원 확인하러 직접 다녀온다고 하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차에 타고 나서 메이슨을 데리러 갈 줄 알았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최동철이 말했다.“별장에 계신 이모님이 연락이 와서 오늘 메이슨이 일어나자마자 발이 아프다고 했다네. 아마도 어제 강행군이었나 봐. 그래서 집에서 쉬겠다고 해서 우리 둘만 가면 돼.”온하랑은 미안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어제 많이 걸어 다니긴 했죠. 메이슨을 말렸어야 했는데...”“네 탓 아니야. 내가 너무 바빠서 녀석이랑 놀아주지 못하는 바람에 무리한 거지.”이에 온하랑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동철 오빠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메이슨도 철이 들었고.”최동철이 피식 웃었다.“우리 사이에 남사스럽게 뭔.”이동하는 동안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면서 편안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했다.동언 국제 유치원에 도착하자 젊은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하며 소개와 함께 내부를 구경시켜주었다.“우리 유치원은 총 3개의 반으로 나뉘는데 최대 학생 수를 각각 20명 이내로 확보하여 교사들이 모든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게끔 노력하죠. 교실에는 멀티미디어 교육 장비가 구비되어 있으며 전용 독서 공간, 놀이 공간, 수공예 공간, 실내외 감시 카메라, 그리고...”꼼꼼하게 알아본 결과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온하랑은 꽤 만족했다.이내 유치원을 나서고 최동철에게 의견을 물었다.최동철이 말했다.“몇 군데가 노후한 것만 빼고 기본적인 인프라는 괜찮네. 시설 개조 명목으로 2억을 기부할 생각이야. 게다가 메이슨도 특별한 케이스라
설윤은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봤어? 다른 사람한테 절대 얘기하면 안 돼.”“당연하지.”간하림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나 몰라? 걱정 붙들어 매.”그리고 다정하게 설윤의 팔짱을 끼고 클럽 탈의실로 향했다.아직 아무도 없었고, 간하림은 옷을 갈아입으며 궁금한 듯 물었다.“윤아, 최 회장님과 어떻게 알게 되었어?”딱히 언급하고 싶지 않은 설윤은 대충 둘러댔다.“우연한 기회에 마주쳤어. 전에 일하던 곳에 놀러 왔다가 마침 내가 접대를 담당했거든.”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간하림은 부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내 손을 뻗어 설윤의 잘록한 허리를 꼬집었고, 뽀얀 피부에 선명한 붉은 자국을 바라보았다.“최 회장님이 네가 진짜 마음에 드나 봐. 직접 출근하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정말 좋겠네.”설윤은 피식 웃으며 옷을 갈아입었다.“너도 든든한 지원군이 있잖아.”“든든하긴 개뿔! 하늘과 땅 차이거든?”간하림이 툴툴거렸다.“가게에 오면 지명할 뿐이지 너처럼 최 회장님 전속 담당이 아니야.”심지어 손님마저 감히 설윤에게 집적거리지 못했고, 누가 봐도 사전에 단단히 경고한 게 분명했다. 반면, 그녀는 치근덕거리는 사람이 있어도 꾹 참아야만 했다.설윤은 웃으면서 아무 말 없이 거울을 보며 헤어스타일을 다듬었다.“윤아, 나중에 사모님이 되면 날 잊지 마.”“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가 뭐 하는 사람인지 정녕 몰라?”이내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바르더니 간하림을 흘겨보았다.“국환 씨가 싫증이 나기 전에 돈이라도 두둑이 챙기면 땡큐고, 사모님은 감히 넘보지도 않아.”간하림은 납득할 수 없는 듯 바짝 다가갔다.“우리가 뭐 어때서? 최 회장님 와이프도 결국에는 사모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했잖아. 그리고 며칠 전 기사 못 봤어?”“무슨 기사?”곧이어 출입구를 힐끗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누군가 최 회장님 와이프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해서 끔찍한 상처를 입었대.”“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임연지는 집에 도착하자 거실 소파에 앉아 굳은 얼굴로 손에 든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는 임가희를 발견했다.테이블에 놓인 등기 전용 서류 봉투 위에 여러 장의 사진이 널브러져 있었다.“고모, 왜 그래요?”말을 마치고 나서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고모부가...”이내 나머지 사진도 확인했는데 전부 어떤 젊은 여자와 다정한 스킨십을 하는 최국환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결코 가벼운 사이는 아닌 듯싶었다.“왜 이렇게 소란스러워?”임가희가 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흘겨보았다.임연지는 목을 움츠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임가희를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고모, 이제 어떡해요?”“어떡하긴?”임가희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모른 척해야지. 지금 네 고모부 덕분에 우리가 먹고 사는 거야. 괜히 추궁했다가 홧김에 쫓아내기라도 한다면 더 손해이지 않겠어?”그렇다고 마냥 당할 수는 없었다.지금껏 비슷한 사례가 여러 번 있었지만 하나같이 머리가 텅 빈 여자들이라 그녀의 도발에 넘어가서 부랴부랴 찾아와 따지기 급급했다. 나중에 울면서 최국환에게 하소연하면 정이 떨어진다며 다시는 만나주지 않았다.또한 최국환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도 신분과 집안, 그리고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다.어쨌거나 그 나이 먹고 결혼을 3번이나 하면서 웃음거리로 전락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본처의 자리를 위협받지 않은 이상 고작 여자 문제로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뭐 있겠는가? 뒤에서 몰래 처리하면 그만이었다.“그냥 넘어가려고요?”비록 고모의 말도 맞지만 그래도 왠지 꺼림칙했다.“넌 신경 쓰지 마. 고모부 앞에서도 티 내지 말고.”임연지는 사진 속 여자를 힐끗 쳐다보며 속으로 ‘여우 년’이라고 욕하고 마지못해 대답했다.“알았어요.”임가희는 사진을 모두 치웠다.무언가를 떠올린 듯 임연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참, 고모, 만약 이 여자가 임신하면 어떡해요?”“네 고모부의 컨
“침착해.”임연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호텔에서 제공한 가운을 느긋하게 껴입었다.“샤워했어? 나랑 같이 씻을래?”“꿈 깨.”이내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면서 문을 열자 알몸으로 나타나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으려는 오재원을 발견했다.“연지야.”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슬쩍 피했다.“호텔에서 푹 쉬어. 먼저 가볼게.”“아직 이른데? 좀 더 있다 가.”“안돼.”임연지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오재원을 스쳐 지나가 침대 옆으로 걸어가서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 들었다.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쌀쌀맞은 얼굴을 보자 오재원은 꼬리를 내렸다.“알았어. 그럼 언제 다시 올 거야? 그리고 원하는 집이 있으면 알려줘. 부동산에 물어볼게.”“방 3개, 풀옵션. 나머지는 알아서 해.”“그래.”임연지는 옷매무새와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방을 나갔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뒤돌아보며 혀를 찼다.‘역겨운 놈.’집으로 돌아가는 차에 몸을 싣고 한진에게 답장을 보냈다.[호텔을 벗어나니 공기마저 상쾌한 기분이야.]한진이 대답했다.[하하하! 참,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우리 오빠가 인맥을 동원해서 각 언론사에 수시로 주시하라고 했잖아. 그중에서 제보받은 회사가 있는데 편집장이 이메일을 보자마자 오빠한테 연락했대.]그러고 나서 이메일의 스크린샷을 보내주었다.본문의 첫 마디가 온하랑이 필라시에서 유학할 때 최동철과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었다.임연지는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대박인데? 고마워, 한진아. 오빠한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해줘. 네가 아니었다면 진짜 아프리카로 쫓겨났을지도 몰라.]그동안 한진의 오빠가 사전에 뉴스를 차단하지 못하고 자칫 폭로라도 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이제 결과를 확인한 이상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하지만 대체 누가 제보했단 말이지?한진이 다시 문자를 보냈다.[물론 메일 주소를 역추적한 결과 여전히 너희 집으로 되어 있어. 아마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가상 주소를 사용한 것 같아.][미친놈.]임연지는 화가 나서 머리카락을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임연지는 그 틈을 타서 오재원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오재원은 그녀를 따라 나가려고 했지만 잠시 뒤 자신이 들고 있던 캐리어를 떠올리고 그것을 끌며 엘리베이터를 나왔다.방에 들어가자 오재원은 서둘러 캐리어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임연지를 끌어안고는 침대 쪽으로 밀어붙였다. “연지야, 빨리 나 주라고. 더는 참을 수 없어.”“오재원! 이거 놔! 먼저 일어나!”“안 돼. 연지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그냥 즐기기만 하면 돼.” 그녀는 그를 힘껏 밀쳤고 마음속에서 강한 반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오재원의 힘이 너무 강해 벗어나기 힘들었다. “오재원, 내 말 들어봐. 우리 얘기 좀 해야 해.” 임연지는 차분하게 말하며 그가 자신의 말을 듣길 바랐다.하지만 오재원은 이미 욕망에 눈이 멀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임연지에게 입을 맞추려 했고 손은 그녀의 몸을 함부로 만지기 시작했다.“얘기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걸 알아. 우리는 지금 중요한 일을 하는 거야.” 그는 말을 마친 후 임연지의 입술을 막았다. “연지야, 잘 생각해. 네가 만약 나를 밀어내면 난 바로 나갈 거야.” 임연지는 속에서 역겨움이 밀려왔지만 그녀의 밀치는 손길은 결국 멈춰 섰다.“그래 이거지.”오재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는 충분히 즐겼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오재원은 임연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너 너무 향기로워. 연지야. 어쩌면 이제 우리 아이가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네.”임연지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더 이상 그를 피하지 않으면 정말로 오재원에게 뺨을 갈길 것만 같았다.화장실에 들어간 임연지는 핸드폰을 꺼내 한진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불만을 토로했다. [한진아, 살려줘. 진짜 그 사람이 너무 싫어!][돌아오자마자 나랑 자려고 하고 역겨워 죽겠어!][내가 기다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