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내가 무슨 바보인 줄 알아?”온하랑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그럼 BX 그룹 새 대표는 누군데? 네 형?”“응, 근데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역시 부민재였다니.“오미연한테서 전화 왔었어.”온하랑의 말에 부승민의 표정이 흔들렸다.“너한테 뭐 심한 말 같은 건 안 했지?”온하랑은 굳이 부승민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오늘 일에 대해 진작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얘기하더라고.”부승민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회사에서 나올 때, 형이랑 오미연이 같이 있는 걸 봤거든.”“... 이미 다 짜여있던 판 같더라. 이 판에서 형이 어떤 역할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사실 이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온하랑 역시 부민재가 오미연 전무와 연락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몰랐다. 단순히 연락만 하고 지낸 게 아니라 부승민까지 대표 자리에서 밀어내고 BX 그룹의 새로운 주인으로 대표의 자리에 오를 줄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한때 세 사람이 한집에서 같이 살던 때, 온하랑이 두 사람에 대한 인상은 사뭇 달랐다. 부승민은 냉정하고도 매정할 정도로 차가운 사람이었고 부민재는 그와 반대로 다정하고 친근한 느낌이었다. 그만큼 온하랑도 잘 챙겨주던 사람이었다. 온하랑 역시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부승민에게는 입을 열 엄두를 못 내고 부민재에게 도움을 요청해왔다. 예를 들면 학창 시절, 자꾸 성가시게 따라붙는 남자를 수십 번 거절해도 계속 달라붙을 때, 그런 온하랑을 도와주던 건 항상 부민재였다. 사실 부민재가 어떤 짓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이후로 온하랑을 성가시게 하는 남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큰아들이 아닌 둘째 부승민이 대표이사 자리에 오른 것도 모두 할아버지의 결정이었다. 온하랑 역시 할아버지의 결정이 틀렸다고는 생각해본 적 없다.온하랑이 부승민을 좋아하던 시절, 콩깍지가 단단히 씌어버려 그때까지만 해도 부승민은 성격만 빼면 부민재보다 모든 면에서 뛰어나다고 생각했었으니까 말이다. 그게 학업이든 일 처리 능력이든.하지만 방관자가 된 지금
“지금 바로 갈게요!”할머니의 다급한 목소리에 심장이 쪼그라드는 듯한 기분을 느낀 부승민이 바로 대답했다.“우선 하랑이한테는 알리지 마.”“알겠어요, 할머니.”집을 나서기 전, 부승민은 안방으로 들러 선의의 거짓말을 남겼다.“하랑아, 인수인계 때문에 회사에 잠깐 볼 일이 있어서, 금방 다녀올게.”“가봐, 집에는 아주머니 계시니까.”온하랑도 별생각 없이 부승민의 말에 대충 대답했다....급하게 병원에 도착한 부승민은 아직 응급실의 응급상황을 알리는 빨간 신호등이 꺼지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할머니와 가정부가 밖에 있는 간이의자에서 할아버지가 무사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할머니!”부승민은 빠른 걸음으로 할머니에게 달려가 다급하고도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어떻게 된 일이에요? 할아버지께서 갑자기 왜...”어두운 낯빛의 할머니는 그저 한숨만 푹푹 내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옆에 함께 있던 가정부가 부승민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오전에 추서윤 씨가 왔다 가셨는데, 대체 할아버님께 무슨 말을 한 건지... 그리고 회사 일까지 전해 들으시더니, 갑자기 저렇게…”부승민은 착잡한 마음에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부승민의 눈빛에는 순간적으로 차가운 기운이 감돌더니 깊이 숨을 들이쉬고는 비상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겨 휴대전화를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오늘 오전에, 추서윤이 할아버님 집을 찾아왔어. 당장 찾아내!”“네.”통화를 끝마친 부승민은 다시 대기실로 돌아와 할머니의 앞으로 가 한쪽 무릎을 꿇고는 할머니의 손을 꼭 잡고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쳤다. 할머니를 바라보는 그의 눈시울은 이미 붉게 물들어있었다.“할머니, 차라리 제 탓을 하세요.”만약 부승민이 추서윤을 데리고 귀국하지만 않았어도 온하랑이 이혼 서류를 내미는 일도 없었을 테고, 그랬다면 지금 할아버지가 저런 곳에 누워 있을 일도 없었다.만약 부승민이 진작에 추서윤을 외국으로 떠나보내기만 했어도 할아버지가 쓰러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이 모든
전화를 끊고 돌아선 부민재는 풀이 죽어 혼자 우두커니 의자에 앉아있는 부승민을 보았다. 마치 하나의 동상처럼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그저 멍하니 앞만 응시하고 있었다.부민재는 다가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승민아.”정신을 차린 부승민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부민재를 향해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괜찮아요, 형.”그저 갑자기 힘이 빠져버렸을 뿐이다.부승민에게 있어 할아버지는 온하랑이 온강호를 생각하는 마음과 같았다.그는 어머니가 누군지도 모르고, 아버지의 모습도 기억하지 못했다. 기억하기 시작할 때부터 쭉 할아버지의 곁에 있었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수 그를 키웠다. 한 대를 건너뛰었다고는 하지만 그에게 있어 그분들은 부모님과 다름없었다.“하랑이한테 알리지 않을 거야?”“일단 비밀로 해요. 지금 가뜩이나 태동도 불안정한데, 견뎌내지 못할까 봐 겁나요.”부승민은 아득한 눈빛으로 말했다.그도 이렇게 큰일을 얼마 감추지 못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그래, 그게 좋겠다.”“형, 기자들이 왔어요.”부현승이 멀지 않은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경비더러 일단 막고 있으라고 해. 내가 경호원 부를게.”부민재가 말했다.BX 그룹 회장이 오늘 급히 입원하며 그룹 내에 불러 올 인사 변동에 대한 소식은 일부 언론 매체에 놓고 말하면 핫이슈 그 자체였다.요즘에는 사람들의 인기를 끌기 위해서라면 물불 안 가리고 덤벼드는 언론 매체가 적지 않았다. 전에 한 여배우가 암 투병으로 사경을 헤맬 때만 해도 한 무리의 기자들이 그녀의 병실 앞에 진을 치고 있으며 사망선고가 내려지기만을 기다리다가 의사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바로 뉴스를 내보냈다.한편 기자들이 너무 많이 몰려온 탓에 경호원들도 섣불리 막을 수 없었고,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이때 한 기자가 응급실 앞으로 뛰쳐나와 주변을 둘러보더니 부승민 앞에 불쑥 카메라를 들이밀었다.“안녕하세요, 부승민 씨. 지금 어떤...”우당탕!발아래 떨어진 망가져 버린 카메라와 자리에서 일어선 부승민
온하랑은 순간 심장이 멎는 듯하더니, 곧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아마 누군가의 악의적인 장난일 거야.하지만 그때 여러 대중 매체에서 연이어 보도하는 아무 뉴스에 들어가 보아도 모두 똑같은 내용이었다.뉴스에 나온 부승민이 입고 있는 옷은 오늘 나갈 때 입었던 바로 그 옷이었다.그래서 그는 정말 병원으로 갔단 말인가.아니, 할아버지가 정말 돌아가셨고?그렇다. 그녀를 아껴주시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불현듯 들이닥친 이 슬픈 소식에 온하랑은 큰 충격에 휩싸이며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코끝이 시큰거리며 금세 눈시울이 빨개지더니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다.며칠 전에 뵀을 때만 해도 할아버지의 신체에 분명 별다른 이상이 없었다.그때 할아버지는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무사히 기다렸다가 증손자를 안아줄 거라고 다짐도 하셨다.그런데 왜 갑자기...‘아니야, 절대 아닐 거야. 아직 아이가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할아버지가 이렇게 가실리가 없어!’코를 훌쩍이던 온하랑은 곧바로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외쳤다.“아주머니, 기사 불러주세요. 저 병원에 갈래요!”그녀는 반드시 할아버지의 마지막을 모시러 가야만 했다.이미 뉴스를 본 아주머니가 방으로 들어와서 온하랑을 만류했다.“대표님이 사모님더러 어디에도 나가지 말고 집에서 쉬시라고 저한테 전화하셨어요. 무엇보다 사모님 몸을 잘 챙기셔야죠...”“아뇨, 전 꼭 가야 해요!”온하랑은 아주머니를 난처하게 만들지 않고 눈물을 흘리며 바로 부승민에게 전화했다.전화가 연결되자마자 부승민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온하랑은 흐느끼며 말했다.“기사한테 날 데리러 오라고 말해! 지금 당장 병원으로 갈 거야!”“하랑아, 너...”“말리지 마! 기사가 안 오면 나 혼자 걸어서라도 갈 거니까!”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로 할아버지 할머니는 그녀를 제일 아껴 주신 분들이자 그녀의 소중한 가족이었다. 그런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손녀로서, 손자며느리로서 어떻게 가지 않을 수 있단
이때 부민재의 지시로 할아버지의 시신은 염습을 위해 장례식장으로 옮겨졌고, 그곳에 빈소를 마련하고 있었다.장례식장에 거의 도착할 때 부승민은 온하랑의 손을 잡으며 당부했다.“도착하면 넌 그냥 할아버지의 곁만 지켜 드리고 있어. 다른 건 하지 말고. 알았지?”“알았어.”소청하는 이미 상복을 입고 장례식장 문 앞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부승민과 온하랑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검정 상복 두 벌을 건넸다.이윽고 두 사람이 상복을 갈아 입자, 소청하가 자발적으로 휠체어를 밀고 와서 말했다.“도련님은 가서 일 보세요. 동서는 제가 돌보면 돼요.”“그럼 부탁드려요, 형수님.”부승민은 허리를 숙이고 온하랑을 바라보며 거듭 당부했다.“몸이 안 좋으면 무리하지 말고 꼭 나한테 알려줘, 알았지? 그럼 난 먼저 가서 일손을 도울게.”“그래.”부승민은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소청하는 온하랑을 밀고 휴게실로 가서 붉어진 그녀의 눈시울을 보며 위로했다.“동서, 너무 슬퍼하지 말아요. 사람은 누구나 다 이 순간을 겪게 돼 있어요. 할아버님께서도 동서의 이런 모습은 바라지 않으실 거예요.”“네, 형님. 저도 알고 있지만... 그렇지만 할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어요...”온하랑은 말하며 또다시 목이 메어와 눈물을 흘렸다.“휴, 도련님이 사실 동서한테 잠시 비밀로 하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그 파렴치한 언론사들 때문에... 도련님이 화나서 카메라도 한 대 부쉈지, 뭐예요.”정말 부승민의 성격다웠다.할아버지의 죽음을 가장 슬퍼하는 사람은 온하랑 뿐만이 아니다. 부승민 또한 온하랑 못지않게 슬퍼할 것이다. 그 언론들이 이때 찾아온 것은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거나 다름없었다.“이렇게 큰일을 어떻게 비밀로 해요. 차라리 사실대로 말해주지...” “도련님도 동서를 생각해서 그랬을 거예요. 지금 할아버님 시신을 수습 중이라 할머님이랑 둘째 작은어머님이 휴게실에 계세요. 저희도 그쪽으로 가서 기다려요.” “네.”김정숙은 넋을 잃고 혼자 덩그러니 휴게실에 앉아
온하랑의 눈시울이 또 붉어졌다.“전 한 번도 할아버지를 탓한 적이 없어요...”부승호도 자신만의 고충이 있을 거라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부승민이 금방 그룹 대표 자리에 올랐을 때 그가 너무 젊은 탓에 이사진의 대부분이 그를 따르지 않아 갖은 마찰을 겪었었다.일부 이사들은 걸핏하면 부승호를 찾아가 고자질하기 일쑤였다.부승호의 첫 개입 이후 부승민은 그룹 내 업무 진행에 큰 어려움을 겪으며 여러 번 타격을 입었다.이사진은 고자질이 효과가 있는 것을 보고는 하루가 멀다 하고 부승호를 찾아갔다.그 뒤로 부승호는 다시는 개입하지 않았다.부승호도 그제야 깨달았다. 부승민은 이미 어린 손자가 아닌 어엿한 그룹 대표였고, 함부로 잔소리를 해서는 안 되는 존재라는 사실을.부승민이 회사에서 우뚝 일어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충분한 위엄을 갖추어야 할 뿐만 아니라 부승호도 부승민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흔들림 없이 지지해 줘야 한다. 이사들의 말만 듣고 그를 반대한다면 이사진, 경영진은 물론 직원들마저도 부승민 대표를 우습게 볼 것이다.이번 일도 마찬가지였다. 부승호가 직접 나서서 온하랑의 신분을 밝힌다면 그저 부승민을 구설수에 오르게 만들어 그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평판만 떨어뜨릴 뿐이었다. 이 때문에 부승호는 스타엔터를 통해 반박 기사를 낼 수밖에 없었다.부승민 스스로 깨닫고 직접 밝히는 게 최선이었다. 다행히 부승민은 부승호를 실망하게 하지 않았다.어쩌면 부승민과 온하랑 사이에서 부승호는 부승민을 조금 더 사랑했을지도 모르지만, 온하랑은 단 한번도 따지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그녀도 알고 있었다. 부승호는 그녀의 친할아버지가 아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도로 해줬다는 것을. 그저 그것으로 충분했다. 염습을 끝내고 부승호의 시신은 빈소로 옮겨졌다.온하랑은 익숙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냥 잠든 것처럼 평소와 다름없었다. 하지만 다시는 깨어나지 못한다.그 생각을 하니 온하랑은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렸다.부승호의 장례식은 품위 있게 치러졌다
두어 번 쳐다보던 온하랑은 마지못해 입을 벌리고 삼겹살을 먹었다. 고소하지만 느끼하지 않은, 요리사의 솜씨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맛이었다. 온하랑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슬픔에 잠겨 입맛이 없었다. 하지만 배 속의 아기를 위해 한입 두입 먹다 보니 아주머니가 준비해 온 도시락을 절반이나 먹었다.분명 조금 전 배불리 먹었는데도 부승민이 짚어주는 음식을 저도 모르게 계속 받아먹고 있었다. 임신 초기 입덧할 때가 지나니 요즘 들어 식욕이 부쩍 늘어났다.부승민은 온하랑이 맛있게 먹는 것을 보고 두 점 더 집어 주었다.세 점을 먹은 온하랑은 부승민이 더 집어주려고 하자 다급히 말했다.“나 진짜 배불러. 오빠가 먹어.”“진짜 안 먹을래?”“응, 안 먹어.”젓가락을 내려놓은 부승민은 휠체어에서 온하랑을 안아 소파에 눕히고 담요를 덮어주었다.“그럼 좀 자.”온하랑은 할 수 없이 몸을 가누며 부승민을 바라보았다.“이틀 동안 눈도 못 붙였잖아. 오빠도 좀 자.”자신을 걱정해 주는 온하랑의 말에, 부승민은 눈을 반짝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도시락을 다 먹은 부승민은 쓰레기를 버리고 온하랑의 옆에 가서 누웠다.온하랑은 살며시 한쪽 눈을 뜨고 부승민을 흘긋 쳐다봤다. 그는 소파 가장자리에 조금만 움직이면 떨어질 것 같은 자세로 간신히 누워 있었다.“잘 곳이 많고도 많은데, 왜 하필 여기서 자는 거야?”그러자 부승민은 손을 뻗어 온하랑의 눈을 가리며 말했다.“그만 말하고 빨리 자.”쪽잠을 자고 일어나 보니 부승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삼일장 제일 마지막 날이 되어 할아버지의 시신을 화장하고 발인식이 치러졌다.검은색 승용차 여러 대가 장례식장을 빠져나와 도심을 가로질러 교외에 있는 부씨 가문의 선산으로 향했다.온하랑은 따라가지 않았다. 묘원은 산 위에 있어 그녀는 산을 오를 수 없었고, 산길이라 휠체어도 밀고 가기 힘들었다.차에 오르기 전, 부승민은 운전기사더러 온하랑을 집에 데려다주라고 말했다.온하랑은 눈시울이 살짝 붉어진 채
“사모님, 이제 돌아가요.”아주머니가 담요와 도시락통을 들고나왔을 때는 오미연이 이미 떠난 뒤였다.온하랑의 비통한 표정을 본 오미연은 기분이 무척 좋아졌다. 자기 목적을 달성한 그녀는 흡족한 마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온하랑은 주먹을 꽉 그러쥐고 아무 말도 없이 제자리에 앉아있었다.온하랑이 아무런 반응이 없자 아주머니는 다시 한번 불렀다.“사모님?”정신을 차린 온하랑은 깊은숨을 내쉬고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네, 돌아가요.”아주머니는 온하랑의 표정을 보며 왠지 조금 전이랑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별장으로 돌아오자, 아주머니는 온하랑을 부축하여 계단을 올라가려고 했지만, 온하랑은 거절하고 소파에 앉아서 말했다.“오빠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게요.”아주머니는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일하러 갔다.오후 3시쯤이 되어서 검은색 승용차가 별장 정원으로 들어왔다. 시동을 끈 부승민은 등받이에 기대어 스틸 시계를 찬 손으로 미간을 문질렀다. 그는 차 키를 뽑고 차에서 내렸다.긴 다리를 뻗으며 안정된 자세로 거실로 걸어 들어온 부승민은,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몸에 담요를 덮고 동공이 풀린 채 한곳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온하랑을 보았다.부승민은 차 키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온하랑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왜 여기 누워 있어? 방에 데려다줄까?”온하랑은 그제야 그의 존재를 눈치챈 듯 시선을 집중하고 천천히 그에게 다가가 이상하리만치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이제 돌아온 거야? 서두를 거 없어. 나 오빠한테 물어볼 것도 있고.”그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뭘?”“할아버지 대체 어쩌다 돌아가신 거야?”온하랑이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나지막이 물어오자 부승민은 흠칫하는가 싶더니 두 눈을 감고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말했다.“말했잖아. 병세가 워낙 위중해 시일이 얼마 안 남으셨다고...”“왜 아직도 거짓말해!”이 한마디에 눈을 치켜뜨고 온하랑의 차가운 눈빛을 마주한 부승민은 갑자기 가슴이 선득해졌다.예전에 다툴 때도
수화기 너머로 임가희는 잠시 멍해 있다가 임연지가 충동적으로 행동했을까 봐 걱정하며 바로 물었다.“오늘 센트럴 백화점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아? 모르셨어요?”간하림은 간단하게 사건의 경과를 설명했다.“따귀를 맞은 일로 설윤은 굉장히 화가 났어요. 그래서 지금 사모님께 복수할 생각만 하고 있다니까요.”그 말을 듣자 임가희는 안심했다.뺨 한 대 맞고 참지 못해 도망가는, 겨우 스무 살짜리 감정적인 계집애 따위는 신경 쓸 가치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무심하게 말했다.“이틀 후에 너희 가게로 갈 거야. 그때까지 설윤을 잘 부추겨서 나한테 덤비게 만들어.”간하림은 곧바로 그녀의 의도를 알아챘다.“알겠습니다. 사모님,”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드는 장면은 반드시 녹화되어 최국환에게 전달될 것이다.하지만 어떻게 하면 설윤이 임가희에게 대들도록 만들 수 있을까?리우 그룹.최국환은 회의를 마치고 몇몇 오랜 친구들과 식사를 하러 갔다.모임이 끝나고 나서야 비서가 그에게 말할 기회를 찾았다.“오전에 사모님과 설윤 씨께서 전화하셨습니다. 설윤 씨는 가방을 사지 않겠다고 하시며 환불해 달라고 하셨습니다.”“갑자기 왜?”“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전화에서 설윤 씨 목소리가 이상했어요. 울먹이는 것 같았습니다.”최국환은 한창 젊은 애인에게 푹 빠져 있던 터라 설윤에게 전화를 걸었다.거의 끊어지려는 순간, 전화가 연결되었다. 설윤의 목소리는 살짝 쉰 듯했다.“국환 씨.”“김 비서 말로는 가방 환불해 달라고 했다던데.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더니 왜 갑자기?”설윤은 잠시 말이 없다가 작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싫어졌어요. 이유는 없어요.”“이유가 없어? 그럼 목소리는 왜 그래? 누가 괴롭혔어? 누군지 말만 해. 감히 내 여자를 괴롭히다니!”“묻지 마세요. 저 때문에 국환 씨와 사모님 사이가 나빠지는 건 싫어요.”“오? 내 마누라와 관련된 일이야?”“말했잖아요, 묻지 마시라고요. 더 물으면 저 진짜 삐질 거예요.”“아이고, 또 어린애
“정말... 어이가 없어...”설윤은 시선을 피하며 돌아서려 했다.“어딜 가요? 방금 구매 기록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이제 와서 못 보여주는 건데요?”임연지는 설윤의 길을 막아서며 그녀 손에 든 선물 상자를 잡고 비꼬듯 말했다.“젊은 아가씨가 왜 이렇게 뻔뻔해요? 유부남인 거 뻔히 알면서 끼어들다니. 내 고모부가 그쪽 아빠보다 나이도 많은데, 역겹지도 않아요? 몸 팔아서 얻은 가방을 들고 다니니까 좋아요?” 마침 가게에 들어오던 손님 몇 명이 임연지의 말을 듣고 문 앞에서 수군거렸다.설윤은 수치심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인 채 임연지를 밀치고 가게를 나서 황급히 도망쳤다.간하림은 그 모습을 보고 재빨리 뒤따라갔다.“저기요. 설윤 씨, 가방은...”점원은 임연지의 손에 들린 선물 상자를 보고 두 번 불렀다.그러나 설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이게 다 무슨 일이래!“그만 불러요. 안 올 거예요.”임연지는 웃으며 손에 든 선물 상자를 내려다봤다.“저 여자가 싫다고 두고 갔으니 이 가방 저 주세요.”“임연지 씨, 죄송하지만 설윤 씨는 그런 말씀이 없으셔서...”“걱정 마세요, 분명히 환불할 거예요. 환불하면 이 가방 저한테 남겨 두세요.”임연지는 선물 상자를 점원에게 건넸다.점원은 임연지의 배경을 생각하며 마지못해 대답했다.“설윤 씨가 환불하면 연락드리겠습니다.”“네.”가방을 못 사서 한진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했는데 상황이 반전되고 내연녀까지 혼내주고 나니 임연지는 기분이 날아갈 듯 좋았다....“윤아, 괜찮아?”마침내 매장 근처를 벗어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 사라지자 설윤은 걸음을 멈추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간하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넋이 나간 채 앞으로 걸어갔다.“윤아, 어디 가서 좀 앉을까?”설윤은 마침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은 근처 카페의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간하림이 그녀를 위로했다.“윤아, 너무 속상해하지
한진은 큰 도움을 주고도 단지 가방 하나 사달라는 부탁만 했을 뿐인데 실망을 안겨주게 생겼으니 대체 뭐라고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심지어 가방을 선물해주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했는데 무슨 생각 할지 걱정되었다. 설마 공짜로 주기 싫어서 쪼잔하다고 오해하면 어떡하지?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었다.임연지가 물었다.“다음번에 언제 입고되나요?”점원은 임연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정확하게 말씀드리기 어려워요. 회원 가입하시면 나중에 재고를 확보할 때 연락드리고 있어요.”“그래요. 할게요.”임연지는 마지못해 동의했다.“연락처가 어떻게 돼요?”점원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물었다.임연지는 전화번호를 말하며 머릿속으로 한진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했다.“설윤 씨, 어서 오세요. 가방 찾으러 오셨죠? 잠깐 앉아 계시면 금방 가져다드릴게요.”다른 점원의 반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네, 고마워요.”소리의 출처를 따라 고개를 돌린 임연지는 젊은 여자 두 명을 발견하고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윤아, 여기 점원이랑 아는 사이야? 물건을 엄청 많이 샀나 보네? 부러워.”나지막이 속삭이는 여자 목소리가 임연지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이내 경멸이 담긴 표정으로 두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세상 물정 모르는 촌년들. 잠깐! 왼쪽에 있는 여자가 낯이 좀 익은데?’그리고 고개를 돌려 찬찬히 뜯어보았다.분명 어딘가 본 듯한 얼굴이다.기억을 되짚어보던 찰나 점원이 정교한 선물 상자를 들고나와 두 여자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나서 뚜껑을 열고 안에 든 가방을 보여주었다.“설윤 씨가 구매한 가방이에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설윤은 가방을 꺼내 꼼꼼히 살펴보았다.“확인했어요. 고마워요. 먼저 가볼게요.”점원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려던 순간 불쾌함이 가득 담긴 목소리가 대뜸 울려 퍼졌다.“재고가 없다면서요? 분명 제가 먼저 왔는데 왜 저 사람한테 주는 거죠?”싸늘한 표정으로 따지는 임연지를 보자 점원이 서둘러 해명했다.“이 가방은 손님께서
일과를 마친 설윤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돌아갔다가 간하림과 다시 마주쳤다.이내 먼저 입을 열었다.“하림아, 내일 쉬는 날인데 같이 쇼핑하러 가지 않을래?”임가희가 부탁한 일을 떠올리자 간하림은 흔쾌히 동의했다.다음 날, 두 사람은 약속 시간에 맞춰 센트럴 백화점 근처의 카페에 도착했다.일단 만나자마자 설윤은 밀크티 두 잔을 주문했고, 백화점으로 걸어가면서 쪽쪽 빨아 마셨다.간하림이 말했다.“여긴 명품밖에 없을 텐데? 지난번에 마음에 드는 드레스를 발견했다가 가격 보고 기겁했잖아. 그나저나 꽤 익숙한 곳인가 봐? 여기 자주 와?”“내가 무슨 재주로? 국환 씨 따라 몇 번 다녀갔을 뿐, 며칠 전에 가방 하나 주문했는데 오늘 픽업하러 가는 거야.”“헐! 회장님 너무 근사하잖아.”설윤을 바라보는 간하림의 눈빛에 부러움이 가득했다.“그러니까 얼른 행동 개시해야 한다고. 사모님과 이혼시키고 너랑 결혼할 방법을 찾아야 해.”비록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질투심이 활활 타올랐다.목적을 이루기 위해 연기하는 게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는 감정이었다.사실 그녀는 속으로 뻔했다. 최국환과 임가희는 결혼 전에 계약서를 작성했는데 설윤에게 준 돈은 부부의 공동 재산에 속하지 않는지라 다시 빼앗아 갈 자격이 없었다. 물론 최국환이 직접 개입하면 회수가 가능했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나중에 임가희가 설윤에게 본때를 보여주거나 최국환의 마음이 식는다고 해도 그동안 받았던 값비싼 선물은 여전히 가져갈 것이며 현금화하면 그래도 두둑이 챙길 수 있다.결국 임가희가 손을 쓰는 이상 설윤은 곧 최국환에게 찬밥 신세 당하므로 얼추 비슷한 액수의 보수를 받을뿐더러 임가희라는 인맥까지 확보하기에 괜찮다고 스스로 다독였다.그제야 간하림은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설윤의 표정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했다.“어젯밤에 돌아가서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네 말이 맞아. 국환 씨 아내와 적이 된 이상 내가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상대방이 봐주는 건 아니지. 고작 돈 몇 푼
“자, 이제 그만하고 출근하자. 아니면 매니저한테 또 혼날라.”설윤은 옷매무새를 다듬고 탈의실을 나가려고 했다.“먼저 가. 나 립스틱만 바르고.”“알았어.”설윤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간하림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사모님이 부탁한 일이 어려운 것도 아니군.’...병원에 도착한 최동철은 올라가는 대신 온하랑에게 전화를 걸었다.온하랑은 부승민과 작별 인사를 하고 병실을 나섰다.유치원 확인하러 직접 다녀온다고 하는데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차에 타고 나서 메이슨을 데리러 갈 줄 알았던 그녀의 예상과 달리 최동철이 말했다.“별장에 계신 이모님이 연락이 와서 오늘 메이슨이 일어나자마자 발이 아프다고 했다네. 아마도 어제 강행군이었나 봐. 그래서 집에서 쉬겠다고 해서 우리 둘만 가면 돼.”온하랑은 미안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어제 많이 걸어 다니긴 했죠. 메이슨을 말렸어야 했는데...”“네 탓 아니야. 내가 너무 바빠서 녀석이랑 놀아주지 못하는 바람에 무리한 거지.”이에 온하랑은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동철 오빠는 충분히 잘하고 있어요. 메이슨도 철이 들었고.”최동철이 피식 웃었다.“우리 사이에 남사스럽게 뭔.”이동하는 동안 두 사람은 담소를 나누면서 편안하고 유쾌한 분위기를 유지했다.동언 국제 유치원에 도착하자 젊은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하며 소개와 함께 내부를 구경시켜주었다.“우리 유치원은 총 3개의 반으로 나뉘는데 최대 학생 수를 각각 20명 이내로 확보하여 교사들이 모든 아이의 요구를 들어주게끔 노력하죠. 교실에는 멀티미디어 교육 장비가 구비되어 있으며 전용 독서 공간, 놀이 공간, 수공예 공간, 실내외 감시 카메라, 그리고...”꼼꼼하게 알아본 결과 컨디션이 나쁘지 않은 편이라 온하랑은 꽤 만족했다.이내 유치원을 나서고 최동철에게 의견을 물었다.최동철이 말했다.“몇 군데가 노후한 것만 빼고 기본적인 인프라는 괜찮네. 시설 개조 명목으로 2억을 기부할 생각이야. 게다가 메이슨도 특별한 케이스라
설윤은 그녀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봤어? 다른 사람한테 절대 얘기하면 안 돼.”“당연하지.”간하림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나 몰라? 걱정 붙들어 매.”그리고 다정하게 설윤의 팔짱을 끼고 클럽 탈의실로 향했다.아직 아무도 없었고, 간하림은 옷을 갈아입으며 궁금한 듯 물었다.“윤아, 최 회장님과 어떻게 알게 되었어?”딱히 언급하고 싶지 않은 설윤은 대충 둘러댔다.“우연한 기회에 마주쳤어. 전에 일하던 곳에 놀러 왔다가 마침 내가 접대를 담당했거든.”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간하림은 부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이내 손을 뻗어 설윤의 잘록한 허리를 꼬집었고, 뽀얀 피부에 선명한 붉은 자국을 바라보았다.“최 회장님이 네가 진짜 마음에 드나 봐. 직접 출근하는 곳까지 데려다주고, 정말 좋겠네.”설윤은 피식 웃으며 옷을 갈아입었다.“너도 든든한 지원군이 있잖아.”“든든하긴 개뿔! 하늘과 땅 차이거든?”간하림이 툴툴거렸다.“가게에 오면 지명할 뿐이지 너처럼 최 회장님 전속 담당이 아니야.”심지어 손님마저 감히 설윤에게 집적거리지 못했고, 누가 봐도 사전에 단단히 경고한 게 분명했다. 반면, 그녀는 치근덕거리는 사람이 있어도 꾹 참아야만 했다.설윤은 웃으면서 아무 말 없이 거울을 보며 헤어스타일을 다듬었다.“윤아, 나중에 사모님이 되면 날 잊지 마.”“무슨 소리 하는 거야? 우리가 뭐 하는 사람인지 정녕 몰라?”이내 거울을 보며 립스틱을 바르더니 간하림을 흘겨보았다.“국환 씨가 싫증이 나기 전에 돈이라도 두둑이 챙기면 땡큐고, 사모님은 감히 넘보지도 않아.”간하림은 납득할 수 없는 듯 바짝 다가갔다.“우리가 뭐 어때서? 최 회장님 와이프도 결국에는 사모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했잖아. 그리고 며칠 전 기사 못 봤어?”“무슨 기사?”곧이어 출입구를 힐끗 쳐다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누군가 최 회장님 와이프의 얼굴을 칼로 난도질해서 끔찍한 상처를 입었대.”“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임연지는 집에 도착하자 거실 소파에 앉아 굳은 얼굴로 손에 든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는 임가희를 발견했다.테이블에 놓인 등기 전용 서류 봉투 위에 여러 장의 사진이 널브러져 있었다.“고모, 왜 그래요?”말을 마치고 나서 사진 한 장을 들여다보는 순간 두 눈이 휘둥그레지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고모부가...”이내 나머지 사진도 확인했는데 전부 어떤 젊은 여자와 다정한 스킨십을 하는 최국환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결코 가벼운 사이는 아닌 듯싶었다.“왜 이렇게 소란스러워?”임가희가 싸늘한 얼굴로 그녀를 흘겨보았다.임연지는 목을 움츠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그리고 쪼그리고 앉아 임가희를 올려다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고모, 이제 어떡해요?”“어떡하긴?”임가희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당연히 모른 척해야지. 지금 네 고모부 덕분에 우리가 먹고 사는 거야. 괜히 추궁했다가 홧김에 쫓아내기라도 한다면 더 손해이지 않겠어?”그렇다고 마냥 당할 수는 없었다.지금껏 비슷한 사례가 여러 번 있었지만 하나같이 머리가 텅 빈 여자들이라 그녀의 도발에 넘어가서 부랴부랴 찾아와 따지기 급급했다. 나중에 울면서 최국환에게 하소연하면 정이 떨어진다며 다시는 만나주지 않았다.또한 최국환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이유도 신분과 집안, 그리고 사회적 지위 때문이었다.어쨌거나 그 나이 먹고 결혼을 3번이나 하면서 웃음거리로 전락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본처의 자리를 위협받지 않은 이상 고작 여자 문제로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뭐 있겠는가? 뒤에서 몰래 처리하면 그만이었다.“그냥 넘어가려고요?”비록 고모의 말도 맞지만 그래도 왠지 꺼림칙했다.“넌 신경 쓰지 마. 고모부 앞에서도 티 내지 말고.”임연지는 사진 속 여자를 힐끗 쳐다보며 속으로 ‘여우 년’이라고 욕하고 마지못해 대답했다.“알았어요.”임가희는 사진을 모두 치웠다.무언가를 떠올린 듯 임연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참, 고모, 만약 이 여자가 임신하면 어떡해요?”“네 고모부의 컨
“침착해.”임연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호텔에서 제공한 가운을 느긋하게 껴입었다.“샤워했어? 나랑 같이 씻을래?”“꿈 깨.”이내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으면서 문을 열자 알몸으로 나타나 팔을 뻗어 그녀를 끌어안으려는 오재원을 발견했다.“연지야.”그녀는 남자의 손길을 슬쩍 피했다.“호텔에서 푹 쉬어. 먼저 가볼게.”“아직 이른데? 좀 더 있다 가.”“안돼.”임연지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오재원을 스쳐 지나가 침대 옆으로 걸어가서 바닥에 떨어진 옷을 집어 들었다.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쌀쌀맞은 얼굴을 보자 오재원은 꼬리를 내렸다.“알았어. 그럼 언제 다시 올 거야? 그리고 원하는 집이 있으면 알려줘. 부동산에 물어볼게.”“방 3개, 풀옵션. 나머지는 알아서 해.”“그래.”임연지는 옷매무새와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방을 나갔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순간 뒤돌아보며 혀를 찼다.‘역겨운 놈.’집으로 돌아가는 차에 몸을 싣고 한진에게 답장을 보냈다.[호텔을 벗어나니 공기마저 상쾌한 기분이야.]한진이 대답했다.[하하하! 참, 너한테 할 말이 있어. 우리 오빠가 인맥을 동원해서 각 언론사에 수시로 주시하라고 했잖아. 그중에서 제보받은 회사가 있는데 편집장이 이메일을 보자마자 오빠한테 연락했대.]그러고 나서 이메일의 스크린샷을 보내주었다.본문의 첫 마디가 온하랑이 필라시에서 유학할 때 최동철과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었다.임연지는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대박인데? 고마워, 한진아. 오빠한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해줘. 네가 아니었다면 진짜 아프리카로 쫓겨났을지도 몰라.]그동안 한진의 오빠가 사전에 뉴스를 차단하지 못하고 자칫 폭로라도 될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이제 결과를 확인한 이상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하지만 대체 누가 제보했단 말이지?한진이 다시 문자를 보냈다.[물론 메일 주소를 역추적한 결과 여전히 너희 집으로 되어 있어. 아마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가상 주소를 사용한 것 같아.][미친놈.]임연지는 화가 나서 머리카락을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임연지는 그 틈을 타서 오재원의 손을 뿌리치고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오재원은 그녀를 따라 나가려고 했지만 잠시 뒤 자신이 들고 있던 캐리어를 떠올리고 그것을 끌며 엘리베이터를 나왔다.방에 들어가자 오재원은 서둘러 캐리어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임연지를 끌어안고는 침대 쪽으로 밀어붙였다. “연지야, 빨리 나 주라고. 더는 참을 수 없어.”“오재원! 이거 놔! 먼저 일어나!”“안 돼. 연지야,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그냥 즐기기만 하면 돼.” 그녀는 그를 힘껏 밀쳤고 마음속에서 강한 반감을 느꼈다. 그녀는 그의 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오재원의 힘이 너무 강해 벗어나기 힘들었다. “오재원, 내 말 들어봐. 우리 얘기 좀 해야 해.” 임연지는 차분하게 말하며 그가 자신의 말을 듣길 바랐다.하지만 오재원은 이미 욕망에 눈이 멀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임연지에게 입을 맞추려 했고 손은 그녀의 몸을 함부로 만지기 시작했다.“얘기할 필요 없어. 네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걸 알아. 우리는 지금 중요한 일을 하는 거야.” 그는 말을 마친 후 임연지의 입술을 막았다. “연지야, 잘 생각해. 네가 만약 나를 밀어내면 난 바로 나갈 거야.” 임연지는 속에서 역겨움이 밀려왔지만 그녀의 밀치는 손길은 결국 멈춰 섰다.“그래 이거지.”오재원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그는 충분히 즐겼다. 모든 일이 끝난 후 오재원은 임연지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너 너무 향기로워. 연지야. 어쩌면 이제 우리 아이가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네.”임연지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더 이상 그를 피하지 않으면 정말로 오재원에게 뺨을 갈길 것만 같았다.화장실에 들어간 임연지는 핸드폰을 꺼내 한진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불만을 토로했다. [한진아, 살려줘. 진짜 그 사람이 너무 싫어!][돌아오자마자 나랑 자려고 하고 역겨워 죽겠어!][내가 기다리